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통일교회에서 모집한 20세 여성이 ‘사과 결혼’을 통해 연장자인 한국인 농부에게 팔렸다. 그는 통일교 신도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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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 통일교
1996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2020년 하늘부모님 성회
▲ 2012년 8월 14일 대한민국 서울 : 통일교 일본 성도들이 일본군이 부렸던 전쟁 중 한국 성노예에 대해 사과하며 절하고 있다.
한국의 광복절은 8 월 15 일이다. 이 날은 1945 년 일제 강점기 해방을 기념하는 기념일이다. 이 집회는 바로 그 전날 열렸다.
한국에 있는 언니를 돌려주세요
1. 무명
게시 : 25.01.10 ID: FFmOrZXZ
나는 모든 일본 여성들에게 진지한 경고로서 나의 경험에 대해 여기에 쓰고 싶습니다. 여기서부터 내가 쓴 모든 것들은 전부 사실입니다!
밝고 예뻤던 저의 언니는 한국 여성 한 명과 알게 되고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관심을 키웠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한국으로 끌려가 사실상 노예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듣기에는 “너무 멍청한 이야기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속임수들은 놀랍게도 영리하며, 수천 명의 일본 여성이 이미 이 계획을 통해 한국으로 끌려갔습니다.
이제 나는 그들의 더러운 속임수를 공개하고 싶습니다. 나는 이 사태를 모든 일본 여성들에게 알려서, 그들이 이런 일을 안 겪도록 조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제 실제 경험에 근거한 것이라고 다시 한 번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이 웹사이트에 게시할 이 경고에 여러분이 훼방을 놓지 않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모든 것은 3년 전에 시작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을 만났고 친구가 되었어.” 이 모든 것은 언니의 이 말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녀가 대학 3학년 때 한국 여학생 한 명이 캠퍼스 벤치에 그녀 곁에 앉아 그녀와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곧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저도 그 한국 학생을 여러번 만났고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예의 바르고 좋은 사람 같았습니다. 나는 그녀가 어떤 평화 단체의 일원이라고 들었습니다.
2. 지금은 그 당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더 잘 알지 못해 정말 후회합니다. 제 언니는 그 한국 학생이 소개한 평화 단체가 주관하는 “문화 수업”에 참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언니의 말에 따르면 이 수업은 “평화에 대해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그녀는 많은 비디오를 보고 강의를 들었습니다.
수업 이름은 ‘평화에 대해 배우다’였지만, 사실 그 내용은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어떻게 고문했는지’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비디오를 몇 시간에 걸쳐서 본 후 참석자들은 조직의 강사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강의의 주제는 항상 “일본인이 자신의 범죄에 대해 보상하지 않고 얼마나 항상 무책임하게만 말하는지”에 대해서였습니다.
어느날 언니는 얼굴이 창백했습니다. 그녀는 “일본군이 150명의 한국인 위안부들에게 줄을 서도록 강요했고 한 명씩 머리를 잘랐대. 그런 다음 그들은 그 잘린 머리들로 국물을 만들고 다른 위안부들에게 그 국물을 먹도록 강요했대……”
저는 그 이야기에 충격을 받았지만 동시에 “과장된” 소리로 들려서 의심스러워졌습니다.
문화 수업을 계속하면서 언니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었다. 그녀는 절망스러운 얼굴 표정으로 “일본인으로 태어나서 너무 부끄럽다”, “지금 당장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보상을 해야한다”, “현재 일본의 번영은 한국인들의 [일제강점기 중 강제로 치러야만 했던] 희생으로 인해 얻어진 것이다” 라고 반복해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대학 공부를 완전히 잊어버리고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3. 그리고 언니는 “한국에 가서 한국 사람들에게 한국어로 사과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가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적으로 친구를 사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언니의 그 말을 충분히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언니가 나도 한국어를 공부해야 한다고 했어요. 나는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죠. 그녀는 “한국어는 세계공용언어가 될 것이며, 인류 역사상 가장 우수한 언어”라고 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더 의심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없는 동안 언니의 방으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신의 원리’, ‘배교자’라는 제목의 책들과 일부 브로셔를 발견했습니다. 나는 그것들을 읽기 시작했고 그 내용에 깜짝 놀랐습니다. 책의 어떤 부분에서는 “일본은 악마가 다스리는 나라다. 세계를 이끄는 나라가 되어야 할 한국을 괴롭혔다”며 “일본은 이브를 대표하는 나라이고 한국은 아담국이다. 따라서 [에덴 동산에서의 이브의 실수를 뒤집기 위해] 한국에 봉사하는 것이 일본의 의무이다” “남북 통일 후에는 한국이 아시아의 중심이 되고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적혀있었습니다. 책과 브로셔들은 그런 미친 내용들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저에게 그런 불안한 느낌을 준 이러한 정보에 대해 저의 대학 튜터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음, 그게 바로 통일교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저는 통일교회를 더 조사해 부모님과 상의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언니가 이 교회에서 물러나도록 설득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그녀는 강경한 태도로 대학을 그만 두기로 결심하고 곧바로 한국에 가겠다고 고집했습니다.
우리는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녀를 막으려 했지만 그녀는 화를 내며 “너희는 세상을 이끌 대한민국과 메시아를 모욕하는 마귀야!”라고 욕했습니다. 우리는 그녀의 변화가 무서웠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함께 울었습니다.
▲ 짝짓기 – 문선명 씨가 커플들을 결정하고 있다. 한학자 씨가 그의 옆에 서 있다.
왼쪽에는 일본인 여성의 결혼을 홍보하는 포스터가 있다. 한국의 한 농촌에 부착되어 있었다. 서울에서 열린 통일교회 ‘한일’ 집단결혼식 직전에 게시됐다. 이런 결혼은 진행된 집단결혼식에서 문선명의 주례로 치루어졌다.
한국 남성들은 일본인 신부를 구하기 위해 수천 달러를 지불해야 했다. 그 금액을 마련하기 위해 가족 단위 투자가 많았기 때문에 일본 여성들의 여권을 뺏거나 다른 방법을 통해 도주를 막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유엔 보고서는 이러한 결혼의 문화적 문제를 강조했다. 이런 결혼의 상당수는 이혼으로 끝났다. 많은 케이스에서 여성들의 요청에 따라 이혼이 허용된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일본 여성들이 “한국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서의 결혼”을 하도록 강제한 세계평화통일가족연맹의 강요 사실 때문이었다.
포스터의 번역 (왼쪽은 한글, 오른쪽은 일본어):
일본여성 참결혼
비영리사회봉사단체 신고: 제1300호
♥ 초급대학 이상의 학력
♥ 몸 마음 건강한 분
♥ 직업이 확실한 청년 (30세 전후)
(기혼독신은 남,녀 ~ 60 세 이하)
순결한 가치관의 이상적인 배우자 맺어 드립니다.
참가정실천운동 ◯◯위원회
상담전화:
상담원
4. 갑자기 언니가 서울에서 열리는 대규모 결혼식에 참석하기로 결심하고 마침내 집을 떠났습니다.
나는 언니를 모임에 처음 초대한 한국 학생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이 학생은 예전의 그 예의바른 태도에서 완전히 바뀌어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너 통일교의 회원이 맞지?” 하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체했습니다. “뭐라고? 그게 뭔데?” 라고 말하더군요.
나는 “통일교회의 창시자는 문선명이란 사람인데,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그렇지 않아? “고 말해보았습니다.
내 말은 그녀를 너무나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뭐라고 했어?!” 그녀는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며 말을 뱉었고 얼굴은 분노로 붉어졌습니다.
사실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녀는 확실히 통일교 교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가족은 너무 슬퍼서 언니가 집을 떠난 후 모두 한동안 계속 울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녀의 상황에 대해 걱정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니가 우리에게 연락해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시골에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한동안 우리는 안심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자주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돈을 보내주세요”, “가전제품을 보내주세요” 등의 요청들을 보내왔습니다. 시골에 사는 한국인 친척들이 자신들을 위해 돈과 물건을 보내달라고 요구하는 것 같았죠. 저의 부모님은 요청에 따라 계속해서 돈과 물품을 보낼 수밖에 없다고 느꼈습니다.
언니가 한국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걱정됐습니다. 나는 그녀를 만나고 그녀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그 곳에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혼자 가는 것은 위험했기 때문에 통역과 경호원이 되어줄 적절한 사람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서울에 사는 일본인 교환 학생 A 씨를 채용했습니다.
統一教会の日本人花嫁数千人が韓国農民に宛われた
수천 명의 일본 통일교회 신부들이 한국 농민들에게 배정되다.
週刊ポスト No.20 2010(H22) 年6月4日号 [雑誌] 142-145頁
주간포스트 No.20 2010 (H22) 6월 4일호 [잡지]
〈衝撃リポート〉 〈충격 리포트〉
韓国農民にあてがわれた統一教会 · 合同結婚式日本人妻の「SEX地獄」
일본인 아내 “섹스 지옥”– 한국 농민들에게 강제 지명 (통일교회 대규모 결혼식에서)
見知らぬ土地での生活、貧困、差別に「故郷に帰りたい……」と
낯선 땅에서 가난과 차별을 겪으며 살아가는 그녀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北海道大学教授らの徹底調査で判明した戦慄の真実
홋카이도 대학 교수들의 심층 조사를 통해 발견된 놀라운 현실
5. A 씨는 언니의 편지에 적힌 주소로 저를 데려갔습니다. 한국의 시골에 있었습니다.
이곳은 일본의 일반적인 시골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비포장 도로가 있는 마을에 있는 근대식 농장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마을 집에서 언니를 찾았습니다. 언니는 내가 만나러 온 것을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농가의 아들이자 상속인이었습니다. 그는 추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저의 언니는 20대 초반인데도 그는 40세가 넘은 것 같았습니다.
A 씨와 저는 한동안 이 가난한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무례하다고 생각했지만, 조심스러운 말로 그들의 결혼에 반대했고 언니에게 일본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갑자기 통역사의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그는 언니의 남편이 “나는 돈을 냈다”고 말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저속한 미소를 지으며 “좋은 거래였어. 왜냐하면 이 일본년은 좋은 몸매를 가지고 있거든.”
그 말은 나를 너무 화나게 했습니다. 나는 정말로 그를 죽이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는 일단 언니의 안전을 위해 그의 말을 조용히 견뎌야 했습니다. 언니도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보상을 해줘야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종일 일한다고 말했습니다. 가족의 대화를 듣고 A씨는 내 귓가에 “그녀는 거의 노예인 것 같다”고 속삭여줬습니다.
6.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일단 일본으로 돌아 왔습니다. 서울 공항으로 가는 길에 A씨가 많은 것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예를 들어, 서울에 이른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하는 통일교 신도들인 이상한 일본 여성들 무리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여성들은 종종 일본에 항의하는 시위와 공연에 참여했거나, 아니면 그러한 활동에 참여하도록 강요당했을 것입니다.
또한 한국 위안부 이야기를 할 때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한국 노인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 노인은 “[강제 모집의] 강압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라고 말했다 합니다.
노인에 따르면 농촌의 가난한 가정은 사실 딸들을 한국인 매춘 중개업자에게 팔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난한 사람들이 깊은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딸들을 파는 것은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의 일반적인 해결책이었습니다. “일본군이 소녀들을 납치하기 위해 트럭을 동원했다는 것은 허구다. 아무도 그런 광경을 본 적이 없고 그 당시 그런 소문을 들은 적도 없다.”라고 노인이 A 씨에게 말했다 합니다.
나는 그에게 “그러면 위안부 이야기는 누군가가 특정한 목적을 위해 만든 것임에 틀림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통일교가 위안부 이야기를 사용하고 있다는 나의 취지를 알아챘습니다. “전쟁 중 위안부 소송을 담당하는 변호사 다카기 씨와 가까운 분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이런 부분에 대해 알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에게 연락해 보겠습니다.”
7. 나는 깊은 좌절감을 느끼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언니의 상황에 대해 부모님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습니다. 언니가 하인으로서 담보로 한국에 팔려갔다 생각되었습니다.
얼마 후 언니가 갑자기 “친척” 중 한 명이 일본을 방문할 거라고 했고 우리가 그를 돌봐달라고 했습니다. 부모님과 저는 그 아이디어를 정말 싫어했지만 거절할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조잡한 거지 같은 청년이 도착했습니다.
이 한국 남성은 펜 선처럼 좁은 눈을 가진 특징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감정이 없어 보였지만 곧 격렬한 기분의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소리를 지르고 얼굴이 삶은 문어의 색깔처럼 빨개지곤 했습니다. 특히 식사 시간에는 자리에서 매우 무례한 태도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끔찍한 소리를 내며 음식을 먹어댔습니다. 뿐만 아니라 “김치는 안 주나?!”, “정말 맛이 없구만!!” 등을 소리치며 불평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저는 이 한국 남자가 정말 싫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저의 어머니에게 소리쳤습니다. “튀김을 담그는 소스가 너무 맛이 없어! 나를 이 따위로 대하다니! 이 귀한 손님을 대충 대하려고 하는 거야?!”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그의 음료에 농약 같은 것을 넣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가 항상 나를 이상한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어느날 밤, 그 남자는 내 방으로 몰래 들어 와서 손으로 내 입을 가리고 나를 강간하려 했습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얼굴을 할퀴었습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나를 때려댔습니다.
이 일은 아버지를 화나게 했고 아버지는 그 남자를 우리 집에서 몰아냈습니다. 마침내 나는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8. 어느 날 서울에 있던 학생 A씨가 놀라운 정보를 보냈습니다. 다음은 그가 보낸 내용에 대한 요약입니다.
먼저 설명해야 할 것은 ‘위안부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 한 것은 ‘백인위원회’라는 조직이라는 것입니다. 이 조직의 목표는 “한국 국민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와 [일본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 단체의 일부 한국인 회원들과 일본인 주부들은 소송을 시작하기에 적합한 “피해자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갔습니다. “성노예 제도의 희생양으로 나선 용감한 첫 여성” 김학순은 일본군과의 매춘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인 한국인 매춘부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인위원회’는 이런 종류의 매춘 여성을 찾아서 일본 정부에 호소하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선전을 시작했습니다.
자, “백인위원회”는 어떤 조직입니까? 사실 이 위원회는 “아시아 여성 평화 연맹”이 만든 것으로 통일 교회의 2차 조직입니다! 또한 매춘부 소송을 지지한 타카기 겐이치 변호사와 ‘피해자’를 찾기 위해 한국에 간 일본인 주부들도 모두 통일교의 회원입니다. (물론 그들은 모두 교인임을 부인했습니다. 이것이 통일교의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교인들은 “통일교의 교인입니까?”라는 질문에 “우리는 다르다”라고 말하도록 지시받았습니다.) 그들의 행동은 “일본은 마귀의 나라이므로 메시아의 나라 한국을 괴롭힌 범죄에 대한 배상을 행해야한다”는 통일교의 가르침에 대한 그들의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9. 1992년 문선명과 김일성의 화해의 만남 이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활동에 관여하게 되었고, 많은 북한 “가짜 위안부”들이 연이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일본군이 위안부의 머리를 칼로 자르고 머리로 국물을 만들어 마시게 했다”는 등의 이야기들을 국제 사회에 전파했습니다.
그렇다면 통일교가 ‘성 노예 문제’를 조작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복잡합니다.
첫째, 일본과 일본 국민의 신뢰를 약화시켜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보상을 하고 재일 한국인에게 유리한 정치적 지위를 부여하기를 원했습니다.
참고 : 줄임말로 Zainichi (또는 Chōsen-jin) 라고 자주 불리우는 재일 한국인 (Zainichi Koreans) 은 일본에 영주권을 갖고 있거나 일본 시민이 되었으며 조선 (나눠지기 전 옛 한국) 으로부터 1945 년 이전에 일본으로 이민을 시작한 한국인들이나, 그들의 후손들을 뜻한다. 취업이나 유학만을 목적으로 일본에 온 한국인들과는 확연히 다른 집단이다. Wikipedia 에서 자세히 알아보기: Zainichi
https://ko.wikipedia.org/wiki/%EC%9E%AC%EC%9D%BC_%ED%95%9C%EA%B5%AD%EC%9D%B8
둘째, 그들은 더 많은 일본 여성들을 “인신 매매” 가 그들의 의무 또는 책임인 것으로 세뇌시키기를 원했습니다. 일본 여성들의 마음 속에 그들은 일본 여성들의 마음 속에 죄책감 [또는 일본의 수치심] 이 사라지거나 속죄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심었습니다. 이 일본 여성들은 자신들이 한국의 위안부와 같은 상황에 처하는 것이,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의 위안부들이 겪은 고통을 보상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고통을 겪어나가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A씨에 따르면, 수천 명의 일본인 여성이 제 언니처럼 이미 이런 식으로 속았다고 합니다. 특히 한국의 시골에서는 이러한 여성들에 대한 수요가 높습니다. 통일교회는 이러한 여성들을 인신매매의 담보로 만들기 위해 조종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또 A씨와 함께 있던 다른 분으로부터 신숙옥 씨 (辛淑玉, シン スゴ, Shin Sug-ok) 가 통일교와 인연을 맺고 통일교와 관련된 단체들에서 강연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 辛淑玉、シン スゴ、신숙옥、女性、1959年1月16日- . とは、東京都生まれの実業家。のりこえねっと (ヘイトスピーチとレイシズムを乗り越える国際ネットワーク)共同代表、シューレ大学アドバイザー。東京都立第一商業高等学校卒業。在日韓国人3世。]
https://ja.wikipedia.org/wiki/%E8%BE%9B%E6%B7%91%E7%8E%89
[신숙옥 (辛淑玉, Shin Sug-ok) 씨는 증오발언과 인종차별 극복 국제네트워크에서 일했다. 그녀는 재일 한국인 3 세대이다.]
나는 재일 한국인들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통일 교회 신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일본 내 인권 운동가들은 모두 하나의 갱단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현실은 그들이 정의의 가면을 쓴 채로, 일본 여성들이 한국인의 노예가 되도록 준비하고 유도하는 활동을 계속하는 비열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10. 현재 많은 일본 여성들이 한국의 선전에 속고 그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통일교의 범죄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몇 번이고 다시 말씀 드리죠. 통일교의 인신매매를 위한 ‘상품’으로 일본 여성이 한국에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 언니처럼요. 제 이야기가 의심스러우시면 이런 일본 여성들이 한국에서 겪고 있는 비참한 삶을 조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 여성들이 사실상 노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 일본 대중 매체가 이 끔찍한 이야기를 보도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사히신문, 매일신문, 요미우리신문과 같은 소위 양질의 신문은 왜 지금 그러한 여성들이 인신매매되고 있다고 대중에게 설명하지 않습니까? 왜!?
왜 일본 TV 방송국에서 일본 여성들이 이런 피해자라는 사실을 보도하지 않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왜입니까?
지금 바로 이 순간 많은 일본 여성들이 이 나쁜 한국 종교에 의해 세뇌되고 한국에 팔려 평생 노예가 됩니다.
내 언니를 돌려주십시오!
11. 이제 우리 가족의 비참한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일본 여성들에게는 우리의 경험이 믿기 힘들다고 생각될 수 있겠지만, 전부 사실입니다.
나는 모든 일본 여성들이 일본 여성들을 그런 비참한 상황으로 이끄는 이 무서운 함정의 존재를 알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가 이 일련의 메시지를 인터넷에 올리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저는 일본에 있는 재일 한국인들과 대한민국의 한국인 대부분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모든 한국 사회에 대해 그 한 민족 전체에 대한 편견을 갖지 마십시오. 그러나 일본 사람들에게 끔찍하고 악의적이며 사악한 일을 한 미친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계속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아무 양심의 가책도 없습니다. 그들이 양심 따위 도외시하거나 무시했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외국인 아내에 대한 학대 사례가 많았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결혼을 희망하는 남성에 대한 선별 검사를 도입했다. 한국에서는 아들을 선호하는 부부들로 인해 남녀 불균형이 발생했다. 한국의 신유교적 사고 방식에서는 남자 아이가 더 가치가 있다. 2017년에는 15-50세 그룹의 여성이 남성보다 약 백만 명 적었다. 이것은 외국인 아내에 대한 수요가 증가한 이유 중 하나이며 좋은 사업 기회이기도 했다.]
내 이야기를 믿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증거를 보여줘!” 또는 “그런 이야기를 지어내지마!” 와 같은 무정한 반응으로 상처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여기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각 사람은 믿거나 믿지 않을 자유가 있습니다. 내 경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대중 매체에 의해 방송되거나 잘 홍보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어쨌든, 다시 한 번 주장하겠습니다. 내 이야기 전체가 사실입니다! 사실입니다!!
메모
문선명은 [20년 동안 세계평화통일가정연맹으로 알려진] 통일교의 창시자였다. 이 종교는 한국에 기반을 둔 조직이다. 자신이 일본의 한반도 강점 당시 독립 운동가라고 [문선명은 주장했다]. 광복 이후 그는 대북승공연맹을 창설했다. [문선명은 2012년 9월에 사망했다.]
김일성은 사회주의 국가인 조선민주주의공화국 (북한) 의 지도자였다. 그는 그의 정치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피를 흘리는 붉은 공포 정치로 유명했다. 김일성은 1994년에 사망했다.
일본군이 사용하는 한국인 위안부도 있었다. 증언과 사진이 있고 많은 증거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 모집은 한국인이 했고, 한국 신문에도 위안부 관련 공지가 실렸던 것 같다.
보상을 구하는 가짜 위안부도 있는 것 같다. [한국 위안부들이 수년에 걸쳐 증언을 변경했다는 분명한 문서가 있으며, 일부는 살 곳을 잃을 것이라는 위협을 받고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했다는 증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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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人수기「나는 조선사람을 이렇게…」파문 | 신빙성에대한 의문을 더욱 던 져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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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44주년을 맞아 일제시 대제주도여성을 위안부로 2 백5명을 징발해갔다는 기록 이 나와 큰 충격을 던져주고 있으나 뒷받침 증언이 없어 파문을 던져주었다。 42년 부터 패전할 때 까지 약 3 년동안 야마구치현노무보국 회(山口縣勞務報國會)의 동 원 부장으로서 조선사람들을 징용하는 일에 종사했던 요시 다세이지씨의 전쟁범죄기록 「나는 조선 사람을 이렇게 잡 아갔다 」가 그것으로청계연 구소 현대사 연구실에의해 83 년판을 번역 발간한것。 여기에는「광주에서의 남자 강제연행」과 「제주도에서의 위안부 사냥」에대해서 자신 이 직접 가담 색출해 끌고갔 던 당시를 기술하고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황군위 문 조선인 여자정신대 2백명 △연령18세이상 30세미만△신 체건강한자 △기간 1년 △급 여 월30엔 △준비금으로 전도 금20엔 △근무지 中支방면 △ 동원 지역 조선 전라남도 濟州 |
리를 맞이하면서 조합장이라 고 인사했다。나는 곧바로 조 합장에게 구두로 통고했다。 이 공장에서 스무살쯤되는 여 자들을 징용한다。곧바로 공 장안을 돌아보고 여자들을 연 행할 것이다。너희들도 협력 하라!』 (「제주도에서의 위안 부사냥」 일부 ) 외설스럽고 배타적인 표현 까지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사람들을 징용 한것에 관한 공식기이나 관계 문서는 패전직후 내무차관의 통첩에 따라 전국 도・부‥현 |
城山리주민 점옥단씨(85)는 『그런일은 없다。2백50여가 호밖에 안되 마을에서 열다섯 명이나 징용해갔다면 얼마나 큰 사건인데…당시 그런 일 은 없었다』고 잘라말했다。 향토사학자 김봉옥씨는『일 본인들의 잔혹성과 몰양심적 인 일면을 그대로 드러낸것이 다。차마 부끄러워서 입에 담 지도 못할 말을 그대로 쓴것 으로 책이라 이름을 붙이지도 못하겠다。83년 원본이 나왔 을때 몇해동안추적한결과 사 실무근인 부분도 있었다。 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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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들”날조”…日 몰염치・상술에 분개 저자는 당시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 “城山浦단추공장・옹포・법환리등서 강제징용” 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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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들을 모두 잡아 싣고 차의 속력을 높여 그곳을 떠났다。 높은 바위산 사이로 뚫린 길 을 돌아가자 비양도가보였다。 넓은 바다에는 돛단배들이 점 점 떠 있었고 수평선은 가물가 |
지사의 긴급명령서가 각 경찰 서장들에게 발송되어 완전 폐 기처분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기록에 의한 城山浦단추공장에서 15~16명 을 강제징발했 기록들이나 |
히려 그들의 악독한면을 드러 낸 도덕성이 결여된 책으로 얄팍한상술이면도 가미되었 을 것으로본다』고분개했다。 【許榮善기자】 |
https://ameblo.jp/nonbiri-aika/entry-11724889922.html
1925년 5월 11일 東亜日報 동아일보
1934년 7월 16일 동아일보
팔린 養女
눈물로呼訴
十一歲少女賣[売]春强要
十四일 오후四시경 어떤소녀하 나이 시내본청서 (本町署) 보안게에 줌무하야 움어가 면서 보호를가 청한일이잇엇다。
송상봉 (宋相奉) (一 一) 은 인전 도 산정 (仁川桃山町) 에 살어 오든…
上海暗黑窟로轉落된
朝鮮女性⼆千餘名
娼妓舞女, 女給으로體面損傷
慘淡한生活對策漠然
중국 상해 암흑가에 조선인 여성이 약 2000 명.
이 원정 매춘부에 대한 조선인의 위엄이 손상된다.
그녀들의 참담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대책이 막연.
왜냐하면 경제적 문제로 인한 자발적인 근로라서 대책을 세울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
惡德紹介業者가跋扈
農村婦女子를 誘拐
被害女性이 百名을 突破한다
釜山刑事 奉天에 急行
1939.8.31 동아일보 東亜日報
악덕소개업자가 발호, 이들이 유괴한 농촌부녀자의 수가 무려 100명 이상.
모두 일본경찰님들이 구출해내심.
1939.03.28 동아일보
50여 처녀가 조선인 인신매매단에 걸려서 북지, 만주에 창기로 팔림. 일본경찰이 구해줌.
五十餘 處女를誘引 北支滿洲에大部隊 를賣喫 收養女를한다고 白砥委任狀을 받아서 犯罪敢行 第⼆河允明事仵擴大
五十餘(오십여)處女(처녀)를 誘引(유인)
北支(북시), 滿洲(만주)에 大部隊(대부대)를 賣喫(매끽)
收養女(수양녀)를 한다고 白紙委任狀(백지위임장)을 받아서 犯罪敢行(범죄감행)
第二(제이) 河允明(하윤명) 事件(사건) 擴大(확대)
얼 마 전 부내 서대문서에서 유괴마부부 하윤명(河允明)사건 이상의 히유 대규모의 유괴마단(誘拐魔團)일당 5명을 일망타진하여다가 엄조를 게속중이라함은 누보한바와 같거니와 그후 동서의 게속 취조의 결과 정작 일당의 두목 천순동(千順童)(35)과 천억만(千億萬)(24)의 형제가 이미 검거선을 탈출하엿다는 의외의 사실이 탈로되어 26일 동서 김(金) 민(閔) 석부(石部)형사등은 천가형제(千家兄弟)가 탈주 잠복하엿다는 인천(仁川)모여관을 습격하여 무난히 체포하여 엄중 취조한 결과 다음과 같은 신인공노의 무진죄상(無盡罪狀)이 속속 판명되어 취조 경관을 경악케 하엿다 한다.
즉 천순동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그의 사촌 아우 천억만외 원척의 친척형제들을 경향각지로 보내어 가난에 울고 혹은 허영에 날뛰는 시골처녀들의 부형을 찾어다니며 수양녀(收養女)로 다려다가 호의호식에 공부까지 시켯다가 후일 혼령(婚齡)에 달하면 서울부호의 메누리를 시켜주겟다는둥 혹은 조흔 곳에 취직을 시켜주겟다는등 별별 감언리설로 그럴법하게 꼬이는 동시에 수양녀로 한다는 백지위임장(白紙委任狀)과 또한 호적초본(戶籍抄本)인감증명등을 맡어 가지고 와서는 녀급 혹은 기생작부(酌婦)등에 매긱하고 아즉 년영이 어린 소녀는 하녀(下女)로 학대하다가 크면은 역시 매소부(賣笑婦)로 인육시장(人肉市場)에 넘기엇다는데 이상과 같은 교묘한 수단의 형제의 독수(毒手)에 히생된 소녀 혹은 유부녀는 현재 동서에 구출(救出)하엿다는 배금순(裴錦順)(19) 이옥희(李玉姬)(16)등 15명의 처녀외에 이미 북지(北支)와 만주(滿洲) 혹은 경성시내에 매소부로 넘긴부녀자는 지금까지 판명된 수만 35명으로 앞으로도 얼마나 판명될지 모르겟다 한다.
處女誘引의副産 金密輸까지綻露
團長은千家兄弟
西署에서殘黨掃蕩
1939.08.05 동아일보 東亜日報
“處女貿易”의誘引魔
北行列車에실린네處女救助
西署에서魔女貞淑을嚴調
처녀무역의 유인마.
일본의 처녀까지 유인하여 중국에 팔아 먹으려는 찰라 일본경찰에 의해 검거됨.
조선인에게 인신매매당한 부녀자들을 일본경찰이 구출함
엄청나게 많은 취업사기, 추업강제, 인신매매, 유괴의 사건기사들이 있다.
범인은 항상 조선인이었고, 이들은 일본여자도 범행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들을 검거하고 여성들을 구출한 것은 일본경찰이었다.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1283822
연도 범죄건수 검거건수 검거인원
. 총수 일본인 조선인 기타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history&no=1683250
위안부 종결하자
센트릭스 (211.232) 2016.01.06
1. 분명히, ‘위안부 모집’ 이라고 되어 있다.
『毎日新報』1944年10月27日付
『軍』慰安婦急募
一、行先 〇〇部隊慰安所
一、應募資格 年齢十八歳以上三十歳以内身體[体]強健한者
一、募集期日 十月二十七日부러十一月八日外지
一、出發[発]日 十一月十日頃
一、契約及待遇 本人面談한後即時決定함
一、募集人員 数十名
一、希 望 者 左記場所에至急問議할事
. 京城府鍾路區楽園町一九五
. 朝鮮旅館内
. 光③二六四五
. (許氏)
『매일 신보』1944년 10월 27일자
「군위안부 급모집」
행선지 〇〇부대위안소 응모 자격연령 18세이상 30세이내 신체강건여성모집 기일 10월27일보다 11월8일 계약及대우 본인면접후 즉시 결정 모집인원 몇십명희망자좌기장소에 시급하게 문議교토성부 종로구(鍾路區) 0소노초(園町) 195 조선 여관내
빛 02645
(아래씨)
『京城日報』1944年7月26日付
慰安婦 至急 大募集
年齢 一七歳以上〹[二]三歳迄
勤先 後方〇〇隊慰安部
月収 三〇〇圓以上(前借三〇〇〇圓迄可)
午前八時より午後十時迄本人来談
京城府中 * 新町四ノ二〇
今井紹介所
電話東⑤一六一三
『교토성일보』 1944년 7월 26일자
「위안부 시급하게 모집」
연령 17세이상 23세까지
근무처후방 00대 위안부
월수 300엔이상 (전차 3000엔까지 가능)
오전 8 시부 터 오후 10 시까 지 본인 내담자
서울
今井紹介所
전화 동쪽 5-1613
실제 신문광고를 살펴보면, ‘위안부 모집’이라고 나와있는 걸 알 수 있으니, 논란의 여지도 없이
열등한 한국은 역사날조 반일 드라마를 만들어 왜곡된 역사관을 주입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관련해서 좀 더 자세히 적어보겠다.
저 신문 광고를 올린 이가 즉, 업주가 ‘허씨’라고 되어 있는 데, ‘조선인’이다.
저 신문광고 뿐 아니라 다른 광고를 보더라도 전부 조선인이다.
당시 신문 광고를 올리며 위안부를 모집하는 주체는 조선인이였다.
그리고 한국측도 사실이라 인정하는 자료들을 보아도, 위안부 경영자는 전부 조선인이였다
군위안부 급모집.. 행선지 00부대 위안소 18세이상 30세 미만 신체 튼튼한 여성 ..본인 면담후 즉시결정 .. 모집인원 수십명…..이렇게 공개적으로 광고를 내어 모집하였다 .. 이것이 강제로 끌려간 것인가?
위안부는 강제로 연행된게 아니라, 납치, 사기, 인신매매 통해서 이루어졌다는게 팩트! 인신매매 중개업자 인간들이 조선인들이었다
2. 뒤 바뀌는 증언
이 증언은 여성부 홈페이지의 종군 위안부 관련 증언집에 있는 내용을 퍼왔습니다.
1944년, 내가 만 열여섯 살 때 가을의 일이다. 그때 우리 아버지는 미창(米倉)에 나가서 쌀을 져나르는 잡역부로 일하고 있었다. 내 동갑내기 친구 중에 김분순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어머니는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그 집에 놀러가니까 그 어머니가 “너 신발 하나 옳게 못 신고 이게 뭐냐, 애야, 너 우리 분순이하고 저기 어디로 가거라. 거기 가면 오만 거 다 있단다. 밥도 많이 먹을 거고, 너희집도 잘 살게 해준단다”라고 했다. 당시 내 옷차림새는 헐벗고 말이 아니었다.
며칠이 지난 후 분순이랑 강가에 가서 고동을 잡고 있었는데, 저쪽 언덕 위에 서 있는 웬 노인과 일본 남자가 보였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우리를 가리키니까 남자가 우리쪽으로 내려왔다. 노인은 곧 가버리고 남자가 우리에게 손짓으로 가자고 했다. 나는 무서워서 분순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새벽, 분순이가 우리집 봉창을 두드리며 “가만히 나오너라” 하며 소곤거렸다. 나는 발걸음을 죽이고 살금살금 분순이를 따라 나갔다. 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은 채, 그냥 분순이를 따라 집을 나섰다. 집에서 입고 있던 검은 통치마에 단추 달린 긴 면적삼을 입고 게다를 끌고 있었다. 가서 보니 강가에서 보았던 일본 남자가 나와 있었다. 그는 마흔이 좀 안 되어 보였다. 국민복에 전투모를 쓰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옷보퉁이 하나를 건네주면서 그 속에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있다고 했다. 보퉁이를 살짝 들쳐 보니 과연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보였다. 그걸 받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 나까지 합해 처녀가 모두 다섯 명이었다.
그 길로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경주까지 갔다. 그때 나는 생전 처음으로 기차를 타보았다. 경주에 가서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 여관 앞 개울가에서 손을 씻고 있는데, 산비탈에 보라색 꽃이 한송이 피어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꽃이어서 무슨 꽃이냐고 물어보니까 도라지꽃이라고 했다. 거기서 이틀밤인가를 지냈는데 또 여자 두 명을 더 데리고 왔다. 그래서 여자가 모두 일곱 명이 되었다. 경주에서 기차를 타고 대구를 지나가게 되었다. 달리는 기차의 깨진 유리 차창 저편에 우리집이 보였다. 그때서야 비로소 집생각이 나고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난 우리 엄마에게 가야 한다고 하면서 막 울었다. 옷보퉁이를 밀치며 이거 안 가질테니 집에 보내 달라고 하며 계속 울었다. 울다가 지쳐서 곯아떨어졌는데 얼마나 갔는지 모르겠다. 여러 날을 간 것 같다.
아래의 내용은 2015년 3월 대구 MBC에서 강연한 내용을 오마이뉴스에서 정리한 것 입니다. 위의 최초 증언과 비교하여 얼마나 내용이 달라졌는지 한번 보시지요.
대구 고성동에서 태어난 이용수 할머니는 16살 때 다른 4명의 동네 언니들과 함께 일본군에 끌려갔다. 1943년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이할머니는 “코와 입밖에 보이지 않는 모자를 쓴 군인이 우리를 데려갔다, 당시 장난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 왜 데려가는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이할머니는 “창문이 없는 기차에 우리를 태웠다”며 “가지 않겠다고 하니 ‘조센징’이라고 하면서 구둣발로 밟고 때렸다, 집에 가겠다고 하니 또 때리더라, 너무 많이 맞아 걷지도 못할 지경이었다”고 말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일본 군인에게 끌려가 기차를 타고 경주로 갔다. 경주에서 다시 대구를 지나 평양으로 이동했고 타이완 신죽에 있는 일본 가미카제 부대의 위안부로 보내졌다. 이 할머니는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가다가 우리 집이 보이길래 엄마를 불렀는데 주먹으로 머리를 때려 정신을 잃고 말았다”고 말했다.
증언 내용이 얼마나 달라 졌는지 위의 내용을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93년의 증언도 내용 전부를 읽어보면 정말 인간적으로 충분히 비극적이고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정대협의 영향 때문인지 증언 내용이 많이 달라집니다.
자신을 데려간 사람이 첫 번째 증언에서는 국민복에 전투모를 쓴 일본인에서 두 번째 증언에서는 일본군인이 자신을 강제로 연행한 것 처럼 증언 내용이 달라져 있습니다. 첫 번째 증언 후반부에는 자신을 데리고 간 일본남자가 종군 위안소의 주인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더 사실과 가까운 증언일까요.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점은 첫 증언의 내용을 살펴보면 어떤 일을 하게 될지 인지하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예쁜 옷과 예쓴 신발에 유혹이 되어서 종군 위안부의 길을 선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전형적인 사기에 의한 약취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도 상당히 많았을 것인데 이런 사기를 자발성으로 정의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자발성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고 봅니다.
위의 내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도표로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두 증언에가 보인 가장 큰 차이는 결국 일제 통치기구의 개입이 있었는지 여부 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저는 1차 증언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이라고 생각되며 2차 증언은 팩트에 근거한 것이기 보다 정대협의 입장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원방법
일제 통치기구 개입
1차 증언 (93년)
사기
없음 – 위안소 주인
2차 증언 (15년)
물리력을 통한 강제
있음 – 일본군인
최초 증언에서 확인 된 것과 같이 종군 위안부로 모집된 여성들은 일제의 통치기구 구성원들이 강제로 납치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고향 가야하는데 우리가 부모도 모르게 여기 왔으니께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 그랬지.
그래갖고 그 장교들이 서둘더니 명령 쫙 내려갖고, 야단났는디 데려다주라고. 이 불쌍한 애들 왜 데리고 왔냐고.
무카야마 소샤(소령), 곤도 소샤, 다카하시 주사(중령), 뭐 이런 사람들이 주인을 불러갖고 이거 어디서 데리고 왔느냐,
이거 덷고 온 그 자리 갖다놓으라고. 그래서 그놈도 데리고 온 그 자리 꼭 갖다놓드만그려.(중략)
이 아까운 거를 한참 피는것을 어디서 뎆고 왔느냐고 이놈 거기 있던 자리 갖다놓으라고
어떤 사람은 그렇게 나를 아깝게 생각을 해요. 우리가 왜 짐승이래 불쌍한거 날려보내 주는거,. 그 맘이 들었던가 봐요 (중략)
그 여자들, 같이 있던 여자들 서넛 되는거 해방시켜 같이 전부 한국으로 나왔어
– 제국의 위안부 내용 中 –
조선인 업자에 의해 속아 끌려온 위안부를 일본인 장교들이 해방시켜줌.
3. 결정적인 미군의 위안부 보고서의 내용
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Attached to
U.S. Army Forces
India-Burma Theater
APO 689
Japanese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No. 49.
Place interrogated: Ledo Stockade
Date Interrogated: Aug. 20 – Sept. 10, 1944
Date of Report: October 1, 1944
By: T/3 Alex Yorichi
Prisoners: 20 Korean Comfort Girls
Date of Capture: August 10, 1944
Date of Arrival
at Stockade: August 15, 1994
PREFACE
This report is based on the information obtained from the interrogation of twenty Korean “comfort girls” and two Japanese civilians captured around the tenth of August, 1944 in the mopping up operations after the fall of Myitkyina in Burma.
The report shows how the [ethnic Koreans with] Japanese [names] recruited these Korean “comfort girls”, the conditions under which they lived and worked, their relations with and reaction to the Japanese soldier, and their understanding of the military situation.
A “comfort girl” is nothing more than a prostitute or “professional camp follower” attached to the Japanese Army for the benefit of the soldiers. The word “comfort girl” is peculiar to the Japanese. Other reports show the “comfort girls” have been found wherever it was necessary for the Japanese Army to fight. This report however deals only with the Korean “comfort girls” recruited by the [ethnic Koreans with] Japanese [names] and attached to their Army in Burma. The Japanese are reported to have shipped some 703 of these girls to Burma in 1942.
RECRUITING
Early in May of 1942 Japanese agents arrived in Korea for the purpose of enlisting Korean girls for “comfort service” in newly conquered Japanese territories in Southeast Asia. The nature of this “service” was not specified but it was assumed to be work connected with visiting the wounded in hospitals, rolling bandages, and generally making the soldiers happy. The inducement used by these agents was plenty of money, an opportunity to pay off the family debts, easy work, and the prospect of a new life in a new land, Singapore. On the basis of these false representations many girls enlisted for overseas duty and were rewarded with an advance of a few hundred yen.
The majority of the girls were ignorant and uneducated, although a few had been connected with “oldest profession on earth” before. The contract they signed bound them to Army regulations and to war for the “house master ” for a period of from six months to a year depending on the family debt for which they were advanced …
Approximately 800 of these girls were recruited in this manner and they landed with their [ethnic Korean with] Japanese [names] “house master” at Rangoon around August 20th, 1942. They came in groups of from eight to twenty-two. From here they were distributed to various parts of Burma, usually to fair sized towns near Japanese Army camps.
Eventually four of these units reached the Myitkyina. They were, Kyoei, Kinsui, Bakushinro, and Momoya. The Kyoei house was called the “Maruyama Club”, but was changed when the girls reached Myitkyina as Col. Maruyama, commander of the garrison at Myitkyina, objected to the similarity to his name. …
PAY AND LIVING CONDITIONS
The “house master” received fifty to sixty per cent of the girls’ gross earnings depending on how much of a debt each girl had incurred when she signed her contract. This meant that in an average month a girl would gross about fifteen hundred yen. She turned over seven hundred and fifty to the “master”. Many [Korean] “masters” made life very difficult for the girls by charging them high prices for food and other articles.
In the latter part of 1943 the Army issued orders that certain girls who had paid their debt could return home. Some of the girls were thus allowed to return to Korea.
The interrogations further show that the health of these girls was good. They were well supplied with all types of contraceptives, and often soldiers would bring their own which had been supplied by the army. They were well trained in looking after both themselves and customers in the matter of hygiene. A regular Japanese Army doctor visited the houses once a week and any girl found diseased was given treatment, secluded, and eventually sent to a hospital. This same procedure was carried on within the ranks of the Army itself, but it is interesting to note that a soldier did not lose pay during the period he was confined.
“위안부는 자원 및 모집되었고 월 평균 급여는 700엔에서 1500엔”
미군의 조사가 제일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 있다. >>> 위안부가 번 돈의 총액의 50~60퍼센트를 받고 있다. 이것은, 위안부가 통상의 달에 총액 1천 5백엔 정도의 돈벌이를 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참고로 저 위안부 보고서는 미국에서 조사한것이고 위안부의 월급과 인원수는 한국정부에서 조사한것이다. 일본에서 한것은 하나도 없고 위안부 관련 자료만 받았을 뿐이다
전시중의 미군의 조사 「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 제 49호」에 의하면 알선 업자가 업무내용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던 것은 있는 것 같다.다만 일본군은 이 손의 업자의 단속을 명하고 있다.
2년에 현재의 화폐 가치로 수천만에서 2억엔의 큰 돈을 벌게 한 진심으로 생각하는 것인가?
일반의 한국인 업자가 종군위안부를 모집하고 있는 광고가 다수 존재하고 있다.
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 제 49호
위안부가 큰 돈을 벌고 있던 직업 매춘부라고 증명하는 미군의 문서
http://www.exordio.com/1939-1945/codex/Documentos/report-49-USA-orig.html
미국 전쟁 정보국 심리 작전반보고서란, 1944년 9월에 아메리카 합중국의 첩보 기관·합중국 전쟁 정보국(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의 심리 작전반이 인드앗삼주의 레드로 작성한 구일본군위안소·위안부에 관한 보고서로, 문서명은 「일본인 포로 심문 보고 제 49호」. 일본에 의한 조선인 위안부의 모집의 방법이나, 생활 상황, 일본 군인과의 관계에 대해 보고되고 있다.
미국립 공문서관에 소장되어 1973년에 공개되었다. 원문의 카피는 일본 정부에 의한 1992년부터 93년까지의 조사 결과적으로 「아시아 여성 기금」에서 공개되고 있다.
4. 포주
표_5-4 상하이 재류 조선인의 풍속영업 · 위안소 경영 ④(1942년) 129
영업 종목 · 상호
경영자 (괄호 안 은 일본 이름)
본적
현주소
상하이로 이 전한 날짜
그리고 한국측도 사실이라 인정하는 자료들을 보아도, 위안부 경영자는 전부 조선인이였다
한국인들이 위안부 강제모집의 증거라고 제시하는『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을 보자
지나사변 지역에 있어서, 위안소 설치를 위해 내지에 있는 종업부(從業婦) 등 모집하는 것에 대하여
군부의 양해 등이 있는 것처럼 명의를 이용해 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일반민의 오해를 사도록 하는 우려가 있고 혹은 종군기자, 위문자를 개입시켜 통제가 안되는 모집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다.
또한, 일본 경찰은 조선인 위안부 경영자가 유괴를 한 경우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있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위안부를 운영하는 조선인들 때문에, 일본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일반인들에게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어서 염려되고 있다는 점만 나타난다.
저 문구에서는 “조선인이 유괴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어서, 일본 경찰이 조사한 일이 있구나.” 라는 사실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이 위안부를 강제 모집한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납치를 단속하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도대체 얼마나 미치광이길래, 열등한 한국의 학자들은 저 내용이 일본이 강제모집한 증거라고 제시하고 있나.
조선인에 의한 유괴나 납치를 일본이 방치한 것도 아니다.
위안부 모집이 절정을 이룰 때에도,
일본의 통치에 의해서 납치나 유괴같은 범죄가 지속적으로 감소했었다.
일본정부의 개입을 최초로 주장한 요시다 세이지는 발언은 허구로 밝혀짐..
이 사람 주장에 현혹되어서 위안부 주장하다간 나라 망신
1992년 당시의 관방장관이었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위안부를 인정하였으나,훗날 증언의 내용은 이러한다.`조사한 서류에서는 일절 강제연행에 대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강제연행의 근거가 되었던 것들은 순전히 그녀들로부터 청취조사와 증언뿐이었다.이것은 강제연행이 없었다고 한다면 한국여론을 잠재울수가 없다.
그리고 배상에 대한 문제도 청구권 협정에 따라 일절 요구하지 않을 터이니 있었던 일로 해달라’는 의뢰를 받아 정치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지금까지 위안부 의 위증에서 나타난 논리적인 오류 및 모순과 이미 검증된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는 부분을 짚어봤다.
한국은 신뢰성이 떨어지는 위안부 의 위증만을 가지고, 살아있는 증거이며 근거랍시고 내세우며, 억지 주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왜곡된 역사관을 퍼트리고 있는 열등한 한국인들은 ‘역사’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위안부 강제 동원 및 강간이였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일제 시대도 조선인의 인신매매의 기사 투성이였던
조선인에 인신매매된 여성들을 일본의 경찰이 구출하는
범인은 항상 조선인이며, 일본의 여성도 범행의 대상으로 한
이것들을 저지해, 여성을 구출한 것은, 일본의 경찰이었다
박유하 (朴裕河)
서문 – 다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서
제1부 ‘위안부’란 누구인가-국가의 관리, 업자의 가담
제1장 ‘강제연행’과 ‘국민동원’ 사이
제2장 위안소에서―풍화되는 기억들
제3장 패전 직후―‘조선인 위안부’의 귀환
제2부 기억의 투쟁―다시, ‘조선인 위안부’는 누구인가
제1장 지원단체의 ‘위안부’ 설명
제2장 하나뿐인 ‘조선인 위안부’ 이야기
제3장 공모하는 욕망들
제4장 일본인 지원자들의 문제
제5장 일본인의 부정의 심리와 식민지 인식
제3부 냉전 종식과 위안부 문제
제1장 해석의 정치학―‘사죄와 보상’을 둘러싼 갈등
제2장 정치화된 일본의 지원운동
제3장 한국 지원운동의 모순
제4장 세계의 생각을 생각한다
제5장 일본 정부에 기대한다―새로운 조치에 나서야 할 세 가지 이유
제4부 제국과 냉전을 넘어서
제1장 위안부와 국가
제2장 새로운 아시아를 위해―패전 70년, 해방 70년
후기
참고문헌
박유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명예훼손을 이유로『제국의 위안부』34개
문장의 삭제를 인용한 가처분 사건 비판
– 서울동부지방법원 2014카합10095 결정에 대한 반론*
홍승기
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이 논문은 인하대학교 2019년 교내연구비의 지원으로 작성된 것임.
▲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문옥주 할머니 일대기
역사의 증언 두번째 이야기
2005년 08월 08일 출간
정대협이 벌이는 불순한 위안부 놀음, 중단시켜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권 434-476쪽에는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의 소정희 교수의 귀한 논문이 실려 있다. 아래에 요지를 소개한다.
식민통치의 마지막 10년(1935-45)은 조선의 산업혁명 시기였다.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추방되고, 노동계급이 태동하고, 인구의 유동성이 증대하고, 도시 사회가 폭넓게 확산되고, 여성계에서는 소위 신여성에 대한 선망이 확산됐던 그런 시기였다. 1917년 이광수의 소설 ‘무정’이 연재되었다. 이 소설은 신문명의 보급서였다. 서구의 신문명이 유입되고, 개화사상이 확산되고, 신청년과 신여성을 연애의 표상으로 삼은 신소설이었다. 1935년 심훈의 상록수는 답답하고 고리타분한 농촌을 계몽하기 위한 계몽서였다. 당시의 농촌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고루하고 원시적이었는가를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위안부 역시 이러한 개화기 시대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190명의 위안부를 조사했더니 88%에 해당하는 168명이 바로 탈농촌 시기인 1937-44년 사이에 위안부가 되었다. 도시를 흠모하는 일종의 골드러시가 한창이었던 시절에 가정을 뛰쳐나온 여식들이 인신매매단의 좋은 먹이감이 된 것이다. 181명의 위안부를 조사한 결과 그중 4분의 1 이상이 이미 가족과 떨어져 식모, 공장노동자, 식당 및 기생집 접대부 등으로 일하고 있다가 위안부가 되었고, 66% 정도가 만주, 대만, 중국 등으로 이송되어 갔다.
위안부로 가게 된 경우는 가정을 이미 탈출해 있던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에서 부모나 오빠들로부터 폭력을 당하고 있던 어린 여식들이 폭력을 피해 달아났다가 곧장 인신매매단의 덫에 걸려들기도 했고, 배움의 신기루를 찾아 넓어진 세상으로 도망쳐 나온다는 것이 곧 인신매매단의 희생양이 되어 위안부의 길로 들어서기도 했다. 당시 인신매매단의 앞잡이는 대부분 조선인들이었고, 군대 위안부를 경영하는 사람들 속에는 조선인들도 꽤 있었다.
위안부로 가는 길은 두 가지 경로였다. 가정-노동시장-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고, 곧바로 가정-위안부업소로 가는 과정이 있었다. 이런 과정을 촉진한 매개체가 인신매매단이었으며, 인신매매단에 걸려들 수 있었던 환경은 곧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과 학대 그리고 배움에 대한 선망을 무조건 억압하는 무지몽매한 조선 가정의 여성비하 문화 때문이었다. 소정희 교수는 가정에서 곧바로 위안부라는 구덩이로 떨어진 한 많은 위안부 6명의 케이스를 정대협 자료에서 쉽게 찾아냈다. 이러함에도 정대협은 이 사실을 알면서도 위안부 문제를 정치문제로 부각시키기 위해 사회에 그릇된 인식을 확산시켰다.
정신대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위안부는 가정에 있던 조신한 여식들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일본 순사들이 들이닥쳐 강제로 붙잡아다가 일본군이 운영하는 유곽에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소정희 교수에 의하면 이는 사실이 아니다. 소정희 교수가 조사한 6명의 위안부 사례는 이를 이해하는데 생생한 자료가 된다. 이하 소정희 교수의 사례를 요약 소개한다.
조선의 부모가 딸들을 위안부로 내몬 대표적 사례
1) 문필기: 정대협이 매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주최하는 시위에 늘 참가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18세가 되던 해인 1943년 후반부터 2년 동안 만주의 군위안소에서 일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평양-개성-서울을 거쳐 고향으로 갔지만, 이내 고향을 떠나 진주-목포-광주-전주를 떠돌며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녀는 1925년, 경남 진양군에서 2남 9녀를 둔 구멍가게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가장 하고 싶은 것이 공부였다. 아버지는 “가시내가 공부하면 여우 밖에 될게 없다”며 화를 냈다. 어머니가 몰래 쌀 한 말을 팔아 보통학교에 넣어주었다.
일주일 안 돼서 아버지가 딸을 교실에서 끌어내고 책을 불태워 버렸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딸을 죽어라 패고 집에서 쫓아내 버렸다. 큰 집에 가 있다가 다시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된 상태에서 9살부터 집에서 살림하고, 밭일도 하고, 목화밭을 매고, 물레질도 했다. 구멍가게에서 파는 고구마도 쪘다. 농사일을 할 때마다 밥을 해서 들로 날랐다. 그러던 1943년 가을 어느 날, 마을에 사는 일본 앞잡이 노릇을 하는 50대 아저씨가 공부도 하고 돈도 벌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겠다 해서 따라나섰다. 18세였다. 그 남자와 일본인 순사가 그녀를 곧장 차에 태워 부산으로 데려갔다. 긴 머리를 자르고 치마저고리를 벗기고 원피스를 입혔다. 그리고 다른 네 명의 여인들과 함께 곧장 만주로 이송됐다. 이 이야기를 포함해 아래의 모든 이야기들은 정대협이 엮은 ‘증언집’에 수록돼 있다.
이 여인이 매주 수요일 12시에 일본 대사관 앞에 나와, 일본이 자기를 강제로 연행해 가서 위안부로 삼았다며 사죄와 피해 배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위안부 놀음은 간첩의 처이자 정대협의 상임대표인 윤미향이 꾸려가고 있다. 문제는 이 여인에 있는 게 아니라 정대협에 있다.
2) 이상옥: 이 위안부의 아버지는 경상북도 달성군 달성면 면장이었다.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짓는 부농이기도 했다. 9살에 학교에 들어갔지만 오빠가 “계집애를 학교에 보내서 어디다 쓰느냐”며 학교를 못 가게 하고, 책을 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렸다. 그래도 학교에 가려 하자 죽인다고 협박했다. 옆집 언니가 학교에 다니는 게 너무 부러운 나머지 그해 어머니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로 도망갔다.
고모가 학교를 보내주었지만 오빠가 고모에게 집요한 압력을 넣었다. 고모집을 나와 소리개라는 집에 들어갔다. 9명의 처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그들의 아버지에 의해 팔려왔다고 했다. 15세인 그녀가 가장 어렸다. 이 여인들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 보니, 시모노세끼였다. 그들을 인솔한 군속이 열 명의 처녀들을 넘긴 곳은 바로 조선인 부부가 운영하는 군 유곽이었다. 그들은 이들 처녀들과는 아무 관계없이 돈을 주고받았다. 이 여인은 일본말을 한다는 것 때문에 일본 군병원에 일하면서 봉급도 받았다. 일본 군의관이 그녀를 가엽게 여겨 조선으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그날 폭격을 맞아 허사가 됐다. 이 여인 역시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으로 인해 유곽으로 떠밀린 케이스였다.
3) 이득남: 이 위안부는 1918년생이다. 그녀는 1939년부터 3년은 중국에서, 또 다른 3년은 수마트라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주정꾼이자 노름꾼으로 이유 없이 마구 때렸다. “집에 있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17세에 시집을 가라 했지만 그녀는 이를 팔려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웃 친구와 함께 봉급을 받을 수 있는 직장을 찾기 위해 기차를 타고 인천 방직공장으로 갔다. 그게 위안부로 가는 길이었다.
4) 김옥실: 이 위안부는 1926년 평양시내에서 10리 되는 촌에서 태어났다. 현재는 김은례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공부하려는 딸에게 가혹한 매질을 했다. 11세 때, 동네친구 하나가 한글도 가르쳐주고 노래도 배워준다는 데가 있다 해서 같이 가서 며칠 있다가 아버지에 들통이 났다.
“에미나이세끼가 글 배워서 어디에 쓰갔네, 연애편지질이나 하려구 그러나!” 매를 든 아버지가 무서워 할머니 뒤에 숨었지만 다리몽둥이를 부러트린다며 때렸다. 그 후 아머지가 보기 싫어 집을 나왔다. 하루는 아주머니들로부터 평양에서는 기생이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 고운 옷 입고, 고운 가마 타고 다닌다는 기생이 되고 싶어 기생집으로 가서 양녀가 됐다. 불과 일주일 만에 아버지에 들켰다. “이 에미나이가 조상 망신, 동네 망신은 다 시키고 돌아다닌다”며 매를 맞고 집으로 압송돼 왔다. 다시 양말공장으로 뛰쳐 나갔다. 거기에서 3년, 담배공장에서 4년 일하다가 드디어 인신매매 단에 걸려들었다.
5) 배족간: 이 위안부는 1922년생이다. 이 여인은 자살까지도 기도했을 정도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광목공장에서 일하게 해주겠다는 동네 구장의 거짓말에 속아 집을 나간 것이 곧 중국행이 되었다. 중국의 여러 위안소들을 떠돌았다. 1946년 집으로 돌아왔지만 어머니는 냉담했다. 어머니가 임종할 때 딸을 찾았지만 그녀는 가지 않았다.
6) 송신도: 이 위안부는 1922년 생으로 어머니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았다. 16세 때부터 먹고 살기 위해 수많은 잡직들을 전전하다가 좋은 직장 구해주겠다는 이웃의 꼬임에 빠져 중국으로 갔다가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일본인 병사가 결혼하자고 하여 일본으로 동행했지만, 그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그녀를 버렸다.
정치목적을 위해 위안부 악용하는 정대협
이 6개의 사례들은 극히 일부의 것에 지나지 않지만 당시의 조선의 사회상을 잘 비추어준다. 이들을 비극적인 나락으로 내 몬 것은 일본 순사가 아니라 그녀들을 낳아준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빠들이었다, 당시 사회는 개화의 바람을 타고 있었다. 어린 처녀들은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과 가정에서의 폭력 사이에서 탈출을 선택했고, 그 탈출은 곧장 인신매매단으로의 진입을 의미했다.
이런 사정들을 놓고, “당시 조선 여인들은 모두 가정에 있었으며, 일본순사들이 가정으로 쳐들어 와서 처녀들을 강제로 끌어갔다. 사과를 하고 보상을 하라” 이렇게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심미자의 경우처럼 일본 순사가 교실 등에서 강제로 끌어간 경우들도 있다. 하지만 심미자 할머니의 증언이나 위 사회상을 보면 대부분의 위안부는 가정폭력과 무지로부터 탈출했다가 인신매매단에 걸려든 여식들이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위 6개의 케이스는 모두 정대협이 작성한 증언록에 있는 내용들이다. 모든 사정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대협은 위안부들을 정치적 목적으로 거리에 내돌린다. 문필기는 매주 수요일마다 대사관 앞에서 “내 청춘을 보상하라”고 시위를 하지만 정대협이 엮은 ‘증언록’에 의하면 그녀는 일본에 요구할 것이 하나도 없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제1권 2부는 ‘식민지 하의 여성의 삶’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일본의 오사카산업대학 후지나가다케시 교수, 미 시카고대학 최경희 교수,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의 소정희교수의 글이 방대한 분량의 논문으로 실려 있다.
이 세 편의 논문을 보면 우리 정대협의 주장들이 얼마나 허황된 것들인가를 낱낱이알 수 있다. 아울러 논문이 인용한 근거자료들을 보면 일본인들의 조사가 매우 많은 반면 한국인들의 조사가 매우 빈약하다. 국내학자들은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하지 않았고, 정대협은 객관성이 결여된 감정적 주장을 해왔다. 때문에 이 분야를 연구하는 수많은 국제 학자들에게 망신스러운 결과만 초래했다는 것이 이들 자료에 시사돼 있다. 먼저 후지나가 다케시 교수의 글 “상하이의 일본군 위안소와 조선인‘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군 위안소의 원조, 상해위안소
1. 오키나와에 거주한 조선인 전 위안부의 증언을 기록한 르포르타주 등 십여 권의 책들이 일본에서 발행됐다. 위안부 문제가 일본에 충격을 준 것은 1991년 8월부터 위안부들이 잇따라 자기 존재를 밝히기 시작했고, 이어서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을 요구한 소송들을 전개한 데서 태동했다. 자료상 확인된 바에 의하면 1932년 상해 위안소가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이며 중일전쟁 개시 이후 이 지역에서의 위안부 수가 최대 규모였기 때문에 상해 위안소는 타 지역의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상해 위안소 환경을 연구하는 것은 그 의미가 매우 크다.
상해에는 개인적인 돈벌이를 위해 일본인 매춘여성(가라유키상)이 해외로 나간 가장 전형적인 케이스다.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은 1880년대부터 가라유키상에 대한 단속에 나섰다. 이는 공창제도의 도입을 의미했다. 공창제도의 설치 동기는 1)강간방지, 2)군의 사기앙양 3)성병 예방 4)방첩이었다.
당시 상해에서의 조선인 여성 실태는 이러했다. 상해에서 조선인 여성 댄서가 출현했다. 카페에서 일하는 여급도 출현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사창도 있었다. 이들은 신흥접객부로 어쩔 수 없이 매춘을 했다. 이러한 여성들은 불경기로 인해 점점 더 많이 상해로 모여들었다. 1936년 당시 상해에는 조선인 여성 댄서가 37명, 이들은 풍속을 혼란시켰다는 비난도 받았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음식점, 카페 등에서 일하는 조선인 여급은 48명, 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 밀매음을 하여 주인과 반반씩 나누었다. 이 무렵 상해에는 290명의 조선인 사창도 존재했다. 사창이란 공창으로 인정받지 못한 곳이었다.
만주사변(1931년 9월) 때 나타난 위안부는 기본적으로 매춘부 출신이며 그 중에는 조선인 여성이 일부 포함돼 있었지만 중일전쟁 중기인 1940년 무렵에는 조선일 여인을 강제로 데려다 위안부를 시킨 ‘성적 노예’들도 새롭게 출현했다. 중일전쟁이 전면화 된 이후 위안소가 대량으로 개설되는 시기에 위안소 경영자 중에 조선인 이름이 꽤 있었다.
일본군이 개설했던 위안부는 1)군직영위안소 2)군이 감독-통제하는 군전용 위안소 3)민간매춘소를 병사용으로 지정한 곳(민간, 군 공용) 4) 순수한 민간 전용 위안소(군이 다니더라도 그건 개인적인 일). 4번째 형 위안소는 일본군 위안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1932년3,14자 상해 파견군 고급참모 오카베 나오자부로의 일지에는 이런 글이 있다.
“요즘 병사들이 여자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다는 추잡한 이야기를 듣는 일이 많다. 이는 피하기 어려운 일이므로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설을 만드는 것이 좋다고 판단. . .”
상해 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는 이렇게 회상했다.
“위안부 문제를 생각한다. . .이렇게 말하는 나는 부끄럽지만 위안부 안의 창설자다. 쇼와7년(1932)의 상하이 사변 때 두 세 건의 강간죄가 발생했으므로 파견군 참모부장이었던 나는 그곳 해군을 본떠 나가시키 현지사에게 요청하여 위안부단을 불러들였다. 그 후 강간죄가 완전히 그쳤기 때문에 기뻤다”
1932년 당시 상해의 일본인의 풍속영업 현황은 다음과 같다. 요릿집 3개소, 음식점 72, 다방 13, 해군위안소 17, 구락부 2, 무도장 1, 예기 134, 무도녀 170, 작부 166.
상해 주재 일본인의 매춘 역사
“메이지 원년(1868년)부터 메이지 14-15년(1881-1882) 무렵까지 상해 주재 일본인 수는 10-100명이 고작이었으며 1년에 평균 5-6명씩 증가했다. 대개 남자 3분1, 여자 3분의 2였다. 여성의 6-7할은 외국인을 상대로 매춘을 했다. 이들이 일본 매춘의 선구자일지 모른다. 모리사키 가즈에저서 ‘가라유키상“은 메이지 15(1882)에 상해에 800명의 매춘부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일본 아가씨들이 금새 늘어난 상해에서는 영사관이 이를 국가의 수치로 간주하고 붙잡아 500-600명을 본국으로 송환했다. 그래도 여전히 200명 정도는 숨어 있었다”
결 론
매춘의 역사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다 어두운 역사로 연속돼 왔다. 우리나라에서도 1961년 5.16 혁명 이전까지 매춘은 불법으로 통제됐었다. 그래서 매춘은 은밀히 가정으로 스며들었고, 성폭행과 살인 등의 나쁜 형태로 확산돼 갔다. 이에 박정희의 최고회의는 공창제를 채택했다. 가정으로 파고들던 성범죄와 성병 등이 매우 효과적으로 개선됐다. 위 논물 일부를 보면 당시 일본도 도덕과 품위와 성적 수요를 놓고 많은 생각들을 했던 것으로 짐작되며 당시 그들의 고민도 지금 현재에도 우리가 풀지 못한 채 끌어안고 있는 고민과 일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보자. 한국사회는 아마도 세계에서 상위권에 속하는 성적 풍기문란 공화국이다. 국가를 이끌고 나가는 자리들은 있지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무능과 이기심으로 서로 물어뜯는 일로 1년 365일을 보내고 있다. 이런 식으로 몇 년을 더 낭비하면 우리는 북한에 먹히고 말 것이다. 만일 지금 북한에 먹히면 우리의 여성 국민들은 70여 년 전에 일본인들로부터 당한 고통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비참한 취급을 받다가 생명마저 잃게 될 것이다.
옛날의 선조들이 못나서 강대국에 먹힌 것은 사실이다. 만일 일본에 먹히지 않고 중국이나 러시아에 먹혔다면 러시아의 위안부 처지나 중국의 위안부 처지는 일본의 위안부 처지보다 더 양호했을까? 나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위안부 문제로 일본을 원망하기보다는 못난 짓을 하다가 나라를 빼앗겼던 우리 선조를 원망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소정희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위안부는 무지몽매한 한국의 아버지와 오빠들의 학대가 낳은 산물이었다 할 것이다. 이런 성격의 문제를 가지고 침소봉대하고 왜곡하여 위안부 문제를 한-미-일 안보협력 체제를 깨기 위해 악용되고 있는 것은 하루라도 빨리 정지돼야 한다. 더구나 정대협 지휘부는 북한과 간첩에 깊이 연루돼 있는 사람들이 장악하고 있지 아니한가. 당장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이는 수요집회부터 중단시켜야 할 것이다. 창피해 못 살겠다.
1932년 06월 04일 毎日新報 매일신보
處女誘引後
蹂躪코賣喫
만주로다리고가려다발각
仁川署逮捕取調中
처녀유인후 유린하고 만주에 창기로 팔려다가 검거.
이건 용감한 어부 두 분이 힘좀 쓰셨네.
1933년 05월 05일 東亜日報 동아일보
民籍을僞造
醜業을強制
악마 같은 유곽업자의 소행
犯人은警察에被逮
호적을 위조
추업을 강제
악마 같은 유곽업자의 소행
범인은 경찰에 체포
시내의 백 사 건 178 번지에 사는 우 正渙라는 사람이
漢南楼라는 상호로 창기 영업을하고 있던 지난달 5 일
경북 남산 清邑에서 박 福南라는 16 세 소녀를 350 원에 구입하게되는 사건으로,
우 소녀가 경영 할 수있는 연령에 도달하지 않은 것을 알고, 朴福南의 언니 朴順南의 호적을 이용하여 상업적 권한을 가지고 일하고 있던 수
관할 혼 경찰서의 엄중 한 조사에 의해 밝혀졌다.
이 우 正渙은 창기 사업을 영위하면서 다수의 어린 소녀를 사면서
전술 한 바와 같은 범행을하고 있었다고보고, 향후, 공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엄중 처벌 할 방침이다.
1933.06.30 東亜日報 동아일보
路上에서少女掠取
醜業中⼈에賣渡
♢金神通 팔아먹은 男女檢舉
判明된 誘引魔手段
노상에서 소녀를 유인하여 납치,
추업중인(매춘포주) 에게 매도.
범인은 박명동과 이성녀
1933.07.01 東亜日報 동아일보
少女誘引團의首魁
은뽕어머再昨夜檢舉
유인파 주업으로 쟌파까지
中人파十五年問同居
소녀유인단의 수괴 은뽕어멈.
주로 어린 소녀들을 꾀어다가 매음굴에 팔아 먹던 악녀였는데,
일본경찰이 검거함.
1935.4.14 東亜日報 동아일보
災害地의處女를꾀여
遊廓에 팔려는誘引魔
취직을 시켜준다고 감언으로
鍾路署에서一黨打盡
재해지(災害地)의 처녀(處女)를 꾀어 유곽(遊廓)에 팔려는 유인마(誘引魔)
취직을 시켜준다고 감언으로
종로서(鍾路署)에서 일당타진(一黨打盡)
재해지의 가난한 처녀들를 전문적으로 유인하야 유곽에 파라먹든 유인마(誘引魔)가 부내종로서에 체포되엇다.
전 북 전주읍(全州邑)에사는 임춘성(林春成)(30)이라는 사나이는 13일 오후六시경에 전주읍(全州邑)에서 수일전 유인하야 상경한 서옥순(徐玉順)(21)이라는 처녀를 부내 돈의동(敦義洞) 이경도(李敬道) 소개소의 소개로 병목정(並木町)모유곽에 파라먹을 여다가 전기 서옥순의 동무인 인사동(仁寺洞) 애월식당(愛月食當)의 여급 이모(李某)의 고발로 소관종로서에 체포되엇다는데 공범자 1명은 수수료 30원을 받어가지고 어디로인지 잠적하엿다고 한다.
그런데 전기 서옥순은 작년 여름의 대수재로 인하야 일조에 파산을 당한 가정의 귀여운 딸로써 전기 유인한 임춘성의 취직시켜 주겟다는 감언의 꾀임을 받어 상경하야 그와 같이 동무의 도움으로 위기일발의 경우에서 구조를 받은 것이라고 한다.
1936.05.14 毎日新報 매일신보
農村婦女誘引
惡漢을檢舉
에여자가 마수를버 서 낫다
警察으餘罪追窮
농촌부녀유인 악한을 검거.
여자를 만주에 창기로 팔려던 것을 일본경찰이 검거해서 여성을 구출함.
네명의 여자가 마수를 벗어남.
1936.07.09 毎日新報 매일신보
婦女誘引醜業強制한
行商魔女의罪状
취조다라속속진상이드러나
關係支那人等檢舉
처녀를 유인하여 추업(매춘)을 강제한 행상마녀의 죄상.
범인은 황금정, 박금희, 이덕순 이라는 조선녀 3인.
순진한 가정부녀들을 유인해서 중국인에게 매춘을 강요함.
일본경찰이 검거하여 피해여성들을 구출.
1936.02.14 毎日新報 매일신보
純眞處女를誘引
娼妓의醜業強要
동업하자고괴여다가매춘시켜
就縛된滿洲⼈肉商
조선인들이 여자 유인해서 창기로 팔아 먹는걸
일본경찰이 발견하고 검거함.
1939년 3월15일 東亜日報 동아일보
河允明誘拐事件波紋擴大
悪辣한遊廓業者
警察의救出을念慮
続々外國으로轉賣
人事紹介所에
検察의“메스”!
特別調査隊編成内探
1939년 3월15일 東亜日報 동아일보
誘拐한百餘處女
貞操를强制蹂躪
河允明餘罪는續出
1939.03.28 毎日新報 매일신보
純眞한農村處女
百餘名誘引賣喫
부자와四촌등세명이공모후수년을범행
西署에第⼆『河允明』事件
농촌처녀 유인해서 100 여명을 팔아먹음.
부자와 4촌이 가족친지 조선인 납치단임.
이걸 일본경찰이 검거해서 여성들을 구해줌.
1939년 3월 12일 조간 제2면 東亜日報 동아일보
人身賣買敢行하는
惡德紹介業에鐵槌
東署逮捕의誘拐魔事件을契機로
發覺되면嚴罰方針
이번誘拐事仵은
一大社會問題
北村東門署長 談
인신매매감행 하는
악덕소개업 에 철퇴
1939년 3월 9일 제3면 東亜日報 동아일보
誘引事件多端(유인사건다단)
遊廓業者(유곽업자)는 娼妓(창기)를 地方(지방)에 轉賣(전매)
警察(경찰)은 營業停止(영업정지)라도 시킬 方針(방침)
유인사건다단
유곽업자 는 창기 를 지방 에 전매
경찰 은 영업정지 라도 시킬 방침
히 세의 처녀유인마 하윤명(河允明)부처는 경찰의 준렬한 취조에 따라 속속 여죄가 백일하에 들어나고 잇는데 이번 사건이 한번 세상에 폭로되자 전기 하윤명에게서 처녀를 산 부내 유곽업자들은 3,4일 동안에 전부 다 곧으로 전매하야 그들의 손해를 미연에 방지케 잿바른 수속을 취하엿다 한다.
이로 말미아마 경찰의 호의로 그라을 구출할려든 게획은 당분간 꺽긴 세음인데 그들 업자들은 경찰에서의 호출이 잇자 곧 지방으로 급처분을 하엿다는데 이들은 이미정을 암고 이와같이 하엿으므로 경찰에서는 업자에게 엄중한 처벌을 하야 경우에 따라서는 영업정지처분까지 나릴지 모른다고 한다.
병목정(並木町) 58번지 박성삼(朴聖三)이가 경영하는 유곽에 하윤명의 꼬임으로 팔려와 잇는 경북 영일(迎日)출생 이칠성(李七星)의 딸 이복귀(李福貴)(1□)는 6일 600원에 병천군 서면 삼향리(明川郡西面三鄕里) 명월루(明月樓)에 전매한 것이 판명되었고 기타 15명 부내 유곽에 판 여자는 전부 다른 지방으로 막처분하엿고 오직 전남 순천군 낙안면 이곡리(順川郡樂安面李谷里)출생 서사헌정(西四軒町)180번지 반월루(半月樓)생기 권사순(權四順)(20)(藝名英子)만이 남아잇는데 그는 작년 써달 1000원에 하윤명이 만월루에 판것이하란다.
그리고 병목정(並木町) 61번지 유명루(遊明樓)에 팔려 잇는 경남 합천(陜川)출생 조학남(趙鶴南)(18)은 이틀전 500원을 받고 산동성 답경위안소(山東省畓鏡慰安所)에 판 것도 들어나 그들의 행방창기에도 여간 곤난이 아니리라는데 사건은 의외의 방면으로 벌어저 취조에 곤난을 느끼고 잇다한다.
1938년 12월 4일 東亜日報 동아일보
良家處女誘引해서
滿洲로賣却騙財
釜山署, 犯人을逮捕
양가처녀유인 해서
만주 로 매각편재
부산서, 범인 을 체포
【釜 山】 전남 군산부개복정 1정목58 소개업자 전두한 (38)은 지난 11월15일 부산부 보수정 1정목 월성려관 에 투숙중에 잇는 부산부본정 5정목46 하촌데이고(下村데이고)(19)와 통영읍서정 26 관원정향 (17)등 2명의 처녀를 유인하야 만주로 취직시켜 준다고 감언이설로 꾀인후 자기가 친권인 것 같이 유곽으로 판다는 위임장을 위조하야 그들에게 각각 150원씩을 어디쓰고 싶은 곳에 쓰라고 준 다음 만주방면으로 수백원씩에 매각하려고 군산으로 데리고 가는것을 소관 부산경찰서에서 탐지 체포하고 방금 엄중취조중인데 이자는 소위소개업이란 간판밑에서 이러한 수단으로 양가의 처녀를 다수유인 매각한 여죄가 만타하야 거듭추궁중이다.
1939년 3월 29일 東亜日報 동아일보
誘引魔의跋扈
유인마의 발호
一(일)
殘忍無道(잔인무도)한 저 白白敎徒(백백교도)의 罪相(죄상)이 아직 法(법)의 裁斷(재단)을 받기도 前(전)에 各種類似(각종유사) 宗敎事件(종교사건)이 疊出(첩출)하는가 하면 一方(일방)에는 處女誘引(처녀유인) 賣喫事件(매끽사건)이 不絶(부절)하고 잇으니 日昨(일작) 東大門署(동대문서)에서 摘發(적발)한 所謂(소위) 河允明事件(하윤명사건)과 西大門署(서대문서)에서 檢擧中(검거중)인 裵長彦事件等(배장언 사건등)은 그의 가장 顯著(현저)한 事例(사례)라 하겟다.
이들은 그 所行規模(소행규모)가 자못 크고 內容(내용)이 極(극)히 惡質(악질)의 것이나 其他群小事例(기타군소사례)는 一一(일일)히 指摘(지적)하기에 어려우리만치 數多(수다)하게 潛行(잠행)되고 잇어 진실로 우리 社會(사회)의 文化水準(문화수준)을 疑心(의심)하게하고 구태여 이런 것을 問題(문제)로 삼는 것부터가 벌서 自身(자신)의 苛責(가책)이크다.
二(이)
그러면 어째서 이같은 非人道(비인도),非合法(비합법)의 人間惡(인간악),社會惡(사회악)이 演出(연출)되고 잇는가? 이것은 무엇보다 첫재로 그 當事者(당사자)들의 罪過(죄과)를 들지 안흘 수 없을 것이다. 먼저 黃金(황금)의 威力(위력)에 手段(수단)을 가리지 못하고 가진 詐行(사행)을 敢行(감행)하는 人肉商(인육상)들의 罪惡(죄악)은 唾罵(타매)하고 膺懲(응징)하여도 오히려 不足(부족)한바 잇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그 對策(대책)을 말한다면 그 誘引魔(유인마)들로 하여금 改悛(개전)케하고 退治(퇴치)하야 再現(재현)을 防止(방지)하는 것이 第一義(제일의)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絶對(절대)로 根本的(근본적)退治策(퇴치책)은 되지못한다. 그 理由(이유)는 한 사람의 誘引魔(유인마)와 한 黨(당)의 誘拐團(유괴단)을 抑壓(억압)햇다고 해서 그 類似分子(유사분자)가 醱酵(발효)할 만한 社會的溫床(사회적온상)이 備置(비치)되어 잇고 그 陷井(함정)에 射落(사락)되지 안흘 수 없는 濟經條件(제경조건)이 잇다면|아니 이 地上(지상)에 無知(무지)와 悲慘(비참)이 存在(존재)하는 동안에 잇어서는 이와 類似(유사)한 性質(성질)의 事件(사건)이 恒常繼續(항상계속)될 것이며 오직 다만 場所(장소)와 사람을 바꾸어서 나타나고 잇을는지도 모른다.
三(삼)
그러니 먼저 誘引魔(유인마)의 跋扈(발호)를 沮止(저지)한다는 것은 重言(중언)할 餘地(여지)가없고,現在司直(현재사직)이 이 點(점)에 留意(유의)하는바 없지 안치마는 앞으로도 一段注力(일단주력)하여야 할 것이다。그러되 우리가 日常(일상)에 잇어서 遺憾(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늘 朝鮮(조선)의 警察行政(경찰행정)이 한便(편)으로 기우치지 안는가 하는 것이다.
換言(환언)하면 社會(사회)의 不安(불안)을 除去(제거)함에 잇어서 從來(종래) 思想對等(사상대등)에는 萬全(만전)을 期(기)하엿 지마는 鄙近(비근)한 雜犯(잡범)의 措置(조치)에 多少不徹底(다소불철저)한 感(감)이없지 안헛다。
純眞(순진)한 農村處女(농촌처녀) 하나를 또는 虛榮(허영)에 날뛰는 都市(도시)의 少女(소녀) 하나를 脫線(탈선)케 한것이 그다지 큰 問題(문제)가 아니라면 이것은 큰 잘못이다. 그것을 다만 正當(정당)치 못한 個人間(개인간)의 한가지 契約(계약)이라고만 돌릴 수 없는것은 勿論(물론) 性道德(성도덕)을 破壞(파괴)하고 社會秩序(사회질서)를 侵蝕(침식)하는 害毒(해독)은 그 影響(영향)이 어느 것보다 結斷(결단)코 적은 것은 아니다. 勿論(물론) 이때까지 이런 事件(사건)을 만히 摘發(적발)하엿고 또 犧牲(희생)된 少女(소녀)들의 勞苦(노고)가 적지 안흔 것을 記憶(기억)하는 바이나 앞으로 좀더 이 方面(방면)의 掃淸(소청)이 必要(필요)하다는 것이 또한 無理(무리)는 아닌 것이다.
四(사)
끝으로 거듭 말하는 것은 誘引魔(유인마)가 跋扈(발호)하지 못하도록 適正(적정)한 社會的(사회적) 調整策(조정책)을 잊지말어야 하겟다는 것이다.””法律(법률)과 風習(풍습)에 依(의)하야 어떤 永劫(영겁)의 社會的處罰(사회적처벌)이 存在(존재)되고 그리하야 人爲的(인위적)으로 地獄(지옥)을 文明(문명)가운데 맨들어 노코 聖(성)스러운 運命(운명)을 世俗的因果(세속적인과 )에 依(의)하야 紛糾(분규)시키는 동안에 잇어서는 그런 性質(성질)의 事件(사건)이 繼續(계속)되리라는”빅톨,유고”의 말을 그대로 믿지 안코 또는 誘引(유인)하는 者(자)나 或(혹)은 誘引(유인)되는 者(자)의 責任(책임)을 곧 社會(사회)에 轉嫁(전가)시키지 안는다고 해도 그 個人(개인)을 問責(문책)하는 同時(동시)에 社會(사회)가 또한 連帶的責任(연대적책임)을 저야만하게 되는 것이 잘못이 아니요 當然(당연) 또 當然(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宗敎的情緖(종교적정서)를 가젓고 經濟的條件(경제적조건)이 生活(생활)을 支配(지배)하는 때가 만흔 것인데 誘引(유인)되는 動機(동기)가 모두 無智(무지)하엿고 環境(환경)이 悲慘(비참)하엿기 때문에 두가지의 貫革(관혁)에 失敗(실패)하엿던 것이다. 이 點(점)을 看取(간취)한다면 當局(당국)은 좀더 그들을 指導(지도)하고 未然(미연)에 防止(방지)하려는 全般的對策(전반적대책)을 어찌 樹立(수립)하지 안흘 수 잇으랴.
1940년 6월 28일 大阪朝日 西鮮版 오사카 아사히 서선판
시골 처녀 같은 열네 명이나 납치 일당 送局 신청
경성부 봉래촌 4초메 무직 배장언 (57세) 외 열한 명은
공모하여 시골의 생활고에 허덕이는 가정의 딸, 어느 날은 出戻り 여자 등
열네 명을 납치하고 酌婦 어느 날은 창기 등에 팔아하여
약 한 만여 엔을 せしめ 테위 사건은 서대문 경찰서에서 조사 테위했지만,
이십오 일 사건 기록과 함께 送局했다.
1953 02 25 京郷新聞 경향신문
륜落되는戰災女性의實態
半數가生活苦로投身
抱主 289名에登錄者만一千二百餘名
1959년 7월 30일 東亜日報 동아일보
慰安婦가悲観自殺
【仁川】
1962년 8월 23일 京郷新聞 경향신문
女性體面지키자 慰安婦들이 决議
【烏山空港】 송탄면지산 리「패러다이 스」「홀」에서 지난17일 오산공항주변 의위안부총회 (一名=姉母會) 가 미헌병대장둥한·미내빈 다수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날 약6백여명의 위안부들은『우리는 대한여성의 긍지를 굳게간직하고 국민의 명예와체면을 지킨다』는둥 7개항목 의결의문울채택하였다。
일본인 멤버 K 씨는 자신이 싫어하는 한국인 남자와 강제로 결혼했다.
일본인 멤버 U 씨는 그녀를 폭력을 휘두르는 한국인 남자와 결혼했다.
홍난숙은 1998년에 미국 CBS TV 60분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野錄 統一敎會史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사) – 1
. 박 정 화 외2인 지음 (前 통일교창립위원)
유효민 – 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통일교의 실상과 그 허상
– 종합적 자료편 –
탁명환 문학석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