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록 통일교회사-2

야록 통일교회사 – 1


야록 통일교회사 – 2


野錄 統一敎會史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사)

박 정 화 외2인 지음 (前 통일교창립위원)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 통일교
1996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2020년 하늘부모님 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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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제5장 재림메시아의 정체 149
원리와 실천의 모순 151
나의 수기는 진실의 기록 151
아무것도 모르는 신자들 152
문선명이 무슨 메시아! 154
정득은 (丁得恩) 과의 이상한 관계 157
체포도 당연한 섹스포교 159
색과 욕과 돈과 162
남편의 돈을 훔쳐 오라 162
왜 죄없는 아이들이 죽는가! 164
복귀 (復歸) 라고 하는 미명으로 섹스 165
많은 가정이 파괴 되다. 167
여자의 원한은 여름에도 서리를 169
처녀에게 낳게한 아이들 170
배신한자는 누구냐 173
문선명의 소개장 173
악착같은 노동력착취 174
문의 아들 흥진과 효진 176
삭제된 창시자의 이름 178
사건이 생겼다 바로 피하라 180
배신자는 문선명이다 182

제6장 진짜 사탄은 문선명이다 185
산증인의 이용가치 187
재혼해서 신천지로 187
병으로 쓰러지다 189
오래간만에 만난 간부 189
통일교회 창립의 산증인 191
문선명의 거짓말과 일본의 신자 193
원리는 김백문 (金百文) 의 것 도용 195
이복형제 결혼 의혹 197
원리대로 실천한 김덕진 (金德振) 198
36가정의 역할 200
속출한 재림메시아들의 대책 200
희생된 공로자 204
문선명보다 뛰어난 인격자 – 유효원 204
재정을 이룩한 실업가 – 유효민 206
화제의 다보탑을 수출한 일신석재사장 – 유효영 208
문선명의 부정과 범죄 209
김영희의 비참 211
또 한사람의 어머니 214
나의 부끄러운 체험 215
붉은용 (龍) 이 세상을 미혹 216

제7장 우리들이 체험한 사실 219
유효민 – 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221
유신희 – 6마리아의 한사람 이었다 227
김덕진 – 섹스릴레이 실천자 232

참고사항:  *는 가명표시 입니다.


149

제5장

재림 메시아의 정체


▲ 당시 6마리아와 한사람 이영옥*, 식사중인 문선명 (1960년경 청파동교회)

원리와 실천의 모순

나의 수기는 진실의 기록
나는 흥남수용소에서 문선명을 알았고, 1년 6개월을 같이 생활 하였다. 6.25동란으로 출옥한 그와 두달간에 걸쳐서 남쪽으로 피딘하여 평양에서 서울 부산까지 왔다.
한동안 나는 경주에 있었고 문선명은 부산에 있었다.
그와 채차 합류하고서도 이 세상의 창조의 역사와 타락의 원인, 그리고 이 세상을 복귀시켜 하나님이 구원한 깨끗한 세상의 창조 목적대로 되돌리는 원리를 듣게 되었다.
원리의 주인공인 재림 메시아 참부모의 이름 아래 통일교회는 이제야 세계 백수십개 국가에 퍼져 있다. 진정한 어머니인 해와가 된다고 하는 것으로 한 사람을 선택하여 “어린양의 잔치 (정식결혼)” 를 행하고 열한사람의 아이들을 낳게 하였다.
그리고 그 첫번째 아들을 아버지 문선명의 후계자로 하고자 하는 세습체제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 
문선명은 각국의 학자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소개 되었다. 그를 위대한 인물로서 존경하고 있는듯한 책도 있다. 나는 그러한 책은 거의 읽었으나 그러한 책은 문선명이 지금까지 그 목적과 실천을 어떠한경과로 해 왔느냐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쓰지 않고 있다.
다만 현상적으로 나타난 것 만을 쓴, 겉치례 만의 내용 이었다.
그러한 책에 책에 씌어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나도 비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이 책에서 써 온 것은, 문선명과 같이 있으면서 직접 이야기를 듣고 행동해 온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 했다고 단언해 두고 싶다.
문선명이 흥남수용소에서 시간만 있으면 나에게 이야기한 “원리” 는 부산 수정교회에서 원고로 써 냈다.
이것이 원리원본이다 (이것은 종이에 연필로 쓴 것인데, 이것을 대구에 와있던 정선옥이 보관하고 있었고, 내가 서진광산에 있을때 박애자가 가져다 주었다. 그때 내가 공책에 베껴쓴 것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이 원리원본을 기초로해서, 두뇌가 뛰어난 유효원이 ‘원리해설’ (原理解說) 을 썼다.
그리고 이 ‘원리원본’과 ‘원리해설’이 통일교회의 기초가 되어 문선명이 세계 백수십개 나라에 진출하게 되는 기초가 된 것이다. 이 원리원본과 원리해설을 전부 인용 할 수는 없으므로, 우선 요약해 둔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자들  152
그러나 이 ‘원리해설’ 에는 그 원리와 실천과의 모순되는 것이 있어서 중요한 포인트를 몇 항목만 지적해 둔다.
어느나라에도 그 역사의 시초에는 신화가 있다. 우리 한국이나 한반도에는 단군을 비롯한 건국의 신화가 있다. 일본에는 천조대신이 있고 중국에는 덕왕형제 11인 등이 있다.
그런데 내가 따랐던 문선명은 한나라의 국조가 아니라 세계의 재림 메시아라고 한다. 지금까지 출판된 많은 책 가운데는 문선명을 구세주라고 쓴 것도 있다. 문선명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계를 통일 하려고 주장 하고 있으나 내가 믿어온 재림메시아는 점점 그 모양이 커감에 따라 그 원리와 실천이 점점 상반 되어 가는듯한 느낌이 드는것을 어찌하라. 2천년전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간 예수와는 너무나도 차이가 있다.
문선명은 제3의 아담 참부모로서 통일교회 교인은 물론 온 세계 사람들로 부터 추앙받아 백수십개 나라에 넓혀져 있다.
그러나 식구라고 불리는 통일교회의 신자가 되더라도 사단의 세상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와 생활에 변화된것은 전혀 없다. 오히려 나빠지던가 비명의 죽음을 맞은 사람도 있다.
나는 그점에 대하여 계속 의문을 가져왔다.


▲ 결혼전 한 학자

많이 있는 통일교회 관계의 출판물 가운데 실제로 내가 읽은것에는 통일교회는 이러한 윤곽의 교회이며 그 교주인 문선명은 원리라고 하는 교리에 나오는 재림메시아 이다 라고 하는정도의 표면적인 것밖에 씌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문제는 문선명이 얼마만큼 재림메시아 로서의 역활을 다 하고 있는가.
구세주로서 이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가 하고 하는 것으로 귀결 된다.
그런데 뻔뻔스러운 문선명은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지금부터도 계속해서 희생 시키려고 하고 있음으로 더 이상 잠잠코 보고 있을 수 만은 없다고 생각되어, 이책을 쓰기로 한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통일교회 교인들은 지금도 백수십개 나라에서 문선명을 참아버지로 생각하고 한학자를 참어머니라고 부르면서 이 세계가 통일될 것을 매일 같이 기원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나도 문선명이 진짜 재림메시아가 되어서 이 세상을 구원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는 식구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만약 문선명이 재림메시아가 아니고 요한 묵시록 20장에 씌여 있는대로 라고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또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고 한다면 진짜 참 신부와 어린양의 잔치를 올려 참부모가 되여 열한사람의 아이들을 출산하고 있는데 어째서 참 부모한테서 남은 아이들이 두명씩이나 교통사고로 죽어 갔는가.
또 다른 여자에게 출산시켜 입적한 세사람 가운데 한사람도 사고로 죽었다.
“요한묵시록 21장 4절” 에는 사람의 눈에서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신다. 이미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부르첫음도 아품도 없다.
먼저 것이 지나가 버렷기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다.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면 복귀 원리대로 어린양의 잔치를 행해서 이 세계의 모든것을 해방하는 날짜 까지 정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 세상은 그대로인 것인가.
원죄의 근원을 모두 없애고 복귀의 의식을 거쳐 참부모가 되었을 터인데 어째서 거기서 태어난 어린 자식들이 죽어 가는가.
또 그 자손들 가운데는 부끄러운 스캔들을 일으켜서 언짢은 소문까지 내는 자도 있다.
나는 문선명이 원죄를 통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 왔는가.
원리대로 실천하였는가? 등에 관해서 밝혀두고 싶다.
문선명의 장래는 하나님 만이 결정 할 수 있는 문제 이다.
나는 다만 문선명이 발표한 원리에 근거해서 그 원리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함께 살고 있었던 때의 사실에 대해서 써 보려고 생각한다.

문선명이 무슨 메시아 !  154
여기서 다시 한번 문선명의 원리를 복습해 두자.

(창조원리) –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고 흙으로 사랄을 만들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인간이 되었다. 그 이름을 아담이라고 부르며 에덴의 동산에 두어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 쓸쓸해 보여서 그가 자고 있는 동안에 그의 갈비대의 하나를 빼어 여인을 만들었다 그 이름을 해와라고 하며 아담과 함께 에덴의 동산에서 세상의 모든것을 지배하도록 하였다.
동산에 있는 나무열매는 무엇이든 따 먹어도 좋으나 동산 한 가운데 있는 나무의 열매만은 절대로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나님은 두 사람에게 명령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라고 경고하였다.
(타락원리) – 해와가 성숙한 뒤 하나님이 모양이 있는 아담의 몸에 임재하여 해와와 함께 사랑해서 즉 섹스를 해서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됨으로 거기에서 부터 생겨나는 죄없는 아들에 의해서 자손이 번영하도록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알고 천사장 루시엘이 아직 성숙하지 않은 해와를 유혹해서 섹스를 하고 말았다. 
또 해와에게 아담과도 섹스를 하도록 시켰으므로 이것이 타락한 사단 루시엘의 혈통 세계가 되었다.

(복귀원리) – 이와같이 성숙하지 않은때에 해와가 천사장 루시엘과 섹스를 한 것으로 인해서 인간이 타락케 된 것이다.
그때 해와와 아담이 나무열매를 따 먹었다면 죄를 범한 입을 감추었어야 할 터인데 하나님  앞에서 두 사람은 부끄러워서 무화과의 잎으로 하체를 감추었으므로 섹스를 한것이 틀림없다고 하는 것이다.
지금도 인간은 신체에 상처가 생기면 그것을 가리우려고 하는것이 본성인데 부끄럽다고 하체를 가리우는 것은 그곳에서 범죄하였음을 자증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이 타락한 것을 어떻게 복귀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해와에게 사단의 피가 흘러들어간 것으로서 아담과 해와는에덴 동산 땅을 파며 해와는 아이를 낳는 해산의 고통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 게 되었다.
그 후 아담과 해와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이 두 사람이 인간의 시조가 된것이다. 가인이그 아우인 아벨을 죽였으므로 이것이 에덴 동산에서 최초의 살인죄가 된 것이다.

156
그러면 어떻게 복귀하면 이 세상이 깨끗하게 될 것인가 여기서 문선명은 이 복귀의 실천을 하기 위해서 많은 장해를 뛰어 넘어 왔다.
그의 그 원리와 실천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복귀를 설명하면 해와가 성숙하지 않았을 때에 천사장 루시엘이 섹스를 해서 해와의 정조를 빼앗았기 때문에 이 죄악을 깨꽃이 하기 위해서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 복귀를 실현하는데 우선 하나님과 같이 더렵혀 지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서 루시엘 에게서 정조를 빼앗긴 해와와 같은 여인과 루시엘이 해와와 섹스한것과 같이 이 두 사람이 섹스를 하는것이 펼요하게 된다.
그리고 루시엘은 해와 위에 올라타고 섹스를 하였으므로 지금 이 사단의 세상에서도 똑같이 남자가 위로 타고 섹스를 하는 것이 보통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복귀 할 때에는 남자가 밑이 되고 여자가 위에 올라타고 섹스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같은 이치로 문선명은 이러한 체위로 복귀의 실천을 계속하고있다.
하나님과 동격으로 복귀할 수 있는 사람은 말 할것도 없이 문선명 이라고 원리 에서는 단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문선명은 왜 죄 없는 하나님과 동격의 입장에서 복귀 시킬수가 있는가.
문선명이 이 사단의 제상에서 극히 평범한 가정에 태어난 것에서부터 생각하자면 도저히 납득 할 수없는 일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어느 것 하나도 납득되는 부분이 없다. 한번 더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흥남 형무소에서 1년 6개월간을 문선명과 같이 지냈다. 이 수용소에서의 1년 6개월간은 외부생활의 16년 정도에 해당되는 기간이라고 서로 간에 이야기 하곤 했다. 그때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문선명이 16세때 (1935년) 부활절 전날밤 예수가 꿈속에 나타나 예수가 달성 하고자 하였던 일을 하지 못한채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으므로 당신이 나 대신 그 사명을 완수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선명도 처음에는 내키지 않았으나 몇번이나 부탁을 하였으므로 받아 들였다는 것이다. 이 예수에게서 부탁 받았다고 하는 것은 후에 ‘원리’ 에서 말하는 ‘복귀’ 의 실천이며, 섹스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의 여부는 본인 밖에 알지 못하는 이야기 이므로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예수의 꿈을 봤다고 하는 사람은 많이 있을 터이고, 꿈속의 말씀에 의한 예수의 이야기 한 것이, 이렇게 엉뚱한 섹스 복귀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무래도 이해 할 수 없다.

정득은 과의 이상한 관계  157
1955년 (소화30년) 7월 4일, 문선명 등이 체포되어 중부경찰서의 유치장에 수감 되었을때 평양시절의 정득은 이 찾아와서 나에게 그녀의 집까지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
 이 할머니도 또 이상한 존재로서, 좀 길어지지 만 주의해서 읽어 보시오)

▲ 정 득은 [ 丁得恩 ]

나도 마침 그당시 문선명의 평양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김종화를 찾던 중이어서 정득은이 살고 있는 집 까지 가기로 하였다.
50세가 되는 정득은은 원효로 3가에 조그만 집을 빌려서 살고 있었다. 여기서 1주일을 함께 지냈다. 그리고 문선명이 서울에서 평양에 도착한 후의 정득은 과의 신비(?) 에 싸인 생활을 듣게 되었다.
정득은 은 북녁의 평안북도에서 한때 번성하였던 이웅도 목사, 황국주와는 전혀 관계가 없고, 복중교 와도 관계는 없었다.

❖ 사진 추가


▲ 1951년 문선명과 정득은

다만 기독교를 믿고 있었는데, 1946년 6월 6일 하늘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내용은 지금 38선을 넘어서 한 청년이 가방 하나를 메고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 그 청년은 하나님이 중요한 책무를 지워서 이세상에 보낸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 이였다.
그리고 그 사람이 평양으로 향하고 있으니, 나가서 그 사람을 맞아 들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 했다는 것이다.
정득은 은 부랴 부랴 남쪽으로 찾아 갔더니, 사동이라고 하는 곳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릭구삭 하나를 멘 청년이 이쪽을 향해서 왔다. 그것이 문선명 (당시는 문용명) 이었다.
정득은은 그의 앞으로 나아가 인사를 한 후에 자기의 집으로 안내하였다. 정득은의 자택은 만수대 밑에 있었다.
문선명을 안내하여 온 정득은은 자기가 계시를 받았다는것.
선생이 오는것을 알고 마중하러 갔던 것을 설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득은은 자기가 여호와에게서 성모로서 인정 받았으므로 문선명과 섹스를 하면 문선명은 신과 동격의 입장이 되어 타락한 부부의 입장에 있는 여인들을 복귀 시킬수가 있게 된다고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문선명이 밑으로 가고, 정득은 은 그 위에 올라타서 소생, 장성, 완성의 3회의 섹스를 하였다.
미 복귀의 실천공식과 방법은 흡사 문선명의 원리와 같다.
성모 마리아 대신에 성스러운 정득은 파 복귀를 한 것으로서, 문선명은 온전한 하나님 처럼 죄 없는
정득은 은 꿈속에서 여호와와 섹스를 하였으므로 자기는 성모라고 말한다.
너무나도 잘 꾸며진 이야기지만, 문선명의 한쪽 팔과 같은 입장에 있던 당시의 나는 오직놀랄 뿐이며 감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창조, 타락, 복귀의 원리도 완성되 있지 않았을 때에, 원리도 모르고 문선명과는 처음대면의 정득은 이 도저히 생각 할 수 없다.
앞뒤의 사정으로 보아 두 사람이 육체관계는 있었던 듯 하지만 아무래도 후에 억지로 끌어다 붙인 조작된 이야기라고 나는 지금 믿고 있다.
그 이유의 하나는 평양으로 갔을 무렵의 문선명의 행동이, 원리를 무시한 엉망 진창인데가있다. 생활안정을 위해서 필사적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당시의 (후에도 그렇지만) 그의 무기는 미완성의 괴상스러운 원리론과, 그것에 빠져서 몰려드는 여인들에 대한 섹스공격 밖에 없지 않았을까 ?
백보를 앙보해서, 만약 그것이 진실이었다면, 통일교회의 인쇄물은 어째서 이 (정득은의 대기적) 에 관한 것을 한 줄을 쓰지 않았을까 ?

체포도 당연한 섹스포교  159
평양시 대의 이야기를 계속하자.
이 후, 문선명은 나최섭의 집으로 옮겼고 다음에는 경창리에 있는 정명선, 김종화 부부의 집으로 가서 거기서 예배를 올리게 되었다. 이미 섹스관계가 있었던 지승도 옥상현들과의 여러가지 갈등이 있어서 정득은 은 독립해서 다른 신자를 모아놓고 예배를 올리고 있었다.
또 여기서 여러가지 문제가 생겨난다.
그 내용은, 여자 신자들이 제각기 문선명과 섹스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간에 자기만이 문선명을 낳은 (영적으로 이세상에 낳은) 성스러운 어머니다 라고 하는 주장이 얽히고 설켜 있었던 것이다.
요컨데, 신자이었던 여자들이 문선명과 섹스 함으로서, 문선명에게 복귀할 자격을 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미 밝힌 바이지만 그 후의 문선명은 김종화의 집에서 남편인 정명선과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부녀인 김종화와 같이 살았다. 
그리고 무엇을 생각한 것인지 그 유부녀와 “어린양의 잔치” 를 구실 삼아 결혼 한다는 소동을 피워서 경찰에 체포되어 사회질서 문란죄 (社會秩序 紊亂罪) 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흥남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거기서 문선명은 나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것에 관해서, 통일교회의 출판물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아무런 죄도 없는 문선명이 복역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 기성 기독교 교단의 투서와 공산당의 종교 말살정책으로 인해서 내무성에 구속되어 공판서 5년의 형을 받았다
이것이 완전히 거짓이라는 것은 독자들은 이해 하실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 공산당이 실제로 종교 말살정책을 행하였다면 기성 그리스도 교단이 질시할 여유 같은 것이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옥상현 남편인 우하섭은 그 무렵 평양 장대현 교회의 신망있는 장로였다. 
또, 이 3개월전인 1946년 8월에도 문선명은 북조선의 경찰에 체포되어, 3개월후에 겨우 석방되었다. 
통일교회는 이것도 원인은 신도를 빼앗긴 목사들의 반감과 질투로 고발 당했다고 하고 있으나, 똑같이 분에 넘치는 섹스포교의 결과였다.
나는 이 책에서 남쪽의 한국 (부산, 대구, 서울) 을 중심으로 문선명과 함께 걸은 발자취와 생긴 일들을 써 왔으나, 문선명은 이미 평양시절에 다수의 여성을 섹스로 식구를 삼아 항상몸 주면서 신봉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여성을 역시 6마리아 논법으로 꾀어내서 육체와 금품을 뜯어 냈던 것이다.


162

색과 욕과 돈과

남편의 돈을 훔쳐 오라
1955년 7월 4일 문선명은 서울시 경찰에 구속 되었는데 재판에서 무죄로 선고되어 석방 되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통일교회는 죄없는 사람이 구속 되었으나, 그 후 사실이 밝혀져 석방되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당시 문선명과 아침부터 밤까지 함께 있었던 내가 그간의 사정이나 사실을 제일 잘 알고 있는 것이다.


▲ 그녀의 졸업에서 최순화와 문선명
이성례* = 최순화 催淳華

문선명은 실제로 여러가지 많은 죄 를 범 하고 있었지만, 우리들의 기민한 대책으로 경찰의 조사에 정직하게 응하지 않았던 것과, 위증이나 거짓으로 뒷말을 맞추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았던 덕분에 무죄로 되어 석방 되었던 것이다. 
통일교회는 그 사실을 감추고 있지만, 내 자신도 위증을 해서 교인들의 말문을 맞추기에손 쓰느라고 뛰었고 증거인멸을 행 했던 것이니까 틀림없다.
사실로 말하면, 재림주로 믿었을 때 어떻게 허락없이 재림주의 연령을 내 마음대로 올릴수 있겠는가. 이건 생각도 못할 일이다.
재림주 문과 의논해서, 허락아래 연령을 올려서, 제 2국민병을 기피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태산 같지만 가령 이순철이라고 하는 유부녀를 자기는 재림 메시아 이니까 자기와 복귀 하면 당신도 6마리아 의 한 사람 예수의 마리아로 된다고 속여서 섹스를 했다.
훌릉한 간통죄 이다.
또, 이 세상을 사단이 주물르고 있으나, 이 세상의 모든 재산은 본래 하나님 것이므로, 사단이 쓰고 있는것, 남편의 돈이나 집에 있는 재산은 전부 훔쳐서라도 나에게 헌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이 이상적인 세계로 되며 하나님은 수천배도 넘는 행운을 주실 것이다. 
이 이야기를 믿어 이순철은 자꾸만 가져다 바쳤다.
어느 때에는 문선명에게 강요되어 당시의 미국달러 1만 5천불이나 되는 돈을 집에서 끄집어내서, 그돈으로 두달동안 문선명을 마음껏 놀아나게 하였다.
드디어 남편도 노해서 팔방으로 손을 써서 찾고 있었다.
절도의 훌륭한 공범이다.
이것이 어찌하여 죄가 안 될 것인가.
남펀이 경찰에 그런 이야기를 안하고, 간통죄로 고소하지 않았기 때문에 견디어 냈을 뿐이다. 다른 마리아의 남편들도 모두 그러했다.
또 처녀인 딸들에게, 문선명은 나의 처가 되면 세계의 진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라고 말해서 믿게 하고, 속임수 섹스를 했었다. 
이러한 수법으로 김영희라고 하는 여자 대학생도 이성화도 속아서 문선명과 섹스를 했었다.
쾌락에 빠지고 결흔을 구실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청순한 처녀들을 범한 문선명이 어째서 죄가 되지 않았을까?
식구들의 눈물어린 심정을 통일교회는 생각해야 할 것 이다

❖ 사진 추가


1955년 최순화가 문선명의 바로 앞에 서 있다. 왼쪽은 최원복 (催元福) 이며, 오른쪽에 서있는 것은 김영운 (金永雲) 이다. 이 두 이화여대 교수들은, 동대 세 명의 다른 교수들과 함께, 이화여대 학생들이 문선명의 교회에 참석하고 문선명에게 피가름 복귀를 받을 것을 권했다. 이 모든 사람들은 문선명과 관련된 것으로 인해 기독교대학인 이화여대로부터 제명당했다.

문선명은 최원복을 부처와 결혼시켰다.


왜  죄없는 아이들이 죽는가!  164
그리고 나는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탈세라고 하는 죄명으로 미국의 형무소에 투옥 되었던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요한 묵시록 21장 3~4에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살며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 스스로 사람과 함께 계셔서 사람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신다.
이미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부르짖음도 아픔도 없다.
먼저 것이 이미 지나가 버렷기 때문이다 라고 쓰어져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것을 실현시켜 주는 것이 재림 메시아 시다.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그했던 것 처럼, 미국에서의 사건도 6천년간 하나님의 희망이었던 복귀의 실천을 하고 있어서 사단 세상의 법률에 걸려서 투옥되는 것은 원리의 예정에 있다고 문선명은 말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원리대로, 처녀를 신부로 맞이하여 “어린양의 잔치” 를 행해서 아이들을 태어나게 하였는데, 그 아이들 가운데는 교통사고로 또는다른 형태로 죽은자 들도 있고, 세상에 여러가지 좋지 못한 소문을 퍼트리고 있는 장본인도 있는 것은 무슨 이치일까?
문선명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왜 그런지 당연한 사실을 왜곡해서 선전하며 전도하고 있다. 그 때문에 도리어 문선명의 장래는 점점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이라고생각한다.
나는 문선명이 원리의 실천이라고 말하면서 하고 있던 행위를 옆에서 직접 보아온 사람으로서, 그 사실을 명확하게 하여.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인가?
아니면 남달리 여색을 좋아하는 돈벌이 주의자인가 라고 하는 것을 밝혀둘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문선명이 하나님과 동격으로 복귀된다고 하는 근거는 성스러운 어머니 ! 정득은이 재림메시아 로서의 문선명을 낳은것과, 문선명이 16세때의 4월 17일 부활절의 전날밤 꿈속에서 예수가 나는 해내지 않으면 안되는 복귀의 임무를 다 하지 못했다.
당신이 그 대신 제3의 아담으로서 재림 메시아의 임무를 다 해 주기 바란다 라고 말했다는것 (통일교회의 신문에도 명기 되어 있다) 의 두 가지를 들수 있다.
만약 그대로 문선명이 하나님의 실체로서 복귀의 임무를 실천 하였다면, 창조 당시의 에덴의 동산이 복귀되어, 통일교회의 교인들은 참 부모와 함께 눈물도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어야 할 것이다.

복귀 (復歸) 라고 하는 미명으로 섹스  165
우선 6마리 아 복귀문제에서 부터 생각해 보자.
사탄에 의해서 해와를 빼았긴 것 때문에, 하나님은 6천년 동안이나 노여움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나넘은 해와를 도로 찾기 위해서 제2의 아담인 예수를 이 세상에 보냈으나, 예수의 생모인 마리아는 예수를 자기의 아들로 밖에 생각지 않고, 자기의 아들이 우선 어머니와 섹
스를 하기 위해서 생겨 났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와 섹스를 하지 않았다. (주–이와같이 어머니와 아들이 섹스 하는것을 원리에서는 ‘모자협조’ 라고 한다.)
그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죽을 수 밖에 없었다고 원리는 설명하고 있다.
또 원리원본에는, 가롯 유다의 연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를 예수가 빼앗아 복귀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원한을 없애기로 되어 있었는데, 유다가 이에 복종하지 않고 은화 30냥을 받고 예수를 팔았기 때문에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 되어 있다.
예수가 복귀하려고한 6여인의 마리아를 복귀 시켰더라면 원리대로 실천되게 되는 것이라고, 나도 이해 하였었다.
그런데 6인의 마리아를 복귀시킨 후에도 문선명은 손에 닿는대로 몇십명이 넘는 여인을 복귀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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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들면 이화여자대학의 사감 선생이었던 한충화는 문선명에게 복귀된 후에 결국 섹스의 마수에 빠져서 학교를 그만두게 되어 문선명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이무렵 볼일이 생겨서 문선명과 전주에 있을 때, 미인 여자와 만나게 되어 그 여성과 복귀하는 것을 나는 바로 옆에서 보았다. 그것이 그녀였다.


▲ 한충화 아들 사무엘

한충화는 열열한 크리스챤으로서 미망인이 되어 사무엘 이라고 하는 벙어리 아이를 데리고 열심히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 원리에 속아서 문선명에게 자기의 몸을 제공 하는것이 하나님의 뜻 이라고 믿고 기뻐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문선명이 또 다른 여자와 복귀하고 있는것을 알자, 그 길로 서울로 돌아와서 문선명과 결별하였을 뿐아니라, 그곳이 더럽혀 졋다고 자궁 수술까지 하였단다.
그때 까지의 자기의 경솔한 행동과 섹스에 미쳐있던 문선명에게 정조를 빼앗긴 것을 후회하면서 그 뒤 얼마 안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누구 때문이며, 누구의 죄라고 말 할수 있을 것인가?
1955년 이화여자대학의 5인의 교수가 퇴직하도록 추궁하여 사표를 내고, 14인의 학생이 학교에서 를겨나게 되었다. 이일은 역시 문선명과 교수와 학생과의 복귀 사건에 얽혀 있던 일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부산 수정동시대에 이미 6마리아는 결정되어 있었으며, 섹스의 실천도 끝났던 것이다. 그런데도 또 새로운 마리아를 복귀 시키려고해 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복귀를 한다고 하는 것만이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는 여성 식구들의 입을 통해서 전해지고 ,또 원리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여인들에게는 무작정 복귀를 받는 일에만 필사적인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통일교회에 대해, 외부에서는 통일교회에서는 벗고, 춤추며 한번 입교하면 마취에 걸려서 두번다시 올수 없도록 해 버린다 고 하는 소문이 널리 퍼져 가게 된 것이다.

많은 가정이 파괴되다.  167
그래서 실제로 문선명의 원리의 이야기를 듣고, 타락원리와 복귀원리를 들음으로서, 각계 각층에서 와있던 사람들의 생활에 변화를 가져 왔다.
지금까지 아이들과 함께 평화로운 생활을 해온 부부와 처가 통일교회에 들어가고 나서는 옷을 벗는 것도, 남편과의 섹스도 거부하기 때문에 충돌이 일어났다.
이 사람들은 문선명에게 바치는 경제 문제만도 골머리를 앓았다 .
그래서 결국 이혼하게 되고, 문선명의 원리에 따라 가정생활이 파탄나게 된다.
경제적 기반이 없는 가정에서는, 더욱이 믿기만 하던 남편이 처에게 절망해서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나가고 말게 된다.
그 당시 통일교회의 섭외부장이었던 김인철은 이렇게 버려진 아이들을 고아원으로 보내는것이 큰일의 하나였다.
이와같이 파탄된 가정 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도 170가정 이나 된다.
그 당시 문션명으로부터 복귀를 받기는 하였으나, 문선명의 행위를 보고 체험하고서는 저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오직 색에 미친 행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여인들은 남편에게는 모르는체 하고 가정으로 돌아갔다.
이 여인들의 심경은 지금쯤 어떠할 것인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여자 식구들은 그래도 모든 것을 바쳐서 봉사했다.
나는 그 당시 통일교회의 어느 남자식구로부터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문선명 선생의 복귀는, 그야말로 엄숙한 것이 겠지요.
그때는 웃으면서, 그러믄요 하나님이니까 라고 대꾸해 두었으나, 재림메시아의 복귀의 의식인 만큼 엄숙한 것이라고 상상 하는것도 당연 하겠지, 그러나 실제는 다르다.
하나님 이었어야 할 문선명은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앞에두고 입 맛을 다시는 개같이 되어굶주림에서 해갈이나 된듯이 섹스를 했을뿐이다.
오로지 성욕 불덩어리 같았다.
사실 문선명은 정력이 뛰어 나서 하루밤에 열번 한 일도 있다고 한다.
본처였던 최선길의 말이니까 이것은 틀림 없을 것이다.
복귀를 받을 때의 부인 식구들도 그렇다. 순수했던 여성들이니까 당연 하겠지만 멋대로 너브러져서 곧 기를 쓴다.
큰 소리를 지르며 실신한 사람도 있다.
내가 돌봐 주었으니까 이것도 틀림 없는 사실이다.
사단을 부정하고 있는 문선명의 복귀라지만, 결국은 사단 세상의 섹스와 무엇 하나도 다를것이 없다.
그러한 문선명의 정체를 재발리 눈치채고 가정으로 복귀한 부인네들은 정말로 현명하였다.
그녀들은 엄청난 피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자의 원한은 여름에도 서리를  169
그런데 문선명은 지금 자기가 재림메시아 진정한 아버지가 된 것이라고 말하면서 복귀한 식구들의 뒷바라지는 하나도 해 주지 않는다.
 외국 특히 일본과 미국에서 참 아버지로 군림하게 되어, 일본에서는 영감상법 (霊感商法) 따위로 반사회적으로 돈을 들어 모아서 큰 문제가 되고 있다.

[ 영감상법 = 霊感商法 = 靈感商法 = 灵感商法 ]

그리고 지금까지 희생이 되어온 사람들에게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문선명을 원망하면서 통일교회를 나서는 여성이 날마다 늘어 가고있는 상황이다.
문선명은 장래 어떠한 방법으로 무슨 원리를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해 갈 것인가?
미국의 목사들에게 원리의 비디오 테이프를 35만개나 만들어서 발송 하였는데 그것으로 이런 것이 방지되게 될 것인가?
미국의 목사들이 원리설명회란 명목으로 세계각국을 방문하여 몇억원이란 돈을 쓰면서 포교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것을 방지 할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 미국, 한국의 유명한 학자들에게 비싼 원고료를 주고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 구세주로서 치켜 올리려고 하고 있지만, 한국의 속담에 여자의 원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주–이것은 음력이니까 5, 6월은 한 여름이다) 고 하는것이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청춘시절에 문선명에게 복귀되었던 여인들은 재산을 전부 털어 넣고, 남편한테는 이혼 당하고 자식들과도 헤어져서 지금은 폭삭 늙어 버렸다.
이 사람들은 거의 식모를 두고 살았을 만큼 넉넉한 가정의 부인들이었는데 재림주! 문선명을 맞아서 그에게 모든것을 바쳐 버리고 지금은 먹고 지내는 것도 옹색해서 자기 (자신) 가 식모노릇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사람이 몇 십명이나 된다.
또 원한을 품은채 일생을 보낸 사람들은 몇백명이나 될 것이다. 나는 이 여인들 한사람 한사람을 만나 보려고 생각 하였으나, 나의 경제적인 사정둥 여러가지 문제로 실현 하지 못해서 참으로 민망하게 생각한다.

처녀에게 낳게 한 아이들  170
원리 중에서 제일 중요시 되는 참어머니가 되는 처녀의 선택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 했
다고 생각한다. 참 아버지로 자칭하는 문선명과 어린양의 잔치를 올리는 사람이 참어머
니가 된다고 하는 것인데, 그의식에 따라서 에덴의 동산을 타락전의 상태로 되돌려서 하
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 하게 되는 것이다.


▲ 이성화* [ 김명희 金明熙 ] 김영운

인간 사회의 원죄를 뿌리에서 부터 뽑아버린 후에, 또 죄없는 깨끗한 세상으로 되돌려 고통도 없고, 죽음도 없이, 영원히 참 부모를 모시고 살아 갈수 있는 세상이 창조 된다고 하는것이 원리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참어머니인 처녀 한사람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또 알기 힘든 문제가 많이 있다. 문선명이 평양에 있을 무렵 정명선 씨의 처이며 아이들의 어머니인 김종화가 “어린양의흔인 잔치” 의 상대로서 준비를 하고 있던 중에 문선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징역 5년의 선고를 받아 문선명이 흥남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는 것은 몇차레나 썼다.
부산 영도의 신성묵의 자택에서는 김영회라고 하는 처녀를 복귀 시켰으나 그 후에도 관계를 계속해서 김 영희는 임신하였다.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문선명은 오승택이란 학생에게 연애한 것처럼 연극을 꾸며 김영희와 함께 일본으로 밀항 시켰다. 김영희는 일본에서 문선명의 아들을 낳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살게 되었다.
또 더욱이 이성례 라고 하는 처녀와도 복귀하여, 남자아이를 낳게 했다. 서울로 와서는 6마리아의 경우도 그러했지만, 문선명은 신부인 처녀를 선택한다고 하는 명목으로 이성화를 서울역 앞의 여관에서 복귀한 것이다.
이성화는 그 후 자기가 참 어머니 후보의 첫번째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의 공범은 이순철이었다.
이성화를 선동한 그녀는 신부 참어머니로 선택되어 복귀한 증표로서 금반지를 만들어 이 가련한 처녀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선명은 이 처녀들을 모두 버리고 홍순애의 딸 한학자와 “어린양의 잔치” 를 올려, 한학자가 참 어머니가 된다고 말하며 결혼했다.
지금은 많은 통일교회 관계의 출판물 중에서 참 아버지로 되어있는 문선명과 참 어머니로 되어있는 한학자와 함께 살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 한다는 목표를 걸고, 여러 단체와 많은 경제력을 동원해서 문선명을 옥중의 구세주라고 치켜 세워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로서 돋보이게 하기위한 여러 가지 마련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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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四事件」を報道する新聞記事(1955年7月7日付『東亜日報』)

「하느님」아들行勢
弄絡當한婦女수두룩
注目끄는統一敎會 『文敎主 』行狀

「하느님」아들 행세
농락당한 부녀자 수두룩
주목 끄는 통일교회『문교주』행장

작보 = 교주의 구속으로 아연 세간의화제꺼리로 『크로–즈 · 엎』된 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정체는무엇이며 文[문]씨는과연 부녀자신도들의정조까지 유린하였는지당국에 적발된 혐의는 『병역기피』 『불법 감금』 두가지로 밝혀져있을뿐인데 文씨와그교를 싸고도는 각종정보를종합해보면 ―
◊ 敎理說敎方式 [교리설교방식] = 동교에서는 七십二[칠십이]시간 (滿三日間) [만삼일간] 에걸쳐 새로가입한 교인들에게 교리의 설교를한다. 설교는 교주文씨에의하여 행하여지는것으로서 매주『월요일』 상오열시부터『목요일』 상오열시까지계속된다.
만약설교도중 文씨의교리설교에 의아심을가 지게되어 퇴장을 원하는 신도가있으면 교주文씨는 엄숙한 어조로 『퇴장하면죽습니다』라고말하여 퇴장을하지못하도록하였다. 또한文씨는『한국민은 하느님이 선택한 백성이며 평양은세계의예루살렘이다』라고 전선하고『자기가 하느님의아들이니자기와 육체관계를하면教世主[구세주]를 낳는다』고 설교를하였다.
◊ 獵色行爲 [렵색행위] = 文씨는능변가로서 독실한신도라고 지목되는 여자들이 발견되면 자기거처 (同協會內單間房) [(동협회내단간방)] 이외의장소로 유인하여 정조를 유린해왔다고한다.
피해자로 단정할수있는 四(사) 명의여자는 三(삼) 십 대를넘은 중년유부녀 (中年有夫女) [(중년유부녀)] 들로서 그들의가정은 중류이상에 속하고있다. 그중의한사람인 金順昌 [김순창] 假名 [가명] = (三六) (삼육) 여사는 남부럽지않은 상류가정의 주부였었으나 文교주의 제물이된후부터는 남편의버림을받는 운명에놓이게 되었다.
◊ 同協會財政關係 [동협회재정관계] = 현재의협회건물은 세로쓰고 있는것이다. 그들은二(이) 백五(오)십명 (서울) 의신자들로부터 성금 (誠金) 을받으나 그금액은 적은것이기때문에 시내의 풍경을촬영한『푸로마이드』를 대량만들어 시내도처에서 판매하고있다.
◊ 組織狀況 [조직상황] = 釜山[부산], 大邱[대구]등지에 지부가있고『서울』내에 본부를두고있는데 신자수는 각각二(이) 백五(오) 십명정도로 도합七(칠) 백여명에 달하고있다 이를성별로보면 남녀 반반씩인데 교육정도는 상당히 높은수준에 있다고한다.

1955년 이화여대에서 일어난 문선명 섹스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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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한자는 누구냐

문선명의 소개장
다음에는 경제문제의 내정에 관해서 쓰고자 한다. 앞에서도 쓴 바와 같이 1953년 내가 서울로 올라 왔을 무렵은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려고 해도 기차의 3등석 자리의 여비도 없어서 여자 식구들이 준 돈으로 겨우 왕복 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 후, 서울시 북학동에 집을 전세임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하고 유효민의 제안으로 푸로마이드 사진을 제작 판매를 시작하였다.
이것이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안정되게 되어서 교회를 흥인동으로 옳겼다. 식구들도 점점 늘어서 통일교회는 번창해가고 있었다.
그해 (1955년) 에 7.4 사건 (이화대학 퇴학퇴직사건) 으로 문선명과 간부 다섯명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문선명이 출옥한 후에 청파동 (현재 통일교회 본부가 있다) 으로 일본식으로 지은 이층집을 사서 본부교회를 이전하였다.
그 후 나는 문선명한테서 수고 하였소 한동한 서진광산으로 가서 쉬십시오 라고 말하기에 그가 써주는 소개장을 가지고 서진광산으로 가게 되었다. 1956년 7월 나는 거기서 생각해 보지도 앉았던 광산의 책임자가 되어 몇 달간을 지내게 되었다.
이 서진광산은 통일교회의 간부였던 정석천이 기부해서 문선명의 소유가 되고, 그가 직접 경영하고 있던 광산이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후에 또 쓰기로 하겠다.
내가 광산에 가 있는 동안 유효민은 산탄 공기총을 발명해서 특허를 얻었다.
이 공기총을 제작 해 보니까 꽤 성능이 뛰어 났으므로 본격적으로 제작 · 판매하게 되어
통일교회 의 경제적인 기반을 굳혔다.

악착같은 노동착취  174
그 당시 문선명의 친척으로서 통일교회에 들어온 사람은 문성균이 처음인데 문선명이 찝차를 구입한 때에 운전수로 들어왔다. 그 다음이 문용선 인데 정석천 장로가 경영하고 있던 아산의 토기 공장에 가서 일하고 있었다. 문선명의 친척은 이 두사람 이외에는 한사람도 없었다.


▲ 청파동 교회 (옛 통일교 본부)

그 이전에 내가 문선명과 부지런히 일하고 있을 무렵에 문선명의 친척은 한사람도 없었고 이름조차 들어 본 일이 없었다. 그런데 현재 문선명의 친척들이 통일 교회의 경제를 좌우하는 상황이 되어 있어서 내부에서도 큰 불만의 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것은 원리에 반하는 것이다.
문선명은 그전부터 이세상의 모든 돈과 재산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남편의 돈을 훔쳐다가 나에게 헌금 하더라도 그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가능하다면 은행에 있
는 돈을 훔쳐다가 우리에게 써 버렸다 하더라도 이 세상의 법률로서는 죄가 되지만 하나님의 법률로서는 죄가 안된다고 식구들에게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식구들은 양심의 가책 같은것은 조금도 느끼지 않고 남편의 지갑에서 돈을 몰래 가져다가 문선명에게 쏟아 부었다. 그 덕분으로 오늘날의 통일교회가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이렇게 식구들이 고생해서 경제적인 토대를 만들어 놓은곳에 문선명의 친척들이 뛰어 들어와서 경제를 주무르며 자유자제로 쓰면서 사치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 반면 최초의 단계에서 경제적인 토대를 만드느라고 고생한 사람들은 거의 탈퇴 하든가 쫓겨 나고 있다.


▲ 당시 유효민

현재 그 당시의 사람으로 남아 있어서 경제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는것은 일성종합건설의 사장을 거쳐 작년 (1992년) 부터 일신석재로 옮겨 간 이수경 사장과 일화식품의 김원필 사장 뿐이다. 이수경은 당시 아직 열여덟살 정도라 문선명의 뒷일은 아무것도 몰랐다.
또 북에서 우리들과 함께 남하 하였을 때는 22세 정도였던, 김원필은 문선명 이 죽으라고 말하면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충실한 심복이었다.
공기총 제작을 시작한 무렵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입교함으로 가정이 산산조각이 되어 고아원으로 보내져서 거기서 키워진 15-6세의 아이들이 수택리에 있던 통일산업(주) 예화공기총 제작소의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통일산업 당시의 사장은 김인철) 그 인원수는 350명 정도였으나,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그들에게 지불된 돈은 한달에 단
돈 500원 이었다. (일본 엔화로 환산하면 겨우 100엔정도–1965년 당시) 이것은 엄청난 노동력 착취로써 말도 되지않는 실례이다.
어느때 지금은 고인이 된 김희옥 집사의 17세된 아들이 고아원에서 도망해 나와서 어머니를 찾아 통일교회로 왔다. 그리고 이 모자가 서울에서 주택건설의 공사를 하고 있는 나를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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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아들이 통일산업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다고 말하며 듣지 않아서 박선생 한테서 써 주실수 없겠습니까? 하고 부탁을 한다.
아들은 통일산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혹사해서 참을수가 없어서 도망쳐 온 것이었다. 이 사실을 내가 그 아들을 사원으로 쓰고 있을 때에 들은 이야기임으로 틀림없다.

문의 아들 흥진과 효진  176
1983년 문선명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서울을 비롯한 7개 도시를 돌며 강연을 한 일이 있다. 그때 문선명의 아들 문흥진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
그 이유로서 통일교회는 문선명선생이 숭공강연을 하고 있을때 사단이 문선명선생을 죽이
려고 노렸으나 그것을 안 아들 문홍진이 아버지의 대신으로 죽었다 고 설명하였다.


▲ 문선명 한학자 부부와 장남 문효진

그리고 문선명선생이 그 아들을 청년영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므로 그는 영계의 청년들을 데리고 지구로 내려와서 문선명선생의 재림메시아 활동을 도와 협력하기로 하였다고 발표했다.
이미 하나님이 모든것을 해결 하는 것을 기다릴수 밖에 없는데 이야기에는 후일담이 있다. (후술) 문선명과 그의처 한학자는 이 세상에 군림한 참아버지 어머니며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원리에서는 죄도 더러움도 없을 터인데 교통사고로 별안간 죽기도 하며 사단과 똑같이 행동하는 나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 참부모가 낳은 문효진의 스캔들은 통일교회의.
내부 뿐만 아니고 사회적으로도여러가지 소문이 흘러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서도 통일교회에서는 아들 문 효진은 한겨울에 문선명 선생이 결정한 성지 성스러운 땅에서 40일간 단식 철야기도를 함으로서 참회하여 문효진의 인격은 깨끗하게 되었다고 한다.
문효진은 문선명 한학자 부부의 장남인데 성화사에서 출판한 성공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문효진의 시집을 읽어 보면, 그를 그의 아버지 문선명의 후계자로서 만들어 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명백한 것이다. 
이 또한 이해 할수 없는 문제이다. 지금 평양에서는 김일성이 자기의 정권을 아들인 김정일에게 넘기려고 하고 있는 모양인데 공산주의 체제의 세습이란 믿을수 없는 폭거와 같은것을 통일사단의 세상에서 당당하게 행해 지고 있는 세습체제를 답습해서 아들의 문효진에게 재림메시아의 권력을 넘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세상을 구할수 있는 이는 문선명선생 밖에 없다고 하는 책을 쓴 김은우 박사는 책이름을 바꾸어서 이 세상을 구할수 있는 이는 문효진 선생밖에 없다고 하는 책을 출판 할 것인가?
또 일본인의 아스기요시는 옥중의 구세주 문선명이라고 하는 책명을 청년구세주 문효진이라고 바꿀 것인가?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느 사람에게서 들었다.
축복을 받은 가정의 제2세들이 40일간 청평기도원에서 집회를 하고 있을때의 일이다. 
문효진의 주최로 1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출석해 있었다. 옛날부터 식구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36가정 이요한 목사가 원리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별안간 문효진이 나타나서 집회에 모여있던 사람들 앞에서 이요한 목사를 끌어내리며 아버지 문선명이 쓴 원리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대단히 노했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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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모여있던 식구들은 문선명의 후계자인 그가 참회하기 전의 본래의 불량자로 되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고 말했다고 한다. 북조선에서 김일성이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정권을 넘기려고 한다는 것으로온 세계에서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거기에 곁들여 한국에도 통일교회의 문선명이 자기의 아들에게 재림메시아의 자격과 권한을 넘긴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우습기만 하다.
통일교회는 이제까지 막대한 자금으로 문선명을 재림메시아라고 선전해 왔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일본인 나스기요시가 쓴 옥중의 구세주 구세주 나타나다등 많은 책이 출판되고 있다.
나스기요시가 돈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통일교회의 체질에서 보아 많은 돈을
써서라도 그 아들에게 전권을 넘기는 구실을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한 원리 어디를 읽어도 문선명이 재림메시아 라고 한다면 그 아들에게 재림 메시아 를 계승 시킨다고 하는 원리는 없다.
이와같은 통일교회의 내용을 보고 있노라면, 그때 그때의 편의주의로 멋대로 이유를 붙여서 상식으로는 생각 할 수 없는것, 인간의 도리에 맞지 않는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중히 하여야 할 원리에 맞지 않는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니까 무섭다.

삭제된 창시자의 이름  178
더욱이 또 통일교회는 역사를 바꿔쓰며 태연하게 거짓을 쓴다. 통일교회의 태동기에서 부터 오랜동안 문선명을 믿고 문선명을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해서 수고해 온 많은 식구들을 거저 내 쫓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사단으로 딱지를 부쳐서 명예도 푸라이드도 빼앗아 버리고 배신자라는 죄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이러한 사람을 많이 알고 있지만 예를 들자면 한이 없을 것이므로 그 중에서 일부만 소개한다.
우선 나 박정화 자신의 문제부터 기술하기로 한다.
통일교회사 (상권) 에 실려 있는 나에 관한 기록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다.
박정화가 누님집에 다만 개 한마리가 남아있는 빈 집에 혼자 있을때 김원필이 찾아 가서 다쳐서 다리를 질질 끌고 있는 박정화를 자전거에 태워서 문선명과 함께 피난해 왔는데 그 선생을 박정화가 서진광산 시절에 배신하고 통일교회에서 나가 버린 것이다.
이와같이 통일교회에 기록되어 있는 박정화는 배신자로 되어있는 것이다.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느냐의 한마디다. 이것은 모든 진상을 똘똘 싸서 감추고 문선명의 우상화 하도록 꾸며 붙인 거짓 기록이다.
그래서 나는 여기에서 그 진상을써 두고자 한다.
우선 지금까지의 요점을 정리 한다면 북에서 피난 할 때의 경과 (제2장) 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이 나는 가족을 버리고 다쳐서 상처를 입은 몸에 채찍을 가하면서 문선명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다.
일생동안 고락을 같이 하자고 한 옥중에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였다.
그후로는, 문선생을 도와 경제적인 문제로 말로서 다 할수 없을 정도의 고생을 해 왔다. 문선생과 유부녀의 복귀라고 하는 섹스에서 생기는 갖가지 충돌에도 내가 대처 하였고 여러가지 고생을 겹쳐 가면서도 살아 왔다.
문선명과 함께 있던 7년간에 두번씩이나 경찰의 전기고문까지 받았다.
최대의 고비 7. 4사건에서는 5인의 간부가 체포된 중에 수사당국의 끈질긴 심문에 대해서 나는 온갖 수단을 구사해서 문선명의 죄상을 숨기고 무죄가 되도록 노력하였는데 이것도 통일교회의 기록에는 아무런 죄도 없었던 문선명선생은 구속 되었으나 무죄로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실은 식구들의 덕분이었던 것은 앞에서 기술하였다.
통일교회는 문선명의 신격화에 열중하였으나 1년6개월간의 감옥생활이나 부산의 수정동에서 서울의 청파동에 이르는 7년간 문선명의 한쪽 팔 노룻을 하며 함께 지낸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문선명의인격은 신격적이란 어림도 없고 회노애락이 심하며 금욕과 호색가인
점 만이 유별나서 정말로 사단 세계의 사나이였다.
기상이 약한 문선명은 내가 경찰에서 최초의 고문을 받았을 무렵 누가 그를 찾아 가면 항상 피하기가 일쑤여서 안절부절 불안해 했다. 
그래서 내가 대신 나가서 용건을 듣곤하였다.
너무나도키가작고 약골처럼 보여서 이 사단의 세상을 맑고 깨끗한 세상으로 복귀해서 본래
의 에덴의 동산을 되살아 나도록 하려는 선생이 어째서 그렇게도 쩔쩔매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한일로 이 우주나 세계를 복귀시킬수가 있겠습니까 고 몇번 문선생에게 말한 일이 있다. 
여러가지 고생을 거쳐 내 이름으로 빌린 서울시 북학동 집에서 “세계 기독교 통일신령협회” 를 창립하였다.
1954년 5월 3일의 일이다.
이것도 또 통일교회에서는 무슨 일인지 날짜를 5월 1일로 고쳐서 발표하고 있다.
이때의 출석한 간부는 문선명, 이창환, 박정화, 유효원, 유효민, 김상철의 6인으로 이 6인을 통일 교회의 창시자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통일교회의 관련 출판물에는 박정화라고 하는 이름은전연 나오지 않는다. 제일로 오래된 나에게 “배신자” 딱지를 붙여서 말살해 버린 것이다.

사건이 생겼다 바로 피하라  180
사실은 전혀 다르다. 배신 한것은 문선명 자신이었다.
그것은 내가 서진광산에 있을때의 일이다.
서진광산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날 조동석이 찾아와서 지금 서울에서 사건이 일어나서 선생은 도망갔고, 그때에 문선명 말이 곧바로 광산에 있는 박정화한테 가서 빨리 다른곳으로 도망하도록 전하시오.
만약 경찰이 광산까지 가서 박정화를 체포해서 취조 당할때에 심하게 고문이라도 당해서 박정화가 나의 일을 고백하게 되면 큰일난다고 지시 한 모양이 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는 어디를 도망하면 좋을까. 이러한 산 속도 위태롭다고 하는것은 당연히 서울의 교회도 식구들집도 위험하다. 이것 저것 생각한 끝에 우선은 문선명을 만나서내 몸가짐을 어떻게 한면 좋을지 의논 해 보려고 생각했다. 
조동석에게 선생님의 행방을 물었더니, 짚차를 타고 충무에 있는 용화사라고 하는 절에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듣고 나는 곧바로 그곳으로 가기로 하였다. 
광산 주변 산중에 사는 화약주임인 전종만에게 여비를 빌려 가지고 출발하여 밤중 열두시에 충무에 도착했다. 
여기서 통행금지 시간이 되어 그날은 용화사까지 갈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숙소를 정해서 일박하고 아침 일찍이 용화사에 갔더니 정말로 한발차이로 문선명이 송도욱 장로와 조일청, 송병호 등 네사람이 같이 제주도 방면으로 출발한 뒤였다. 
절 마당에는 문선명등이 타고 있던 찝차 타이아의 흔적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언제까지 어떻게 해야만 좋은가?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만 좋은가? 앞일이 막막하다. 
어찌할 바를 모른 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경찰을 경계하면서 서울로 갔다. 
그리고 은밀히 여기에 있으며 연락을 기다림이라고 문선명에게 전해지도록 수배했다. 
나는 문선명으로부터의 연락을 열심히 기다렸으나, 한달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나는 그 동안 노동자들이 기거하는 서울역전의 지저분한 간이 숙박시설에서 하루에 빵 한개를 씹으면서 살고 있었다.

배신자는 문선명이다  182
한달이상 기다려도 문선명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이상하다고 나는 의심스러운 생각이 일기 시작했다. 
내가 서진광산으로 간것은 1956년 3월 28일, 7.4사건으로 체포되었던 문선명이 무죄로 된것은 전년의 10월 4일, 약 9개월 뒤의 일이다. 당초에 7~8인의 광부가 있어서 문선명으로 부터 필요경비도 송금되고 있었다.
그 무렵 서울 청파동의 본부에 갔던 나는 새로 입교했다고 하는 육군장교 두사람을 문선명 에게서 소개 받았다. 박보희와 한상국이었다. 
그때 문선명은 박정화는 처음부터 같이 해온 한쪽 팔로서 넘버2의 사나이요. 당신들은 박정화한테서 여러가지를 배우시라고 그들에게 나를 소개 했고 두사람 모두그 3년후에 일어난 박정회 장군에 의한 군사정권 구테다 (1961년) 로 초대 KCIA (한국중앙정보부) 장이 된 김종필의 심복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또다른 군인 두사람이 더 들어온 듯 했으나, 나는 만나지 않았다. 또 박보회는 그후 미국으로 가서 활약하여 통일교회의 제2인자로 올라섰다. 그리고 두사람은다같이 36가정의 축복을 받았다.
그 후 얼마 안되서 문선명으로부터의 송금이 뚝 끊겼다. 아무리 청구해도 기다려도 송금은 없었다.
원래부터 적자이어서 자금이 없었으니까 광산개발은 무리임으로 작업을 중지하고 갱부들은 돌아가도록 하였다.
뒤에 남은것은 서울에서 온 김덕진과 대구에서 거들어 주려고 와 있던 여자식구 세사람뿐 한 동안은 매식을 하면서 견디고 있었으나 얼마 안되어 바닥이 들어나서 끼니도 거르게 되었다.
너무나도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서 밥짓는 아주머니는 대구로 가고 말았다. (그리고 탈퇴 한
것 같다.)
김덕진도 서울로 철수해 버렸고 단지 흘로 남은 나에게 같은 마을에 사는 화약주임인 전종만이 때때로 놀러 올 뿐이다. 
그러한 상황속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위태로우니 바로 피하라고 문선명의 심부름으로 조동석이 온 것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도망쳐 버린다면 이제 아무도 없게된다. 충무시로 출발하기 전에 됫치닥거리와 정리하는것 만은 얌전하게 끝내기로 하였다. 전 화약주임에게는 발동기를 한대 주고 여비를 조달했던 것이다. 훨씬 뒤 에 안 일인데 ,이때의 사건은 다시 문선명을 둘러싼 복잡한 여성관계가 원인이었다.
내가 산속의 광산에서 먹을것에 어려움을 려고 있던 수년 동안에 통일교회는 미국으로 진출하고, 일본에도 통일교회를 창립시켰다. 
(1959년 10월 2일) 더욱이 60년 4월 11일 문선명은 한학자라고 하는 처녀 와 또다시 “어린양 잔치” 로 결혼하였다.
그리고 3쌍 합동 성혼식 (동년 4월 16일) 33조 합동성혼식 (1961년 5월 15일) 과 소위 36가정의 조직을 만들었다. 36가정의 신부들의 자격은 원칙으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들로 만들었다.
36가정의 신부들의 자격은 원칙으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어야 했으나 기성가정도 있었다.
이제까지의 경위를 지나치게 알고, 문선명의 여성관계도 상세하게 알고 있는 나는 역시 거북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다. 
나를 섬 (島) 유배가 아닌 산유배로 긍지에 몰아놓고, 먹는지 마시는지의 상황으로까지 몰아놓고 그 동안에 문선명은 야망을 채우기 위해서 모순 투성이 원리를 추진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때에 또다시 일어난 여자사건으로 쫓기던 그가 광산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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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화를 도망가게 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경찰이 또 고문을 해서 박정화에게 불게 한다면 큰일이다라고 일부러 삼복중에 광산으로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생각해 낸것 만으로도 문선명이 나를 과거의 사람으로 취급하려 했던 참뜻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문선명은 나를 오래도록 살게 하기 위해서, 도망치라고 한것은 아니다.
자기가 오래도록 살아 남기 위해서 나를 과거의 우리에 가두어 버린채 도망치도록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날만은 신장 개점한 통일교회의 안방자리에 나를 돌아오지 못하도록 찬 것이었다. 이러한 것을 알게 된것은 정말 훨씬 뒤에서야 알았고 아무것도 모르는 당시의 나는 하루 한개의 빵조각으로 허기를 채우며 살아가면서 한여름의 땀에 흠뻑 젖는 간이숙박시설에서 한달 이상을 문선명으로 부터의 연락이 올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1962년 8월의 일이다.
이것은 사실이며 거짓이 아니다.
나는 결단코 문선명 을 배신하지 않았다.
배신한것은 문선명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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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진짜 사단은 문선명이다


▲ 문선명 교주

산 증인의 이용가치

재혼해서 신천지로
나는 문선명에게 배신 당하고, 서울역전의 간이 숙박시설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나를 구해 준것은 엄덕문씨 였다 나는 그의 도움으로 부산으로 가서 주택건설의 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일본 와세다 대학의 건축과 출신으로서 지금은 세계의 건축가 100명중의 한 사람)
 그래도 나는 문선명 한테서 한번쯤은 무슨 연락이 있을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으나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도 문선명으로부터 단한번의 연락도 없었다. 문선명은 하나님과는 다른 속된 성격의 사나이라는 것을 남들보다 훨씬 더 알고 있는 나였다.
그래도 하늘에 맹세하고 출발한 분신으로서 일해온 나를 절대로 방치 할 리가 없다. 흥남의 옥중에서 「생사를 같이하자」고 맹세 하고 여기까지 서로 도와 가며, 생명을 걸고온 두사람이다.
마음 한구석에 그것을 믿고 있던 나였으니, 14년간에 걸쳤던 문선명과의 인연도 이것이 마지막이고 자나 깨나 나의 인생이었던, 통일교회에서도 손을 떼기로 결심했다. 
이무렵 나는 엄덕문의 누이동생과 결혼 하였다. 
그녀의 남편은 서울지방검찰청의 검사로서 훌릉한 인물 이었는데 6·25동란으로 북의 인민군에게 집앞에서 사살 되었다. 아이들이 세사람 있었다. 
나는 또 가정을 갖게 되어 땅에 발을 붙이고 제3의 인생을 내 딛게 되었다.
제1의 인생은 북조선시대 제2의인생은 흥남 형무소에서 통일교회 시대이다. 이때 나는 45세 처는 37세였다. 
그로부터 10년간 나는 부산에서 주택건설 사업에 몰두하였다. 당초부터 계획 했던 300동의 주택건설과 아파트건축도 끝내서 무사히 책임을 다 할 수가 있었다. 
다음 약10년은 통일교회의 식구였던 사람으로부터 부탁을 받아 매립공사에 협력하였다. 중국 신경공업고등학교 토목과 출신으로 군의공병대에 있었던 나로서는 토목공사는 전문분야이다. 
많은 작업원 (인부) 을 지휘 감독하며 즐겁게 일하며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직책상 부하들과 친목의 술을 매일 호쾌하게 퍼 마셨다. 그런데 그것이 않 좋았다

병으로 쓸어지다  188
1981년 나는 뇌일혈로 쓰러져서 약 두달 동안 인천 기독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처의 오빠 엄덕문의 처 고희용과 누님의 엄순태가 나에게 「당신과 문선명 선생과는 하늘이 맺어준 깊은 인연이 있으므로 통일교회에서 떠나서는 않됩니다. 떠났기 때문에 당신은 병에 걸린 것이니까, 지금 부터라도 참회해서 통일교회로 되돌아 오시오」라고 권했다.
나도 생각지 않았던 병으로 조금은 마음이 약해 있던 상황이었다.
진실한 크리스찬 이었지만 신앙심이 얇어져이었던지도 모른다.
나는 인천 송도에 있던 나의집 뒷산에 들어가 3개월간 기도 하였다. 
내가 기도 한 것은 「지금까지의 나의 살아온 방법이 옳바른 것이었던가 아닌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또 「병이 든 이몸으로 지금부터 나는 어떻게 살아 가면 좋은가」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계속 하였다. 병의 후유증으로 부자유한 몸이 된 나였으나, 사업의 제1선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시간만은 넉넉히 있었다.
통일교회의 그 뒷일도 알고 싶었다.
그리고 열심히 모이는 식구들의 근처의 통일교회에 가서 그들과 이야기라도 나누며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도록 노력하자고 생각하게 되였다. 
내가 다리를 움직일수 있을만한 때의 인천지구교회의 목사는 문흥권 이라고한다. 몇 달 동안인가 다니고 있던 어느날 예배가 끝난 뒤에, 어느 중년의 여인이 나에게 인사를 하며 나를 아시겠습니까 하고 그녀는말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그랬더니 그녀는 대구교회에있던 류권사의 딸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까 내가 선진광산에 있으면서 대구교회까지 예배를 다니고 있을때 아직 고교생이었던 류집사의 딸이었다
지금은 이곳 교구장인 문홍권목사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류권사라는 사람은 신앙심이 두터워서 여러가지 고생을 경험하면서도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 ,모두 교회에 다녔던 사람인데 그 아이들은 모두 교회의 임원이 되어 있었다.
1983년 나이 들은 식구들의 위로여행을 겸해서 성지순례 여행을 가게 되었다. 70세의 나도 노인식구의 한 사람으로서 참가 하였다. 그 때 류권사와 20년만에 만나서 그동안의 이야기와 아이들이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서울의 본부교회에서 연락이 온것은 여행에서 돌아 온 무렵인데 중요한 의논할 것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서울로 와 주십시오 라고 한다.

오랜간만에 만나 간부  189
남대문에 있는 그랜드호텔의 커피숍에 당시 승공연맹의 회장이었던 김인철과 국제부장 겸 섭외를 담당한 안병일, 김덕진목사, 유효민, 그리고 나, 다섯 사람이 모였다.
이 날 본부교회가 나에게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 한 이유는,「김덕진의 행동을 억제 할수 있는것은 박선생 밖에 없으므로, 어떻게 좀 설득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었다. 
김덕진 목사는 경찰의 유치장에서 용의자나 피해자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을 설교해서 솔직하고 평온한 심경이 되도록 하는 전도 사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김덕진은 전술 한바와 같이 작사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통일교회의 식구였을때 통일교회에서 애창하는 성가 20여곡을 작사작곡한중, 성가편집사 유효민씨가 19곡만을 발취 게재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통일교회가 그 노래를 작자의 이름도 게재하지 않고 무단으로 한국어, 일본어, 영어로, 수만부나 인쇄를 해서 판매 하였다. 
그 출판권과 저작권의 문제를 제기 하기 위해서 김목사가 용산경찰서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의 협회장인 이재석을 고소 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김목사는 그가 통일교회에 있을무렵 문선명으로 부터 직접 복귀를 받은 유신회 한테서 복귀의 섹스를 받은 뒤에 릴레이식으로 그도 열사람이 넘는 여인들을 복귀 시켰다고 한다.
이러한 방법으로 복귀를 받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복귀하고 그 복귀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복귀 시키면 섹스의 둘레가 점점 넓어져서 온 세계의 인간이 모두 복귀하게 된다.
그에게는 이 복귀원리의 실천의 실천 방법에 관해서 자기의 체험을 그대로 쓴 원고를 각 신문에 발표하고 싶다고 하는 의향도 있었다. (제7장참조) 동시에 5천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동을 민사재판에 걸어 김덕진 목사가 5백만원의 공탁금을 내서 「성가」의 가창 금지처분을 신청할 계획도 있었다.
김 목사는 이러한 계획을 변호사와 의논해서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날 회합이 이루어 졌던 것이다. 
나는 김덕진과 친하고 그의 심정이나 노여움도 잘 이해 할 수 있었으나, 한 식구들로서 통일교회에 다니고 있었으므로 「좀 더 통일교회의 꼴을 두고 보자. 문제제기는 아무때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니까」라고 김덕진을 설득시켜 우선 소송을 중지 시킬 수가 있었다. 
그 때 안병일과 김인철이 나에게 「박선생 당신은 인천에 있는 것보다 서울 본부로 오는것이 좋겠오」라고 말해서 그로부터 3년간 나는 본부교회로 나오게 되었다.

통일교회 창립의 산증인  191
서울의 본부교회에서는 가장 고참인 원로인 나에게 어떤 직책이라도 붙여 주려고 이것저것 제안해 왔으나 나는 모두 거절 하였다.
통일교회의 태동기에서 부터 관여 해 온 한 사람인 나는, 나이먹고 늙은 식구로서 통일교회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 되는 일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협력은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들이 낳은 자식들의 성장을 지켜보는 어버이의 심경이기도 하였다. 
나는 1981년에서 5년간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몸과 마음을 다해 기도도 했다. 또 통일교회에는 「박정화는 재림 메시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 온 산증인」으로 선전되어 이곳 저곳에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일본에도 가서 십 수개소에서 40회에 걸쳐 약 5천명 앞에서 강연도 했다. 
다만 나의 증언에는 반드시 조건이 붙었다.
강연하는 내용은 「흥남감옥에서 남쪽으로 피난 한것 까지」로. 그 이외의 것은 말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요컨대 문선명이 얼마나 고난의 길을 넘고 넘어온 위대한 인물인가 를 많은 사람에게 인상 깊게 심어 주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복잡한 심경 이었지만 사실 있었던 그대로를 이야기 했다. 
그래도 나는 통일교회의 열렬한 식구는 좋아 했다.
어떤 종교도 그러하지만 위의 간부는 썩어 있어도, 말단의 신자는 정직하고 순수한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이 즐거움이었다. 
1985년 7월 8일 나는 통일 신학교 학생회장들의 요청으로 「피난길을 실현했다.
문선명과 함께 평양에서 부산까지 내려갔던 피난과정을 재현 하기위해서 임진강에서 영등포까지 걸어 주었으면 하는 부탁 이었다.
나는 임진강에서 점심을 먹은 뒤에 비가 부슬 부슬 내리는 것을 부자유한 몸으로 18키로의 거리를 도보로 강행했다. 
이 때문에 발이 부어 올라서 병원에 다니게 되었다.
74세라고 하는 나이 에다가 너무나도 장시간을 걸었기 때문에 혈액의 순환이 나빠져
서 옛날에 골절했던 부위가 부어 올라 오는 것이 아닌가?
병원에서는 이 부어 오른 독이 뱃속으로 돌면 위험하다고 겁을 준다.
맨 처음 치료에서 약값이 2만원 침값이 5천원 교통비 4천원등 약 3만원인데 완치 하기 까지 나의 경제 형편으로는 지불이 불가능한 금액이었다.
학생회장에게 연락 해 보았으나 아무런 답변도 없었으므로 하는수 없이 만일의 경우를 위해서 간직해 두였던 수표를 은행에 넣고 한달에 백만원이란 비용을 들여서 겨우 치료할 수 있었다. 
통일신학교의 교장 이었던 이요한 목사에게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치료비의 분담을 사정해 보았으나 이목사도 「자기로서는 어찌할 수가 없다」고 냉정하게 거절 당하고 말았다. 
이요한목사 정도의 고참도 이렇게도 명확한 문제를 「어떻게도 할 수 없다 」고 한것은 사람을 이용 할 만큼 이용하고 다음은 쓰고 버리듯 하는 문선명의 체질과 독재 지배가 변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문선명의 거짓말과 일본의 신자  193

이런 일도 있었다.
1983년의 어느날 통일교회의 국제부에서 나에게 연락이 있었다. 
「잠깐 물어 보고 싶은것이 있으니 와 주십시요」하고 하는 것이었다. 
가 보았더니 「중앙일보」에 실린 사진을 보여 주며 이 사진을 알고 있는가 하고 국제부장의 안병일이 물어 왔다.
그 사진은 머리카락이 짧은 사람이 겨울용 방한모자를 쓰고 무엇인가 짐을 지고 있는 사람을 업고서 바지를 걷어 올리고 냇물을 건너고 있는 사진 이었다. 이 사진은 문선명선생이 박선생을 등에 업고 시냇물을 건너고 있는 사진이 아닙니까 하고 안병일이 물어 왔다. 
나는 그 당시는 사진을 찍을만한 여유 같은 것도 없었고, 선생한데 업혀서 냇물을 건넌일은 없소 라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국제부에 있던 직원들도 아무말도 못하고 이 건은 그것으로 끝났다고 나는 생각 했었다. 
그런데 그해 5월 나는 일본에 가게 되었다. 동경 시부야의 본부교회로 안내되어 갔더니 아랫층 응접실에 걸려 있는 문선명 선생의 초기의 발자취 라고 하는 전시장에 중앙일보에 실렸던 사진을 벽의 크기만큼 확대한 것이 걸려 있었다. 일본 본부교회 간부들이 몰려와서 그사진 앞에 나를 세워 놓고 기념촬영을 했다.
이 사진에 대해서 그들이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미국에 있는 문선명이 이사진을 맨 처음에 보고, 이것은 내가 피난할 때에 박정화를 업고 한겨울 추운때에 맨발로 냇물을 건너는 장면이다 라고 이야기 한듯 하다.
그 장본인이 왔다고 해서 일본에 있는 식구들이 감격해서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으면 하고 부탁을 했다. 
한국의 통일교회의 국제부에서 말한 것 처럼 이런 사진은 촬영한 일이 없오. 문선명선생이 나를 등에 업고 맨발로 내를 건넌 일은 없다고.
말해 버린다면 문선명이 거짓말을 한것이 된다.


▲ 문교주는 박씨를 업고 겨울바다를 건너는 사진 속 사람이 자신이라고 주장한다.
(文鮮明か噓を言った寫眞)


중공군의 공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다시 철수하였습니다. 중공군의 공격을 피하려고 충주의 남한강을 건너 더 남쪽으로 가려는 한 피란민이 연로하신 아버지를 업고 차디찬 강물을 걸어서 건너고 있습니다.

일자: 1951년 1월 14일
사진 제공: 미 육군 상병. J. J. McGinty


그렇게되면 일본의 식구들은 실망한것이 틀림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할수 없이 거짓말을 할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용매도에 있을때 청룡반도에서 돌아을 때에 만조되어 할 수없이 선생한테 업혀서 건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때 15.6인 정도의 식구가 따라와서 우리들의 모양을 사진으로 찍어 놓았다. 이승만대통령의 부인 후란체스카여사가 동란의 사진을 수집하고 있어서 중앙일보에 제공한 것이겠지오 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식구들은 감격해 있었으나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대단히 괴로웠다. 
이 사진이 또 1985년 3월 31일자 동아일보의 「비화6 25=정일권회상록」에 기재 되었는데 중앙일보에 실었던것 보다도 훨씬 또렸하게 보였다. 
그 사진을 보니까 찍혀져 있는 것이 문선명과 내가 아닌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사실이 아닌것을 사실인것 처럼 만들어 내는 것은 통일교회로서는 극히 보상적인 것으로서 그들이 선전하는 때의 상투적인 수단인것이다.

원리는 김백문 (金百文) 의것 도용  195
서울의 본부에 나가게 되면서 부터 나는 창립당시에 수고한 많은 식구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탈퇴한 사람도 많고 또 그속에서 버티고있는 사람도 있었다. 년로 (늙으신) 한 부인들이 더욱 불쌍 했다.
복귀원리를 구실로 문선명에게 몸을 마구 짓밟히고 재산도 가족도 잃고 생활에 어려운 처지가 되어 버린 그 사람들은 문선명을 원망하며 이런 인생으로 만들어 버린 하나님도 나쁘다고 한탄하고 있었다. 
통일교회는 표면적으로는 대단한 세력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 같았으나,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돈에 얽힌 추문이 끊이지 않았다.
1984년 7월 20일 문선명은 탈세한 죄로 아메리카 커네티같주의 렌단베리형무소에 수감 되었다. 함께 수감되어 5개월 가까이나 형무소에서 문선명과 생활한 일본인 가미야마 (神山) (그후, 일본 통일협회의회장에 취임 92년) 은 형무소에서의 문선명 선생의 태도는 훌륭했다는 등으로 발표했으나, 그것은 문선명이 형무소에 들어가는 일이 세번째로서 이미 길이잘 들었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 이야기다.
흥남에서는 평양의 여성들과의 성문란한 행위로 사회질서 문란죄, 서울에서는 식구들의 위증과 우리들의 필사적인 행동으로 증거인멸을 한 덕택에 무죄로 되었다고는 하지만 사실대로 라면 장기형이 되는 것 이었다.
미국의 탈세사건 외에도, 부동산취득을 둘러 싼 미묘한 소문도 얽혀있다. 1년을 넘게 옥중에서 보내고 다음해 8월 20일에 석방 되었으나, 통일교회는 문선명선생은 사실 무근이다라고 외치고 있었다.
35만명이나 되는 미국의 목사에게 통일원리의 비디오나 책을 증정하며 막대한 돈을 써서 출소잔치를 하는것 보다도 좀더 발밑을 비쳐보는 행동이야말로 진짜 원리가 아니었을까.
더구나 통일교회가 보배처럼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창조, 타락, 복귀의 원리」는 문선명의 발안(發案)이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 수도원 김백문 밑에 최선길 부인과 다니고 있던 문선명이 김백문의 논리를 그
대로 도용 한 것이다.
되는데로 외워서 논리일관이 되지 못한채, 종이에 연필로 쓴 문선명의 메모를 유효민이 정서해서 정리 하고, 유효원이 논리에 모순없이 구성 한 것이다. 
통일교회의 원리는 죽은 유효원이 진짜이며, 원칙대로 하자면 오직 유효원이 진짜 교주이다. 그 큰 은혜를 입은 유효원의 우수한 두뇌와 인격을 질투한 문선명은 그 후 갖은 수단으로 몹쓸짓을 곁드려서 드디어는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도 있다. (후술)
통일교회의 원리는 문선명이 김백문의 는리를 도용해서 유효원이 정리해 낸 것이라고 내가 지적하는 근거는, 김백문 저작 「기독교 근본원리와 성신신학」을 읽으면 일목요연하다.

이복헝제 결흔 의혹  196
잊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어느 때인가 부산에 있는 송병호 가족이 별안간 나에게 전화를 해서 부산의 대학병원에 송사장이 입원중인데, 박선생을 꼭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송사장은 위독한 상태 입니다 라고 말한다. 나는 바로 달려 가고 싶었으나 그때는 나도 마침 병이 들어서 몸을 가누기 조차 어려운 형편 이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 병이 웬만하면 곧 찾아 가리다 라고 말하였는데, 3일후에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다.
이 죽은 송사장이 생전에 몇차례 나에게 문선명에 대해서 이야기 한 일이 있다. 
문선명의 처인 학자 이외의 여자에게서 난 아들과, 간부의 딸이 결혼했는데 이것은 남매결혼이 아닌가? 
그 간부 부인은 9세의 차이가 크게 있어서 웬만해서는 결혼의 상대가 될수 없는 터 인데,
 36가정 (후술) 의 하나로 되었다. 
실은 그때 그처는 문선명과의 복귀로 임신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적당한 식구가 없어서 김영희나 이성례의 경우처럼 부탁 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할수 없이 한 간부에게 맡겨서 문선명이 임신시킨 식구와 결혼 시켰던 모양이다.
문선명의 아들인 그남자 아이와, 간부와 그의처 두사람 사이에서 낳은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은 문선명의 아이인 딸이 결혼 하는 것은 남매 결혼이 틀림없다.
한국의 관습상 남매결혼이란 말도 되지 않는 것으로서 있어서는 않되는 일이다. 나는 열심이 그렇지 않다. 무슨 착오 이겠지 하고 그를 이해 시키려고 애썼다.
이 송사장은 부산에서 내가 문선명을 소개 해서 식구가 되었다.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현재의 연세대학교) 출신으로 매우 친하게 지내고있었다. 부산의 세관과장을 퇴직하고 나서 통관사무소를 경영한 사장이었다
통일교회가 드디어「원리해설」을 출판하게 되었을때 내가 부탁해서 50만원의 자금을 내 준일도 있다.
처음 한 동안은 왜 열심으로 나오는식구로서 제법 많은 헌금도 하였는데, 문선명이란 남자의 정체를 보고는 크게 실망했다고 노해서 탈퇴해 버렸으나 그후에도 문선명의 일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 송사장이 자신을 가지고 사실이다 라고 말한 이상 나는 반론 할 수 없었다. 
또 당시는 광산에 있어서 36가정의 경위를 몰랐던 나에게는 또 반론의 재료도 없었다.

원리대로 실천한 김덕진 (金德振)  198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복귀문제로 무어라 해도 기록에 남기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앞에서도 기술한 바 있는 김 덕진의 문제이다.
서진광산 시절에 조동석이 서울에서 김덕진을 데리고 대구로 왔다는연락이 있어서 내가 대구로 가니까 문선명이 김덕진은 서울에 문제가 많으니까 광산에 있는 박정화 한테로
데려 가라고 명령해서 데리고 왔다고 한다. 김덕진은 본래 음악에 재능이있는 예술가로서 솔직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 김덕진

나는 김덕진과 같이 광산으로 돌아 왔으나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깊은 산골에 오게된 경유를 그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문선명의 원리를 듣고, 문선명 한테 복귀를 받은 여자 한테서 자기도 복귀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도 다른 여인에게 복귀 해 주었는데, 그것은 원리대로 실천 한것 뿐이다 라고 말한다. 문선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 유신희 한테서 김덕진은 원리대로 세차례에 걸쳐 복귀를 받은 모양이다.
그 유신희 한테서 복귀를 받은 그는 종로 5가의 엄순태의 집에서 5인의 여자들을 복귀 시켰다 .그 여자들이 또다른 남자들을 복귀시켜 불과 한주일동안에 70여명의 남녀가 복귀 의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점점 넓혀져 갔던바 복귀라고 하는 남녀의 섹스 소문이 협회장인 유효원이나 문선명의 귀에 들어갔다. 
그 결과 문제의 김덕진을 서진광산의 나있는 곳으로 추방해서 두번 다시 서울에 나타나지 못 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광산으로 온 김덕진은 광산의 굴속에는 들어 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방안에 혼자 처 밖혀
서 오직 열심히 원리에 근거한 작사나 작곡을 하고 있었다. 나는 김덕진에게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정직하게 말해 주었으면 하고 물었더니 나는 원리대로 실천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분명히 당신은 원리대로 실천 한것이니까 당신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고 생각된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약 2년간 나는 그와함께 대화했다. 
김덕진은 문선명 한테서 오는 송금이 뚝 끊겨서 먹을것도 없을 때, 또 서울로 가서 재차 복귀의 실천을 하기 시작 했다.
또 유효원이 나에게 연락이 왔으므로, 나는 서울로 가서 복귀의 실천을 하고 있던 김덕
진을 대구로 데려와서 현재의 부인과 결혼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김덕진은 원리대로 실천한 것 뿐이다. 무엇이 나쁘다고 할 것인가? 
문선명은 원리의 설교를 해서 일일이 셈 할 수 없을 정도의 가정을 파괴하였으며 김덕진도 문선명의 원리대로 실천 했을 뿐인 것이다.
그런 사람을 산속의 광산에 가두어 두고, 서울에는 두번다시 나타나지 못 하도록 강금한 것은 이해 할 수 없다. 그러나 그때의 나로서는어떻게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200

36가정의 역할

속출한 재림 메시아들의 대책
도리켜 생각해 본다면, 원리대로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 남자 식구를 복귀시켜 그남자 식구들이 또 다른 여자식구를 복귀 시킨다고 하는 방식으로 이세상의 전인간을 복귀하여 혈대교환 (血代交換) 하는 것은 당연 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중에 「나만이 재림 메시아다. 저 문선명은 엉터리고 사단이다」라고 부르짖어 자기의 복귀를 받지 않으면 진짜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몇 사람씩 각곳에 출현해서 그사람에게서 복귀를 받고자 모여드는 신자들도 늘어 가게 되었다.
이러한 사태가 되니까 문선명 은 생각끝에 「36가정」이 란것을 생각해 냈다.
문선명이 세계의 인간을 모두 복귀해서 혈대교환 (血代交換) 하는 것은 무리한 것이므로이 36가정만을 직접복귀 (혈대교환) 시키기로 한것이다.
그 후에는 진정한 부모가 「성수」를 뿌려서 새로 결혼하는 신부에게 축복을 준다고 하는 형태로 바꾸어 「합동결혼식」을 하기로 한것이다.
36가정이라고 하는것은 이러한 경로로 만들어 진 것인데 그러면 왜 36인가?
「구약시대」의 12지파,「신약시대」의 예수의 12제자, 그리고 문선명의 원리를 「성약시대」라고 해서 12제자, 합계 36가정을 택하여 빼앗긴 종적 (縱的) 인역사를 횡적 (橫的) 으로 벌려 놓코, 탕감복귀 한다는 조건만을 세워 구약, 신약, 성약과 전세계를 탕감복귀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36인의 신부는 문선명이 복귀한 여성이나 상대가 아니고서는 자격 이 없다고 되어 있다.
복귀라고 하는 것은 섹스를 뜻하는 것인데, 그 목적은 「혈대교환 (血代交換)」이다.
제2의 아담인 예수가 이루지 못했던것을, 제3의 아담 (요컨대 문선명) 이 이세상에 재림해서, 혈대교환 (血代交換) 을 한다.
이것은 요컨대 메시아가 세계의 대표로서 6인의 마리아와, 36가정의 아내들과 섹스를 하면, 더러워진 피가 깨끗하게 된다고하는 것인데, 이 의식을 혈대교환 (血代交換) 이라고 한다.
그리고 혈대교환 (血代交換) 을 한 36가정에서 태어 나는 아이들은, 죄없는 하나님의 자녀 뿐이며 이러한 사람들이 세계에 널리 퍼짐으로써 죄악이 없는 세상에 태어 난다고 하는 것이다.
현재에는 36가정과 6마리아와 같이 문선명과 직접 간접복귀의 혈대교환 (血代交換) 을 받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 한다. 제아무리 식성좋은 문선명이라도 전부 먹어 치울 수 없는 많은 수 인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문선명이「성수」를 뿌림으로서 그것에 대신하고 있으며 섹스 3회의 방법은 그대로 하고 있다.


▲ 문교주 한학자와 결혼 (어린양 잔치) 후 장모 홍순애가 딸의 어린시절의 간증을 하고 있다.

또 일본에서는 혈대교환 (血代交換) 을 피나누기 라는 표현으로 인식되고 있는것 같은데, 통일교회에는 피나누기란 말은 없다. 어디에선가 잘못 전해진 것이 라고 생각된다.
202
이 36가정은 혈대관계를 한 신성한 가정이라고 하는 것인데, 통일교회의 식구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어 있다.
어떠한 중요한 일이 생기면 대개 이 36가정에서 그 책임자를 선임하게 된다고 하는 중요한 지위 에 있다. 이 가정에서 어느 한쪽이 사망한 가정이 5가정 또 탈퇴한 가정이 9가정이 있다. 
이들 14가정의 존재가, 문선생의 원리의 어디엔가 잘못이 있다는 것을 생각케 해 준다.
원리에 의하면, 잃어버린 해와를 도로찾고, 6마리아도 도로 찾는다면,참부모와 함께 살수 있게 되어서 타락했던 인간이 창조 본래의 인간으로 회복되고, 그 원리대로 생각하면 두번다시 이세상에는 이 36가정과 통일교회의 식구들은 죽음도 없고, 고통도 없고, 타락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되는데,어찌하여 이 36가정중의 14가정이 죽든지 탈회 하던지 하게 되는 것일까?
이것은 그 원리에 잘못이 있음으로써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203

당시의 36가정의 명단과 직업 (1985년당시)

부 ( 夫 )     처 ( 妻 )        직업 (職業)

1.  유효원 (劉孝元)  사길자 (史吉子)  사망
2.  김원펄 (金元弼)  정달옥 (鄭達玉)  도미 활동중
3.  김영휘 (金榮輝)  정대화 (鄭大和)  영국선 교사
4.  이요한 (李耀翰)  원심희 (元心姬)  신학교교장
5.  유효영 (劉孝永)  김화영 (金花英)  일신석재사장탈회
6.  이꾸현 (李相憲)  김한숙 (金漢淑)  재단이사장
7.  김인철 (金寅哲)  구정숙 (具貞淑)  휴식 중
8.  황충훈 (黃忠雲)  김원량 (金錦良)  도미선교사
9.  문승용 (文昇龍)  장병주 (張炳珠)  협회부회장경제담당
10. 황환채 (黃煥菜)  박영숙 (朴榮淑)  수산회사사장
11. 이재색 (李載錫)  강정원 (姜貞遠)  종교협의회회장
12. 홍종복 (洪鍾幅)  서명전 (徐明鎭)  회사사장
13. 최용석 (崔容碩)  김문희 (金文姬)  휴식중
14. 이수경 (李秀卿)  김기영 (金基榮)  일성종합건설사장
15. 정한채 (鄭漢菜)  박승희 (朴承姬)  사망
16. 홍성표 (洪成杓)  유길자 (兪吉子)  일화제약사장
17. 한인수 (韓仁洙)  이선구 (李善九)  사망
18. 박보희 (朴普熙)  윤기숙 (尹基淑)  총재 한미재단
19. 한상국 (韓相國)  임병숙 (林秉淑)  미국활동중
20. 김상철 (金相哲)  강의홍 (姜義弘)  미국신학교교장
21. 안창성 (安昌成)  최예정 (崔禮貞)  외국선 교사
22. 이기석 (李基錫)  자생연 (池生蓮)  사망
23. 최봉춘 (崔奉春)  선미식 (申美植)  탈회
24. 정수원 (鄭壽源)  김경남 (金京南)  미국선교사
25. 한상길 (韓相吉)  김정은 (金正恩)  미국활동중
26. 김찬균 (金贊均)  최영자 (崔榮子)  미국선교사
27. 곽정환 (郭錠煥)  윤정은 (尹貞恩)  협회장
28. 김병호 (金炳浩)  한영심 (韓榮心)  미국선교사
29. 박종구 (朴鍾九)  최원순 (崔錦順)  사망
30. 최주원 (崔周源)  이홍연 (李洪蓮)  수산회사사장
31. 송문규 (宋文奎)  조미자 (趙美子)  탈희
32. 유효먼 (劉孝敏)  라순열 (羅淳烈)  탈희
33. 이전태 (李鎭泰)  장원순 (張元順)  탈희
34. 한인수 (韓仁洙)  김숙자 (金淑子)  탈희
35. 이준용 (李俊容)  선우정숙 (鮮于貞淑)  탈희
36. 홍광철 (洪光哲)  최영자                      탈희

❖ 사진 추가

희생된 공로자  204
또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 라고 한다면, 초기 (처음) 부터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양말을 짜 신긴 옥상현*, 자기 인생의 절반 이상을 문선명에게 바쳐 충성한 96세나 되는 그녀가 셋방살이로 겨우살아가고 있는 상황을 문선명은 무슨짓을 해서라도 도와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본래 송도욱 장로의 처 였던 박봉식집사의 경우를 보자.
문선명이 송도욱 장로와 오명춘* 집사를 결혼 시켰기 때문에, 홀로 되고 말았다. 
그후 남편도 곧 죽고, 갈곳이 없어진 박봉식 집사는 교회에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늙은이는 더이상 소용없다고 하는 교회의 방침으로 교회에서도 쫓겨나서 먹고 살기도 어렵게 되었다. 열심히 문선명을 받들어 온 여인들을 어째서 이다지도 몰인정하게 못본체 내버려 둘 수가 있을까?
초기에 자기가 복귀 시킬 때에는 좋아서 함부로 아무짓이나 하고 그 젊음과 아름다움과 돈이 없어 지니까 곧바로 따돌려 치우고, 다른 여자에게로 옮겨가서 두번다시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것은 원리에 써 있지 않다.
이것을 여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나 박정화처럼 부러진 다리를 끌며 함께 남쪽으로 피난 해 온 사람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만들어서 배신자로 소문을 퍼트려 나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원고를 완성해서 진상을 밝혀야겠다고 결심 했다. 
아무리 생각 해봐도 내가 문선명을 배신 한것이 아니라, 문선명이 나를 배신 한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문선명보다 뛰어난 인격자 – 유효원  204
다음에는 유효원씨에 대해서 밝혀 두고자 한다.
이것을 근거로 유효원이 구성 집필한「원리해설」를 완성 할 뿐만아니라, 불구의 몸으로 정력을 다해서 전도사 양성에 밤낮이 따로 없이 충성을 다했으며, 36가정을 선정 할 때에는 그가 고생해서 각자의 짝 짓기를 결정하는 임무를 수행 했다.


▲ 유효원

유효원은 구 경성제국대학의 의학과 중퇴자로 자기가 환자의 몸 인데도, 자기병에 대해서는 자제히 알고 있었다. 

그는 당시 결핵성 고관절염으로 다리뼈와 환도뼈가 유착되어 앉을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수술을 받으면 완치가 안될 몸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것을 알고 있는 문선명이 와서 하늘의 명령이라고 하면서 수술하도록 명령 하였다. 
문선명은 그때 그래도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것은 하늘의 명령에 거역하는 것이다 라고 까지 말했다고 한다. 
유효원은 울면서 수술 하는것을 거부 하였다.
자기는 주사로 살아가는데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하고 나에게 의논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문선명한테는 거역하지 못하고 할수없이 수술을 받아 그대로 죽고 말았다. 
이때의 문선명의 비정한 행실은 내부에서도 간접살인 이다 라고 까지 말했을 정도이다. 
유효원의 장례식이 끝나고 산에서 돌아온뒤 교회에서 간부들이 모여 않은 자리에서 효원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었나 했더니 죽었구먼 ! 하고 말했다.

❖ 사진 추가


▲ 유효원 북학동 北鶴洞

두뇌가 좋은 인격자로 신자들의 인기가 대단 하였던 유효원에게 문선명은 많은 비밀을 지령하고 후에 위험 한 존재 임을 느끼고 유효원을 거세하지 않았을까?
더구나 또 당시 미국에 있던 대간부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36가정의 멤버였던 이기석, 박종구 (주:이 두사람은 당시 이미 죽었었다) 두 사람은 영계에서 대단히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으나 유효원씨는 제일 말석에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그는 통일세계 라고 하는 잡지에 이 기사를 기재하고 청평기도원에서도 발표 하였다. 참으로 죽은 사람에 대해 가혹한 매질이 아닐수 없다.
유효원이야 말로 통일교회 최대의 공로자인데도 볼일이 끝나면 들어덤벼서 못살게 굴고는 죽은 다음에도 매질을 하는 것이다.

재정을 이룩한 실업가 – 유호민  206
유효민의 이야기도 해 두어야겠다.
유효민은 초기에 경제적 사정이 대단히 어려웠을 때에 푸로마이드 사진을 제작 판매하는 아이디어를 발휘해 당시의 식구들의 생활을 지탱시켜 주는등, 통일교회의 발전에 공헌한사람이다. 
또 산탄공기총을 발명하여 그것을 제조 판매 함으로서 통일교회의 경제적인 토대를 이룩한 공로자, 이것이 점점 발전하여 「통일산업주식회사」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가장 핵심적 공헌자인 유효민에게는 주권을 단 천주를 주었을뿐 (후에 다 회수하였지 만) 공기총의 발명특허권 (실용신안국제특허 ) 은 문선명의 명의로 기증하는 것으로 공증되어 조립부장이라는 직책만을 부여했다.
유효민은 그후 을지로의 예화 공기총 센타에서 백구섭에게 영업부장 일을 맡기고 계속 밖에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30원짜리 차값까지도 영수증을 요구 할정도로 무섭게 감시를 당했다고 한다.
문선명의 지시였을 것이지만, 나와 같은 모양으로 그를 통일교회에서 몰아내려고 한 수작이었다고 생각된다.


▲ 유효민, 저자, 유효영 (1992년경)

드디어 유효민은 통일교회와 인연을 끊고 1972년에 탈퇴하고 말았다. 나의 다음으로 그림자 같은 존재가 탈퇴 한다고 하는것은 유효민이 두번째이다.
이와같이 가장 최초의 비서였던, 박정화를 배신하고, 두면째 유효민을 못견디게 굴어서 탈회 시키고 ,제3의 송도욱이나 교회최고의 두뇌이자 공로자인 유효원을 사망케 한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예정인지, 문선명의 계획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내가 문선명과 같이 있었던 1953년에서 1956년에 서진광산으로 갈때까지의 말하자면 통일교회 발전의 제일 고생한 무렵에는 문선명의 친척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후에도 도중에 문성균, 문용선, 문승룡 두사람이 들어 왔을 뿐이고, 통일교회의 경제가 커 지니까, 거의 대부분의 경제지배를 문선명의 친척 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실은 문선명이 재림 메시아가 아닌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것은, 문선명 자신이다. 통일교회의 재산을 안심 할수 있는 자기의 친척에게 넘겨서 장래의 생활기반을 확립하는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제7장 참조)

화제의 다보탑을 수출한 일신석재사장 – 유호영  208
나는 어느때 일신석재사장인 유효영 (주 = 92년에 그만두고 탈회) 을 만나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다. 
유효영의 이야기로는 자기가 경영하고 있는「일신석재주식회사」에서 열심히 지혜를 짜서 연구한 결과 다보탑을「100분의 16」크기로 축소 한 것을 제작해서 일본에 판매하여본 결과 예상외로 수출이 잘되 매월 20억원 상당을 수출하고 있었다고 한다.


▲ 유효영

그런데 이 수입에 탐이난 문승룡 (문선명의 6촌) 은 다보탑 제조부문은 자기가 그 나머지 부분만을 유효영 사장이 담당하는 공장 분활 경영안을 끈길기게 요구했다. 다보탑부분의 수입이 회사 전체 수입의 95%나 차지했다.
지금까지 참고 견디어 온 나에게는 5%만을 건네주고 남어지 95%를 문승룡이 가로 채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림도 없는 생각이다.

이회사 일신석재는 유효영사장이 사장겸 목수겸 노동자로 스스로 청소까지 해가며 여기까지 키워 온 회사이다. 
그런데도 전연 관계가 없었던 사람이 뛰어들어 빼앗으려고 하니까 어림도 없는 짓이다 라고 말하며 유효영은 크게 싸웠단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나는 부산-대구-서울시대, 북조선에서의 형무소 시대의 일을 생각 하였다. 
그 당시는 문선명을 재림 메시아라고 우러러보며 원리를 듣고 새로운 식구를 모으기에 필사적 이었다. 이 식구들과 함께 원리 그대로의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매일처럼 노동했다 여성들은 재산도 질투도 생각지 않고 원리에만 열심이었다. 자아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오로지 원리의 달성을 기원하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노력하였다.

문선명의 부정과 범죄  209

그런데 그다지도 어려웠던 시대가 지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니까 들어보지도 못했던 문선명의 친척들이 몰려들어 차지하고 문선명 일족의 천하가 되어 버렸다.

문선명은 박모씨라고 하는 사람에게 자금을 건네주고 그 박씨의 명으로 몰래 부동산을 구입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세무서의 조사에 들통나 자그만치 1억 2천만원의 막대한 세금부과에 놀란 박씨가 밝힘으로 통일교회의 문선명이 부동산을 부정으로 구입하고 있던것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행위가 메시아를 자칭하는 사나이가 할짓인가?
문선명 이 탈세관계로 미국의 형무소에서 복역한 그것도 통일교회의 발표대로 「문선명선생은 아무 죄도 없는데 복역했다. 」고 하는것이 된다. 그 복역하고 있을때에도 막대한 돈을 마구 뿌리며 지내고 있다고 폭로되었는데, 타인의 명의로 부동산을 부정구입 하는 맞잡이나 돈이 되는 기업은 거의 문선명의 친척에게 빼앗기고 있는 현실을 볼때 대관절 이것이 종교 단체인가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선명이 나에게 이야기 해 준 원리와 이상세계 그리고 그 이상세계의 공생 공의 (共生公義) 주의 시대란 과연 어떠한 것일까?

문선명 일족의 「더 돈을 보내라」「빨리 현금을 보내라」고 하는 소리가 되어 세계로 날아간다.

특히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통일교회의 실태를 모르는 식구들이 이상세계의 실현을 믿고 돈 수집에 열심히 뛰어서 영감상법 (霊感商法) 이라고 하는 반사회적인 큰 문제로 발전했다.

초창기의 노고를 알지 못하는 일족이 저지른 폐해 (弊害) 라고 할 수밖에 없는 문제이다.

「법에 저촉되어 훔치더라도 하나님은 용서해 준다」고 여자식구를 꾀어서 문선명의 친척인체 하는 말투로 물욕 금전욕에 한층 더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한국은 일제지배로 피해를 받았다. 그 일본에 원한을 갚기 위해서도 일본의 돈을 싹싹 긁어 내야 한다고 문선명이 호언하고 있던 사실 (여러사람의 간부가 들은바 있다) 을 일본의 순수한 교인들은 알고 있을것인가?

원리의 이상사회등은 꿈같은 이야기일뿐 재림메시아의 아버지는 별것 아닌 허상에 불과 하다는 것을 빨리 알아야할 것이다.

도대체 통일교회 란 무엇인가?

종교인가?

단순히 배금 기업체인가?

문선명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메시아를 자칭하고 있을뿐이라면 원리는 어떻게 된 것인가?

문선명의 행위가 원리에 따라서 복귀를 한 것이라고 한다면 원리대로 6인의 마리아로 충분하지 않은가?
6인의 마리아의 정조를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그 외에 더 복귀라고 하는 명목으로 헤아릴수 없을 정도의 많은 여성을 범하고 재산을 착취한것은 용서할 수 없다.

참 어머니로 한다고 속여서 처녀인 이성화를 서울역전의 여관에서 범하고 또 이순철도 같은 구실로서 범하고 그밖에 김명희라고 하는 처녀도 같은 구실로 복귀해서 임신시켜서 학생이었던 그녀의 인생을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것은 재림 메시아를 자칭하는 문선명의 크나큰 범죄이며, 통일교회로서는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김명희의 비참 211

연세대학교의 우수한 학생이었던 김명희의 경우를 특기하면…

김명희를 임신시킨 것을 알게 된 문선명은 자기의 입장이 위태로울 것을 두려워해서 그녀를 같은 대학의 학생으로서 교인이 된 순수한 청년 오승택과 함께 일본으로 가도록 계획을 꾸몄다.
외국에서의 생활을 보장한다고 약속해서 부산에서 일본으로 탄피를 밀수출하는 작은 배
에 숨겨서 밀항했던 것이다. (이 비용은 오군이 등록금으로 아버지를 속여 받은것)

일본에서의 두 사람은 언어도 통하지 않고 밀항자의 몸으로 입원도 할수가 없어서 극도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해산하였다. 젊은 오승택은 갓난애기의 탯줄을 자기의 이빨로 끊고 애기를 출산시켰다고 한다.
가지고 왔던 얼마 안되는 돈은 다 써버렸고 문선명한테서의 생활비도 오지 않아 기다리다 지쳐버린 오승택은 일본으로 밀항시킬때 문선명이 부를 때까지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있었지만, 문선명한테로 돌아오기 위해서 또 다시 밀항을 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대단한 고생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우선 오 청년이 한국으로 돌아와서 직접 문선생에게 이야기 해서 생활비를 얻어낼 예정이었다.

오승택은 문선명을 만나서 자기들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고 생활비를 구하였더니 문선명은 이것을 한마디로 거절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가혹한 이야기는 들어 본 일이 없다. 보통사람이라도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에게 이와 같은 처사는 하지 않을 것이다.

212
하물며「재림 메시아」라고 하는 그 사람이 자기가 책임을 지는것이 당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다지도 비정한 배신을 태연하게 당하였으므로 오승택은 몹시 노하여 그 길로 지금껏 재림메시아로 믿고 우러러 오던 문선명과 결별하게 되었다. 사실은 이때 문선명은 그런 돈은 없다. 너희들이 생각해서 해 ! 라고 말한 것이다.

❖ 사진 추가


▲ 당시 김영희* [ 김명희 金明熙 ]

나는 문선명 옆에 있었으므로 잘 기억하고 있다.

문선명의 말에 오승택은 노발대발 하며 무슨 말인가? 잘 기억해 두라!
너는 사단이다 ! 하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가고 말았다.

김명희가 임신한 당시 연세대학교에서 입교한 세사람의 학생 가운데 사정을 듣고 상의를 받은 오승택이 문선명 메시아와 통일교회를 위하는 것이라고 믿고서 내가 맡겠습니다 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크리스챤인 부모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고 부산에서 김명희와 만나서 소형 어선을 타고 일본 규슈로 밀항한 것이다.

오청년이 노해서 뛰쳐나갈때 그자리에 7, 8인이 있었으나 누구도 내심으로는 괘씸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무것도 할수 없었다.

나는 그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동 · 서도 모르는 일본에서 김명희는 오로지 돈을 가지고 돌아을 오승택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는 동안의 나날은 김명희와 그 갓난애기 (문희진) 에게는 그 고생이야말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한 김명희 모자를 일본 오오무라 수용소에서 발견한 한국인의 황모씨가 그녀를 한국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돈도 여권도 없는 김명희는 오오무라 수용소에서 3개월간이나 수용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1955년의 관련자. 김명희 (金明熙) 는 성추문에 역시 연루된 연세대학교 (延世大學校) 의 학생이었다. 이 사진에서 그녀는 1959년 10월 2일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그녀의 아들 문희진과 함께 있다. 김명희는 임신 중에 양윤영의 서울 집에 머물렀다. 문선명은 그의 아들의 출산을 위해 그녀를 일본으로 보냈다. 김명희가 한국에서 아이를 낳는 것은 문선명에게 위험요소였다. 문선명은 1946년 평양에서 수감되었던 것처럼 다시 풍기문란으로 감옥에 갈 수도 있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에 의하면, 문선명은 1948년에 중혼죄로 감옥 신세를 졌다. 문선명은 일본에 있던 김명희에게 편지를 쓰곤 했지만, 돈은 전혀 보내지 않았다. 문희진은 도쿄에서 1955년 8월 17일에 태어났다. (문희진은 1969년 8월 1일 열차 사고로 사망했다.)

김명희가 아이를 데리고 돌아 왔으므로 문선명은 할수 없이 아이만은 자기의 호적에 입적 시켰다. 아이의 이름은 “문희진” 이라고 한다.

이 아이는 황모라고 하는 사람의 부인이 숨겨서 양육하고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죽어 버렸다.

중학교 여름 방학때 하기 전도 나간다고 큰 학생을 따라 나갔다가 무더운 때라 객차에 오를때 두손으로 붙잡고 오르는 난간을 붙잡고 뒤로 잔뜩 늘어져 시원하게 바람을 쐬다가 역에 들어갈때 역 시설물에 머리를 부딪혀 뇌진탕으로 죽었다.

이 사건에 대해선 영계 가서 소년들을 동원하러 영계에 갔다고 미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그 이외에는 「어린양의 잔치」를 거행한다는 구실로 처녀인 이성례를 복귀해서 그녀에게도 아이를 낳게 했다.

그 아이도 어느 간부의 아들로서 양육되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다.

이러한 일이 하나님께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또 한사람의 어머니 214

납득되지 않는 사실은 그밖에도 있다. 최원복의 문제이다.

이 사람은 「7.4사건」때에 문선명이 구속되어 교수들이 사표를 내고 졸업반 대학생들이 퇴학을 당하는 소란이 일어 났을때에 우연히 나와 만날 기회가 있어서 대단히 걱정을 해 준 사람이다.

「나도 힘이 되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수가 없네요」하며 아쉬워 했다.

그녀는 이미 통일교회에 입교해서 대학교수를 그만두고 그후 가정도 버리고 문선명 한테로 달려 왔다.

무슨 일에서인지 식구들은 최원복을 「어머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어머님」이라고 하는것은 원리의 어느곳에 나오는 것일까?
6인의 마리아는 예수가 복귀를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었는데 그것을 못했으므로 예수는 죽었다. 그래서 제3의 아담이 이세상에 와서, 6인의 유부녀를 마리아로 복귀시킨다고 하는 구실로 문선명이 섹스를 하고 그 육체도 재산도 빼앗았다.

그리고 처녀 한사람을 선택하여 「어린양의 잔치」라고 하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문선명과 처인 한학자를 「참아버지」「참어머니」라고 부르게 한다.

참어머니는 이미 있는데도 「최원복어머니」라는 명칭은 원리가운데 어디에서 끄집어 낸 이론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문선명은 6인의 마리아를 선택 하였고 그중에서 한사람을 특별히 어머니 라고 부르게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문선명 자신이 좋아서 열을 내고 있는 여인 이었으니까, 어머니 라고 이름을 붙인것 뿐이리라. 대단한 이야기다.

나중에 말하자면 문선명의 처인 한학자의 어머니 홍순애가 「미국에 가있는 최원복은 2호다. 첩이다」라고 어린아이들에게 충동질해서 비상수습책으로 선화예술학교의 교장으로 최원복을 한국으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 최원폭, 한학자, 문선명

이 학교는 박보희의 동생 박노희가 이사장으로 있었는데 교장이란 명칭도 다만 겉치레
의 이야기일뿐 문선명이 당황해서 붙여준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원리」를 내세우며 뒤로 돌아서면 전혀 종교인답지 않은 문선명의 언동은 여전히 변함없이 여자문제나 부동산의 부정구입 탈세사건 「남의 돈을 훔쳐 와도 하나님은 용서 한다」고 하는 교사등, 일일이 다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이지만, 한가지만 더 나의 체험을 써두고자 한다.

나의 부끄러운 체험 215

나는 제3장에서 문선명으로부터 이순철이 만든 영계의 역사에 관한 시험을 치라는 이순철의 강요에 문제를 보고 답을 썼더니「됐어 합격」이야 라고 말했다고 썼는데, 사실은 이때 문선명의 눈앞에서 6마리아의 한사람인 이순철과 섹스를 하도록 명령을 받았던 터였다.

나는 이미 문선명이 복귀한 6마리아 중 한사람 한테서 복귀를 받았으므로 문선명의 원리에 말하자면 유자격자였다.

그런 나에게 문선명은 이순철과 이자리에서 하라고 재촉했다. 메시아의 명령에는 따를 수 밖에 없어 나는 그 자리에서 이순철과 섹스를 하고 「합격」한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남편 몰래 집에서 많은 돈을 가지고 나온 이순철은 격노한 남편한테 쫓기고 있었다.

그래서 위험을 느낀 문선명과 이순철과 함께 여기저기 도피하며 5박을 하면서 부산으로 간것인데 그때도 같은 것을 명령 받았다.

남편의 노여움을 모른채 두사람은 이순철이 가지고 온 돈으로 호화스런 강산 유람의 여행을 했다. 그리고 매일밤 두사람의 섹스를 문선명은 나에게 「보라」고 말하며 「자네도 하게」라고 명령했다. 거기에는 종교도 없었고 원리도 없었다.

성욕에 놀아난 남녀 세사람이 귀신들린 광란의 성희가 아닌가!
문선명이 말하는 복귀의 정체를 나는 그때 싫증이 나도록 체험 하였다.

또 부산의 영도의 밤 비좁은 방에서 자고 있는 나의 옆에서 문선명은「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돼 잠자코 있어」라고 말했다.

재림메시아라고 자칭하려면 원리대로 하였을 뿐이지, 왜 감추려고 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해 못할 것이 많이 있지만 원리를 앞세워 가장하고 해괴한 복귀행위는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피할런지!

붉은 용(龍) 이 세상을 미혹  216

자칭 재림메시아의 문선명은 그 원리를 김백문으로부터 배워가지고 평양으로 가서 파렴치한 사건을 일으켜 체포되어 실형을 받고 복역한 후에 서울로 왔다.

1954년에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를 창립 여러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통일교회는 점점 성장해서 일본에는 최봉춘 (일본이름 니시가와) 을 밀항시켜 해외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또 김상철과 김영운이 미국에 포교하여 미국에서도 식구들은 문선명을 아버지로 우러러 재림메시아로 믿고 있다.
그러나 오늘에서 원리와는 관련이 없는 문선명의 행동으로 많은 여성들과 남성들이 희생되어 죽은 시체가 가득 쌓인 속에서 원한의 소리가 들려 오는듯 하다.

그리고 지금은 「복귀 실천의 비밀」이나 「실천의 치부」를 알지 못하는 철부지 교인을 전면에서 내세워서 가면을 쓰고 있다.

미국의 형무소에 들어갔던 것을 영광된 큰 기적등으로 선전하여 옥중에 있었어도 막대한 돈을 쓰고 있었다. 그 돈은 여러 식구들이 목숨을 걸고 벌어들인 귀한 돈인 것이다.

수년전 미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여신자가 한국 인삼차를 팔기 위해서 흑인촌을 찾아 갔다가 집단으로 윤간을 당하고 죽음을 당했다.

흑인들은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도로에 그 시체를 끌어 내다가 차로 몇차례 깔고 뭉개버린 사건이었는데 시체의 주머니에서 통일교회 회원증이 나와서 신원이 판명되었다.

이와 같이 비참한 희생으로 들어온 돈을 물쓰듯 써버리면서 문선명은 재림메시아를 자칭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식구들이 총동원되어 영감상법 (霊感商法) 이나 초코렛 껌팔기로 술취한 사람들의 희롱을 받아가면서 돈을 벌어, 그 돈은 전부 문선명한테로 보내진다.

그렇게 보내진 돈을 쓰는 명목으로 문선명은 엉뚱한 계획을 꾸며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국제 하이웨이 건설계획」이다. 현해탄에 해저터널을 통해서 일본, 한국, 중국, 러시아, 유럽을 연결하는 국제 하이웨이를 만들자고 하는 것이다.

통일교회의 내부에서 조차 「실현 불가능」이라고 실소의 소리가 있는데도 말이다.

재림메시아! 문선명이 이세상에 나타나서 국제 하이웨이를 건설하다니 도대체 무슨 짓을 한다는 거야!
국제 하이웨이건설 같은 것을 계획하기 전에 혈대교환 (血代交換) 을 해서 참 부모가 되어있을 터인데, 그 재림 메시아는 무엇보다도 죄악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서 에덴의 동산을 복귀해 놓는것이 본래의 그가 할 일이 아니었던

문선명은 미국의 신문이나 매스컴에서 자기를 「목사」라고 자칭했다. 문선명은 신학교에 다닌 일도 없고, 목사로서의 안수 받은 일도 없다.

만일 통일교회 계열의 신학교에서 얻은 자격이라면, 질문이 있다.

문선명은 처음 부터 자기는 재림 메시아이며, 제3의 아담이다. 그리고 자기의 할 일은 혈대교환 (血代交換) 을 통해서 본래 그대로의 죄없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것이 사명이다 라고 계속 말해 왔다.
그렇다면 재림 메시아가 목사로 변신해서 어떻게 해서 사명을 다 할수 있는가 !

스스로 지금까지의 속임수는 말할 것도 못되는 이야기가 아닌가 !

문선명이 북에서 남으로 내려와서 이름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성경의 「요한계시록 12:9」에 이 세상에는 끝날에 붉은 용이 나타나서, 이 세상을 미혹케 한다고 씌어져 있다.
자기의 이름에 용(龍) 이 들어있는 문용명(文龍明) 은 그것에 착안해서, 서둘러 이름을 문선명으로 바꾼 것이었다. 이것은 자기 가 붉은용=사단 임을 인정 한것이 된다. 나 자신의 부끄러움을 천하에 내밝혀 쓴 이 고백에 거짓은 없다. 문선명이야 말로 진짜 사단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 붉은용 문선명으로 인해서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이 이 이상 기만 당하거나 희생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나는 이 원고를 목숨을 걸고 발표할 결심을 한 것이다.

진짜 하나님의 심판을 마음속에서부터 기원하는 바이다.

「1985년 8월 31일 – 1993년 9월30일 기술」


219

제7장

증언 – 우리들이 체험한 사실

 

유효민 – 통일교회의 경제적 기반에 공헌하고 배신 당했다.


▲ 유효민

문선명의 초대 비서역 이었던 박정화씨의 뒤를 이어 2대의 비서역 사촌간인 유효원, 유효영 형제와 함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간판을 걸고 발족에서부터 기반 만들기에 크게 공헌.

이화여자대학사건으로 문선명과 옥고 동참자이며, 36가정의 멤버, 1972년 탈회, 현재 서울거주, 회사사장, 현 72세

나는 통일교회가 정식으로 창립되기 전의 1954년 1월 4일에 부산에서 사촌인 유효원, 유효영과 함께 문선명의 추종자가 되었다.

박정화씨는 그 무렵 식구 (신자) 의 중심적 존재로서 문선명의 한 팔로서 활동하고 있었고 나 또한 대단히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는 문교주가 박정화씨를 밖으로 멀리 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 원인은 박정화씨는 너무나 문교주의 비밀을 지나치게 알고 있는 처지다. 만약 그가 수사당국에 모든 것을 폭로하게 되면 문선명 선생은 중죄로 될 것은 물론 그가 반대하면 문교주의 모든 행각이 다 탄로 나므로 이 사회에서 파렴치범으로 이 땅에 있을 곳이 없게 된다.

그러니까 박정화는 요주의 인물로서 교인 식구들이 접근치 못하도록 박정화의 비리에 대한 뉴앙스를 풍겼다. (전매청에 새끼 납품한 돈을 잘라 먹었다는등)

이 책 속에서 박씨를 「대구의 할머니들이 박정화는 대사단이다」라고 꿈의 계시를 받았다고 귀속말로 퍼뜨렸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박정화씨를 멀리 하기 위한 구실이며 뒤에서 문선명이 시킨 음모였다고 생각한다.

박씨는 문선명의 여자관계나 돈 출처 문제를 너무나도 깊이 알고 있기 때문에 소외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사진 추가


▲ 문선명, 유효영, 유효민, 김원필

이것은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상투적 수단이고 나의 경우도 그러했다.

내가 처음 성경원리를 들을 무렵 문선명을 위시해서 모인 식구들은 그날 먹을 것도 어려운 형편이어서 북한에 있을 때에 사진관을 했던 경험을 살려서 나는 푸로마이드를 제작 판매 하는 일을 제안했다.
이것이 적중해서 하루에 일만 장이나 매상이 있었다.

한장에 7원 전후로 도매한 것을 학교에 못가는 전쟁고아들이 담배나 라이타돌 등을 판자에 넣어 행상하는 때가 유행이 되었다. 10원씩에 팔고 매일 7만원정도씩이나 현금수입이 되었으므로 부엌사정은 단번에 해결하였다.

❖ 사진 추가


▲ 문선명과 유효민

박정화씨가 말한 바와 같이 남자 식구들은 작업을 분담해서 일을 하고 여자 식구들은 가위로 잘라서 정리하는 일에 몰두 하였다.

이 일은 2년정도 계속되었다고 생각한다.

공기총은 1961년부터 시작하여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서 일본에 수출하였으나 공장도 가격으로 1정에 1만원 (지금이라면 30만원) 에 15만정 이상이 팔렸다.

도합 15억원 이었으니까 통일교회에서는 꽤 큰 재원이 되었다.

산탄 공기총을 발명한 내가 「통일산업」의 사장이 되지 못했던 것은 소위 7.4 사건 (이화여대 14인 퇴학사건) 문교주와 옥고를 같이 치렀음으로 전과 기록으로 총포제조 허가조건에 하자가 있었다.

그래서 김인철씨가 사장 문선명의 6촌 문승룡이 공장장 그 아우가 생산부장이 되고 발명자인 나는 「조립부장」이라고 하는 세상에 유래없는 기묘한 직책을 받았다.

총의 제 2차특허권은 문교주 지시로 문선명의 명의로 양도 공증까지 하였다.

주요간부는 문선명 친척들 뿐 그들은 한사람이 한대의 차를 가지고 화려하게 타고 돌아다녔으나 나는 도보를 걸어다닐 수 밖에 없었다.

신앙보다 친척중심의 돈벌이 주의 라고 밖에 생각 할수 없는 입장이었다.

오래지 않아 그것은 더욱 노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나에게 「당신은 사진에 솜씨가 있으니까 사진관이나 안해보려나」농담 말이, 사진관이나 하고 있을 그런 기분이라면 나 혼자서도 된다.

나는 이렇게 강한 반발을 느꼈다.

요컨대 이것은 공기총사업도 궤도에 올라섰고 또 문교주의 여자관계도 지나치게 알게 되여 산탄공기총을 발명한 나도 더이상 필요없으니 그만두라고 하는 암시 아닌가!

1971년 어느날 나는 미국에서 막 귀국한 문선명을 만나서 여러가지 의논을 해 보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측근중에 어머니라고 호칭하는 최원복에게 연락을 하였더니 효민씨라면 시간을 정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와서 만나면 될 것입니다 라고 전화로 통화되어 가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여럿이 문교주 중심으로 모여 있는데 예전과 같이 끼여 들었다. 통금시간 12시가 다가 옴으로 한사람 두사람 다 집으로 돌아가고 단둘이 남았다.

그때 뒷문으로 훌쩍 나가 길래 화장실 가나보다 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렸지만 다시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온순한 나라 하더라도 이것만은 머리가 화끈거렸다.

전신이 막 뜨거워지며 열이 나고 떨려오는 것을 자신으로서도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나는 문선명이나 통일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온갖 노력과 봉사를 다해 옥고 동참상, 모범상, 14년공로상, 전도상등 교회에 상주하며 그림자처럼 어디든지 모셨지만 단 한가지라도 가르침에 상반된다든가 폐를 끼친 일은 없다.

다만 경제문제나 여자문제를 너무나도 지나치게 알고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문선명 쪽에서 나를 께름칙하게 여기고 배신한 것이다. 이것으로 나는 확실하게 인연을 끊고 탈회 하였다.

박정화씨의 체험과 너무나 꼴이 같아서 나는 그의 억울함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문선명과 통일교회의 본질을 이야기 할 사건에 관해서 나는 한가지 더 구체적 인 것을 증언 해두고 싶다.

그것은 1955년의 「7.4사건」문선명과 우리들 간부가 체포되었던 사건인 것이다.

7월 4일의 문선명에 이어서 6일에 나도 체포되었다.

체포이유는 「병역기피용의」우리들 북한에서 남으로 나온 피난민에게는 호적이 없었으므로 신분증명서를 만들어 받을 때에 「제 2국민병」으로서의 병역을 면하기 위해서 실제연령보다 5-6세 정도 올려 (연상으로) 신고 하였었다.

그것이 위반이라고 하는 것인데 문선명 자신도 박정화씨에게 지시해서 위조시키고 있었다.
우리들은 말을 맞추어서 위조에 협력하였다고 공술 하였으나 한편에서 문선명은 자기는 모르는 사이에 제자들이 맘대로 한것 이라고 책임회피하고 있었다.

하나님과 같이 모시는 입장에서 우리들 제자가 그의 연령을 함부로 변경 한다는 것은 천벌을 받을 일이다. 실제로는 모든 것을 문선명의 지시 에 따랐을 뿐인 것이었다.

그런데 이「병력기피」용의는 문선명 이하의 간부를 체포해서 취조하기 위한 구실이고 실은 「간음과 혼음」을 조사할 목적이었다. 수사관의 질문은 날이 갈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당신들은 부부사이는 어떠한가?

당신부인들과 동침은 언제했나?

한주일에 몇번씩이나 하는가?

한달에는 몇번이나 했나?

여자 신자들과는 몇번이나 했는가 병역기피와는 관계가 없는가…

남의 사생활 문제를 집요하게 심문하는 형사에게 큰소리로 대들고 수사관과 입씨름을 한일도 있었다.

그러나 수사관의 조사는 끈질겨서 책상 위에는 문선명과 여자식구들이 관계를 도표로 그린 그림을 놓아두고 섹스관계의 확인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시종일관 모른다. 없다고 버티었으나 내심으로는 그 정확함에 탄복하였다. 유치장안에 있는 우리들은 밖의 상황을 잘 몰랐으나 박정화씨들의 은폐공작의 결과인지 조사를 받은 여성들은 나는 문선명선생과 그런 짓을 한 일이 없고 나는 꿈에서 섹스는 하였다 등등으로 적당히 거짓말을 늘어 놓았다.

경찰은 거의 정확하게 문선명을 둘러싼 여성들의 성관도를 쥐고는 있었으나 본인의 친고나 남편으로부터의 고소가 없었고 이사건으로 문교주는 3개월만에 무죄선고로 풀려 났다.

그래서「7.4사건」은 단순한 병역기피문제가 아니라 통일교회의 안방 깊숙이 숨겨져 있는 섹스문제의 수사가 경찰의 노리는 바였는데 통일교회가 말하는「아무 것도 아닌 사실무근의 혐의」가 아니라 간신히 문교주와 혼음 사실이 천하에 공포되는 것을 면한 것이다.

참고로 이때 체포되었던 간부의 유치번호는 문선명 390번, 유효원 380번, 유효영 1709번, 나는 1175번 이었다.

김원필도 체포되어 그만이 1년 실형의 판결을 받고 수감 되었다. 하여간 통일교회와 결별하여 두고 두고 냉정하게 문선명이나 협회의 실정을 보니까, 여러가지 모순과 이념이 눈에 띈다.

인류역사의 대세는 분명히 민주주의의 흐름인데도 불구하고 통일교회의 체질은 신앙과 관계없이 문선명에게 아부하는 무리들만 주위에 둘러있는 독재체제이다.

이것은 역사의 흐름을 어거지로 되돌려서 문명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식구들이 몸을 깎아서 모은 거액의 돈은 문선명 한사람이 관리하고 있어서 어디에 얼마만큼 숨겨 두고 있는지, 현재의 최고 간부들도 모르고 있다.

비민주적인 횡포로서 독재일방의 역사를 거슬러간다. 또 통일교회의 인쇄물에는 어느 것이나 문선명선생이 1948년에 북한에서 체포된것은 공산당의 종교말살정책에 의해서 내무성에 구속 되었던 것이라고 판에 박은 듯이 거짓 말을 하고 있다.

나는 북쪽의 평안북도 선천에서 사진관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공산주의가 싫어서 1947년 8월 사진관도 각종기계도 그대로 두고 28세때 혼자서 월남했다.

그때까지 나는 선천북교회의 집사였다.

그런데 그때 기독교 탄압 같은 것은 없었다.

이것은 통일교회의 거짓의 역사이며 박정화씨가 자세히 쓴 바와 같다.

또 이책 가운데에 소개 되어 있는 것처럼 나자신도 말하자면 36가정의 한사람이지만, 그저 원리만 앞세웠을 뿐, 으시대고 폼만재지 아무런 섭리도 없는 일당 독재 체제이다.

그래도 그당시는 부부의 짝짓기를 신중히 생각해서 종로의 유명한 백운학 (관상가) 또 이명학 (사주가) 에게 찾아가 짝짓기 궁합을 맞춰 달라고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최근의 합동결혼식은 마치 마작판의 마작말패 섞듯이 남의 인권을 아무렇게나 적당히 처리해 버리는 것이다.

이래서야 참부모가 정해주는 이상상대 축복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성스러운 축복 행복한 꿈이 채 가시기전에 여기 저기서 이혼소동이 발생하고 있으니 과연 땅에서 재림주에게 축복 받은것이 하늘에서도 영원한 부부가 될 수 있을까? 그 책임은 또 누가 져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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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희 – 6마리아의 한 사람 이었다.


▲ 유신희

1954년부터 수년간 6마리아의 한사람. 문선명의 원리를 믿고 복귀를 받아, 5-6인의 남성과도 복귀의 실천을 했다.

지금 회고하면 「참으로 어리석었다.」고 후회하며,「문선명은 죽어 마땅한 남자다」라고 단언한다.

– 유신희씨는 부산 영도에서 남편인 신성묵씨와 다섯 아이들과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그때 근처에 살고 있던 사촌오빠 유효원의 권유로 문선명의 포교집회에 방을 빌려 주셨던 것이지요.
유: 그렇습니다. 1953년 12월 24일이었습니다. 처음에도 3일간만 쓰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만 결국 25일간이나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사촌오빠인 유효원, 효영형제, 그리고 유효민등 머리가 좋은 오빠들이 믿게 되므로 우리들 부부도 덩달아 믿게 됐어요.

– 문선명의 가르침을 정말 마음 속에서부터 믿으셨습니까?
유: 메시아의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세히는 이해하지 못하였었지만 오빠들이 전부 믿어 우리부부도 덩달아 믿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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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선명, 유신희 (맨 오른쪽에)

– 그래서 얼마후에 부부가 서울로 가셨군요? 아이들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유: 남편이 먼저 집을 나갔으므로 내가 가족회의 처럼 아이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아빠도 엄마도 재림주가 오셔서 대단히 바쁘게 되었다. 그래서 너희들의 뒷바라지를 할 수 없게 되었구나‥‥」
위 아이는 중학교 2학년생이었고 제일 끝의 막내딸은 아직 여섯살 이었습니다만 다섯 아이들이 이해해 주어서 서로 손잡고 고아원으로 보냈습니다.
정말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7년동안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 벌써 40년이나 지났습니다만 지금 아이들은?
유: 모두 기독교신자로서 그저 얌전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막내딸하고는 자주 충돌이 있습니다. 어머니 때문에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대단히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고 나를 책망 한답니다.

– 문선명과 복귀의 섹스를 한 여성으로서 이렇게 얼굴을 내놓고 인터뷰에 응해준 사람은 아마도 유신희씨가 처음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지금의 심정은?
유: 지금까지 침묵해 온것은 아이들에게 복귀의 사실이 알려지는것이 부끄럽고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벌써 나이가 나인만큼 참을 수 있습니다만은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한다면 사실은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기는 합니다만은 나같이 미혹에 빠진 사람들이 다시 있어서는 안되겠기에 죽기보다 어려운 이 사실을 밝혀야 겠다는 결심을 한 바입니다.

– 문선명과의 복귀에 관해서 자세히 이야기 해 주십시요?
유: 여자 식구 한사람한테 꾀임에 빠져서 밤늦게 캄캄한 문선명의 방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복귀를 받은 것입니다.
나의 경우는 극히 짧은 시간에 깜빡 할 사이에 끝났습니다. 사단의 피를 맑게 하기 위해서는 아직 두번 더 복귀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만은 나는 한번 만으로 끝냈습니다.

– 그것은 왜?

유: 문선명은 여러 여자와의 관계가 많아서 다음에는 언제 내 차례가 돌아 올런지도 몰랐고 또 좋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피난민 시절에 그것은 다름 아닌 범냇골 (지금은 성지로 명명, 통일교 교인들이 세계 각처에서 참배 하러옴) 당시 나는 근처에 살고 있는 터이여서 우리 아버님과 문선생은 매일 등산 산책을 하는 처지여서 어느날과 같이 나도 손을 잡고 아침 등산 하던중 문선명이 철부지 나를 움막으로 끌고 들어가 성폭행을 해 많은 출혈이 심했었다고 울면서 이야기 하여‥‥ 아무리 복귀라 하는 명분 이라지만 타락이니 복귀니 전혀 귀가 열리지 않은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그런 몹쓸 짓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나는 두번 복귀를 단념 했습니다.

– 문선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다음 유씨는 몇사람의 남성과 복귀를 하였지요.
유: 그때는 문선명 한테서 복귀를 받은 여성은 다른 남성을 복귀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가르쳐서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6인의 남성과 복귀 했습니다.

– 그래서 유씨는 6마리아의 한사람이었다고 박정화씨가 썼던데요.
유: 6마리아의 이야기는 듣기는 하였습니다만 누가 그런지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처지인지 나는 잘 몰랐습니다.
나 보다 훌륭한 여인들이 많이 있었고 문선명의 주위에는 항상 세 사람 정도가 바짝 붙어 있어서 나와는 격이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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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순* [ 이득삼 ], 강옥실* [ 강현실 ], 이순철* [ 김순철 ], 임영신* [ 박정숙 ]

– 그 세사람 이란 누구인가요?
유: 신정순*, 양윤신*, 이순철*씨 들입니다.
문선명이 유난히도 귀여워했고 후에 재산을 노리고 재벌과 결혼시킨 임영신* [ 박정숙 ]이 들어 온 것은 그 뒤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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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선명을 에워싼 마리아 (인처) 들 왼쪽 두번째부터 강옥실* [ 강현실 ], 임영신* [ 박정숙 ], 문선명, 옥상현* [ 옥세현 ], 신정순* [ 이득삼 ], 이순철* [ 김순철 ]


– 문선명은 차례 차례로 새 여성을 신변에 두고 시중을 들게 하였다고 하는데 같은 여성들 끼리 투닥거리는 일은 없었습니까?
유: 있었지요. 여자들 끼리니까 질투나 독점욕은 당연히 있습니다. 그래서 여자들 끼리 심한 싸움이 있을때에는 문선명이 그러한 여자를 때린 일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육체도 재산도 빼앗고 볼일이 끝난 여인은 계속 주변에서 내쫓아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내쫓긴 중의 한사람 입니다.

– 6마리아는 그때 그때의 정원으로 적당히 교체가 되어 결국은 재산이나 새로운 여인이 목표 이었던가요. 신구교체는 문선명의 독단으로 행해 졌습니까?
유: 우리들은 옆의 일도 몰랐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땐 그 주위에서 쫓겨난 여자만도 다섯사람이나 되어서 서로 이야기 한일도 있습니다. 그 정보교환으로 알았습니다만 실로 여러 여자들에게 피해를 주었던 것입니다.
처녀를 임신시켜서 아이를 낳게 하기도 하고 유부녀나 어머니와 딸들의 정조를 닥치는 대로 짓밟아서 가족이 풍비박산이 되기도 하고 유복했던 사람이 재산을 빼앗겨서 빈털털이가 되기도 하고.

– 여러가지 비극이 셀수 없을 정도로 속출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모두가 참말로 분개 하였었습니다.
유: 그렇다고 생각 합니다. 사람이 모여 있을 어느땐가 원리의 설명을 내 사촌오빠인 유효원이 열심히 땀을 흘려가면서 열심히 강의하고 있는데 문선명은 여성들과 히히덕 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 신자들에게는 유효원쪽이 존경을 받았고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 유효원 오빠는 수술을 받지 않았더라면 좀더 오래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의학부 출신답게 자기 병을 잘 알고 있어서 수술을 하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싫어 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선명은 병 따위는 진짜 메시아라면 고칠수 있을게다고 말할것을 두려워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러한 소리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유효원씨에게 무리하게 수술을 시켜서 죽게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기가 높은 효원씨에게 정상의 자리를 빼앗길 일도 없게 되어 문선명은 모름지기 안심 하였을 것입니다.

– 지금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 보고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유: 이제 생각 하는것은 「한 (恨)」그것인데 정말로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할말이 없습니다 나도 정말 바보 였습니다. 좀더 현명 하였더라면 그때에 선악의 구별이 섰을 터인데 어리석었기 때문에 이렇게 돼 버리고 만 것입니다.
지금의 나는 남편과도 이혼하고 아이들과도 떨어져서 혼자서 조용히 살고 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그 무렵 문선명의 신변에서 봉사하게 한 여성으로서 행복하게 된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문선명의 사기에 속아서 몸도 마음도, 재산도 바치고 걸레가 되어 당장 내일 생활에도 곤란을 겪고있는 사람들 뿐입니다.
그러한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 할때 우리들의 소원은 단 한가지.
문선명은 재림 메시아가 아니다.
죽어 마땅한 사나이, 하루라도 빨리 죽었으면 하는 인간이다 라고 하는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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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 – 섹스릴레이의 실천자


▲ 김덕진

평양 숭실전문학교 출신.
일본의 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일도 있고 음악의 외길을 걸음.
통일교회에서 애청중인 성가 19곡을 작곡, 문선명의 가르침대로, 섹스원리를 실천한 산증인.
현재 서울 거주.
경찰목사.
현 80세

나는 어느 한국육군의 고급 장교의 보신을 위한 모략으로 북의 스파이로 몰려서 유엔군 제1형무소에 무기징역수 (438번) 로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것이 사실무근인 것으로 증명되어 1954년 11월 27일에 무죄로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출소 할때 형무소에서 내가 노래를 가르쳐주고 있던 이석빈이란 남자가 자기는 재림주 문선명의 제자 이므로 출소해서 서울로 가거든 찾아서 반드시 이 편지를 전해 주십시오 라고 하며 한통의 편지를 맡겼다.

봉투겉에 「아버님전상서」뒷면에는 제자 이석빈 이라고 써 있었습니다.

누이동생 집에서 한동안 신세를 지고 있으면서 그럼 문선명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당시는 아직 통일교회 따위는 아무도 몰랐었다. 거처를 모르고서는 편지를 건네 줄 수가 없다.

그래서 친한 친구인 중부경찰서장에게 부하에게 명해서 빨리 찾아주게나 하고 부탁하였습니다.

보잘것 없는 작은 집을 찾아 가서 나는 이런 사람인데 형무소 안에서 이런 편지를 맡아 가지고 왔다고 말하니까 문선명을 만나게 해주더군요.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여성이 선생님 예배 시간 입니다 예배를 하셔야…

그리고 나에게도 함께 어떻습니까 하기에 같이 참가 하였지요. 좁은곳인데 풍금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처음에 노래한 찬송가란 것이 6천년 한이 맺힌 싸움의 동산 승리의 월계관을 찾아 구하여… 문선명이 작사 하였다고 하는 「복귀의 낙원」이라던가 이 세상을 에덴의 동산으로 복귀한다고 하는것 같은 가사였는데 웬일인지 그 노래를 일본의 군함 행진곡의 곡조로 노래하고 있는 거예요. 놀란 나는 끝난 뒤에 말해 주었습니다.

세계를 통일하는 살아있는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우리를 한국인의 원수인 일본국의 그것도 가장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군함 행진곡으로 자작의 찬송가를 부른다는것은 무슨 일이오? 이렇게 바보스러운 일이 어디에 있소?

어찌 당신이 재림메시아란 말이오? 여러가지 질문을 하였더니 문선명은 얼굴을 벌겋게 하고 있더니만 김선생 부탁이 있소. 내가 작사 한것이 또 다른것도 있으니… 라고 말하며 나에게 작곡을 부탁 하였습니다.

즉석에서 좋다고 대답하고 그후 약 2, 3년간에 나는 통일교회의 성가를 작곡하였습니다. 문선명 작사가 5곡, 유효원 작사가 1곡, 나의 작사가 13곡 모두 19곡이 나의 작곡인데 지금도 전 세계의 통일교회에서 열심히 불리우고 있습니다.

한국에 만든 성가책에는 「작사, 작곡, 김덕진을 지워 버렸고 다만 일본책에는 문선명 작사, 김덕진 작곡」이 5곡과, 「작사, 작곡 김덕진」 14곡 모두 19곡이 실려 있습니다.

잠깐 이야기는 조금 뒤로 돌아 갑니다만.

문선명을 방문했던 다음날 부터 아름다운 여성들이 매제의 집으로 나를 찾아 오게 되었습니다. 김선생님. 저희들의 교회로 다니시지요 하는 것 이었습니다. 작곡을 맡은것도 있고 해서 다니기 시작 하였더니 대우가 좋았다.

모두들 같이 푸로마이드 사진을 만들고 있었고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도 하고 있는 신자도 있던 시대였다. 그렇게 가난한 속에서 나에게 신사복을 여러벌 만들어 주어서 즐거워서 열심히 작곡을 한 셈이지요.

그러는 동안에 싫어도 문선명의 원리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6천년전 에덴의 동산에서 아직 고교생 정도의 나이로 미성숙했던 해와를 사단의 천사장 루시엘이 범하고 말았다.

이것이 세상에 악을 가져온 원죄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눈에는 눈을 이에는 이로 이번에는 사단을 속이고 세상의 여성들을 복귀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요컨대 문선명은 젊었을 시절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재림메시아 임으로 섹스로 파탄이 된 세상을 자기가 여성과 섹스 하는것으로 원래의 모양으로 복귀시켜 혈대교환 (피갈음) 을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겉으로 내세울수 없는 비밀의 원리임으로 대외적인 설교에서는 그 비유로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기전에 하나님에게 「될수 있으면 이잔을 피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원리에서는 하나님은 95%까지는 인간을 인도하여 주시지만 나머지 5%로는 인간자신이 생각해서 해결 하지 않으면 안된다. 예수에게도 하나님은 자기가 해결 하라고 말하였으므로 피의 눈물을 흘리는 수고끝에 깨달았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하 이 원리를 재빨리 나는 깨달은 것이지요. 인간의 몸을 쓴 하나님 (문선명) 의 섹스의 무리를 점점 넓혀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희망을 성취하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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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선명 뒤를 걷는 김덕진


원래가 불량해서 청춘주식회사 사장을 자칭하며 여색을 탐미하고 있던 나는 딱 짚히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죄가 아니고 좋은 일이라고 학생시절에 일본에서 다방의 여자들을 유혹해서 그날밤에 범한 경우 같은것은 죄의식을 느낄때도 있었는데…

그렇지만 통일교회의 복귀원리는 열심히 섹스에 전념하면 전념할수록 하나님의 섭리가 성취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문선명으로부터 복귀받은 유신희씨에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피」를 나누어 받기로 한것이다. 지금은 이미 할머니가 되어 늙었지만 당시의 유신희씨는 대단한 미인이었고 머리가 좋은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문선명이 가르쳐 준 원리를 진심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다른 남성 에게 넘겨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그래서 「김덕진선생 보세요 내가 복귀해 드리지요…」라고 말하며 그녀 쪽에서 다가 왔다. 물론 나도 승락했다. 그리하여 나는 유신희씨와 고맙게 섹스를 했습니다.

그녀는 남편이 있는 몸이었는데도 욕구불만도 있었던지 몰라도 불량하고 오입쟁이로 여러 여성과 경험해 온 나의 기교에 이미 흐물흐물하게 돼서 즐거워 했어요.

「지금까지 한중에 제일 좋았어요 문선명선생 보다 몇 십배나 더 좋았어요」라고 말하면서요.

복귀원리의 실천 이라고는 하지만 이것은 이미 보통 남녀의 섹스 그대로여서 여자가 위라던가 아래라던가는 관계 없어요.

그후에도 다른 여성과 좋을대로 했다. 원리의 책을 쓴 유효원씨들 처럼 온순하고 꼼꼼한 사람들은 문선명이 자기가 범해서 복귀시킨 누구 누구와 자라고 지시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면 바보들이에요. 나는 달라요. 95%는 하나님의 가르침이지만 나머지 5%는 자기가 찾아야 합니다.

문선명과 섹스를 한 여인은 다른 남자와 혈대교환 (血代交換) 을 해야만 한다.

남자는 제2의 여자와 하고 여자는 제3의 남자와 하며 그래서 제4의 여자에게로 릴레이식으로 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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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쯤 6마리아 뒤에 서있는 김덕진


이렇게해서 넓혀 가는것이 원리 아닙니까?

그렇게 함으로서 온세계의 남녀가 하나님의 혈통으로 사단에게 빼앗긴 전인류, 즉 사단혈통의 세계를 하나님편으로 복귀해야 사단의 발판을 무너뜨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문선명이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나는 순풍에 돛단배처럼 유효원 협회장이 답답한 고지식쟁이를 비웃으면서 하나님의 뜻도 이루고 성적만족도 느끼며 동분서주 하면서 쾌락의 나날을 보냈지요.

서울은 물론 대구에서도 부산에서도 깨끗하고 예쁜이들만을 엄선해서 15-6인과 관계했을 거에요.

서울에서 내가 5인의 여성과 섹스 한짓이 일주일 후에는 자그만치 72인의 그룹이 되었다더군요.

이것도 훌륭한 원리실천의 성과이지요.

그런데 문선명 이나 유효원씨가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 문선생 한테서 받는 복귀의 섹스는 소생, 장성, 완성의 원리로 3회 섹스 하지 않으면 안된다.

너는 아직 1회 밖에 하지 않은 유신희와 했으니까 무효다. 몇백사람에게 둘레를 넓혀도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성질이 났어요.

이 새끼 그런 거짓말이 어디 있어! 라고 사단이 해와를 범했을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단을 이기는데는 조건만 맞으면 되는게 아닌가.

그런데 문선명과 3회하지 않으면, 여성은 복귀가 안된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 개새끼야 라고 노해서 싸움을 했어요.

그런일이 있은후에 나는 대구로 가서 영신중고등학교의 음악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문선명의 수제자 였던 박정화씨가 대구로 찾아온것 입니다.

문선명이 대구의 미인 신도 우옥례와 나를 정식으로 결혼 시켜서 무마 하라고 지시 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여성과 문은 섹스를 한 사이 입니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어느 곳에서 이석빈 (형무소에서 같이 복역함) 과 공교롭게 만났습니다. 형무소에서 나에게 문선명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부탁했던 그사람입니다.

이석빈은 출옥한 후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지금은 대구시내의 작은교회의 전도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고 이 기회에 당신도 자기와 같이 일반여성과 재혼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는 것이 어떠 하겠는가?

박정화씨도 협조해 주었으므로 이석빈이 근무하는 교회의 장로의 장녀 강혜환 집사와 나는 재혼 하였습니다.

가난했던 내가 결혼식에서 입을 옷이 없어서 박정화씨 한테서 빌린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오늘까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로 나는 대단히 행복하고 75세때에 귀여운 손자까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재혼해서 2년째 되던해에 우리들 부부는 대구에서 서울로 이사해서 나는 성동고등학교의 음악교사가 되었고 밤에는 신학교의 생도로서 공부 하였습니다.

마침 그무렵 친구인 김경래씨 (현재는 한국기독교 총회 사무국장) 가 신문기자로서 「통일교회의 정체」라고 하는 기사를 크게 쓴 것입니다.

그 신문기사를 읽었다던가 생각지도 않았던 부인이 나를 찾아 왔는데 정말 깜짝 놀랬습니다.

그 부인이란 문선명의 본처였던 최선길씨 였습니다. 최여사는 문선명의 인격이나 통일교회의 성의 난맥을 알고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이혼하고 가련하게도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때 최여사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선생님 이 기회에 문선명이란 남자가 재림주가 아니라는것은 물론 사람도 아닌 무서운 독사 같은 자식 이라는 것을 온 세계에 알립시다.

문선명은 호색가로서 성욕이 장성해 내가 문과 결혼해서 자식 (문성진) 을 낳기 까지 부부관계를 매일밤 10회이상 해도 기운이 펄펄났었다.

이것은 그가 뱀처럼 이상하게 정력이 강한 때문입니다.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였다.
통일교회는 종교가 아닙니다.
음란한 섹스교단일 뿐입니다.

문선명과 싸움을 하고서 대구로 옮길때 까지 나는 박정화씨가 있었던 광산으로 쫓겨 간 일이 있었다. 1년반 정도 있다가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 부터 친구들이 빌려준 방에서 남자 6인 여자 3인이 즐겁게 「복귀게임」을 한일이 있습니다. 통일교회의 원리를 실천 한것 뿐이지만 거기에는 종교다운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깨달았습니다.

문선명의 섹스원리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그는 이 원리를 내세워서 어머니와 그의 딸 형제를 범하고 끝의 딸에게는 아이까지도 낳게 하고 있습니다. 극악 무도한 행위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 겠습니까?

이번에야말로 문선명도 통일교회도 하나님의 제재를 받을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많은 희생자 들에게 그 죄를 보상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 자신도 불량청년시대에 죄를 짓고 통일교회에 들어 와서는 원리를 미끼로 제멋대로 음행을 자행 한 죄는 몇천만가지 엄벌을 받는다 해도 할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부터 통회하며 열심히 경찰목사로서의 사명과 고아들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 하나님의 선한 사업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비디오



野錄 統一敎會史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사) – 1
.    박 정 화 외2인 지음 (前 통일교창립위원)

문선명의 정체! (1) 김명희

문선명의 정체! (사진으로 보는 문선명의 정체)

홍난숙은 1998년에 미국 CBS TV 60분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하였다.

박사무엘 비디오의 대본

1955년 이화여대에서 일어난 문선명 섹스 스캔들 

일본인 멤버 K 씨는 자신이 싫어하는 한국인 남자와 강제로 결혼했다.

일본인 멤버 U 씨는 그녀를 폭력을 휘두르는 한국인 남자와 결혼했다.

통일교의 실상과 그 허상
– 종합적 자료편 –
탁명환 문학석사 (저자)

진정서 “25년동안 속았읍니다” 송 부 웅

김백문의 ‘섹스 타락론’, 무엇을 말하나

정득은 丁得恩 / 鄭得恩

原理原本 원리원본 1952년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 통일교
1996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2020년 하늘부모님 성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