유호민 – 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통일교회의 경제적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유호민 – 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 유호민

문선명의 초대 비서적 이었던 박정화씨의 뒤를 이어 2대의 비서역 사촌간인 유효원, 유
효영 형제와 함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간판을 걸고 발족에서부터 기반 만들기에 크게 공헌.
이화여자대학사건으로 문선명과 옥고 동참
자이며, 36가정의 멤버, 1972년 탈회, 현재
서울거주, 회사사장, 현 72세

나는 통일교회가 정식으로 창립되기 전의 1954년 1월 4일에 부산에서 사촌인 유효원, 유효영과 함께 문선명의 추종자가 되었다.
박정화씨는 그 무렵 식구(신자)의 중심적 존재로서 문선명의 한 팔로서 활동하고 있었고, 나 또한 대단히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는 문교주가 박정화씨를 밖으로 멀리 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원인은 박정화씨는 너무나 문교주의 비밀을 지나치게 알고 있는 처지다. 만약 그가 수사당국에 모든 것을 폭로하게 되면 문선명 선생은 중죄로 될 것은 물론 그가 반대하면 문교주의 모든 행각이 다 탄로 나므로 이 사회에서 파렴치범으로 이 땅에 있을 곳이 없게 된다.
그러니까 박정화는 요주의 인물로서 교인 식구들이 접근치 못하도록, 박정화의 비리에 대한 뉴앙스를 풍겼다. (전매청에 새끼 남품한 돈을 잘라 먹었다는등)
이 책 속에서 박씨를 「대구의 할머니들이 박정화는 대사단이다」라고 꿈의 계시를 받았다고, 귀속말로 퍼뜨렀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박정화씨를 멀리 하기 위한 구실이며, 뒤에서 문선명이 시킨 음모였다고 생각한다.
박씨는 문선명의 여자관계나 돈 출처 문제를 너무나도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소외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상투적 수단이고 나의 경우도 그러 했다.
내가 처음 성경원리를 들을 무렵, 문선명을 위시해서 모인 식구들은, 그날 먹을 것도 어려운 형편이어서 북한에 있을 때에 사진관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나는 푸로마이드를 제작 판매 하는 일을 제안했다.
이것이 적중해서 하루에 일만 장이나 매상이 있었다.
한장에 7원 전후로 도매한 것을 학교에 못가는 전쟁고아들이 담배나 라이타돌 등을 판자에 넣어 행상하는 때가 유행이 되었다. 10원씩에 팔고 매일 7만원정도씩이나 현금수입이 되었으므로 부엌사정은 단번에 해결하였다.
박정화씨가 말한 바와 같이 남자 식구들은 작업을 분담해서 일을 하고, 여자 식구들은 가위로 잘라서 정리하는 일에 몰두 하였다.
이 일은 2년정도 계속되 었다고 생각한다.
공기총은 1961년부터 시작하여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서 일본에 수출하였으나 공장도 가격으로 1정에 1만원 (지금이라면 30만원) 에 15만정 이상이 팔렸다.
도합 15억원 이었으니까 통일교회에서는 꽤 큰 재원이 되었다.
산탄 공기총을 발명한 내가「통일산업」의 사장이 되지 못했던 것은 소위 7.4 사건 (이화여대 14인 퇴학사건) 문교주와 옥고를 같이 치렀음으로 전과 기록으로 총포제조 허가조건에 하자가 있었다.
그래서 김인철씨가 사장 문선명의 6촌 문승룡이 공장장, 그 아우가 생산부장이 되고 발명자인 나는 「 조립부장」이라고 하는 세상에 유래없는 기묘한 직 책을 받았다.
총의 제 2차특허권은 문교주 지시로 문선명의 명의로 양도 공증까지하였다.
주요간부는 문선명 친척들 뿐, 그들은 한사람이 한대의 차를 가지고 화려하게 타고 돌아다녔으나, 나는 도보를 걸어다닐 수 밖에 없었다.
신앙보다 친척중심의 돈벌이 주의 라고 밖에 생각 할수 없는 입장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것은 더욱 노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나에게 「당신은 사진에 솜씨가 있으니까 사진관이나 안해보려나」농담 말이, 사진관이나 하고 있을 그런 기분이라면 나 혼자서도 된다. 
나는 이렇게 강한 반발을 느줬다.
요컨대 이것은 공기총사업도 궤도에 올라셨고 또 문교주의 여자관계도 지나치게 알게 되여 산탄공기총을 발명한 나도 더이상 필요 없으니 그만두라고 하는 암시 아닌가!
1971년 어느날 나는 미국에서 막 귀국한 문선명을 만나서 여러가지 의논을 해 보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측근중에 어머니라고 호칭하는 최원복에게 연락을 하였더니 효민씨라면 시간을 정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와서 만나면 될 것입니다 라고 전화로 통화되어 가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여럿이 문교주 중심으로 모여 있는데 예전과 같이 끼여 들었다. 통금시간 12시가 다가 옴으로 한사람 두사람 다 집으로 돌아가고 단둘이 남았다.
그때 뒷문으로 훌적 나가 길래 화장실 가나보다 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다시 들어 오지 않았다.
아무리 온순한 나라 하더 라도 이 것만은 머리가 화끈거렸다.
전신이 막 뜨거워지며 열이 나고 떨려오는 것을 자신으로서도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나는 문선명이나 통일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온갖 노력과 봉사를 다해 옥고 동참상, 모범상, 14년공로상, 전도상등 교회에 상주하며, 그림자처럼 어디든지 모셨지만 단 한가지라도 가르침에 상반된다든가, 폐를 끼 친 일은 없다.
다만 경제문제나 여자문제를 너무나도 지나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문선명 쪽에서 나를 께름직하게 여기고 배신한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확실하게 인연을 끊고 탈회 하였다.
박정화씨의 체험과 너무나 꼴이 같아서 나는 그의 억울함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본질을 이야기 할 사건에 관해서 나는 한가지 더 구체적 인 것을 증언 해두고 싶다.
그것은 1955년의「7.4사건」문선명과 우리들 간부가 체포되 었던 사건인 것이다.
7월 4일의 문선명에 이어서 6일에 나도 체포되었다.
체포이유는 「병역기피용의」우리들 북한에서 남으로 나온 피난민에게는 호적이 없었으므로 신분증명서를 만들어 받을 때에 「제 2국민병」으로서의 병역을 면하기 위해서 실제연령보다 5-6세 정도 올려 (연상으로) 신고 하였었다.
그것이 위반이라고 하는 것인데 문선명 자신도 박정화씨에게 지시해서 위조시키고 있었다.
우리들은 말을 맞추어서 위조에 협력하였다고 공술 하였으나 한편에서 문선명은 자기는 모르는 사이에 제자들이 맘대로 한것 이라고 책임회피하고 있었다.
하나님과 같이 모시는 입장에서 우리들 제자가 그의 연령을 함부로 변경 한다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다. 실제로는 모든 것을 문선명의 지시 에 따랐을 뿐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병력기피」용의는 문선명 이하의 간부를 체포해서 취조하기 위한구실이고 실은「간음과 혼음」을 조사할 목적이었다. 수사관의 질문은 날이 갈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당신들은 부부사이는 어떠한가?
당신부인들과 동침은 언제했나?
한주일에 몇번씩 이나 하는가?
한달에는 몇번이나 했나?
여자 신자들과는 몇번이나 했는가 병 역기 피 와는 관계가 없는가…
남의 사생활 문제를 집요하게 심문하는 형사에게 큰소리로 대들고 수사관과 입씨름을 한일도 있었다.
그러나 수사관의 조사는 끈질겨서 책상 위에는 문선명과 여자식구들이 관계를 도표로 그린 그림을 놓아두고 섹스관계의 확인을 하는 것이아닌가?
나는 시종일관 모른다. 없다고 버티었으나 내심으로는 그 정확함에 탄복하였다 유치장안에 있는 우리들은 밖의 상황을 잘몰랐으나 박정화씨들의 은폐공작의 결과인지 조사를 받은 여성들은 나는 문선명선생과 그런 짓을 한 일이 없고, 나는 꿈에서 섹스는 하였다 등등으로 적당이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경찰은 거의 정확하게 문선명을 둘러싼 여성들의 성관도를 쥐고는있었으나 본인의 친고나 남편으로부터의 고소가 없었고 이사건으로 문교주는 3개월만에 무죄선고로 풀려 났다.
그래서「7.4사건」은 단순한 병역기피문제가 아니라 통일교회의 안방 깊숙이 숨겨져 있는 섹스문제의 수사가 경찰의 노리는 바였는데 통일교회가 말하는 「아무 것도 아닌 사실무근의 혐의」가 아니라 간신이 문교주와 혼음 사실이 천하에 공포되는 것을 면한 것이다.
참고로 이때 체포되었던 간부의 유치번호는 문선명 390번, 유효원380번, 유효영 1709번, 나는 1175번 이었다.
김원필도 체포되어 그만이 1년 실형의 판결을 받고 수감 되었다. 하여간 통일교회와 결별하여 두고 두고 냉정하게 문선명이나 협회의 실정을 보니까, 여러가지 모순과 이념이 눈에 띈다.
인류역사의 대세는 분명히 민주주의의 흐름인데도 불구하고 통일교회의 체질은 신앙과 관계없이 문선명에게 아부하는 무리들만 주위에 둘러 있는 독재체제 이다.
이것은 역사의 흐름을 어거지로 되돌려서 문명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더구나 식구들이 몸을 깍아서 모은 거액의 돈은 문선명 한사람이 관리하고 있어서 어디에 얼마만큼 숨겨 두고 있는지, 현재의 최고 간부들도 모르고 있다.
비민주적인 횡포로서 독재일방의 역사를 거슬러간다. 또 통일교회의 인쇄물에는 어느 것이나 문선명선생이 1948년에 북한에서 체포된것은 공산당의 종교말살정책에 의해서 내무성에 구속 되었던 것이라고 판에 박은 듯이 거짓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북쪽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사진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공산주의가 싫어서 1947년 8월 사진관도 각종기계도 그대로 두고 28세때 혼자서 월남했다.
그때까지 나는 선천북교회의 집사였다
.
그런데 그때 기독교 탄압 같은 것은 없었다.
이것은 통일교회의 거짓의 역사이며 박정화씨가 자세히 쓴 바와 같다.
또 이책 가운데에 소개 되어 있는 것처럼 나자신도 말하자면 36가정의 한사람이지만, 그저 원리만 앞세웠을 뿐, 으시 대고 폼만재지 아무런 섭리도 없는 일당 독재 체제이다.
그래도 그당시는 부부의 짝짓기를 신중히 생각해서 종로의 유명한 백운학 (관상가) 또 이명학 (사주가) 에게 찿아가 짝짓기 궁합을 맞춰 달라고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최근의 합동결혼식은 마치 마작판의 마작말패 섞드시 남의 인권을 아무렇게나 적당히 처리해 버리는 것이다.
이래서야 참부모가 정해주는 이상상대 축복이 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성스러운 축복 행복한 꿈이 채 가시기전에 여기 저기서 이흔소동이 발생하고 있으니 과연 땅에서 재림주에게 축복 받은것이 하늘에서도 영원한 부부가 될 수 있을까? 그 책임은 또 누가 져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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