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무엘 비디오의 대본

박사무엘 비디오의 대본

이 페이지는 2021년 1월 6일에 업데이트되었습니다.

ICSA 2014년 7월, 워싱턴 D.C.

비디오 링크:  https://youtu.be/xPwJYC9h93M

“읽으신 분들이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Mariah Blake 라는 기자가 저에 관하여 쓴 기사들이 있습니다. ‘The New Republic’ 과 ‘Mother Jones’ 잡지에 게재되었지요. [아래 링크 참조] 그러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새로운 건 아닐 수 있지만, 그 기사들에 실리지 않은 새로운 정보들이 아직 더 존재합니다. 새로운 정보들 또한 흥미롭게 봐주신다면 좋겠네요.

이런 것이 처음인지라 – 전 정말 초보자랍니다 – 다룰 부분이 많다보니 미리 써놓은 것을 읽는 것이 좋을 거라 생각했구요, 그렇게 하지 않아서 여러분의 시간을 모두 낭비한다면 [Donna Orme-Collins 를 가리키며] 이 분이 좋아할 리 없습니다.”

Donna: “맞아요, 그건 싫어요.”

사무엘: “아닙니다, 그렇게 되길 원치는 않아요. … [일동 웃음]

이렇게 제 이야기를 시작하길 원합니다. 한 번 시작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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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통일교의 억만장자 설립자이자, 통칭 “모든 인류의 구원자라 선포된” 文鮮明 문선명 목사의 숨겨진 아들 (또는 최근 기사들에서 묘사한 대로는 “사생아”) 입니다. 저의 어머니 최순화씨는 (催淳華) Soon W. Choi  는 권력을 갖춘 억만장자 최씨 가문의 자손이었고, 최씨 가문은 한국에서 두번째로 큰 보험회사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금장 건물인 서울의 63층 금색 본부건물로 인해 널리 알려진 대한생명 회사의 이전 소유주였습니다.
[대한생명, 1946년에 세워졌으며 현재는 한화생명으로 알려짐]

▲ 한 때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던 63 빌딩은 예전 최씨 가문이 소유했던 기업인 대한생명 (현재는 한화생명으로 알려짐) 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저는 부와 광신과 위선으로 가득찬 세상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삶은 돈, 섹스, 권력 그리고 음모로 가득찬 한국 드라마와도 같았습니다. 저는 권력이 어떻게 타락시키는지, 절대 권력이 어떻게 절대적으로 타락시키는지 직접 목격해 왔습니다. 저는 지옥으로의 길이, 비록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광적인 정의감에 의해 뒤틀렸을 지언정, 얼마나 좋은 의도로 포장되어있는지 보아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거절당했다는 심리와, 저의 탄생의 상황에 대해 비밀로 해야했던 점이, 내 삶의 대부분에 있어 내가 그림자 안에서 숨어 살아야 하는 삶으로 만들어버렸음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역사학 전공, 철학과 심리학 부전공으로 문학학사학위를 받았으며, 동대에서 금융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지난 10년간, 저는 저의 아버지와 통일교운동과의 1999년 기밀협정계약에서 비롯된 소송에 이런저런 형태로 관여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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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어머니처럼, 저도 한때는 저의 아버지, 문선명 목사가 만인류의 구원자라 믿도록 훈련되었었죠. 그렇지만 제 할머니께서 통일교로 데려갔던 경우인 저의 어머니와는 다르게, 저는 그 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저는 “개종의 경험” 을 겪은 것도 아니고, 가족들과 의절하거나 예전의 삶의 방식을 버려야했던 것이 아닙니다. 통일교회는 제 삶의 방식이었지만, 하지만 저는 제 자신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다름’ 은, 제가 12살 때쯤, 12세 후반 아니면 13세 초반 즈음에 저의 생부모가 사실은 문선명 목사와 Soon W. Choi 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드러났습니다. 제가 부모와 형제자매라고 본래 생각했던 사람들 (박보희 (朴普熙) 와 그의 아내 윤기숙 (尹基淑),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은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저를 키우고 제 진짜 부모의 정체를 숨기도록 문선명 목사에게 명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와 통일교운동과의 소송의 중점은 바로 이 강압적인 사기와 저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약속하고는 지키지 않은 많은 약속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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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어머니와 문선명 목사와의 관계는, 문선명 목사가 17살의 나이에 저의 어머니를 강제로 범하여 그녀의 처녀성을 뺏었던 1953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당시 [잠시 멈춤] 저의 아버지가 말하기로는 저의 어머니가 그의 영원한 신부 또는 통일교 용어로는 “참어머니” 가 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그가 그녀와 성관계를 맺어야했던 것은 되돌리기 위해… 통일교 용어들이 많이 나올 텐데, 용서하세요. 통일교에 대해 알아보셨다면 아시겠지만,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실 겁니다 – 이 영상을 많은 통일교 신자들이 볼 것이고 그들에게 도움이 될 터이니, 제가 그런 용어들을 쓰는 것을 이해해주세요. 저의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말하길 – 사실 강간한 것이죠 – 그는 대천사 루시퍼가 어린 이브에게 한 짓을 되돌리기 위해 그녀와 성관계를 가진 것이라 했습니다. 문선명 목사는 성경의 이브가 17살이었을 때 대천사 루시퍼에게 유혹당했고, 이것이 성경에 묘사된 인류의 타락의 진짜 이유라고 가르쳤죠. 이것이 통일교 신자들이 이해하는 인류의 타락입니다.

먼저 저의 어머니의 가족 (최씨 가문) 이 문선명 목사의 초기 종교운동의 시작 때부터 맡은 중심적인 역할에 대해 알지 않고는, 저의 아버지와 통일교 운동에 우리가 관여된 배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통일교 신자들에게도 비신자들에게도, 이 최씨 가문의 “숨겨진 역사” 의 시사점은 주목하지 않을 수 없고 참 중요합니다.

저의 아버지가 1953년 처음 저의 할머니를 만났을 때, 할머니의 이름만으로도 그녀가 그에게 정말 중요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이득삼 (李得三) 이었고,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세 가지를 얻는다” 는 뜻인데 한국 기준으로도 꽤나 특이한 이름입니다. 하지만 통일교 신자에게는 이 이름이 정말 중요한데요, 이는 그 이름이 창세기 1장 28절에 묘사된 대로, 생육하고, 번성하며, 피조계를 다스리는, 이 세 가지 축복이라는 원리강론 (통일교 신앙 체계) 의 중심되는 명령을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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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 가문의 부를 발판으로, 저의 할머니는 1950년대와 1960년대 내내 몇백만불을 기부하는 등 초기 통일교 운동 재정의 주된 후원자였습니다. 실제로, 초기 통일교회에서 할머니가 돕지 않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통일교 내에서 그리도 사랑받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달러가치로 보자면, 1950년대 중반의 백만불은 오늘날의 팔백 오십만불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다. 1950년대 초반 그녀의 백만불짜리 맨션을 팔아 통일교회에 기부한 것에 더하여, 그녀는 1973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오랜 세월 동안 거액을 계속 기부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최성모 (崔聖模) 는 그의 시대에서는 상당히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그는 26세에 자력으로 백만장자가 되었으며 (백만불이 정말 의미가 있을 시절에 말이죠) 전재산을 얻고 또 잃고를 세 번이나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할머니가 통일교에 들어간 1950년 초반에는 이미 신동아 그룹 (최씨 가문 소유의 대기업) 을 수억만달러 규모 기업으로 키워낼만한 발판을 잘 닦아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의 사업이 확장되면서, 그의 영향력은 서울시의 권력의 회랑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당시 대통령 박정희 (朴正熙) 의 개인적인 부탁으로 워싱턴 DC 에서의 미국과의 무역 협상을 주도하도록 여러번 보내졌습니다. 박정희 재임 기간 중, 그는 청와대와의 핫라인이라고 불리던 직통 전화선이 있었고, 미국의 경제자문위원회와 유사한 단체의 수장이었으며, 경제 정책에 있어 대통령에게 밀접히 조언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정예 기업 집단을 세웠고, 세금 납부액으로 보았을 때 삼성 (三星) 그룹의 설립자이자 그의 친한 친구인 이병철 (李秉喆) 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 두번째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이 두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위해 만나면, 사업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과 자녀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점은 참 아이러니하지요. 어떤 점에서는, 이런 것이 저의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전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의 성공과 권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의 자녀들과 고용인들의 행복이었습니다. 그의 내심은 겸손하고 고결한 사람이었고, 당시대 가장 도덕적인 사업가로 여겨졌으며, 이는 저의 어머니와 제가 가장 그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사실입니다 – 특히 당시 한국의 부패 정도를 감안했을 때 한국인 사업가로서 말이죠, 현재도 부패한 한국이구요.

가문의 지위를 보았을 때, 저의 아버지가 최씨 가문의 지원을 받는 데에 왜 혈안이 되었을지는 자명합니다. 저의 할아버지의 지원으로, 권력의 회랑 [즉, 청와대] 과 재정 자원이 그의 초기 운동에 활짝 열린 셈이 되겠죠. 좋은 지원을 바탕으로라면 그가 얼마나 높이 올라갈 수 있을지, 예측이 불가한 수준이었겠구요. 저의 아버지에겐, 최씨 가문이란 그의 구세의 꿈을 이루기 위한 왕관의 보석과도 같았습니다. 통일교 비신자들에게는 제가 다음 할 말들이 얼토당토않겠지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해해 주세요, 저의 아버지는 저의 어머니에게 여러번이나, 하나님은 최씨 가문을 통해 인류 역사의 전체를 완성시키길 원하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저의 할아버지가 역사상 대천사의 위치에 해당하고, 저의 두 삼촌들 (저의 어머니의 남동생들) 이 역사상 가인과 아벨의 위치에 해당하며, 저의 어머니와 그녀의 언니 (두 사람 모두 저의 할머니가 1953년 통일교에 들어간 직후 통일교에 들어감) 가 역사상 레아와 라헬의 위치에 해당한다고 믿었습니다.

문선명 文鮮明 과 최순화 催淳華

저의 아버지는 두 친자매들과 결혼하고, 그 자매들과 몸종들과 열두명의 아들을 낳음으로써 성경의 야곱의 삶을 본떠야한다 믿었습니다. 야곱처럼, 저의 아버지는 먼저 언니 (저의 이모) 와 1960년에 결혼하기로 계획했고, 7년이 지난 후 그녀와 이혼한 후 더 어리고 더 편애받는 자매, 바로 저의 어머니와 결혼하기로 계획했습니다. 1960년에 이르기까지, 통일교회 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의 이모와 어머니 둘 모두와 결혼하려는 저의 아버지의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고, 저의 어머니를 미래의 통일교 “참어머니” 로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에 따르면, 그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는 성경의 야곱이 이룬 바를 본뜨기 위해 최씨 가문과의 이 중대한 관계를 제대로 맺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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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저의 아버지의 지나친 성욕으로 인해, 다른 여자들과 의도하지 않은 임신이 수어번 생겨났고, 저의 아버지를 향한 저의 이모의 믿음은 점차 약해져서 결국 그녀는 1959년 후반 공식적인 약혼 이후 곧 통일교를 떠나게 됐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부분입니다. 이런 일은 그들이 당연한 이유로 덮고자 했던 숨겨진 역사인데, 이런 일들은 교회가 배척할만한 일이며 그들이 신도들에게 1960년부터 가르쳐온 것과 절대 모순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이모가 파혼하고 난 뒤, 저의 아버지는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사명에 정말 중요했던, 7년간 그가 일궈온 관계가 그야말로 증발해버린 것입니다. 그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기보다는, 그는 그를 실망시켰다며 저의 이모와 최씨 가문을 비난했고, 이는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그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두를 비난하는 문선명 목사의 전형적인 수법입니다. 하지만, 그는 딜레마에 빠졌죠, 그는 “하늘의 예정” 을 지켜 1960년 봄, 그가 40살일 때에 결혼해야했습니다. 통일교 신도들은 숫자 40 이 중대한 우주의 중요성을 지닌다고 믿어서, 그는 짧은 시간 안에 신부를 찾아야만 했습니다, 거의 4달 안에 말이죠.

전형적인, 대체하여 만회할 여자나 찾는 상황이죠. 그가 현재 문선명의 부인인, 한학자 (韓鶴子) 를 아내로 간택했을 때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던 겁니다. 최씨 가문에게 내쳐졌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권위와 소망에 대한 개인적인 모욕이라고 받아들인 저의 이모의 배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결국 현재의 부인인 한학자를 택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새로운 신부를 찾음에 있어 제시한 유일한 기준은, 여자가 “그 아무도 아닐 것” 과 부모의 허락이 필요없을 사람인 것이었습니다. 10대였던 한학자는 똑똑하고 근면하며 외모가 뛰어났지만, 그녀에겐 불행하게도, 그녀의 어머니는 무지하며 박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모로,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와, 그녀의 어머니가 통일교에 들어가기 전 하녀로 주방에서 일했던 성적 종교집단 모임에 함께 참석하곤 했던 유부남 간의 사생아였기 때문에, 한학자는 그녀 환경의 희생자였습니다. 한학자의 생부가 그녀를 그의 딸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부모의 허락이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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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으로 빠르게 넘어가면, 저의 아버지와 그의 세계 지배란 거창한 계획은 잘 흘러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구원자인 저의 아버지와 그의 완벽한 신부 한학자의 1960년 혼인이 있은 후로, 세상은 이를 거의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1960년에 통일교 신도의 일반적인 신앙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통일교 신자들은, 저의 아버지가 한학자와 결혼하는 순간, 하늘이 열리고 온 세상이 기적적으로 무릎을 꿇어 그가 구원자이며 그의 아내가 만인류의 참어머니임을 인정하리라 실제로 믿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광신종교집단에서 벌어지는 마술적인 사고 증상이죠. 하지만 현실은 커다란 실망이었습니다. 문선명 부부의 맏이인 예진은 애초에는 “하늘의 왕자” 가 될 것으로 선포되었지만, 결국 딸이었습니다. 셋째인 해진은 그녀가 태어나자마자 곧 죽었습니다. 신도 증가는 침체되어 있었고 교회는 재정적으로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는 부와 영향력이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번영했던 저의 할아버지 때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룹니다. 저의 아버지는 한학자와 결혼한 것이 실수였고, 경로를 바꾸어 최씨 가문과의 원래의 계획 (또는 그가 “최씨 가문의 섭리” 라고 불렀던 계획) 으로 회귀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1964년 봄 조지타운대학교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기로 한 저의 어머니의 결정은 저의 아버지가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게 했습니다. 본질적으로, 저의 어머니는 서울에 있는 저의 아버지로부터 멀어지고, 한학자에게 숨 돌릴 공간을 주길 원했던 것입니다. 1960년 한학자가 저의 아버지와 결혼한 이후 줄곧, 교회 내 모든 사람들이 한학자가 그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한학자와 저의 어머니는 아주 불편한 관계였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학자의 어머니가 자신의 딸이 저의 아버지와 최대한 많은 아들들을 갖도록 권한 이유이고, 아들을 한 명 한 명 낳을 때마다 저의 아버지를 향한 자신의 딸의 지배력이 더 단단해질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1. “고독한 부활의 길에 서있는 선생을 위해서, 나의 마음에 빛이 되어줄 수 있겠는가.”

2. “이름의 첫 글자를 경 慶 (남자아이라면) 자 그리고 연 妍 (여자아이라면) 자를 써서 문씨 가문의 이름 짓는 전통을 따르라고 보희 (박) 커플에게 전하라.”

문선명이 최순화 (애니) 에게로 보낸 우편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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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아버지는 마음을 정했고 그의 계획을 확실히 하고 저의 어머니를 잃지 않기 위해, 1964년 서울 청파동 교회의 본부에서 통일교 인가 비공개 의식에서 저의 어머니와 결혼을 합니다. 저의 아버지에겐 무엇이 걸려있었던 것인지 아셔야 합니다. 그는 만약 그녀가 미국으로 떠나면 그녀를 영영 잃을 것이며, 이는 최씨 가문의 재정으로의 길 또한 잃는다는 것임을 두려워했습니다. 또한, 그 자신과 통일교회를 저의 할아버지의 응징으로부터 지켜주는 유일한 것은 저의 어머니의 그와 교회를 향한 충성심과 헌신이었기 때문에, 저의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은 그에게는 존재 자체의 위기였을 것입니다. 또 가장 중요한 것은, 저의 어머니와 결혼하고 그녀와 자녀를 가짐으로써, 그는 야곱의 삶 또는, 통일교 신도들이 통칭 이야기하는 야곱의 경로를 본따는 일을 이루는 셈이며, 원리강론에 따르면 이는 그에게 아마도 가장 중요한 명령이었습니다. 원리강론은 당시 이후 변하였고, 오늘날의 원리강론은 초기의 그것과 비교하여 많이 다릅니다. 그들은 현재 문선명 목사가 현재의 아내와 결혼한 이후 일어난 사실관계들에 맞추기 위해 원리강론을 손봐야만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미국에 도착한 뒤 바로, 저의 아버지는 1965년 그녀를 따라 미국에 곧 왔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미국에 1964년에 왔고, 저의 아버지는 1965년에 왔습니다. 그가 말하기로는 그는 근본적으로 저를 갖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이는 저의 아버지가 직접 한 말입니다] 고 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미국에 와서 저의 어머니를 임신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던 거죠. 그녀가 임신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그녀 곁을 떠났습니다. 그는 1965년 세 달 정도 머물렀습니다. 저는 다음해인 1966년 1월에 태어났고, 그 이후는 모두가 아는 일이죠. 사실은, 저의 아버지가 저를 가짐으로써 최씨 가문의 섭리로 되돌아가겠다는 자신의 의도를 확연히 했기 때문에, 제가 태어났을 무렵 문선명의 현재 아내는 그녀가 물러나서 문선명의 아내로서와 “참어머니” 로서의 위치를 저의 어머니에게 넘겨주겠다고, 저의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어머니의 동정심은 그의 한학자를 끌어내고 저의 어머니가 통일교 용어로 “참어머니” 로서 그녀의 정당한 위치에 서게 하리라는 계획을 막게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한학자의 가능성을 믿고 싶어했고, 또한 한 명의 여자로서, 그녀는 한학자와 한학자의 어린 네 자녀들을 쫓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태어난 후 그녀가 저를 포기해야만 했던 이유입니다. 그녀는 이를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만약 저의 어머니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그녀는 완전히 다른 접근법을 취했을 것입니다. 제가 태어난 뒤, 저의 아버지는 저의 어머니와 자녀를 더 갖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저의 할아버지와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자녀들을 뺏기고 다른 가족에게 키워지도록 포기해야 한다는 슬픔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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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까지 설명한 것들이 통일교의 진짜 숨겨진 역사입니다. 제가 그 역사의 기록을 바로잡기 위해 이 강단에 서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저는 제가 더 이상 이러한 비밀을 짊어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이런 날이 결국 왔다는 것에 마음이 놓입니다. 통일교에 미칠 수 있는 영향과, 문선명 목사의 아내의 “참어머니” 로서의 정당성과, 원리강론에 따른 그 자손들의 “참자녀” 혹은 적자상속인들로서의 정당성 등을 생각해 볼 때, 왜 통일교운동이 이러한 정보들을 숨기려 했는지, 그리고 왜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극단적인 법적 수단도 가리지 않았는지는 자명합니다. 저의 어머니가 통일교의 정당한 “참어머니” 임을 주장하는 것은, 문선명 목사의 아내 자신이 1966년, 1967년 시간대 즈음 그녀 자신의 위치를 저의 어머니에게 넘겨줄 준비가 되었을 때 이미 그리 했기 때문에, 전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아부로 가득찬 거대한 부와 특권과 절대적인 권력의 세계에 싸인 채 시간이 지남으로, 한학자는 그녀의 젊을 적 양심을 잃었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에게 키워진 그녀의 어린시절의 비참한 현실을 더하면, 한학자가 자신의 자녀들을 키우는 데에 있어 적절한 기술을 갖추지 못했음은 자명하고, 그 자녀들은 오늘날 대부분 그녀를 비난합니다.

저의 탄생의 배경과 시점을 보신다면, 제가 통일교운동의 “정당한 상속인” 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입니다. 한학자가 만약 통일교운동의 예정된 참어머니였다면, 왜 저의 아버지가 그 “성스럽고 신성한” 결혼에서 걸어나와 저를 가졌겠습니까? 그리고 왜 당시 저의 어머니에게 그가 저를 갖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고 말했겠습니까. 뭐, 제가 보기에는, 이러한 상황은 저를 아주 중요한 우주적인 녀석이 되게 하는 것이구요, 물론 통일교 논리 상 말이죠, 그리고 바로 저의 이복 형제자매들이 저를 싫어하거나 저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들 중 하나인 것입니다. 문씨 가문의 폭력의 굴레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그들의 자기 도취증적 인격 장애와, 망상적인 절대 관념 (예를 들면 그들이 특별하고 그러므로 신도들과 다른 사람들을 마구 대해도 된다는 믿음) 때문이니, 저야 괜찮습니다. 이런 방식의 생각과 행동이 제가 그들과 공유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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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만 오해하지는 말아주세요. 저는 차기 구원자 혹은 그런 류의 무언가가 되기 위해 캠페인을 펼치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솔직히 저는 관심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내 자신이 특별하다거나 우월하다고 느껴야만 하는 필요성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니까요.

Donna: “뭐 그건 말만 그렇게 하는 것 같은데요.” [웃음] …

사무엘: “정말이라구요! … 저는 저의 한계점에 대해 지독히도 잘 알고 있고,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가까워지기 위해 저란 존재가 필요하다는 생각 따위 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똑똑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특별한” 혹은 진실된 통찰력을 가졌다고 믿거나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자아도취에 빠지는 파멸에 이르는 길이죠.

저의 어머니와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만한 특이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우리에겐, 우리의 삶은 우리가 아는 유일한 삶이며, 그러니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입니다만, 하지만 이제 그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저는 이제는 그 이색적임을 고맙게 여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하기 위한 우리의 여정은 길고 힘든 싸움이었으며, 이 방 안에 있는 많은 분들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의 지원과, 정말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그 은혜와 사랑의 보편적인 존재 없이는 이뤄낼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말이나 우리 모습이 평범해 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는 우리 존재에 영원히 새겨진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인용구는 Khalil Gibran 의 이 말입니다: “너란 존재에 새겨진 슬픔의 깊이가 깊을 수록, 너는 더 많은 기쁨을 담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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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가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비록 우리가 많은 일을 겪었지만, 그만큼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것이 이 모든 경험에서 얻은 축복입니다. 그리고 ICSA 에 온 것은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여기 많은 SGA 들 [2세 성인들] 이 있고, 많은 학자들이 있고, 많은 일반 성도들이 있습니다. 저에게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 있어 아주 강하고 고무적인 사인이 되었어요. 희망이라는 것이 있으며, 사람들이 회복하고 그들의 경험으로부터 치유받는 방법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 [기립박수.]

저의 어머니는 17살의 나이에 저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성적 착취를 견뎌냈고, 저의 아버지란 바로 그 사람 때문에 당국에 체포당하고 심문당했으며, 저의 아버지란 바로 그 사람을 지원하기 위해 억만달러의 유산을 포기했고, 비밀리에 아들을 가졌으며, 저의 아버지란 바로 그 사람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강제로 포기해야 했으며, 그리고, 지난 5년간 저의 아버지와 통일교운동이 우리에게 주어야할 금액을 집행하기 위한 소송을 해왔기 때문에, 다른 많은 통일교 신도들처럼 우리는 압류와 파산 직전의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그로부터 인정받기를 오랫동안 원해왔습니다만, 이젠 그가 자신의 자아도취에 빠져 감정적으로 저를 위해 있어주지 못했음을 이제 압니다. 제 스스로 아들을 가지면서, 나의 아들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고사하고 나의 아들을 버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저는 저의 아버지의 삶의 선택들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이제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정말로 애석하고 비극적인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론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구원자 또는 전인류의 참아버지라고 스스로 주장하면서, 자신의 친아들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지 못하면 안 됩니다. 이는 궁극적인 위선입니다. [박수]

이미 언급한 대로, 지난 5년간, 저의 어머니와 저는, 저의 아버지와 통일교 운동이 우리에게 빚진 부분에 대한 소송에 휘말려왔습니다. 아시겠죠, 2천만불 (우리의 법적 청구 가치) 은 그 누구에게도 큰 돈이긴 하지만, 일본에서 종교적인 공갈로 인해 강제로 빼앗긴 돈을 환수 혹은 되찾기 위해 통일교를 고소한 사람들처럼, 우리는 저의 할머니와 최씨 가문이 1953년부터 시작하여 20년이 넘게 통일교회에 기부한 수백만불,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늘날 달러 가치로는 2천만불을 쉽게 넘길만한 가치의 그러한 돈에 대해 원칙적으로 우리가 같은 소송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구요, 그러니 사실 통일교 운동은 꽤 큰 할인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결론은 이것입니다: 저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지금 통일교 운동이 되어버린 그 무언가에 자원한 바가 없습니다. 그들은 개인 인격의 광신단체에 자원한 바가 없고, 신도들을 영적으로 재정적으로 노예 삼아, 특히 일본에서, 대다수를 극빈자로 만드는 데에 자원한 바가 없고, 문씨 가문이 사는 아부로 가득찬 보호막을 행하고 유지하는 한국 중심의 지배 엘리트 계층을 만드는 데에 자원한 바가 없습니다.

만약 통일교가 생존 가능하고 정당한 단체가 되길 원한다면, 통일교는 그 이름의 “통일” 이라는 부분으로 회귀해야 합니다. 신도들의 과반수 이상이 끼니를 잇지 못하는 가운데 문씨 가문이 해외 은행계좌에 수억의 돈을 쌓아두는 데에는, 탐욕과 부패 외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이른바, 자선은 내 집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지금이 바로 통일교 운동이 하나의 세계 가족을 만들어야 한다는 그 설립 명령을 말로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부응해야 할 시점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렇게 나서며 바란 것은 다른 사람들이 통일교의 권력을 다시 되찾을 수 있는 용기를 갖도록 고무시키고, 애석하게도 통일교 운동이 되어버리고 만 이 거짓에 참여하는 것을 멈추게 하기 위함입니다.

제 이야기를 다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박수]

31:48
Donna 에게 발언권을 넘기기 전에 제가 말하고 싶은 한 가지가 더 있는데요, 사람들이 제가 이렇게 앞에 나서기까지 왜 그리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궁금해합니다. 제가 왜 홍난숙 (洪蘭淑) 과 Donna 를 위해 앞에 나서지 못했는지 말이죠. 이유는 간단한데, 제가 순진해 빠진 탓입니다. 당시 저는 저의 아버지와 어떠한 화해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교회 일을 떠나서, 결국 그는 저의 생부였고, 저는 아들로서,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정말 믿고 싶었고, 그가 절 걱정할 거라고, 신경을 조금이라도 쓸 것이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결국 포기하기 제일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소송 중, 상대방이 소송의 가치보다도 더 많은 금액을 변호사 비용에 소비하는 것을 보고 겪으면, 이 사람들의 본성에 대해 참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혈연을 이런 식으로 대하는 것, 특히 저의 어머니가 감수한 희생을 말이죠. 그게 저를 정말 크게 바꾸어 놓았으며, 시간이 좀 지나기 전까지는 이런 것들을 겪지 못했기 때문에 시간 지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저의 구심점이 변한 시점이구요. 이것이 제가 오늘 서있는 이 곳에 오기까지 그리도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는 오늘 이 곳에 왔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박수]

박사무엘


韓国・毎日新聞1976年6月28日記事

崔聖模씨別世     新東亞「그룹」會長

26일상오            ◊  故崔聖模씨

新東亞그룹  崔聖模회장이

지난26일 宿患으로 別世、親知및 財界重鎭등 弔客이참석한가운데 28일상오 京畿도楊州군瓦阜면月文리 선영에서 장례식이엄수됐다。

享年67세의 故人은 黄海道沙里院출신으로  지난55년釜山冷凍을 창업한이후 東亞綜合産業、新東亞火災、韓國메타놀、泰興産業、大成木材등을  설립해  新東亞그룹을  이뤘으며 統 一主體國民會議운영위원과 全経聯부회장을  歷任한  重鎮實業人이다。

유족으로는朴貞淑 [ 박정숙 ] 여사와  4男 4女가 있다。


▲ 박정숙 朴貞淑


「私の一族は統一教会の餌食にされた」 崔淳英  최순영



박사무엘: 제가 받은 피드백에 답하여 2015


▲ 박씨 가문과 함께 있는 사무엘 (좌측)

저의 비디오 프레젠테이션이 HWDYKYM (How Well Do You Know Your Moon blog) 에 공개된 이후, 그 내용에 대해서 제가 해명을 위해 답하고 싶은 질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저는 문선명 목사의 살아있는 아들들 중 둘째로 나이가 많은 아들입니다. 저의 이복형 文聖進 문성진 씨는 일본에 살고 있습니다. 저는 키가 작은데, 이는 키가 크지 않은 최씨 가문 쪽 가족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또, 저의 아버지도 키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저는 소송 기간 중 통일교 측 변호사들로부터 부자감별 목적으로 유전자 검사를 요청받은 적이 없는데요, 이는 소송의 양측 모두 그럴만한 이유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걸 생각해보십시오: 왜 통일교가 저의 어머니 催淳華 최순화 씨 그리고 저와 비밀협정을 맺기 위해 그렇게도 많이 애를 썼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거짓말쟁이들이라면, 통일교는 그럴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비디오는 제 삶에 대해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이야기한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초조할 수밖에 없었고 (그리고 감정적이었죠 – 그래서 짜증나실만하게 훌쩍거렸고요), 그리고 제한된 시간에 많은 이야기를 다루어야 했기에, 저의 프레젠테이션을 읽어내려 가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진행 방법이었습니다. 저의 좋은 친구인 Donna Orme-Collins 가 주기적으로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쪽지 카드를 건네주었지요. 이 친절한 도움 이외에는, 그녀는 저의 프레젠테이션에 있어서 전혀 지도, 지시하거나 강제한 부분이 없는데요, 이는 제가 제 아버지의 성격을 좀 닮아 고집스럽고 남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저의 큰 후회 한 가지는 그녀가 말한대로 몇십년 전 솔직하게 앞으로 나서지 못한 점입니다.

1. “고독한 부활의 길에 서있는 선생을 위해서, 나의 마음에 빛이 되어줄 수 있겠는가.”

2. “이름의 첫 글자를 경 慶 (남자아이라면) 자 그리고 연 妍 (여자아이라면) 자를 써서 문씨 가문의 이름 짓는 전통을 따르라고 보희 (박) 커플에게 전하라.”

문선명이 최순화 (애니) 에게로 보낸 우편엽서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강간은 보통 타인의 동의 없이 타인에게 범해지는 성관계 또는 다른 형태의 성적인 삽입을 포함하는 성폭행의 한 종류이다. 강간 행위는 물리적인 힘, 강요, 권한의 남용에 의해서, 또는 법적으로 유효한 동의를 할 수 없는 사람, 예를 들면 의식이 없는 사람, 무력화된 사람, 또는 동의를 할 수 있는 법적 연령 이하의 사람 등에게로 행해질 수 있다. 강간이라는 용어 자체는 종종 성폭행이라는 단어와 교체 사용된다.”

저의 어머니는, 성이라는 주제가 그냥 다뤄지지조차 않았던 시대와 문화 속에서, 좋은 집안환경에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일들에 관해 아주 무지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머니를 가르치는 선생이었고, 이러한 상황이 그를 저의 어머니에게 힘과 권력을 행할 수 있는 위치에 놓게 했습니다. 아시아 문화는 서양에 비해 선생을 숭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그는 또한 키가 겨우 5피트 정도인 저의 어머니에 비해 훨씬 크고 강했습니다. 한국에서 법적 동의 연령은 만 19세입니다. 저의 아버지가 저의 어머니를 범한 후, 그는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으며, 특히 그녀의 어머니 李得三 이득삼 (저의 할머니) 씨에게 절대 말하지 말라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종교적 훈련을 받으면서, 비록 오늘날까지도 그 정신적인 충격의 기억이 남아있음에도, 그녀는 그녀에게 일어난 일을 “섭리” 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슬픈 현실은, 이 세상엔 성폭행을 당했지만 웬일인지 정상참작 또는 단순무지의 사유로 마치 본인들이 책임이 있다고 느끼게 된 여성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보면서, 성폭행을 당한 모든 여자분들이 마음 속으로는 진실을 알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 정신적인 충격을 안고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입니다. 누구나 원하는 대로 믿을 권리는 있지요 – 하지만 많은 경우에 한 개인의 믿음은 실제 사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 한 때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던 63 빌딩은 예전 최씨 가문이 소유했던 기업인 대한생명 (현재는 한화생명으로 알려짐) 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저는 워싱턴 DC 에서 지난 7월 열린 ICSA 컨퍼런스에서 저의 프레젠테이션을 하였습니다. 여러모로, 저에겐 감정적으로, 영적으로, 또 이지적으로 중요한 분수령이 된 행사였습니다. 저는 ICSA 의 코디네이터 분들, 스태프 분들과 참가자 분들의 사랑, 지원, 진실성 그리고 지식의 수준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Steve Eichel 박사, Michael Langone 박사와 같은 분들과, 그에 더불어 정신건강전문가들, 심리학자들, 연구원들, 그 외 제가 정말 존경하는 Eileen Barker 박사와 같이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학자들께서 신흥종교의 역학 관계를 연구하고, 이 모임들의 현 신도들과 전 신도들이 그들의 경험을 다스리고 그로부터 치유되는 과정을 도울 수 있는 놀라운 체계를 제공해주셨습니다.

혹자가 ICSA 가 단지 미화된 “신앙을 버리게 하는 자들” 일 뿐이라고 매도한다면, 그것은 그 본인의 무지함의 깊이를 보여주는 일일 뿐입니다. ICSA 는 비영리단체이며, 참여하는 심리학자들, 정신의학자들 그리고 그 외 전문가들은 다른 전문직업을 유지하면서, 이 일을 보수 없이 진행합니다. 이 중 많은 분들은 본인 스스로 이단종교에 관여해본 적이 없으나, 그러한 모임들에 의한 피해를 보았고 그런 피해를 본 사람들을 돕고, 변호하며 치유하는 데에 관심을 둡니다. 저는 하레 크리슈나 교단에 대해서, 어떻게 그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관행을 개혁하고 좀 더 투명성을 가지고 운영하게 되었는지를 배우고 특별히 감명을 받았습니다. 저의 바램은 통일교가 그러한 변화를 본따 변하는 것입니다.


문선명 과 최순화

제가 저의 비디오에서 넌지시 밝혔듯, 문씨 가문은 전세계에 600억 달러 정도 추정 재산을 지니고 있습니다 (워싱턴 DC 에서 통일교 송사 진술 녹취록에 따르면). 통일교의 과장하는 성향을 감안해서, 실제 금액은 그 절반 정도라고 생각해도, 엄청난 금액의 돈이며, 옳게 사용된다면 통일교 성도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돈입니다. 통일교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자초한 재정적인 대참사에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일본에서의 통일교의 영적 공갈 행위는 일본 성도들과 비성도들 모두에게로부터 몇십억의 돈을 긁어냈습니다. 일본과 서양에서 대부분의 성도들은 통일교의 모금 캠페인과, 십억불의 돈을 들인 왕궁 (미국 국회의사당보다 큰 건물) 이 있는 清平 청평에서의 金孝南 김효남 씨의 귀신을 쫓는 행위 때문에 재정적으로 황폐해졌습니다. 김효남 씨 본인은 5억불에 가까운 교회 자산의 횡령 혐의로 인해 한국 정부의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사건에서 법이 승리하리라고는 별로 기대하고 있지 않은데요, 이는 한국과 같은 곳에서는 법치보다는 돈이 더 중요하고, 또 아시다시피 통일교는 돈이 많거든요.

일본과 서양에서의 헌신적인 1세대 신도들은 허약한 건강 상태에 모아둔 돈도 없고, 통일교 때문에 빚더미에 앉은 60대, 70대 노인 분들이십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짐이 되었고, 그 자녀들 중 많은 사람들이 통일교를 떠나 세상에서 자리를 잡고자 하지만, 결국은 부모들을 간호하는 세대로서 통일교란 늪에 다시 빠지고 맙니다. 이것은 통일교의 영적 공갈 장치로 인해 많은 1세대와 2세대 통일교 신도들이 겪는 비극적인 현실입니다.


▲ 한학자 韓鶴子 와 최순화 催淳華

왜 지금 이러는 것인가? 사무엘이 뭘 원하는 거지? 돈 때문에 이러는 거겠군!

1년이라는 시간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요.

제가 ICSA 에서 지난 2014년 7월에 프레젠테이션을 하였을 때, 저는 두 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통일교의 진짜 역사에 대해서 기록을 바로잡는 것이었고, 둘째는 우리의 소송에서 드러난 대로 지켜지지 않은 과거의 약속들에 대해서 저의 아버지와 통일교에 책임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1년 간, 우리는 파산을 겨우 피해내는 것조차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법적 조치를 위한 자금을 모을 수 없었고, 저는 실제로 집을 압류당했습니다. 통일교는 부패와 소모전을 통해 저를 끝까지 짓눌러 버리고자 했던 그들의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강압적으로 꾀어져 서명한 비밀보장계약이 뉴욕주 법 아래 절대로 집행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그 어떤 유능한 변호사에게도 명확한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교는 법체계를 장악할만한 돈이 있었기 때문에, 거짓된 사실을 꾸며내어 사실로 둔갑시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朴普熙박사 박보희박사 가 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다고 주장한 허위증언을 그 어떤 법적 이의 제기도 없이 인정시켜 냈습니다. 하고 많은 사람들 중 박보희박사 그 본인이야말로, 저의 아버지가 1965년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저의 어머니와 지냈던 방이 바로 박보희박사 의 옆방이었고, 그의 집에서 제가 태어났기 때문에, 진실을 알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 최순화 와 박사무엘

듣자하니 오직 자신만이 유일하게 진실로 순결한 혈통에서 태어났으며 유일한 진짜 하나님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신하기로 천명한 문선명 목사 부인에 의한 저의 아버지의 유산의 해체와 파멸을 지켜보는 것은 박보희박사 에게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박보희박사 은 언제나 우리 아버지의 충실한 병사였는데요, 하지만 저는 그와 그의 가족도 역시 환경의 희생자였으며 그 충절이 이리저리 끌려다녔음을 압니다. 저는 통일교 때문에 모두 고통을 겪은 저의 예전 박씨 가문 형제자매들을 향해서는 따뜻한 안부를 전하고자 하는 마음밖엔 없으며, 우리가 다시 만나는 그 날을 기다립니다. 문선명 목사 부인의 최근의 선포들은 완전히 새로운 단계의 정신나감을 보여주고 있고, 저의 아버지를 미화된 정자 제공자 수준으로 격하시켰습니다. 주께서 정말 쓰러지셨습니다 – 도움을 받아서 말이죠.

한국, 일본 그리고 서양에 있는 통일교는 金永雲 김영운 씨를 비롯하여 저의 어머니 쪽 가족, 최원복 씨, 그리고 셀 수 없는 다른 이름없는 성인들을 포함해, 여성들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이 여성들은 그들의 친구와, 가족과, 결혼생활을 통일교를 위해서 포기했지만, 극심히 혹사되었고 한국의 남성 지도부와, 저의 아버지를 섬겼던 그 어떤 여자에게도 질투와 의심을 품었던 한학자 씨에 학대당하기까지 했습니다. …

저의 본래 핵심은 이제서야 솔직히 앞에 나섰던 저의 동기를 다루고자 함이었습니다. 문선명 기업에 법적 방도로는 패배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그들에게 책임을 물리기 위한 저의 바램에서,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고 또한 신도들이 통일교에 대해 좀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것을 돕기 위해 제가 가진 것은 제가 나눌 수 있는 이야기 뿐입니다. 솔직하게 앞에 나선 우리의 (저의 어머니와 저의) 동기가 순전히 돈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은 순전히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가 저의 아버지를 위해서 “재정적으로” 얼마나 포기했는지 그들이 안다면, 그리고 조금이라도 그들에게 품위가 남아있다면, 그들은 입을 닫을 것입니다.

저의 할아버지는 저의 어머니가 통일교를 떠났다면 그녀에게 그의 비지니스 그룹의 주력 회사인 대한생명 (수십억불 규모 회사) 을 넘길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는 저를 박씨 가문으로부터 데려와서 통일교에서 떨어진 채로 한국에서 키울 준비조차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럴 수 있는 능력과 권리가 있었고, 저의 존재란 비밀이었기 때문에 통일교가 그를 막을 방법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를 막은 유일한 것은 저의 아버지를 향한 저의 어머니의 헌신이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가 원한 대로 되었기를 바란 적이 여러번 있는데요, 그랬다면 적어도 최씨 가문 비지니스 그룹과 저의 할아버지의 유산을, 저의 삼촌의 탐욕과 통찰력 부족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심이 있으시면, ‘모피게이트 (furgate)’, ‘대한생명’ 또는 ‘崔淳永’ ‘최순영’ 을 구글 검색해보시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저의 아버지를 지지하는 데에 있어서 저의 어머니에게 경제적 기회 비용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그녀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그녀의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유린당한 기회 비용이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돈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죽었고, 시간을 돌려서 저의 어머니에게 다시 그녀의 인생을 되돌려줄 힘이 없습니다; 그에게 개입당하거나, 아들을 포기하도록 강제당하거나, 어둠 속에서 사는 삶을 살도록 매도당하지 않은 그런 인생 말이죠.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우리의 폭로가 다른 분들이 힘을 되찾고 두려움 속에서 살지 않도록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980년 이래의 대한민국, 허욱과 Terence Roehrig (2010)

South Korea Since 1980 by Uk Heo and Terence Roehrig (2010)

1999년, 또다른 정치 스캔들이 한국인들을 실망시켰다. 이른바 모피게이트 스캔들은 신동아 그룹의 소유주인 崔淳永 최순영 씨와 검찰총장 김태정 씨가 연루되었다. 최순영 씨는 1998년 체포되었고 자본도피죄로 기소되었다. 대한민국의 법에 따르면, 자본도피 – 많은 양의 자본을 해외로 옮기는 행위 – 는 나라에 꼭 필요한 투자 자본을 빼내는 행위였기 때문에, 불법이었다. 이 사건이 수사 진행되는 동안, 최 씨의 부인은 김태정 씨의 부인에게 암암리에 그녀의 남편이 최 씨를 관대하게 대하도록 설득해달라는 의미에서 비싼 모피 코트를 사줌으로써 뇌물 행위를 하였다. 야당에서는 이 스캔들을 폭로하였고, 검찰총장이 연루되었으므로 독립된 특검 수사를 요청했으며, 검찰청이 이를 은폐 시도했다는 증거가 나타났다.9 게다가, 여당 의원 정형근 씨가 안기부와의 연계를 통해 대중매체를 조종하는 등의 정부 관여의 증거가 담긴 문서를 공개했다. 여당은 또한 안기부가 국회의사당 내 본부에서 불법적으로 야당의 활동을 감시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10

9 Y. Youn. “1999년의 대한민국: 냉전 유산의 극복” Asian Survey 40 (2000년); 164-71.

10 N. Kristof, “잠긴 문은 부서졌고 서울의 의원들은 첩자 소동을 겪다,” 뉴욕타임즈, 1월 4일, 1999년.

9 Y. Youn. “South Korea in 1999: Overcoming Cold War Legacies” Asian Survey 40 (2000); 164-71.

10 N. Kristof, “A Locked Door ls Broken and Seoul Lawmakers Have a Spy Furor,” New York Times, January 4, 1999.



English

Sam Park reveals Moon’s hidden history (2014)

Sam Park: In response to the feedback I have received (August 2015)

Mother JonesMeet the Love Child Rev. Sun Myung Moon Desperately Tried To Hide.

PDF of the Mother Jones article

The New Republic – The Fall of The House of Moon

Nansook Hong In The Shadow Of The Moons – My life in the Reverend Sun Myung Moon’s family

Nansook Hong, transcripts of three interviews, including ‘60 Minutes’


홍난숙은 1998년에 미국 CBS TV 60분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문선명의 장남인 문효진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홍난숙. 그녀는 1995년 8월 8일 14년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이스트가든을 떠났다. 그녀는 참가정을 떠난 것을 ‘탈출’ 이라고 표현한다. 그 후 홍난숙은 문선명 일가의 실상을 폭로하는 책을 썼다. 그 책의 이름은 <In the Shadow of the Moons> 이다.


野錄 統一敎會史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사)
박정화 외2인 지음 (前 통일교창립위원)


유효민 – 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유신희 – 6마리아의 한 사람 이었다

김덕진 – 섹스릴레이의 실천자

일본 통일교회에서 모집한 20세 여성이 ‘사과 결혼’ 을 통해 연장자인 한국인 농부에게 팔렸다. 그는 통일교 신도가 아니었다.

일본인 멤버 K 씨는 자신이 싫어하는 한국인 남자와 강제로 결혼했다.

일본인 멤버 U 씨는 그녀를 폭력을 휘두르는 한국인 남자와 결혼했다.

김백문의 ‘섹스 타락론’, 무엇을 말하나

1955년 이화여대에서 일어난 문선명 섹스 스캔들 


통일교 초월 (1편) : 나는 통일교를 이렇게 초월했다!

통일교 초월 (4편) : 문선명의 6마리아 혈통복귀설은 사실이었다!

통일교 초월 (5편) : 문선명의 <원리원본>을 꼭 읽어라!

통일교 초월 (6편) : 통일교 원리에서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라!

통일교 초월 (7편) : 아프더라도 외면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


문선명의 정체! (1)   저자  김명희

문선명의 정체! (사진으로 보는 문선명의 정체)

진정서 “25년동안 속았읍니다”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저자  박준철


生의 原理  생의 원리
정득은 丁得恩 / 鄭得恩

原理原本 원리원본 1952년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 통일교
1996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2020년 하늘부모님 성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