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록 통일교회사-1

野錄 統一敎會史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사)

박 정 화 외2인 지옴 (前 통일교창립위원)

문용명(龍明) ⟶ 선명(鮮明) ⟶ 선생 ⟶ 목사 ⟶ 재림주 ⟶ 참 아버지

自稱 하나님이다. 진짜 사단은  文鮮明이다.

큰샘출판사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 통일교
1996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2020년 하늘부모님 성회


統一敎會는 섹스 敎團이었다!

有夫女를 빼앗고 財產을 말아먹고,
側近中側近인 통일교회 創姶者였던 著者가
「죽기전에 모든것을 밝히고」라는 遺書를 대신의 手記!
《섹스릴레이 – 實踐者의 告白》

文鮮明語錄(本文에서)

「그것은, 예수가 세상에 탄생해서 이루지 못한, 女子들과의 復歸」다.
天使長 누시엘과 섹스에 의해서 빼앗긴것과 같은 方法으로 六마리아를 빼앗아 오지 않으면 않된다.
「六마리아를 복귀 (復歸하면 再臨主는 섹스 경험이 없는 處女)를 택해 “어린양 잔치 儀式” 을 거행한다.」
「이 世上中 모든 財產은 本來 하나님의 것이었는데 전부 흠처와 내게 헌금해도 세상 法律에는 저촉되도 하나님은 용서한다」

값 7,000원


野錄 統一敎會史
1996년 3월 1일 발행


이 책은

한국에서 발생한 가장 악랄한 사이비종교, 통일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문선명교주의 복귀(復歸)라는 미명으로 혼음, 섹스, 혈대교환 (血代交換) 실천 (처녀잉태, 유부녀) 과 그 실제 경험했던 실화를 적나라하게 밝혀 놓은 책이다.

그 비극의 섹스 혈대교환 (血代交換) 을 통해서 구원(복귀) 받는다는  사이비종교 통일교집단에 빠져 인생을 망치고 가정파괴를 당한 사실과, 어린양잔치라고 처녀들을 미혹 잉태시켜 놓고 책임을 회피당한 비극의 여인들.

유부녀와 결혼 (어린양 혼인잔치) 소동을 일으켜 5년 실형을 받고 흥남감옥 노무자였던 문교주의 죄수번호 596.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환 (血代交換) 의식과 통일교 복귀 (復歸) 라는 구원방법, 문교주 체포와 혼음 (섹스) 관계 조사와 거짓말 증언들.

문교주에게 몸도 맘도 재산도 다 빼앗긴후 (유부녀) 여인들의 비참한 말로.

나의 부끄러운 체험들. (섹스, 혈대교환 실천 내용).
황금에 눈이먼 문교주의 노동력 착취와 문씨족벌 체제운영.
문교주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별짓을 다한다.
김백문의 원리를 도용, 문교주의 것으로 만든 사이비 · 이단교리.
통일교 창설 전 · 후 최초로 문교주와 13년간 함께 생활해 왔던 저자의 산 글이다.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타종교인, 일반 시민들에게도 사이비 종교 (틀일교) 를 알기쉽게 체험한 사실 그대로 밝혀 놓은 책이다.


저자 소개


▲ 朴 正 華 (통일교창설위원)

1913년 평안남도에서 출생.
만주 · 신경 전문학교졸업.
인민군 시대, 부하의 범죄 책임(감 독불충분)에 형무소로. 옥중에서 문선명과 인연이 되여 생명을 걸고 뚯길에 맹세하고 제자가 됨.
6.25동란에 남쪽으로. 한국(서울)에, 통일교회 설립전후 문선명의 오른팔로서 활약. 여자관계, 경제문제 등을 속깊이 알아, 후에 문선명에게 비열하게 배신당함.
통일교회 창시자 6인의 한사람.
현재 인천시에 거주함




▲ 유효원 [원리해설] 직필원고 일부


차  례

머리말   6

제1장 옥증에서 만난 사나이   15
재림 메시아로 믿고  17
흥남특별노무자수용소  17
죄수번호 596 문용명 (文龍明)  22
총반장으로 임명되고  24
해와는 왜 하반신을 강추었나  26
예수와 6인의 여인들  30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판 (血代交換) 을  34
평양을 소란케 한 이단자  39
최초의 체포 구속  39
유부녀와의 결흔소동으로 징역5년  41
한국전쟁과 대공습  42
김일성 은사  44

제2장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난   45
평양에서 서울로  47
불량배에게 다리를 절골 당했다  47
문용명 (文龍明) 과의 재회  48
가족을 이북에 버리고 문선생을 따랐다  49
죽을때까지 함께하자던 사나이의 약속  50
악전고투의 피난길  52
겨우 서울에 도착하다  54
서울에서 부산으로  56
제2의 피난행  56
경주에서의 작별  58
생활에 쫓긴 문선생이 찾아옴  60
평양에서 온 옥상현과의 재회  62

제3장 통일교회의 창립전후  67
여자신도 들의 열의  69
부산 수정동교회  69
최선길 (문교주의 본처) 부인의 큰난동  70
경찰서에서 전기고문  74
하늘의 뜻에 관한 시험  75
노한 이순철의 남편  76
부산 영도 (影島) 의 집회  80
여자대학생 김영희의 비극  80
수사기관에 쫓기는 나날  83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 창립  85
유효원이 원리해설을 집필  85
통일교회 창립의 날  89
이화여자대학사건 무렵  91
교수와 학생들의 대거 입교  91
김덕진 (金德振) 이라는 사나이  92
대구에서 또 전기고문  93
푸로마이드의 제작판매 95
3대째의 비서역 송도욱  98
잠시 숨을 돌리며  99
간부 체포 사건의 진상  100
문선명의 체포  100
조사의 촛점은 혼음관계  103
간부 5인을 기소  105
수사의 손길에서 도피  107

제4장 희생당한 여인들   109
대공로자 옥상현의 말로  111
머리카락으로 짠 양말  112
주인 우하섭 장로의 탄식  113
문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재산도  115
퇴원해도 갈곳이 없다  117
박봉식과 오명춘  121
부부가 문선명에게 헌신  121
남편 송도욱의 불륜  122
탁월한 인격자 박봉식  123
큰돈을 바친 오명춘  124
식모살이라도 해서 살아야지  126
김종화 (金鐘和) 의 눈물과 분노  128
문용명 (文龍明) 을 죽이고 싶다  128
6마리아의 비극  130
유부녀 여섯을 때았다  130
신정순, 이순철, 오명춘, 김안실, 유신희, 임영신  131
6마리아 아니라 60마리아  137
연인을 빼앗기고 살해되고  140
김원덕 (金元德) 이란 사나이  140
신비적인 낭만  141
아름다운 부인과 진수성찬  143
이상한 예지능력  144
제자의 연인을 빼앗은 문선명 (文鮮明)  146

제5장 재림메시아의 정체  149
원리와 실천의 모순  151
나의 수기는 진실의 기록  151
아무것도 모르는 신자들  152
문선명이 무슨 메시아  154
정득은 (丁得恩) 과의 이상함 관계  157
체포도 당연한 섹스포교  159
색과 욕과 돈과  162
남편의 돈을 훔쳐 오라  162
재 죄없는 아이들이 죽는가  164
복귀 (泌購) 라고 하는 미명으로 섹스  165
않은 가정이 파괴 되다  167
여자의 원한은 여름에도 서리를  169
처녀에게 낳게한 아이들  170
배신한자는 누구냐  173
문선명의 소개장  173
악착같은 노동력착취  174
문의 아들 흥진과 효진  176
삭제된 창시자의 이름  178
사건이 생겼다 바로 피하라  180
배신자는 문선명이다  182

제6장 진짜 사탄은 문선명이다  185
산증인의 이용가치  187
재혼서 신천지로  187
병으로 쓰러지다  189
오래간만에 만난 간부  189
통일교회 창림의 산증인  191
문선명의 거린말과 일본의 신자  193
원리는 김백문 (金百文) 의것 도용  195
이복형제 결혼 의혹  197
원리대로 실천한 김덕진 (金德振)  198
36가정의 역할  200
속출한 재림메시아들의 대책  200
희생된 공로자  204
문선명보다 뛰어난 인격자 – 유효원  204
재정을 이룩한 실업가 – 유효민  206
화제의 다보탑을 수출한 일신석재사장 – 유효영  208
문선명의 부정과 범죄  209
김영희의 비참  211
또 한사람의 어머니  214
나의 부끄러운 체험  215
붉은용 (龍) 이 세상을 미혹  216

제7장 증언 – 우리들이 체험한 사실  219
유효민 – 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221
유신희 – 6마리아의 한사람 이었다 227
김덕진 – 섹스릴레이 실천자 232

참고사항:  *는 가명표시 입니다.


6

머 리 말

나는 1985년부터 이 원고를 쓰기 시작 하였다.
「야록. 통일교회사」라고 표제도 정했다. 일본식으로 말한다면 우선「도큐메토. 통일교회사」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목적은 문선형과13년간에 걸쳐 행동을 함께 해 온 기록을 분명하게 기록해서 그 허상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이다.
재림메시아를 자칭하는 문선명이 아마도 종교인에게 있을 수 없는행위를 통일교회 창설의 전후 나는 가장 잘알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도대체 신변에 많은 여성을 두어 시중들게 하며 복귀원리를 명목으로 유부녀이건 학생이건 닥치는 대로 섹스를 해서 임신시킨 처녀를 일본으로 밀항 시켜서 아기를 낳게한 사실등 인간으로서 용서 받을 일이아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문선명의 수제자였고 결과적으로 그녀들이 행복 해 주었으면 하고 원리의 가르침을 믿고 지켜 볼수 밖에 없었다.
문선명의 악행을 지나치게 알고난후 나는 1962년 그의 비열한 배신으로 인연을 끊고 탈회 하였다.
그리고 거의 20년후 이제서야 대간부가 된 당시의 동료나 부하의 요청에 따라 본부교회에 발길을 다시 옮겨 놓게 되었다. 교회측의 기대는 나를 귀중한 옛날의 산 증인으로서 이용 하는 것. 다만 일정한 범위안에서만 신자들 앞에서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옥중에서 남하할때의 문선명의 고생한 이야기등)
나에게도 숨겨진 목적이 있었다.
통일교회의 그 이후와 고락을 함께했던 많은 신자들의 소식을 알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알아낸 것이 글속에서 서술한 바와 같은 비극 투성이었다.
원리를 믿고 문선명에게 따르면 행복하게 된다던 여자식구들은 내일 먹을 양식도 궁핍하고 어려워서 산 시체와 같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문선명이 때문에 가련한 고목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원고에 착수한 동기는 거기에 있으며 그녀들 또한 하루라도 빨리 출판을 재촉하였고, 내가 아는 바로는 젊었을 시절의 그녀들은 모두 풍부한 재산가로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문선명이 달러 붙은 것이지만 정조를 빼앗기고, 재산을 잃고, 가족과 흩어지고, 아이들과도 소원해진 현재의 그녀들은 홀로 쓸쓸한 노후를 보내는 길 밖에없다.
그 원인과 과정 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사실을 공포할 의무와 책임을 통감하게 되었다.
유서 대신에 생명을 걸고 써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제 새삼 생명도 아깝지는 않지만 출판을 실현하기 전에 죽음을 당해서는 목적 수행이 어렵다. 그러한 이유로 원고를 조금씩 써 놓아 가면서 나는 때가 올 것을 기다리며 바라고 있었다.
때는 흐르고 착실한 크리스관의 장로로서 인망있는 김영삼 대통령이탄생했다. 김대통령의 용단으로 지금 한국은 눈부신 속도로 정계는 물론 각계각층의 정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도 때에 오랜 세월의 염원이 이루어져서 나는 정말로 기뻐하고 있다.
출판에 있어서는 6000매에 이르는 원고 정리 분류, 번역, 집필, 편집과 대단한 작업이 계속 되였는데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돌린다.
나는 이책의 인세를 문선명에게 희생이 되어 노후로 고생하는사람들의 구제에 힘이 되어 진다면 기부할 작정이다.
끝으로 진정한 행복은 멀어지고 원한을 풀지 못하고 돌아가신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희생자」들의 영령에게 깊은 기도를올리고 싶습니다.

1993.10
박 정화


17

제1장

옥중에서 만난 사나이


▲ 문선명교주와 저자


재림 메시아로 믿고

나는 북한의 내무성에 소속된 제 2여단 제 1대대 제 3중대장으로서 1947년 5월부터 황해도 해주에서 철도보안대의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해 12월 1일 같은 여단의 제 2대대장으로 승진발령을 받아 황해도 사리원의 큰 기지로 옮겼다.
일본의 조선통치시대에 만주 신경(현재 중국)의 공업전문학교 토목과를 졸업한 나는 만주국 관사(길림성)를 거쳐 일본군의 공병대 중위로서 중대장으로 근무한 경험도 있고 북한에서는 말하자면 엘리트로서 장래가 촉망되어 있었다.
그런데 착임해서 얼마 않되는 5월 7일 엉뚱한 사건이 발생했다. 같은 제 2대대의 제 3중대장으로서 황해도 신막에 근무하고 있던 허정이란 사람이 엉뚱하게도 군의 차량으로 상인들의 물자를 수송해 주고 돈을 받기도 하고 여성들의 모발등 북의 상품을 남쪽 한국측에 파는 암매상에 협력하고 있던 사실이 발각된 것이다.
체포된 허정은 2월 2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고 또 대대장인 나는 부하의 부정 행위에 대한 감독 불충분이란 것으로 책임을 물어 직무태만죄로 징역 3년형에 선고 되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평양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흥남 특별 노무자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1949년 2월 2일 35세 때의 일이다.

흥남 특별 노무자 수용소
이송된 우리들 약 100명의 죄수들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2인1조로 팔목을 툴여서 흡사 소나 돼지처럼 화물열차에 쓸어 넣어졌다.
그로부터 24시간 멈쳤다가는 달리고 달렸다가는 멈추는 화물차속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한잠도 못잔 채 날이 밝을 무렵인 새벽 4시경에 학교운동장 같은 광장에 도착하였다. 끄집어 내려서 주변을 보니까 무장한 간수나 경찰관들이 사방을 포위하고 있어서 개미새끼
도 빠저나가지 못할 정도로 엄중한 경비를 하고 있었다.
이곳이 흥남의 특별노무자수용소, 속칭 흥남감옥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였다. 울던 아이도 울음을 멈춘다는 강제노동의 지옥인 것이다. 우리들은 먼저 들어와 있던 죄수들과 함께 좁은 방에 32명씩 동거하도록 인원수가 할당되어 집어 넣어졌다. 7시가 되니까 조반이 나왔다. 콩, 좁쌀, 보리쌀, 옥수수 등을 뭉친 조그만 주먹밥인데 금방이라도 흐트러질 것 처럼 엉성했다. 이가 엉망으로 빠진 그릇에 국이 담겨져 나왔는데 두 서너 조각의 미역이 둥둥 뜬 소금기가 좀 있는 그런 국이었다. 어제부터 한방울의 물도 입에 대지 못한 채로 흔들림 속에 담겨온 몸 동아리는 지치고 지쳐서 속은 공복인데도 식욕이 나지 않는다. 장차 다가올 일들을 생각하며 멍청하니 있자니까 옆의 사내가 기운이없구먼 못먹겠으면 내나 먹지 하며 내 밥에 손을 대더니 순식간에 먹어 치워 버린다. 깜짝 쉴 사이도 없을  만큼 감옥의 엄격함을 실감케 하는 기분이 들었다.
8시 “전원노동이다” 하는 간수의 큰소리에 떠밀려서 운동장으로 나오니까 1,500명 정도의 죄수들이 집합되어서 정문을 향해서 정령하고 정좌하게 하였다. 소좌의 계급장을 단 소장이 이송되어 온 신입 죄수들에게 소대의 규칙등 수용소의 작업에 대한 설명과 주의사항을 들려주고는 전원 출발이 라는 것이다.
죄수들은 두사람씩 손을 묶고 4열로 나란히 정면에서 부터 나가기 시작하였다. 정면 좌우에는 간수가 줄지어 늘어싫고 완장을 단 “총반장” 이 죄수들을 점검 인수하였다. 두사람씩 손을 묶게 하는 것은 역시 도망방지 때문인 것이다.
수용소에서 조선 질소 비료 주식회사(구 일본질소) 흥남 공장까지는 약 4킬로의 거리가 된다. 이날부터 비가 오나 눈이 쌓이거나 우리들은 매일 걸어서 감옥과 공장을 왕복하게 된 것이다.
우리들은 횐 암모니아비료 가루가 산처럼 괌인 곳에서 10인 1조가 되어 비료포대의 가마니
에 하루, 1,300포대를퍼 넣어야 하는 책임량(노루마)을 할당받았다. 산더미 같은 비료앞에 저울이 놓여 있고 공장측의 검량원이 중량을 달기 위해서 앉아 있다.


▲ 특별 노무자 수용소 (흥남비료 공장)

작업의 순서는 이러하였다. 우선 한사람이 빈 가마니를 잡고 아구리를 벌리면 두사람이 삽으로 비료를 두번 정도 퍼 넣는다. 그래서 40킬로가 되면은 다른 한사람이 가마니를 저울대에서 내려놓고 남은 6인이 그것을 운반해다가 새끼로 음어서 포장을 한다. 10인 1조의 작업이므로 한 사람이라도 태만하거나 서투르거나 하면 조 전체의 책임량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전원이 반장한테 된통 혼나게 되므로 10인은 서로서로 격려하기도 하고 감시 하기도 하는 것이다. 눈깜벅거릴 틈도 없을 정도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20
작업은 아침 8시에 시작되고 낮참 쉬는게 30분 저녘 5시에 끝나는데 매일 8시간반의 노동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극심한 노동을 한일도없었고, 6개월간이나 평양에서 구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서 이 중노동을 참아 낸다고 하는 것은 여간 큰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감옥생활에서 다른 죄수들에게 여러가지 끔찍한 가혹행위를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버티어 내기 때문에 하루의 일을 마치면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별하기 조차 어려운 상태로 되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내 의지로 똑똑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이래서 저녁때가 되면 하루의 작업량을 검사하고 인수를 점검한 후에 아침이 왔을 때와 똑같이 두사람씩 손을 매고 4열로 늘어서서 4키로나 되는 수용소길을 걸어서 돌아온다.
그때는 제발로 걸은 것인지 어떤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문에서 재차 인수점검을 한후에 운동장에 정열해서 정리하고 나면 또 주의사항이 설명된다. 그리고 면회를 허락받은 사람들이 면회실로 간 후에야 각자 제방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불과 4톨평정도의 좁은 방에 32명이나 쓸어 넣어 하루종일 작업을 해서 땀 투성이가 된 몸뚱이를 씻지도 못하고 고단하다고 두러 누울수도 없는 상태로 그대로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야 말로 진짜 감옥생활이란 것을 통감하게 하였다.
저녁밥은 조반과 같이 여러가지 잡곡이 섞인 주먹밥 한 덩어리와 소금기가 있는 국물 한그릇뿐, 식욕이라곤 전혀 없지만 서도 내일의 작업을 생각하면 먹어 두는 수 밖에 도리가 없다. 같은 방의 동배들도 지쳐 있음인지 모두 험악한 얼굴들이다. 죄명 또한 가지가지였다. 취침은 밤 10시이지만 좁은 방에서 머리와 다리를 서로 어긋매겨 잔다. 서로의 다리가 옆 사람의 머리나배위에 걸쳐지는 일도 있었지만 32인이 억지로 옆으로 누울 수가 있었다. 변기는 방의 구석에 놓여 있었는데 아침이 되면 일제히 서로 쓰려고 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대소동이 벌어진다.
이리하여 중노동에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무사히 출소할 때까지는 최선을 다하기로 및장을 정한 나이지만 어느새 손과 발에는 군살이 박혀있었다. 나는 비료포대를 새끼줄로 끓어내는 요령만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못해서 큰 곤욕을 치렀다. 다른 사람들이 두포대를 묶을 동안에 나는 한포대도 제대로 못 묶는 때도 있었다. 동료들의 싸늘한 눈길을 느끼며 책임량을 다하지 못해서 폐를 끼친 때가 제일 괴로웠다.
그리고 더욱 더 참을수 없는 것은 배가 고파 죽을지경인 것이다 감방의 다락에는 면회가 있었던 사람들이 차입받은 미수가루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훔쳐 먹으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한들 여기까지 와서 도둑질을 해서야 되겠나 하는 생각으로 자제하였다.
배가 고파서 잠을 이를 수가 없을 때 미수가루 봉지를 쳐다 본체로 밤을 새운 일도 여러번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일어나니까 어제 밤에 미수가루를 도적맞았다고 모두들 떠들석 하였다. 훔친자가 눈에 띄면 온 방안의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고 자루 돌림으로 패댔다. 이러한 꼴은 징역생활이라고 하기 보다 아귀지옥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30인이 넘게 쳐 박혀진 방안에서는 몇일에 한번씩 그야말로 큰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것은 쳐 박혀진 인간최후의 순간이 것이다. 배만 앙상하게 남아서 숨도 제대로 못쉬는 상태로 쇠약한 사람이 한 주먹의 밥을 소중하게 움켜 편채로 속에 들어 있는 콩알을 집어서 넣으려는 순간 죽는 사람도 있었다. 옛말에 자식이 죽은 때나 부모가 돌아가신 때보다도 더 서럽고 매정한 것은 배가 고픈 때다 라는 말이 있다. 먹는다고 하는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나는 몸소 절실히 체험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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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되박의 미수가루는 양복한벌과 맞바꿀 정도로 귀중품이었다. 매월 집에서 면회를 와서 차입을 받는 사람은 그런대로 견디어 나가는데 면회나 차입이 전혀 없는 사람의 경우는 언제라도 죽음과 직면해 있는 상황이었다.

죄수번호 596. 문용명 (文龍明)
나의 작업은 여전히 서틀러서 차마 볼수없던지 조장이 가마니의 아구리를 벌리는 일이나 삽으로 비료를 가마니에 퍼 놓는 일로 돌려 주었으나 어느 것이고 제대로 익숙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40키로의 비료가 든 가마니의 짐 꾸리기로 악전고투하고 있는 내 옆에 10인의 조원 가운데서도 훨씬 건장해 보이는 30세가량의 사나이가 와서 “가르쳐 들이지요”하고 말했다. 그는 익숙한 솜씨로 자기의 일거리를 가볍게 해치우면서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더욱 일에 익숙해져서 훌릉하게 해 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다행히도 건강해서 힘은 있었으므로 몇일 동안 계속해서 가르쳐 주는 바람에 그럭저럭 한사람 몫의 작업 책임량을 해낼 수가있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다.
그는 나보다 반년정도 먼저 흥남감옥으로 후송되어 온 듯해서 소내의 사정이나 물물교환으로 살아가는 지혜등 여러가지를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지옥에서 부처님 만나기란 바로 이런 것인가. 나는 괴롭고 쓰라린감옥의 중노동속에서 비로서 따뜻한 사람의 마음씨에 접하게 되었고 절망속에서 어렴풋이 희망이 보이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과는 방이 달랐으므로 작업이 끝나고 만원이 된 방으로 돌아오면 공복의 쓰
라림과 잠을 푹 자지 못하는 괴로움이 있었다. 그래도 아침이 되어 비료공장의 일터로 나가면 그 사람과 같이 일을 할 수있다. 지옥과 같은 곳에서나마 서로간에 마음을 주고 받을 수가있게 되었으므로 한 시간이라도 빨리 일터로 나가는 것이 기다려지곤 했다.
아침 8시 운동장으로 나가면 나는 서둘러서 그 사람을 찾아서 그뒤에 앉는다. 점검이 끝나면 그사람과 2인 1조가 되어 비료공장까지 손을 묶고 걸을수가 있다. 지금까지는 비오는 날 같은 때는 그야말로 죄수생활의 비참함을 절실히 느끼게 하는 도보행진이었는데 어느새 나에게는 그 사람과 매일 아침 만나서 함께 일을 하는 것이 옥중에서 그나마 즐거운 일과였다.
이렇게 20일 정도 지난 어느날 초반 회색 옷에 갓을 쓴 백발노인이꿈속에 나타나 나의 이름을 부르며, “네가 매일 함께 도와주고 거둬주는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고 물었다.
나는 “그 분은 무척 친절하고 좋은 분이므로 함께 지내고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노인은 “그분은 네가 어릴때부터 배워 온 성경에 장차 이세상에 오신다고 가르쳐 온 재림주(메시아)이시다” 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서 사방을 둘러 보았으나 깊은 잠에 떨어진 동료들이 있을 뿐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이 겟세마네동산에서 최후의 기도를 하고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지워져서 돌아가신 후 삼일 후에 부활되어 40일간 이곳 저곳에서 재림하였다. 그리고 감람산(성경에 나오는 산)에서 여러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실 때 예수님은 “너희들은 어찌하여 하늘을 처다 보는가, 나는 이처럼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이 머지 않아또 재림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재림주라고 하는 꿈이 마음에 걸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도록 생각하고 있었으나 복잡한 심경으로 조반을 마쳤다. 나는 어느 때와 같이 운동장으로 나아가 그사람 뒤에 앉았다. 그리고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해서 무슨 일인가를 물어 보고자 하였다. 
그런데 내가 말을 걸기 전에 그가 별안간 돌아보면서
“간밤에 꿈을 꾸었지요 꿈속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말 하던가요” 라고 묻는 것이다.
어떻게 그가 알고 있는 것민지 이상 하였지만 나는 “재림주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그때부터 이 사람은 29세로 나이로는 7년이나 손아래 이었지만 반드시 “선생” 이라고 존경해서 부르게 되었으며 그 사람도 “정화” 라고 나의 이름을 불러서 점점 친근감을 느끼면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 사람이 죄수번호 596을 단 문용명 이었다.


총반장으로 임명되고
그로부터 15일정도 지난 어느날 아침 집회에서 “919번 소장실로 오도록” 호출되었다.
919번은 나의 죄수번호이다. 무슨 일일까? 나는 겁에 질린 채 가보니까 소장은 나를 쳐다보고 “어제 총반장이 만기로 출옥하였으므로 지금부터는 네가 전죄수의 총반장으로 복무하라.”
이곳에는 1,500명의 죄수가 수용되어 있다. 10인에 1인, 조장 18을 파악하는 것이 반장, 총반장은 15인의 반장을 소관하고 매일의 작업배치나 분담을 자치적으로 결정하는 등 전죄수의 대표로서 크나 큰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아니된다.
소장은 죄수전원의 경력 이나 기내기록을 본 후에 전문학교 출신으로서 군의 대대장을 한일이 있는 나를 골라 “후임은 너밖에 없다” 고 말하는 것이다. 이 대역을 맡을것인가 말것인가를 망서렀으나 문선생의 권고도 있고 해서 맡기로 하였다.
총반장이 되니까 여러가지 것을 알게 되었다. 죄수들이 가장 바라는 작업은 취사이고, 다음은 수용소내의 잡역, 선반공장 선반공으로 이어지고 끝으로 비료공장 순이다. 선반공도 중노동이지만, 일하면서 철가공의 기술을 취득할 수 있다고 하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비료공
.장에서의 가마니 작업은 오직 힘이들 뿐이고 아무것도 이점이 없는 최저 최악의 중노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일 3식이란 작으나마 주먹밥 한덩어리와 소금국 한그릇만으로는 몸둥이가 견델 수가 없는 것이다. 조악한 식사때문에 영양실조자가 속출하고 과로와 허기로 한달이면 100명 정도가 죽어갔다.
단순하게 계산한다면 1년 남짓해서 전감한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흥남수용소에는 그 보충을 위해서 매월 100명 정도의 죄수가 각지의 형무소에서 후송되어 오고 있었다. 총반장이 되고 나면 사내에서는 자유가 꽤 통하므로 기회를 엿보아서는 문선생을 찾아가 잡담을 하기도 하고 되도록이면 편안한 작업으로 회부될 수 있도록 손을 쓰기도하였다. 어쨋거나 꿈속의 노인에게서 계시를 받아 내가 꿈에 본것을 먼저 알고 있던 이상스런 힘에 놀란 나에게는 문선생은 바로 재림주라고, 나는 믿게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반장인 주흥식이 묘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담당의 죄수가 병이 들었는데 내일이 어떨지 알수없을 정도의 중태인데 주반장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 죄수는 일본의 식민지시대에 큰 화물선의 선장으로서 전세계를 누비고 다딘는데, 전쟁이 끝 나고서는 고향인 여수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에 있는 친척을 방문했을때 공교롭게도 죄를 범해서 체포 투옥되게 되 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가 죽기 직전에 비단보에 그려진 지도와 무엇인가 영문으로 쓴 종이 쪽지를 주반장에게 건네 주었다. 얼마 안있어 그는 죽고 말았는데 영문을 읽을줄 모르는 주반장은 그후 영문을 아는 반공사상의 죄수중 김진수목사에게 번역을 해달래서 그것을 받았다. 그 종이쪽지에는 이와 같은 내용이 쓰여져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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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뒤편에 있는 묘지 가운데 이런이들의 무덤이 있다. 그 앞에서 세번째 어린이 무덤속에 시가 수억원의 보석이 들어있는 상자를 자기가 묻었다. 이제 나의 명은 다한것 같으니까 주반장에게 들이는 것이니 남쪽에 갈 기회가 있거든 꼭 찾아내시오”
주반장은 이와같은 이야기를 하고 나서 “총반장은 나보다 먼저 출소할 것이니까꼭 남쪽의 여수에 가서 그것을 찾아내시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나에게 말했다. 재미있는 이야기 였으므로 나는 그대로 문선생에게 전했다.
나는 그후 남한에 살게 되었으나 여수는 가본일도 없고 또 이야기는 깨끗이 잊어 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2년후의 부산시대, 문선생은 친구와 둘이서 부산에서 연락선을 타고 여수로 가서 필연적으로 찾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묘지장소는 알아 냈으나 가장 중요한 아이의 묘는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문선생은 여수에 갔던 일조차 나에겐 말하지 않았다.
훨씬 뒤에서야 이 사실을 알았을때 나는 진짜 재림주라면 보석상자 정도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문선생의 정체에 대해서 새로운 의혹을 갖게하는 자료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재림메시아, 문선명의 정체…” 그것만이 이 책의 주체이며, 나의 고백의 주안인 것이지만 이무렵 무지한 나는 그저 오로지 문용명을 존경하고 믿고 있었다.

해와는 왜 하반신을 감추었나
총반장의 완장을 단 나는 작업장으로 가는 죄수의 점검과 죄수들의 작업 배치를 정한 후에는 대수로운 일거리도 없이 자유롭게 지낼수가 있었다. 그래서 빈 가마니를 쌓아 놓은 창구로 문선생을 불러내서 그에게서 종교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러나 문선생의 이야기는 유아세례를 받아서 젊었을때에는 교회 집사로도 일했고, 조금은 성경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 할수 있는 나에게도 이해는 커념 대단히 반발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많았다.
예를들면 세례요한은 들녘 에서 가죽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어가면서 수도를 했고 “천국이 가까와오니까 회개하라” 고 말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은 자기의 책임 분담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을 잘리어 죽음을 당한것이다 라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기독교에서는 세례요한은 아주 훌릉한 인물로 가르치고 있는 만큼 나는 강한 충격을 받았다.
더욱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도 책임을 다 할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본래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처지는 아니었다” 등 등으로 말한다.
내가 더욱 더 충격 받을 이야기를 들은것은 잊어 지지도 않는 1950년 3월 29일 토요일의 일이 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와서 여느때처럼 두사람씩 손을 묶은 죄수들 1,500명을 물에 빠진 생쥐처럼 흠뻑 젖어 오직 땅만 보고 비료공장으로 서둘렀다. 도착한 후에 총반장인 나는 아마 10분정도 전원의 점검과 작업배치를 정했다.
그무렵 문선생에게는 빈 가마니에 짚을 넣어두는 일로 병자나 노인들이 할 수있는 손쉬운 작업을 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그곳으로 가서 “총반장으로서 볼일이 있으니 잠간만 오세요” 라고 불러내서 조용한 창고 속의 빈 가마니가 산더미처럼 쌓인 그 위에 올라가서 둘이서 마주보고 앉았다.
총반장에게는 작업장에서도 이러한 자유가 인정되어 있어서 간수나 죄수도 이의를 하는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몇 시간이라도 이야기 할수가 있었다.
사회질서 문란죄로 5년의 형을 받고 복역중인 문용명은 죄수번흐596, 부하 잘못으로 인한 책임을 물어 직무태만죄로 징역 3년인 나는 죄수번호 919, 두사람의 죄수는 서로 마주보고 596은 이야기를 하고 919는 열심히 듣기도 하고 질문도 해가며 중요한 대목은 메모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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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의 이야기는 성경의 “창세기” 부분이었다. 창세기의 요지는 6000년전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들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사람으로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부르며 에덴의 동산에 살게 하였다. 그리고 걸맞는 반려를 만들기 위해서 아담이 자고 있을 때 아담의 갈빗대 한개를 뽑아서 여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해와이다.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에덴동산의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만은 따 먹어서는 안된다고 명하였으나 뱀이 해와를 꼬였기 때문에 해와는 드디어 금단의 나무 열매를 먹고 남편인아담에게도 권해서 먹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금단의 나무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발견된 때에는 부끄러운듯 무화과의 잎으로 하체를 가리우고 있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고 해와를 만든 목적은 해와가 성숙하면 이세상에 죄없는 자손을 번식 시키려고 그랬던 것인데, 하나님을 배반한 두 사람은 얼마 안돼서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죄를 범하고 더럽혀진 아담은 땀 흘러 일하지 않으면 살아 갈수 없게 되었고, 해와는 해산하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가인과 아벨의 형제가 태어났는데 얼마 안가서 형인 가인은 동생인 아벨을 죽이게 되어 이 세상에 처음으로 죄인이 된 것이다.
이상이 성경에 씌어져 있는 것이고 우리들에게 가르쳐 온 해석인 것이다.
그런데 문선생은 “성경의 이러한 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 이라고 하는 것이다. 전세계의 크리스챤들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문선생의 해석은 이러하다. 해와를 꾀인 뱀이란 천사장 루시엘의 이름인데 루시엘이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감언으로 미 성숙한 해와를 유혹해서 금단의 나무 열매를 따먹게 한 것이다. 말하자면 루시엘은 해와와 섹스를 한것이다.
그리고 처녀성을 범행당한 해와는 하나님께 발각되기 전에 사탄의 피로 더럽혀진 몸 그대로 남편인 아담과도 성교를 했다. 지금까지는 금지 되었던 실과를 따 먹은것이 죄가 되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들켰을 때 왜 해와는 무화과의 잎으로 하반신을 가리운 것일까?
사람은 몸에 상처가 나면 상처에 반창고 같은 것을 붙여서 아물게 하는데 그것과 같은 논리로 아담과 해와는 하나님이 금지시킨 성행위을 하고 깨끗했을 하반신에 상처가 생겨 그래서 무화과의 잎으로 그 부분을 가리운 것이다 해와는 그패 까지 나체로 있어도 부끄러움을 모르지 않았던가.
그것은 말하자면 하반신의 성기부분으로 성행위를 한 것이 원인이 되어 그 부분에 죄가 있으니까 하반신을 가리운 것이다.
지금도 남자가 여자와 성행위를 하고자 노력하며 만족한 성행위가 되면 “어디어디의 처녀(부인)를 따 먹었다” 고 표현 하는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랑 신부가 결흔식을 올리고 정정당당하게 첫날밤을 지내도 다음날 가족들 앞에 모양을 나타낼때 어던지 모르게 마음속에 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것이 일반적이다.
이것은 6천년 전에 천사장 루시엘이 아직 성숙되지 않은 처녀인 해와와 성행위를 할 때에 “색큼” 함을 느끼게 되는 것도 미숙한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성행위를 했기 때문이다.
미숙한 과실을 따 먹으면 색큼한 맛이 나는 것도 미숙한 해와와 천사장 루시엘이 성행위를 함으로서 “색큼” 함을 느낀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은 죄없는 인간을 세상에 번식시키려고 하였는데 천사장 루시엘 때문에 그 목적을 방해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가인이 그의 동생인 아벨을 죽임으로서 이 세상에 죄인의 번식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이것을 절대로 방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죄악이 가득해 있던 소돔과 고모라에는 불로 심판하고 노아때에는 홍수로 심판하였다. 그래도 죄 악으로 가득한 인간을 구제할 수는 없었으므로 유대 땅에 2천년전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예수를 탄생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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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예수를 이 세상에 탄생케 한 목적은 그 4천년전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인간세계를 창조 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예수를 제2의 아담으로서 탄생시켜, 제1의 아담을 통해서 달성하려고 했던 목적을 실현 시키고자 한 때문이다.

예수와 6인의 여인들
그리고 예수는 3십년간 요셉의 집에서 목수일을 하면서 켰고, 30세가 되어서 예수는 구세주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예수는 12 제자를 골라 제2의 아담으로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케 하기 위해서 우선,
첫째로 자기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성행위를 해서 제1아담인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겼던것을 되찾아서 복귀섭리(復歸攝理)를 달성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와같은 하늘의 섭리를 알지 못해서 육신의 자식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아서 예수와성교할 기회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예수가 행한 기적은 가나안 잔치집에 가서 결혼 축하를 하기 위해서 어머니인 마리아와 함께 가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것이다.
그 집의 술이 없어졌으므로 어머니 마리아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예수와 의논하였다. 말하자면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수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에게 부탁한것이다.
그때 예수는 마리아에게 “여인이여, 당신은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요” 라고 말했다. 예수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성행위 할 생각은 전혀 없이 이웃집의 잔치집에서 포도주를 만들것만을 원하였으므로 정말로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생각으로 말 한것이다.
성모마리아가 예수와 성교를 한다고 하는 것은 제1의 아담인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긴 해와를 되돌려 빼앗아 온다고 하는 복귀의 원리인 것이다.
말하자면 마리아가 모자협조(모자간의 성교)를 하지 않았으므로 예수가 순혈을 이어 받을수가 없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후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 자매를 대단히 사랑하였고, 그녀들도 예수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막달라 마라아와 결혼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제자인가롯 유다의 연인으로서 곧 결혼할 사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인 예수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 하였으므로 유다는 질투하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는 막달라 마리아의 매제인 마르다 마리아와 유다를 결혼시키고, 자기는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유다는 예수에게 반역해서 예수를 로마의 병정에게 은화30냥에 몰래 팔아 넘기게 되었는데 실은 돈이 욕심이 나서 판것이 아니라 자기의 여인을 예수에게 빼앗긴것을 질투해서 판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데리고 각지를 돌고 있을때 일행은 수가촌이라는동네에 이르러 제자들과 먹을것을 찾고 있었다. 그사이 예수는 고단해서 우물가에 앉아서 쉬고 있을때 사마리아의 여인이 물을 뜨려고 왔다.
예수는 이 여인에게 “당신의 남편을 데리고 오시오” 라고 말했다.
여인이 대답이 없음으로 예수는 “당신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어서 대답을 못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물을 한잔 청하고 채차 말했다.
“당신이 나에게 주는 물을 내가 마시면 또 목이 마른다.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물은 당신속에서 생수와 같이 영원히 흐르게 된다.” (주=성경과는 역순이지 만 문선명의 이야기대로)
예수는 이 사마리아의 여인과 성교를 해서 복귀섭리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예수의 의도를 알지 못하는 제자들이 협력하지 않았기때문에 실현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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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느때 세리와 바리새인의 사람들(성경에는 세리와 바리새인의사람이 제일 악인으로 되어 있는듯 하다) 이 간통한 여인을 예수앞에 데려왔다. 예수가 “이 여인을 용서해 주라” 고 말하면 모세의 계율에 간통한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으므로 모세의 계율에 상반되는 것이되고, 또 “돌로 쳐 죽이라” 고 말하면 예수가 언제고 “죄 있는 자가 있거든 일곱번씩 칠십번이라도 용서하라” 고 가르쳤던 말이 거짓이 된다.
참으로 거북살스런 문제로서 대답하기가 난감한 것이었는데 이때 예수는 아무 말도하지 않고 땅에 글자를 썼다. 사람들이 다가가서 보니까 거기에는
“누구든지 자기에게 죄없는 자가 있거든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 고 쓰여 있었다.
모여있던 많은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 죄를 지고 있었으므로 하나 둘 다 사라지고 예수와 여인만이 남았다.
거기서 예수는 여인에게 말했다.
“나도 당신을 용서하는 것이니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도록 하라” 이때에도 또 예수는 복귀섭리에 따라 이 여인과 성교를 해야만 했었는데도 실현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음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나병환자가 있는 시몬의 집에 갔을 때의 일, 모두들 식사를 하고 있을때 한 여인이 귀중한 향유가 든 항아리를 가지고 와서 감동의 눈물로 예수의 발을 적시었다. 여자는 머리털로 발의 눈물을 밖고나서 예수의 발위에 기름을 부었다.
제자들은 “어째서 귀중한 기름을 그렇게 함부로 쓰는가 그것을 많은 돈을 받고 판다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쓸수 있을 테낀데”라고 그여인을 비난하였다.
예수는 “그 여인을 책망하는 것은 그만해라 그 여인은 나에게 대단히 중요한 것을 해 주었으니까”라고 말했다.
예수는 이 여인과 성교를 해서 복귀섭리를 실현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이때에도 또 제자들이 협력하지 않았으므로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질머지고 십자가에서 죽어 갔으므로서 그 피의 댓가로 죄인이 깨끗하게 되어 구원한다고 하는것처럼 모두 믿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창조의 이상을 옳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제2의 아담으로서 이세상에 예수를 탄생시킨 것은 제 1의 아담이 천사장 루시엘에게 빼앗긴 해와를 도로 찾아서 본래대로 돌려 놓기 위한 것이고 요컨대 복귀섭리를 실현하는 사명을 달성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가 복귀섭리를 위해서 이세상에 탄생 한것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예수가 성모마리아와 최초의 성교를 한다고 하는 죄없는 피를 전하게 되기 위한 중요한 의식의 챤스를 예수에게 주지 않았다.
첫째로 필요한 “모자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서 예수는 이상에 태어났어도 복귀섭리를 다하지 못하였고 결흔조차 하지 못한 동안에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고, 하늘로 올라갔다.
예수는 재림을 약속한 최후의 기도때에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한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십시요 그러나 아버지의 뜻에 따르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으나 이것은 죽는것을 두려워 해서가 아니라 제2의 아담으로서 이 세상에 와 빼앗긴 해와를 되돌려 받지 못한 채로 어머니들에게 복귀섭리의 실천(성교)도 못한채로 죽는것이 허전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즉음으로서 그 피의 대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구원 되였다고 하는 해석이 을다고 한다면 그러한 기도를 했을리가 없다.
예수는 육적으로는 실패하였으나, 영적으로는 승리해서 재림이라고 하는 숙제를 남기게 된 것이다.
그렇다 재림주(메시아)는 어디로 와서 어떻게해서 인간을 구제하는 것인가? 구름을 타고 감람산을 통해서 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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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지 않다 동방에 있는 나라, 횐옷을 입은 사람들이 있고, 4계절이 분명한 나라, 동쪽에서 해가 뜨는 나라, 그것은 우리들의 대한민국이고, 이 나라에 재림하기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재림주는 제3의 아담으로서 이 세상에 태어난다 예수가 하지 못했던 복귀섭리를 이세상에서 실천해서 인간의 6천년간 죄악의 역사를 완전히 깨끗하게 하고 사탄의 피로 더렵혀진 인간의 피를 성스러운 하나님의 피와 교환 함으로서 이 세상을 영원히 죄와는 관계가 없는 세
계로 하는것이 하나님의 참된 뜻을 달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주의 사명으로서 잃어버린 해와의 순결을 되찾아 만인 앞에서 처녀와 “어린양찬치”를 행하고 참된부모 아담과 해와에 의해서 전세계의 인간의 피가 더럽히지 않은 피와 교환되게 되는 것이다.

섹스 릴레이로 혈대교환 (血代交換) 을
부모님이 같은 기독교 신자이신 집안에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교회 집사 까지한 경험이 있는 나는 문선생의 성경해석에는 귀를 의심하고 머리를 갸우뚱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반면 꿈속에서 “문선생이야 말로 재림의 메시아다”라고 하는 계시를 받은 나는 반신 반의 하면서도 차츰 그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선생님은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이며, 어떻게 해서 이상의 천국을 완성시켜 나아가실 것입니까?” 라고 물었다.
그것은 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달성하지 못했던 여인들과의 복귀다.
우선 천사장 루시엘의 성교로 인해서 빼앗겼던 것을 그것과 같은 방법으로 남편이 있는 부인 6인 즉 6인의 마리아를 빼앗음으로서 되돌려 놓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것은 복귀섭리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하지 않으면 안될 숙제이고, 목숨을 걸고라도 해내지 않으면 안될 중대한사명인 것이다.
나는 놀랍고도 반발을 느끼면서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남편이 있는 유부녀와 더구나 여섯 사람씩이나 유부녀와 성교를 한다고 하는것은 그 남편에게 죽임을 당할 염려가 많고, 설혹 남편들이 모른다고 하더라도 간통은 하나님이 가르침이신 십계명에 “간음하지 말라” 고 쓰여 있습니다.
또 이나라의 법률에서도 유부녀와 성교하면 간통죄가 됩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수 있습니까?
아니야 걱정할것 없네 머지않아 세상은 극도로 성이 문란해지네 길바닥에 남녀가 천연덕스럽게 성교를 하게 되고 통행인은 그것을 보더라도 지금의 악수하는 정도로 밖에 생각지 않을것이며, 이상스럽게 느낄것도 없게 된다.
또 그무렵이 되면 인간의 심리상태도 달라져서 자기의 처나 연인이 다른 남자와 성교를 하더라도 노한다던지 질투를 하지 않게 된다.
그렇게 되면 복귀원리를 들은 여인들은 복귀를 받고 싶어서(성교를 하고 싶어서)자기들이 자원해서 오게 된다. 그 시기가 오면 재림 메시아는 6인의 유부녀를 마리아로서 남편에게서 빼앗아 더렵혀진 사탄의 피를 정화하기 위해 피를 교환하는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것을 “혈대교환 (血代交換)” (주=말하자면 “피 나눔” 이라고 하는것.후술) 이라고 하는 것인데 복귀의 의식인 성교에는 지금의 사단의 세상과는 달라서 일정한 규정이 있다.
재림메시아가 유부녀의 더렵혀진 사단의 피를 정화하여 혈대교환 (血代交換) 을 하기 위해서 복귀의 의식으로서 행하는 성교는 메시아가 위에서 3회씩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것은 소생, 장성, 완성의 의미가 있다. 말하자면 6마리아와 도합 18회의 성교에 의해서 유부녀들은 마리아로서 환생하는 것이다. 6마리아를 복귀시키면 재림의 메시아는 다음에 성교경험이 없는 처녀를 골라서 해와로 정해 “어린양잔치의식” (정식 결혼) 을 한다. 아담의 대리인 메시아와 해와는 참아버지, 참어머니이며, 그 두사람에게서 태어나는 자손은 영원히 죄가 없는 선한 존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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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세상을 6천년전에 하나님이 창조하려고 하였던 이상의 원점으로 돌려 놓을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 이 세상에는 천사장 루시엘에게 해독을 입은 사단의 피를 받은 인간이 50억인이나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 전부를 ” 혈대교환 (血代交換) “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까?”
최초에 재림 메시아에게 복귀된 여인은 다른 남자의 식구(신자를 말한)와 여자가 2회 위에서 “소생, 장성, 완성” 의 3회에 걸쳐 복귀를 해 줄수가 있다.
복귀를 받은 남자식구는 다른 여자 식구들과 여자가 위에서 2회, 아래에서 1회 성교를 해서 복귀시킨다. 또 그 여자식구가 다른 남자 식구에게 여자가 위에서 2회, 아래에서 1회 성교를 해서 복귀 시킨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넓혀가게 되는 것이다.
다만, 복귀를 받으면 그전에 7년간은 “성별” (성교를 하지 않는 기간) 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복귀를 받을 자격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만큼 7개월간의 성별만으로 가능하며, 그 후에는 훨씬 짧아져서 7일간만의 성별로 남여 서로 복귀를 받을 자격을 주게 될것이다.
나는 거기서 이 세상에는 국적도 언어도 피부색도 이상도 다르다. 이만큼 다수의 사람들이 있고, 한국 뿐이라면 또 몰라도 어떻게 그렇게 될수가 있는것인가” 고 물었다.
문선생은 “복귀섭리(復歸攝理)의조건만 만들어 놓으면 국적, 민족, 언어 따위와는 관계없이 실행할 수 있다” 고 답하고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들은 세계각국에서 동쪽에서 해가 뜨고, 횐옷을 입은 4계절 나라에 재림한 메시아 아래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몰려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진정한 부모 밑에서 온 세계의 인간이 하나의 가족처럼 되어서 국적이나 언어 따위에 관계없이 전세계가 가깝게 된다. 한국인이 아프리카에 가고 싶을 때에는 아프리카의 어디라도 갈수있고, 어느집이고 찾아가서 그집에서 하루고 몇일이고 지낼수 있게 된다.
또 그집에 있는 모든물건을 자기의 물건처럼 사용 할 수도 있다. 양껏 먹고 즐겁게 마셔도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 있는 혹인이 한국에 오더라도 몇일씩이고 묵을수 있고 우리들의 물건을 무엇이던 자기의 물건처럼 쓸수가 있으며, 좋을대로 먹고 마시더라도 누구도 군소리를 할 사람은 없다.
지금까지의 사단의 세상에서는 모든 물자나 돈을 사단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용방법이 틀렸던것 이다.
참 부모와 함께 지내는 식구들은 이 세상의 모든 물건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것이 당연한 것이다. 사단의 세상에 있는 모든 물건이나 돈은 참 부모와 함께 있는 식구들이 가령 그것을 훔쳐서 썼다 하여 그것이 세속의 법률에 걸린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된다.
이것은 본래 하나님 것이었던 물자나 돈을 사단이 탈취해서 썼던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경제적으로 대단한 고통도 없어지고 모든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어서 세계의 어느 곳이라도 갈수있게 된다.
지금 우리들 죄수 1,500인이 하루 온종일 노동해서 겨우 될수있는 일거리도 그때가 되면 한사람이 3시간만 일하면 모두 될수있게 된다. 세상 사람들은 먹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 삼아 3시간 정도만 하면 되게 되는 것 이다.
그리고 알라스카와 같이 추운 지방의 식구들은 하고 싶으면 일년내내 따뜻한 하와이와 같은 경치좋은 곳에 와서 자유롭게 먹고, 마시고, 서로 사랑 할 수가 있다. 만약 그것이 싫증이 나면 4계절이 뚜렷한 한국과 같은 나라에 와서 즐길수가 있다. 또 일본과 같이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 가서 자유롭게 구경하고 생활하고 사랑할 수도 있다. 이러한 시기가 반듯이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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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의 사람들이 참 아담과 참 해와라고 하는 두사람의 부모의 자식이 되어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문선생은 “원화원이상 (圓和園理想)” 이라고 한다.
현재 형무소 안에서 고생하고 있는 처지에서는 그것은 꿈속의 또 꿈과 같은 이야기라서 나는 그저 명청하게 듣고만 있었다. 옥중에서 나는 총반장이란 처지를 이용해서 시간을 벌어 가지고 문선생에게서 몇 주간에 걸쳐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 생각한다면 그로서는 형편이 좋은 전도였고 포교활동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창조원리나 복귀원리는 실은 그가 가르침을 받은 김백문이나 이용도의 이론의 복사판이었을 뿐아니라 몽땅 받아다 파는 식의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훨씬 후에야 알았다.
또 복귀라고 하는 명목의 성행위로 문선생이 얼마나 많은 여성을 불행하게 하였는가, 그자신이 얼마나 음난하고 방자한 성욕에 탐익 하였는가를 이 책속에서 밝혀두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 반면에 사회악이라고 말 할수 있다. 복귀의 진실을 고발하는 나 자신, 실은 문선명의 명령에 따라 많은 여성과 복귀한 사실도 있다.
여하한 이제 한동안 무지했던 나와 문선명의 당시의 관계를 읽어 주십시요.


평양을 소란케 한 이단자

그날도 나는 죄수들과 함께 작업장으로 나가서 작업배치를 한 후에 문션생과 함께 조용한 창고로 가서 빈 가마니가 쌓여 있는 곳에서 둘이 서로 마주 보고 앉아 긴 이야기를 하였다.
오늘은 서울에서 평양까지 오게된 동기와 평양에 와서 무엇을 하였는가 무엇 때문에 사회질서 문란죄라고 하는 죄명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게 되었는가를 들었다.
나의 꿈속에서는 분명하게 문선생은 재림 메시아라고 하는 계시를 받았다. 나의 해석으로는 재림메시아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종말의 날에 심판을 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추수 할때에 잘 익은 곡식은 알뜰히 수확하고, 제때에 여물지 못한 것이나 쭉정이 같은것은 불에 태워 버리는것 처럼, 재림메시아의 심판에 따라 참된 신자들은 하늘로 들려 올라가고, 믿지않은 사람들은 지옥으로 떨어트려 버리는 것이다.
그것이 재림메시아의 사명이라고 성서에서는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문선생과 어떠한 이유로 이러한 감옥에서 이와같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가를 물었다. 그는 긴 시간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최초의 체포 구속
문선생은 서울의 영등포구 상도동에 살고 있을때 김 백문이 라고 하는 사람이 지도하고 있는 이스라엘 수도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김백문의 성경의 원리해석을 배워 나가던 중에 그 원리에 흠뻑 빠저 버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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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중에 하나님으로 부터의 계시를 받아 북한으로 가도록 말이 있었다고 한다.
문선생의 말에 의하면 1946년 6월6일의 일이었다.
그 당시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고 전체가 거의 공산주의로 물들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문선생은 그러한 시기에 처자를 서울에 남겨둔채, 배낭 하나만을 짊어지고, 38선을 넘어서 평양으로 왔다.
평양으로 와서 맨 먼저 정득은 (丁得恩)이란 여인을 만났다. 의기 상통해서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를 받은 평양성을 제2의 예루살렘으로 만들것에 합의하고 서로 협력하기로 하였다. 이때 문선생은 26세, 정득은은 40세정도였다.
두 사람은 평양시 상수구리의 검은다리에 있던 정득은의 집에서 원리를 전도해 나가기로 하였다. 며칠이 채 못가서 이집에는 열성적인 신자들이 10명이 넘게 모여들었다. 여기서 문씨는 처음으로 창조원리에 대해서 강의를 하였다.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알아 차리고 해와를 유혹해서 타락시킨 일, 예수의 모친이었던 마리아가 모자협조(성교)를 하지 않아서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죽게 되었다. 
예수는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것은 아니었으나, 십자가위에서 육체는 죽어 버리고 영혼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된 것이므로 또 재림할 것을 약속한 것이라는등‥‥
이때 모인 신자는 정득은, 옥상현*, 지승도, 정선옥*, 김인주, 김종화등의 여성과 김원필, 정명선, 차상순 등이었다.
문선생이 집회를 열고, 성경해석의 원리를 강의하면 특히 여인들은큰 소리로 울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모양을 보고 근처의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 하였던것 같다.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가 열사람 남짓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면 온 방안의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든가 소리를 지르던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선생에게 말을 시키면 창조원리와 타락원리의 강의 그리고 복귀에 관한 강의를 들으면, 6천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 누구던지 울면서 기도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이와같은 집회가 허용 될리가 없다. 근처의 사람들이나 기성교회의 신자들, 특히 교회의 목사와 장노들은 문선생의소행을 이단시하였다.
이 이상스러운 집회를 하고 있다고 경찰에 고발하였기 때문에 문선생은 평양으로 와서 2개월째인 1946년 8월2일 대동보안서에 체포되어 약 100일간 구속되었다. 그간에 가혹한 고문을 받아 한잠도 못자게 하든가, 식사를 2일도 주지 않는등, 학대를 받었으나 특별한 죄가 없었기 때문에 석방되었다. 그때 문선생은 꽤 쇠약해 있었으나, 신자들의 도움과 한약의 덕분으로회복하였다고 한다.

유부녀와의 결혼소동으로 징역5년
문선생은 그후 경창리에 있는 김종화(金鍾和)라는 열렬한 여신자의집에 머물렀는데, 그녀의 남편인 정명선과 세자녀가 있는 가정이었다.
이집에서 문선생은 복귀원리를 실현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남편이 있는 부인네를 천사장 루시엘이 해와를 빼앗아 성교를 한것과 같이 빼앗아서 하필 남편과 아이들이 옆에 있는 방에서 김종화와 동침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더욱이 문선생은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김종화와 “어린양잔치”(정식결혼)을 하기로 하였다. 신자들은 쌀을 거두어 떡을 만들고 양복과 이불을 만드는 등 푸짐하게 의식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젊은 남자가 매일같이 사람을 모아 놓고는 울면서 기도하다가 큰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며 시끌벅끌하며 밤중까지 떠들석했다. 그위에 남편이나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 지붕밑에서 동거하고 있다. 그것이 이번에는 결혼식을 올린다고 큰 소란을 떨고 있는 것이니까 그 소란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잠자코 있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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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여 1948년 2월 22일 문선생이하 전원이 체포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서 문선생은 사회질서 문란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아 흥남특별노무자수용소로 오게 된것이다.
(6월 20일)
나중에 들은 이야긴데 김종화는 징역 1년의 실형으로 복역하고, 옥상현은 그녀의 집이 상당한 재산가였으므로 2개월 만에 석방 되었다고 한다. 또 몇해 후에 남한 서울에 피난하고 있던 김종화를 찾아가서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어서, 나는 당시의 진상을 들어 보았다.
믿음을 잃고 쉬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문선명의 이야기와는 달라서 흥미 진진한 것이 있었다.

한국전쟁과 대공습
1950년에 접어들자 형무소안은 한층 더 엄중해졌다. 비료공장의 작업장은 웬일인지 유안분이 돌처럼 굳어져서 일에 능률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책임량(노루마)은 증량일로 이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일을 하여도 달성되지 못하는 상황이 있었다. 더구나 노동시간은 1시간이 연장되어 6시에 종업이 된다. 참으로 “죽으라” 고 하는것 같았다.
1,500인의 죄수중에서 매월 100인정도는 툭특 쓸어져 죽어서 공장의 노동자들은 매일 장사를 치르는 것으로서 일과가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죽은사람의 인수만큼 죄수가 평양형무소에서 확실하게 보충되어 왔다. 
젊은 간수들이 많이 줄어 든것을 알아차린 것은 5월경 이었다.
아무래도 사원들이 “이 것은 비밀이지만‥‥라고 말하면서 소근거리며 “소련쪽으로 비료를 운반해 간 배가 돌아올 때에는 고사포 같은 무기를 잔뜩 싣고 오곤 한다. 아마도 곧 전쟁이 시작되는것은 아닐까”라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수용소내의 경계나 작업소내의 감시가 한층 더 엄해졌고 죄수들은 큰소리로 이야기를 할수없는 분위기가 계속되어 있었는데 6월 25일 드디어 전쟁이 시작 되었다.
북한의 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서 남진하여 3일후에는 서울이 함락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죄수들을 연령별로 나누어 군대로 보내서 위험한 최전선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뜬 소문이 나돌았을 때에는 불안한 나머지 수용소 안이 크게 떠들석 하였다. 그런 가운데 8월1일 오전 11시 비료공장의 상공을 UN군의 비행기가 약30분이나 정찰하고 갔다.
나는 군대시절의 경험에서 계호계장인 간수에게 “여기는 틀림없이 폭격 당합니다. 수용소쪽이 안전할 테이니까 죄수들을 철수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진언하였으나 전쟁을 모르는 간수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할수없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가요란하게 공급경보의 싸이렌이 올렸다.
UN군의 B29가 공습해서, 12시경부터 약4시간 비료공장은 맹렬한 폭탄비의 세례를 받았다. 북한 산골 옥수수 농사짓던 농민이었던 간수들은 넋이 빠져서 우왕좌왕 할뿐이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만약 또 폭격이 있더라도 국제법상 형무소나 수용소는 폭격하지 않을터이다. 안심하고 수용소로 가기를 서두르자, 간수들은 죄수가 전원 따라오는지 뒤에서 감독해 주시오라고 큰 소리로 지시하고 선두로 달려서 수용소로 돌아왔다.
비료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총 인원수는 8천명 정도 이었고, 죄수는 1,500명이었는데 돌아와서 조사해보니까 죄수의 사망자는 불과 70명, 공장 전체로서는 약 3천 7백명 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다. 
참으로 무서운 대공습이었다 수용소로 돌아온 나는 서둘러 문선생을 찾아 폭격으로 다친데나 없나 하고 걱정 하였는데 상처 하나없이 무사하였다.

❖ 사진 추가


▲ 흥남비료 공장

김일성 은사
북한이 김일성 정권의 수립으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서 독립하였는데 (1948) 은사로서 1년 6개월로 감형되었던 나는 대공습 다음날(50년 8월 2일) 간신히 형기를 마치고 지옥의 수용서에서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 하늘 아래인데도 공장안과 밖은 이렇게도 다른 것인가를 눈물이 넘쳐 흐르는 생각으로 하늘을 바라 보았다. 오전 10시경이었다. 비료 공장 옆을 지나보니 폭격당한 흔적의 비참한 광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여기 저기 있는 큰 구덩이에서 시체가 산산히 흩어진 살점들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이 공장속에서 문선생은 오늘도 강제노동을 당하고 있을 것인가고 생각하니까 자기 혼자서만 먼저 석방 된것이 면목이 없었다. 출옥의 인사차 갔을 때에 문선생은 “평양에 가거든 경창리에 살고 있는 김종화를 찾아서 나는 잘 지내고 있으니 안심하라 고 전해 주시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김종화 여인은 문선생과 결혼하려고 하였다가 투옥 당하게 된 원인이 된 바로 그 유부녀인 것이다.
홍남의 도로는 인민군의 군수물자를 실은 트럭이 많이 달리고 있었다. 인민군은 선제공격으로 승리하여 서울을 점령한것 같았다. 지금은 전쟁중인 것이다. 평양행 군용트럭을 세워서 사정을 말하였더니 평양까지 태워다 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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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전쟁을 피해 남으로 피난


▲ 동란으로 폐허가된 서울시내(1950년 9월)

평양에서 서울로

불량배에게 다리에 절골 당했다.
폭격을 피해서 산길을 뛰기도 하고 도중에서 자기도 하며 평양에 도착한 것은 3일 뒤였다. 공습을 피해서 교회로 소개되어 있던 가족과 합류한 다음날, 나는 김종화 여인의 집을 찾았으나 찾을수가 없었다. 그 무렵 한국군은 인민군에 밀려 1950년 8월 18일에는 부산으로 한
국정부가 옮겨가 있었다.
북의 공산당정부가 장악하고 있는 평양시내는 전승분위기로 넘쳐 있었으나 9월 15일에 UN군이 인민군의 배후를 찔러 인천으로 상륙, 전황은 뒤집혔다. UN군의 진격은 재빨라서
9월 하순에는 한국군과 UN군이 평양에 입성하였다.
그러한 어느날 나는 보안대라고 자칭하는 무법자들 일당에게 둘러싸였다. 본바닥의 불량배들로서 북이 오면 북을 맞이하고 남이 오면 남에 꼬리를 치는 패거리들 이었다.
“너는 북조선 군의 대대장을 지낸 진짜 공산당원이니까 죽인다. 죽어라 !!』몇사람이 나에게 달려들어 망치로 내다리를 쳤다. 발목뼈가 부러져서 나는 움직일수 없게 되었다. 마침 지나가던 한국군 헌병대의 찝차에 구조되어 유치장에서 조사를 받았으나 직무태만
죄로 투옥 되었던 것을 알게 되어 석방되었다.
이러한 곳에서 살해 당하는가 싶어서 한때는 죽음을 각오하였던 만큼 ‘정말 사람에게는 무엇이 행운을 가져 오는지 알수 없다’ 고 무심결에 실소한 일도 있었다. 그때 유치장에 남아 있던 사람들 가운데 중죄인들은 모두 총살 당한것 같다.
전쟁으로 시내의 병원은 어디고 제대로 되는것이 없었다. 유도가 5단이었던 나는 할 수 없이 약국에서 적당한 약을 구해서 먹고 부러진 발목에는 응급조치로 나무쪽을 대서 묶어 두었다.

문용명 (文龍明) 과의 재회
10월 27일 김원필과 문정빈이 나를 찾아 왔다. 문선생은 출옥해서 10월 24일에 평양에 도착하여 나를 찾고 있었으므로 데릴러 왔다는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서 기쁘고 반가워서 말조차 잘나오지 않았다.
나는 리야커에 실려서 얕은 언덕받이에 있는 옥상현의 집으로 갔더니 문선생은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 순간 나와 문선생은 손을 잡고 울어버렸다. UN군에 의해서 흥남감옥이 10월 14일에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 문선생은 10일 동안이나 걸어서 평양으로 온것같다.
옥상현의 자택은 일본식 주택으로 부지가 수백평이나 되고, 집이 여러채 서있어서 큰 부자임에 틀림없었다. 옥상현과 딸 정애, 정순, 문선생, 김원필, 문정빈, 그리고 나까지 7인이 한 가족처럼 생활하였다.
일주일정도 지나니까 옥상현의 남편인 우하섭의 가족전원이 피난 나갔던 서울에서 돌아 왔으므로 우리들은 쓰고 있던 방을 비워 주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모두들 의논한 결과 서성리 라고 하는 곳에 있는 방을 하나 빌리기로 하고 그 다음날에 이사를 했다. 문선생과 김원필, 문정빈 그리고 나까지 4인이 함께 살게 되었다.
문선생은 그사이 아는이의 안부를 찾아 들락거렸고, 김원필에게 자기의 출옥을 알리는 일을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또 평양에서는 1950년 12월2일 시내전역의 시민에게 피난명령이 내렸다. 그것은 중국군이 대량으로 투입되어 인해저술로 거센 파도(노도)처럼 몰려오고 있기 때문에 한국군과 UN군이 일단 후퇴 하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때는 조선반도의 맨 북쪽까지 쫓겨 갔던 북조선 인민군과 그것을 지원하는 중국지원군(10월 25일에 참전)의 전진은 예상외로 빨랐던 것 같다. 그날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의 탄약고가 폭격 당해서 밤새도록 폭발하는 바람에 한잠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족을 이북에 버려두고 문선생을 따랐다.
우리들은 남쪽으로 피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다리골절 상처가 다 났지 않은 나는, 걸을수가 없었기 때문에 상수구리에 있는 누님댁에서 자전거를 가져다가 나는 그것을 타고 김원필은 뒤에서 밀고 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1950년 12월 4일 10시경에 평양을 출발하였다. 계절은 겨울이였으나 아직 그렇게 춥지는 않았으므로 피난 하기에는 비교적 장해는 없었다. 도중 대동군에 있는 나의 본집에 들려 가기로 하였다.
우리집에 도착하니까 가족은 우리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내가 부자유한 다리를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남으로 출발한다는 것은 온가족이 “엄청난 무리”라고 크게 반대하였다. 
조카인 정근은 “삼춘이 그 다리로 어떻게 남으로 피난 갈려고 생각하는가”하면서 필사적으로 말리려고 하였다. 문선생은 우리가족을 납득시키려고 평양성을 눈앞에 바라 보이지만 북에서는 목적을 달성 할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은 하늘의 뜻에 따라 일단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설명하였다.
나는 옥중에서 맺은 사나이의 약속으로 문선생과 함께 남쪽으로 가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마음 속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이미 80세가 되신 어머님께 작별 인사를 들인 뒤에 처에게 가족들 일을 부탁하였다. 그때 맏딸 효순이가 나와서 “나도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를 돌보면서남쪽으로 따라 가겠다” 고 눈물을 흘렸으나 문선생이 말렸다. 문선생은 흥남에서 같이 온 문정빈과도 나중에 기회를 봐서 남쪽으로 오라고 타일러 우리집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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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후방에는 중공군이 물밀듯이 멀려오므로 우리들은 되도록 빨리 대동강을 건너야 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정근에게 부탁해서 그날 밤중에 배로 남충면 효남리로 건널 수 있었다.
그날 밤은 근처에 있는 누님댁에서 묵었다. 남쪽으로 피난하려고 하는 마을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다음날 아침인 12월 5일 누님이 마련해준 식량을 자전거에 싣고 나는 타고 김원필은 밀면서 출발하였다. 
누님은 문선생을 목사라고 생각하고, 목사님 제발 제 동생을 잘부탁드립니다 라고 머리를 숙여 인사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후 43년간 가족과의 만남은 사라져 가는 꿈같고 아내와 다섯 아이들은 어떻게들 하고 있는지 )

죽을때까지 함께 하자던 사나이의 약속


▲ 북에서 남으로 피난민들

남쪽으로 내려 가는 피난길은 사람들로 넘쳐 있었다. 피난민들은 저 마다 손을 잡고 그야
말로 몇만명이나 되는 엄청난 사람들이 서서히 남쪽으로 남쪽으로 걷고 있었다. 우리들은
역포를 거쳐 용연면에 들어서서 12시경에야 가학리 에 도착하였다.
서쪽에서는 폭격기의 공습과 총격전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날은 흐려 있어서 해가 아직지지 않았는데도 해가
넘어 간것처럼 어두었다. 오늘은 앞으로 더 가는것을 체념하고 숙소를 찾아서 쉬기로 하자는 문선생 지시로 우리들은 근처의 마을에 들러 초입에 있는 농가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아무도 살고 있는것 같지 않았다. 가재도구는 있었으나 아마도 주인은 남쪽으로 피난해 갔는지 부및에 가보니까 쌀은 물론 김치, 간장, 된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 김원필

정말로 인류최후의 날이 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세상은 이제부터 어떻게 되어가는 것일까? 가구와, 살림도, 의복도, 그대로 남아 있는데 가족만이 증발해 버린것 같다. 피난 도중에 쉬려고 맨 처음에 들어간 집의 광경을 보고 나는 여러가지 것을 생각케 하였다
원필이가 저녘 준비를 해서 가져 왔다. 횐 쌀밥에 물김치를 차린 밥상이었다. 우리들은 감사의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하였다 문선생이 “정화는 다리가 부러져서 고생하고 있지만 좀 있으면 낳을것이다. 또 자유롭게 걸을 수 있을 터이니 안심하시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가족들을 생각해서 쓸쓸해 보였던지 “우리들은 지금 새로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남쪽으로 가는 것이다. 다만 피난하기 위한 길만은 아니다. 평양성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역사를 이 세상에 창조하려고 한 것인데, 나를 감옥으로 보냈기 때문에 허사가 된것이다.
남쪽에서 다시 한번 해내는 것이야”라고 격려해 주었다. 쌀 뒤주 위에 가지런히 개서 올려져 있었던 이불을 펴고 누됐으나, 나는 아무리해도 잠이 들수가 없었다. 원필은 피곤한지 바로 잠이 들었으나 문선생도 한동안 잠이 안 오는것 같았다. 이제 부터의 계획이라
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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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부터 한평생 문용명 (본명) 과 박정화는 고락을 함께하고 영원히 같이 살자” 고 옥중에서 서로 맹서하였기 때문에 정다운 고향을 떠나서 사랑하는 가족들 부모, 형, 그리고 처 다섯식구 들 (17살 장남, 15살 차남, 13살의 3남, 10살의 큰 딸, 다섯살 4남) 과 헤어져서 부러진 다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내 일생은 모두 재림 메시아로 믿고 있는 문선생에 맡긴것이다.
역시 나도 고단했던 가보다.
 어느새 잠이 들었다가깨어 보니 벌써 아침해가 떠 있었다.
피난 길에 우리들의 복장은 문선생은 횐 명주 바지에 고무신을 신고 검은 외투를 입고 머리에는 일본 식민지시대의 말기를 생각케 하는 검은빛의 반공두건을 쓰고 있었다. 흡사 봉건시대의 부인들이 입고 있던 당의와 같은 느낌인데 얼굴 앞 부분만이 보일뿐이었다. 그는 그와 같은 겉차림뿐만 아니라, 여인과 같은 음성이였으므로, 진짜 여성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리고 나는 작업복 상하에 일본군의 구두를 신고 머리 에는 누런 방한모를 쓰고 있었다. 
외국제의 밝은 자전거에 짐을 싫고 다리가 불편한 내가 걸터 앉아 핸들을 쥐고, 원필과 문선생이 교대로 뒤에서 밀고 있던 모습이 아마도 기묘하게 보였을 것이리라.

악전고투의 피난 길
남쪽으로의 길은 간선도로를 가면 비교적 평탄하고 수월하겠지만 미헌병이 여기저기 서 있어서 통행을 제한하고 있었다 결국 피난민이 통행할 수 있는곳은 좁고 기복이 많은 옆길 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피난민의 수는 늘고 그야말로 인산 인해 좁은 길에 넘쳐나고 있었다. 남으로 가기만 하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보증도 아무것도 없건만 그래도 무언간에 희망을 가지고 사람들은 남쪽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이었다.
평양을 떠날때 의복이나 살림을 한짐씩 싸짊어지고 피난길에 올랐으나 그짐도 날이 갈수록 점점 줄어 들었다. 줄곳 걷다 보니 다리도 아프고 지쳐 그리 대수롭지 않은 물건들은 자꾸 내버려 피난길 20일 정도 된 때에는 짐들은 거의 줄어졌다. 피로가 겹친 몸에는 한 겨울의 추위가 한층 더 느껴졌다. 따뜻한 곳을 찾아서 풀위에 눈이 녹아있는 곳이 눈에 띄이면 주저 않았다가 쉬엄쉬엄 걸었다. 그래도 잠 자리와 식사 걱정만은 대단하지 않았다.
그날도 조금 일찍이 숙소를 찾아서 쉬기로 하고 가까운 마을로 들어갔다. 어느집에 들어가니까 꽤 잘 살던 집처럼 보였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시 살림살이와 식량은 놓아둔 채였다. 방을 정하고 한참 쉬고 나서 원필이 저녘밥을 마련해 주어서 세사람이 식사를 했다.  아픈 다리로 이대로 부산까지 갈수 있을런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우리들은 점점 늘어가는 피난민에 섞여서 남으로 남으로 향하였다.
그 도중에 광주근처에 각도가 거의 30도정도는 되는 가파른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는 150M정도로 길어서 자전거를 밀고 올라 갈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내가 자전거에 타고 원필이 아무리 힘껏 민다 해도 그리 쉽사리 올라 갈수 없었다. 조금 올라간듯 하면 미끄러져서 자전거가 뒤로 나 자빠지고 만다.
주위에는 피난민이 가득차서 저마다 앞을 다투어 먼저 가려고 하였다. 이대로 하다가는 아무리 해도 나아갈수 없겠다고 생각한 나는 나 때문에 문선생과 원필도 남쪽으로 못가게 된다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되서 문선생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안 되겠오 나를 두고 앞으로 가시오 나는 여기서 어떻게 되더라도 나는 나의 운명에 따르겠오.” 그했더니 문선생은 화를 내며
“당신과 나는 죽음까지 함게 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금후에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살자 걱정말게 !! 라고 말해 원필에게 자전거를 끌게 하고 나를 업고서 고개를
넘었다. 감격 한 나는 문선생을 믿고 따라 가기로 다시금 다짐했다.

겨우 서을에 도착하다.
우리들 세사람은, 그후 남쪽으로 온 피난민속에 공산군이 섞여 있을것 이라고 하는 정보에 따른 UN군의 전투기의 기총소사로 여럿이 죽는 고초를 겪기도 하고, 이의 등살에 견디기 힘들었던 어려운 고비를 참고 넘어서 사리원, 하성, 동해주, 청단, 내성, 용매도, 영양, 토성, 장서를 거치고 임진강을 건너서 남쪽으로 들어가 마포를 지나서 서울로 향하였다.
12월 27일 눈이 퍼블는 속에 얼어붙은 한강을 미끄러지고 구르면서 건너서 24일만에 우리들 세 사람은 꿈에 본 서울에 당도 하였다. 우리들은 우선 영등포구 흑석동에 있는 곽이라고 하는 사람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그런데 문선생의 옛날의 친우였던 곽이란 사람은 이미
부산쪽으로 피난해서 그 집은 빈집이 되어 있었다.
이집은 2층집인데 양옥집이고, 가재도구가 그대로 놓아둔 채로였다. 할수없이 우리들은
이 빈집에서 한동안 지내기를 하였다. 서울은 문선생이 학생시절부터 살아서 신앙적인 면으로도 여러가지 것을 체험 해온 제2의 고향이었다.
그 곳에서 문선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후 한동안 하숙을 하고 있었다. 이기봉이라고 하는 할머니 한테 찾아갔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렇게 반갑게 대해 주지 않는 것이
다. 그 후에도 몇 사람 옛 친구를 찾아 갔으나, 문선생의 꼴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들의 모양이 거지같이 보였든지 그리 친절하게 대해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무렵 서울시민은 국민방위군요원에게 물겨 다니고 있었다. 나는 또 다리가 부자유스러워서 걸리지 않았지만, 문선생과 원필 두 사람은 무조건 끌려갔다. 세사람이 사선을 넘어 평양에서 겨우 서울에 닿았는데 이것은 또 어떻게 된 것인가. 나만 홀로 남겨지고 금후의 일이 걱정인데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서울은 낯선 고장으로, 아는 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곳이다. 더구나 전쟁 중이다. 문선생이 찾아가도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가령 내가 찾아간다 하더라도 나 같은 것에 동정 해 줄리가 없다. 이제부터 나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하여도 아무것도 떠 오르지 않았다. 문 선생만을 믿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문선생과 원필은 국민방위군의 자체검사에서 불학격이 되어 돌아와서 세사람은 또 흑석동의 곽씨의 자택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새해가 밝아 1951년 1월 2일, 서울전역에 퇴거명령이 내려졌다. 공산군이 가까이 까지 남하해 온 것이다. 우리들은 또 피난길에 나서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다. 이번의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지금까지 검문을 받던지 할 때에는, 우선 먼저 증명서의 제시를 요구 받았다. 그런것을 생각해서, 나는 가까이 있는 치안대를 찾았다. 유홍이라고 하는 치안대의 대장이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해서 우리들은 “피난민증명서”를 한통씩 만들어 줄것을 요청하였더니 친절하게 증명서를 발행해 줄뿐만 아니라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 고 위로의 말까지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 때의 기분은 지금껏 잊을수가 없다.
평양에서 마련해 가지고온 돈도 모두 떨어졌으므로 우리들은 할수없이 곽노필씨 집에 남아있던 양복이나 돈이 됨직한 것을 자전거 뒤에 싣고 서울을 출발하였다.만약 그대로 남겨 두었다 하더라도, 인민군이나 중국군이 처들어 온다면 아무것도 남아 나지 않을것은 명백하였다. 사실 서울은 1월4일 재차 공산군에게 제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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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부산으로

제2의 피난행



우리들은 1월3일 이번에는 부산을 행해서 500키로의 피나길에 올랐다. 두번째의 피난인 것이다. (1·4후퇴 때)
 자전거에 타고 그저 밀려 다니는 꼴이 었지만, 자유를 찾아가는 희망의 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서울을 출발해서 부터 우리들은 부산까지 경부선을 따라 가지않고 중앙선을 따라 가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나의 숙부가 되는 정기수씨가 제천이라는 곳에 살고 있어서 그곳을 들러 가면 여러가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성남을 지나서 이천으로 향하였다. 이번에는 평양에서 서울까지의 피난 때와는 달리 모르는 피난민들끼리 줄을 짓기도 하고, 또 무더기로 몰려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같은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끼리라든가, 가족들끼리 함께 이동해 가는 것이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그의 마을로 들어갔다. 마을에는 거의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빈 집이 눈에 띄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집에 가서 하루밤 쉬어 가기를 부탁하면 쾌히 들어주어 방을 빌려서 쉴 수가 있었다. 빈 방이 없을 때에는 부엌이나 헛간 같은 데서도 쉬어 갈 수가 있었다. 쉴 장소가 마련되면 다음은 가지고 은 쌀로 식사를 마련해서 먹고 자는것 뿐이 었다.
제2의 피난때에는 전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 가짐에도 얼마간의 여유가 생겨서 그렇게 서둘지 않고 느긋하게 갈수가 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일찌감치 마을에 찾아들고 서둘러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잘하는 방법인 것이다. 가지고 있던 쌀이 떨어 졋으므로 가까이에 있는 작은 마을에 들렸다.


▲ 강을 건너는 피난민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은 피난을 갔는지 상점은 거의 닫혀 있었다. 그러나 우려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쌀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이 작은 마을 가운데 있는 큰 집을 찾아가서 곽씨집에서 가지고 온 양복 한벌을 꺼내서 집에있는 할머니에게 건네고 우리의 사정을 설명하였다. 70은 넘은 듯한 기품좋은 할머니는 우리들이 측은하게 보였던지 아니면 양복이 탐이 났던지, 팔 뒤주를 열고 쌀 한말 가량을 주었다.
장호원, 원주를 거쳐 제천으로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 헤맨 숙부의 집은 이미 피난해서 빈집이 되어 있어 맥이 쪽빠졌지만, 그래도 앞으로나아가 조령(새재)의 마루턱에 도착하였을때 UN군의 헌병이 “피난민은 도로로 가서는 안된다” 고 제지를 당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걷기 힘든 산길을 갈수 밖에는 없었는데, 그 무렵에는 나의 다리도 거의 나아갔으므로 산길이라도 악을 써서라도 걸을 생각을 했다. 그런데 별안간 UN군의 헌병이 문선생과 원필을 강제적으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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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세번째 이별이 되는 것인가 하고 나는 무척 불안하였다. 처음에는 북에서 피난할때 보안대에 연행되었다. 다음에는 서울에서 국민방위군에게 연행되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또 혼자 남게 된 것이다.
그러한 곳에 혼자 남겨 지더라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매우 걱정 스러웠는데 한참 만에야 두사람이 돌아왔다. UN군의 군용 차에서 작업을 시켰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내리막 길 이었으므로 나 혼자서도 갈수 있을것 같았다.
“여기서 부터는 지팡이를 버리고 걸어서 가자” 고 문선생이 말했다.
두달 가까이나 지팡이에 의지해서 자전거에 타기도 하고 네리기도 하였으므로 아직 자신은 없었지만 다부지게 마음먹고 지장이를 버리고 보니가 지팡이가 없이도 걸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 후의 길을 나는 혼자서 걸어 다닐수 있었다. 단양, 점촌, 풍기, 안동, 의성으로 피난길은 이어졌다.

경주에서의 작별
경주에 도착한것은 저녘때였다. 시내에는 피난민이 넘쳐 있었고 비어있는 방은 여간해서 찾아 볼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사방을 헤매서 겨우 시내의 로서리를 거처 쉴만한 집을 찾아냈다. 현관문을 판자로 X형으로 막어 놓은 집인데 그집을 찾아 가니까 30세가량의 젊은 사람이 나왔다. 우리들이 방문한 이유를 물었으므로 “판자로 문판을 막어 놓았기에 아무도 안사는것 같아서 하루밤 쉬어 가려고 생각 한것이다”하고 하였더니 안으로 들여 보내주었다. 
집안을 살펴 보니까 판자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는 공장같은데 집 주인의 설명으로는 “밥상”을 만들고 있었는데 전쟁 때문에 직공들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으므로 공장을 폐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이다
방을 빌린 후에 원필은 저녘 반찬거리를 사려고 시장으로 나아갔다. 어항이 있는 포항이 가까이 있어서 오징어를 세마리 사다가 죽을 쑤었다. 원필이 방을 빌려 준 주인에게 죽 한구릇을 가져갔더니, 뒤에 그집 아주머니가 “이러한 죽은 어떻게 쑨것이냐” 고 물어 원필이 설명을 하니까 아주머니는 웃으면서 “오징어로 족을 쓸 때에는 먹장을 떼내고서 죽을 쑤는 거예요. 그냥 하신거죠”
우리들은 어두운 곳에서 먹었기 때문에 그런것도 모르고 맛있게 먹었는데 아주머니가 가져 온 죽을 보니까 과연 새까만 것이었다. 그것을 그냥 먹었는가 하고 생각하고 우리들은 서로 웃고 말았다.
이집의 주인은 황해도가 고향인데 자기는 어렸을 때에 경주로 살러와서 생활을 위해서”밥상을 만들게 되었다” 고 한다. 어른들은 지금도 북에 계시고 자기의 가족들만이 이쪽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장만영이라고 3일간 이집에서 쉬었다. 식사는 물론 우리들이 만들어 먹었다. 그래도 피난민이 넘쳐서 한곳에 오래동안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주인에게 “우리들은 오늘 부산쪽으로 갑니다”라고 인사를 하니까 젊은 사람은 가도 괜찮을터이지만‥‥하면서 그는 나를 가르쳐 말했다. “당신은 제일 나이도 많는것 같고 몸도 쇠약한것 같다 부산에 가더라도 피난민으로 꽉 차 있을 터이니까 두사람이 먼저 가서 자리잡은 다음에 당신도 가면 좋지 않은가”
여기까지 문선생과 원필이 함께 사선을 넘어왔으므로 나는 “아니야 나도 부산으로 가겠다” 고 말했더니 문선생은 “이집 주인의 마음씨가 고맙다” 고 말하고 “정화 자네는 이곳에
있으면서 좀더 기다리게, 우리들이 부산으로 가서 자리 잡히면 연락할 것이니까. 그때 또 서로 합쳐서 큰 일을 하기로 하세나”
이려하여 나는 경주에 장만영써 집에 남고 문선생, 원필은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때의 나의 심경은 무척 복잡하였다. 피난도중 문 선생과 함께 사선을 몇 차례나 넘어 왔는데,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려고 하는 위대한 일거리를 위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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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떨어진 나의 심경은 서러워서 함께 가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했으나 피난길은 한 사람이라도 적은 편이 수월한 것이 라고 생각해서 잠시의 이별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후에 문 선생이 경주로 왔을때 들은 바로는, 이때는 울산까지 걸어가서 울산에서 처음으로 기차를 탈 수 있었다고 한다. 기차는 기차였지만 화물 차량의 지붕까지 사람이 타고 있는 상황에서 간신히 화칸 부근에 탈수 있어서 부산의 초량역에 겨우 내렸다는 것이다. 그날이 1951년 1월 20일 이였다고 한다.

생활에 쫓긴 문선생이 찾아옴
나는 혼자서 경주에 남아 장만영씨 집에 식객이 되었다. 4월이 되어 날씨도 따뜻해졌다. 식객도 오래 되었기에 무슨 짓이라도 해서 밥값 정도는 치러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나는 어느날 주인과 의논하였는데
“전쟁중에는 만들어도 별로 팔리지도 않으니까 공장을 페쇄하고 있다” 하는 것이었으나, “밥상만 만들어 준다면 내가 자전거에 싣고 다니면서 시장에서 팔아 올 터이니 해보지 않겠오” 라고 내가 권하였더니 주인도 그러 할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전부터 공장에서 일하던 아들과 식객 노릇을 하고 있던 피난민 나와 주인등 셋이서 밥상을 만드기 시작하였다.
나는 한번에 20개씩 자전거에 싫고 포항으로도 가고, 영천으로도 가고, 또 울산에도 갔다. 익숙하지 못한 장사였지만 싣고 나간 밥상은어떻게든 다 팔렷으므로 그 대금을 주인에게 넘겨 주었다. 경주 주변에는 사방에 시장이 있었다 영천에도, 울산에도, 포항에도 언양에도, 감포에도, 경주에서 2,30키로 거리에 있었으므로 5일마다 서는 장이 그 시장에 매일같이 밥상을 실어다 팔았다.
또 저녘때가 되면 그집의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가정교사 노릇도
하였고 식객으로 지내는 동안의 밥값 정도는 특특히 한 셈이다.
이렇게 지내고 있는 동안 그 다음해의 3월 7일 별안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문선생이 부산에서 오셨다. 그 기쁨이란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군용 모포 한장으로 공장에서 기거하고 있는 나로서는 문선생을 환영할 방도가 없었다. 주인이 돈을 내주어서 저녘 식사만은 접대를 하였으나 밤에 나무조각 투성이의 방에서 주무시도록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선생은 그동안 부산에서 있었던 일이나 금후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꿈과 같은 이야기 뿐이었다. 흡사 몇 십년만에 만나 밤이 깊도록 둘이서 이야기를 했고, 다음날 문선생은 “오늘은 부산으로 돌아가야겠다” 고 한다.
내 기분 같아서는 여기에 방이 하나만 더 있었으면 여기서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 할만한 활동을 해서 문선생과 함께 있고 싶은 심정 이었지만 아직 상황이 좋지 못해서 할 수 없는 노릇 이었다.
마침 그날은 울산에 장이 서는 날이라서 문선생과 같이 기차로 가기로 하였다 오전중 내가 시장에서 밥상을 팔고 있는것을 문선생은 보고 있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문선생은 기차로 부산으로 떠났다. 밥상이 많이 팔리면 용돈 이래도 드릴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하필 그날은 웬일인지 거의 팔리지 않았다.
경주에서 헤어지고서 1년만의 재회이었는데 문선생을 전송하고 돌아온 나는 정말로 깊은 생각에 빠지고 말았다. 무엇이든 장사를 해서 자금을 마련해 가지고 부산으로 가서 문선생과 함께 위대한 사업 달성에 힘쓰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는 것만 생각하고 있었다.
문선생의 말에 의하면, 원필은 식당에서 일하고 있고, 문선생 자신은 일본의 공업학교에 함께 유학하였던 동창생 집에 식객으로 있다고 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계시기에 무척 불편 하실 것이라고 생각 되었다. 
(실은 이때, 그는 나에게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하고 상태를 보러 온 것이었다.)
어떻게 해야만 하루라도 빨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수 있을까 하는 것을 나는 늘상 생각해 왔다. 날마다 변함없이 밥상을 운반해다가 시장에서 파는 것이 내 일의 전부였다. 이러한 일거리라도 열심히 붙잡고 있으면 기회 가 찾아을 것이 라고 하는 희망을 가지 고 여기서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것일까? 아니면 집어 치우고 부산으로 가는 편이 났지 않을까도 생각 하였으나 아직 피난민으로 가득한 부산으로 간다 한들 별 볼일이 없을것 같이 생각되어 좀더 경주에 있기로 하였다.

평양에서 온 옥상현과의 재회
공산군에 의해서 2년전의 1월4일 재차 함락된 서울은 꼭 두달후의 3월 4일 UN군이 탈환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이무렵 일진일퇴 하면서도 간신히 전황은 시드러 들기 시작해서 휴전협정의 준비가 추진되고 있었다.


▲ 옥상현*

그러나 민간인의 사상자만도 남북 합해서 2백만명 이상, 이산가족도 일천만명을 넘는다고
하여 국민간에 불안과 불행의 그림자가 짙게 깔리고 있었다.
그러한 1953년 봄 부산에서 저 옥상현 할머니가 경주로 나를 찾아와서 오랜만에 대면하였다 평양에서 피난 할때에 헤어져서 서로 알길이 없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니 정말 반가웠다. 
옥상현은 그녀의 피난 이야기와 부산의 문선생의 안부와 식구들을 키우는 일에 열중하고 원리를 책으로 만들기 위해서 원고를 써냈다는것, 흥남감옥 당시에 이야기 했던 원리를 정리해서 출판해야 하겠다고 항상 문선생이 이야기 하던 것을 생각하고 이렇게 엄청난 피난 생활 중에도 기어히 써 냈구나 하고 감격하였다.
하루 빨리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해서 원리를 출판하여 전국에 배포하고 전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고 생각했다.


▲ 이요한

옥상현의 장남이 군인용 트럭을 가지고 온 덕분으로 가족전원이 무사히 남쪽으로 올수 있었던 것이다. 자리잡히면 부산에서 함께 일할수 있게 하루 속히 경제적인 기반이 마련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
문선생과 함께 6,000년전의 하나님의 뜻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할때가 이제 곧 다가 올것 등등 열심히 이야기 하였다 원필은 지금 미군부대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았다. 범일동에 교회를 마련하여 새로 입교한 식구들이 원리를 들으려고 모여들게 되었고, 평양에 있던 식구들도 부산으로 와 있다고 한다. 교회의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문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왔던것 같다.
옥상현은 하루밤을 같이 지내고 다음날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동만 있다가 이요한 이라고 하는 목사가 나를 찾아 왔다. 부산에 있는 문선생이 보냈다고 하는 것이었다 방으로 안내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새로운 식구들이 많이 모여와서 원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으므로 박정화씨도 선생이 계시는 부산으로 발리 오시는 것이 좋겠다” 고 하는 것이 었다. 
모두가 힘을 합쳐서 하나넘을 위한 위대한 사업에 전진할 시기가 지
금 막 왔다고 가슴이 벅차 있었다.
그 다음날 이목사는 부산으로 돌아갔다. 나도 곧 부산으로 간다고 문선생에게 전하도록 부탁을 하고 혼자서 생각하였다. 저 흥남감옥에서 문선생이 빈 가마니 위에 앉아서 눈을 감은채 신비의 세계를 변화하게 할 이상, 즉 “원화원 이상(圓和園理想)”의 세계를 실현시키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나에게 말한 것을 생각 하였다. 그 때의 전경이 눈에 아물 거렸다. 희망의 세계가 하루라도 빨리 왔으면 좋겠다.
죄악이 없는 세계, 그리고 질투, 음모, 배신, 전쟁 같은 것이 없는 세계, 그 이상세계의 회원만 된다면 노동은 취미로서 하루에 세시간 정도만 하면 된다. 세계의 어느 나라에도 갈 수 있게 되고, 회원 집에 가면 자고, 먹고, 쓰는 것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
받는것 보다는 주는것을 기뻐하는 세계, 남을 책망하지 않으며, 존경을 받기 보다는 존경
하는것을 기뻐하는 세계, 이 이상세계가 지구의 구석 구석까지 넓혀져서 우리들은 어느 나라와도 마음이 상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계가 가까운 여기 지금 부산에서 고생하고 계신”문용명 선생”에 의해서 완성 될것을 생각한다면 감사할 뿐이다.
나는 한시바삐 부산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는 마음에 재촉을 받았다.

▲ 북에서 남쪽의 피난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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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통일교회의 창립전후

▲ 통일교회 창립기념사진

(앞줄) 좌로부터  이성화*[ 최순화 ], 李奇煥  이기환, 池承道  치승도, 옥상현*, 文鮮明  문선명, 강옥실*, 이순철*, 金在根  김재근, 劉信姫  유신희
(뒷줄) 좌로부터  李成範  이성범, 著者 ( 저자 )  박정화, 趙東錫  조동석, 李耀翰  이요한, 羅英洙   나영수, 李昌煥  이창환, 劉孝元  유효원, 金相哲  김상철, 劉孝敏  유효민, 李秀郷  이수경

여신도들의 열의

부산 수정동 교회
나, 박정화는 1953년 5월 15일 새로 사드린 부산 수정동의 집으로 문선생을 찾아갔다. 문선생은 대단히 반가워 하며 그간의 경과와 금후의 계획에 관해서 자세히 들려 주었다. 
마침내 위대한 사업을 위해서 일 할때가 왔다. 마음 단단히 힘써 나아가자고 문선생은 말한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많이 들려 주었던 6,000년의 역사의 과정, 창조원리, 타락원리, 복귀윈리, 재림예수의 사명과 그 자세등을 종이에 써 가면서 개인교수 하는것 처럼 가르쳐 주
었다. 
문선생은 어느새 이름자의 용(龍)을 떼고 문선명(文鮮明)으로 바꿔 쓰고 있었다.
그 당시 동거하고 있었던 주된 식구들은 김원필, 정성옥 강옥실*, 옥상현*, 지승도, 이기환, 이봉운, 이수경과 그가족, 문선생의 처, 최선길과 장남인 성진, 이요한 목사등 이었다. 새로 들어온 식구로 예배에만 참가하고 있던 사람들은 신정순, 김안실, 김재책, 김복순과 그가족, 오명춘 등이었다. 장남은 별로치고라도 김원필, 이봉운, 이수경, 이요한 외 에는 모두 여자이다.
당시 김원필은 미군부대에서 일 하고 있었는데, 저녘때가 되면 미군들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데 울산에서 왔다는 젊은 부부가 새로 들어 왔다. 어느날 그 부부는 하루종일 전도하러 나가서 밤이 늦어서야 돌아왔는데, 성령에 열중한 나머지 딴 사람같이 되어 있었다. 마침 그날밤은 월식이었는데, 그것을 보고 그 부부는 하늘에서 빛이 비쳤다고 큰 소리를 지르며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월식이라 설명을 해서 간신히 진정하게 한일도 있었지만 또 어느날오후 지승도, 옥상현*, 이기환 등이 영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너무나도 신비스러움에 홀려서 실신한 일도 있었다.
몇일후에 문선생 이 나를 불렀다.
“지금부터는 어떻게 해서든지 경제적기반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떠한 사업을 하면 좋을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요. 무슨 좋은 사업이 없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던 때에 알고 지내던 김동기라는 사람을 만나서 의논하였다.
그럤더니 그는 “친구와 공동으로 전매청에 새끼를 납품하는 계약을 체결 하였으나 자금이 딸려서 계약량의 남어지를 납품하지 못하게 되였다고 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돈을 받지 못하게 되는데‥‥라고 말하면서 나머지의 납품을 나에게 맡겨도 좋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반가워서 이 이야기를 문선생에게 전했다.
문선생은 곧 부인 식구들이 헌납한 귀금속 따위를 처분해서 37,000원이란 자금을 마련되었다. 그 돈으로 새끼를 생산하고 있는 삼천포의 흥해로 가서 새끼를 사다가 부산전매청의 창고에 납품하고 납품서를 받는것이 나의 일과로 되어 농촌에 몇일씩 묵으면서 “새끼” 를 사
모아 가지고 화물차에 실어 운반하고, 또 삼천포에서 배편으로 운반하기도 하였다 6월 20일경에 일을 시작해서 새끼를 생산하는 농가를 찾아 다니며 계약잔량을 거의 다 채워가고 있었다.

최선칠 (문교주의 본처) 부인의 큰난동
그러던 어느날, 삼천포로 이봉운 장로가 별안간 예고없이 찾아 왔다. 이장로는 수정동의 교회에 큰 일이 벌어지고 있오이다.
최선길씨가 문선명선생이 부인 식구들과 복귀의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난동을 벌려 식구들을 전부 내쫓아 버렸다.
그리고 수정동의 교회를 최씨가 가재도구채 팔아 치워서, 교회가 없어져 집회도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되도록 빨리 돌아가십시다.


▲ 최선길 (문선명의 본처)

그래서 나는 급히 각지를 돌며 새끼 계약잔량을 조달해서 전매청에 완납하는 절차를 취했다. 계약조건과 새끼의 매입가격과 경비를 계산해 보니까 30,000원이나 이익이 남은 것을 알았다.
일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 오니까 문선생은 최선길에게서 도망치듯 주된 식구들을 데리
고 서울로 가고(9월17일), 원필도 영도(부산교외 마을, 열심인 식구의 집에 있고, 전도의 거점이 되어 있었다)로 도망갔다라고 한다.
이봉운장노는 대지공원에 판자집을 한채 사서 그리로 이사해서 거기서 임시로 예배를 보기도 하였다. 수정동 교회에는 이미 다른 사람이들어 와서 살고 있었다. 최선길의 대 난동으로 부산의 수정동 교회는 어처구니 없이 날라가 버린 것이다. 나는 하는 수없이 여관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서울로 갔다.
 서울에 있는 식구들에게 물어서, 청진동에 있는 문선생을 심방 하였더니 반가이 맞아 주었다. 불문곡직 하고 나는 그동안 새끼 납품결과를 보고하고 내일 부산으로 가서 납품서를 받아오면, 전매청에서 돈을 받을 수 있게 되고,그 이익은 30,000만원 정도가 된다고 설명하였다.
그때 청진동에 문선생과 함께 있던 사람은 옥상현*, 신정순*, 양윤신*, 오명춘*, 이순철*.이 성화* 등 7-8인인데 여자 식구들 뿐이 었다. 나는 그다음날 기차를 타고 부산의 전매청지점에서 납품서를 받아 들고, 또 기차를 타고 되짚어 서울로 돌아왔다.
문선생에게는 낮 12시에 도착한다고 전보를 처 놓았으므로 그길로 바로 청진동 집으로 직행하니까 문선생도 여자식구들도 어디론가 가고 없어서 행방을 알수가 없었다.


▲ 사진 1, 2는 최선길(본처) 서울 청파동 교희에서의 횡포장면

그대신 최선길이 혼자 지켜 앉았고 최부인은 가재도구 같은것을 전부 처분하기 위해서 짐을 싸기도 하였다.
문선생 앞으로 보낸 나의 전보를 보고 나라면 문선생의 거처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가재도구 중에는 문선생의 성경과 찬송가, 그리고 놀라운것은 원필이 정서한 원리원본까지 들어 있지 않은가. 나는 필사적으로 최부인에게 부탁하였다 “내가 찾으면 선생 계신 곳을 알수 있을 터이고 알게되면 반드시 연결 할것이니 성경과 원리원본 만은 나에게 돌려두세요. 최 부인이 나에게그 서 류들을 건네 주었음으로 가지고 돌아 갈수가 있었다. 만약 그때 원리원본을 되돌려 받지 못했더라면 나중에 원리해설을 정리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최선길 (본처) 서울 청파동교희에서의 횡포장면

그후 옥상현*, 신정순등과 만났으나 그녀들도 문선생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녀들이 내가 서울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물어 보게 되면 알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문선명의 복귀 의식이란 미명을 빌어 눈에 넘치는 난맥상을 이룬 성교로 화가 치민 최 선길 부인은 수정동 교회에서 대난동을 피워서 여자 식구들을 두들겨 내 쫓았다. 겁을 먹은 문선명은 여자들을 데리고 서울로 도망해서 청진동에 있는 으슥한 집을 빌어서 여인들과 살았다.
그러나 그것도 겨우 1주일만에 최부인에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내가 부산의 전매청지점에서 돌아오기 직전 문선명은 혼비 백산할 지경이 되어 여자들을 사방으로 분사시키고 목숨보다는 귀중하게 여기는 원리원본의 초고도 그대로 놓아둔채, 최 부인에게서 도망쳐 버린것이다. 여자식구들에게 포위되어 산다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소란한 “여국나라”를 의미 한다.
왜냐하면 문선명을 둘러싼 여자 식구들은 복귀원리에 따라 몸을 내놓으면 소생, 장성, 완성, 복귀에 미달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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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문선명 선생으로 우러러 그 원리를 맹신하고 있던 나는, 때로는 복귀의 실제현장인 성교를 목격하기도 하고, 실제 의식에 걸맞지 않는 여자식구들의 광기나 교성을 직접 보았다.
그렇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메시아로서의 임무라고 해석하고 있었다. 한편 아무리 생각해도 모른것은 무엇때문에 수차에 걸쳐 꼬리에 불이 붙은 것처럼 최부인에게서 도망을  친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메시아라면 처 앞에서라도 당당하게 하면 좋을텐데, 처 한사람 전도를 못하고서 어떻게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이 새삼 솟아 난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렇게도 귀중한 전도에는 없어서는 아니 되는 원리원본을 내 팽개 치고 줄행랑을 처버린 문선명에게 언행 불일치의 의심을 품게 된것도 사실이 었다.
청진동에서 도망친 문선명은 또 다른 곳에서 여자들과 함께 지냈는데, 그것이 또 엉뚱한 사건으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경찰서에서 전기고문
그날은 청계천에 있는 여관에서 일박하기로 하였다. 마침 잠이 들 무렵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나가보니까 “이방에 박정화라고 하는 자가 묵고 있는가” 고 말한다.
“내가 박정화요” 말하자 종로경찰서의 형사라고 말하면서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며 묻고 싶은것이 있으니 경찰서까지 같이 갑시다라고 말한다. 갑작 스런 일이라서 영문을 몰랐지만 따라 갈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다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당신은 모든것을 다알고 있을 것이다.
문선명은 지금 어디 있는지 바른대로 대라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모르는 일이므로 “모른다” 고 할수 밖에 없었다. 이쪽 저쪽에서 질문이 있었으나 “정 말 모른다” 고 대답하였더니  그 형사는 “그러면 알도록 해주지”라고 하더니 밧데리를 가져왔다. 그리고 밧데리에 연결되어 있는 두 줄의 전기선을 나의 양손 엄지 손가락에 붙잡아 매고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
몸 전체에 이상한 고통이 흐르더니 도저히 참을수가 없었다. 이래도 모른다고 할테냐!고 하면서 점점 더 세게 돌렸다. 온몸이 찌릿 찌릿 경련을 이르켜 내 몸이 내몸이 아닌것 갔았다. 손잡이를 돌리다가는 그치고, 그치다가는 돌리면서 욕설을 퍼 웃기도 하고 때로는 간사한 목소리로 말 하기도 하는등 거의 3시간 정도나 짓궂게 계속 당했다 나는 “죽일려거든 죽여라 모르는 것은 모를 뿐이다” 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랬니 옆방에서 계급이 높은듯한 이가 나와서 “말씨를 듣자니까 평양사람 같은데, 그런가? 고 묻길래 “그렇다” 고 대답 하였다. 
그 사람은 나도 평양 출신이요. 동난이 끝난 후에 남쪽으로 와서 경찰서에 근무하고 있오, 그리고 고문하고 있는 부하들에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심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이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것 같지는 않다. 풀어주라고 해서 고문을 중시시켰다. 아침까지 심문을 받고 아침 아흡시가 지 나서 야 겨우 석방 되었다.

하늘의 뜻에 관한 시험
경찰서에서 나온 나는 씁쓸한 조반을 먹은후에 엄덕문을 찾아서 YMCA 옆에 있는 3층집으로 갔다. 그때 거기에 건축설계 사무소를 열고 있었다. 내가 서울로 온것을 그는 무척 반가워 하며 문선생 있는 곳을 지도를 그려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전매청 볼일을 끝마치고 나는 그날 저및무렵 문선생을 만나러 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옥상현 등 부인 식구들에게 붙들려서 나와 같이 문선생한테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이다. 경찰에서도 찾고 있고 해서 지금은 도저히 무리라고 말해서 어떻게든지 설득하려고 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마침 그때 소낙비가 퍼못기 시작했다. 그여들이 우왕 좌왕하고 있는 틈에 나는 버스에 뛰어 오르고 말았다. 안양에서 내려서 1키로쯤 가면 길가쪽으로 남향 받이의 작은 집 한채가 있다고 들었으므로 곧바로 찾을수가 있었다. 집안에 들어서니까 문선생과 이순철이 같이 있다가 무척 반가히 맞이해 주었다. 우선 나는 전매청 관계의 업무의 경과와 어제 있었던 경찰의 사건을 간단히 보고 하였다.
그후에 문선생에게 이순철이 만든 하늘의 계시에 관한 시험을 받도록 말하였다. 문제를 보고 답을 썼더니 문선생이 “좋아 합격이다”라고 말하고 어제 엄덕문도 시험을 받았다 그도 합격하였으므로, 그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장남이고, 정화는 다음에 합격 하였으니까 차남이다 라고 말했다. 그때 이철순은 영계의 계시라고 이불을 만들고 있는 중이었다. 방 가득히 솜이 널려 있었고 그것을 자기전에 치우는 것이 큰일이었다 (후술)

노한 이순철*의 남편
나는 이틀동안 그곳에서 지내고 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이순철*의 남편이 눈에 쌍불을 켜고 문선생을 찾으려고 사방 여러곳에 수배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금 이대로 지금 집에 있는것은 위험해서 그 다음날 나와 함께 문선생과 이순철*세사람이 부산으로 가게 되었
다
.
사람들의 보는 눈이 있었으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부산까지의 직행표를 살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안양에서 수원까지 가서 일박, 그후 대전, 대구, 마산에서 각각일박, 5일만에 겨우 부산에 도착하였다. 우선 세사람이서 서면에 있는 거제여관에 한동안 유숙하기도 하였다.


▲ 문선명과  이순철* [ 김순철 金順哲 ]

그 이틀후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도록 고생하며 부산까지 왔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 왔는지 그만 들통이 나고 말았다. 김안미라고 하는 여자 식구가 여관까지 찾아 왔다. 그녀는 6마리아(문선명이 복귀한 유부녀중-후술)의 한사람이었는데, 문선생이 뒤에 6마리아가 된 이순철만을 데리고, 부산쪽으로 내 뺀 것을 괘심하게 생각하고 여기까지 이를 잡듯 찾아 왔다고 하는 것이다. 김안미 와 이순철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다. 자기들의 영적인 지위다툼으
로 여자끼리의 싸움이 더욱 귀찮게 되었다. 알기쉬운 이야기로 질투의 불꽃이었다.
나는 김안미 를 불러내서 문선생의 상황을 설명했다. 선생님은 지금 매우 복잡한 상태에 놓여 있어서 틈만 생기면 사단이 언제라도 참소 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선생님이 하시려고 하는 계획의 장애가 된다. 선생은 한동안 이대로 부산에 계실 모양이니까 우선 조웅히 하는것이 좋겠다고 간청하였더니 김안미는 노한 채로 자기집으로 돌아갔다.
우리들은 부산에서 5일동안 유숙하고 또 서울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오명춘*이 손을 써서 친척집을 빌어서 문선생과 신당동 중택에 있는 어느집에 살게 되었다. 이순철*은 자기집에 돌아갔으나 노한 남편에게 두들겨 맞아서 다리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고 백인제병원에 입원하였다.
문선생과 나와 오명춘*과 함께 병원으로 문병을 갔으나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예감 들어서 다시 오기로하고 바로 돌아섰다. 나중에 오명춘써 말에 의하면 문선생과내가 병원을 나온 즉시, 이순철의 남편이 들어가 “지금 나간 남자들은 문션명과 박정화가 아닌가” 고 다그치는 바람에 어물어물 둘러대느라고 혼이 났다고 한다.
만약 그때, 남편이 문선생과 마주쳤다고 하면 큰 사건이 일어날것은 틀림 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문선생을 둘러 싼 여자 문제가 여기 저기 일어나 그야말로 나도 손들고 말 지경  이었다.
복귀원리를 구실로 삼아 유부녀던, 처녀던, 눈에 나타나는 여인들은 조만간에 문선생과 성교하는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남편되는 자나 부모들은 노할 것이다. 그중에는 어머니와 두딸까지 세사람과 관계를 한일도 있다. 대사건으로 되지 않았던 것은, 이것도 하나님의 가호 라고나 할까? 이동안에 청진동 집에서 일어난 모든 것은 이렇다. 부산에 있던 문선명이 서울로 도망처온
뒤에 본처인 최선길은 남편이 있는 곳을 찾아 나서 청진동으로 찾아왔다.
부산에서는 최선길이 부인 식구들을 모두 내쫓고 문선명이 자유롭게 나갈 수 없도록 해서 화장실에 가는것 까지도 엄하게 감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마침 흥남 감옥에 있을 때의 제자이던 김원덕이 문선명을 찾아왔다. 이 모양을 보고  그는 성진의 어머니이며 본처인 최선길에게 이러한 것을 해서는 안된다고 화를 내고 문선명을 끄집어 냈던 모양이다. 최선길이 김원덕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들은 것은 그 당시 치안국에 근무하고 있던 현직 경찰관이었던 김원덕이 문선명이 무슨 일이 있어서 연행되게 되면 바로 석방해 주던 전예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믿지 않는 남편을 서울까지 쫓아 온 최부인은 청진동 집에 내가 와있으면 문선명의 거처를 알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라갈 작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청진동 집에서 도망친 직후 문선명은 이순철과 서울역 앞에있는 여관으로 가서 영적인 의식이란 명목으로 처녀인 이성화와 복귀의식을 행하였다. 
요컨대 세사람은 거기서 영적인 의식이 아닌 육체적인 의식 즉 성교를 하였을 뿐인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복귀의식은 그 옆에서 다른 식구가 증인으로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 날은 이순철이 증인으로서 협력하였다. 이성화는 처녀였으므로 절차는 “어린양 잔치 (묵시 록 21장 9절)”를 올려서 말하자면 정식으로 결흔해서 문선명의 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이순철은 이성화에게 이때 “미래의 어머니께” 라고 말하며 값비싼 금반지까지 선물한 것이다. 이것은 내가 당사자인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들은 것이니까 틀림 없는 일이다.


부산 영도(謄島) 집회

여자대학생 린영희의 비극

▲ 김영희* [ 김명희 ]

그 무렵 나는 대구를 거점으로해서 문선생과 함께 이곳 저곳 식구들에게 원리강의를 하기  위해서 각지로 나돌아 다니고 있었다. 또 문선생의 지시로 부산이나 서울에 가서 식구들에게 문선생 이야기를 전하기로 하였다. 그 당시는 아직 기차여행이 대단히 힘든 시대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꼭 12시간이 걸렀다. 추풍령에서 부터 대구까지는 군사상 차내의 등불을 모두 꺼 버렷으므로 캄캄하였다.
한밤중이 되면 난방까지도 꺼 버렸고, 창유리도 거의 깨져 있어서 겨울에는 대단히 추웠다. 유리가 없는 창에서는 연료로 쓰는 석탄의 연기나 냄새가 스며들어 터널에 들어갔을 때에는 질식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 문선생과 함께 있던 어느날, 부산의 이봉운 장로에게서 “부산에서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자 방도 준비하고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떻게든지 부산까지 와 주십시오”라고는 하지만 부산까지의 여비가 없어서 난처하게 있는 터에 마침 오명춘 집사가 왔다. 그녀가 여비를 마련해 주어서 그날밤 문선생과 함께 다음날 아침 8시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봉운장로를 위시해서 10여인의 식구들이 마중을 나왔다. 문선생이 부산까지 왔으므로 모두 기뻐하며 인사를 한후, 택시로 시내의 영도로 갔다. 이 날은 1953년 12월 24일이었다.
안내된 곳은 허술한 집이기는 하였지만 비교적 넓직한 방이었고 잘 정리되어 있어서 식구들의 성의가 나타나 있었다. 이집 주인은 신성묵이란 사람인데 유신희와 부부였다.
아침을  마치고 문선생은 여느때와 같이 원리강의를 시작하였다. 유효원이란 사람은 결핵성 고관절 유착으로 굳어 버려 앉아 있을수가 없어서 누워서 강의를 듣고있었다. 이 사람은 무척 과민한 성격인듯 누구 옆에서 기침을 하면 표정으로 그것을 제지하기도 하였다.
28인 가량이 강의를 듣고 있었는데 방안은 무척 조용해서 엄숙한 분위기였다. 식사 이외에는 휴식시간도 없이 강의는 밤중 한시, 두시까지 계속되었다. 그래도 듣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는 시종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날 처음으로 강의를 들으러 온 사람은 유효원, 유효영의 형제, 신성묵, 유신희 부부, 김관성, 차집사등.
식구들은 신정순, 옥상현, 이기환, 지승도, 양윤신, 오명춘, 이봉운장로, 그리고 가족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 김 영희*라고 하는 여자대학생이 처음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그녀는 교인인 양윤식의 질녀로 연세대학 학생이었다. 성적이 우수해서 장래성이 있는 학생 이었으므로 대학 총장에게도 귀염을 받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언더우드 총장이 귀국할 때 그녀에게 1년분의 학비를 선사해주었다. 그러한 큰돈을 자기가 가지고 있으면 위험하다고 생각한 그녀는 숙모인 양윤신에게 전액을 맡겼던 것이다.
그런데 양윤신은 식구들의 경제사정이 대단히 말이 아니었으므로 교회를 위해서 문선생께 몽땅 바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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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학이 시작되고 돈을 전부 써 버린것을 안 김영희는 노했다. 그래서 숙모가 다니는 교회가 어떠한 교회이고 무엇을 가르치며 선생이란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고나서 항의하려고, 아침부터 밤까지 꼼짝을 하지 많고 그녀는 문선생의 강의 를 듣고 있었다.
밤중에 폐회가 되어 참가자의 태반은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그집 단칸 방에서 문선생과 남자 두사람, 옥상현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 김영희의 여자 5인이 함께 자게 되었다.
이것이 부산 영도 집회의 첫날밤이었다.
실은 여기서 처음으로 밝히는 바이지만 김영희는 이날밤 문선명과 성교를 한 것이다.
같은 방의 맨 아래목에 문선명, 그다음에 나, 그리고 여섯사람의 여인들이 이름은 든 순으로 누웠다.
나는 고단했으나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어느새 잠이 들었는데 묘한 기척에 눈이 띄었다.
내 옆에 누워있던 문선명의 자리에서 비명소리도 허덕임 소리와도 같은  여자의 소리가 들렸다.

▲ 부산 영도판자집 촌

그런데 그것도 반대편 끝쪽에 누었던 김영희의 소리였다. 문선명의 성교를 여러차례 목격해온 나지만 이것은 정말로 놀랐다.
복귀원리로 설득을 당한 그녀가 먼저 그했는지 몰래 문선명이 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이것이 복귀의 의식 따위가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약한 처지로서의 나로서는 잠자코 옆의 행위에 자는 척 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다른 5인의 여자들은 한사람은 마리아이고, 다른 4인도 이미 문선명과 관계가 있었으나 자세한 것은 후술한다.
또 그후 김영희는 문선명의 아이를 임신해서 실로 비참한 인생 첫발을 걷게 되었다.

수사기관에 쫓기는 나날
그 다음날도 똑같이 선생은 강의를 하였고, 유효원은 열심히 메모를 해 가면서 듣고 있었다. 수염을 기르고 있던 김관성은 한방의라고 자기 소개를 한 사람인데 역시 열심히 듣고 있었다. 집주인인 신성묵도 강의에 빨려 들고 있었다.
그의 처 유신희도 열심히 듣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후에 서울로 가서 문선생에게 복귀를 받게 되었다. 약 3주간이 지나니까 식구들은 문선생의 강의를 되풀이해서 듣고 있어서 찬송가와 기도를 할때에는 딴 사람 같아서 성령이 충만해서 큰 소리로 울기도 하였다. 이집에서는 사람이 모이면 아침부터 저녘까지 울기도 하고 떠들기도 해서 곧 근처 사람들의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고, 이상한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수사기관에 조사를 부탁하였다는 소문도 들려 왔다.
뿐만 아니라 또 평양에서의 식구의 가족 중에서 남으로 와서 검사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이  있어서 기회만 있으면 선생을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는 움직임도 있어서 부산영도의 집회를 중지 하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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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 무렵에는 어디를 가더라도 누구한테 쫓기는듯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나와 문선생은 여기 저기를 돌면서, 고심하고 있는 식구들과 그가족을 격려 하고 있었지만 겨우 방을  얻더라도 일주일 정도만 지나면 문선명이 어디 어디에 있다고 하는 소문이 나서, 수사기관에서 사람이 조사를 받는 상황이 계속되곤 하였다.
이유는 문선생이 이전에 북한에서 사회질서 문란죄로 복역한 사실이 있어서 남쪽으로 가서도 또 고치지 못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가 하는 것이, 북에 있던 식구의 가족들이 남으로와서 수사기관에 들어간 사람이 보복을 겸해서, 뒤쫓아 다니고  있기 때문 이었다.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

유효원이 원리해설을 집필

1954년 2월경 대구에 있던 문선생이 나에게 말하기를 서울 교회의 기초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너는 부산으로 가서 유효원을 데리고 먼저 서울로 가라 나는 바로 부산으로 가서 유효원을 만나 문선생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기뻐하며 동의하였다. 유효원은 부자유 스러웠으므로 기차를 밤새도록 타는것을 근심 하였으나 양윤신이 자기도 유효원씨와 함께 서울까지 가겠다고 동행해 주었다.
그날 야간 열차에 12시간의 여 행 이었지만 유효원은 전혀 피곤한 기 색을 보이지 않았고, 더구나 희망에 찬 표정으로 기차를 타고 있었다.
유효원은 일본식민지 시대 경성제대 의학과(현 서울대학교)의 학생 이었는데 신병으로 인하여 할 수 없이 중퇴하였다고 한다. 대단히 머 리가 좋은 사람으로 나는 이 사람이야 말로 꼭 장래 문선생을 위해서 큰 일을 해낼 사람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와서 곧 이 창환을 방문하였더니 반갑게 나를 맞이해 주 었다. 마침 유효원, 유효민도 와 있어서 함께 종로에 있는 이창환의 처남집으로 갔다. 우리들은 그날부터 원리해설 출판을 목표로 준비를 시작 하였다. 김원필이 정서한 원리원본을 순번대로 펴놓고 그것을 유 효민과 내가 고쳐서 이것을 유효원이 풀이해서 정리 구성해 가면서 원 리해설을 집필한다고 하는 순서였다.
한달전에 청진동 집에서 최선길이 원리원본을 도로 뺏어내지 못했다 면 이 작업은 무척 어렵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 간부들 (앞줄) 좌로부터 김관성, 이요한, 문선명, 저자 [박정화], 유효민
(뒷줄) 좌로부터 유효원, 강소령, 이한서, 이봉운, 신성묵 (당시간부들)

식사는 동대문에 있는 이창환의 형이 경영하고 있는 대중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종로에 있는 여관에서 숙박하면서 작업하는 날이 열흘쯤 계속되었다. 우리들은 어떠한 괴로움도 참아 낼수 있었으나, 여관주인과 식당주인들은 왜 그런지 우리들을 싫어하는 눈치였다.
대구에 있는 문선생을 찾아가 사정을 보고 하였더니, 5만원을 내 주면서 부산에서 간 양윤신과 함께 방을 마련해서 유효원과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해 곧 서울로 돌아와서 성동구 북학동에 방을 빌려 우선 되는대로 본거지로 삼았다.
이곳에 숙식을 같이 하고 있던 식구는 나, 유효원, 유효민 세사람 이었다. 이창환은 날마다  와 있었고,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 옥상현,이기환 등 여자식구들도 매일같이 와서 여러가지 일을 협력해 주었다.
그런데 어느날 문선생이 별안간 대구에서 서울로 왔다.
그런데 바로 그날밤 시경에서 왔다고 하는 6~7인의 남자가 신분증명서를 보이면서 시경까지 같이 가자고 말한다.
거기에 있던 전원이 연행되었는데 특별히 이렇다할 조사도 받은것이 없고, 일반적인 종교문제에 대해서 물었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통행금지 시간이 되여, 그날합은 시경에서 자고 아침에 돌아온 일이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연행사건 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양윤신과 함께 여러가지 가재도구를 사러 갔다. 이렇게 함께 장을 보노라니까 그녀는 이상적인 부부처럼 생각되었다. 하지만 양여사는 년령이 나보다 훨씬 아래였다. 인생은 길어야 할 터인데도 그녀는 몇해후에 나보다 앞서 죽고 말았다. 사람의 운명은 누구에게도 알지 못하는 것인가 보다. 그녀가 우리들의 교회에 들어 와서 여러가지 일이 있었지만 복귀 받으려고 그녀는 대단히 노력한 사람이었다.
식구들이 점점 늘어나 이제까지 쓰던 방으로는 식구들 전원이 함께 일하면서 지내기가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같은 북학동에 있는 대문이 셋이 나 있는 큰 집으로 옮겼다.
문선생은 그집의 남쪽에 따로 방을 빌렸다. 식구들이 많이 모여서, 부산에 있던 이수경, 김상철과 이창환도 함께 있었다. 이즈음에 유효원 동생 효영씨가 조기 잡이를 하던 차에 금빛 같은 조기를 한 가마니 갖어와 식구들이 포식한 일도 있다. 또 잊을수 없는 일이 하나가 있다. 어느 정치가가 지능이 좀 떨어지는 딸을 한사람 우리들의 교회로 데려고 왔다. 이 교회에  한동안 맡겨 두면 낳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덟살 된 그 아이는 식사를 하고 있노라면 꼭 똥을 싸기 때문에 모두들 큰 일이었다.
그래도 함께 기도를 받던지 하면 기적이 일어 날지도 모르겠다고 우리들도 생각해서 열심히 참고 견디어 봤다.
그러나 1년이 경과해도 상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서 부모들은 그
아이를 데려가고 말았다.
이 무렵 이수경은 우리들 식구의 생활비 때문에 일하러 나가서 사진에 색을 칠하는 작업을 해서 돈을 벌어 온일도 있다. 이창환은 교회의 전도문을 영문으로 작성해서 세계각국의 유명한 인사들, 특히 유명한 목사등 백여명에게 발송한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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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은 이러한 것이었다 동쪽 나라에 재림메시아가 왔다. 숭배하자. 의심스러운 자는 기도를 통해서 들어 봅시다. 그리고 문장 끝머리에 이창환 자신의 사진을 붙여서 발송하였다.
이러한 작업으로 아침부터 저녘까지 분주 하였다. 유효원은 매일 원리해설 집필에 몰두하고 있었고 유효민과 나는 줄곧 원리 원본을 베껴 쓰고 있었다. 유효원이 어느때 「이 원리는 모순이 잔뜩 있어서 잘 모르는 곳이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고 나에게 말했다. 둘이서 문선명에게 철저히 질문 하였더니 그는 대답을 못하였다. 유효원은 뒷일은 하늘에 맡길수 밖에 없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자기류로 집필하였다. 김상
철은 이무렵 영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하게 되어 여권 수속을 하는 서류를 써 달라고 나에게 부탁 하기에 써준 일이 있다. 김재근(대구할머니)이라고 하는 할머니도 있었다. 대구에서 서울로 와서 한 겨울에도 우물가에 가서 냉수를 퍼끼었는 일을 매일같이 하고 있었다. 늦으신 분이라서 병이라도 나면 안된다고 염려 하였지만, 무척 건강해서 열심히 견디고 있었다.
이 무렵 부산에서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고 하던 송도욱이란 사람이 입교 하였다. 병역을 기피하고 있던 김원필은 영도의 송도욱의 집 이층에 방을 하나 빌려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당시 부산에는 식구들은 그리 많지 않으나 서울에서는 낮에 신정순, 오명춘, 양윤신, 이순철, 김인주등의 부인 식구가와 있었지만 임영신이란 미망인이 새로 유효민의 전도로 들어 왔다. 그녀에게는 어린딸이 있었는데 부산의 송도욱의 집에 맡겨서 길러 달라고 하였다. 임영신은 식구들의 식사 준비를 돕고 있었다.
이 당시는 식구들의 생활비가 큰 일이었다. 유효민은 본래 사진업을 해서 솜씨도 좋았으므로 시내나 지방을 돌아 다니면서 각지의 여러 유적지를 사진으로 찍어다가, 그것을 푸로마이드로 만들어서 파는 장사를 생각해 냈다. 우선 닥치는대로 해 보니까 예상외로 잘 팔렸으므로 우리들은 푸로마이드 제작에 온 힘을 쏟게 되었다.
나는 사진에 광택을 내는 일을 담당하여 밤중까지 작업을 하였다. 임명신도 부엌일이 끝나면 바로 사진을 씻는 일에 열중하었다. 식구들이 힘을 합해서 푸르마이드를 대량으로 제작 하였다. 이 일이 적중해서 한꺼번에 경제적 여유가 생겨서 식구들의 생활비를 모두 충당 할수 있게 되었다

통일교회 창립의 날

▲ (앞줄) 좌로부터 저자, [박정화], 문선명, 백운학 (관상가), 김원덕, 유효원
(뒷줄) 좌로부터 김상철, 이요한, 이창환 (당시사진)

1954년 5월3일 성동구 북학동 391에 있었던 교회에서 문선생을 중심한 이창환, 유효원, 김상철, 박정화, 유효민의 다섯 사람이 에워싸고 있었다. 드디어 문선생을 중심으로 해서 전세계에 원리를 포교하기 위한 일을 개시하는 날이 왔다.
우리들은 어떠한 명칭으로 하면 좋을까 하고 의논 하는데 우선 세계의 기독교를 통일 한다고 하는 목적에 알맞게 “세계기독교통일” 이라고 하는 머리글자를 붙이기로 하였다. 그 다음을 “심령협회”로 할것인가 신령협회”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 의논이 있었지만 나는”신령협회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해서 최종적으로 “신령협회” 로 결정 된 것이다
이리하여 원리를 내세워서 전세계의 기독교를 통일하려고 하는 종교단체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 (世界基督敎 統一神靈協會)” 가 이 세상에 처음으로 창립되게 된 것이다. 초대협회장에는 여러가지 의논한 결과 이창환이 취임 하였다 그런데 그는 3개월만에 탈퇴하고 말았다. 
(주=현재는 5월1일이 창립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5월3일 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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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 사건무렵

교수와 학생들의 대거입교

▲ 여대생 식구들과 문선명

❖ 사진 추가


▲ 문선명교 최순화

서울의 명문교 이화여자대학의 음악교수 양문영*이 입교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녀는 3일간 文씨의 강의를 들었다. 그러더니 기적이 일어나서 성령이 충만한 그녀는 별안간 지금까지 사단에서 가로막했던 벽을 차고 떠들어 대면서 발로 벽을 걷어 차는등 크게 소란을 피웠던 것이다.
그 후 신당동의 양문영 여사의 집에서 유효원이 매일같이 원리해설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다음에 이화여자대학의 기숙사 사감인 한충화가 입교해 왔다. 또 같은 대학의 영문과 교수 최원복과 김영운, 연세대학의 교수 박상래, 학생인 유경규, 황환채, 오승택도 입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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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서울로 온 식구중에 유신희라고 하는 여성이 있었다. 저 영도집회때 집을 빌려  준 신성묵의 처이다. 그녀는 어느날밤 교회 옆에 방을 빌려살고 있던 文씨의 방을 찾아가 방을 노크하니까 누구냐고 가만히 묻기에 신희입니다 라고 이름 대자 들어오라고 하여 안으로 들어 갔다. 
그리고 그자리에서 복귀의 실천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때에는 이미 복귀를 받았던 김인주가 복귀에 대한것을 귀뜸 하였다. 김인주에게 권유를 받은 유신희는 용기를 내서 복귀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 후에 유신희는 여러 남성 식구들과 복귀를 하였다. 나도 실은 유신희와 복귀를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바로 뒤에 등장하는 김 덕진과도 복귀를 하고, 나아가 김 덕진은 다른 여성과 복귀 하고 그 여성은 또 . .  별안간 70몇 사람의 바퀴가 되고 말았다. 그후 목사가 된 김덕진은 너무나도 난맥을 이룬 통일교회의 섹스를 스스로 고발하고 책으로 해서 발표하겠다고 선언하여 큰 소동이 일기도 하였었다. 
(후술)

김덕진 (金德振) 이란 사나이

❖ 사진 추가


▲ 1956. 김덕진과 6마리아

그 무렵 나는 매일밤 10시경까지 사진의 광택을 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밤 검은 UN군 코트를 입은 청년이 찾아와서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여 어디서 온 누구냐고 물으니까, 김덕진이라고 하며 북쪽의 숭실전문학교의 문과 출신으로, 간첩죄로 군사재판을 받고 사형을구형 받었으나 판결은 무기징역으로 복역중에 재심에서 무죄가 되어 남쪽의 동촌육군형무소에서 나온 길이라고 한다. 그리고 형무소 안에서 만난 이석빈이란 사람이 문선생에게 전해달라며 “아버님께” 라고 쓴 편지 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를 문선생이 있는 양문영의 자택으로 안내 하였다. 그에게는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작곡과 작사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입교하자 마자 곧 성가(찬송가)의 작곡과 작사를 하기도 해서 문선생도 그 음악적 재능을 칭찬하고, 식구들 중에서 제1번으로 문선생에게서 양복을 얻어 입는 영광을 맞았다. 
식구들도 늘었다. 김찬균, 정린정, 안창성, 강정원, 차만춘, 이소담, 유광렬, 이진태, 박승규, 이월성, 김원민, 황은자, 지생연, 유동회 등이다.

❖ 사진 추가


▲ 1955.5.23

그 다음에 들어온 이는 지원대, 안정국, 김순화, 신미식,정대화, 김주화, 이관선, 이기석, 박봉애, 남궁철, 이영일, 최정순, 이인복, 김화영, 김정은, 사길자, 박영숙, 서명진, 이정호, 김영휘 등이다.
교수에 이어서 이화여자대학 학생도 많이 입교 하고 있었으나, 이단적인 신앙을 이유로 14인이 대학에서 퇴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전에 교수들은 사표를 내고 퇴직하고 있었다) 퇴학이 된 학생은 신미식, 사길자, 김정은, 서명진, 박승규, 정대화, 박영숙, 박승희, 이계순
정원, 최순화, 김숙자 들이다.

대구에서 또 전기 고문
본부교회는 다음해인 1955년 1월 북학동에서 같은 성동구의 흥인동에 있는 새 집으로 이사 하였고, 또 다시 3개월 후인 4월 27일 중구의 장충동으로 옮겼다. 
이전하고 얼마 안되는 5월 13일 교회로 치안국의 형사 2명이 찾아왔다. 그들은 교회에 스며들어 우리들의 행동을 살피고 있었고 경찰의 수사관도 버티고 있었다. 경찰의 수사에는  꽤 익숙해 있는 편이었지만 이번만은 좀 다르다고 느낄 정도로 많은 수사관이 투입되어 있었다.
그러한 긴박감을 알지 못하고 지방에서 온 나이든 여자 식구들은 기가나서 떠들거나 날뛰고 있어 상황을 이야기하고 주의를 한일도 있었다.


▲ 북학동시대 최초의 본부교회 – 옥상현* (좌) 강옥실* (우)

대구에 있는 문선생 한테로 가서 이 상황을 보고 하고 금후의 대책을 의논하기 위해서 나는 서울역으로 나아갔다. 그때 역에는 김영희* 가 와 있었고 황환채등이 전송하러 나와 있었다. 나는 김영희가 부산에 가는 목적을 알고 있었으므로 대구까지 함께 가기로 하였다.
앞에서도 기술 하였지만 김영희는 연세대학의 학생시절에 부산의 영도에서 문선명에게 정조를 때앗긴 여성이다. 자세한것은 후술 하겠지만 이때 그녀의 배는 출산 직전이어서 제법 눈에 띄이고 있었다.
연세대 재학중인 오승택도 함께 일본에서 출산을 돕기 위해 부산에서 밀항하려는 참이었다. 그리고 대단한 고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대구에 도착해서 우선 이요한 목사의 집을 찾았더니 방은 텅비어 있었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서둘러 나왔으나 어디서 지켜보고 있던 형사가 나와서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면서 이집에는 무슨 목적으로 찾아 왔느냐. 이목사와는 어떠한 관계이냐. 문선명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느냐 등을 물어 왔다. 신분증명서를 제시 하라고 해서 보여 주었더니 당신이 박정화 인가라고 말하였다.
대구경찰서까지 연행되어 밤새도록 조사를 받았다 그 내용은 나라면 문선생이 있는 거처를 알터이니까 대라고 하는 것이였다. 나는 정말 몰랐으므로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라고 말했다. 만약 알았다 하더라도 나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밤 10시경에 연행되어서 아침 10시까지 조사를 받았다. 그때도 밧데리를 양쪽 엄지손가락에 연결하는 전기고문을 받았다 서을에서 한차례, 지금이 두번째였다. 
그후 경찰서에서 나와서 들은 이야기지만, 내 바로 뒤에 김안실의 형이 경찰이 있는것을 모르고 이목사를 찾아 왔다가 내가 붙잡혀 간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그때 문선생은 이목사와 대구의 식구들을 데리고 용문산에 가 있었기 때문에 경찰에서 피할수가 있었다.

푸로마이드 제작판매


▲ 당시 (안압지)

이 무렵 유효민의 제안으로 전국울 순회 하면서 명소의 경치나 유적등을 촬영한 사진과 서울의 거리나 배우들을 찍은 사진을 푸로마이드로 해서 판매하였다는 것은 앞에서 말하였다. 
사진촬영과 현상기술, 재료구입 등은 본업인 유효민이 담당하고, 암실에서의 작업을 김원필, 유효영, 이수경이 도왔다. 흥인동의 본부교회는 단독 주택 이었으므로 방이 다섯이나  있고, 응접실과 부엌을 겸한 방까지 있었다. 푸로마이드의 제작과 원리강의를 하는 장소로서는 대단히 편리한 곳이었다. 정원에는 나무도 있고 대단히 좋은 집이었다.
이집으로 이사와서 부터 입교하는 사람도 불어나서 통일교회는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그때에 신문이나 소문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통일교회에 한번 들어가면 어찌된 방법인지는 몰라도 2~3 일에 세뇌되어 가족을 버리고 입교하게 된다. 소문에는 교회의 내막을 조사하려고 작은 방에 빨간 불이 켜져 있어서 밤새도록 사람이 드나 드는 것을 보고  저 방이 사람을 홀리게 해서 유혹하는 장소임에 틀림없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은  그 방은 사진제작 하는 암실이었다.
푸로마이드 제작은 밤중에 사진에 광택을 내는 작업을 해서 날이 밝기전 완성해 놓았다. 새벽녘이 되어 통행금지가 해제 되는 것을 기다려서 제일착으로 거리에서 담배 라이타 돌을  행상하는 전쟁 고아들이 와 도매 떼기로 사기 때문에 푸로마이드는 곧 모두 팔려 나가고 말았다.
이렇게 푸로마이드가 잘 팔려서 제법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다. 교회에서는 매일 70-80명 가량의 사람이 식사를 하고 있어서 그 때문에 매일 같이 쌀 한가마 정도의 밥을 해댔다. 당시의 부인 식구들에게는 엄청난 고생이었을 것이고, 식사비도 꽤 많이 들고 있었다.
그러한 경제적인 지원은 전부 이 푸로마이드 판매로 충당하고 있었다. 서울 거리에는 한동안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피난민의 노천상들이 그때까지는 널판지 위에 미국담배를 올려 놓고 팔고 있었는데, 그것 대신에 몇 백 종류나 되는 푸로마이드 사진을 올려놓고  팔고 있을 즈음 노점 상인들이 거리 구석구석에 늘어나 사진 판매수입에 재미보게 되었다.
어떤 날 아침은 광택작업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나가보니까 남자 세사람이 원리를 들으러 왔다고 하면서 서있었고 맨앞에 서있는 사람이 아니 바로 김인철이었다.

▲ 사진을 짜르는 여자식구들을 오른쪽 김영화* [ 김명희 ] 김경식

이 사람과는 내가 북조선의 내무성 제2여단에서 해주 중대장을 하고 있을때 잘 알던 사이였다. 그는 운수 주식회사의 해주지점장으로 근무하면서 해주 여관을 경영하고 있었다. 내가 그 여관에 약 두달동안 투숙하고 있을때, 두 사람은 술 친구가 된 사이였다.
우연히 이러한 곳에서 만 날줄은 정말로 몰랐다 서로 반가워서 어쩔줄을 몰랐다. 서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바도 있었다. 만약 그가 북조선군의 38선 부근에서 대대장을 근무한 나의 전력을 밀고 한다면, 수사당국은 북의 간첩용의자라고 하는  구실로 나를 구속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 페를 끼치게 되고 중대한 영향이  될 것이다. 
우선 이일을 먼저 문선생에게 보고 하고, 다음은 그의 행동에 주의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김인철은 열심히 교회에 다녀서 중요한 간부가 되였고 나의 과거의 일은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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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0년 가량 지난뒤 그를 만날 기회가 있을 때, 당시의 나의 심경을 고백해서 서로
간에 크게 웃은 일이 있었다.

3대째의 비서역 송도욱 (宋道旭)
부산 영도에서 입교한 송도욱 집사는 살충제 행상 방문 소독을 하던 사람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시대에 만주에서 조선독립운동을 해온 사람이다. 교육은 대단스레 받은것이  없었으나 짜임새 있는 체격, 대나무를 쪼갠듯한 성격에 행동력이 있고 판단력도 있었다.
문선생의 비서역은 우선 내가 오랫동안 맏았었고, 그 뒤를 유효민이 맡아 주었다. 그리고 3대째가 송도욱이 었다.
그는 송비서에서 송장로로 승격, 동시에 문선생과 함께 보좌 할 수 있는 신분이 되었다. 내가 서진 광산에 있을 때 (후술) 그는 문선생의 심부름 와서 온갖 자랑을 늘어놓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자랑끼(뽐내고자) 어린 태도는 두려움을 모르는 것 같았다. 너무나도 잘난
체 하며 큰 소리를 치고 뽐내는 말을 함부로 해서 나는 정석천 장로 앞에서 송장로에게 충고한 일이 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지방을 순회할때 순진하고 얌전한 식구들을 놀래키기도 하고 이해할  수 없는 허풍을 떨지 못하도록 충고를 하였다. 
그때의 일이 흡사 어제일 처럼 생각되는데 지금은 송장로도 정장로도 돌아가셧다. 하늘나라에 오르셔서 지금쯤 어떻게 하고 계실까? 당시의 식구 중에서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은 서울의 김영도씨로서 해방후 상해에서 귀국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송기주, 조동석, 김병욱, 유효
원, 송도욱, 정석천, 유경규, 신정순 양윤신, 김재근, 라순렬, 이기환의 손으로 그 밖에도 부인 식구들이 몇 사람인가 죽었다.

잠시 숨을 돌리며
흥인동 교회에서 푸로마이드 사진 작업을 하고 있을 때이다. 프로마이드 판돈 가운데서 500원 정도를 떼어 가지고 토요일 저녁때가 되면 유효영, 나, 이수경 등과 함께 작업의 피로도  풀겸, 동대문 시장으로 나가서 노천에서 부인들이 다라에 돼지고기나 순대를 파는 것을 사 먹었다.
맛있는 안주감으로 맛있는 소주를 한잔쯤 곁들인다. 그러면 기운이 나는듯 했다. 일에 몰려 피로해지면 토요일이 되면 돼지고기와 순대로 기운을 차리자고 서로 격려하기도 했었다. 그것도 역시 어느덧 엊그제 일 같이 생각이 난다. 
정말로 시간의 흐름이란 흐르는 물과 같이 빠르구나 푸로마이드의 제작에는 무엇보다도 유효민의 두뇌와 기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처음에는 사진 기술에 무지한 나는 푸로마이드의 제작이나 판매 따위는 아이들의 장난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었는데 막상 시작해 보니까 예상외로 수입이 많았다. 또 대량 생산에 필요한 재료 같은 것을 그때 그때 맞추어서 정확하게 요령 있게 구입하는 유효민의 치밀한 계획성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흥인동 시대의 식구들은 교회의 확장을 도모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열심히 작업하는 것으로서 버티어 갔던 것이다. 
또 그후 유효민이 발명해서 특허를 얻은 “산탄 공기총”의 대량 생산에도 성공하였다.
이때 들어온 수입은 단위가 틀릴 정도로 커서 몇 십억 이 나 되었다.
지금은 탈퇴해서 식구는  아니지 만, 유효민은 라순열 (지금은 고인)과 결혼하여 36가정의 일원으로서 축복(결혼)을 받은 사람인데 3남매의 아이들이 있다. (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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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부 체포 사건의 진상

문선명의 체포
이화여자대학의 5인의 교수(양문영*, 한충화, 최원복, 김영운, 이정호), 이화여자대학생 14인 뿐만 아니라 연세대학의 교수 박상래등이 대거 입교하면서 부터, 이화여자대학 측에서는 이 사태에 분개해서 수사 기관에 고소하여 그 진상을 조사할 것을 요구하였다.
앞에도 썼지만 1955년 4월 27일에 본부 교회가 장충동으로 이전한 뒤에 5월 13일 검찰에서 수사원 한사람과 치안국 특수 정보과에서 형사 두사람이 교회에 왔다. 그들은 교회에 스며들어 원리 강의를 듣고 그것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또 출입하는 식구들의 신원을 검문도 하고 일상생활에 관해서도 감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 두달 동안 우리 식구들과 침식을 함께 하면서 철저하게 조사하였다.
경찰 출신의 조동석을 통해서 경찰의 수사 방침을 알아 본 결과 문선생을 비롯하여 몇 사람의 간부가 구속 될 것이 예측되었다. 
문선생은 삼각산 밑에 임시로 빌린 집에서 박상래와 같이 숨어살고있었는데, 7월1일 최종 방침을 결정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모이게 했다. 나, 유효원, 유효민, 조동석, 노동휘, 이순철, 오명춘, 김인주,신정순 등이 문선생 있는 곳으로 가서 여러 가지 대책을 상의하였다. 
그때 이순철은 선생님을 경찰에 넘길 수는 없습니다. 한동안 일본에 가 계시도록 하면 어떨까요? 하고 주장하였다. 자금도 모두 준비될 수 있다고 한다. 여러 가지 말이 나와서 좀처럼 방침이 서지 못했다. 결국 이번에는 도망칠 수도 없을 것 같으니 우리들이 경찰로 가는 편이 금후를 위해서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서 그렇게 결정하였다. 
그 무렵 입이 가벼워서 문제가 되었던 김덕진은 이순철, 김인주 두사람이 감시하기로 하고 중구 산림동에 집 한채를 빌려서 살도록 하였다. 나도 그 방에서 3일간 감시역으로서 함께 있었다. 
1955년 7월 4일 드디어 문선생이 구속되었다. 여기까지 이르기에는 두달 이상의 내탐과 수사가 있었다. 치안국 특수 정보과의 경감이담당관이었는데, 우선 당시의 협회장 유효원이 조사를 받았다. 협회장에 대해서는 원리의 내용에 관한 조사가 있었다. 원리의 어떠한 부분이 대학교수나 대학생들에게 학교를 떠나게 하여 통일 교회에 입회하게 하였는가? 통일 교회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서 신앙하고 있는가? 등에 관해서 하루종일 조사를 받았다. 
다음에는 내가 조사 받았다. 문선명과의 관계는 언제부터인가?흥남감옥에서 함께 있었을 때의 상황은? 등등을 물었으므로 앞에 쓴 바와같이 (제1장) 요약해서 말했다. 전에는 문용명 이었었는데 왜 부산으로 와서부터 문선명으로 개명하였는가? 를 물었으나 나로서는 모른다고 대답해 두었다. 우리들이 어떤 죄가 성립하는가를 수사당국이 검토하고 있을 무렵, 한가지 문제가 떠 올라왔다.
북에서 온 사람들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한 시민증이 발급되지 못하는 것인데 어째서 문선명은 가지고 있는 것인가? 나이도 속이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처음 조사 때에는 문제 삼지 않았던 것인데, 그후 문선생이 자기의 증명서의 작성 경위에 의해서 추궁되자 매우 곤경을 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날 나는 치안국으로 출두해서 북학동 교회 시절, 동회 사무장에게 부탁해서 신청 서류를 준비하고, 내가 선생의 시민증을 만들어 냈다고 설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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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됫돈을 주어서 매수해 가지고 “위조한 서류” 로 발행된 것이다. 내 시민증도 그때 만들었다. 나이를 속였다는 것은 병역기피 때문이었다. 뿐만아니라 거기서 많은 신자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드는 비용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고 질문을 받았다. 
“프로마이드” 를 제작 · 판매해서 그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그 다음에는 경제담당은 누구이며 조직은 어떠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는가 고 물었다. 
경제의 담당자는 나 박정화이고, 선생의 지시에 따라 모든것을 처리해 왔다. 푸로마이드에 관해서는 사진관을 했던 유효민이 재료의 구입이나 제작을 위해서 전력을 다 하였고, 요효영, 김원필, 이수경, 박정화등이 도와 주워서 아침까지 완성해 놓으면 새벽녘에 소매인들이 와서 모두 도매로 떼어 갔다. 그 돈을 생활비로 쓸수가 있었다.
그후 드디어 간통문제 (혼음관계) 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신자인 부인네들이 박정화는 대사단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슨 뜻인가 고 물었을 때에는 정말 난처하였다. 내가 잠자코 있으려니까 담당관이 큰소리로 역정을 내면서 당신은 문선명과 오랫동안 같이 있었으니까 그가 하는 행위를 다 보았을 것이다. 
그것을 모두 말하시오. 문선명은 재림 메시아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것처럼 그도 죄값으로 죽는다고 하는 이야기인데 그것이 정말인가 대답하시오 하며 책상을 치며 윽박질렀다. 
나는 내가 대사단이다 라고 하는 이야기는 들은바가 없다. 식구들의 부인네들이 어째서 그러한 말을 했는지, 나로서는 모르겠다 고 대답했다. 그했더니 담당관은 대구에서 온 신자의 김채근 할머니가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을 자기들의 조사관이 듣고 왔다 당신이 모를이가 없다 고 말했다.
이 문제는 그 다음날 대구 할머니가 하나넘의 계시를 받았기 때플에 그대로 말한것 뿐이다라고 하는 것을 자진해서 치안국에 출두하여 담당관에게 설명하였다.
이무렵 박정화는 대사단이다 라는 소리가 일부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문선명의 일을 속속드리 알고도 남음이 있는 내가, 만약 수사당국에 말한다면 문선명은 절대로 온전하게 있을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재림 메시아인 문선생” 은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게 되며 그래서 그 열쇠를 쥐고 있는 박정화는 사단이라고 순진한 할머니들의 발상이었다. 그만큼 문선명의 구속은 식구들에게는 위기감을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 7장의 유효민의 항목 참조)
그 참뜻을 알았다면 담당관은 더욱 철저하게 집중적으로 나에게 불도록 (사실을) 하였을 것이다.

조사의 촛점은 혼음관계
혼음관계에 대해서는 더욱 엄하게 집중적인 조사가 계속되었다.
담당관은 점점 깊은 곳을  찾아 내게 되어, 당신들의 원리에 따르면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성교를 하고 해와는 또 다시 아담과 성교를 함으로서 원죄가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 원죄를 복귀하기 위해서는 죄없는 하나님과 같은 사람이 이세상에 나타나서 그사람에 의한 성교가 행해지면 그 죄가 깨끗해진다. 요컨데 복귀 한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정말인가?
그 원리에 따라서 문선명은 여자들에게 자기가 재림 메시아니까, 자기와 섹스를 함으로서 복귀된 인간이 된다고 말하여 많은 여성 특히 유부녀들과 섹스를 하고 있는것 같다.
당신은 그것을 목격한 일이 있는가” 고 추궁당했다. 물른 사실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원리문제에 관해서는 협회장의 유효원이 담당하고 있으니까 자세한 내용은 그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경제부문을 담당하고 있어서 그러한 일은 생각해 본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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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생을 감옥에 있을 무렵부터 믿고 따랐을 뿐이다. 많은 여성 특히 유부녀와 섹스를 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본일도 들은 일도 없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랬더니 담당관은, 당신들의교회에는 두갈래 의견이 있는것 같다.
하나는 원리를 무조건 지지하는 사람들, 문선명과의 섹스로 피를 바꿔 넣음으로 해서 진정한 복귀가 되어 죄와는 관계가 없는 인간으로서 다시 태어난다. 이와같은 부부에게서 태어난 자손들이 이세상을 지배 할 때에만, 완전복귀된 에덴의 동산과 같이 죄없는 세상이 된다고 하는 것을 믿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문선명도 우리들과 같은 인간으로서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 문경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째서 그가 죄없는 원죄와 관계가 없는 재림메시아가 되어 혈대교환 (血代交換) 을 할 수 있어서 복귀 시킬 수가 있는가 라고 하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먼 문선명도 결국 원죄를 이어받은 타락한 인간이지, 하나님은아니며, 복귀 (섹스) 로 사람을 구제한다고 하는 따위의 일은 할 수 없다 고 하는 의견인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섹스로 복귀가 된다” 않된다 하는 이야기는 누군가 꾸며내서 퍼뜨린 소문이다. 그러한 사실은 없다. 
문선생은 북한에 있을때에 대관절 무엇을 했는가, 또 남쪽으로 피난해 와서 부산이나, 대구에서도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은 일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일이었던가 알고 있는가?
문선명은 북쪽에 계실때 기독교의 성경원리를 연구하고 있었고, 새로운 진리를 신자들에게 가르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기성교회의 신자들이 많이 몰려왔다.
그 신자들의 가족이 남쪽으로 피난와서 문선생이 부산, 대구등지에서 성경 원리의 이야기를 전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고, 수사기관에 통고해서 그 때문에 다소의 문제가 생긴것 같다. 
그렇다면 문선명에게는 처자가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거요.
부인은 최 선길과 장남인 성진군이 있오, 극히 최근까지 부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서울에 와 있을거요. 그 부인이 문선명이 여러 여자와 성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산에서도 그랬지만, 또 서울에 와서 집안살림을 모두 때리치워 버리고 여인들이 오는 것을 방해 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인가?
이것은 혼음관계의 증거가 될만한것 아닌가?
부인이 부산에서 서울로와 그러한 짓을 한 것은 사실 이지만 단지 신앙의 문제로 일어난 것이지 절대로 섹스관계라고 하는 것은 있을수 없다. 그러한 사실은 없다.

간부 5인을 기소
나의 다음으로 남자 식구로서 유효민과 유효영이 조사를 받았다. 김원필이 그 다음에 조사를 받았는데 그는 지금까지 병역을 기피하고 있어서 그것이 문제가 됐다.
그리고 부인 식구들이 조사가 시작되었다. 옥상현이 맨 먼저 조사를 받았다. 여성의 조사는 낮에만 하였고, 하루에 한사람씩 조사해 갔다. 
신정순*, 오영춘*, 양윤신등이 차례로 조사를 받았다 그내용은 모두혼음관계 (섹스관계)의 사실 수사였다.
5일에는 김원필이 구속되고 6일에는 유효민 유효영이 13일에는 유효원이 그리고 18일에는 여자인 이성화가 구속되었다. 결국 문선생을 포함해서 다섯분이 구속된 셈 이다.
그 당시 교회의 섭외담당은 노정우, 조동석 두사람이 담당하고 있었다. 조동석이 치안국에 나아가 박 정화선생이 구속되면 몇십명이나 되는 식구들의 생활에 영향이 있으니까 우선 보류해 주었으면 한다. 검찰에서 출두명령이 있을 때에는 언제든지 출두시킬 터이니라고 약속한 덕에 나는 구속되지 않았다.

▲ 법정에 선 문선명(우측) 유효민, 유효영, 김원필

이때 문선생은 중부경찰서의 유치장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중부 경찰서에는 김덕진의 처남 김선환이 경찰관으로 있어서 비교적 간단하게 면회를 할 수 있었다.
이 성화* 는 아직 젊었기 때문에 담당관의 혼음관계 조사에서 유도심문에 걸려 구속되게 되었으나, 부친이 끈질긴 교섭으로 기소는 되지 않고 일주일 후에는 석방 되었다.
1955년 7월 29일 남자 5인은 전원 병역기피만으로 기소되었다. 
검찰에서 출두명령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으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 조 동석은 나에게로 와서 치안국에는 미국에서거짓말 탐지기가 도입되어 있어서 혹시 박선생이 치안국에 또 끌려가서 조사를 받게 된다면 이제까지 숨겨져 있던  것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것이 폭로된다면 큰일이니까 재판이 끝날때까지 어디던지 숨어 있는것이 현명하지 않을까요, 선생님도 꼭 찬성하실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빨리 숨을것을 제안 하였다.
나는 생각끝에 그 제안을 받아 들이기로 하였다.

수사의 손길에서 도피
그리고 문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장충동교회의 문선생의 책상 서랍속에 5만원짜리 수표가 있는데 여차할 때에는 쓰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마산으로 가서 마산 국립결핵요양원에 있는 양윤신을 찾아 갔다. 
마산요양원에는 그 당시 양윤신이 간호부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약 보름동안 거기서 식객 노릇을 했다. 
내가 마산에 있을때, 별안간 이원주라고 하는 사람이 그의 동생인 이덕순, 부산에서 온 신성묵과 박봉식, 거기에다가 양윤신의 친딸 김정숙 등과 함께 찾아왔다. 모두 우리들의 교회의 교인들이었다. 
우리들은 언제나 모이면 서울서의 문선생과 간부들의 재판에 관해서 걱정하고 있었다. 열흘 정도 지나고 나서 이원주는 어디론가 가 버렸는데 한참 뒤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이원주가 별안간 자기만이 재림 메시아 이고, 문선명은 재림 메시아가 아니다 라고 말하고 나선것이다.
그의 집에 모였던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전부 믿었고 낮이나 밤이나 울면서 기도하였다. 
이원주는 원리를 악용해서 양여사의 딸 김정숙을 비롯하여 여러명의 여성과 실제로 복귀의 섹스를 하면서 하늘의 원한을 풀어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등 떠들고 있었던 모양이다.
양여사는 혼비백산해서 요양원 일도 못하게 되어 그 요양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녀가 서울로 집을 빌려서 이사 하였으므로 나도 대구로 이동하였다.
대구로 이사는 하였으나 여기에도 교회가 있어서 도망해서 숨어 있는 몸이라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친척이 살고 있는 제주도 서귀포로 갔다 여기서 신문을 읽으면서 서울 지방검찰청의 재판동향을 알수 밖에 없었다. 
1955년 9월 20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윤학로 재판장, 강서룡 검사에 의한 일심공판이 열렸고, 같은해 10월 4일에 결심공판에서 문선생은 무죄로 선고되었다.
이 보도를 신문에서 읽고 문선생을 모신 사람으로서 무척 반가웠다. 유효원은 벌금 오천원 유효민, 유효영 두사람은 제2국민병법위반 (병역기피죄)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되어 석방되었다. 김원필만이 병역기피죄로 징역 1년의 실형을 받았다.
이때의 조사목적은, 복귀라고 하는 혼음(섹스)의 사실관계의 입증이었다.
그러나 부인 식구들이 자기들의 부끄1러운 이야기를 할 리가 없고, 그 남편들도 또 남자의 체면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문 선명을 고소하지 않았다. 결국 관계자 전원이 위증하였기 때문에 문 선명은 살아난 것이다.
부인 식구들이 문 선명과 섹스관계에 있었던 것은 물론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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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희생당한 여인들

▲ 문선명을 애워싼 마리아 (인처) 들 왼쪽 두번째부터 강옥실* [ 강현실 ], 임영신* [ 박영숙 ], 문선명, 옥상현* [ 옥세현 ], 신정순* [ 이득삼 ], 이순철* [ 김순철 ].

대공로자 옥 상현의 말로

전항까지 나는 당시의 사실들을 일기나 메모를 기초로하여 기술하였다. 경찰둥의 끈질긴  추적을 피해서 겨우 살려놓은 몇권의 일기도 이제와서는 귀중한 기록이다.
옥중에서 재림 메시아라고 믿고 “선생” 이라고 부르며 맹종해온 나의 어리석은 발자취나 심정을 모두 기술해서 고백했다. 글 속에 등장하는 “문선명 선생” 의 행동은 모두 사실이다.


▲ 옥상현* [ 옥세현 玉世賢 ]

우직한 군인이었던 나는 “선생”과의 약속을 지켜서 북쪽에 부모도 처도 다섯명의 아이들도 남겨두고 남하해서 “선생”의 충실한 분신으로서 노력해 왔다.
그런데 “선생”측에서 어느날 별안간 돌아갈 집도 가족도 없는 제자를 배신한 것이다.
나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사나이 였는지도 모른다
마을에서 쪽 떨어진 깊은 산속의 광산 사장이란 직함이 붙여져서 돌아치게 한 나는 몇해 동안을 보수도 없이 일만 하였다. 그리고 나와 교대라도 하는 것처럼 등장해서 통일 교회속에서 차츰 세력을 키워가는 군사정권의 무엇인가 괴상한 냄새를 옆눈질로 보았다.
문선명 선생은 어느새 내마음 속에서 더 이상 목숨을 바쳐서 지킬 가치도 없는 단순한 문선명으로 되버리고 말았다. 
전항까지는 그래도 “문씨” 라고 쓸 수가 없어서 “선생” 으로 기술하였으나, 이항부터는 모두  “문 용명”, “문 선명” 으로 기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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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카락으로 짠 양말
이제와서 생각하면 맨처음에 문 선명과 관련이 있던 여성으로서 인상에 남는것은 옥 상현*이었다. 흥남 감옥중에 있었던 문 용명(당시)에게서 자주 들었다. 
그 당시는 평양에서 흥남까지의 차표를 입수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었다.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 파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옥 상현은 차표를 사기 위해서 밤새도록 늘어서서 문 용명 을 면회하기 위해서 고생끝에 손에 넣을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문 용명에게 차입하기 위해서 미수가루를 정성껏 만들고, 겨울이 되면 속옷을 털실로 짜고 습을 넣어서 수용소까지 그 먼 길을 면회하러 다녓다. 여름에는 미수가루와 엿을  만들어서 때로는, 엿을 말랑말랑하게 해서 미수가루에 개가지고 가져오기도 하고, 삼베 옷을 만들어 오기도 하였다.
영양을 위해서 간유를 사 먹으라고 돈까지 주고 갔다고 한다. 자기와 피도 섞여있지 않은 사람에게 그렇게 열심히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남득이 되지 않았다. 내 사정과 비교해 본다면 나에게는 어머니도 계시고 처도 있지만, 3개월이나 4개월에 한번 면회오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녀는 자주 면회를 와서 언제나 여러가지 준비물을 가져오는 데는 나는 놀랄수 밖에 없었다.
나와 문 용명은 감옥 안에서 서로 아무일이고 의논하고 무엇이고 숨기는 것이 없었다. 어느날 그가 말했다.
“옥 상현이 자기의 머리카락을 짤라서 털실과 함께 짠 양말을 가져다 주었다.”
옛말에 진정한 은혜를 받은 사람을 위해서는 자기의 머리카락을 짤라서 그것으로 신을 삼아 은혜에 보답하였다고 했다지만 그러한 사람이 실제로 있구나 하고 생각하니까 머리가 숙여질 뿐이었다.
그 여성은 무엇 때문에 이다지도 헌신적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에 관해서는 문 용명 에게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가 가져온 미수가루등 을 나누어 주어서 그저 고맙게 먹었을 따름이다.
6 · 25동란이 시작되고 UN군의 북진으로 문용명은 10월 14일(1950) 출옥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다. 같은 죄수이였던 문 정빈과 함께 걸어서 열흘만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후, 나는 처음으로 옥상현의 집에서 그녀와 만났다. 옥상현의 자택은 상당한 부자집 같았고, 큰 마당이 있고, 집이 여러채 틀어서 있었다. 딸인 우정애, 우정순 자매와 함께 살고 있었으며 문씨의 신자였던 김원필은 사단의 집(자기집을 지칭)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며
식객으로 있었다.
옥상현이 치워준 방에서 문용명, 나, 문정빈, 김원필의 네 사람이 숙박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닷새쯤 지낼 무렵, 서울로 피나했던 가족 전원이 돌아왔다.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아침을 마치고 옥 상현과 남편인 우 하섭 장로가 성경을 들고 인사차 왔다. 
그리고 오늘은 일요일이니 함께 예배를 올립시다 라고 말했다.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하였으며, 우하섭 (禹夏燮) 장로가 성경을 낭독하고 설교하였다. 
그는 평양의 장대현 교회의 장로였다.

주인 우하설 장로의 탄식
그날 오후 우장로가 나에게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그의 방으로 갔다. 자기는 평양고무연맹의 이사장인데 당신의 동서에 해당하는 정황고무의 최내봉씨를 잘 알고 있다. 서로 절친한 사이다
얘기거리는 딴것이 아니고, 처와 문 용명의 관계되는 일이었다. 자기는 교회의 장로이고, 처인 옥 상현도 권사로서 교회에 열심히 시무하고 있는데 남쪽에서 왔다고 하는 청년이 이상스런 설교를 하고서 부터, 처가 몇주일간 이 집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원만한 부부로서 아무런 문제도 없이 사이좋게 살고 있었는데 별안간 처가 자기와 동침하는 것을 거부했다. 아이들은 다 자랐고 기독교의 장로집에서 이러한 이상한 것을 겉으로 들어내 놓고 따질수도 없고해서 처음에는 오랜기간에 걸쳐 설득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아무러 해도 허사였다고 한다.
훌릉했던 처가 틈만나면 돈을 챙겨가지고 문 용명을 위해서 나갔다. 
경제적 여유도 있고 해서 조금쯤은 어떠냐 싶어서 처음에는 생각만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빨리 부부가 전과같이 사이좋게 살고 싶어서 그것을 기대하고 열심히 기도하였으나 헛일 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 청년을 비롯하여 저의 처까지 전원이 경찰에 구속 되고 말았다. 
우장로는 평양 시내에서는 얼굴도 잘 알려져 있다. 체면도 있고 해서 경찰에 가서 구속한  이유를 조사였더니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는 김종화라고 하는 유부녀와 그 청년이 “어린양 잔치”라고 하며 결혼식 준비를 하고 있어서 이웃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경찰에 신고하여 구속되게 된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알았다.
우장로는 자기의 얼굴이 있어서 겉으로는 나서지 못하고 조카에게 부탁해 경찰과 연락을  하고 처인 옥 상현을 석방하도록 하였다. 
그 청년이 문 용명인데 자기는 그가 감옥에 있으니까 안심하고 있었다. 처가 저렇게 먼 흥남 수용소 까지 면회를 다니고 있어서 처음에는 그만두도록 설득한 일도 있었지만 결국은 듣지 않아서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박형도 예수를 믿는 크리스챤 이니까 문 용명과 같은 사나이와 함께 행동하면 언젠가는 벌을 받은것은 물론 이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매우 힘들게 될것이오. 문 용명 같은 사람과는 함께 행동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문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재산도
문 선명에게 몸도 마음도 채산도 다 바쳐온 옥 상현은 6 · 25동란으로 남쪽으로 피난해 부산에 들어가 개명한 문 선명에게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면서 굶주렸던 문 선명의 생활기반을 마련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서울 흥인동으로 교회가 이사한 후의 일이다. 
푸로마이드 제작에 성공해서 경제적인 상황도 상당이 좋아지고 있었는데 합숙한 교인들은 전원이 홀아비 살림이어서 옥상현이 선두가 되어 세탁을 하고 있었다.
식구들 양복이나 속옷 등을 넣어 두었다 각자가 자기의 것을 자기
의 상자에서 꺼내서 갈아입고 있었는데, 그 상자가 자그만치 24개나 되었다. 그 때의 옥상현의 고생은 필 설로 다할수 없을 것이었다고 생각 된다. 
훨씬 뒤의 이야기인데, 문선명과 결별하고나서 나는 부산으로 가서 주택건설 사업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권 창정이란 박사가 찾아왔다. 
자기도 집을 한체사고 싶은데 살수 있느냐고 하여 나는 그의 신청을 받아 들였고, 그는신청금을 내고 돌아갔다. 그후에 옥 상현이 찾아와서 자기의 둘째 아들을 건설현장에 써줄  수 없느냐고 한다. 사원은 필요치 않았지만 옥 상현의 부탁이기도 해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 다음날 부터 그 아들을 고용해서 1년 남짓 함께 일 한일이 있다.
주택건설이 끝날 무렵 목사가 된 우 장로의 말에 의하면 「집사람 옥 상현에게 마음 돌리라고 일렀지만 허사였고 결국 이혼 할수 밖에 없었다. 그후 자기는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어 지금 조그만 교회에 시무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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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와 이흔후 교회 부인 집사와 재혼 했단다. 또 사위인 권창정 박사는 자기 사위인데, 사위가 신청한 주택은 자기의 집인데 좀 보여달라고 하여 완성된 주택을 보여주며 장시간 이야기 했다.
문선명이 처 최선길이 남편이 여자관계로 행패를 부려 그주위에 있기가 거북 스럽게 됐다. 그래서 초창기 문선명의 됫바라지는 옥상현이가 맡아했다. 
부산 수정동 교회시절에는 네번씩이나 쫓겨 다니게 되었다. 그것은본처 최선길이 문선명이 있는 곳에 모여드는 부인 식구를 질투하고 집에 가재도구를 팔아 치우고 모여드는 사람들을내 몰기 때문에 하는수 없이 다른데로 뺑소니 이사갈 수 밖에 없었다. 
새로 이사 가면 문선명 처가 또 눈에 쌍심지를 켜고 끈질기게 추적 하다가 기발한 생각을  하였다. 옥상현 친척집에 가정부에게 돈을 주고 옥상현이 찾아오면 그뒤를 밝게 하여 미행에 성공했었다. 그것이 성공해서 새집을 찾아내 가지고 또 한차례 반복해서 큰 소란을 피웠다.
결국에는 식구들 전원과 함께 경찰에 연행되게 된 것이다. 
그때 부인은 두번 다시 큰소란은 떨지 않겠다고 하는 것으로서 석방되었다. 그후로는 교회에 일체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는 약속이었으나, 그 뒤 수정동 집에서도 최선길 부인은  또 같은 짓을 했다. 가재도구는 물론 집까지 팔아 치우고 문 선명은 서울로 도망쳐 버렸다.
이번에는 서울의 청진동의 작은 집으로 거점을 옮겼으나 어떻게 알아 냈는지 이집에도 최부인이 찾어와서 또 똑같이 가재도구는 물론 문 선명의 모든 것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문 선명이 원리 원본책도 집어 던지고 도망친 것은 이때 일이다. 
그 때 문 선명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던 옥 상현은 문 선명이 없어져서 무척 걱정하였다. 내가 혼자서 문 선명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니까 밤중에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에서 내 소매를 잡고 함께 가고 싶다라고 울었으나 나는 거절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안한 일 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때 서울에서는 문선명에게 체포영장이 떨어져서 옥 상현을 데리고 갔다가 도중에서 경찰에게 심문이라도 받는다면 큰 일이어서 할수 없었던 것이다. 
옥 상현은 한동안 대구 교회에서 살면서 문 선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유 효원을 부산에서 서올로 데리고 와서 북학동에 방을 빌렸을때, 대구에 있는 옥 상현을 서울로 불렀다.
그때부터 또 그녀는 문 선명과 식구들의 생활을 몽땅 돌보게 되었다.
7·4사건으로 문 선명이 경찰에 구속되었을 때의 옥 상현의 슬퍼하는 모습은 참아 볼수가 없을 정도였다. 
매일 단식하고 기도하며 마음속으로 부터 슬퍼하며 우는 모습은 옆에서 보고 있는 우리들도 머리가 숙여 질 것 같았다. 
그후 청파동으로 이사한 후에도 쪽 교회의 살림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내가 한동안 교회를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옥 상현은 교회 에서 쫓겨나고 없었다.
어느날 유 효민에게 옥 상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옥 상현이 유 효민에게로 와서 돈을 좀 빌려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옥 상현의 딸인 우 정애양이 와서 또 돈을 백 칠십만원만 빌려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었다는 것이다.
돈을 빌려 주었으나 갚아주지 않더라고 하는 것과 옥 상현은 그후  몇 차례나 돈을 꾸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걸어 왔지만 그 이상은 빌려 줄 수가 없어서 거절 했다고 한다.

퇴원해도 갈 곳이 없다.
옥 상현은 1946년 11월 6일 48세 때에 평양에서 문 선명과 만났다. 문 선명 은 그때 27세로 21세나 연상이 었다.
북으로 갔던 문 선명의 복귀원리를 믿고 육체관계를 가졌다. 제일 최초의 마리아 이다.
그 당시부터 문 선명을 따라서 약 40년간 몸도 마음도 재산도 바쳐서 보살펴 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는 터에 강산이 네번이나 바뀌는 세월이었다. 그렇게 오랜동안 문 선명의 옆에서 시종을 들던 사람이었다. 
한 순간도 문 선명과 떨어져서는 못 살아갈 것 같은 옥 상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옥 상현의 사정을 들어보면 교회가 노인 식구들을 전부 내쫓기로 하였기 때문에 그녀도 30수년간 다니던 교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교회에서 쫓겨날때, 단 일천만원의 돈을 받았을 뿐이라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 돈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장사 밑천도 되지 못하는 금액이다.
딸 내외에게 주택자금의 일부로 빌려준것 같은데, 먼 곳에서는 교회에도 다닐 수 없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교회에 다니기 위해서, 교회 근처에 작은 방을 하나 빌려서 거기서 살고 있
다고 하는데 참으로 어이 없고 마음 아픈 이야기였다.
만약 내가 사회에서 활약하고 있어서 사업이라도 하고 있었더라면, 살만한 집 한채 정도는 마련해 주고 싶고, 매달 적어도 생활비 정도의 돈을 보내주고 싶었다. 아흔몇살이나 되는 큰 공로자가 교회 떠난 사람에게 돈을 빌리러 다닌다니 눈물이 나을 정도로 불쌍한 이야기가 아닌가?
1985년 8월 16일 일승일 (一勝一) 을 선언하였다. 과거의 모든 죄를 전부 용서하고 사단을 복종시켜 그후에는, 사단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세상으로 복귀시켜 모든 축복이 통일교회의 식구들에게 가져와 준다고 본부 교회의 송 영석 목사가 설교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이야기 보다는 우선 옥 상현과 같은 사람에게 집 한채 라도 주워서 생활에 곤란하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 라고 생각하였다.

▲ 입원중인 옥상현* [ 옥세현 ] 문병인 저자 (1993.5)

옟날 흥남의 옥중에서, 문 선명에게서 원리나 “원화원이상” 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가슴이 벅차서 그것이 어느때 쯤 되는 것 인가요 라고 물었다.
그때 문 선명이 “7년후에는 그 시기가 온다” 고 대답하던 것을 어제 일 처럼 기억 하고 있다.
그로부터 벌써 40년이 지났다.
분명히 문 선명 자신은 큰 돈을 벌어 놓았을지 모르지만 꿈같은 이야기는 실현되지 않고 있다.
1993년 5월경 이었다.
유 효민으로부터 나에게 연락이 있었는데 옥 상현이 지금 인천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중인데 문병을 가자고 하는 것이다.
나와 유 효민은 인천 가좌동”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으로 가서 옥 상현을 문병하고 왔다. 올해에 96세라고 한다. 
이미 병은 다 나아서 건강 하였으므로 병원에서도 퇴원하라고 말하고 있다지만 퇴원해도갈 곳이 없어서 병원에 눌러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유 효민이 돈을 대서, 아파트를 빌려서 퇴원 시키고저 하였는데 이 이야기를 들은  통일 교회측이 서둘러 방을 빌려서 퇴원시키고 말았다.
문 선명을 일생동안 떠 받쳐온 옥 상현의 노후가 이렇게도 비참하게 된 것을 보니까 정말로 슬펏다.
그러나 옥 상현 뿐만 아니라 이와같이 희생된 사람은 아직도 몇백명이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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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봉식과 오 명춘

부부가 문 선명에게 헌신
내가 문 선명과 함께 부산 영도로 신성묵, 유 신회 부부의 집을 찾아 간 것은 1953년 12월  24일이었다.
새로 입교한 사람은 유 효원, 유 효민, 유 효영, 신 성묵 부부, 김 관성, 최 집사
등, 섬유공장을 경영하고 있던 최집사는 3개월 후에는 교회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송 도욱, 박 봉식 부부가 들어 온 것도 이 무렵이었다. 본래 신앙이 돈독한 사람 들이어서 다음해 봄, 송부처는 서올로 올라와서 교회의 헌신자가 되었다.

▲ 송 도욱

송집사는 그리 교육은 받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튼튼한 몸매를 하고 있는 커다란 사나이로 대쪽을 쪼갠듯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가하는 등 여러가지 일을 해 온 사람이었다. “해방” 후 귀국해서 부산에서 박 봉식과 결혼하였다.
원만한 부부생활로 딸이 하나 태어났다. 세사람이 생활하기 위해서 송 도욱은 가정 방문을 하면서, 살충제 약을 팔기도 하고, 약을 뿌리기도 하였다.
처의 박 봉식은 부산의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원리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부터는 지금까지 하던 장사를 집어치우고 부부가 문 선명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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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집은 작은 판자집이었는데, 이층에 방이 하나 비어 있어서 김 원필이 거기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가끔 김 원필을 찾아 갔었다.
서울에서 부산간 기차 여행에 터널을지날때는 석탄연기가 들어와서 양복이 그 끄럼으로 새까맣게 돼버린다. 어느 때인가는 내가 입고 있던 스프링 코트가 베이지 빛이었는데 검정색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박 봉식은 밤중에 그렇게 새까맣게 된 코트를 세탁해서 말려 가지고, 아침에 서울로 돌아갈 무렵에는 새옷과 똑같이 빳빳하게 입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잊을수가 없다.
송 장로 부부의 딸은 매우 성격이 활발하여서 문 선명이 그녀가 마음에 들어 그녀에게 가야금을 사주어 배우게 했다. 그리고 교회의 모임이라던가 친목을 위한 식구들의 모임이 있을때는 그녀에게 가야금을 타고 창을 부르게 했다. 
그후 어떤 청년과 열열한 연애 중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모두 축복해 주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결국 결혼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그 당시 처음에는 내가 비서역으로
문 선명과 함께 돌아 다녔는데 유 효민이 입교하고, 나서부터는 그가 비서역이 되었다. 그후 문 선명은 그 비서역을 유 효민으로부터 송 도욱으로 바꾸고, 또 송집사는 장로로 승진하였다.

남편 송도욱의 불륜
서울로 올라 온 박봉식 은 경상남도 거 창을 비 롯한 각지 에서 통일교회의 원리를 전도하는 순회전도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마침 그 무렵 남편인 송장로에게 큰 문제가 일어 나게 되었다. 
그 무렵 서진 광산에 있던 나는 볼일이 있어 군산에 갔다. 김모에게사정을 설명하고 월명동에 있던 김모 집에 약 일주일동안 머물러 있은 일이 있었다. 이집은 군산의 교회로도 쓰고 있어서 김모씨의 부인과는 전부터 아는 사이 였다.
닷새째 되던 어느날, 밖에서 볼일을 마치고 김모의 집으로 돌아가니까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부인이 정신적으로 약간 이상한 상태로 되어 있어서, 「자기를 복귀시켜 달라」고 나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남자를 보면 누구에게나 「복귀하고 싶다」고 중얼대고 있었다. 원리 이야기에 열중하게 되면, 이러한 상황으로 되는것은 자주있던 일이었다. 서울에서도 부산에서도 나는 몇번이고 이와같은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방치 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 광산으로 돌아오자 마자 서울의 유효원협회장에게 연락을 하였다. 그래서 송 장로가 군산으로 나가서 부인을 데리고 서울로 돌아 갔다. 노량진(교회를 떠난 임영신 집)집이 있어서 거기서 부인의 병을 치료하기로 하였다. 송장로 혼자서는 그녀를 돌 볼 수 없기 때문에 오명춘과 함께 지내면서 돌보기로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송장로와 오명춘과는 서로 좋아하게 되고 말았다. 부인은 회복 되었으나 송장로와 오집사는 서로가 헤어질수 없는 관계가 되어 있어서 결국은 문선명에게서 축복을 받고 함께 지내게 되었다.

탁월한 인격자 박봉식
나는 박봉식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원리에서부터 이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송도욱과 박봉식은 부부로서 문선명한테 와서 식구가 된것 이다. 송장로는 문선명의 비서가 되었고, 박집사는 그때까지 하던 집 일을 모두 걷어치우고 전도에만 전념하였다.
문선명이 축복을 하는 것이라면 박집사와 송장로가 축복을 받는것이 상식적으로나 원리적으로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오집사와 송장로가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두사람의 동거를 인정 했다고 하는것이 되지 않는가. 이것은 여러가지 면으로 모순되고 있다.


▲ 박봉식

문선명 이 축복을 하였다고 하니까 달리 아무말도 말할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박집사에게는 납득이 가지 않는 문제였다 망연하게 어깨를 떨군 그녀의 심정을 살필 수 있다. 축복을 받은 후, 한동안 지나서 송 장로는 간 암에 걸려서 대단히 고생스러운 생활을 보냈으며, 수술을 받았으나 개복한 때에는 이미 상당히 진전되어 있어서 배를 꿰맬수도 없는 상태에서 죽어 버리고 말았다.
그때 박집사가 임종하는 옆에 있었다고 하는 것을 듣고, 나는 그녀의 인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송 장로가 젊은 여자와 축복을 받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죽음의 자리 옆에 있었다고 하니, 현여라고 해야 옳을지, 열녀라고 해야 옳을지 분간 할 수가 없었다.
송장로가 죽고 난 뒤에 함께 축복을 받았던 오집사도 병이 들어 꿈속에 송 장로가 나타나서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고 신음 하였다고 한다. 
이 병이든 오집사를 박집사가 또 몇달동안 함께 살면서 간병 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저 머리가 숙여 질뿐이었다.

큰 돈을 바친 오명춘
문선명은 옥상현 등과 함께 부산에서 네차례나 집을 옮겨 다녓는데 이때의 비용은 모두 오명춘 집사가 내 준 것이었다. 오집사는 장리욱박사의 친척이나 김안실 같은분에게도 전도해서 입교하게 하였고 이순철도 신정순도 신정순의 딸 이성화 성례와 양윤신에게도 전도하였다. 
교회의 초기에 매우 중요했던 부인 간부의 대부분은 오집사가 전도한사람들이다.
그 후 문선명이 이순철의 복귀라고 말하며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을 때에 집을 빌릴 돈도 없었는데 오 집사가 신당동에 사는 자기의 매제에게 돈을 건네 주며 문선명이 살만한  방을 주선해 주었다.


▲ 당시의 오 명춘* [ 오영춘 呉永春 ]

이화대학사건이 터져서 문선명을 위시하여 간부들이 구속되었는데 이때의 뒷바라지도 오집사가 맡았었다.
그 때문에, 자기의 집을 팔아서 그 대금 오백만원을 고스란히 문선명에게 드려 미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문선명이 구속된 뒤에 섭외비를 염출하기 위해서 조그마한 가계를 원효로에다 열고 신정순등과 함께 경 영하고 있었다. 
거기서 나온 이익으로 문선명이나 간부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문선명이나 내가 돈이 필요하게 되면 반드시 오집사가 마련해 주었다. 부산의 영도로 처음에 갔을 때도 그러하였다. 
그 당시 문선명은 한푼도 없어서 곤경에 있을때 오집사가 여비를 마련해서 가져다 주었고, 그 돈으로 부산으로 갈수 있었고, 유씨네 삼형제가 입교하게 되면서 부터 교회의 기초가 견고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오명춘은 그 후 미국으로 가서 의사가 된 아들한테서 살고 있었는데 83년에 한국에 돌아 왔을때, 오명춘은 딸 장혜숙에게 주려고 응담을 하나 가지고 왔다. 그 당시로서는 백오십만원 상당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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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혈압으로 쓰러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효민을 통해서, 딸이 장혜숙의 집으로 오도록 전달이 왔다.
찾아 갔더니 그 웅담을 나에게 건네주며 딸에게는 또 기회가 있으면 사서 줄수 있으니까 우선 지금은 이것을 잡수시고 기운을 차려 보십시오. 박선생님은 병환이 나서도 필요한 사람 이니까 이것을 드리는 것이에요 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문선명이나 교회와 나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문선생은 박선생님을 더
욱 아끼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문선생은 지금 서울에 계실 터이니까 두 분이서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라고 약속해 주었다.
그때 옛날 자기집을 팔아서 조달한 오백만원은 지금첫 한푼도 갚아 주지 않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당시의 오백만원은 지금으로서는 오천만원 이상이 되는 셈이다.
나는 웅담을 고맙게 받아, 그것을 먹고나서 한달만에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오명춘은 여러가지로 노력해 주었으나, 물론 문선명한테서는 전화도 없었다.
이와 같이 최초의 교회의 식구들은 함께 고생해 온 일도 있어서 서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도와주곤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혼자서만 잘난체하고 있는 문선명은, 원리의 공론만을 앞세우고 인간성이라고 하는것은 찾아 볼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식모살이라도 해서 살아야지
그런데 옥상현이 행적도 비쳤지만 본부교회는 몸과 마음을 몽땅 문선명과 교회에 바치고, 돈도 집도 없는 “박봉식” 을 나가라고 내 몰았다. 그 후 박봉식은 갈 곳이 없어서 대단히 불쌍한 지경이 되었다.
박봉식은 청평 통일교 수련소로 가서 산에 천막을 치고 기도 하면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몇일이 못가서 그것을 안 수련소 관리인이 와서 또 몰아내고 말았다고 한다. 박봉식은 할 수 없이 다시 시내로 나와서 먹고 살기위한 참기름 장사를 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우선 교회의 간부의 집을 찾았다. 원식구인 박봉식이 부탁하면 한집에서 한명쯤이야 참기름을 사 줄것이라고 생각하고 찾아 다녔던 것이다. 맨 처음에 협회장 부인 한테 가서 참기름 한병을 내 놓고 진짜 참기름이니 시장에서 파는 값으로 한 병만 사달라고 부탁  하였다.
그했더니 그 부인이 통일교회의 식구가 참기름 따위나 팔다니 너무나 창피하니까 그만두라고 말하며, 박봉식을 내 쫓아버렸다.
그리고 또 원협회장의 집을 찾아 갔더니, 먼저 집에서 당한것과 같이 문전에서 거절을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박봉식은 통일교회 간부들에게는 사랑이라고 하는것은 한조각도 없는 참으로 냉정한 사람들이다 라고 한숨 지었다.
그래서 협회장의 부인이 두 사람이나 다 거절하는 것을 보면 다른곳에 간들 어차피 헛수고 일것이라고 참기름 장사를 체넘해 버리고 말았다. 살어가기 위해서는 통일교회 따위를 기대  할 것이 아니라 식모살이던, 무엇이던 해 나가야 겠다고 그 박봉식은 쓸쓸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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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화 (金鐘和) 의 눈물과 노여움

문용명을 죽이고 싶다
평양으로 간 문선명은 미완성이라서 엉터리 같은 원리를 설교해 신자를 모으고 있었다. 가련하게도 옥상현은 그 무렵부터의 희생자인데, 더 한사람 써두지 않으면 않될 사람이 있다.
그것은 문선명이 투옥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된 유부녀 김종화의 사건이다.
흥남감옥에서 형기를 마치고 먼저 출소하는 나에게 그는 평양 경창리에 있는 김종화의 집을 찾아 가서 내가 잘 있다는 말을 전하고 정화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여 나는 출소하자 바로 그곳으로 갔으나, 이미 피난길을 떠난후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
다.
문선명의 열렬한 신자가 되어 주인과 아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방에서 문선명과 동침해서 드디어는”어린양의 잔치”를 올리는 소란을 피워서 체포되어 징역 일년의 형을 받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원리의 이론에서 말하자면 6마리아(유부녀)를 복귀한 뒤에 오는”어린양의 잔치(정식결혼)”는 상대가 더러움이 없는 처녀가 되여야 한다.
어째서 남편이나 자식이 있는 유부녀를 선택한단 말인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더욱이 문선명에게는 서울에 두고 온 처자도 있다.
내가 서울에서 간신히 찾아 냈을때, 김종화는 이문동에 살면서 집사로서 기성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남편인 정명선은 파고다 공원앞에 코롬비아 라고 하는 구듯방을 경영하고 있었다.
내가 김종화를 방문 하였을때, 그녀는 그때의 일을 후회 하면서 사단이 나를  유혹해서 죽을때 까지 참회해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때는 이름을 문용명에서 문선명으로 바꾼것을 모르고‥‥그녀는 말했다. 문용명은 엄청난 대사단인데, 나는 흠뻑 속았습니다.
나와 같은 죄인을 많이 만든 나쁜 사람이예요.
박선생도 빨리 그만두지 않으면 나중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이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커다란 눈물 방울을 흘리면서 울었다.
평양시절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나의 남편은 내가 하는 행동을 그늘에서 야속하게 생각 하였을뿐 어째서 성을 내지 않았을까요.
자기의 처와 저남자가 매일 같은 방에서 함께 자며 복귀를 한다고 하는 명목으로 섹스를 하고 있는것을 옆에서보면서 어째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나중에 그가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고 하는것을 알고 그때 나는 너무나도 큰죄를 범하고 말았다고 생각 하였습니다.
나는 김종화 집사에게 더 한번 물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데, 다른 남자와 매일밤
섹스를 한다는 것이, 그 당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그때는재림 메시아라고 믿었고, 그 남자에게 미쳐서 그 사람과 섹스를 하는때에는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천국으로 올라 가는 듯한 심경 이었습니다.
문용명이 지금 서울에 있는데 더 한번 만나 볼 용의는 없는가, 하고 물어 보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면서 엄청나게 큰 죄를 범한 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므로 대사단의 문용명은 나와 같은 유부녀나 처녀들을 교묘한 말로 범하고, 많은 사람을 죄의 구렁텅이로 떨어트리고 있어요.
어떻게 또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겠어요 라고 반문하였다.
그리고 만약 내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세상에서 더 이상 우리들에게 한것 같은 죄를 두번다시 그가 범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다. 그 남자를 죽이고 싶도록 원망하고 있어요.
그녀는 그야말로 불처럼 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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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마리아의 비극

유부녀 여섯을 빼앗다



나 박정화는 1953년 5월 15일 경주에서 피난생활을 끝마치고 부산 수정동에 마련한 교회에서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원리강의를 들었다. 
그 내용은 흥남 수용소에서 문선명이 나에게 “원화원이상” 에 관해서 이야기 한 내용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었다.
특히 주의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은 “6마리아” 의 부분이었다.
평양 시절은 그렇다 치고, 식구들 가운데서 6마리아로서 복귀를 받은 사람들은 제일 첫번째가 신정순, 그리고 오명춘, 이순철, 김안실, 강옥실, 정전옥의 순이라고 문선명은 이야기 했다. 그 후 한동안 지나서 이 6마리아의 얼굴생김이 바뀌었다.
그 이유는 강옥실과 정선옥에게는 남편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남편이 있는 유부녀 가 아니면 6마리아” 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문선명은 이 두사람 대신으로 유신희, 임영신을 6마리아로 선택 하였다. 6마리아 자격이 있는것은 유부녀라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형체가 없는 하나님은, 해와가 에덴동산에서 성숙하면, 형체있는 인간의아담으로 재림하여 아담과 해와가 결혼해서 더렵혀 지지 않은 자녀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 자손이 이 세상에 번식 함으로서 이 세상을 선한 죄 없는 사회  할 것을 창조이상이라 한것이다.
그런데 천사장 루시엘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해와를 유혹해서 따먹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사단의 것이 되어, 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범죄한 천사의 사랑의 대상인 유부녀를 빼았음으로서, 사단에게 더럽혀진 피를 깨끗이 하는 복귀섭리의 의식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문선명 은 설명하였다.
문선명은 나에게 복귀하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었다. 그 복귀의 방법이란, 지금까지의 사탄의 세상에서는 섹스를 할때에 남자가 위로 되고, 여자가 아래로 되었지만, 복귀를 할 때에는 두번 까지는 여인이 위로되고 남자가 아래로 되는 것이고, 세번째는 남자가 위에서 행위한다.
그래서 소생, 장성, 완성으로 3회에 걸쳐서 복귀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것이다.
특히, 나는 문선명의 섹스에 의해서 복귀된 여자와 최초로 섹스를 해서,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내가 문선명에게 제일 신뢰 받는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6마리아 들이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를 추적해 보자.

신 정 순*
자산가인 이순모의 처였던 신정순은 내가 1953년 5월 IS일에 부산의 수정동 교회에 갔을 때부터 두 사람의 아들을 데리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같은해 12월 24일 문선명이 직접 원리강의를 하기 위해서 부산영도의 집회에 갔을때 그는 나에게 정화 너는 장래 신정순과 이상적인 상대(부부)가 되어서 우리 교회의 경제 문제를 해결 해야 한다 라고 이야기 한 일이 있다.
그런데 문선명은 이 신정순의 장녀로 처녀인 이성화를 장래에 해와가 될 사람이라고 말하고 범하였는데, 김영희 사건으로 그 거짓말이 탄로나고 말았다.
또 둘째딸인 성례도 문선명한테 복귀를 받다, 아이까지 낳게되었다. 신정순은 6마리아가 된것으로서, 문선명의 곁에서 영원히 평화로운 생활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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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부산 초량동에 있던 집을 팔아서 문전명에게 바쳤다. 내가 부산에서 새끼장사를 시작 하였을때 그 자금을 마련해준 것도 역시 신정순 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된 두 딸의 모녀 3인이 문선명과 섹스를 했다고 하는 사실은 신정순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자궁암에 걸려 몇해 후에 죽고 말았다.
저 세상으로 간 신정순은 지금의 문선명을 어떻게 보고 있을 것인가?

이 순 철*
이순철은 내가 경주의 생활을 청산하고 부산의 수정동교회로 갔을 무렵, 오명춘의 전도로  입교하게 되어 문선명의 복귀를 받고부터 쪽 그에게 따라 다닌다.
이순철의 남편은 당시 관세청의 간부였다.
그녀는 남편몰래 많은 재산을 문선명에게 헌금 하였다.
문선명이 대단히 열을 올리고 있을 무렵에, 우리들이 안양, 부산 등지를 돌아 다녔다는 것은 이미 기술한 바와 같다.
그 후의 이순철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어느날 노동휘가 나를 찾아 와서 아침 예배에 가자고 재촉한다.
청파동 교회로 예배를 가니까, 마침 문선명이 나와서 설교를 하고 있었다.
그때 문선명이 별안간 지금 수택리(경기도 소재) 총포공장을 건축하고 있는데, 오늘밤 안으로 그 총포공장을 완성 시키시오 라고 명령 하는 것 이었다. 
급작스러운 일 이라서 건축 일꾼을 모은다는 것이 큰일 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천호동에 주택을 건설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축일꾼 18명을 트럭에 태워 실어다가 밤샘 작업을 해서 어거지로 그 공사를 완료시켰다. 
작업이 끝나서 돌아 가려고 하는데, 이순철이 느딘없이 찾아와서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같이 가자고 해, 그이를 따라 가니까 통일 산업 주식회사의 정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방을  빌려서 살고 있는데, 방안에는 다 날가 빠진 헌이불과, 꾸겨진 양복등, 겨우 몇가지 가재도구가 놓여 있을뿐, 그렇게 화려한 생활을 하던 이순철이 왜 이다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을까 나는 그에게 어째서 이런데 와서 이런 생활을 하고 있으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문선생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로 찾아가도 만나주지 않아 백방으로 생각 끝에 할 수없이 통일산업에는 문선생이 하루에 한번은 꼭 온다고 하기에 이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 신정순*[ 이득삼 李得三 ], 강옥실* [ 강현실 姜賢實 / 姜賢実 ], 이순철* [ 김순철 金順哲 ]

매일 문선생이 오는 길에 기다리고 있다가 먼발치에서 나마 얼굴 만이라도 뵙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선생은 차로 오기때문에 내가 서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방향으로 돌려서  다른 길로 가 버리고 맙니다 라고 이야기 한다.
그녀는 이 슬픈 사정을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 내가 와 있다는 것을 듣고 나를 찾아왔다고 한다.
세시간 동안이나 눈물을 흘리면서 이야기한 이순철은 문선명에게 재산도 자기의 몸도 모두 바쳤다고, 남편에게서는 이혼당하고, 자식들은 남편에게로 따라가고 쓸쓸한 생활을 하면서 그래도 문선명을 만나고 싶어서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문선명은 어째서 이다지도 냉정하게 배신 할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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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재림메시아를 자칭한 사나이의 할 수 있는 일인가.
우리들은 손을 맞잡고 한 없이 울었다.
이날부터 한달 후에 오명춘 집사에게서 연락이 왔다. 오명춘이 혼자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순철은 그 한 많은 인생을 마치고, 이세상에서 사라졋다고 하는 것이다.
그 옛날 문선명은 밤에나 낮에나 이순철 없이는 못 살것 같이 굴더니만, 이제 와서는 이순철이 문선명을 만나고 싶어서 수택리 총공장 근처로 이사까지 와서 문선명을 기다렸는데  얼굴 한번 마주대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 버리고 말다니 ‥‥
저 세상에서 이순철은 문선명을 얼마나 원망하며 내려다 보고 있을 것인가?

오 명 춘*
오명춘은 제주도에 피난 생활 중에서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 최근의 오 명춘*

부산에서 문선명의 원리를 듣고 감격해서 복귀를 받은 뒤에도 문선명이 어려운일이 생기면 이 오명춘 집사가 전부 해결해 주었다.
집을 판 대금 5백만원을 몽땅 문선명에게 바쳐서 남편과는 이혼하고, 아이들은 남편한테로 가 버려서, 혼자서 문선명을 위해서 살아 왔다.
이 오명춘 집사의 이야기는 앞에서도 자세히 썼으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로 해 둔다.
그 후 오명춘집사는 교회에 못있게 돼서, 지금은 필립핀에 있는 아들을 찾아간 것이다. 서
울에 살고 있는 딸도 문선명으로부터 합동결혼 을 받었으나 이상이 맞지 않아 이혼하고 말았다.
이제 새삼 자기의 집으로 오는 것을 그리 반가워 할 이가 없다.
유효민과 내가, 올 봄에 오명춘을 찾아 갔더니 그 딸 한데서도 나가 달라고 말하더라는 것이었다. 지금쯤은 낮선 나라에서 어떠한 노후를 보내고 있을 것인가?
유효민과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이 사람들을 장래 남은 인생을 평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서 서로 노력 할 것을 약속 하였다.

김 안 설*
김안실은 내가 부산의 수정동 교회에 있을 때에 오명춘 집사에 전도되어 입교했다. 문선명으로부터 원리를 듣고 복귀를 받은 뒤에는, 신정순과 같이 유효원 등을 열심히 전도한 장본인이다.
김안실은 장리욱씨의 자부인데, 남편은 의사였고 미국으로 가서 박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김안실은 남편이 유학중 아이들과 함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열심히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 김안실은 문선명을 제일 사랑하고 있었다. 그 후, 김안실의 남편은 미국에서 귀국해서, 서울 청량리에 병원을 개업하였다.
한동안은 남편과 살고 있었지만 역시 문선명을 못 잊겠다며 교회로 돌아왔다. 문선명에게서 복귀를 받을 당시의 김안실은 30세 가량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문선명은 그 젊은 안실이가 마음에 들어서, 내가 서울에서 부산에 갈때마다 반드시 편지를 써서 내가 그것을 전해주는 책임을 맡았다. 지금 다 나이든 이 사람을 문선명은 돌아다 보지도 않는다.
이제 새삼 남편한테도 돌아갈수도 없어서 혼자서 방을 빌려 가지고,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리치고 또 혼인 중매로 직업화 하다시피 홀홀 단신 쓸쓸한 인생살이를 하고 있다.
유효민과 나는 이와같이 문선명과 통일교회에 배신당한 사람들을 위해서
책임을 지고 남은 인생을 보낼수 있도록 노력 할것을 결심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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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신 희*
유신희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도 밝혔기에 여기에는 지금의 상태만을 간단히 말해둔다.
고아원에 어린것들을 맡겼던 아이들은, 고아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다 졸업하고 제집도 마련하고, 교회집사 일도 잘보고 장사도 잘되여, 사회에 모범 청년층에 속한다.
그러나 유신희씨는 아들들 집에 살 면목도 없고, 아이들도 어머님 모시기가 서먹하다 하여  구로동에 방을 두칸 빌려서 바느질 일을 해 가면서 겨우 살아 가고 있는 형편이다.
과거 눈이 멀어서 문에게 속은것을 한탄하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그날그날 고생
을 감수하며 살아간다.
이 사람에 관해서는 유효민과 나는 도와 줄 것을 약속 하였다. (제 7장 참조)

임 영 신 *
서울의 북학동 교회에서 세계 기독교 통일 신령협회가 창립될 무렵 신정순이 임영신의 집을 알려주어서 유효민의 전도로 임영신은 통일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임영신은 다섯살쯤 되는 딸이 하나 있었고 혼자사는 몸인고로 가볍게 교회로 들어올수 있어서 푸로마이드 사진을 추운 겨울철에도 우물물로 수세작업을 하여 열심히 도왔다.
이 또한 문선명 이 누구보다도 매우 사랑을 받아왔다.
교회가 발전하여 여러번 이사를 했고 용산구 청파동 시절 문선명은 남녀 이상상대 설교를 한참 역설할 때다. 교회 교인들은 이심전심으로 임영신은 자기와의 이상상대의 꿈이 깨진줄 알고 탈교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시내모처에 단신으로 생활중 교회에서 친숙하게 지내던 딸을 만난 인연으로 그딸 아버지 재산가 이순모의 끈질긴 구애끝에 다시 부부생활을 하게 되었고 또 번창하여 재벌급에 들었다.
그 사장도 병사로 아들하나 낳고 또 과부가 되었다. 미망인이 된후 많은 사업체를 전처 장남에게 물려 주고 외롭게 아들하나 바라보며 외롭게 살고 있다.


▲ 임 영 신 * [ 박정숙  朴貞淑 ]

그리고 한동안 어느 예능인과 결혼하였으나, 그 사람과도 이혼해서 또 독신이 되어, 자기의 가정부 아줌마와 같이 살고 있다.
또 자기가 낳은 아들도 어머니를 보살피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도 사이가 좋았던 이순모와의 결혼생활 무렵 시간만 있으면 가만히 불러내서 만나고 하던 문선명도 임영신 만은 전연 돌아 보지 않았다. 지금은 방 한칸을 빌려서 고독한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유효민과 함께 그녀를 만났는데, 그 생활 형편은 쌀 살돈이 없을 정도로 궁색하였다. 
문선명은 복귀 한다는 명목으로 몸뎅이 를 유린하는 것은 물론 재산까지 전부 들어 먹고는 급기야는 차 내버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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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毎日新聞1976年6月28日記事
崔聖模씨別世
新東亜「그룹」會長
26일상오
◇ 故崔聖模씨
新東亞그룹 崔聖模회장이
지난26일 宿患으로 別世、親知및 財界重鎭등 弔客이참석한가운데 28일상오 京畿도楊州군瓦阜면月文리 선영에서 장례식이엄수됐다. 
享年67세의 故人은 黄海道沙里院출신으로 지난55년釜山冷凍을 창업한이후 東亞綜合産業、新東亞火災、韓國메타놀、泰興産業、大成木材등을 설립해 新東亞그룹을 이뤘으며 統 一主體國民會議운영위원과 全経聯부회장을 歷任한 重鎮實業人이다. 
유족으로는朴貞淑여사와 4男 4女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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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영「私の一族は統一教会の餌食にされた」 崔淳英


▲ 문성진과 박정숙


6마리아가 아니라 60마리아
문선명은 한 학자와 “어린양의 잔치 의식” 을 행하고 학자가 참 어머니라고 떠들어대고 있지만, 이 대표적인 6마리아 이외도 문선명에게 농락 당하고 재산까지 도적 맞은 여성은 몇 십명이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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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에게 배신 당하고 버려져서 지금은 60-80세가 된 할머니들은 인생 여한을 품은채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와같이 정도에 넘치는 행위는 인간의 상식에서 보던지, 종교가의 입장에서 보던지 간에 절대로 용서 할 수 없는 일이며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파탄을 가져 올것으로 필연적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마리아 교대의 강 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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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현실, 박정숙, [ 서명진 徐明鎭 ? ]

그리고 나는 문선명 이야 말로 진짜 대 사단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선택한 6마리아라고 하는것은 모두 재산가의 아내뿐이었고, 가난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2천년전에 예수는 그가 만났던 간통한 여인, 향유의 여인등 육인의 여자와 섹스를 하지 못했기에 예수는 죽었다.
육인의 유부녀를 복귀하는 것은 원리의 근본이다 등등으로 말한 문선명의 이야기는 실은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 악용한 함정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케 된다.
사실 그들은 문선명의 호색적인 섹스의 포로가 되어 미쳐서 남편과 자식들을 버리고 문선명 한테로 달려와서 돈이나 재산이 확실하게 문선명의 손아귀에 모였다.
그리고 빨아 먹을 만큼 발아 먹은 뒤에는 돈있는 여인을 찾아내서 6마리아의 이름으로  꾀였던 것이다.
정말 그대로 풍부했던 그녀들은 하나같이 허수아비 빈 털털이와 같이 되어 버림을 당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도 사랑도 없다. 문선명의 색과 금욕의 가련한 희생자의 죽음만이 남았다.
더욱이 해마다 새로운 마리아로 교체해서 볼일이 끝난 마리아는 자꾸만 버려 치워서 두번  다시 돌보지 않는 것이다.
6마리아란 무서운 함정에 빠진 여성들의 대명사로서 그 이면에는 실로 몇십명, 몇백명이라고 하는 희생자의 예비군이 있었던 것이다.
그녀들의 재산이나 자금이 없었다면 통일교회가 발족해서 발전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를  아는 내가 첫번째 증인이다.
예를들어 이북에 원적을 둔 황모 중년 부인은 통도 크고, 뱃장도 좋아서 자기의 것을 다 바치고 남에 돈도 잘 들러다 댓다. 그래서 사랑을 받게 되니 인신이 아닌가. 자기 돈도 다 떨어지고 하여 문에게 낙태 수술비를 달라고 했더니 무정하게도 딱 잡아 떼며 노발대발 울면서 탈교선언에 겁이나 유 부장이 문교주에 이야기 해서 수술비를 얻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교회에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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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을 빼앗기고 살해되고

김 원덕 이란 사나이

부산의 교회에서 노여움이 치밀어 미친듯 했던 최선길 부인에게서 문선명을 구출해낸 김원덕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시대에 육군사관학교 포병과를 나와서 일본군에 복무하던중, 포병소위 로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후 그는 북조선인민군에 입대하여 포병사령관 무정의 한쪽 팔 노릇을 하며 근무하면서  북조선의 비밀을 몇차례 남쪽에 흘려 보냈다.


▲ 김원덕

이 사실이 사령관인 무정이 군사회의로 중국에 가있는 동안에 폭로 되었다. 당초 사형을 선고받아 집행되는 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김원덕은 명랑한 성격으로 솔직한 사람이었으므로 그냥 사형의 집행을 기다리는 정도라면 죽는편이 났다고 결심하고 옥중에서 자살을 도모 하였다.
다행이도 그것은 미수에 그쳤고 수갑을 찬채로 독방에 들어 있게 되었다. 오래간만에 귀국한 무정장군은 자기의 한쪽 팔이었던 부하가 사형을 선고 받아 감옥에 들어가 있는 것을 알았다.
무정장군은 고급 군사기관에 입김을 넣어서 그가 신원보증을 한다는 조건으로 김원덕의 사형은 4년 8개월의 형으로 감형된 것이었다. 감형 통고를 받은 김원덕은 평양 형무소에서 홍남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위기일발로 총살을 면한 김원덕과는 내가 홍남 수용소에서 총반장이 된 후에 문선명으로부터 소개되어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세사람은 친형제처럼 문선명을 중심으로 모든것을 의논하면서 쓰라린 상황을 극복해 왔다. 또 김원덕과 나는 북쪽의 평남 대동군 용연면 출신이어서 서로 가까운 이웃 마을의 출신이라고 하는 점에서 더욱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다.
김원덕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 남쪽으로 피난하여 경찰의 치안국 외사계의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통일교회가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을때 김원덕이 나타나서 문선명을 끌어 낸 것인데 그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최선길은 차마 반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신비적인 낭만
어느날 김원덕은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것은 좀 샘이나는 듯한 그의 사랑 로맨스이다. 
그 몇일전 김원덕은 부산에 볼일이 있어서 용산역에서 야간열차를 탓다. 그는 상등석에 앉아 있었는데, 어느 품위 있어 보이는 부인이 몇사람의 경찰관에게 둘러싸여서 같은 기차에 타려고 하였다. 
그녀의 복장이나 전송나온 사람들을 보니까 어던지 모르게 고급관리의 부인이 여행을 떠나는것 같이 보였다. 
그부인은 공교롭게도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수원역을 지나 대전역을 지났다. 두 사람은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로의 얼굴을 때때로 보는 정도로 그대로 부산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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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이 지나자,
그 부인은 한국의 유명한 시한구로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내는 흐르고 있어서 옟 물이 남아 있을수가 없다. 사람도 이와 같아서 한번 흘러 버리면 또 다시는  못 돌아오네 라고 하는 내용의 노래를 김원덕의 옆 얼굴을 보면서 작은 소리로 중얼 거렸다.
그 소리는마치 선녀가 노래하는 것 처럼 들렸다. 
다시 한번 부인을 뜯어 보니까, 그 모양은 엄숙하게 보였으나 또 정이 넘쳐 흐르는 듯 하기도해서 한동안은 함부로 말을 건낼수도 없어그저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러나 김원덕도 만고풍상을 경험해온 사나이다.
그대로 위축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얼굴 생김새로는 자신도 있었으므로 큰맘 먹
고 말을 걸었다고 한다. 실례합니다. 당신은 용산역에서 보았습니다만, 부산에는 여행으로 가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은, 용산역 가까이에서 알미늄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부산에는 볼일이 있어서 가는 길입니다.
그로부터 부산역에 도착하기 까지는 아직 세신간이 있었으나 시간이 가는줄도 모르고 열심히 이야기에 빠졌다. 야간열차 속에서 알게 된이 부인과 김원덕은 완전히 호흡이 맞아서 그날 어떤 곳에서 만날것을 약속하고, 부산역에서 헤어졌다.
약속한 장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저녁식사를 같이 하였는데 그 부인은 그에게 마치 연인에게 대하는것첨럼 행동하였다. 그녀의 행동에는 일본여성 처럼 사교적인 여자티가 넘쳐 흘러서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그녀의 태도와 행동에 도취한 김원덕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그 후에 영화를 보러 갔었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어느쪽이라고 할것도 없이  이심전심으로 어느 호텔로 발걸음을 옴겼다. 이날 둘이서 맺은 사랑은 도저히 말로서는 설명 할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김원덕은 부산에서 볼일을 마치면 다음날 야간 열차로 서울로 올 예정이었으나, 그 부인과 같이 있으니까 한 주일이 금방 춘몽으로 어제 서울로 돌아왔다고 하는 것 이었다.

아름다운 부인과 진수성찬
그리고 오늘 그녀의 자택으로 갈 약속을 한 것인데 자기 혼자서 가기는 쪽스러워서 박선생님도 같이 가셨으면 합니다 라고 한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호기심이 생겨 김원덕과 함께 열두시에 용산시장으로 갔다. 철길을 건너서니 공지가 있는데 서쪽으로는 옛날 모리나가 제과의 공장이 있었고, 그 동남쪽으로 단충집이 있었다.
일본사람이 살던 헌집이라서 그다지 깨끗한 집은 아니었다.
현관으로 가니까 문패에는 “윤청정심 (尹淸淨心)” 이라고 책어 있었다.
두 사람이 현관에 들어서자 20세 가량의 두 여인이 나와서 우리를안내해 주었다. 첫방에는 큰 불단이 있고, 그 중앙에는 순금인지 도금인지 잘 모르겠으나 황금빛 불상이 놓여 있고, 좌우에 놓인 놋쇠 촛대에는 밝은 낮인데도 불이 켜져있다.
다음방은 자리가 열개도 더 깔릴만큼 큰 방이었는데 객실인것 같았다.
그곳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으려니까 한참만에 여인이 정중하게 차를 날라다 주었다. 
이 집의 구조를 보고 있는데, 옆의 문이 열리며 향수와 같은 냄새가풍겨왔다.
대단히 좋은 향기로서 처음 맡아보는 향기였다. 중년부인이 들어와 앉으면서 그녀는 얼굴을 약간 숙여서 미소지으며 그리고 인사를 하였다.
김선생 흔자서 오시라고 말 한것인데 이렇게 누추한 곳에 선생님까지 오셔서 정말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 목소리는 밝고도 대단히 깨끗하였다. 40대 후반 정도로보였는데 매우품위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김원덕에게 소개되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인사 하였다. 무엇인가 마음까지 관통된듯한 분위기였다. 마음을 진정하고 맞아서 그 부인을 다시 보니까 머리는 빗어올려 쪽을 짓고 긴비취 비녀를 꽃고 옛날의 궁전에서나 쓴듯한 금빛장식에 빨간 댕기를 드리우고 있었다. 감색저고리에 엷은 옥색치마를 입은 모양은 멋진 우리의 전통 정식 복장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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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첫날밤을 맞이하는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듯한 모양이었다. 부인의 안내로 옆의 방으로 갔더니 고급요리집과 같은 한식요리상이 놓여 있고 은제의 주전자에는 노오란 빛갈의 술이 들어 있어서 한잔 드시지요 라고 은제 술잔으로 한잔 받은 술은그야말로 최고의 가슴설레임 이 아닌가!
중국의 시인 이백은 장강폭 아래서 술을 마시며, “삼천자 높이에서 똑바로 떨어지는 물은, 흡사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과 같구나” 라는 시를 읊었다.
나도 그러한 기분으로 술을 마시고 안주를 들었다.

이상한 예지능력
그 부인은 금강산에서 10년간 수업해서 이 세상일은 무엇이고 내다 볼 수가 있어서 사람의운명을 점칠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여명을 판단 할 수도 있고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그 사람의 당선을예언 할 수 있게 되고, 대학의 입학시험 때에는 그 사람의 합격 여부도 알수 있게 되었다고한다.


▲ 윤 청정심

그 덕분으로 그녀가 경영하고 있는 알루미늄 그릇의 제조공장은 그녀로서는 본업이 아니라 부업으로 된것 같다고 한다. 그녀의 참 목적은 불쌍한 고아들 특히 여자 고아를 길러 대학교육까지 받게해서 사회에 내 놓는것이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길러낸 여자 아이들을 전원 이화여자대학을 졸업시켜, 현재 돌보고 있는 고아는 17명 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고 있자니까, 감히 얼굴을 들고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국회의원 선거때가 되면, 이 부인집에는 사람들이 파도처럼 몰려온다. 대학의 입학시험때도 역시 같다고 하는것이었다.
우리들은맛있는 성찬을 잘 먹고 이상한 그 부인의 이 야기 를 듣고 또 오십시요 라고 전송을 받으며 그집을 나셨다
김원덕씨를 연인으로 삼았다고 내비치면서 그녀는 김씨에게 부인이있어도 관계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자기를 사랑해 주고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서로가 좋으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그녀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세속적인 감각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김원덕과 나는 그집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고, 김원덕의 덕분으로 나는 언제고 성찬을 먹을 수 있어서 한 동안은 괜참은 생활을 보냈고, 서로간에 친하게 되니까, 나는 불단에 놓여 있는 싱싱한 과실을 마음대로 집어 먹어도 실례되지 않을 만큼 친숙해겼다.
재림 메시아의 아버지와 함께 있으니까 생명이 없는 불단 앞에 이러한 물건을 놓아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맛있게 먹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부인은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것을 항상 주의 깊게 들었던 것 같다. 
그 후 그 부인 윤여사는 김여사라고 하는 다른 부인을 사이에 넣어서 토목 건축회사를 설립하여 김원덕을 사장으로 앉혔다.
회사의 명칭은 윤여사가 “운흥공사”라고 명명한 이름인데, 구름처럼 일어난다고 하는 의미였다. 사장이 된 김원덕은 토목건축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경영은 그리 잘되지 못해서 얼마 못가서 이 회사의 간판을 내리게 되고 말았고, 그후에도 또 여러가지 사업으로 김원덕과 윤여사는 협력하였으나 운이 없는 탓인지 그리 잘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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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한동안 윤여사는 불단의 과일을 먹을때에 말한 그 말의의미를 물어왔기에 설명하였더니 꼭한번 그 선생을 만나보고 싶다고 윤여사가 말하지 않는가 !
나는 김원덕과 의논하여 문선명에게 그간의 사정을 설명 하였더니 만나도 상관없다고 말하여 1954년 10월 25일 오후 6시에 신당동 양문영여사의 자택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그 다음날 윤여사에게 그 일을 전하였더니 그녀는 대단히 기뻐 하였다.

제자의 연인을  빼앗은 문선명
약속의 날, 김원덕과 나는 윤여사를 데리고 양여사의 자택에 안내하였다. 양문영, 신정순, 오명춘, 옥상현, 지승도, 이순천, 이기환, 양윤신, 등의 여자 식구들과 유효원, 유효민. 이수경, 김원태등이 모였다.
그때의 윤여사는 최고의 한국정장으로 몸을 싸서 흡사 신부가 신랑집으로 첫날밤을 맞으려 들어가는것 같은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본 식구들 특히 부인 식구들은 넋을 잃고 있었다.


▲ 양문영* [ 梁允永 양 윤영 ]

인사를 나눈 후에 윤여사는 자기의 영적인 눈으로 선생을 우러러 뵈오니까 참 어머니가될 여인이 없어서 근심하고 계신것 같습니다. 제가 신부로서 신랑인 선생님을 맞이하러 왔습니다 라고, 당돌하게 첫 인사를 하여 식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날은 예수가 세사람의 제자를 데리고 변화산으로 올라간 때와 같은 분위기가 되어, 문선명도 원리강의를 밤새도록 이야기 했다. 
또 윤여사는 시를 노래하고 창을 불렀다. 그 소리는 그 집의 주인이며 이화여자대학의 음악교수인 양문영 여사가 들어도 놀랄 정도였다. 
그 당시는 문선명에 대한 감시가 엄하게 되어 있었다. 밤 열두시가 되면 통행금지가 되어있어 다음 기회에 또 만날것을 약속하고 그 밤은 다 헤어졌다.
일주일 정도지난 어느날, 문선명이 별안간 유효민과 같이 윤여사의 집을 찾아 왔다. 김원덕과 나는 문선명이 오는것을 몰랐으므로 대단히 놀랐다. 윤여사는 정성을 다해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문선명을 접대 하였다.
문선명도 신랑이 신부집에 간것 같은 태도로 윤여사와 앉아 있었다.
또 윤여사는 성경에 나오는 신랑을 맞이하러 가기 위해서 기름을 준비하고 있던 신부가 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것 같은 분위기였다.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나와 김원덕은 밤도 깊었으므로 문선명과 유효민을 남겨두고 돌아갔다. 이날밤 문선명은 윤여사와 복귀 (섹스)를 했다고 한다. 
김원덕은 북에서 피난하여 남으로 올때 살곳이 없었던 문선명을 자기의 셋집에 한동안 머물러 있게 하기도 하고, 부산에서 문선명이 곤난한 상황에 놓였을때, 선두에 서서 몇번씩해결해 주었다. 그 김원덕이 자기의 사랑하는 연인 윤청정심과 문선명에게 배신 당한 심경이되어 그후 문선명을 피하게 되었다.
문선명은 송도욱 장로를 비서역으로 하고 부터는 자주 윤여사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1955년 7월 4일 문선명이 경 찰에 구속되고 부터는 윤여사도 한동안 우리들의 통일교회 와는 발을 끈었다. 
김원덕은 그 후에도 몇차례 나와 만나서 문선명에 대한 원한과 노여움을 말했고 나는 열심히 복귀원리를 설명해서 문선명을 감쌌으나 김원덕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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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여인이 있는 가운데 어째서 자기의 제자가 사랑하는 연인인 것을 알고 있으면서 뺏아서 가는가. 선생은 나를 바보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짓을 하는 선생에게 어떻게 복종할 수 있는가?
통일교회의 원리가 아무리 훌륭해도, 자기는 더 믿을 기분도 없다.
선생 아니 문선명을 용서 할 수 없다.
문선명은 종교의 이름을 빌어서 여자를 속이는 사기꾼이다.
김원덕은 군인출신답게 외골수인 데가 있어, (나도 그렇지만) 정말로 격분했다.
그래서 문선명이란 사나이는 발정한 개다.
음수다 라고 뱃속에서 짜내듯이 매도했다.
김원덕의 억울함은 잘 알기 때문에 나는 그 이상 댓구할 말이 없었다.
그로부터 몇해뒤의 일, 윤여사, 식모, 양녀(대학생딸)의 일가 3인이 누군가에 의해서 타살당한 사건이 생겨서 큰 소란이 되었다. 경찰도 필사적으로 수사를 한 모양이지만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그 전까지도 문선명과 윤여사의 사이는 계속되고 있었고, UN군의 인천상륙으로 6 25동란이 유리하게 된것을 찬양하는 영화 “오오 인천” 의 준비가 두 사람 공동으로 진행되고 있었는데, 윤여사의 돌연한 죽음으로 자금이 나오지 않아서 중단되었다.
김원덕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어, 나도 당시 경찰의 조사를 받다 그의 소재를 물었었다. 
그 후 김원덕과는 몇 번 만날 기회가 있어, 나도 슬적 모양새를 살펴 보았으나 김원덕 자신도 그 사건에는 대단히 놀라고 있고 둘이서 진짜 범인 찾기의 연상게임을 한 일도 있다.
김원덕한테는 전혀 변한 것이 없어서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러던 그는 죽어서 이미 3년이 되었다.


제5장 재림 메시아의 정체


제6장 진짜 사단은 문선명이다


제7장  증언 – 우리들이 체험한 사실

유호민 – 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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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희 – 6마리아의 한 사람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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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 섹스릴레이의 실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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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록 통일교회사 – 2

문선명의 정체! (1) 김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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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숙은 1998년에 미국 CBS TV 60분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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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통일교 – 사교여부 는 『노 | 탓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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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理原本 원리원본 19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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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 통일교
1996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2020년 하늘부모님 성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