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선명의 정체! (1)

문선명의 정체! (1)

김명희 저

한 때 열렬한 통일교도였고 문선며으이 비밀 지령을 수행하여 오던 김명희가 밝히는 문선명의 가공할 실체!
그는 세계황제를 꿈꾸는 미치광이다. 히틀러 · 김일성을 능가하는 흉계로 세계 곳곳에 암세포처럼 번져가는 문선명의 세력을 보라! 그는 곧 그가 가진 전역량을 동원하여 이 나라의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총 공세를 펼칠 것이다.

선교신학연구회


종교적 과대망상가
문선명의 말

• 공자 · 석가 · 예수도 내 부하다. (1975. 3. 15)

• 앞으로 내 말이 법률로 통용될 때가 올 것이다. (1971. 11. 26)

• 세계를 하나의 통치자 앞에 굴복시켜 놓아야 한다. (1976. 3. 2.)

• 필요한 재력만 있으면 기성교회는 무너뜨릴 수 있다. (1969. 12. 3)

• 통일교회는 발전해 가지고 세계를 정복할 것이다. (1976. 2. 22)

• 앞으로 통일교를 믿든가, 도망가든가, 죽든가 셋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를 내가 만들고 있다. (1972. 6. 25)

• 이러한 안팎의 모든 활동은 치밀하게 계획되어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이럴줄 몰랐다” 할 날이 올 것이다. (1972. 9. 26)

• 세상의 여자들은 모두 내게 속해 있다. (1972. 9. 25)

• 내가 여자들의 사랑을 받는 데 있어서 최고기록을 만들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1977. 5. 3)


저자 김명희에 대해
이 책을 쓴 김명희는 1963년 1월 26일부터 1978년 3월까지 15여년간 문선명에게 헌신했던 사람으로서 한때는 수택리땅사건, 일화제약의 탈세사건 같은 문선명의 비밀 특명사항을 전권 위임받아 처리할 만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문선명의 비밀 사건들을 수습, 처리해 나가는 과정에서 문선명과 그 교단의 비리와 부정, 그리고 사기성과 엄청난 흉계를 알게 되었고 교단과 사회의 장래를 위해 이를 시정해 야 한다는 사명감 아래 안팎으로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77년 8월 12일 통일교회 핵심간부 37명을 모아 놓고 시정책을 제시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통고한 기일 내에 반성과 시정의 징후가 보이지 않자 결별을 선언하고 나와 사회 각계에 문선명의 사기성과 위험성을 폭로하고 알리는데 주력해 왔다.
저자의 이러한 반 문선명활동이 거세어지자 다급해진 문선명교단은 과거 저자가 사재 (私財) 를 아까와 하지 않고 교단문제를 앞장서 해결해 나갈 때 들인 개인 사비를 충당 해주기 위해 교단측에서 저자에게 수교해준 금액을 트집잡고 거꾸로 뒤집어 씌워 공갈협박범으로 형을 살게 하였으며 10억을 줄 테니 반 문선명운동을 중지해 달라거나 미국으로 이민을 시켜주겠다는 등의 회유책을 펼쳤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출감 후 7여년간 문선명에 관한 자료를 면밀히 수집 집필하여 이 책을 내게 되었다.


문선명의 흉계
문선명, 그는 “세계황제” 가 될 계획 아래 통일교를 설립하고 하나님 · 역사 · 세계평화 · 반공 · 통일 등 거절키 어려운 명분으로 사람들과 재물을 끌어 모은 후, 이를 터전으로 국제 승공연합 · 평화교수협의회 · 전국대학생원리연구회 · 남북통일전국학생총 · 남북통일국민사상운동 대학생자원봉사대 등 단체와 전 세계각국에 150여개에 이르는 기업체 각종 기관 · 신문사 등을 거느리고 결정적 시기에 이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여 한국 · 일본 · 미국의 정치권력을 손아귀에 넣어 전 세계를 지배할 흉계를 추진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내 말이 법률이 되어 움직일 때가 온다” 고 큰 소리 치는가 하면 명절날 레이건대통령 · 일본천황, 〇〇 대통령 등 각국의 우두머리와 공자 · 예수 · 석가 · 마호메트 등 역사상의 성현을 총 망라한 인물들의 대역을 간부들에게 맡겨 놓고 무릎을 꿇려 절을 받는 의식을 행하는 등 처음부터 “세계정복과 지배” 가 문선명의 목적임이 여러 자료에서 드러난다. 무술인 수 천명을 포섭하여 대기시켜 놓고 “통일교를 믿든가 도망가든가 죽든가 셋 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를 내가 만들고 있다” 통일교를 반대하다가 대낮에 나가 넘어지는 때가 올 것이다” 라고 호언하는 그의 잔인한 흉계를 제때에 저지하지 못할 때 전 세계는 다시 한번 히틀러 치하와 같은 암흑기를 피해 가기 어려울 것이다.


머리말

저 큰 도둑을 잡아라!

가짜가 흔한 세상이다. 참기름에서 고추가루에 이르기까지, 이민을 알선한다는 해외 여 행사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고관의 친척 임을 사칭 하는 ‘사기꾼’ 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생활과 관계된 모든 물질, 정신활 동에 관련된 가짜들이 하도 많아서 마치 살얼음을 밟고 가듯 살지 않으 면 자칫 손해를 보기 쉬운 세상이다.

그런데 참기름이나 고추가루에 속았다면 밥맛이나 음식맛을 버리는 데 그치지만 그 보다 범위가 넓은 사회활동에 관한 가짜에게 당했을 때는 그 손해가 훨씬 더 크다. 예를들어 이민을 시켜준다는 가짜 여행 사에 속았다면 집을 팔아 이민 간다고 기다리다가 셋방으로 들어 앉는 일을 겪게 되고 일확천금을 바라 고관친척에게 거액을 주었다면 빚더 미에 올라 앉아 평생을 고생하는 일이 생긴다.

그러나 가짜는 참기름이나 고추가루, 여행사와 돈 만을 탐내는 사기 꾼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생활에 보다 더 근본적인 연관을 가지며 대다 수 대중의 사회적, 정신적 운명을 결정짓는 정치, 이념, 사상, 종교 분야 에도 야바우꾼들이 끼어서 수천, 수만 아니 수십, 수백만 인간의 삶을 망가뜨리는 입들이 적지 않다. 이 분야의 가짜들이란, 모든 사람이 바라 는 ‘평화’, ‘천국’, ‘어떤 민족의 위대한 미래’, ‘평등하게 함께 잘 사는 세계’, ‘세계 어떤 지역의 공동번영’을 대중에게 약속하고 실제에 있어 서는 그와 전혀 반대의 일을 벌여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신봉 자들을 노예화하여 미운 사람늘을 공격하게 하는 일에 서슴이 없는, ‘사람몰이꾼’ 들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선전과 선동으로 예외 없이 ‘위대한 인물’, ‘계시받은 사람’, ‘영웅’, ‘큰 스승’, ‘재림주’ 등으로 보이게 마련이다. 이들에게 속으면 수백, 천, 수십, 수백만의 생명이 상한다.

히틀러를 보라, 소련에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킨 레닌과 그 추종자들을 보라, 그리고 김일성의 행적과 그의 통치방식을 보라. 1978년 11월 21일 남미 가이 아나의 죠지 타운에 서 신도 923명 과 함께 집 단 자살을 한 인민사원’ 의 교주, 짐 죤즈를 보라, 그리고 멀리 갈 것도 없이 1920년대 우 리나라에서 6, 70만의 신도를 거느리고 ‘천자 (天子)’ 행세를 하고 ‘황제 즉위식’ (皇帝 則位式) 까지 올린 차전자, 차경석 (車京錫) 의 행적을 보라. 또 1930년대의 백백교 (白白敎) 의 교주 전용해 (全竜海), 60년대의 용화 교 (畜華敎) 교주 서백일 (徐白一) 의 행적을 보라. 이들이 모두 가짜 영 웅 · 스승 · 지도자 · 수령 · 천자 · 하나님들이었으며, 합해서 수 전만 인 간들의 생활을 망가뜨리고 짓밟은 자들이었다.

나는 이제 이 서문과 이어지는 이 책에서 우리나라 출신이며 지금 현재에도 세계 곳곳에서 움직임을 쉬지 않고 있는 거짓 재림주 · 가짜 종교지도자 · 가짜 스승 하나의 탈을 벗기려 한다.

그 이름은 문선명, 그가 내 건 명분도 ‘세계구원’ 이며 ‘계시에 의해서 명령을 받았고’, ‘진리를 밝혀냈으며’, 선전과 쑈가 하도 근사해서 혹시 정말이 아닌가 의심이 들 만큼 연극에 출중한 인물이다. 그러나 가짜임 이 분명 하다. 그리고 가짜임 을 애 써 밝혀 야 하는 까닭이 바로 그 “연극이 너무 훌륭해서 모든 사람이 그에게 쏠리는 현상” 에 있다. 흥행 (興行) 을 잘해서, 노벨상 수상자들, 세계 각국의 저명한 교수들, 종교지도자들, 국 회의원, 우리나라 교수들, 대학생들, 가끔씩은 미국 대통령, 일본의 수상 들이 화려하게 그 연극의 출연진으로 등장해서 지 상최대의 스펙타클을 보여주며 눈 속임을 하기 때문이다.

사상과 종교분야에서의 가짜를 판별하는 방법도 어려울 것이 없다. 참기름이나 고추가루에서와 같이, 겉 보임과 내용이 다르면 가짜인 것 이다. 내세우고 선전하는 말들과 실제로 하는 짓이 다르면 틀림 없는 가짜요 아무리 거창해 보여도 그 모든 활동이 사기극인 것이다.

앞에 말한 1920년대 우리나라 정읍에서 일어난 차천자, 차경석의 경우, 2만명이 모여 지리산 기슭에서 행한 ‘황제즉위식’ 이 하도 거창해서 잡 으러 간 경찰의 우두머리가 제자가 되겠다고 자청해 굴복했다는 얘기가 전해 진다. 또한 김 일성은 아프리카 여러나라, 중동의 레바논, 동부 독일 같은 데에 김일성도서관 · 김일성거리, 김일성야영장, 김일성 주체사상 연구소를 차려 놓고 ‘만민의 태양’, ‘가장 위대한 영웅’ 행세를 한다.

또 히틀러는 어떠했나 ? 그의 쏘가 그야말로 스펙타클이 아니었나 ? 가장 요란한 구호와 끔찍히도 선동적인 깃발과 신문, 방송, 교육제도, 대 학교수, 문학인, 예술인들을 총동원한 선전과 수 백만의 인간을 잡아다 죽이고 탱크와 비행 기, 로케트 포탄을 동원하여 전 유럽국가들을 침략한 그의 미친짓이야말로 정말로 볼만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가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정치, 군사 연극에서 그렇게 능했다고 해서 진짜 영웅, 진짜 구세주였는가 ? 그렇게 믿은 사람들이 수 천만이 었지만 말 이다. 히틀러는 세계와 그의 조국 독일에 대해서 유익한 인물이었나, 아니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악마였나?

사람 눈에는 가짜가 진짜처럼 보이고 진짜는 어리석고 힘이 없어 보 이게 마련이다. 특히 신문과 방송, 엄청난 돈이 드는 대규모 군중대회, 호화판 세미나, 리셉션, 유료광고 등에 의해 年명해진 영웅이나 성인 (聖人), 구세주는 일백프로 가짜이 기 쉽다.

돈과 이권을 바탕으로 한 음모와 기획, 연출없이 거창한 군중집회와 유료광고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광고와 홍보 선전물이란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게 보이게 하려는 조작극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뉴욕 타 임즈의 광고대로 라면 김 일성은 정말로 인류의 태양이며 김 정일이 그 뒤를 잇는 또 하나의 영웅이다. (1985년 10월 8일자 뉴욕타임즈 13면의 3만3천 달라짜리 전면광고)

그리고 현재 세력이 크고 힘이 세기로는 미국의 마피아단과 남미 콜 롬비아에 근거를 둔 마약 밀매조직을 능가할 것이 많지 않다. 지상에서 불가능한 것이 없는 저들이다. 돈 많고 못할 짓이 없을 만큼 세계적 기 반이 크다고 해서 그들을 ‘위대한 인물들’ 이라 봐 줄수는 없다.

세계적 기반을 구축하고 가지가지 거창한 쏘를 하는 것은 돈과 여자 들과 명예욕을 이용하는 수법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무슨 직함을 가 졌건 세상 사람들 대부분에게,잘 먹고 입고 여자들과 즐기며 자기 이 름내는 것 이상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자, 그러면 문 선명의 그토록 화려하고 거 창한 겉보임과 속 안의 진짜 내용은 어떠한가? 독자들은 앞으로 이 책을 읽어가면서 보시게 될 것 이다. 나의 결론은, 그가 히틀러, 김일성, 차경석, 전용해, 서백일들의 경 우에서와 같이, ‘가짜’, ‘속이는 사람’ 이라는 것이다.

와세다대학을 졸업했다는 그의 학력도, 계시를 받았다는 주장도, 순 수하게 승공활동을 하고 교수들의 학문을 지원한다는 일도, 한국과 세계를 ‘위해’ 일 한다는 것도 또한 무엇 보다 ‘종교활동’ 을 한다는 일도 모두 전부 가짜요 거짓말이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러나 아직 이 머리말을 읽는 단계에서 결론을 보류하고 이 책을 끝까지 읽 어 가시겠다면 그것은 독자들의 자유이다.

다만 한 가지 이 책의 다른 부분에 쓰지 않은 그의 ‘계시’ 에 관한 일화 하나를 소개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1972년 2월 5일, 문 선명은 미국 뉴욕에서 대중강연을 한 후 그 곳의 한 텔레비젼 방송국의 ‘알 캡 쑈우’ 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그가 16 세에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계시에 대해 방송국 기자와 대담을 가 졌다. 방송국 기자가 그 당시 예수님이 어떤 언어로 말씀하셨냐고 묻자, 문 선명은 ‘히브리어 악센트’ 가 섞인 한국어 였다고 자신만만하게 대 답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한국어’ 로 말 했다는 것도 우습거니와 ‘히브리어 악센트’ 가 섞였다는 것도 배꼽을 잡을 만한 일이다. 예수님이 히브리어 를 사용하시 지 않았기 때문이 다. 기 원 전 그 당시 유대 땅과 중동지 방의 언어는 ‘아람 어’ 였던 것이다.* 이 정도는 신학교 일학년생 정도면 누 구나가 아는 상식 임에도 우리의 재림주,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 받았으며 예수님의 ‘상관 (上官)’ 이고 (“예수도 나의 부하다” —문선명의 말) 수시로 만난다고 주장하는 문 선명만은 틀리게 알았으며 무식한 거짓말 을 늘어놓으면서도 태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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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람 어

셈족의 언어, 중앙 아시아의 북부와 중앙부, 북서부에서 사용되었고 기원전 6, 7세기부터 근동 (近東) 지방의 아카디언 말과 섞여 쓰이다가 뒤에 페르시아제국의 공용어가 되었다. 유대 땅에서도 점차로 히브리어 대신에 아람어가 쓰이게 되었다. 구약의 다니엘서와 에즈라서 가 아람어로 기록되었으며 바빌로니아와 예루살렘 탈무드도 아람어 이다. 예수님 과 그 제 자들도 아람어로 말을 했다. 아람어 가 가장 활발히 사용된 시기는 기원전 300년에서 서기 650년까지다(대영백과사전 마이크 로패디아 1권 476페지).

* Aramaic language, Semitic language of the Northern Central or Northwestern group; in the 7th and 6th centuries BC, it gradually supplanted Akkadian as the lingua franca of the Near East and later became the official language of the Persian Empire. Aramaic replaced Hebrew as the language of the Jews; portions of the Old Testament books of Daniel and Ezra are written in Aramaic, as are the Babylonian and Jerusalem Talmuds. Jesus and the Apostles also spoke this language. Its period of greatest influence extended from c.300 BC until c.AD 650; (Encyclopedia Britanica, Micropedia Vol.1, p.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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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문 선명은 합동결혼식의 후보자들 수백, 수 천쌍의 궁합을 ‘계시’ 에 의해, 정확히 본다고 해 놓고서는 뒤로,윤 청정심, 位981년에 살해당한 원효로의 윤경화 보살) 종로의 백모 같은 점술인에게 짝 짓 기를 의뢰했다든지 영등포 모 점쟁이에게 자신의 후계자로 누가 좋으냐 하는 것까지 물었다든지 하는 에피소드가 많으나 여기서는 이 정도로 줄인다. 그런 것이 문 선명의 ‘계시’ 인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모든 판단의 근거로 사용한 자료는 문 선명 자신의 말과 문선명교단에서 발행한 각종 문서와 간행물이 그 중심이다. 그리고 나 자신이 16년간의 교단내 생활에서 보고 들은 일과 문선명 측근들의 증언을 방증의 자료로 삼았다. 저자는 지난 7년간 문 선명 에 관하여 거의 2미터 높이에 달하는 가지가지 자료와 문서를 수집하여 그 일부를 이 번에 공개하는 것이다. 그 핵심내용들을 법원 재판부에 이미 제출해 놓 았거니와 앞으로 모든 기회, 모든 길을 동원해 문 선명의 세계적, 세기적 사기극을 벗기는 데 주력할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을 쓰는 데 저자가 중심줄기 만을 이끌어 가고 대부분 외부기사를 인용해서 증거하려 한 것은 저자의 주관적 관점보다는 ‘객 관성’ 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국제 종교문제연구소장이며 월간 현대종교지 발행인인 탁 명환 선생에게 깊 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의 신흥종교의 얼굴을 드러내는 데에, 특히 문 선명의 탈을 벗겨내는 데에 있어서 탁 명환 소장은 없어선 안 될 귀중한 자료들을 지난 십 몇 년간 일반에게 공개해 왔고 그의 노력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도와 왔다고 믿는다. 특히 이 책을 만드는 데 있어서 그가 작성한 기사들이 가장 중요한 증거 자료로 채택되었음을 독자들이 보시게 될 것이다. 이러한 방향으로의 노력을 지원하고 격려 하는 일이 더욱 강력해 져야 이 땅의 종교적 혼란이 가라앉아 참다운 종교적 심성이 계발되기 시작하리라고 믿는다.

다시 한번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간단한 기준을 되풀이 하고 머리 말을 마치려 한다. 겉으로 선전하고 내 세우는 이론과 진짜 속 셈이 다른 것이 가짜인 것이다. 세계과학자대회, 무슨 교수협의회, 무슨 종교협회,신문사,잡지사, 영화사, 기업체들을수도 없이 벌려 놓고 ‘내말이 법률이 되어 통용되는 때가 온다. 세계를 정복하겠다’ 하면 가짜인 것이다. ‘네 피를 깨끗하게 해 준다’ 하면서 수백, 수천의 여자들과 섹스 행각을 벌 이고 ‘여자들의 사랑을 받는 데 있어서 역사상 최고 기록을 만들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 고 말하는 구세주면 가짜인 것이다.

그가 히틀러, 김일성, 차경석, 전용해, 서백 일 등이 한 짓들을 따라 하는 자에 불과하며 그 가짜의 무리, 도둑들의 숫법을 흉내내기 때문이다. 그 모든 기관, 단체들은 그의 ‘그물 코’ 요 ‘낚시바늘’ 인 것이다.

옛말에도 가장 큰 도둑이 성인 (聖人) 흉내를 낸다고 했고 성경에도 “다른 예수를 전파하는 이단” (고린도 후서 11장), “자기를 신격화하는 자” (데 살로니 가 후서 2, 4장), “은혜를 색욕거 리로 바꾸는자” (유다서 1, 4장) 에 대한 경계의 말이 나온다.

그가 비록 1,100여개의 성경구절을 인용하며 기독교의 탈을 쓰고 나 왔으나 더 이상의 성구 (聖句) 나 신학이론을 들어 거짓임을 증명할 필 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하는 짓을 보고 가짜를 가짜, 도둑을 도둑이라 하면 그만이지 성 현들의 말씀이 동원되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리고 말과 이론에서는 언제나 진짜가 가짜를 못 당하는 법이다. 진짜는 마음씨와 행동에서만 착할 뿐이지 말과 이론에서는 서툴고 어리석어 보이는게 철칙이다. 예수님, 간디, 마더 테레사(인도에서 빈민구제 사업 에 헌신하는 수녀, 노벨상 수상), 마틴 루터 킹 목사 등의 조용하고 어 리석어 뵈는 행적과 히틀러, 레닌, 김 일성의 행적을 비교해 보라.

빈틈없는 이론서와 자신들의 대형 초상화부터 만드는 것이 그들 활동의 시작이 아니었던가 ? 문 선명이 움직이는 모양이 어느 그룹에 속하는지 독자들 자신이 판단해 나가시기 바란다.

끝으로 가짜들의 가장 중요한 특징 하나를 더 소개한다. 자신들의 탈 이 벗겨져 정체가 숨김 없이 드러나려 할 때 어떻게 하는가 하는 점이다. 자신들의 가면을 벗기고 빛을 비추어 제몰골을 폭로하는 대상을 죽인다. 문 선명은 이미 “나를 반대하려면 목숨을 내 놓고 하라” 고 공개적인 협박을 하기도 했고 ‘무술인’ 수 천명을 포섭하여 대기시켜 놓고 있다. 이 점에 있어어도 문 선명은 히틀러, 김 일성, 차 경석, 전 용해, 서 백 일을 닮고 있는 것이다. 반대자를 죽이고 협박 공갈하는 일 이상으로 자신이가짜라는 증거가 또 어디 있겠는가? 가짜가 아니고 숨겨야 할 것이 없는 집단에서 협박, 공갈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 책과 관련하여 저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문 선명은 스스로가 가짜임을 증명하는 가장 결정적인 증거를 만천하에 제시하는 셈이 될 것이다. 그 리고 그 일은 거대한 문 선명제국이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게 하는 시발 점이 될 것이다.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문선명교단의 최근 움직 임 하나를 더 소개한다.

드디어 ‘금강산 댐’ 보다도 더 무서운 문선명의 이 나라에 대한 정치 공세, 국회원들과 대중들을 돈으로 ‘사려는’, 거대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지난 1월 문선명은 전국의 교회장들에게, 금년의 선거에서 ‘당선 이 가능한’ 국회의원 후보자들을 조사하고 이들에게 5천만원에서 3억 원씩을 주겠다고 제의하라고 지시하여 지금 국회의원 비사들을 접촉하고 있다고 한다. 이 나라 국회의 원들 대다수를 제 하수인으로 만들려는 문 선명의 흉계가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전국의 문선명교 단은 ‘남녀노소 온천, 호텔 관광 알선하기 사업’ 에 바쁘다고 한다. 이 역시 문선명의 지시로, 3천원만 내면 누구든지 대형 뼈스에 태워 호텔, 온천등 관광을 시키며 이 과정에서 팀 당 3시간의 ‘문선명 선전 강연’ 을 반드시 실시한다고 한다. 국회의원, 지방의회, 대통령등의 선거에서 ‘표’ 를 가진 유권자들을 문선명이 먼저 ‘대접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선명은 누구인가? 그가 김일성, 히틀러와 다른가, 같은가? 이제 우리가 이북의 금강산 댐에 대응한 평화의 댐을 건설하는 것과 같이, 문선명에 대응한 ‘대책’ 을 세우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문선명의 손 안에 들어갈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통일교를 믿든가, 죽든가, 도망가든가 셋중 하 나를 택해야 할 때를 만들고 있다”고 호언 장담하는 악마인 것이다. 저 큰 도둑을 잡아라!.

1987년 3월 1일 김 명희


차례
머리말 저 큰 도둑을 잡아라  ……………………………………………… 3
1. 문선명의 정체  ………………………………………………………… 17
2. 문선명의 목표  ………………………………………………………… 32
깃발  ……………………………………………………………………… 35
나의 맹세  ………………………………………………………………… 36
경배 / 참부모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38
행사일  …………………………………………………………………… 39
행사일표 (자료 1) ………………………………………………………… 40
사탄굴복 및 경배의식 / 경례식의 기괴한 의식 …………………………… 43
3. 문선명의 세력 / 단체기관과 기업체 / 종교단체 ………………………… 45
사회단체 ………………………………………………………………… 46
문화사업단체 …………………………………………………………… 47
교육기관 ………………………………………………………………… 48
예술단체 ………………………………………………………………… 49
언론기관 ………………………………………………………………… 50
출판사 / 인쇄소 ………………………………………………………… 52
기업체 …………………………………………………………………… 53
부동산 / 건물 …………………………………………………………… 56
통일교 …………………………………………………………………… 58
통일교 협회 정기수련회 (자료 2) ………………………………………… 66
통일교 협회 각종교육약사 (자료 3) ……………………………………… 69
순회전도단 활동표 (자료 4) ……………………………………………… 77
문선명 미국 70개 도시 강연일정표 (자료 5) ……………………………… 79
통일교가 침투한 나라들 (자료 6) ………………………………………… 82
세계 성지일람표 (자료 7) ………………………………………………… 84
국제승공연합 …………………………………………………………… 88
국제승공연합 교육 및 각종 집회 약사 (자료 8) …………………………… 89
초청인사 총괄내역 (자료 9) ……………………………………………… 95
승공연합회 전국조직 말썽 ……………………………………………… 97
초교파 기독교 협의회 …………………………………………………… 99
문선명의 말 ……………………………………………………………… 102
초교파운동 연혁 ………………………………………………………… 103
기성교회 장로 · 집사들 제주도 여행 ……………………………………… 107
12억원에 농어촌교회 1천개 매입계획 …………………………………… 108
문교주 초청 만찬회 / 기성교회 평신도 초청만찬회 ………………………… 109
나는 부끄러운 목사입니다 ………………………………………………… 110
통일교 수법에 치가 떨립니다 .…………………………………………… 116
세계평화교수협의회 ……………………………………………………… 120
세계평화교수협의회 활동 ………………………………………………… 123
세계평화협의회 관련교수 명단 (자료 10) …………………………………… 125
교수 99명 통일교활동 지지성명서 (자료 11) ………………………………… 140
문선명 선생에 대해 – 사랑과 눈물이 많으신 분 – …………………………… 144
김일성에 대해 – 위대하신 분 – ……………………………………………… 144
야마모도원수의 국장일 / 우리들은 대일본국민이다 …………………………… 145
국제 크리스챤교수협의회 …………………………………………………… 147
국제크리스챤교수협의회 창설 ………………………………………………… 148
교수초청 세미나 149 / 교수원리 세미나 연혁 (자료 12) ……………………… 151
통일신학교와 New ERA에 의해 개최된 회의 (자료 13) ……………………… 153
세계평화교수협의회 아카데미 수상자 개요 (자료 14) ………………………… 162
통일사상연구원 교육약사 (자료 15) …………………………………………… 163
전국 대학생 원리연구회 ……………………………………………………… 167
전국대학생 원리연구회 주요 하계 수련대회 연혁 (자료 16) …………………… 169
전국대학 원리연구회 21일 수련회 연혁 (자료 17) …………………………… 170
원리연구회 각 학군회관 및 학사전화번호 (자료 18) …………………………… 171
승공세미나 대학생 국제캠프 (자료 19) ………………………………………… 172
국제기독학생 연합회 ………………………………………………………… 173
– 기성교회 기독학생의 유혹의 손길 – ………………………………………… 173
일본대학가의 원리연구회 활동 ……………………………………………… 175
대학에 침투하는 원리연구회 ………………………………………………… 175
리틀엔젤스 …………………………………………………………………… 193
리틀엔젤스 해외공연 연혁 (자료 10) ………………………………………… 195
재미동포 원리공청회 …………………………………………………………. 196
재미동포 원리공청회 (자료 21) ……………………………………………… 196
재미동포 모국방문 지원시비 ………………………………………………… 198
통일교 교포지도자 초청세미나의 진상을 밝힌다 ……………………………… 199
4. 화보 : 사진으로 보는 문선명의 정체 ………………………………………… 212
5. 문선명 어록 (위장단체 관계) ……………………………………………… 235
6. 문선명, — 1986년 ……………………………………………………… 242
특별보고, 문선명의 활동 …………………………………………………… 243
7. 정치야욕 ………………………………………………………………… 259
통일교는 종교를 가장한 정치잡단 …………………………………………… 260
8. 문선명 어룩 (정치야욕) …………………………………………………… 262
9. 문선명의 결의 …………………………………………………………… 263
10. 일본 통일교의 비리 (원제 : 이것이 통일교의 秘部다) …………………… 269
폭력을 휘둘러 점거 ………………………………………………………… 269
경례식의 기괴한 의식 ……………………………………………………… 275
돈 거두기에 광분 …………………………………………………………… 277
해피월드 회사란? …………………………………………………………… 279
탈세의 수법 ………………………………………………………………… 280
판매원의 안내서 …………………………………………………………… 282
일본에서 파는 통일교 상품의 원가 · 이익표 (자료 22) ………………………… 285
미국에 있어서의 탈세재판 …………………………………………………… 285
11. 진정서 ………………………………………………………………… 289
25년동안 속았습니다 ……………………………………………………… 289
12. 문선명의 활동에 대한 반응 …………………………………………… 296
기독교 범교단 지도자협의회 성명서 ………………………………………… 296
미국의 회 보고서의 결론 …………………………………………………… 299
로마교황청의 지시문 ……………………………………………………… 302
13. 문선명은 누구인가? …………………………………………………… 306
문선명교주의 발자취 ……………………………………………………… 308
1. 문교주의 행적 …………………………………………………………… 308
1) 문교주의 가정배경 ……………………………………………………… 308
2) 문교주의 학력 및 경력 …………………………………………………… 309
3) 문교주의 종교적 배경 …………………………………………………… 310
4) 문교주와 이북의 신령파운동 …………………………………………… 312
5) 문교주의 투옥생활 ……………………………………………………… 314
6) 문교주와 통일교의 태동 ………………………………………………… 316
2. 통일교의 창설경위와 그 발전 …………………………………………… 318
1) 통일교의 출발 …………………………………………………………… 318
2) 세칭 이화여대 사건의 전말 ……………………………………………… 320
3) 통일교의 국내활동 (1955~1979) ………………………………………… 322
4) 통일교회의 해외활동 (1959~1979) ……………………………………… 326
문선명, 그는 과연 누구인가? ………………………………………………… 331
고집 센 용명이 ……………………………………………………………… 331
와세다대학에 학적 없어 ……………………………………………………… 333
눈이 나빠 중학시험에 떨어지다 ……………………………………………… 333
잘 꾸며대는 문선명 ………………………………………………………… 334
엘리자베스여왕이 예물을 갖고 온 것이다 …………………………………… 335
1년도 못간 김영운의 결혼 …………………………………………………… 336
사기 당한 문선명 …………………………………………………………… 336
문선명의 배후에는 점쟁이와 잡도인들이 …………………………………… 338
문교주, 조강지처 벌어다 …………………………………………………… 341
우리 아버지는 가짜 재림주다 ……………………………………………… 343
흥남감옥에서 얽힌 비화 …………………………………………………… 343
문선명의 죄목은 “여성관계, 사회교간죄” …………………………………… 346
천신만고의 남하작전 ………………………………………………………… 347
여관에서 또 어린양 혼인잔치 ………………………………………………… 349
문의 아이를 밴 김명희, 일본으로 밀항 ………………………………………… 350
북한에서의 문선명과 그 활동 ………………………………………………… 350
문의 두려움은 여인들과의 불륜관계 …………………………………………… 351
혈통복귀원리의 이론형성과정 ………………………………………………… 352
문의 교리는 황국주 · 김백문 · 정득은의 이론 …………………………………… 353
“워리강론” 속의 혈통복귀 주장 ………………………………………………… 354
접신녀 정득은의 “생의 원리” 전문 ……………………………………………… 355
정득은 · 박태선 · 문선명의 관계 ………………………………………………… 363
정득은의 딸, 우리 모친은 인간이하…   ………………………………………… 366
박태선은 문선명과 선후배지간 ………………………………………………… 367
문선명의 찬란한 혼음행각 ……………………………………………………… 367
차라리 주사기로 피를 뽑아 섞는 것이 …  ……………………………………… 368
야, 이종교사기꾼놈아! ………………………………………………………… 370
축복가정 선서 ………………………………………………………………… 376
일선통혼 (日鮮通婚) 찬양하는 문선명 ………………………………………… 387
비밀폭로 두려 원하는 문선명 ………………………………………………… 377
통일교 간부들의 불륜행위 …………………………………………………… 378
문교주의 사관과 그의 정체 …………………………………………………… 381
모든 것을 비치시오 …………………………………………………………… 386
신도들의 고생 ………………………………………………………………… 387
장영자 · 이철회도 포섭 ………………………………………………………… 388
탈퇴를 선언했던 박보희 ……………………………………………………… 389
이용하고 버리는 문선명 ……………………………………………………… 391
초대협회장 유효원씨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들 ………………………………… 391
용기 있는 고발을 기도하며 …………………………………………………… 394
14. 문선명의 여자관계 ………………………………………………………… 395
15. 문선명의 위험성 …………………………………………………………… 404


306

13. 문선명은 누구인가 ?

지금까지 우리는 각종 자료와 문 성명 자신의 말을 통하여 문 선명의 목표와 세력, 그리고 활동의 숫법과 작전 · 전술에 대해서 알아보았고 전 세계에 걸친 문 선명의 활동에 대한 우리나라 기독교계와 미국과 천주교 교황청의 반응들도 살펴보았다. 결국 문 선명은 그 자신의 “내말이 법률이 되어 움직일 대가 온다. 세계를 하나의 통치자 앞에 굴 복시켜야 한다”는 말과 같이, 자신이 세계의 절대황제가 되어 세상을 제 손아귀에 넣고 지배해 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여러가지 흉계를 실 천해 나가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북의 김일성정권이 그러하듯이 문선명운동의 원인과 결 과적인 모든 뿌리는 문 선명이란 인간 그 자체에 있다. 기독교를 표방 하고 승공을 내세우고 과학자 · 교수사회에 침투하여 과학이 어떻고 학 문이 어쩌고 하지만 우리 모두가 잘 알듯이 기독교와 국제 정세와 과학과 학문이 그들의 주장대로 그렇게 얕지만 않은 것이다. 독자들이 이어지는 글에서 보시겠으나 기껏해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대학부설 의 “전기 (電氣) 학원”을 다녔을가 말가 한 인물이 절대적으로 모두 알 수 있을 정도로 이 우주와 세상이 얕지 않은 것이다. 더우기 여자들에 둘러싸여 청장년시절을 정신없이 보낸 처지에서 어찌 깊은 생각이 나 왔을까 싶은 것이다.

오히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문 선명의 야욕과 만용 (蠻勇) 은 전후좌 우를 잘 살필 수 없는 그 자신의 무지와 무능력이 뒷바침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점도 이북에서 “위대한 분 중에서 가장 위대하다”고 칭송받 는 김 일성이와 아주 비슷하다. 어쨌든 문 선명이란 인물 그 자체를 더 잘 알지 않고서는 문 선명이 벌인 모든 활동에 대한 이해가 완전해 질 수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에는 문 선명의 어린시절과 청년시 절의 행적, 교회 초창기에 있었던 일, 이른바 “원리”의 형성과정과 특히 관심 거리가 되어왔던 그의 “혼음 (混淫) 행각”에 대해서 알아본다.

먼저 문 선명의 어린시절부터 청 · 장년기와 통일교의 초창기 형성과 정을 다룬 “문 선명교주의 발자취”(탁명환 지음,통일교의 허상과 그 실 상 49~81페이지에서 인용)을 살펴보고, 다음에 처음부터 그의 가장 가 까운 측근이였다가 이탈하여 나온 분들이 폭로한 잡지연재물, 문선명, 그는 누구인가 ?」를 제시한다.

이 연재물은 문선명집단에서 세상에 공표될까 보아 가장 겁을 내던 실록 (實録) 으로서 북한에서 부터 期년대 말까지 거의 동고동락해 오던 Y씨와 문 선명과 흥남감옥애서 함께 지내다가 같이 이남으로 내려왔고 부산과 서울에서의 초창기를 보낸 P씨의 증언을 토대로 또 다른 이탈 신도 H씨가 정리한 것이다. 이 자료를 10 · 26 이후 월간지 현대종교가 82년 11월부터 83년 8월까지 연재하였기에 대부분을 그대로 싣는다.

다만 독자들의 이해를 명확히 하기 위 해 같은 사건들을 다룬 부분들을 한데 모아 이어지게 했고, 소제목을 바꾸었으며 모호한 표현들, 예를 들어 “복귀 · 대입 (復歸, 代入) · 혈통계승”(문선명과의 섹스를 의미) 이 런데다가 주해석을 조금씩 가하였다.

독자들께서는 문 선명의 감추어진 행적을 그리는 아래 글의 내용이 너무나 상식 이하이고 때로는 믿기 어려울만큼 추악 (醜惡) 한데 대하여 새삼 지나치게 놀라지 않으시길 바란다. 세계황제가 되겠다. 그것이 하 나님의 뜻이다 하는 발상부터가 십대 이전의 아이들이나 할 정도의 유 치하고 시대 착오적 인데다가 돈과 쏘와 또 무엇으로 세 상을 요리하겠다 는 생 각과 수법 역 시 범 죄 인들의 발상법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308

문선명교주의 발자취

1. 문교주의행적
1) 문교주의 가정배경

문 선명교주의 본명은 문 용명 (文竜明) 이었다. 문 교주는 1920년 음력 정월 초엿새날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平北 定州郡 德彦面 上思里) 2221번지 에서 부친 문 경유 (文慶裕) 와 모친 김 경계 (金慶繼)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

문 교주가 태어난 상사리는 바다로부터 약 20리 떨어진 농촌으로써 20호 미 만의 농민이 사는 적은 마을로서 대부분의 동민들이 문씨 일가여서 속칭 문촌 (文村) 으로 불리 웠다.

문 교주의 형 인 용수 (竜壽) 는 정신질환으로 죽었고 위로 누이 한 명과 아래로 누이동생 세 명이 있었다.

문 교주는 어려서부터 호기심이 많아서 눈에 띄는 모든 사물에 관심이 많았고 모험성이 강한 소년이었다. 뿐만 아니라 무엇이던지 생각과 동시에 실천에 옮기 는 성미였고 한 번 손을 대면 끝까지 결말을 보는 무서운 기질을 갖고 있었다.

문 교주의 어린 시절의 끈질긴 집념에 대한 실화가 있다. 그가 10세 때 3세나 위인 이웃 소년과 싸움이 붙었는 데, 처음에는 그 소년이 어린 문 선명을 타고 앉아 짓누르고 있었으나 몇 시간이 지난 뒤에는 오히려 문 선명이 큰 소년을 타고 앉아 깔린 큰 소년의 귀를 사정없이 잡아 가지고 들었다 놨다 하여 사정없이 그 머리를 땅바닥에 짓이겨 놓자 큰 소년이 항복하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 선명교주의 오늘의 그 끈질긴 집념과 악착같은 성품을 발견할 수 있다.

문 교주가 열다섯살 때 형과 둘째 누이의 정신이상으로 인하여 문 교주 일가는 기독교인이 되었다.

문 교주는 1945년 4월28일 그의 첫번째 부인 최 선길 (崔先吉) 과 결혼하여 그 이듬해인 1946녀 4월 2일 (음력3월1일) 장남 문 성진 (文聖進) 을 낳았다.

그러나 문 교주가 혼음사건으로 파동을 겪은 1957년 1월 8일 본처였던 최 선 길여인과 이혼해 버렸고, 최 여인은 현재 외롭게 서울 관악구 상도동에서 살아 가고 있으며,배신의 한을 교회에서 신앙생활로 달래고 극복하고 있다.

본처 와 이혼한 문 교주는 1960년 3월 1일 추종신도인 홍 순애 (洪順愛) 여 인의 딸 한 학자 (韓鶴子) 여인과 재혼을 했으며, 1961년 12월 20일 혼인신고를 했다.

한 여인은 1943년 1월 6일생이니까 그녀의 나이 17세에 41세의 장년이었던 문 교주의 두 번째 부인이 된 것이다. 이들의 결혼을 어린양 혼인잔치 (The Feast of the Lamb) 라고 불렀다. 당시 한 학자양은 서울 성정여중을 마치고 성요셉병

원의 간호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한 여인의 모친 홍 순애여인은 평북의 복 중교회 신도였고 1 · 4후퇴시 월남하여 문 교주의 식사 시중을 들고 있었다.

한 학자여인과 결혼하기 전에 문 교주는 추종여신도였던 김 명희 (金明熙) 양 과의 사이에서 1955년 양력 8월17일 아들을 하나 낳았으니 문 회진 (文喜進) 이 었다. 문 희성으로 알려진 회진군은 교인들의 눈에 뛸까 봐서 교인 변 모여인댁 에서 몰래 숨겨 길렀다.

김 명회양을 일본에 데리고 가서 희성 (희진) 군을 낳게 하는 데 뒷바라지 한 장 본인인 오 모씨는 그후 문 교주의 곁을 떠나 현재는 사업을 하고 있다.

회성군은 중학교 때인 1969년 8월 1일 열차사고로 죽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최 모여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더 얻어 문 사무엘이라고 이름을 지었는 데 이탈신도들은 한결같이 문 교주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문 교주의 모습을 빼다 박은듯 닮았다고 하지만 호적상에 올라 있지도 않고 확인할 길도 없다. 그런데 후일 박 보희씨가 그의 호적에 입적하여 박 진사무엘 (朴珍사무엘) 이라고 부른다고 하나, 역시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재미교포 중 박 보희씨 이웃에 사는 K씨는 문 교주와 닮은 아이가 박 씨집에 있다고 귀뜸한 바 있다

한편 문 교주는 한 학자여인과의 사이에 5남 3니를 두었으니 아래와 같다.
장녀 문 예진 (文譽進) 1961년 1월27일생
3 남 문 효진 (文孝進) 1962년12월29일생
차녀 문 인진 (文仁進) 1965년 8월14일생
4남 문 홍진 (文興進) 1966년12월 4일생
3녀 문 은진 (文恩進) 1967년12월14일생
5남 문 현진 (文顯進) 1969년 5월25일생
6남 문 국진 (文國進) 1970년 7월17일생
7남 문 권진 (文權進) 1975년 3월 2일생

2) 문교주의 학력 및 경력

어린 문 용명 (후에 선명으로 고침) 은 7세 때부터 13세까지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을 공부하여 천자문 · 명심보감 · 소학 등을 익 혔다.

1934년 봄 15세에 이르러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약 10킬로를 통학하면서 1년간 다니다가 그 이듬해인 1935년 4월에 정주공립심 상소학교 4학년에 전학하여 1938년 봄에 6학년을 졸업했다. 그때 나이 19세였다.

소학교를 마치고 그 해 봄에 문 용명은 서울로 올라와 한강 건너편에 있는 흑석동에 하숙하면서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과에 입학하였다. 1941년 3월, 22세 때 경 성 상공실무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후 3월 24일 배를 타노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 도착하여 와세다대학 (早稻田大學) 부속고등공업학교 전기공학과에 입 학하였다.

그는 한국인 학생 2~3명과 함께 와세다대학 근처인 東京都新宿區戸塚町二丁目에 있는 일본인 삼교효장 (三橋孝藏) 씨댁에서 하숙을 했으며 그 당시 가장 친 한 학우로는 건축가인 엄 덕문 (嚴德紋,현재 일성종합건설 대표) 씨였다고 한다

문 용명은 고학을 하면서 어렵게 학업을 계속했다. 가와사끼 (川崎) 조선소에서 석탄운반 등 중노동을 했는가 하면 항공회사의 유산탱크 정화작업 같은 힘 겨운 중노동을 했다.

1943년 9월 반년을 앞당겨 졸업을 하게 되었으니 이는 제2차 세계대진이 임 박해 오는 일련의 여파 때문이었다. 문 용명은 3년간의 동경 유학시절에 공산주 의를 신봉하는 정경과 학생들과 곧잘 부딪쳐 논쟁을 벌리기도 하였고, 때로는 사상운동 학생그룹에 끼여 활동을 하다가 왜경의 요시찰인물이 되기도 했다. 일설에는 여 운형계의 좌익사상운동을 했다고도 하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문 교주의 전공과목이 전기과였으므로 후일 그의 교리서인 원리강론은,十一 음양이론을 펼 수 있는 기본 훈련을 받은 셈이 된 것이다. 일본에서 학교를 마치 고 돌아 온 문 용명은 서울 혹석동의 하숙집이었던 이 기완 (李奇完) 의 집에 방을 얻었다.

서울에 돌아와 40일 가량 놀다가 서울에 있는 유명한 토건회사인 녹도조 (鹿島組) 의 전기기사로 취직했다. 1944년 10월 문 용명은 동경유학시절의 지하운동 을 이유로 경기도 경찰부에 체포당하여 그 이듬해인 1945년 2월까지 4개월간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경찰에서 석방된 문 용명은 다시 복직이 되어 8 · 15해방을 맞았다.

3) 문교주의 종교적 배경

문 용명은 16세 때 정주공립심상소학교 시절부터 교회의 유년주일학교 반사 로서 어린이들을 지도했다. 1935년 16세 되던 부활절인 4월17일. 기도 가운데 홀연히 예수께서 나타나서 엄중한 당부를 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통일교에서는 「인류구원 사업 의 소명이요, 공식하명 (公式下命)」이라고 한다.

예수의 공식하명을 처음에는 몇 번이나 사양했으나 예수께서는「그대가 아니 고는 이 중대한 책임을 감당할 사람이 없다」고 하면서 거듭 당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큰 사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문 교주는 학교생활보다는 교회생활에 더 열심이었고 자신의 방법대로 성경 연구에 몰두하는 신비주의적인 열광주의자가 되어 버렸다.

경성 상공실무학교 시절에 문 용명은 흑석동에 하숙과 자취 생활을 하면서 당시 이 용도파인 예수교회 소속 명수대교회에 나가 유년주일학교 반사직을 맡아 열 심을 보였다. 그는 새벽 일찌기 흑석동 뒷산에 올라가 바위 위에 꿇어 엎디어 울면서 기도를 했다.

그 무렵 그는 예수교회의 중앙간부였던 이 호빈 (李浩彬) · 박 재봉 (朴在奉) 목 사 등과 자주 신앙토론을 벌렸고 서울역 에 가서 노방전도강연도 했다.

그는 말 주변이 좋아 사람들이 흥미 있게 들었다고 한다. 문 교주의 17세 되던 부활절 아침의 신비체험을 놓고 통일교의 원리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땅 위에 인생과 우주의 모든 근본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문 선생을 보내셨으니, 이 분은 수 십성상을 두고 역사이래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황망한 무형세계를 헤매시면서 혈혈단신으로 영계와 육계의 억만 사탄과 싸워 승리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비롯한 낙원의 수 많은 성현 들과 자유로히 접촉하시며 은밀히 하나님과 영교하는 가운데 모든 천계의 비밀 을 밝혀 낸 것이다」(원리해설 총서 p.17).

해방 직전 1943년말 귀국한 문 용명은 흑석동에 거주하면서 토목회사의 건축 기사 생활을 하면서 자기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문 용명은 본격적인 종교활동을 개시했다.

영등포구 상도동에 새로 집을 마련한 문 용명은 1945년 10월 경기도 파주군 임진면 섭절리에 자리잡고 있던 김 백문 (金白文) 의 이스라엘수도원에 몸을 담 았다. 그해 12월 25일 김 백문은 문 용명에게 솔로몬왕과 같은 사명을 받은 사 람이라고 자신의 받은 계시를 간접적으로 전했다.

문 용명은 1946년 4월까지 만6개월간 이스라엘수도원에 몸담고 있으면서 이 스라엘수도원의 상도동집회소의 인도자로 일했다. 1946년 6월 6일 문 용명은 단 신 월북하여 평양으로 갔다. 그는 이스라엘수도원에서 김 백문으로부터 배운 「원리」를 전파하러 간 것이다.

후일 통일교의 문 교주가 계시로 받았다는 통일교의〈새 진리〉라고 하는 원 리해설 (후에 원리강론으로 고쳐 부름) 은 김 백문의 교리를 뼈대로 하고 문 교 주의 음양이론을 덧 붙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312

4) 문교주와 이북의 신령파운동

문 교주와 김 백문의 신비주의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을 전후하여 일 어났던 신령운동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해방전 이북에는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신령운동단체가 있었다. 그 하나는 해방전 김 성도 (金聖道) 여인을 중심으로 한 평북 철산의 철산새주파 (鐵山새主派) 는 한국에 재림주인 새 주가 나타났다고 하면서 예언을 하고 불쌍한 사람 어린이를 도와 주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평북 선천의 허 허빈여인을 중심으로 한 복중교회파 (腹中敎會派) 로서 문 교주의 현 부인 한 학자여인의 모친 홍 순애도 그 파의 신도였다 허 여 인은 주님 이 도적 같이 임 한다고 하면서 1세에 서 33세 사이 의 사람으로 온다고 하면서 항상 재림주의 옷과 더운 밥을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고 한다. 밥이 식으면 방문객에 게 대접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문 용명은 추종신도 차 상순 (車相淳) · 김 원필 (金元弼) 을 보 내어 차씨와 김 씨가 허 여인에게 기도해 보면 문 용명이 바로 기다리는 재림주 임을 알 것이라고 하여 허 여인이 기도해 보더니 아니라고 했다. 허 여인의 예 수재 림준비 집단은 1940년대 인 일제 때부터 존속되어 왔다. 그들은 예수께서 불 우한 환경중에 태어나 평생을 곤고와 박해 속에서 하늘의 큰 뜻을 못 펴고 끝내 십자가의 수난으로 한 많은 생을 마친 예수의 한 (恨) 을 풀어 드리고 다시 오실 주님에게 초림주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사전에 완전한 준비를 해야 된다고 주 장하는 열광주의 집단이었다.

허 교주를 중심으로 약 300명의 교인이 있는 재산을 다 털어서 예수께서 태어 날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변변히 입고 쓸 한복 · 양복 각 한 벌씩을 정성으로 마련했다고 한다. 이런 이단의 집단에 대해 1946년도에 일제 검거선풍이 불었다.

세 번째 신령운동집단으로 황국주일파의 집단이 있었다. 이 황 국주 야말로 혼음파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협성신학 4회 출신인 감리교소속 이 용도 (李竜道) 목사의 영향을 받았다.

황 국주의 제자중에는 후일 문 교주의 수제자가 된 옥 세현 (玉世賢) · 지 승도 (池承道) · 박 월영 (朴月影) –재벌 박 모씨의 장모–,정 득은 (丁得恩) 등노파들이 었다.

옥 세현은 문 교주의 추종신도 우 하선장로의 부인이었다.

1958년 문 교주는 이 용도 · 이 호빈씨 부인을 청파동에 데려다가 4개월간 원 리교육을 실시했으나 추종케 하는 데 실패했다.

이 용도를 혼음파의 원조로 규정하고 있는 일부 주장자도 있으나 1934년에 폐결핵으로 사망한 이 용도목사는 혼음할만큼 기력이 없었다.

황 국주의 영향을 받은 사람중에는 백 남주 (白南住) 목사를 비롯하여 청진의 김 남조노파도 있었다. 백 목사는 원산에 이스라엘수도원장직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무신론자였던 김 백문 (金白文) 은 경상북도 칠곡 사람으로써 대구의학전 문학교 4학년 재학 중 여름방학에 인턴실습차 함북 청진도립병원에 내려 갔다가 김 남조노파를 만나 은혜를 받고 학교마져 중퇴해 버리고 신령운동 길로 들어서 버렸다. 그리하여 김 남조여인의 소개로 김 백문은 원산이스라엘수도원장 백 남주 (白南柱) 를 만났고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북의 황 국주파였던 옥 4현노파와 같은 신령파였던 정 득은은 월남하여 1945년 겨울 서울역 부근 동자동에서 집회를 하면서 삼각산에 대성심기도원을 차렸다.

한편 신령파가 돼 버린 김 백문은 경기도 파주에 이스라엘수도원을 차려 놓고 서울 상도동에는 그 지교회를 했으니 대략 그 시기는 1944년에서 1946년 사이 였다.

이 때 방 호동 (方好童) 이란 사람이 지교회장을 맡고 있었고 영들포 신길동에 살면서 백수건달생활을 하던 문 교주를 위해 최 선길 (본처) 의 모친이 신접살림 을 차려 주었다. 문 교주는 김 백문의 상도동지교회를 드나들면서 그의 주장과 교리에 심취했고 심지어 문 교주가 그의 처였던 최 선길에게 권하기를 김 백문 에게 가서 혈통복귀 (혼음의식) 를 받으라고 했으나 김 백문이 최 선길을 보니 보통 여지가 아니고 자칫 잘못하면 문제가 될 것 같아 하지 않겠다고 하고 내 쫓았다는 것이다.

문 교주는 김 백문과도 접촉하면서 삼각산 대성심수도원에서 방 호동 등과 함께 약 40일간 수련을 하면서 정 득은에게서 복귀받고 아담격이며 하와 격인 정 득은과 더불어 모자협조의 기준을 갖추었다.

문 교주는 1946년 6월 6일 이북으로 떠난다고 하면서 6월 6일의 6수는 잃어버 린 수를 다시 찾는 탕감복귀의 수라고 하면서 탕감복귀역사의 촛점을 맞추는 작업을 했다. 그러 면서 문 교주는 마치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듯 자신도 하늘의 계시 (북으로 가라) 를 받고 어린 핏덩어리 아들 성진이를 놓고 떠났다고 하나 그의 본처였던 최 선길의 주장에는 성진군을 임신하여 만삭이 되었을 때, 이북으로 갔다고 증언하는 걸 보면 성진군을 낳기전인 1946년 3월경 이북으날 떠난 것이 확실하다. 그 때 문 교주의 나이 27세였고 김 백문은 3세 위 인 30세였던 것이다.

월북한 문 교주는 평양에서 광해교회 (원래 김백문이 설립 운영하다가 월남함) 에서 황 국주의 수제자 옥 세현을 잡아 헤게머니를 쥐려고 했으나 황 국주일파 에게 쫓겨나서 평양 육교리에 있던 김 종화여인의 집 부억 뒷방에서 광야교회란 간판없는 교회를 시작했다. 이 때 지 승도노파가 이에 합세했고 뒤 이어 김 원 필 · 김 인주 (金仁珠) 여인 · 차상순 (車相淳) 등이 잇달아 입교했다.

이 때 문 교주는 20여명의 신도들과 더불어 광란집회를 했으니 몽시 (夢示) · 방언 (方言) · 투시 (透視) 등을 했다.

문 교주는「하나님의 창조이상」「천사장의 횡적 (横的) 사랑에 의한 아담 하 와의 타락 경위」「성모 마리아 세례요한 등 사명담당자들의 책임미완수로 초래 된 예수의 십자가 비극」등을 설교제목으로 하면서 성서를 문 교주 나름대로 풀이했다.

이들의 예배 때 문 교주는 흰 옷을 항상 입었고 신도들도 역시 흰 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했으며, 문 교주는 정렬적으로 땀을 쏟으면서 겨우 20여명의 교인들 에게 설교를 했으며 템포 빠른 찬송가의 반복, 박수의 연속이어서 항상 떠들썩 했다.

뿐만 아니라 밤낮으로 소리 높여 울면서 기도를 하여〈우는 교회〉라고 이웃 으로부터 지탄을 받기도 했다.

5) 문교주의 투옥생활 (投獄生活)

문 교주는 김 종화여인의 집을 빌어 광야교회라는 간판없는 교회를 하면서 기성교회의 부녀자들이 가정을 떠나 문 교주에게 미혹돼 버리는 일이 속출했고, 그들은 가정과 기성교회에 돌아가기를 거부하자 물의를 빚게 되었다. 1946년 8월 2일 문 교주는 사회 혼란혐의로 대동보안서에 구속됐다가 그해 11월 21일 풀려났다. 이것이 문 교주의 두 번째 투옥사건이다 (첫번째는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됐던 사건).

그러나 통일교측에서는 100일간의 투옥생활을 한 것은 기성교회의 투서와 밀 고로 인하여 이남에서 파견한 간첩혐의로 구속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속에서 풀려 난 문 교주는 47년초에 평 양 경 창리의 신도 정 달옥 (鄭達玉) 집으로 옮겼다. 이 때 황국주과인 옥 세현여인이 문의 휘하에 들어왔다. 1947년말경엔 지 승도 여 인도 문 교주를 따르게 되었다.

1948년 2월 22일 오전 10시, 문 교주는 유부녀인 김 종화여인과의 어린양 혼 인잔치 (결혼) 사건으로 인하여 김 여인 남편의 고소로 다시 투옥됐다. 재판을 받고 1948년 4월 7일 5년형을 언도 받았다. 이것이 세번째 문 교주의 투옥생활 이었다.

통일교에서는 이 사건에 대해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노정으로 출발했으므로 문 교주 역시 옥중생활부터 시작되는 섭리적 차원에서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문 교주는 1개월반 가량 평양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1948년 5월 20일 함경 남도의 흥남형무소에 이감됐다. 북괴는 이 흥남형무소를 德里특별노동자수용소 라고 불렀다. 이 수용소는 함흥으로부터 12KM 떨어진 흥남에 있었다. 홍남형무 소에서 복역하던 문 교주는 김 원덕이라는 일본국 포병대위 출신의 청년을 만 났는 데 김 씨가 북괴군 대위로 있으면서 남한으로 군사기밀을 빼 돌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체포돼서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 중 자살을 기도했다가 발각돼 철쇠 에 묶여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어떤 백발노인이 나타나서「너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리고 이남에서 평양으로 올라 온 청년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 후 김 씨는 4년 8개월 징역형으로 감형이 되었다.

김 씨의 죽은 부친이 꿈에 나타나서「할아버지가 너에게 이남에서 올라 오는 청년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었을텐데 이제 내가 그 청년을 보여 주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김 씨는 죽은 아버지를 따라 계단식 3층을 올라가 보니까 궁전같은 집안에 보좌가 있고 거기에 광채나는 사람이 앉아 있는 데 그가 바로 문 교주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통일교측의 이야기니까 대개 신홍 종교가 그러하듯이 역시 교주신화의 창조라는 관점에서 짚고 넘어갈 이야기이다.

또 형무소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1500명의 죄수의 총반장을 하는 일본군 대위 출신이며 평양숭실학교출신이며 평양 서문밖교회 집사였던 박 정화 (朴正華) 씨 를 만난 것이다. 죄수 번호 596번인 문 교주는 박 정화를 설득하였고 박은 문 교주의 언변에 빠져 문 교주와 뜻을 같이 했다.

1950년 8월 박 씨는 먼저 출감하였다. 6 · 25동란중에 형무소는 자주 폭격을 당했고 문 교주는 그 해 10월 14일 투옥, 2년 8개월만에 출감하여 도보로 평양에 돌아오니 10월 24일이었다.

문 교주는 5년형을 언도 받았으나 북괴정권 수립으로 3년 4개월로 감형됐다가 다시 유엔군의 북진으로 인해서 풀려 난 것이다. 1950년 11월 문 교주는 옥 세 현여인의 집에 기숙하면서 성가「성령의 노래」와「영광의 은사」두 곡을 작사 했다.

1950년 12월 4일 문 교주는 박 정화씨를 만나 박 씨를 대동, 김 원필 등의 제자와 함께 평양을 출발하여 황해도 해주를 거쳐 용매도 (竜媒島) 를 거쳐 임진 강→서울→문경새재→낙동강→영천→경주→울산→부산으로의 길고 긴 피란길 을 도보로 감행했다 (홍남에서 해군 함정편의 피란설은 사실과 틀림)

경주에 이르러 박 정화와 헤어진 문 교주는 김 원필만을 데리고 부산 초량에 도착하니 1951년 1월 27일이었다. 현재 박 씨는 문 교주와 결별하고 충남에서 건설업을 하고 있다.

1955년 7월 4일, 문 교주는 네번째로 경찰에 의해 구속됐다. 이 때 한국일보는 7월 6일자 스쿠프기사에서「正體들어 난 統一敎」란 제하에「敎主 文을 구속」 「罪相 속속 들어나다」「高官婦人도 농락? 自己와 사귀면 구세주 낳는다고」라는 부제를 달고 사건전모를 파 헤쳤다.

당시 36세인 문 교주를 비롯하여 유 효원 · 유 효민 · 김 원필 등 4명을 병역 법위반 및 징발특별조치령위반 등 협의로 구속됐고 유 효영은 병역법위반으로 각각 구속기소했고 간음매개혐의로 구속 · 송치되었던 최 순실(崔淳實 22세)양 은 석방됐다.

문 교주는 9월 20일 첫공판에서 간통혐의는 고소가 없어 못 다루고 부득이하게 병역법위반혐의로 강 서룡검사는 문 교주에게 징역 2년, 유 효원 징역 2년, 유 효민 징역 1년, 유 효영 징역 1년, 김 원필 징역 1년을 구형했다.


1955.9.21  동아일보  東亞日報
어제첫公判 統一教會 事件  ( 공판통일교회사건 )


▲ 사진은 공판정에나선피고들 X 표가文 (문) 교주

『통일교회』 교주 文鮮明 (문선명) (본명 = 文龍明 (문용명) = 三六 (삼륙)) 씨에 대한 서울지법제一 (일) 회공판은 작二 (이) 십일상오열시반 서울지법제四 (사) 호법정에서 尹學老 (윤학로) 판사담당 姜瑞龍 (강서용) 검사관여로 개정되었는데 이날법정은『통일교』신자로보이는 다수의 여성들로초만원을 이루었다
한때 많은『간통』사실이있다고 화제에 올랏던文 (문) 피고는 동혐의사실에대한 관계자들의 고소 가없어 결국 이날공판정에는 오직 『병역법위반』(연령七 (칠) 년인상) 피고로서만나섰고 그와함 께같은 교회관계자 金元弼 (김원필) (二八 (이팔) = 兵役法違反 (병역법위반) = 年齡六年引上 (연령육년인상)) 劉孝元 (류효원) (四二 (사이) = 兵籍申告不履行 (병적신고부리행)) 劉孝敏 (류효민) (三六 (삼륙) = 同上(동상)) 劉孝永 (류효영) (三五 (삼오) = 同上(동상)) 등제피고도 재단앞에나섰는데 공판은 개정벽두검찰측 기소장낭독에 이어 사실심리가 진행되었다이날文 (문) 피고는 연령인상사실은 이를시 인하였는데 소집해당자 (三二 (삼이) 세)이상 (三三 (삼삼) 세이상)되는자가 연령을인상한경우에도 그것이『병역법위반』이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법조계에서도 두가지이론이있다 그런데 담 당姜(강)검사는기소장에서文 (문) 피고가『피를흘려 살생 (口生(생)) 을하지 않는다는 기독교진리에의해서연령을인상하고 병역을 기피하였다』고 지적하였다


1955.9.22  동아일보  東亞日報
文敎主에二年 統一敎會事件求刑
작보 = 二 (이) 십일 개정된『통일교회사건』제一 (일) 회공판에서  사실심리에이어  관여  姜瑞龍 (강서용) 검사는피고들에게  각각다음과같이  체형구형을하였다
▲ 文鮮明 (문선명) (교주) = 懲役二年(징역이년)
▲ 劉孝元 (유효원) = 懲役二年(징역이년)
▲ 金元弼 (김원필) 劉孝敏 (유효민) 劉孝永 (유효영) = 各各懲役一年六月(각각징역일년륙월)

1955년, 통일교 – 사교여부 는『노 | 탓취』


1955년 10월 4일 언도공판에서 문 교주는 무죄가 되고 유 효원은 벌금 5천환, 유 효민 · 유 효영 · 김 원필은 징역 8월이 선고됐다.


이 “범죄의 무죄” 인증서는 가짜입니다.


문 교주는 왜정 때 1회, 북괴치하에서 2회, 한국에서 1회, 모두 4회의 옥고를 치루었다. 문 교주는 그의 이름을 용명 (竜明) 에서 선명 (鮮明) 으로 1964년 [1954년?] 8월11 일 개명했다.

6) 문교주와 統一敎의 胎動

부산에 도착한 문 교주는 갈 곳이 없었다. 초량역 구내 대합실에서 하손밤율 새우고 다음날인 1월 28일 부산역 맞은편 속칭 40계단 근처에 있는 서울 흑석동 시절부터 알고 지내 온 곽 씨라는 사람의 집을 찾아 3일간을 지냈고 김 원필씨는 그 근처 식당의 종업원으로 취직했다.

1월 31일 우연하게도 동경시절의 친구인 엄 덕문 (嚴德紋) 씨를 만난 문 교주는 경남도청 옆 부민동에 있는 엄 씨의 신혼 단간셋방으로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문 교주는 엄 씨부부를 상대로 그의 원리「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믿고 죽어 천당가자」는 식보다「지상천국을 건설하고 하나님의 한을, 어 드르자」는 문 교주의 설득에 1주일만에 굴복하였다.

엄 씨는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2천년전에 오셨던 예수에게 누이가 있었는 데, 그 누이가 그 오빠인 예수의 일로 해서 자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한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의 누이에 게 이 한을 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 한을 풀자면 하기에 보았더니 큰 문이 있었다. 문을 열쇠로 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마침 거기에 열쇠가 있어서 그 문을 열었더니 그 안에 또 문이 있었고 또 그 문을 새 열쇠로 열고 보니까 그 안에 또 조그만 문이 있었다. 이 문을 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 문을 열지 못하면 한을 풀 수 없다고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그 작은 문을 열자면 열쇠가 필요한 데 그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문 교주라는 것이 다」

이 꿈 이야기 역시 통일교측의 주장이고 보면 객관적인 입증자료가 없으므로 신빙성이 없고, 혼히 신흥종교의 창교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설화이기도 하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아무튼 친구에서 스승으로 부각된 문 교주는 엄 덕문일가 의 식객으로 후히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1951년 3월 6일 문 교주는 엄 덕문씨 부부와 함께 셋방에서 쫓겨나 남부민동 속칭 자갈치시장에서 송도로 빠지는 길 녁에 있는 엄 덕문씨의 친척 집에 방 하나를 얻었다.

한 달 후 4월 하순경 문 교주는 15일간 부산 제3부두에서 부두노동을 했다. 때로는 노동자 숙소에 들기도 하고 밥을 얻어 먹기도 했다.

51년 4월 하순경 문 교주는 동대신동 구덕산 넘어 괴정동으로 옮겼는 더1, 홍 남감옥시절의 옥중동기인 김 씨댁에 가서 묵게 되었다.

통일교측의 주장에 의하면 문 교주는 이때부터 약 1년간 본격적으로 원리 (原理) 집필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7년 후에 원리해설 (原理解說) 로 발행되었다.

문 교주가 집필한 원리는 정 득은여인의〈생의 원리〉나 김 백문의〈기독교의 근본 원리〉〈성신신학〉과 유사한 것이므로 그가 독자적으로 계시를 받았다기보 다는 해방을 전후하여 정 득은 · 김 백문 등과 교제하면서 터득하고 배운 교리 임을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다.

여기서 문 교주는 추종신도들을 모아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1951년 8월 문 교주는 부산시 동구 범4동 1513 속칭 범냇골에 토담집을 지었다.

범냇골에는 현재 이를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고 통일교 신도들은 이를 성지 (聖地) 라고 부르며 1975년 희망의 날 대향연 때 한국에 온 외국인 통일교 신도 들이 참배하고 돌아 간 곳이다.

문 교주가 부산에 와서 포교하여 맨 처음 입교한 사람이 당시 신학교 2년생 이었던 강 현실 (姜賢實) 전도사였다. 그때가 52년 5월 10일이었다. 1952년 12월 1일에는 이 요한목사가 입교를 했고, 이 씨는 자신을 따르던 제주도에 있는 신 도들에 게도 문 교주를 따르도록 했다.

범일동 범냇골시질의 교인들은 북한에 서 부터 따르던 지 승도 · 옥 세현노파와 정 달옥 (鄭達玉) 씨 · 강 현실전도사와 그녀가 김도한 金在柵권사 · 흑석동시절의 이 기완 (李奇完) 노파와 그의 딸 백 희숙 (白嬉淑), 이웃에 살고 있던 송 기주 (宋基柱) 장로와 그의 세 자매 인 송 효숙 (宋孝淑) · 송 문규 (宋文圭) · 송 방송 (宋芳松), 문 교주의 육촌동생인 문 승룡 (文昇竜) 씨 등이었다.

1953년 1월 범냇골을 떠나 셋집으로 옮겼다가 다시 2월에 다른 집으로 옮겼다. 3월에는 다시 부산시 동구 수정동 437번지에 집을 사서 이사했으나, 그해 11월 다시 이 사를 했다.

1953년 4월 14일 제주도에 가 있던 이 봉운 (李鳳雲) · 이 수경 (李秀卿) 부자가 이 요한목사의 권유로 입교했다. 1953년 7월 20일부터 강 현실전도사는 문 교주의 지시를 받고 40일간 대구에 가서 전도활동을 전개했고 8월 중순경부터는 이 요 한목사가 이에 합세했다.

이때 대구에 있는 기성교회에서는「부산에서 여자 이단이 올라와 미혹하려고 하니까 경계하고 조심하라」고 신도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켰으나 대구 삼덕교회 같은 곳에서는 여신도들이 홍 목사 몰래 문 교주의 집회에 참석하곤 하였다. 대구에서도 역시 문 교주는 경찰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하고 신문에 보도 되기도 했다.

대구에서 입교한 기성교회 출신 신도들은 김 복순 (金福順) · 오 금전 (呉金全) · 도 기선 (都基善) · 정 덕기 (鄭德基) · 방 달순 (方達順) · 유 선이 (劉宣伊) · 오 영춘 (呉永春) · 이 한성 (李漢成) · 김 순철 (金順哲) 등이었다.

1953년 12월 24일 후일 통일교의 주요 인물이된 유 효원 (劉孝元) 씨가 입교했 다. 유 씨는 다리 가 불구여서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받다가 문 교주를 만나 뜨거운 환영을 받고 감격하여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한 편 수정동에서 집회를 하면서 영도에 있던 신도 신 성묵 (申成黙) 씨댁에서도 집회를 열었다. 이때 유 효원씨와 함께 입교를 했던 유 씨를 유 씨의 사촌 유 효민 (劉孝敏) 씨는 통일교의 문 교주 에게 환멸을 느끼고 이탈하여 요즘은 사업을 하고 있다.

문 교주는 1954년 1월 하순경 부산을 떠나 대구에 을라 갔다. 대구에 올라 온 문 교주는 그의 생 일 잔치를 54년 2월 9일 대구에 서 했는 데, 그때 모인 부산 · 대구의 신도들은 약 20명이었다.

대구에 서도 역시 기성교회의 반대에 부딪혀 문 교주는 상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 통일교의 창설경위와 그 발전

1) 통일교의 출발

지금까지 문 교주는 간판을 걸지 않고 그 나름대로 원리를 전파 하면서 색다른 종파운동을 해 왔으나 문 교주가 상경하여 본격적으로 간판을 걸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1954년초 서울에서는 엄 덕문씨의 인도로 다년간 종교연구에 심취한 이 창환 (李昌換) 씨와 김 상철 (金相哲) 씨가 입교했다. 김 상철씨는 문 교주의 수제자로써 미국 포교의 선교사로 간 인물이다. 이 창환씨는 현재 우주신령학회 · 世界宗敎 統一本部 · 세계초종파 신앙본부 총재란 직함을 가지고 있다.

이 씨는 문 교주와 만나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 란 간판을 걸기로 하고 이 씨가 협회장직을 맡았다. 그 때가 1954년 5월 1일이었고, 서울 성동구 북학동 391번지에 간판을 걸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다음해인 1955년 1월 7일에는 서울 성동구 홍인동 341-44번지로 이전하고 집회를 계속했다.

문 교주는 1954년 3월 25일 대구에서 상경하다가 김천에서 내려 8명의 추종 신도들과 더불어 용문산기도원의 나 운몽장로를 찾아갔다. 나 장로는 이 때 문 교주 일행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이 자리에 심령도둑놈들이 왔다. 잘 건사해야 지 심령 다뺏기고 만다」고 경계의 광고를 했다.

용문산기도원에서 3일을 지내고 3월 27일 문 교주는 이 요한목사와 함께 김 천역에서 열차편으로 상경했다. 용문산기도원에서 푸대접을 받은 문 교주는 신 도들을 격려하고 떠난 것이다.

문 교주와 함께 통일교의 간판을 걸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개시한 이 창환 전 통일교협 회장의 증언을 들어본다.

「1953년 12월 21일 나는 홀로 진리탐구에 열을 쏟고 있었지요. 세계종교는 하나로 통일시켜야 된다고 생각했읍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읍니다. 그 당시 나는 건축설계업을 하고 있었읍니다.

54년 1월로 기억됩니다만 평소 건축설계관계로 안면이 있는 엄 덕문씨를 통 해서 문 용명 (文竜明) 이란 사람이 있는 데 만나 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대구에 내려가서 만났지요. 그때 문은 대구에서 한 칸짜리 방 하나를 얻어 살고 있었는 데 고무신에 핫바지 차림이었어요. 거기서 이 요한목사와 박 정화씨도 만났지요.

그때 문 교주는 주장하기 를 기독교의 궁극목적은 사후세 계 (死後世界) 가 아니 고 지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는 데 있으며 재림 예수는 구름을 타고 영 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메시아처럼 인간의 형태로 재림하게 되며 메 시아는 필연코 한국에서 나게 되어 있으며 기도 끝에는 예수란 말을 빼고 아버 지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해야 된다고 주장하더군요. 한 마디로 어 처구니가 없었읍니다.

그래 서 나는 유 효원씨에 게 문 용명이 메시아라면 나는 메시아감독관이라고 했지요.

나는 그때 내 종교적 발판을 세우기 위해서 문 용명이 바라는 대로 협회장직을 맡았고 명칭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라고 내가 정했고, 내 생일이 5월 1일이 어서 그날 간판을 달기로 하고 창립일을 54년 5월 1일로 정한 것입니다.

한 3개월 협회장직을 맡아 해 보니까 원가 이상하더란 말이예요. 수군수군 거리고, 그래서 문 용명과 의견대립이 되어 그만 두어 버리고 말았지요」

결국 통일교의 명칭은 이 창환씨의 아이디어에서 나온 것이다.

2) 세칭 이화여대사건의 전말

세칭 이대사건은 당시 이화여자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을 비롯하여 연세대 교 수와 학생들이 서울 중구 장충동 1가 37번지에 있는 통일교에 출입하는 데서 터졌다.

당시 연세대 교수였던 박 상래 (朴相來, 현재 朴一韓으로 개명) 씨를 바롯하여 이대의 이 정호 (李正浩) · 한 충화 (韓忠嬅) · 양 윤영 (梁允永) · 최 원복 (崔元福) · 최 신덕 (崔信德) 교수 등과 사 길자 (史吉子) 등 여대생들이 문 교주의 집 회에 나가게 되자, 이에 당황한 학교당국은 당시 기독교 교육학과 교수였던 김 영운 (金永雲) 교수를 보내어 알아 보기로 했다.

그러나 조사차 나갔던 김 영운 (金永雲) 교수마저 문 교주에게 깊이 빠져 버리 고 말았다.

그리 하여 학교당국은 눈물을 머금고 이 정호교수 · 김 영운교수 · 최 원복교 수 · 한 충화사감 · 양 윤영 강사 등 5명에 대 해 55년 3월 14일 파면을 단행하고야 말았다. 뒤 이어 사 길자 등 여대생 14명을 퇴학처분해 버렸다.

김 활란총장은 실로 가슴 아푼 결단을 단행했던 것이다.

이어 연대에서도 오 승택 · 김 명희 · 황 원진 · 유 경주 (사망) 군 등 4학생을 문 교주에 게 빠졌다는 이유로 퇴학처분을 시켰다.

이대사건의 실마리는 대개 아래와 같다.

53년 말 문 교주가 대구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고 그야말로 잠바차림에 고무 신을 신은 핫바지 차림의 초라한 몰골로 상경하여 몸 하나 의지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멜때 인 1954년 4월초에 구세주격인 여인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이대 음대 성악교수였던 양 윤영 (梁允永) 여인이었다.

그녀는 을지로 6가에 있던 자기 집 뒷방에 문 교주의 거처를 마련 해 주고 기숙시켰다. 이 때 양 윤영은 남편이 중병을 앓아 누어 있었으므로 결혼생활은 불행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든 남편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문 교주에게 홀딱 빠져 버렸고, 급기야 남편이 죽자 조금도 슬픈 기색이 없이 웃으면서 자기야말로 주님을 만났으므로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털어 놓았다고 한다. 문 균주와 양 윤영은 양의 남편이 살았을 때 부터 심상한 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양 윤영은 이화여대 기숙사 사감으로 있던 한 충화 (韓忠嬅) 를 권유하여 입교 시켰다. 한 충화 (당시38세) 역시 6 · 25에 남편을 잃고 외롭게 벙어리 아들 하나를 데리고 팔순 시어어니를 모시고 살아가던 불행한 여인이었다. 양 윤영은 한 충 화더러 이제야말로 진리를 발견했다고 하여 문 교주의 집회에 참석한 한 충화는 마치 자석 에 달라붙듯 문 교주에 게 미혹돼 버 렸다.

한 충화는 다시 성명이 밝혀지지 않은 이대 출신의 인텔리여성을 미혹하였고, 그녀로 하여금 문 교주는 영국선교사를 시켜준다고 하면서 마음을 들 뜨게 해 놓은 뒤, 파견 조건으로 김 활란총장과 박 마리아 (이기붕의 부인) 교수를 데리고 오도록 지시했다. 통일교는 자기네들이 필요한 인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접선시켜 포섭한다. 좋은 예로, 모 정부기관에 있던 고위층에 접근하여 일 본인 통일교여성을 소개하여 결혼시켜 주고 통일교를 돕도록 한 사실도 있다고 하나 확인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문 교주는 설교는 엉터리였어도 좌담회를 이끌어 가는 데 비상한 재주와 마 력이 있었다고 후일 그 집회에 참석했던 한 여인은 증언하고 있다.

당시 이화여고생도 수 십명이 와서 정신을 잃고 문 교주를 추종하여 신 봉조 교장이 퇴학을 시키기도 했다. 이대생과 이화여고생들이 너무 문 교주에게 빠진 나머지 이대 영문과 홍 모교수가 영어시험을 치루는 데 시험답안지에 문 교주의 교리를 씀 학생이 7명이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들은 반드시 문 교주를 만나기 전에 꿈을 꾼다는 것이다. 꿈에 하얀 옷을 입은 문 교주가 나타나서 목에 뱀을 걸어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 교주를 만나 보면 꿈에 본 바로 그 얼굴이라는 것이다. 통일교 신도들은 대다수가 문 교주의 얼굴도 모른채 꿈을 꾸고 들어 온 사람이 많은 것을 보아서 분명히 문 교주는 어떤 영의 역사를 행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다시 한 충화는 미국에 서 갓 돌아와 당시 유도선수로 한국에 서 제 일 가는 남편 석 모씨로부터 너무 위함을 받고 이에 불만을 느끼던 최 원복 (崔元福) 교수가 문 교주에게 빠지더니 남편도 자식도 다 버리고 문 교주를 따르더라고 털어 놓았다. 이어 이대 출신의 차 만춘도 입교하여 남편과 이혼하고 남편에게서 위 자료로 받은 청파동 집을 문 교주에게 바쳤다.

최 원복이 입교하자 최는 문 교주에게 3년간 영어를 가르쳤다.

그러면서 자연히 문 교주는 최 원복을 좋아하게 되었고 한 중화는 전북 전주로 전도의 사명을 맡겨 파송하였다. 한 충화는 벙어리 아들을 고쳐 달라고 하면서 당시 돈으로 200만환을 문 교주에게 바쳤으나 벙어리도 못고치고 재산만 날라간 후, 뒤 늦게 이탈했으나 비참한 말년을 보내다가 죽고 말았다.

문 교주는 자기에게 모든 정성을 다 쏟은 한 충화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헌 신짝 내동댕이 치듯 팽개친 것이다.

그 후에 김 영운이 입교 했다. 아꾼튼 초창기의 통일교에 입교한 여인들은 모두 가정이 파탄되었고, 남편과 이혼하고 자녀를 외면한 채 문 교주를 따랐으니 무슨 마력일까?

한 충화가 죽기전 한 친구를 만나서 하는 말이 우리 선생님은 정신적으로 만 족할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아주 흡족하게 해주는 남자 중 남자라고 고백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3) 통일교의 국내활동 (1955-1979)

소위 7 · 4혼음파동을 겪고 사회로부터 지 탄을 받은 문 교주는 형무소에 서 출 감하자 마자, 서울 중구장충동 1가 37번지에서 본부를 용산구 청파동 1가 71-3 으로 옮겨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청파동 본부는 이대 영문과 출신의 여신도 차 만춘여인이 통일교로 인하여 남편과 이혼할 때 남편으로부터 받은 건물을 문 교주에 게 바친 것이다.

이미 1954년 12월 31일 성화 (成和) 기독학생회를 결성하고 젊은층에 파고들어 전도를 하면서 문 교주는 10-20년 후를 내다보고 학생 · 청년층에 파고들어가 오늘의 중견간부들을 양성해 냈다.

1955년 1월 16일엔 부인회를 결성하여 부녀자층에 파고들었는 데 결과 혼음 피동을 겪었다.

1955년 3월 27일, 성화기독학생회를 성화청년회로 승격 · 개편하고 본부의 사무 집행을 대행케 했다. 이어 성화 (成和) 라는 기관지를 발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4년 10월 23일에는 성화학생회를 조직하고 다음 해 10월 납일엔 성화장년 회를 결성했다.

1956년에는 이렇다 할 움직임을 못 보이고 있다가 1957년도 하계에 접어들어 7월 22일 전국 120개 도시 에 2명 씩 40일간 포교차 파송하여 이들이 가는 곳곳마 다 기 성교회와 충돌했다.

1957년 8월 15일, 최초로 원리해설을 발행하여 그 교리를 비로소 성문화 (成文化) 시켰다.

1958년 1월 1일 강원 · 충청 · 전라 · 경상도 4개지구회를 설치하고 포교에 박 차를 가했으며 1958년 3월 20일 중앙문화회관을 개관했다.

1958년 12월 16일에 종로구 견지동에 있는 시천교당 (侍天敎堂) 을 빌려 5일간 집회를 갖고 통일교의 교리를 선전했다.

1959년 1월 10일, 40일간에 걸쳐 통일교 전국전도사 제1회 수련회를 개최했다.

1960년 7월 20일, 하계 40일 전도를 실시하였고 기관지 형식으로 발행하던 월간신문 성화를 10월 4일자로 정부에 등록했다.

1960년 10월 14일,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기구를 확장하고 간부를 발령했다.

1960년 12월 20일, 전도사들을 내 세워 동계 40일 전도행각을 독려했고 이때 이들의고생은 필설로 형용할 수없었다고 이탈간부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으고있다.

1961년 8월 31일, 전국을 9개지구 72개지역으로 개편하고 지구에는 지구장을 두고 그 아래 지역에는 지역장을 두었다.

1963년 5월 31일, 문공부에 사회단체 등록을 한 후 10월 4일에는 재단법인 인가를 얻었다.

1963년 7월 27일, 무용연구소를 개설했는 데 이것이 후일 리틀엔젤스 (Little Angels) 가 되 었 다.

1964년 3월 2일, 사라와크의 왕이었던 안토니부루크 (Anthony Brooke) 씨가 내 한하여 통일교의 문 교주와 손을 잡았다.

1966년 1월 10일, 대 학생 을 상대로 전도하기 위 해 전국대 학원리 연구회를 발족 하여 각 대학마다 원리연구회를 두고 대학가에 침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학주변에는 학사 (學舎) 라는 기숙사를 두고 지방출신 빈곤한 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할 뿐아니라, 때로는 장학금까지 지급하면서 엘리트 양 성을 했다. 이렇게 되니 통일교의 혜택을 입고 학업을 쌓은 엘리트들이 사회 와 각계 각층에 퍼지게 되어 지금은 관계 · 학계 · 언론계 · 경제계 · 종교계 할 것 없이 각 분야에 걸쳐 통일교도의 세력들이 퍼져있는 것이다.

동국대 · 숭의 여 전 등을 대상으로 하는 남산학사를 바롯하여 성균관대 · 국민 대를 대상으로 하는 명륜학사, 중앙대 · 숭전대를 대상으로 하는 명수대학사, 서 강대 · 경기대를 대상으로 하는 서강학사, 서울대를 대상으로 하는 서울대학사, 연대 · 상명여사대를 대상으로 하는 신촌학사, 고대 · 숙대 · 덕성여대를 대상으 로 하는 안암학사, 외국어대학을 대상으로 하는 외대학사, 각 대학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의료학사, 건대 · 세종대를 대상으로 하는 장안학사, 단국대를 대 상으로 하는 한남학사, 한양대를 대상으로 하는 한양학사, 항공대학을 대상으로 항공대학사, 홍익대학을 대상으로 하는 홍익학사, 경희대를 대상으로 하는 회기 학사 등 학사만 15개에 이르고 있다.

기성교회가 파벌싸움 · 교권싸움에 열중하면서 그 사명을 망각하는 동안에 통 일교는 젊은 대학생들을 상대로 먼 앞을 내다 보고 착실히 포교의 기반을 닦았 으니 할 말이 막힌다.

19期년 1월 13일, 혁명정부가 내 세운 국시인 반공 (反共) 에 재빨리 영합한 통일교는 국제승공연합을 창설하고 새마을요원은 물론, 경찰 · 군대 · 공공기관 요원들에 게 까지 반공교육을 시켰다.

1969년 9월 22일, 영문잡지「The Way of the World」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1970년 4월 15일, 한국종교협의회에 가입하여 기성종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 고자 했으나 결국 통일교의 가입으로 인하여 한국종교협의회가 제 기능을 발휘 할 수 없게 되었고 지금은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1970년 4월 16일,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수택리에 반공교육장인 중앙수련소를 개설하고 반공교육 및 통일교 교리교육을 실시했다.

1970년 7월 24일, 부산에서 부터 문 교주를 추종하면서 협회장을 지낸 유 효 원씨가 사망했다. 유 씨는 문 교주보다 6세나 연장이면서도 문 교주를 아버지라 불렀고 천사장 사명을 지녔다는 것이다.

제1대 협회장 이 창환, 제2대 협회장에 이어 김 영휘 (金榮輝) 씨가 제3대 협회 장이 되었다. 통일교에서는 이 창환씨를 무시하고 김 씨를 제2대 협회장이라고 한다.

1970년 12월 1일, 향후 3개년간 120개지역에 걸쳐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한 전 도행각을 실시했다.

1970년 12월 20일, 월간잡지 통일세계 (統一世界) 를 발행하게 되었으며 1979년 9월말 현재 통권 106권에 이르고 있다.

1971년 1월 10일, 크리스찬아카데미하우스를 빌려 제1차 대학교수초청 원리세 미나를 개최하여 교수들에게도 파고들었다.

1974년 7월 4일, 통일교는 종교통일의 기치를 들고 주간신문인 주간종교를 발 행하여 후일 문 상희 · 신 사훈 필자 등 통일교 비판자들을 향하여 곡필 (曲筆) 을 휘둘렀다. 그들은 매스컴의 힘을 이용하여 각 종교계에 침투하여 그들의 약점을 폭로함은 물론 정보수집을 하는 데 신문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1972년 6월 1일, 전국에 9개 팀으로 구성된 한국순회 전도단을 구성하고 교리 전 도에 박차를 가했다.

1973년 5월 6일, 세계평화교수아카데미 (회장 이항녕 홍익대총장) 를 창립하여 학계에 파고들어 회원수 전국 60개대학 교수 464명에 이르고 있다.

1973년 11월 27일, 100일 수련회를 개최하고 신도들의 전도행각을 독려했다.

1973년말 문 교주는 이민여권을 갖고 미국으로 가족들을 데리고 갔다가 1974년 2월 8일 일시 귀국했다.

그의 미국행은 당시 한반도의 고조되는 긴장사태 (북괴남침 위 협) 에 대한 도피 성 이민이라고 하는 여론이 지배적이었으나 통일교측은 세계선교의 기틀을 닦 으려면 미국으로 진출해야 된다고 변명했다.

1974년 4월 21일부터 일주일간 세계평화교수아카데미 주최로 제1차 국제학술 회의를 개최하였다.

1974년 5월 1일, 문 교주는 승한일 (勝恨日) 을 선포하고 식을 거행한 바, 승한 일이란 하나님이 그 자녀인 인류를 사탄에게 빼앗겨 맺힌 한 (恨) 을 문 교주가 사탄과 싸워 승리를 거둠으로 하나님의 한을 풀어 드렸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날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1974년 5월 9일, 한선무용단 (Korean Folk Ballet) 을 조직하여 미국에서 열리는 문 교주의 집회에 찬조출연코자 도미했다.

1974년 12월 期일, 문 선명교주는 미국집 회를 마치고 일시 귀국하여 다음해 인 1975년 1월 16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희망의 날 한국만찬회를 열고 650여명의 각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문 교주의 강연과 통일교 선전일변도의 모임에 제각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 만찬회에 쓴 경비만도 약 1천만원이 넘는 막대한 경비였으나 문 교주의 최초 공식적인 데뷰치고는 비싼 값은 아니다.

1975년 3월 27일, 세계 26개국 청년들로 구성된 통일교의 국제부홍단 6백명이 일본전도를 마치고 내한하여 거리 거리를 누비면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고 통일 교의 선전에 열을 올렸다.

1975년 4월 1일, 부산에서부터 개막된 희망의 날 대향연으로 하여 곳곳에서 기성교회 교인 및 신학생들과 충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 교주의 설교집 제174호 (75.5.25, p.12~p.13)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여기에 결속해 가지고 통일교회 뿐아니라 영계에 왔다 갔던 수 많은 조상들 까지도 전부 다 동원할 수 있도록 조치해 줘야 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알다싶이 5월 1일의 총 해원식 (解怨式) 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한 (恨) 이 맺혀 있기 때 문에 하나님을 해원해야 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에덴동산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류를 사탄에게 빼앗겨 버 렸는 데 그 가슴에 한이 맺혀있는 데 땅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해야만 하나님의 가슴에 맺 힌 한 (恨) 이 풀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희망의 날 대향연을 했다고 하니 이는 샤머니즘의 해원사상과 유사한 행위의식이라 볼 수 있다.

희망의 날 대향연 행사는 부산 · 대구 · 대전 · 전주 · 광주 · 청주 · 인천 · 서울 등 9개 도시에서 전개되었는 데 어디서든 마찬가지겠지만 서울의 경우 장충체 육관에서 진행했던바 실내에 가득 채우지 않고 시간전에 문을 걸어 잠그고 밖 에서 청중들이 듣도록 하여 청중수를 과장선전하기도 했다.

통일교에서는 태권도 등 무술에 능한 유명한 모 씨의 조직을 동원하여 행사의 경비를 했고 반대하는 거성교회 교인들을 무자비하게 때려 누이고 폭행 · 폭언을 감행했다.

구국세계대회까지 이런 여세를 몰아 행사가 끝난 후 문 교주는 모 씨에게 수 고의 댓가로 승용차를 하나 주기도 했다.

1975년 6월 7일, 서울 여의도 5 · 16광장에서 세계 각국 신도들을 모아 구국세 계대회를 개최했다. 이때 문 교주는 김 일성을 때려 잡자고 사자후를 토했고 리틀엔젤스 무용단의 무용 등의 순위가 먼저 있었고 뒤 이어 문 교주의 강연 순위에는 청중들이 모두 일어 서서 홀어지는 바람에 이를 막느라고 통일교간부 들이 애를 먹었다.

통일교에서는 지방에서 멋 모르는 노인들과 부녀자들에게 서울구경을 가자고 꾀어 뼈스를 대절하여 여의도에 데려다 놓고 행사를 치루고 있는 데 정작 통일 교가 기독교라면 그들의 손에 모두 성경 찬송이 들려져야 할텐데 필자는 한 사 람도 못 발견했다. 통일교신도도 아닌 불신자들을 모아 놓고 행사를 치른 그들은 백만명이 모였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과장선전하기에 여념이 없었으나 실제 통 일교 신도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1975년 7월 20일 통일교 신도들은 제3차 7년노정 제1차 하계 40일 전도를 실 시했다.

1976년 4월 5일부터 1개월간 전국 58개 시 · 군에서 통일교 교구장들은 지역 유지들을 모아 놓고 식사대접을 하면서 통일교 활동영화를 상영하면서 선전에 안간힘을 썼다.

1977년 3월 8일 전국대학원리연구회 순회전도단을 창설하고 대학가에 적극적 으로 파고 들었다.

1977년 7월1일 청파동에 있는 통일교본부 건물의 헌당식을 끝냈다. 원래는 여 의도 43층짜리 건물을 세우려고 했으나 차질이 생긴 것이다.

1977년 2월초 일화인삼주식회사 59억 탈세사건이 터 져 간부 5명이 구속되자 사장이던 김 원필씨는 일본으로 가 버렸고 한 인수씨가 사장에 취임하고 일간 지에 탈세사건의 사과광고를 냈다.

1977년 11월 12일 김 영휘씨가 재단이사장 및 협회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1977년 12월 4일 국제순회전도단 134명이 내한하여 2개월간 전국 각지에서 통일교 선전을 했고 78년 2월 10일 제1회 세계승공대회를 개최했다. 1979년도에 접어들어 통일교는 기성교회 및 통일교 반대자들에게 적극 공세를 펴기시작했다.

4) 통일교회의 해외활동 (1959-1979)

통일교가 해외교포에 첫 발을 디딘 것은 1958년 7월 17일 최 봉춘 (崔奉春) 씨를 일본에 밀항시킨 이후부터였다.

1959년 1월 2일엔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김 영운 (金永雲) 여 인을 미국선교사로 파송했고 이어 9월 26일에는 부산에서 부터 추종신도였던 김 상철 (金相哲) 씨를 미국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이어 61년 1월엔 미국에 건너 간 김 영운 · 김 상철 · 양씨가 The Divine Principle 라는 원리해설 영어판을 발행했다. 같은 해 역시 일본에서 일본어판 원리해 설을 발행 했다.

1961년 2월 25일 주미한국대사관 무관이 며 통역 장교 출신인 박 보희 (朴普熙) 씨를 선교사로 미국에 파송했다.

1963년 10월 독일어판 원리해설이 출판되었다.

1965년 1월 28일 문 교주는 제1차세계순희를 했는 데 10개월간에 걸쳐 40개 국을 순회했다.

1965년 4월 26일 미국에 있던 김 영운씨를 영국에 보내어 선교하도록 했고, 같은 해 4월 27일 미국에서 김 영운씨에게 포섭된 미국인 도리스 월더 여인을 이태리선교사로 파송했다.

1965년 6월 25일 문 교주는 아이젠하워 전미국대통령을 만나 요담한 후 그 요담광경을 사진 찍어 최대한 통일교 선전에 사용했다.

1967년 6월 12일 통일교 간부 15명이 일본에 건너 가서 일본간부들의 재교육을 2개월간 실시하고 돌아 왔다.

1967년 6월 19일 정 인숙 (鄭仁淑) 여인을 대만선교사로 파송했다.

1969년 2월 2일 문 교주는 3개 월 간에 걸쳐 21개국을 순방하는 제2차세 계순희를 했는 데 이런 순방을 통해 서 관광을 했는 지 아니면 포교를 했는 지 알려 지 지 않고 있으며 각국마다 가서 돌맹이를 한 개씩 모아 왔다는 말은 전해 들었다.

1971년 12월 5일 문 교주는 제3차세계순희를 하면서 5개월간에 걸쳐 약 15개 국을 돌았다. 이 때 세 계 9개 도시에 서 집회를 갖기도 했고, 세 계순회 전도단 (One World Crusade) 을 편성하기도 했다.

1971년 11월 21일 제4차세계순희를 8개월간에 걸쳐 실시했다.

문 교주의 4차례 에 걸 친 세 계순회를 두고 일부 이탈 신도들은 통일교 신도들의 피땀 어린 돈과 리틀엔젤스 공연수입금을 막대하게 낭비했다고 주장하는 사람 들도 있었다.

1972년 11월 23일 미국 뉴욕에서 제1회 국제통일과학회의를 개최했는 데 여 기 엔 7개국 50명의 과학자들이 참가했는 데 그 중에는 저명한 노벨상 수상자들도 초청되었다.

이어 다음해 11월 18일에는 일본 동경에서 저12회 국제통일과학회의를 열었는 데, 이 대회에는 17개국 70명의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참가했다. 제3차 국제통일 과학회의는 영국 런던에서 개최되어 27개국 128명의 과학자들이 참가했고, 제4 차는 미국 뉴욕에서 열렸는 데 57개국 340명, 제5차는 미국 워싱턴에서 52개국 349명, 제6차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52개국 460명, 제7차는 미국 보스턴에서 57게국 459명의 과학자들이 참가했다. 매 회 회의비용은 최 저 80만불에 서 100만 불이 소모되었다고 하니 7차에 걸쳐 600여만불 (36억원) 의 엄청난 돈이 들었다.

1973년 11월 30일 문 교주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하여 궁지에 몰린 닉슨 대통령을 지지하는 소위 워터게이트선언을 미국 주요일간지 뉴욕타임즈 · 워싱 턴포스트지 등 21개 신문에 전단 광고로 발표하였고, 1974년 2월 1일에는 백악관 앞에 서 72시간 닉슨 지지데모나 닉슨을 위한 금식기도를 하자 이에 감격한 닉슨 전미국대통령은 문 교주를 만나 약 1시간동안 요담했다. 이때 들리는 말에 의하 면 닉슨을 위해 한국말로 기도를 했다고 하는 데 닉슨이 실각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문 교주의 통일교세력은 하늘 높은 줄 몰랐을 것이다.

1974년 2월 15일 문 교주는 미국 32개 도시에서 순회공개강연을 했고 이보다 앞서 73년 8월 7일부터 4개월간에 걸쳐 미국 21개 도시에서 순회강연을 하기도 했다.

1974년 4월 25일 미국 대도시 순회강연을 마지막으로 하와이 호놀루루에서 마치고 일시 귀국하기도 했다.

1974년 5월 7일 문 교주는 일본 동경의 제국호텔에서 1,700명의 일본 각계인 사들을 초청하여 “희망의 날” 일본만찬회를 개최하였는 데 이때 일본의 거물급 정객들이 다수 참석했으며 1,500만원의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1974년 5월 13일 박 보희씨가 주재하는 “생명의 향연” 순회원리강연회가 같은 해 7월 21일까지에 걸쳐 미국 10개도시에서 개최되었다.

1974년 9월 18일 문 교주의 생애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워싱턴 메디슨 스 레어가든 공개집회에 약 2만명의 군중이 모여 하룻밤 집회비용이 100만불 (약6 억원) 이 소요되었다고 하며, 이 어수선한 집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통일교 신도 1명이 반대파에 의해 죽고 수 명이 부상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1974년 10월 8일 문 교주는 미국의 하원외교위원장인 죤 스파크맨 의원 등 12명의 의원초청으로 하원에서 연설을 하기도했다.

1974년 11월 21일 영국 런던에서 제3회 국제과학통일회의를 개최하였던 바, 매스컴은 통일교에서 주최하는 회의라고 비판적인 보도를 하였다.

1975년 2월 13일 문 교주는 일본 동경에 있는 무도관에서 거행된 희망의 날 대향연 공개집회를 가졌다.

1975년 5월에는 통일교 본부는 미국, 일본, 독일 등 3개국 출신 신도들로 3인 1조의 선교사조직을 구성하고 세계 127개국에 통일교의 교리를 선전하다가 간 첩혐의로 체포되는 등친공 (親共, 말라가시) 물의를 빚기도 했다.

1975년 12월 18일 문 교주는 미국 의회에서「미국을 중심한 하나님의 계획」 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기도 했다.

1976년 5월 12일 미국 뉴욕의 맨하턴 34번가 힐튼계열의 43층에 객실 2002개의 뉴요커호텔을 5백만불 (약 30억원) 로 매 입하여 세계 선교센터로 사용하기 시 작했 다.

1976년 6월 1일 미국의 건국 200주년기념 집회를 뉴욕 양키스타디움에 서 개최 하여 문 교주가 강연을 했고 이어 76년 7월 18일 미국 워싱턴 머뉴먼트 광장에서 미국 독립2백주년 기념집회에서「하나님의 뜻과 미국」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 였다.

1977년 9월 15일 미국 워싱턴시 16번가에 있는 모리다힐 몰몬교회 본부 건물을 매입하여 워 싱턴본부로 사용하고 있다.

1977년 10월 26일 일본 동경에서 세계언론대표자 회의를 개최한 바, 이 모임 에는 한국에서도 언론계 중진들이 참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8년 3월 22일 통일교의 제2인자로 알려 진 박 보희 (朴普熙) 씨가 미국하원 국제관계 소위원회에서 증언을 했고,4월 11일 · 4월 22일 · 6월 20일 등 네 차례에 걸쳐 “프레이져 위원장”을 공박했다.

소위 코리안 게이트 혹은 문게이트사건으로 불리워지는 통일교와 미국 국회 의원들간의 자금제공 및 미인계사건은 미국 언론계만 아니라 전 세계 매스컴을 떠들석하게 했다.

통일교의 실력자 박 보희씨는「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란 팜프렛을 수 백 만부 인쇄하여 군부대 · 경 찰 · 정부 각 기관 · 리 · 동 · 마을까지 무료로 뿌리고 통일교가 가장 국가를 위해서 충성을 다하고 프레이저의원을 때려 눕힌 애국적 집단이요, 박 보희씨를 영웅시하도록 했다. 그 팜프렛만 보면 박 보희씨는 애국 적이고 유능한 한국인었다.

그러나 미국을 아는 사람이라면 통일교에서 선전하는 액면 그대로 믿을 사람 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외신부장 金 大中씨는 그가 79.5.20.자 조선일보에 쓴「워싱턴의 四季」 에서 통일교의 미국활동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짓고 있다.

미국에 있는 문 선명씨의 통일교 요원들은 스스로를「한미관계의 피해자」라고 한다. 박 동선 사건으로 인해「한국」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모조리 들쑤셔지는 당시의 미국 풍조아래서 한국을 종교의 발상지로 삼고 있는 통일교가 어쩔 수 없이 걸려들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통일교 밖의 사람들은 오늘의 한미관계가 오히려「통일교의 피해자」 라고 말한다.「종교를 울타리로 삼아 그 속에서 상업적 영리행위를 하고 남의 나라 대통령의 스캔들에 개입, 콩 놔라 팥 놔라 하고 다닌 것은 통일교와 한국 정부와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들었으며 마침내는 한국의 이미지에 의혹을 갖게 끔 해서 한미관계를 악화시키는 데 일조를 했다」고 통일교를 조사한 프레이져 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주장했다.

어느 쪽이 누구의 피해자이건간에 결과적으로 통일교가 한미관계, 특히 미국 여론이 한국에 대한 이미지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것은 하나의 엄연한 결과다.」

김 대중씨는 74년도 닉슨을 지지한 통일교의 행동을「너무나도 위험한 만용」 이라고 결론 짓고, 반공 (反共) 을 교리로 담아 미국의회를 상대로 한국에 대한 원조삭감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국지원을 역설한 것은「분별없는 애 국심」으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프레이져는 한국정부를 공격하기 위해 통일교를 한국정부의 전위대로 몰았고 통일교의 박 보희씨는 통일교와 프레이져 싸움이 아닌 한국정부 대 프레이져 싸움으로 변질시켜 통일교가 마치 한국여론의 대변자인 것처럼 싸움의 양상을 승격시켰다」고 비판했다.

통일교는 끝내 미국의 두꺼운 벽을 뚫지 못하고 78년말께 부터 슬그머니 미 국내에서의 액티브한 포교활동과 대집회의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 런 과정 에 서 진정한 피해자는 통일교도 프레이져도 아니었다. 진정한 피해자는 한국인과 한국 그 자체였다. 통일교 야말로「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논쟁」에 휘말려 미국의 對韓 이미지를 부정적으로 가속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 다」라고 김 씨는 결론짓고 있다.

그후 통일교는 프레이져의원의 출신구에서 프레이져 낙선운동을 전개하여 프 레이져의 정치생명을 끊은 악착성으로 복수를 했다.(탁명환 지음, 통일교의 허상 과 실상 49~81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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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과 소개의 글은 월간 현대중교의
「컷」올 옮긴 것임

統一敎 前職 幹部가 쓴

実録 文鮮明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이 재 식 (가명)

문 선명 그는 누그민카?


고집 센 용명 (龍明) 이

그의 본명은 문 용명 (文竜明) 이었다. 1920년 음력 정월 초엿샛날 오후 1시에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2221번지에서 태어났다. 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은 중농의 농사꾼인 문 경유 (文慶裕) 의 2남 6녀의 자녀 중 둘째 아들로 서열은 다섯번째였다.

그의 형의 이름은 문 용수 (文竜壽) 였고 문 선명의 이름도 문 용명이었으니 그 집안은 용 (竜) 과 관련이 있는 이름을 지니고 있어 동양에서는 용을 출세의 상징으로 보고 있으나, 성경에서는 사탄으로 풀이하고 있으니 문 선명의 적 그 리스도성은 이미 태어날 때 그 이름부터 그렇게 타고난 바 있는 것같다.

문 용명의 어린시절을 특별하게 기록할 것은 없지만 문 교주 자신이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너무나도 신화같은 거짓말을 신도들 앞에서 잘 늘어 놓았기에 여기에 그대로 옮겨 싣는다.

문 교주의 말에 의하면 태어날 때 부터 문씨 가문이 기울기 시작하여 갑자기 집안에서 기르던 소가 죽고 여동생은 악령이 들어 정신이상이 된 채 미쳐 죽고 장독이 깨어지는 등 이변 (異變) 이 속출하였다.

이러한 재난을 문 교주는 하늘이 사탄과 주고 빼앗는 탕감복귀원리를 입증하 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사실은 조작된 내용들이다.

한 번은 그 자신이 화가나서 집을 나가 버렸는 데 그가 사랑하던 개가 역시 때를 같이하여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가 강가에 가서 고기를 잡으면 만물을 사랑하는 심정으로 미꾸라지 등에 살그머니 손을 대어도 그 미꾸라지가 도망가지 않는 상태에서 고기도 잡지 않은 휴머니스트였다고 주장했으며, 잡은 고기도 강물에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허황한 이야기를 1960년대 까지 추종 신도들을 모아 놓고 입심좋게 늘어 놓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문 교주는 앞으로도 하늘과 연관된 신화를 얼마든지 창작해서 실화처럼 늘어 놓을 수 있는 신화조작의 명수이기도 한 것이다.

1936년부터 39년까지.서울 영등포의 흑석동에 있는 일본인이 기독교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박애정신으로 건립한 사립학교인 경성상공실무학교 (전기 · 건 축 · 상업) 제3기생으로 졸업을 했고 일제시에 사용하던 문 용명교주의 창씨명 (創氏名) 은 江本竜明이었다.

그가 16세 나던 해 4월 17일 부활절 이른 아침에 예수님을 만나보고 하나님의 천명(天命)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출발하여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며, 그 당시 흑석동에 있는 大觀莊敎會 주일학교 반사 노릇도 했다고 한다.

그는 그 당시 경성상공실무학교 (현 중앙대학교) 설립자인 土居山洋씨(현재 일본 九州電氣學校校長)와 당시 일본에 와서 영어를 가르쳤던 園部治夫씨(현재 일본의 명치대학원 교수) 등 두 사람은 그 당시 江本竜明을 교회에서 본 일이 없다고 입증하고 있으며, 문 교주의 동급생이었던 모 씨는 그때 문 교주는 분명히 신앙인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문 교주의 16세시 예수님과 만 나서 사명을 받았다는 주장은 거 짓말임이 입증된다.

문 교주는 기독교신자였던 경성상공실무학교의 교장과 선생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문은 1941년에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부설 神田전기학원 1학년을 다니던 중 미일전쟁관계로 수료일을 앞당겨 6개월만에 수료했다는 조사결과도 있으나 그것은 미확인된 것이다.

문은 자신이 와세다대학 전기공학과를 졸업했다고 하나 전혀 근거가 없다.

그것은 위장된 학력이요 다만 와세다대학 부근 新宿區 戸塚二町目에서 하숙을 한 예가 있을 뿐이다.

통일교도들은 모두 교주 문 선명의 최종학력을 와세다대학 전기공학과 4년 졸업으로 알고 있으며, 그들의 통일교 교회사에 보면 1941년부터 1945년까지 “文先生 해외유학시절 4년”을 기록하고 있으며 동 대학 건축과 출신 엄 덕문 (嚴德紋)씨의 증언을 발판으로 하고 있다.

와세다대학에 학적 없어

그러나 일본 每日新聞社 취재기자의 조사와 일본통일교 반대운동본부에서 와 세다대학 학생부에 문의한 바, 문 용명이나 江本章明이나 문 선명 등의 이름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는 것으로 보아 문 교주는 와세다대학에 다닌 사실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밝혀 지고 있다.

문 교주의 교리에 설득당한 엄 덕문씨의 확실한 입증도 없이 그저 우물쭈물 하는 식의 동창생이라니 정확한 엄 덕문씨의 답변 · 입증이 없이는 문 교주의 와세다대학 졸업설은 거짓일 뿐이다.

그러나 문 교주가 일본에 머무르고 있을 때, 엄 덕문씨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을 쓰고 하숙을 했던 때가 있다고 친척으로부터 질문을 받은 엄 씨의 대답은 문 교주가 와세다대학 예과에 다녔다는 말도 있다.

문 교주 자신의 말을 빌리면 동경 유학시절에 수 많은 미녀들의 유혹이 있었 다고 실토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혈서 (血書) 까지 쓴 여인도 있었다고 자랑삼아 말했으나 문 교주는 예나 지금이나 여자들에게는 매력있는 존재인가 싶다.

그러나 그는 그 많은 유혹을 단호히 뿌리 쳤다고 하나 본 사람이 없는 데다가 워낙 거짓말을 잘하니 뿌리 쳤는지 넘어갔는지는 문 교주 외에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문 교주의 말에 의하면 동경시절 4년은 사탄세계를 연구키 위한 기간이었으며 유학시 절에 독립 운동에 참여 했다고 주장하는 그는 사탄세 계 와 싸워 야 할 하늘의 정 신훈련이 었다고 주장한다.

이상과 같은 문 교주의 위장경력은 서서히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으며, 그의 가증한 속셈이 들어날 날이 머지 않아 올 것이다.

눈이 나빠 중학입시에 떨어지다

1960년대에 청파동에 있는 통일교 본부에서 문 교주의 6촌 동생되는 문 승균 (한국 티타늄 사장)의 문 선명 교주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자.「선생님 (문 교주를 가리킴) 은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하여 무척 열심히 공부하였 읍니다.그러나 입학시험에 떨어지게 되자동리 사람들은 “저렇게 열심히 공부를 한 사람이 떨어졌으니 어떤 사람이 합격하겠는가”라고 말을 했다는 간증 속에서 문 교주의 열성과 노력을 발표하려는 의도가 빗나가자, 문 교주는 즉시 육촌동 생의 말을 가로 막고 얼굴표정까지 달라지더니 하는 말이 “그때에 눈이 나빳어. 그래서 공부하기에 힘이 들었다”고 불합격의 변명을 어색하게 늘어 놓은 적이 있다.

그때 그 변명을 듣고 있던 신도들의 대부분은 그대로 믿었으나 좀 성격이 차 분하고 냉정했던 조 모여사가 말하기를 그때에 눈이 나뻤다면 안경도 있었을텐 데一라고 하면서 문 교주의 변명을 정면으로 비꼬고 나서자 문 교주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잘 꾸며대는 문선명

문 교주는 본처 최 선길과의 만남에 대하여 삼류소설과 같이 아주 그럴듯하게 꾸며 서 이야기하고 있다.

1959년 여대 생 등이 가출해서 10여명이 집단생활을 하고 있을 때, 청파동 통일 교본부 부근에 문 교주가 명원회 (明園會) 라고 명명한 여학사에서 그가 최 선길 과 결혼하기 전에 처가를 드나들던 이야기를 흥미있게 들려주곤 했다.

문 교주가 최 여인의 집에 들리면 그 집에서는 대 환영이었다. 한 번은 문 교주가 말을 타고 처가에 갔는 데 그 말은 처가 뒷 동산 소나무에 매어 놓고 약혼중인 최 여인집에 들렸더니 최 선길이 무슨 영문인지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문은 최 여인의 간청을 한 마디로 거절하고 그대로 있으라고 타이른 후 말을 타고 벌판을 달리자 검정치마 흰저고리를 입은 최 여인은 “선생님——”하고 한 없이 불러댔고 그 음성이 귓전에 맴돌아 더 나아갈 수 없어서 말을 멈추고 뒤 쫓아 달려 온 최 여인을 태우고 평북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 자기 집으로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와같은 이야기에 대해서 문 교주와 가장 가까웠다가 후일 퇴교한 36가정의 유 모씨는 문 교주의 이러한 이야기가 황당무계한 조작극이라고 반박한다.

문 교주의 처가인 최 여인집은 정주군 곽산면 관삽동에 있는 최촌부락이요, 최 선길 여인집은 장요장로교회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더구나 최 여인집까지는 곽산역에서 작은 내를 낀 달구지 길로써 영창국민학 교가 있고 긴 허리동리 다음이 장요리인 최촌부락이었다고 하며 거기서 1 키로 정도 떨어진 데 에 탕우리가 죽은 유 효원 전 협회장의 동네였다고 한다.

문 교주가 말을 매었다는 거기에 뒷동산은 커녕 소나무도 10리 밖의 맴산에 가야 볼 수 있고 허 허벌판이요, 그 외에 장요리로 통하는 뒷논두렁길 밖에 없다고 하니 문 교주는 이야기를 실화처럼 꾸미는 데 천재적인 소질을 지닌듯 싶다.

그는期년대에 가끔 간부신도들과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자기가 소설을 쓰려고 하면 기가막힌 소설을 쓸 수 있고, 옛날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밤새껏이라도 멋진 이야기를 전개할 수 있다고 자랑삼아 털어 놓은적이 있는 데, 그의 입심쏜 어느 누구보다도 좋아 종종 밤을 새워 가면서 이야기를 할 정도였다.

또 자신은 상대방의 넋을 홀랑 빼 버리는 데 자신이 있다고 하며 쓸개까지 빼 놓고 미치게 만들 수 있다고 자랑삼아 자주 이야기 하곤했다.

문 교주의 말은 어디서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진실성은 물론 알맹이도 없는 이야기들이 많았으며 추종신도들에게 이야기를 할 때는 짐짓 두 주먹을 움켜 쥐고 마루장을 발로 구르며 있는 힘을 다 해서 몸짓으로, 마치 희극배우처럼 연기력을 짜 내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특히, 여자들은 거의 백프로가 그의 말에 넋을 잃고 따라갔다.

훈 교주는 흥남형무소에서 복역할 때의 쌀가루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의 모친 이 면회 온 이야기라던가 그외 신화같은 루머는 그와 같이 복역했던 옥중 동기 생들의 주장을 종합컨대 엄청나게 과장하거나 조작한 이야기들이 수 없이 많다 는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예물 갖고 올 것이다.

지 난 1956년 경 이라고 기 억 된다. 문 교주가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이란 영화를 보고 오더니 솔로몬의 이상이 재림주의 이상으로 상징된다고 했으며 시바의 여 왕은 타락한 하와로서 복귀받기 위하여 예물을 가지고 동방에 재림한 문 교주 자신에 게 불원간 찾아 오리라고 예언했다고 이탈한 측근이 전하고 있다.

1954년에 청파동 본부교회에서 문 교주는 3년만 있으면 남북통일이 된다고 예언을 했다. 이때 문 교주의 예언을 믿고있던 이탈한 간 부인 유 모씨는 그 의친구인영락교회 집사 · 장로들에게 문 교주의 예언을 걸어 놓고 내기를 하여 각서까지 써 놓고 1957년을 기다렸으나 통일은 커녕 무일도 없어 결국 유 씨는 지고 말았고 친구들 사이에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1955년경 문 교주는 공산주의는 그 발단의 시작으로부터 3대만에 망하고 만 다고 예언을 했다.

모세의 성막이상을 사울왕 · 다윗왕 · 솔로몬왕 등 3대에 걸쳐서 성전건축의 이상을 실현 했듯이 칼 막스의 공산주의이론은 레닌 · 스탈린 · 후르시쵸프로 끝 난다고 예언이 그럴싸한 근거까지 제시했으나 빗나가고 말았다. 또 문 교주는 예언하기를 유엔이 120개국이 되면 역사적인 종말이 오고 죄악세계가 완전히 끝난다고, 1950년대에 공식석상에서 자주 발언을 했으나 현재 120개국이 넘었어 도 세상은 끝나지 아니한 것이다.

문교주의 엉터리 예언은 모두 빗나갔고 선동과 미혹하는 데 안성맞춤일 뿐이 었다. 재림주로서의 문 교주의 예언이 하나도 맞지 않은 점을 통일교신도들은 신중하게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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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년도 못간 김영운의 결혼

문교주의 원리에 의하면 통일교신도가 아닌 사회 사람들을 완전히 사탄으로 몰아치고 있으면서도 미국에 선교사로 가 있는 김영운 선교사는 세상 사람과 축복을 해주었으나 얼마 못 되어 헤어지게 되었다. 사실 김영운여사 야말로 통일교 미국선교의 개척진 중 인격적으로 훌륭한 학자로서 초창기부터 고생을 했고 그녀는 바른 말 잘 하기로 유명하여 문교주의 두통거리였다. 다른 신도들이 문교주에 맹신하는 데 비해서 김영운여사는 따지는 편이고 성서적인 지식이나 신학에 어두운 문교주에게는 위험인물 이였기에 그녀를 세상 사람과 결혼하도록 하여 자연도태를 시켰는지 모를 일이 다.

그들의 교리로 볼 때 불신의 세상 사람과의 결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하는 문교주의 속셈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통일교 본부 청파동교회에서 행한 감영운여사의 결혼식전에서 소위 영통한다는 통일교 교주 측근의 할머니들은 계시를 받아 보니 그 결혼식이 하늘이 기뻐하며 축복하는 행사라고 하면서 기뻐하며 축복해 주었는데 1년도 채 못 넘기고 헤어지고 말았으니?……

 

사기 당한 문선명
1956년경으로 기억된다.

당시 배재학교 교목이었던 김 모 목사는 통일교의 이론을 연구하기 위해 약한 달간 청파동 통일교본부에서 침식을 하면서 문교주로부터 원리강론을 듣고 교주의 생활을 연구하였다. 그가 한 달 만에 결론을 내리고 돌아선 것은 문교주가 적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1957년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18세 가량의 정신이상자인 소년 하나를 김재건 노파와 홍순애 (현재 문 선명의 부인인 한 학자의 모친)여인이 자기네들의 신통력으로 정신이상증세를 고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지나치게 안수. 안찰을 하다 결국 맞아 죽은 사건이 발생하여 두 여인은 강원도 춘천형무소에서 2년간에걸쳐 복역을 하고 나왔다.

통일교는 초기에 이적이나 신유의 역사가 많은 것처럼 선전하고 있으나 사실은 모두 위장된 거짓일 뿐이다.

성서에는 악령이 들린 미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알아 보았으나 통일교본부에서 유숙하면서 발악하는 정신이 상자들을 상대로 야단을 치면 소위재림주라는 문교주를 상대로 욕을 하고 대어드는 일도 있었으나 악령의 눈으로 볼 때, 재림주는 커녕 가소로운 가짜 재림주임이 틀림없다고 판단되고 있는지 추측된다.

적어도 문교주가 재림주라면 그의 원리인 부활론에서 말하고 있듯이「영인들의 재림으로 본 종교통일」에서와 같이 귀신들린 청년을 문교주의 말 한 마디로 내쫓아야 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1957년도에 있은 일이다. 36가정의 양 모 씨의 부친 姜 大成씨가 통일교에 접근하여 문교주와 중진간부들에게 말하기를 <만리동에 적산가옥의 빈 집이 큰 게 하나 있는 데 집회장소로 사용하면 좋을 것이라> 고 하면서 <재판중에 있는 이 집을 찾아가서 통일 교에 기증하겠다고 하여, 잔뜩 욕심이 생긴 문교주와 간부들은 만리동 집을 구경했다.>

강 씨는 100만환만 있으면 이 집을 찾을 수 있다는 밀에 속아 문교주는 급히 100만판을 마련하여 강 씨에게 넘겼던 바, 돈을 받은 강 씨는 그 길로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이러한 사실은 재림주를 자처하는 문교주의 물질적 인심과 사람 하나도 볼 줄 모르는 문교주의 안목을 그대로 들어 내고 있으니 사기꾼도 문제지만 속는 사람도 문제가 있는 법이라 통일교에서는 이런 사실을 창피스러워<쉬쉬> 하며 덮어 두고 있다.

1960년 초반의 일이다. 아주 그럴싸하게 잘 생긴 50대의 부인이 자칭 엉통인이라고 하면서 문교주를 찾아 와 접근했다.

그 여인의 이름은 李東錫 었고 그녀는 해인사에 있는 팔만대장경이 자기의 자기 집 장농 밑에는 하늘 뜻을 이루기 위해 평생을 준비한 금과 보물이 가득들어있다고 늘어 놓았다.

장농 속에 있다는 귀금속 보물이 탐난 문교주는 군침을 삼켰다. 그리하여 문교주와 그 여인은 서로 가깝게 지냈고 교주는 그녀를 깍듯이 모셨고 자기전용찦차에 태워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교주는 자기의 제자인 김인철과 이 여인간에 수양아들과 어머니 인연을 맺어 김 씨로 하여금 장농 속에 있는 수 십억대의 보물을 확인케 할 계략을 썼다. 하루는 이 여인이 급히 쓸 일이 있다고 하여 교주로부터 40만환을 받아서 그 길로 행적을 감춰버려 문교주는 닭 좇던 개 담장을 바라보는 격이 되었으니이 역시 한치 앞도 내다 못보는 가짜 재림주의 실패극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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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교주가 과욕으로 빚은 또 하나의 사기 망신극이 있다. 1955년대에 일어난 오창환 사건이었다. 이화여대 사건 당시 문교주는 본부 간부들과 같이 서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때 유효원 협회장과 같은 감방에 복역하고 있던 오창환이라고 하는 37세의 죄수가 얼마 후 형기를 마치고 먼저 나온 유효원씨를 찾아 통일교본부에 나타났다.

유효원이 오 씨를 문교주에게 인사시켰더니 며칠 후에 오 씨는 유효원과 문교주에게 이런 달콤한 말을 던졌다.

「인천에 목재가 많이 있는 데 80만환만 있으면 몇 배 장사를 할 수 있다.」

그 말을 들은 문교주는 김 모 부인에게 급히 자금준비를 지시하여 급전을 마련해 가지고 그 다음날 협회간부였던 유 모씨가 돈 가방을 가지고 오 씨와 함께 인천으로 떠났다.

인천행 버스 속에서 오씨는 돈 가방을 들고 도망쳐 버렸다. 결국 오 씨의 사기극에 분격한 문교주는 신도 여러명을 동원하여 오 씨의 행방을 추적하였다.

오씨가 인천과 노량진 미군부대에 있었다는 말을 근거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감영운여인이 미군부대마다 돌아 다니면서 오씨를 찾았으나 허 탕을 쳤고 조 동석씨가 우연히 오씨를 붙잡아 주었는데 문교주는 그를 다시 형무소에 보낸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 볼 때, 문교주가 참 재림주라면 사기꾼 하나쯤은 식별할 줄 알아야 할 것이었다.

더구나 예수께서는 죄인과 원수를 위해 목숨을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였으나 현대판 자칭 재림주 문 용명은 오히려 잘못을 사과를 하는 오 씨를 안면을 바꾸고 냉정하게 형무소로 보내 버렸으니 인류의 참 부모라는 문교주의 도량이 어떤가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문선명의 배부에는 점쟁이와 잡도인들이···
1950년대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된 용산구 원효로에 살고 있는 윤청정심보살(1981년에 살해 당한 윤 보살)과 문교주와 얽힌 이야기는 통일교가 어떤 집단인가를 정확하게 보여 준다.

윤 보살은 원래 용산역전에서 사주를 봐 주고 점을 쳐 주는 자칭 영통인 인데 통일교와는 1950년대부터 인연을 맺고 있다.

그는 통일교인들의 사주 · 관상을 많이 봐 주었고 문교주를 재림주라고 증거 하였기 때문에 통일교인들은 영통한 잡도인이 문교주를 재림주로 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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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한다고 하여 통일교를 중심한 종교통일을 그들의 교리인 부활론에서 예를 들어 윤 보살을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윤 보살이 1981년도에 원효로에서 살해당하므로 그들의 선전꺼리가 사라져 버렸고 주간종교 신문에서는 윤 보살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까지 실은 넌센스를 보였다.

문교주와 흥남형무소 옥중동기생인 김 덕진 (현재 목사) 씨가 부산에 내려 가는 데 기차 속에서 윤 보살이 김 씨를 보더니 “선생님 신수가 훤 하시어 앞으로 큰일을 하겠수다” 라면서 말을 걸어 왔다.

그러다가 이야기하는 도중에 문 선명 이야기도 나오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송 상로와 더불어 통일교 중진들과 만나 사귀게 되었다.

윤보살과 송 장로의 미리 짜여진 각본에 의해 문교주를 재림주로 증거케 되었다.

문 선명 자신을 재림주로 증거케 해 준 윤 보살을 문교주는 최대한 이용했고 윤 보살은 윤 보살대로 통일교인들의 사주를 봐 주어 초창기 신도들은 유 보살에게서 사주를 안본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어 재미를 보았으니 문교주와 윤보살의 수수관계는 계속되었다.

본래 바람기까지 있는 윤 보살은 김 모씨와 자기가 같은 관계를 맺었다고 실토하고 있었음을 보아 그외 통일교 간부들과의 관계도 석연치 않다.

문교주는 가짜이건 진짜이건 간에 자신을 재림주라고 증거하면 흥미를 갖고 좋아하며 선전꺼리로 이용한다.

문교주는 사주 · 관상쟁이를 좋아했다. 1960년대 초반에 문교주는 종로구 인사동에서 직업적인 사주풀이를 하고 있던 이 명학이라는 이 노인과 친했다.

이 씨는 통일교의 축복가정 (문교주 주례로 결혼을 한 가정) 들의 사주를 봐주었고 그 사주풀이에 따라 문교주는 36가정 · 72가정의 찍을 맞추어 주었고 이때 사주보따리를 들고 심부름을 한 사람은 송 장로였다.

남녀 의 결함을 사주쟁이의 판단에 따라 결성하는 재 림주연 (再臨主演) 하는 문, 교주는 사주쟁이 이씨가 좋다고 하면 짝을 맞추어 주었고 나쁘다고 하면 짝을 안맞추어 주는 등 결국은 신도들의 짝은 중심까지 들여다 본다는 문교주가 맞춰주는 것이 아니라 어이없게도 사주쟁이에 의해 맞춰지는 것을 맹신도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하늘을 모시고 뜻을 편다는 통일교의 문교주의 이와 같은 미신적인 처사는 이해가 안되며 통일교에서는 이를 두고 문교주의 결정을 외부의 사탄까지 증거한다고 거꾸로 선전하고 있으니 거짓의 명수들인 것이다.

유명한 사주쟁이와 재림주가 결정하여 결합시킨 축복가정들이 탈퇴하고 이혼까지 하는 일들이 속출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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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에 발생한 사주쟁이 이 재덕간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재덕은 송 장로를 통해 통일교화 인연을 맺고나서 통일교의 내막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자이다.

한 때 문교주가 그의 뜻을 펴기에 암담한 시기가 있었으니 그때 최원복여인은 소위 도인 (道人) 이라고 하는 사주쟁이 이 씨를 찾았고 통일교 부녀신도들은 상도동에 있는 이 씨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이 씨는 문교주 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기 자신은 문의 아버지 격이라고 했다.

최 여인이 이 씨를 찾아가자 이 씨는 당장에 하는 말이「당신은 인류의 어머니」라고 하는 바람에 넙죽 엎드려 큰 절을 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통일교 가성하려면 자기의 핏줄을 받아 재생해야 한다” 고 하면서 “문교주의 사명이 하늘에서는 끝났다” 고 털어 놓았다고 한 이탈자는 전한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통일교인들이 문 선명이 재림주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소위 잡도인이라는 영통인들까지 찾아 동분서주해야 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문 선명을 재림주로 만들기 위한 억지 편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1973년도에 문교주는 경기도 청평별장에서 36가정과 1970년도에 시작된 3년 노정이 끝난 전도대원들을 모아 놓고 조상풀이 (解怨) 굿을 했다.

그때에 막걸리 · 돼지대가리 · 떡 등의 제삿상을 차려 놓고 논산 할머니 이 백임의 주도아래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고 하면서 무당식 절을 하고 굿을 했다.

당시 이 백임 노파는 67세로서 원래는 대종교 교인이었는 데 73년 문 선명과 줄이 닿아 통일교에서 영통인으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통일교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언제나 제주노슬을 하다가 1979년 9월 암으로 사망했다.

문교주는 젯상을 차려 놓고 양편에 라헬과 레아로 지칭되는 여인을 거느리고 큰 절을 하면서 이것은 영계를 해방시키는 의식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통일교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영통인 (?) 논산할머니는 통일교 산하 각 기업체까지 순회까지 하여 통일교인들은 다 이러한 의식에 참가한 것이다.

이러한 해원굿은 한국의 무속적인 굿거리와 꼭 같은 것으로서 소위 기독교 간판을 걸고 있는 통일교가 이러한 비밀의식을 갖는 접으로 보아 통일교는 기독교가 아닌 유사 기독교임을 알 수 있다.

통일교 내부에서는 조상풀이굿 외에 수 없이 젯상을 차려놓고 절을 하는 행사들이 많고, 특히 신도들은 문교주에게도 큰 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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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파동 통일교본부 2층에 있는 문교주 방에서는 실로 기상천외한 의식이 벌어졌으니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간부 유 광렬 등 여러 명이 각국 대표로 분장하여 문교주 앞에 항복하는 절을 하는 의식 인데 예를 들자면, 소련대표 00 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절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 몬도가네식 의식을 행하기 위해 차려지는 호화판 젯상과 의복에 엄청 난 경비가 소요됨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문교주는 죽은 자의 원한을 풀어주는 해원풀이굿을 하나 사실은 통일교의 역사에서 젊음과 재물과 정조를 희생당한 산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 더욱 급선무일 것이다.

산 사람과 원수지간에 있으면서 죽은 자 조상까지 원한을 풀어주는 의식을 행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문교주 조강지처를 버리다
1945년 4월 28일, 문 용명은 그의 나이 25세에 평북 정주군 관주면 관삽용에 있는 長腰敎會에서 崔先吉과 결혼식을 올렸다.

최선길은 長腰長老敎會의 독실한 신도였고 그 교회 집사인 큰 오빠 崔 重吉 씨의 뜻을 따라 재건파교회로

교적을 옮긴 신앙경력은 있으며 작은 오빠의 이름은 崔重建씨이며 그의 부친은崔 竜日씨였다.

1946년 음력 3월, 서울 흑석동에서 신혼생활을 하던 중 장남인 文 聖進을 낳았다. 문은 1946년. 6월에 평양에 월북했다가 1·4후퇴시 부산으로 남하하여 그 이듬해 부산에서 비밀히 집회를 갖고 있을 때, 본처 최선길과 재회하였다. 그때 이미 문 선명주변에는 여인들의 그림자가 그치지 않고 따랐으며 문교주의 문란한 생활과 신앙관이 맞지 않았던 최 여인은 남편 문 선명과 충돌했으며 악착스럽 게 문교주의 여 인군상들과의 관계를 끊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문교주는 처인 최여 인을 몰래 피해 다녔으며 조강지처와 자식까지 배신하고 버린 그는 부산 범냇골 (범천동) · 수정동 등지를 전전하면서 복귀원리 (피가름의 교리) 를 중심삼고 집회를 갖고 전도하기 시작했다.

최 여인도 자기와 자식까지 배신한 남편을 찾아 형사들까지 동원한 바 있다.

문교주의 피가름의 비 밀을 알고 있는 최 여 인은 문교주를 찾아 다닐 때마다 광신도들로부터 제지를 당했고 정면에서 난투극을 벌인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문교주는 본처인 최선길에 대해 신경과민이 되었고 그 때마다 신도의 돈뭉치를 치마폭에서 동원했고 최 여 인의 반대역사를 막는 데 수 많은 돈을 날렸다고 그의 측근에서 따랐던 X씨가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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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여인은 배신한 남편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에서 계속 추적하다가 1957년 1월 8일에 끝내 합의이혼형식으로 문교주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때 최 씨의 작은 오빠인 최 중건씨와 통일교측 대표였던 X씨는 그들간에 사돈지간이었으므로 문교주와 최 여인에 대해 합의이혼이란 결론을 내렸던것이다.

그때 통일교측 대표 (현재 이탈했음) 였던 X씨는 위자료조로 50만환을 최 여인 에게 주었고 아들 성진이는 반공포로 교환하는 식으로 교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리하여 최 여인은 혼자 몸이 되었고 문교주는 아들을 데려 온 것이다. 그러나 최여인의 가슴에 맺힌 채 원한의 감정이 사그러질리가 없어 계속 문교주를 괴롭혔고 아들을 빼앗아 왔다가 빼앗기는 악순환이 되풀이 되었다.

최 여인의 작은 오빠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처음에는 저도 용명 “문교주” 이의 행동을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이해하드 동생 선길이더러 “참으라” 고 달랬으나 지금은 “용명이 그 X의 새끼, 개X의 새끼”」라고 분을 터뜨린다.

최 여인은 그후 1960년대에 문교주의 집단인 통일교로부터 피해를 당해 님 편을 빼 앗긴 다른 두 여 인 (유 효영씨 부인 및 유 효민씨 부인) 과 함께 통일교의 진상을 세상에 폭로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동분서주하였던 사실이 있다.

최 여 인은 서울 영락교회에 몸을 담고 신앙으로 그 아픈 배신의 상처를 달래고 있다가 지금은 상도동의 모 교회에 나가고 있다.

문교주와 이혼당시 통일교측 대표였다가 현재 이탈한 바 있는 유 모씨가 최여인의 친척 오빠를 75년도에 길거리에서 만나 최 여인의 소식을 물었더니 언젠가도 수사기관에서 연락이 왔는데, 최 여인의 신원을 보장하겠다고 하면서 그 내용인 즉, 문교주의 동생인 문 승균 (한국 티타늄 대표) 이 한 달에 한 번씩 통일교 신도들 몰래 최 여인집에 보내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보기 에 혼자 사는 과부가 윤택한 생활을 하는 데 의심 품었고 더구나 이북 말을 쓰는 중년남자가 드나든다는 데 수상하게 여겨서 시나 간첩이 아닌가 하여 수사기관에 신고하였다는 것이다.

재림주로 자처하는 문교주가 신앙이 독실한 본처를 버리고 17세의 앳된 소녀 한 학자 (현 부인) 와 재혼을 한 처사는 인간 윤리상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이탈자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그러기에 아들인 문 성진도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다. 더구나 이렇게 저렇게 태어난 배다른 이복형제들의 맏형으로서의 고민과, 자신과 불과 세 살 차이 밖에 안되는 한 학자여인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모셔야 할 그로서는 말 못할 고민이 많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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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가짜 재림주다

문 성진은 1974년 일본에서 36가정 중 10인의 간부에게 개인별로 사신 (私信) 을 띄운 중요한 “편지사건”을 일으켰다.

「당신들이 따르고 있는 우리 아버지는 재림주가 아니므로 각자의 앞길을 찾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각자 갈길을 가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통일교본부에서는 이 편지 때문에 비상이 걸렸고 각자 간부들이 받은 편지를 회수하느라고 야단들이었다.

그 후 즉시로 전 재단이사장 김 원필씨가 한국으로 왔다.

「성진씨가 당신들의 신앙을 시험해 보기 위난 것」이라는 변명 아닌 변명으로 편지사건은 일단 수습이 되었다.

성진은 1969년도에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김 원필 (전 일화제약 사 장) 씨의 딸 김 동숙 (金 東淑) 과 1974년 7월 18일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76년 5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애서 득남하여 아이의 이름은 “信一님”이 라고 명명했다. 성진은 1974년 출국시에 김포공항에서 병역미필로 출국제지를 당했는 데 그후 어떻게 해서 출국했는 지 궁금하다.

 

흥남감옥에서 얽힌 비화

필자는 지난 3월 20일 오후 7시 경 서울 중구 을지로 3가에 있는 통일다방에 서 문 선명의 흥남형무소 동기생으로 옥고를 같이 겪고 문 선명의 초창기 동지였던 박 모씨를 만났다.

다음은 박 씨와의 대화를 엮어 나가려 한다.

강한 평안도 사투리를 사용하는 그는 만나자마자 이렇게 털어 놓았다.

지금 내 입장이 제일 편하다. 하나님은 바로 내 마음에 계시지. 작년 여름에 통일교 간부라고 하는 황 인태 (黃仁泰) 라고 하는 자가 몇 사람의 통일교도들과 찾아 와서 자기들의 선생님 (문 교주) 의 흥남형무소에 있을 때의 사기 (史記) 를 쓰겠다고 하기에 박 씨는 대뜸 황 씨에게 이렇게 쏘아 부쳤다고 한다.

「당신네들 이제 나더러 거짓말하라면 금덩이를 갖고 와서도 안돼, 또 정말을 말하라고 해도 안해」그러자 말도 못붙이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박형! 요즘 사이비종교문제가 계속 신문에 나고 있는 데 통일교에서는 그 기관지 주간종교에 한 번도 사이비종교를 규탄하거나 기사화 못하고 있는 데 그 이유는 뻔하지 않소」라고 우리 일행 중 Y씨가 말을 하자 죄없는 자가 이음 란한 여 인을 돌로 치라고 한 예수의 기사를 비유로 들어 박 모씨는 Y씨에 게 답변했다.

다방에서 담소를 즐기던 우리 일행은 모래내로 가기 위해 다방 문을 나와 택 시를 잡아 탄다.

이때 택시 안에서 박 씨는 입을 열었다.

「문 선명과 김 원필, 나 이렇게 셋이서 남하할 때 임진강을 건너서 김 원필이 입회한 자리에서 나에게 묻기를, 내가 언제 자네를 버릴 때가 있다면 자네는 어떻게 하겠는가? 라고 물었지. 그래서 그때 내 대답이 그러면 당신을 죽여 버 리겠다고 대답했더니 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버리더군요」

박 씨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말끝을 맺었다.

이때 다시 동행했던 Y씨가 물었다.

「박형! 그 김 덕진 (金德振) |一현재 목사로서 유치장 전도를 하고 있음一씨 있지 않소? 그 김을 문이 제거하라고 했다는 말은 사실인가요?」

이때 박 씨는 사실이라고 확언했다.

「김 덕진씨는 그때 문 교주가 운영하던 서진광산에 있었는 데 그때 제거하라고 지시를 내렸지요. 나도 그와 더불어 서진광산에서 한 3년 같이 있었지」

우리는 모래내에 도착하여 일식집 은성에 들어가 아늑한 방을 잡고 앉았다.

여기서부터 박 씨의 굳게 닫혔던 입은 술술 풀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흥남감옥소에서는 1,500명 가량의 죄수가 있었고 문 용명이가 입감할 때에 나와 문, 그리고 신천동교회 목사이며 애국자로서 민족주의자였던 김 지수 목사와 셋이서 한 감방에 있었지. 그후 나중에는 한 방에 30명이나 쳐넣어 옴짝 달싹도 못하게 만들어 버렸지.

그때 내가 1,500명 죄수를 다스리는 총 감방장이였고 10명이 1개조가 되어 조장 15명을 통솔하는 총 반장 노릇을 했 지요.

형무소 죄수들은 종종 굳어버린 비료산을 곡팽이로 찍어서 파내는 작업을 했 고, 이것을 부대에 담아 묶어 가지고 1인당 하루 200부대 정도의 책임량이배당 되는 중노동이었지요.

나는 형무소에 입소한지 3개월만에 총 반장이 되었고 그때 형무소장은 나보다 두계급이나 아래였지. 내 고향은 평양이었고 서문밖교회에서 유아세례까지 받은 장로교인이었고 평양 남산국민학교를 거쳐 숭실 전문학교를 마쳤지요.

박 씨는 전문학교 2년 재학시에 2,000명 모이는 서문밖교회에 학생으로서 집 사직분을 가지고 있었다.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 갔다가 귀국해서 일본군에 입대했다. 일본군 공병부대 중위로서 31세 나이의 박 씨는 길림 (吉林) 을 거쳐 송화강에서 덴바책임자 노릇을 했다.

해방이 되자 귀국해서 다시 인민군에 들어가 해주에서 인민군 중대장을 했고, 그때에 학교 동창생인 김 인철 (金寅哲, 통일교 36가정) 씨를 만났다. 김 인철씨 와 같이 숭실학교 축구부에서 활동했고 김 덕진씨는 응원부장이었다.

박 씨는 해주 중대장 당시 계급은 인민군 상위 (대위) 였고, 김 인철씨 집에서 여관업을 하고 있었기에 김씨 집에 기숙하고 있었다. 그 때 김 인철씨는 해주에 자녀가 7명이나 있었다. 박 씨는 그 당시 월권행위와 근무태만죄로 2년 6개월 징역형을 받고 흥남형무소에 입소하게 되었다.

박 씨는 문 용명보다 7년이나 연상 (年上) 이었고 복역중인 문 용명은 총 반장인 박 씨에게 “손이 아파죽을 지경이니 제발 비료부대 묶는 일은 시키지 않았으면 좋겼다”고 간청해 왔고, 그래서 박 씨는 문을 콤베어벨트작업을 시켜 문 용명의 편의를 봐 주었다.

통일교에서는 김 원필이 문 교주를 대변해서 흥남옥중시절에 대한 간증을 할 때 늘 입버릇처럼 해대던 이야기, 즉 비행기가 비료공장을 폭격할 때.문 용명은 자기가 서 있는 10미터 안으로 들어오면 산다고 외 쳤다는 이야기는 새빨간 거 짓말이라고 박 씨는 폭로한다.「내가 이렇게 두 눈을 뜨고 살아 있는 데 그까짓 거짓말을 꾸며 가지고 문을 신격화시키는 일이 될 법이나 한 일이야?」

박 씨에 의하면 그 때에 B29 폭격기가 계속 폭격을 했고, 그 때에 박 씨는 “감 옥으로 가야 살지 여기 있다가는 다 죽는다”고 고함을 치자 현장에서 일하던 사회 사람들은 다 죽었고 죄수들은 감옥소로 들어가 비행기가 감옥은 폭격하지 않아 다 살았다는 첫이다.

그 때 죄수들은 박 씨의 명령 때문에 살았고 국제법상 형무소는 폭격하지 않 는다는 것을 박 씨는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런 기지를 발휘하여 인명을 구했는 데 문 교주는 그것이 자기가 한 것처럼 꾸며대어 간증하고 있으니 얼마나 거짓 말의 명수인가 알 수 있다.

그 당시 쌀가루에 얽힌 이야기 역 시 통일교 안에 서는 유명한 이야기인데 그 내용인즉, 문 교주가 자기의 밥을 동료 죄수들에게 나눠 주었고, 쌀가루 역시 나누어 주었으며, 하루는 쌀가루 반사발 정도 남은 것을 누가 훔쳐갔으므로 작 업을 마치고 감방에 둘아와 보니 같은 방의 죄수들은 그 쌀가루 빈봉지만 쳐다 보고 있는 데 문 교주는 훔쳐간 사람을 미리 알고 나머지를 분배할 때 훔쳐간 사람에게 제일 많이 나눠주자 감동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미수가루 절도범은 그만 배가 고파서 훔쳤다고 실토하면서 눈물을 홀리며 용서를 구했다는 것이다.

또 밥도 한 공기를 가지고 오래오래 씹어서 먹어야 하는 상황 속에서 문은 언제나 옆 사람에게 나눠 주었다고 통일교에 서 문 교주는 수 없이 거짓 간증을 되풀이할 때마다 어떤 여신도들은 아예 감동이 되어 울기까지 했던 유명한 이 야기가 있다. 그러나 그것도 거짓말임이 박 씨에 의해 입증된다.

그 당시 형무소생활은 배가 고팠고 비료작업의 중노동을 하기 때문에 강엿을 먹지 않고는 오래 못산다는 것이었다. 30명이 한 방에 있었고 감방 안의 선반 위에는 수감자 집에서 부쳐 온 쌀가루와 강엿을 얹어 놓고 있었다. 처음에는 각자가 자기의 것을 먹었으나 후에는 모두 합의하여 똑 같이 나눠 먹었다는 것 이다.

처음 각기 먹을 때는 양복 한 벌과 쌀가루 한 사발을 맞바꿔 먹었다고 하니 얼마나 배가 고팠었는가를 알 수 있고, 박 씨는 한 번은 너무 배가 고파 훔쳐먹고 싶은 생 각이 들더 라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문 교주자신이 마치 자비의 화신 인양 밥과 쌀가루를 죄수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말 자체가 터무니 없는 거짓말 이라는 것이다.

그는 탐욕스러워 밥을 나눠 준 예가 없고 쌀가루는 통제되었으므로 오히려 문 교주가 박 씨와 다른 죄수들에게 신세를 졌으면 졌지 박 씨 기억으로 나눠 주는 것을 본 일이 없다는 것이다.

문 교주가 옥살이를 할 때 옥 세현여인이 가끔 쌀가루를 차입해 주었다.

문 교주의 어머니는 꼭 두번 면회를 왔는 데 그때마다 문 교주는 자기 모친에게 쌀가루를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흥남 감옥생활의 이야기는 자기를 신격화 · 우상화시키기 위해 신도들에게 조 작된 신화를 들려준 것이니 그때 중인이 버젓이 살아있는 것이다.

그 당시 형무소 동기생들이 박 씨 외에 金 元德 씨도 살아 있으니 문 교주의 거짓말은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박 씨는 형기를 마치고 1950년 8월 2일 출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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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명의 죄목은 “여성관계 사회교란죄”

그때 문 용명의 죄목은 사회질서 교란죄 (여성관계) 로 7년형을 받고 복역했는 데 통일교에서는 반공활동을 하다가 투옥됐다고 거짓으로 꾸며대고 있다.

문은 유엔군이 북진하자 1950년 10월 14일에 석방되어 평양에서 다시 박 씨와 재회하였다.

문은 평앙 육교리에 있는 광야교회에서 유부녀인 김 종화여인과 함께 어린양 혼인잔치라는 의식을 행하다가 이웃 사람이 고발해서 현장에서 체포된 것이다.

그때 문을 따르던 지 승도 · 옥 세현 · 김 인주여 인 등은 쌀을 씻고 면류관준비 등 예식준비를 부지런히 하다가 그 꼴을 당했다는 것이다.

박 씨는 지금도 김 종화여인과 그의 남편 이 집사를 만나고 있으며 이 씨는 종로 2가에서 양화점을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박 씨는 문 교주를 꼭 문 용명 이란 옛 이름을 부르고 있다.

출옥 후 평양에서 문과 만나 경상리 막바지에 있는 옥 세현여인의 집에 갔는 데 그의 남편 우 하선씨는 장재대교회 장로로 시무하고 있었다. 우 장로는 그후 목사가 되어 부산 온천장의 장전동에 있는 교회목사로 80이 넘어서도 목회 일을 보고 있는 훌륭한 목회자였으나 그의 부인이 문에게 미쳐 따라 다녔으므로 하 루도 심사가 편할 날이 없었다.

경상골 옥씨댁에는 김 원필이 같이 있었다. 혼음의 원조로 알려진 정 득은여 인은 문과는 바로 혼음의 수수관계를 맺고 있는 여 인으로서 평양에 살고 있었다.

박 씨가 문과 함께 옥씨댁 에 가서 하루밤을 묵고 나자 우장로는 말하기를 오 늘은 주일입니다. 예배를 봅시다 라고 하면서 문더러 기도하라고 했다. 그후 우장로는 박 씨더러 문 용명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와서 과거 옥살이할 때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더니「똑똑한 사람이 그런 사람과 같이 다니 지 마시오」라고 충고를 하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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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의 남하작전

1·4후퇴 당시였다.

문 용명은 평양 대동강을 건느면서 하는 말이,「우리가 삼위기대 (三位基臺) 라 야 산다」고 김 원필과 박 씨에게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평양 지리를 잘 아는 박 씨는 자동차 충돌사고로 오른쪽 다리 무릎 아래에 부상을 입고 있었으니 불 편한 다리를 이끌고 남하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

1950년 12월 4일 문 · 김 원필 · 박 씨 등 세 사람은 월남 길에 오른 것이다.

박 씨 일행은 30리 길을 걸어 박 씨의 부모가 살고 있는 박 씨의 고향집에 들렸다. 일행은 저녁을 지어 먹고 박 씨는 친척 동생들에게 배를 준비하라고 지시해 놓고 나서 어머님께는 잠깐 다녀 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떠난 것이 벌써 30년이란 세원이 흘렀다는 것이다.

그 당시 37세의 박 씨는 이 미 5남 1녀의 아버 지 였고, 장남이 17세 였고, 막내가 5세였으니 이 제 이북에 자녀들이 살아 있다면 40대 전후가 될 것이라고 회상한 다.

박 씨는 집을 나설 때 자기가 입던 낙타털 코트를 문 용명에게 입히고 다른 개털 오바코트는 김 원필에 게 주고 박 씨는 스프링 코트를 입고 출발했다. 우선 강을 건너 가서 누님댁에 들린 박 씨는 떡과 돈은 넉넉히 가지고 떠나 왔고 그 길로 남하하여 서울을 지나서는 도보로 계속 걸었다는 거이다.

통일교의 문 교주의 수석제자인 김 원필은 다음과 같이 이 때 남하할 때의 간증을 하여 통일교 신도들은 귀가 닳토록 들었고 문 교주가 의리 있는 사람이 라고 믿게 하고 있으나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 박 씨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문 교주와 김 원필, 박씨 일행은 자전차 한 대를 구해 다리가 부상당한 박 씨를 자전차에 싣고 문은 자전차를 끌고 김 원필은 뒤에서 밀고 가다가 박 씨가 「나를 버리고 선생님과 김 원필씨만 어서 떠나라」고 할 때 문 교주는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하면서 천륜이 맺어 준 인연을 함부로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으로 통일교인들은 알고 있는 데 사실은 그 일행이 황해도 황주 혹격고개를 넘어 오다가 박 씨가 당신들만 가라고 하자 문 용명은 “너 하나 떨 어지면 우리 모두 죽는다”고 말한 것은, 그 실은 지리를 잘 모르는 그들이 절대로 자기들 끼리는 남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음을 알고 박 씨를 데리고 남하한 것이다.

일행의 남하는 계속되었고, 경상도 경주까지 내려와 어떤 소반공장을 하고 있는 집에 들어가 쉬게 될 때, 주인 영감은 문과 김 원필은 부산으로 내려 가라고 하고 박 씨는 며칠 묵어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 박 씨는 문 교주 일행과 헤어져 경주에 남고 그들은 부산으로 내려간 것이다. 통일교에서는 문 교주가 이때 박 씨에게 돈을 주었고, 다리를 부상당한 박을 살려 주었는 데, 박 씨가 배 신했다고 박 씨를 비난하고 있으나 사실은 문 교주가 박 씨를 배 신했다고 박 씨는 흥분하고 있다.

박 씨는 경주에서 주인영감과 친해져서 가정교사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 1년을 지냈다. 부산에서 이 요한 (현 통일교 수련소장) 이 경주로 찾아와 내려가자고 했지만 그대로 주저 앉아 내려가지 않았다.

그후 부산으로 내려가 범냇골 (범천동) 골짜기로 문 용명을 찾아가 보니 그의 본처 인 최 선길도 같이 있었고 이 봉운 · 이 요한 · 강 현실 (현 통일교 부녀부 장) · 이 득삼 · 김 성실, 그리고 김 성일 (현 간부) 이 그의 부친과 누이인 김 복 순여인 등이 있었고, 수정동 김 명희 (金明熙) 의 모친도 있었다. 문 교주는 박 씨더러 유부녀인 이 모부인과 이상상대 (理想相對, 색시감) 라고 하면서 앞으로 이 여인과 더불어 통일교 발전을 위해 재정문제를 연구하라고 권했다. 이리하여 박 씨는 전매청에 새끼납품을 위해 남해에 가 있는 동안에 문 용명은 서울로 올라갔다. 박 씨가 뒤 따라 상경해 보니 문 용명은 종로구 청진동 모 여관에 묵고 있었고 거기에는 당시 보사부차관 문 홍모씨 부인도 드나들고 있었다.

다시 그 길로 부산에 내려가 문 교주가 살고 있던 범냇골 토담집에 갔더니 문의 본처 최 선길이 혼자 방을 지키고 있었다.

최 여인이 문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 씨는 모른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문 교주가 본처인 최 여인에게 큰 봉변을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최 여인은 박 씨더러 제발 문 용명을 찾아 달라고 간청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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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에서 또 어린양 혼인장치

그 무렵 교주는 서울 청진동 여관에서 X여인과 어린양 혼인잔치를 했고 김모여인도 문에게 미쳐 남편을 버리고 가출한 채 문이 묵고 있는 여관을 드나들고 있었다.

최 여인은 만약 이번에 남편인 문을 만나면 범냇골에서 몽둥이로 내 쫓아 버리겠다고 하면서 문의 소지품 일체를 집으로 가져 가겠다고 하자 박 씨는 문이 사용하던 성경책과 노트 (원리강론 원본을 기록한 것으로 현재도 박 씨가 보관하고 있음) 만 남겨 놓고 가라는 박 씨의 간청을 들어주어 지금도 박 씨가 그것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 여인은 만약 이번에 남편인 문을 만나면 단단히 보복을 할 각오와 결심을 굳혔다.

박 씨는 통일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보물처럼 여기는 그 노트를 가지고 서울 청진동 여관으로 들어왔다. 와서 보니 이미 문은 주소나 행방도 남기지 않고 어디로인지 바람과 같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결국 천신만고로 헤맨 끝에 문을 만나 보니 그는 당시 관재청 모 고관의 부인과 같이 있었고 그 자리에는 엄 덕문씨도 드나들고 있었다. 이때 부인을 잃어버린 그 고관은 문을 잡기 위해서 서울 시내를 샅샅히 뒤졌고 당시 문의 앞재비로 알려진 박 씨를 잡아야 한다고 해서 박 씨는 부득이 피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박 씨는 종로경찰서 형사에게 붙잡혀 문이 유부녀인 고관의 부인과 어디로 그 행방을 감추었는 지 소재를 대라고 하면서 24시간 조사를 받고 심지어 전기고문까지 받았다. 박 씨는 악이 받쳐 끝까지 모른다고 잡아 떼고 간신히 풀려나와 보니 또 문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박 씨는 혈혈단신 월남한 몸이라 찾아갈데조차 없었고 그렇다고 친구는 면목없어 못찾아 가고 돈도 떨어져 버려 어차피 문을 찾아야만 했다.

그 무럽 박 씨는 친구인 조 동석씨를 만났더니 조 씨는 다짜고짜로 박 씨더러 경찰이 알고 있으니 파하라고 하면서 돈 3만환을 주기에 그걸 받아 넣고 부산과 제주도로 도피해 버렸다. 그러나 돈은 바닥나고 하는 수 없이 죽으나 사나 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상경하여 간신히 문을 만났더니 당시 통일교에서 경영하는 경북 성주군에 있는 금광인 서진광산으로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

박 씨는 얼마동안 광산에 있다가 올라와 보니 문은 검정 찦차를 타고 다니고 있었으며 문을 만나려고 여러 번 시도했으나 만나주질 않아서 못만났다.

그러던 어느 날 인천 주안에 가서 신도의 집에 있는 문을 만나려하자 신도들이 문이 박 씨를 못만나게 문을 빼돌렸고 이에 화가 난 박 씨가 모두 다 때려 죽이겠다고 흥분하자 옆에 있던 김 인철 (金寅哲) 씨가 말렸다.

박 씨는 문을 위해 경찰에 끌려가서 곤욕을 당하면서도 비밀을 지켜 주었는데 그 결과는 배신의 쓰라림 뿐이었다. 결국 박 씨는 서울 역전에서 지게꾼들과 함께 하루에 빵 3개씩 사 먹으면서 3일간을 노숙했다. 다행히 아는 친구를 만나 여비를 마련해 가지고 부산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평양 숭실전문학교 출신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3개월만에 당시 돈으로 2억 7천만환을 융자받아 건축업을 시작했고 성공의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박 씨는 지금도 문이 돈이 생기니 자기를 완전히 배신했던 배신감에 원한이 사무쳐 있고 서진광산 시절의 일기를 보면 얼마나 고생을 했는 지 눈물없이는 볼 수 업을 정도였다. 문을 위해 만 7년간 가방 들고 따라 다녔던 박 씨를 헌신짝 버리듯이 차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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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아이를 밴 김명희 일본으로 밀항
당시 연대생이었던 오 승택 (현재 사업운영) 은 문의 아이를 밴 김 명희와 일본으로 밀항을 했고 문을 따르던 충성스런 유 경구는 죽었다. 그러나 황 환채 (현 통일교 주요 간부) 는 그대로 문을 따라 다니고 있었다.

문 교주는 자기에게 굽실거리고 맹종 · 아첨하는 자는 좋아하고 직언 · 충언을 하는 자를 싫어하는 성미였고 문선명은 바른 말을 소화시키지 못하고 결국 박 씨를 배신해 버리고 만 것이다. 언젠가 건축가이며 문 교주의 오랜 친구인 엄 덕문이 인천에 내려와서 문 교주가 여의도에 큰 건물을 짓는 데 같이 일을 하라고 권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북한에서의 문선명과 그 활동
1884년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되고 평양을 중심으로 신앙인들의 열심은 대단했다. 또한 그 유명한 부흥목사들에 의하여 평양은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지칭되었다. 문 용명이 성장하던 소년시절에 이 용도 (李龍道) 라는 부흥목사의 열변과 피와 땀을 쥐어짜는 듯한 눈물의 기도는 많은 신도들에게 깊은 감명과 은혜를 주던 그런 시대였다.

문 용명은 8·15해방당시 박 재봉 (朴在奉) 목사의 “성신강림 40일 부흥회” 를 늘 들먹이면서 자신의 복귀섭리관과 결부시켜서 말을 많이 했다. 이러한 시대적 종교활동으로 보아 재림주는 한국으로 강림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기 위한 심사였고 한 학자여인의 연령으로 보아 모든 은혜로운 집회의 의의를 문 교주는 자신의 섭리관에 결부시키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평북 철산 (鐵山) 의 새주 (主) 파와 복중교회 (腹中敎會) 의 “육신으로 오는 주님” 을 모시기 위한 그들의 준비를 문 교주는 자기 자신에게 결부시켰다.

문 교주는 1950년대에 설교할 때마다 새주파와 복중교회파가 지혜가 없어서 자기가 “육신으로 오시는 재림주” 임을 몰라 보았다고 술회하곤 했다. 이것이 문 선명이 자기자신을 재림주로 부각시키기 위해 우매한 신도들을 미혹하기 위한 숫법이었다. 그러므로 통일교 신도들은 가짜재림주를 만든 책임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문 선명의 정체가 백일하에 들어나 메시아가 아닐 경우 그 모든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평양에서 시작한 통일교의 문 선명은 혼란한 시기에 그의 생애를 잘 조화하여 합리화 시켰으나 오늘에 와서 그 거짓의 정체가 점차 들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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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두려움은 여인들과의 불륜관계

문 교주가 제일 고민하고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여인들과의 불륜한 관계인데 이것은 교단간부들도 확증이 없고 또 피해여인들의 일방적인 발설만 가지고는 증거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 교주가 어떤 여인과 음행을 했느냐 안 했나냐가 문제가 아니라 문 교주가 외치고 있는 바로 탕감복귀원리 자체가 문제이다. 그 교리는 엄연히 피가름을 해서 중생해야 하는 원칙이 제시되어 있고 문 교주,즉 참 부모의 혈통으로 거듭나야 할 원리를 내세워 재림주로 등장한 문 교주의 혈맥 (血脈) 을 절대적으로 하는 것으로 못 박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36가정까지 혈통이 대입 (代入, 문선명과의 섹스관계를 말함) 되었고 문 교주와 36가정의 간부들은 이것을 최대의 하늘의 비밀로 간주하고 있고, 자기네들끼리도 숨기고 있어야 할 문 교주와의 약속이 그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는 36가정에서 이탈한 몇 사람의 증언으로 입증되고 있는 바, 미구에 한 번 쯤은 폭로가 될 것이 틀림이 없다.

문 교주 주변에 있는 여인들을 중심하여 쳇바퀴 돌듯이 맴돌은 상태이니 복귀 원리의 원칙에서 생각해 보면 천의 얼굴을 가진 통일교의 모습과 바로 그 속에서 돌고도는 피가름의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문 교주 주변에 남편과 이혼한 과부들이 많았고 이들이 피가름 역사의 모체였고 이리저리 움직인 장본인들이라고 생각하면 많이 빗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여인들은 혼음원리를 추종하는 바로 그러한 사실이 하늘의 뜻으로만 알고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제일문제인 것이다. 통일교인들이 알고 있는 복귀원리는 성서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교리라는 사실을 제시해 주어야 하는 것이 오늘 기독교인들의 사명이요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문 교주의 복귀원리에 미혹당해 파괴된 가정들이 수 없이 많으며 피해자들은 당하고도 말못할 입장이고 또 알면서도 그들의 보복이 두려워 입을 못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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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복귀원리의 이론과 형성과정

혈통복귀 역사를 구상케 된 문 교주의 과거배경을 살펴 보는 것도 의의 있는 일이다. 1919년 기미 독립운동 이후 가중되는 일제탄압으로 평양지방에는 지하 깊숙히 잠복하고 있던 일부 기독교인들 사이에 이상한 주장이 나 돌기 시작했다.

에덴동산의 원죄의 장본인들이–아담 · 하와 · 천사장 (루시엘) –타락의반대입장에서 그 원죄를 청산하는 피가름의 역사가 혼음원리의 원조를 이루고 있다.

피가름 원죄를 성서적인 뒷받침을 하여 계승해 온 새로운 성령운동의 기수였던 황 국주 (黃國柱) 에 의한 해방 후 평양의 광해교회 시대와 자칭 대성모 (大聖母) 정 득은 (丁得恩) 여인의 복귀원리의 혈분역사 (血分役事) 와 경기도 파주에 있던 이스라엘수도원의 성혈운동 (聖血運動) 김 백문 (金白文) 등의 계통을 문 교주는 다 거쳐왔다.

특히, 정 득은여인의 성서적인 이론을 자기의 것으로 도용 · 각색하여 실천무대에서 세계적인 혈통혁명을 부르짖고 나온 것이다. 1947년 정 득은여인의 구술 (口述) 로 그의 제자 방 호동 (方好童) 이 책임 · 집필한 “생의 원리” 는 통일교 원리해설의 원서 (原書) 라고 할 수 있다.

문교주는 1946년 초 정 여인이 주최한 대성심기도원의 집회 때 정 여인의 내의까지 세탁해 주는 등 충성을 보였고 정 여인의 속옷을 받아 재림주로 둔갑을 하고 나온 것이다.

문 교주는 1958년도에 청파동 통일교 본부교회에서 수 차에 걸쳐 정 여인과의 관계를 털어 놓았다. 즉, 40일노정의 피 묻은 빨래를 세탁하여 주면서 충성을 다 하고 그녀로부터 받은 축복을 이야기 했다.「내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부인이다」라고 주장하는 정 여인과 문 교주는 복귀관계 (섹스관계) 를 가졌다고 수없이 말했으며 정 여인이 문 교주의 주관을 받아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하여 악령에 걸려 미쳐서 거리에서 방황하다가 죽었다고 하였다.

또한 27세 때 문 교주는 1946년 1월부터 6개월간에 걸쳐 겨기도 파주에 있는 김 백문의 이스라엘수도원에서 자기보다 세살 위인 김 백문으로부터 복귀원리의 영향을 받았다. 그 당시 김 백문의 이스라엘수도원에는 문 선명 뿐만 아니라 박 태선 · 나 운몽 · 지 용성 등 제씨들이 드나들었다고 김 백문에게 장소를 제공하고 편리를 봐 주던 정계의 거물급 인사였던 김 모씨는 증언하였다.

김 백문은 황 국주에 의해 영향을 받았고, 1945년 12월에 평양으로부터 월남한 신령파 정 득은 (丁得恩) 여인의 대성수도원을 찾아 자신의 피가름 원리와 정 여인의 주장이 일치함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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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교리는 황국주 · 김백문 · 정득은의 이론

문 교주는 황 국주 · 김 백문 · 정 득은 등 세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기식으로 이론을 구축하여 기로 해 놓은 것이 바로 원리강론이라는 통일교의 교리인 것이다.

문 선명교주는 1957년경에 김 백문이 동대문구 창신동 부근에서 노환으로 죽었다고 신도들에게 말했고 통일교인들은 김 백문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 김 백문은 어엿이 살아 있다. 경북 칠곡군 인동면 출신인 김 씨는 지금까지 세 차례의 결혼 · 이혼 등 경력을 갖고 있고, 서울 성북구 정릉동 산 1번지 청수교회란 간판을 걸고 그 나름대로 신도들을 이끌고 있다.

1954년 서울 성동구 흥인동 집회시에 정 득은여인으로부터 피가름을 받은 정 여인의 제자인 김 한 (金漢) 씨가 문 교주를 찾아 와 문 교주의 추종신도인 간부 유 모씨에게 “문 교주가 피가름 섭리의 혼음교리를 가지고 있으니 당신은 조심하라” 는 경고의 말을 남기고 갔다고 한다. 이에 대해 간부 유 모씨는 “우리도 이미 알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해서 돌려 보냈다” 는 것이다.

문 교주는 일찍이 16세 때인 1936년 4월 17일 부활절 아침에 하늘의 계시에 의해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예수가 못다한 사명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은 억만 사탄과 영적으로 싸워, 사탄의 정체와 인간타락의 비밀을 하나님으로부터 알아냈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것은 믿기 어려운 거짓이며 증거능력이나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타락한 인류의 조상이며 하나님의 창조이상을 이룰 수 있는 신천신지의 세계의 조상이요 참 부모인 그의 사명노정으로 보아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딸인 하와를 사탄에게 잃어 버림으로 아들인 아담을 빼앗겼듯이 하나님은 사탄세계에서 딸을 찾고 아들을 찾아 세우는 섭리로서 문 선명을 제3아담으로 세우기 위하여「나는 여호와의 부인」임을 자처했던 대성모 (大聖母) 인 정 득은 여인과의 사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축복을 받기 위해 정 여인의 피 묻은 속옷까지 빨아 주었던 소위 40일노정은 제3아담으로 세움을 받기 위한 기간이었다고 문 교주는 제자들게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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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강론’ 속의 혈통복귀 주장

원리강론 227페지 “중생론” 에서「타락한 인간들은 원죄가 없는 자녀로서 두 번 태어나지 않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우리를 낳아 주는 부모가 아니면 아니된다. 그러면 타락한 우리들을 원죄가 없는 자녀로 다시 낳아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줄 수 있는 선의 부모는 누구일것인가?」

「원죄 있는 악의 부모가 원죄 없는 선의 자녀를 낳을 수가 없는 것이다.따라서 선의 부모가 타락한 인간 가운데 있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부모는 하늘로부터 강림하여야 하는 데 그렇게 오셨던 분이 예수였다. 따라서 그는 타락한 자녀들을 원죄가 없는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지상천국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참 아버지로 오셨던 분이시다.」

「그런데 아버지 혼자서 어떻게 자녀를 낳을 수 있겠는가? 타락한 자녀들을 선의 자녀로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해서는 참 아버지와 참 어머니도 계셔야 하는 것이다. 죄악의 자녀들을 다시 낳아 주시기 위하여 그 참 어머니로 오신분이 바로 성신이시다.」

또 원리강론 230페지에서「부모의 사랑없이는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없다. 성신의 감동에 의하여 예수를 구주로 믿게 되면 영적 참 아버지이신 예수님과 영적 참 어머니이신 성신과의 수수작용에 의하여 나타나는 영적 참 부모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그를 믿는 신도들은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이 주입되어 새로운 영적 자아로 중생케 되는 것이니 이것을 영적 중생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은 영 · 육이 아울러 타락되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더 나아가 육적 중생을 함으로써 원죄를 청상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육적 중생에 의한 육적구원을 위하여 필연적으로 재림하시게 되는 것이다.」

또 원리강론 389페지에는 재림주를 중심한 실체 가나안 복귀노정이란 제목에서 다음과 같은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섭리의 목적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혈통관계가 꾸미어진 타락인간을 복귀시켜가지고 하나님의 직계의 혈통적 자녀로 세우려는 데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비밀을 성서에서 알아 보기로 하자」

또 원리강론 388페지에 보면「예수님은 하나님의 혈통적 직계의 원죄 없는 독생자로 오셔서 타락한 온 인류를 그에게 접 (接) 붙이어 한 몸되게 하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원죄를 벗고 하나님의 직계의 혈통적 자녀로 복귀하시기 위하여 오셨던 것이다. 예수님과 성신이 인류의 참 부모로서 이와 같이 타락인간을 접붙여서 원죄를 벗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창조본연의 혈통적인 인연을 맺게 하시는 역사를 우리는 중생이라고 한다」

원리강론 389페지에 보자.

「아무리 잘 믿는 기독교 신도라 할지라도 육적으로 내려오는 원죄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탄의 혈통을 벗어나지 못한 점에서는 구약시대의 성도들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원리강론 전편 제4장 제1절) 이와 같이 기독신도들은 하나님 앞에 혈통이 다른 자녀이기 때문에 양자가 되는 것이다 (롬8 : 23).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류를 하나님의 혈통적 직계의 자녀로 복귀케 하기 위하여 재림하셔야 한다」

이상과 같이 장황하게 통일교 교리서인 “원리 강론” 에서 인용한 바를 풀이해보면, 문은 예수의 재림체요, 그의 후처인 한 학자여인은 성신의 화신 (化身) 이며 참 부모로 등장하는 문 교주 부부가 원죄있는 타락인류를 하나님의 혈통적 직계의 자녀로 중생시켜야 할 사명이 통일교의 중심사상이요, 피가름 역사의 강령으로 된 복귀론이다.

그러므로 혈통혁명의 교리적 근거가 원리강론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장하기 위한 외적 활동이 바로 반공입네, 국위선양활동입네, 하는 정치적인 제스츄어이고 여기에 사람들이 미혹되고 상당수의 지성인들과 지도급인사들마저 통일교의 속셈을 모르고 나타난 외형적인 활동만 보고 애국적이니 국가이익에 보탬이 된다고 이야기를 한다.

통일교 신도들은 “나의 맹세” 속에서도 명시 된 바와 같이 참 부모 (문선명과 한학자) 의 혈족임을 자랑하는 조직화된 혈맥의 계보 속에 극비리에 되었고 추종인의 다수는 혈통섭리와 같은 내막을 모르고 있으며 그들의 외적활동의 이념과 활동에 매혹되고 있다.

355

접신녀 (接神女) 정득은의 ‘생의 원리’ 전문
원리강론에 있어서 타락론과 복귀원리의 원서라고 할 수 있는 정 득은여인의 “생의 원리” 를 보면 피가름의 꼬리가 더욱 적나라하게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통일교 원리강론의 원본인 정 득은의 “생의 원리” 를 요약.

생의 원리는 창조론 · 복귀역사 · 생의 원역 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고 있는데, 1947년에 정 여인의 구술을 방 호동이 받아 쓴 글을 그대로 책에 옮긴 것이다. 특히, 창조론의 “혈통적 신의 백성” 이란 글의 내용을 보자 (원문 그대로 싣는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를 당신의 백성을 번식하시려고 예정하셨던 섭리이다. 이러한 뜻을 루스벨 당시 천사장이 알게 되어 이브를 유혹하여 마귀에게 자식을 낳아 주셨으니 이가 곧 가인이라. 아담에게는 이부 자식이다. 아담도 하나님께로 버림을 받았으니 결국 마귀에게 지배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씨의 결과를 전수치 못하였다.

이브가 사탄의 딸이 되므로 사람의 딸이란 명칭을 받게 되고 사람의 딸의 아릿다움에 미혹되어 생명까지 버렸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일이 금일에도 있다. 하나님의 자식들이 사람의 딸의 아릿다움을 보고 저희 마음대로 장가가고 시집간다 하였다 하니 하나님의 딸들이라 칭함을 받도록 회복하여야 한다.

혈통적 선민의 번식은 사람으로부터나 노아로나 아브라함으로나 예수님으로 시작을 하였어도 결과를 맺지 못하였다. 택한자의 영감적 번식이 시작하여서 그 결실은 육신에 돌아가고 생능적 신 (生能的神) 에 결과적 결실을 수락치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수락목적을 섭리에 두시고 잃은 것을 회복하시는 데 선지자와 전도사, 예언자를 보내시어 교도했다. 사탄도 그의 회복역사를 방해하기 위하여 힘을 다 해 갖은 유혹을 다 하였다.

이것을 알게 된 증거판이 성경이란 것이다. 모세가 기록한 율법에 “이는 이로, 피는 피로, 손은 손으로, 목숨은 목숨으로 갚으라” 한 법이 있다. 이것이 잃은 것을 찾기위한 율법이라는 것이다. 하와를 잃었으니 하와를 찾아 하와로 하여금 아들을 찾으려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이다.

예언자이며 선지자인 이사야를 통하여 예언하신 말씀의 징조를 보라.「처녀가 아이를 낳으리니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처녀가 아이를 낳게 한다는 뜻이 곧 하와가 누시엘에게 유혹되어 가인을 난 것을 회복하려는 뜻에서 행하여진 일이다.

당시 유대법령에 그러한 불법자는 돌에 맞아 죽게 되어 있는 법이니 약혼자가 시집가기 전에 잉태하였다는 것은 선한 일이라 할 수 없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는 명령 앞에 죽음을 무릎쓰고 범한 것이다. 이것은 죽음에 내려 간데서 뽑아 내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생명을 내 걸고 용감하게「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다 이룹소서」하고 승락한 마리아의 믿음이 야말로 현대여성에 비추어 볼 때 대단하다. 할 것이 다하여 사탄의 씨가 박힌 것같이 하나님의 씨는 박힌다.

마리아는 예수를 배에 싣고 보니 목숨을 잃어 버릴것이 겁났던 것이다. 즉시 일어나 산으로 도망하여 요한의 모친 엘리사벳에게 피신하였으니 그들은 반갑게 만나서 서로 축복하였다.

그러나 마리아는 신의 섭리를 받아 순종하고 아들을 낳기까지는 성공했으나 그는 그 태도를 완전히 정하지 못하였다. 거룩한 뜻을 받고도 세속에 매어 거룩히 구별 못하였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게 된 원인이 요한에게 책임도 있지만 마리아의 잘못이 더 많은 것이다.

요한은 자기가 맡은 사명을 못하여 목 베임을 당하였거니와 마리아도 요한을 목 베게 하였고 예수도 십자가에 달리게 하였다.

마리아는 예수를 낳고, 요셉과 살지 않았어야 하며 또 신의 뜻을 따라 예수를 완전케 하여야 할 것이며 수종들어 충실한 모친이 되었어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수방관하였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자기가 할 의무를 못하고도 예수에게 그 무엇을 구하고자 할 때, 그는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뇨?” 라고 배척을 당하였다.

예수가 나의 때가 안되었나이다, 하신것은 하나님의 뜻을 백성들이 알아 줄 때가 안되었나이다 한 뜻이다. 또 어머니 조차도 몰라주니 어찌 믿지 않는 자들이 알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하와를 찾았고 소생까지 얻었으나 먼저 장성한 불의에 눌리어 완성을 맺지 못한채 역사를 남겼으나 결실은 맺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왔다고 한 원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몇 천년 역사를 두고 회복의 섭리를 자기일신에 지니고 수취 (收取) 하시려는 것은 너무 약하다고 쓰였으나 반대로 너무 사랑이 많으셔서 권능을 나타내기 위하여 돌아와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완전히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멸시하여도 세인 (世人) 을 불쌍히 여겨 너희가 듣지 않으나 내가 좀 더 참자하시는 은혜로다. 인내는 소망을 낳고 소망은 보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결실케 하나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전기 마리아는 무슨 이유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느냐 하면 마리아가 자기 책임을 다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 그 책임 무엇이냐?

마리아는 무슨 책임을 못하여서 예수로부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말을 들었는가? 자기 몸을 동정녀로 하나님께 드린 일은 성공이었으나 그 태도를 완전히 결정 못한 것이다.

이는 무엇인가? 처음 수태하게 한 자가 참 남편이니 본부 (本夫) 에게 찾아 가야 할 것이다. 헌데 요셉과 살았으니 하나님께서는 동정녀를 찾았다가 다시 잃은 결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사탄의 이부자식 (異夫子息) 을 만들어 키웠도다.

사라는 첩의 자식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니 이를 당할까봐 첩의 소생을 추방하였다. 본 자손을 키우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본 자손으로 구별하여 주신 씨이니 귀중히 여겨졌던 것이다. 또 이삭의 소생에서와 야곱이 복중 (腹中) 에서 다툴 적에 리브가는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지시하실 때 “네 복중에 두 족속이 들었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며, 작은 자가 큰 자를 주관하리라고 한 지시를 받고 리브가가 야곱을 지극히 사랑하였으며 또 에서가 받은 축복을 뺏어 야곱에게 주었으며 에서가 그를 죽이려 할 때 외삼촌네로 피신시켜 보호하였다.

또 아비 이삭을 속여 축복을 받으려 할 때 발각되면 나를 저주하리이다 하니 그 저주도 내게로 돌리라 하고 리브가는 하나님께서 계시하던 말씀을 기억하여 자기할 바 의무를 다 하셨던 것이다. 또 여 선지자 미리암은 모세를 키웠다. 강폭한 바로왕의 탄압중에 죽음을 각오하고 모세를 살렸고 그를 키울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셨던 것이니 모세는 바로 궁전에서 호화롭게 자라며 그 나라 법률을 다 배우게 되었다.

그런데 불리한 환경일지라도 마리아는 예수를 수태할 때 어떠한 입장에서 수태하였는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 보면 그 장에 수태역사가 기록되어있다.

“장차 거룩하신 이가 너를 덮으리니 나시는 이가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여러 나라의 머리가 되리라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한 어마어마한 말씀을 받고 그를 수태하고 자기 행동을 구별치 못하였으니 하나님의 뜻을 다 하였다고 볼 수 있겠는가?

이도 예수님을 존중히 사랑하시어 하나님의 아들로 출세하시게 하여야 할 것을 목수인 요셉의 아들을 만들었고 또 그의 앞 길을 막는 일을 하였도다. 누가복음 2장 4절에 보면 얼마나 아기 예수님 자신은 배워야 할 것을 알고 성전에서 제사장이나 서기관들에게 묻고 배우고 하셨다.

마리아가 예수에게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찾았다고 하니 누가복음 2장 49절에 예수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나이까?

예수 자신은 12살 때에 성전에 이써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을 알고 성전 안에서 장성하시려 하셨던 것이다. 그런것을 모친 마리아는 이를 촌으로 데리고 가고야 말았다. 모세가 바로의 궁에서 교육을 받은 것과 같이 교육을 받아야 할 것이었다 마리아는 그를 성전 안에서 키우도록 했어야 할 일을 목수의 집에서 키우고 말았다.

수태할 때 들은 말이 있는 데 잊어버렸을 리는 만무하리라,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못하였나이까?란 말을 듣고 마리아는 찔림이 없었을까? 마땅히 증거하여야 할 일을 증거하지 아니하고 나사렛 촌에 목수의 자식을 만들어 멸시와 천대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짓밟히게 하였도다.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애굽의 학문을 다 배웠어도 이스라엘 민족이 듣지 않았는 데 목이 곧은 사람들이 목수의 말을 듣겠는가? (요4 : 34).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쫓아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내 양식이라 (요5 : 36).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여기 있으니 내가 하는 일은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니라. 사람에게 증거를 지켜도 증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증거를 믿지 않는다. 그러므로 신이 날마다 행하시고 행하는 것을 의롭게 하여 그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신 스스로가 나타내며 증거하는 것이 다하였으면 아무의 증거도 필요치 않다.

사람의 증거보다 더 확실하다 함을 말씀하셨나니 마리아가 증거하여 주지 아니하고 요한은 또 길을 예비하러 와서 길을 예비하지 못하였으니 하러오신 그 일을 못하게 됨을 아시고 근심은 끊임이 없었다. 요한은 안식에 들일 길을 예비하러 왔고 예수는 안식을 가지고 쥔으로 오셨는 데 전자도 아니믿고 후자도 멸시를 하였도다.

요한복음 5장 25절, 죽은 사람이 하나님 아들의 소리를 들으니 듣는 자도 알아내리라 하심이 죽은 자를 알리러 오셨나니 그가 이 알리고자 하는 답은 어떠한 답인가? 말씀을 듣는 자로 이에 산자가 아닌가? 죽은자가 말씀을 들을 수가 있는가?

즉, 음부에 나려 간 자 곧 죽은 자요, 이는 언제 죽은자인가? (엡2 : 1).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라 (엡2 :2). 그때의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풍속을 쫓아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니 이 권세 잡은 자는 순종치 아니하는 자 속에 지금 일하는 신이라, 하나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는 누군가?

하와가 하느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고 사탄의 말을 순종하여 사탄의 자식이 됨으로 음부에 내려 안침을 받아 공중권세 잡은 자의 수하에 있는 것을 끌어내어, 즉 죄로 죽은 것을 다시 알리려 하심이니 곧 태초에 하나님이 코에 바람을 불어 넣으니 생명이 된지라 한 이 사람으로 마귀의 자식되었던 것을 불러 살리려는 일을 하시려 오신 것이다.

예수 말씀에 받는 자 외에는 알 수 없도다 (마10 : 27-28). 내 아버지의 뜻대로 계시를 받아야 된다고 하셨는 데 마리아는 받아서 알면서도 모르는 체 하고 가만히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의 실책이다. 사무엘의 모친 한나는 여호와께 구하여 아들을 낳아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어 주심을 감사하여 그 아들을 일생 여호와께 드렸으니 하나님을 섬겼노라.

어려서 부터 (삼상1 : 26-28, 2 : 18) 하나님의 성전에서 장성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을 알기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알았다 (삼상3 : 19-21). 여호와는 사무엘에게 함께 하시어 그의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게 아니 하였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도 하나님께서 땅에 떨어지게 하신 것은 없으되 먼저 받은 자가 한나와 같이 자기 책임을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을 음란한 자의 자손인 목수의 아들로 주민이 인식케 한 것이 잘못이다. 마리아는 성결하여 스스로 분별하여서 예수를 성전에 드리고 착실한 하나님의 부인 노릇을 했어야 하나님께서 처음 잃은 사랑을 찾으시고 성결한 혈통의 자손을 번식하였을 것이다.

하와를 도로 삼킨 바 되었도다. 그러므로 역사 이래로 외아들 예수만 남은 바 되었도다. 그러면 4천년 역사를 두고 거둔 결과가 예수 하나 뿐이다. 예수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시어 역사이래 하나로 나타나셨나? 그는 아담 이래로 여러 선지자가 감당치 못한 것을 이겨 물리치었다.

마태복음 3장 13절에 보면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로 나가셨다. 성신에게 이끌리어 예수에게 시험하는 자가 와서 시험을 시작하였다. 시험에 대한 것은 “나중에 논하기로 하고 먼저 40일이란 날자에 대하여 왜 40일을 굶주리시며 시험을 받으셨나 하면 4수는 태초에 에덴동산에 완전히 전개되는 숫자인 것이다.

하나님 1위, 아담1위, 하와1위, 아들1위, 4위가 결정되었던들 하나님의 창조섭리는 완전을 이루었을 것이다. 이 4위를 완전결성을 못하였기 때문에 에덴동산은 파괴되고 인류는 권세자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러므로 4자를 두뇌에 두고 복귀역사 (復歸役事) 를 다하게 되었다.

역대를 하니 하나 보다 쉽게 계명을 보아도

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말라.

② 너를 위하여 의자할 것을 만들지 말라.

③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④ 육축까지 안식하라고 하셨다. 이 안식세계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4수가 완전결정이면 평화다.

그러한 것을 시기하는 자가 이것을 완전결성 못하게 방해를 놓은 것이다. 그 4천년간을 두고 훼방자의 방해로 연장되어 나온 역사를 40일간 단축시켜 놓고 예수 혼자 감당하시는 역사이다.

이상은 정 득은의 생의 원리를 부분적으로 가감없이 장황하게 인용하였거니와 그 이유는 통일교의 복귀역사가 바로 이 정 득은이 생의 원리에서 표절했음을 입증하려고 하는 시도이다.

360

문선명의 원리는 정득은 교리의 표절
문 교주가 계시로 받았다는 원리강론은 결국 무식한 정 득은이란 접신녀의 교리의 표절인 것이다.

더구나 정 득은의 “생의 원리” 에서 복귀역사를 보면 통일교의 탕감복귀 이론이 바로 정 득은의 주장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정 득은의 주장을 들어본다.

「아브라함의 아비는 우상 장사를 하였다. 왜 하나님은 우상 장사의 자식을 택하셨나? 이는 마귀가 가장 사랑하는 아담을 마귀에게 잃으셨으니 이를 복귀하는 뜻에서 마귀의 가장 사랑하는 우상 장사의 아들을 뽑아 내셨다. 그리하여 그에게 복을 주노라 하시고 언약의 조건물을 가져 오라 하셨다. 이 제사를 잘 드렸으면 아브라함 이후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은 인류의 대제사장국을 성립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제사실패로 말마암아 에덴동산을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은 4백년간이라도 일진수의 노예노릇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게 되었다. 그러면 이 실패한 제사의 제물에는 어떠한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말인가?

3년된 암소, 3년된 숫양, 암염소, 산비둘기, 집비둘기 새끼 등 세가지 종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시대로 구분하면 소성기 (所成期) · 장성기 · 완성기의 3기로 구분하여 상대적으로 말하면 비둘기는 성신대상이요, 산비둘기는 사탄 대상이라, 염소는 음란죄 대상이요, 양은 속죄제물이요, 소는 육신대상이 되는 것이니 이 제사로 말미암아 소성 · 장성 · 완성, 겸하여 완전을 성취하려는 뜻이었으나 장성 · 완성 각기로 갈라서 깨끗할지라도 소성기를 가르지 못하였으니 아담이 그대로라, 아담당시의 실패를 회복하려는 약조물인데 제일 중요한 소성기가 부정한 그대로서는 전개할 수 없으므로 다시 연장한 것이니 즉, 나무 밑이 썩었는데 그 나무가 잘 자라날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시초가 부정한 것은 아브라함도 회복치 못하고 4백년이란 고역의 날자를 복락동산 대신 받았다. 그리하여 3대에 걸쳐 야곱으로 하여금 가족적 구원의 성을 쌓고 이스라엘이라는 승리의 칭호를 받았다.

이 이스라엘의 아들로 말미암아 애굽에 들어가 번성한 백성을 인도해 내는 역할을 한 사람이 모세라는 대선지자이니 모세는 이스라엘을 우상국 애굽에서 인도해 냈거니와 예수는 인류를 사탄의 사슬 앞에서 끌어낼 임무를 가지고 당신이 먼저 가시덤불에서 나오는 역사를 당하시는 것이다.」

정 득은여인의 이 “생의 원리” 를 부분적으로 읽어 볼 때, 통일교 원리강론과 흡사함을 발견할 것이며, 연대적으로 정 여인의 생의 원리가 문 교주의 원리해설보다 수년 앞서 있으므로 문 교주가 정 여인에게서 그 교리적인 구상을 얻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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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문의 성신신학과 원리
김 백문의 성신신학은 1954년 3월에 출판된 것이었다. 그 책 첫 페이지 “啓” 에 이런 글이 있다.

「3위가 일체적으로 기독교 구원역사를 도모하심에 있어서 각위의 시대적 역사성을 고찰한 바, 구약이 부위 (父位) 의 역사시대로 되어진 것과 같이 신약은 자위 (子位) 의 주동적 역사시대로서 볼 수 있음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역사요 결국 삼위분의 섭리적 구원성과를 삼위분의 역사상 역사적 (役事的) 순리로 보아 최후 말로 결과시기에는 성신위 (聖神位) 가 하실 분담적 사명문제로 알게 된 때다」이상과 같은 김 백문의 이론은 통일교 교리의 책임분담 섭리로 본 시대구분과 같은 점에서 김 백문의 교리를 표절했다고 볼 수 있다. 즉,통일교 원리강론 102페이지 혈통문제 (죄악성 유전문제) 에서,

「회개에서 초혈통 (超血統) 에 실적을 보아야 할 것이 회개전은 예컨대 박씨 혈통에 최악성격자가 제3자로서 씨족을 달리 보리만큼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의 성체문제 (聖體問題) 인 성혈 (聖血) 문제에 결과적인 의의가 관련되는 사실인데 그리스도의 성혈은 속죄에만 가치적 본의가 다함이 아님은 원죄 · 속죄 다음으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와의 혈통성을 느끼게 하는 즉, 혈통적 갱결연 (更結椽) 을 위한 성현인 것이다. 그러면 이상 논한 김씨 자손이 순 혈통적으로 변하여서 그 다음 예수의 혈통성격을 닮아 새로남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통일교원리에서 본 강생론의 의미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근본원리 (창세론 · 타락원리 · 복귀원리) 가 있고 이는 김 백문과 문 교주가 동거했던 1946년도의 5개월간에 문 교주가 김 백문의 문하생으로 있으면서 터득한 김 백문의 교리라고 볼 수 있다.

1955년 당시 사회에 물의를 일으켰던 혼음파동 사건으로 인하여 노량진 오집사댁에 피신하고 있을 때, 책꽂이에 진열되어 있는 김 백문의 “기독교 근본원리” 를 보고 놀라면서 오 집사에게 저 책이 어떻게 여기 있느냐고 하면서 불태워 없애 비리라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책을 보면 자가의 독창적이라고 하던 원리가 이미 논리정연하게 미리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의 원리가 그 책에서 도용된 것을 신도가 간파하지 않을까 라는 의구심 때문인 것이다.

또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이스라엘수도원에 정 득은여인이 1945년말 부터 여러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므로 문 교주는 이스라엘수도원을 중심한 신앙적인 수련기에 교리적인 체계를 김 백문으로부터 습득하였고, 1950년 말경 문 교주가 흥남형무소 복역 후 평양에 DT는 김 종화여인 집에서 정 득은여인을 만난 일이 있다.

그후 그들은 각기 월남하였고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정 득은여인이 문 교주를 찾아 헤매였으나 문 교주는 정 득은을 피해 다녔다. 정 득은은 문 교주의 부산 수정동집회소와 서울 흥인동집회소에 자주 나타났다. 그 때마다 모자협조관계론 (母子協助關係論) 을 정 여인이 주장했고 문 교주는 자꾸만 정 득은 여인을 피하였으니 그가 교리를 내세우는 원리가 남의 것을 표절 · 도용했기 때문이다.

또한 재림주격인 김 백문은 세례요한 격의 문 선명의 활동을 멀리서 지켜 보았고 통일교 신도들 중에 골수분자인 박 모씨 같은 사람은 김 백문을 따라 통일교를 버리고 청수교회로 옮기기도 했다.

김 백문은 자신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재림주임을 신도들에게 암시했고 문 선명을 세례 요한격으로 장차 자기를 증거해 줄 섭리적인 시기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김 백문의 제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문 교주는 김 백문의 성서적인 이론을 계승했다.

363

정득은 · 박태선 · 문선명의 관계
삼각산에 위치한 대성신기도원의 원장 정 득은 (丁得恩) 여인은 1897년생으로서 48세 때인 1945년 11월경에 평양으로부터 월남하였고 그녀를 추종하던 신도들은 그녀를 대성모 (大聖母) 라고 불렀으며 그녀는 병든 자들을 기도로서 쾌유시키는 영통력의 소유자로 평양에서는 장로교회에 다녔던 인물이다.

그녀는 8·15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비밀리 모이고 있던 신령집단인 황 국주의 광해교회 (廣海敎會) 에도 자주 나갔다. 뿐만 아니라 평양 장재대교회의 우 하선장로의 부인이었고 현재도 통일교의 문 교주가 오늘의 발전이 있기까지 옥 세현여인과 신앙적으로도 가까운 사이였다.

하루는 정 득은여인이 옥 세현여인댁에 가서 기도하는 가운데「오후 3시에 이남으로 내려가라」는 계시를 받고 그가 평소에 사사하던 박 을노 (朴乙魯) 씨에게 가서 상의한 바, 그 역시 동일한 계시를 받았노라고 증거하여 시간을 맞추어 월남하게 되었으니 그때가 엄동설한의 겨울이었다고 한다.

그는「이렇게 추운 날씨에 어찌 남으로 내려가라 하시나이까?」라고 기도 했던 바「예수 모친 마리아도 추운 때에 호적하러 갔노라, 그러니 너도 가거라」하는 계시를 받고 용기를 내어 떠나 왔다고 한다.

월남도중에 하늘의 계시를 어기지 못하여 입고 있던 의복을 피란민들에게 하나씩 차례로 다 벗어주고 홋치마 저고리바람의 초라한 모습으로 가까스로 서울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에 도착한 그녀는 삼판동 (현 동자동) 에 가서 20여명의 신도를 모아 집회를 가지고 한 편으로는 파주에 있는 김 백문의 집회에도 가끔 참석하게 되었다.

1945년 12월 말경 김 백문과의 상도동교회에서 방 호동 (方好童) 씨 모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후원 아래 1946년 1월에 삼각산에 집회장소를 마련하게 된 것이니 바로 이곳이 한 때 항간에 물의를 빚던 삼각산기도원이었다.

이때 김 한 (金漢) 이라는 연세대신학생의 전도로 이 요한교사 (현 통일교 간부) 를 알게 되었고 이 요한은 서울에 나와서 박 태선집사 부부를 전도하여 약 1개월간 같이 기도하다가 의견 충돌로 박 태선부부는 그들의 집인 수색으로 가 버리고 정 득은여인 일파는 경제적인 타격이 너무 심하여 1950년 3월경에 삼각산을 내려 와서 모였던 신도들은 부득이 분산하고 말았다.

그후 1950년 6월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수복이 되자 용산구 원효로 2가에 에덴유치원을 창설하여 전쟁고아를 수용하는 한편 구호사업을 주민들에게 하였고 1950년말경 1·4후퇴당시 문 선명이 주관하던 평양 육교리 간판 없는 광야 교회의 주인이었던 김 총화여인 집에 나타났다.

그후 경기도 평택군 진위면 계시리에서 장로교회를 다니며 봉사하다가 교회 내분으로 이단시 당하여 서울 흑석동으로 올라와 이 용은목사의 친척이 경영하던 교회에 다니다가 한강을 건너 서울에 들어와 용산에서 은신하고 있던 중 김 연 (金演) 을 알게 되어 교회의 협조를 받아 용산구 신계동에 기도원을 창설하게 되었으니 그 때가 1953년 2월경이 었다.

그녀는 경제적인 기반이 없는 데다가 사회적인 핍박을 받아 가며 기도생활을 계속해 나가면서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초라한 순례자라고나 할까? 그들은 적극적으로 크게 확장을 위해 전도생활을 하지 않고 오직 심신의 수련생활만 전념했다.

현재 한국기독계 이단자들로서 가장 큰 물의를 빚고 있는 통일교의 문 서명이나 전도관의 박 태선도 극히 짧은 시일이나마 정 여인을 피가름역사의 모체격 (母體格) 인 원조 (元祖)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정 여인이 운영하고 있던 대성심기도원은 어떤 곳인가, 그 내막을 살펴 보자. 대성심기도원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성경은 교리니라」
① 심신의 수련으로 혈육적 욕심을 초월하고 심중에 예수님을 모시고 피와 살이 전폭으로 기독교화 하기 위하여 수도함을 목적으로 함.
② 성경을 토대로 삼아
③ 예수께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하러 왔노라 하여 온전케 하기위하여 받으신 고난을 힘입어 선지자의 예언하신 말씀을 한 말씀도 어김없이 이행하셨음을 본 받아
④ 우리는 기독교의 교훈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의 예언「너희는 나보다 큰 일을 하리라」하신 말씀을 이루려 심신의 수련을 쌓아 주의 거룩하심같이 우리도 거룩하여 대성심의 뜻을 성취하려는 데 있음 <아멘>

‘동방의 의인’ 이라 자처하고 나온 박 태선의 혼음역사를 김 경래가 취재하여 1957년 3월 17일자와 3월 18일자 세계일보 지상과 실화 (實話) 잡지 동년 6월호에 보면 혼음역사의 계보와 실상은 다음과 같다.

박태선의 혼음
「박 태선 일파의 혼음은 1947년 5월 이후에 평양에서 남하해 온 정 득은여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혼음파의 본부인 삼각산에 주거를 정한 정 여인으로부터 정여인의 교리에 감복한 박 태선부부는 수색에 있던 자기 집을 집회장소로 제공했고 그들은 당시 수색장로교회에 나가고 있었다.

정 득은여인의 연하에 추종신도인 이 태윤 (李泰允, 1958년대 통일교신도였음) 과 박 태선을 중심으로 3개월 동안 기성교회 신도들이 모였으며 박 태선은 정 여인에게 설교를 받아 김 백문에게 성서해석법을 배워서 영체교리 (靈體敎理) 를 체계적으로 세웠는 데, 박의 영모론 (靈母論) 은 바로 여기에 근러하고 있는 것이다.

50대의 중년여인인 정 여인은 먼저 삼각산기도원을 중심한 세 사람 김 한 · 방 호동 · 이 수완에게 혈분 (血分) 을 하였고 김 한 (金翰) 은 민 은순 (閔恩順) 여인과 혈분하였고 민 여인은 복귀된 후에 그의 남편과 육적인 부부생활을 하지 않고 있다가 이혼을 당하였고 민 여인은 다시 이 태윤과 혈분을 했다. 이 태윤은 다시 백 목사 부인인 장 애삼 (張愛三) 과 극비리에 혈분을 햇으나 방 호동 (37세) 만은 혈분을 맺지 않았다.

이 수완은 26세인 원 경숙 (元慶淑) 과 혈분하였고, 원 경숙은 박 태선과 혈분하였고, 원 경숙은 박 태선과 혈분하였다. 박 태선은 존귀한 성혈 (聖血) 을 먼저 자기 집안에서 행하기로 마음 먹고 그의 장모와 형수에게 권한 것이다. 박 태선의 처는 원 경숙과 같이 이 수완에게 혈분을 받고 박 영창에게 권하였다. 박 영창의 말로는 박 태선의 처와 처음에는 잘 안되다가 두 번째 겨우 되었다 한다.

행하는 방법은 교조적인 정 여인의 입회하에 정 여인이 기도를 드리고 나서 하는 혈분행위가 진짜라고 하며 남자가 여인에게 혈분할 때는 남상여하 (男上女下) 이고 여자가 남자에게 전할 때는 여상남하 (女上男下) 가 된다」(이와 같은 사실은 통일교의 합동결혼식 후 부부행위와 같음). 이러한 방법으로, 혈맥을 중심한 피가름역사의 교리는 비밀리에 확산된 것이다.

또한 김 경래의 취재에 의하면 기성교회 목사 백 X X의 부인 장 애삼여사와 이 태윤과의 영체교환이란 명목의 성관계를 통해 장 부인은 유인되어 신흥종교단에 입단하고 양심의 가책을 견디다 못해 일체를 남편인 백 씨에게 고백했다.

백 목사는 이 말을 듣고 심신의 고민을 견디기 어려웠다. 목사 체면에 이혼을 할 수도 없어 김 경래에게 고민하던 문제를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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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득은의 딸, 우리 모친은 인간 이하 ···
그후 1967년 2월경 백 목사부부는 서울에서 혼음파의 주역인 정 득은여인의 딸을 만나게 되었다. 그 딸은 자기 모친을 비난하면서 남녀신도들을 삼각산에 모아 놓고 영체교리를 해설했으며, 우이동에서 신도 20여명을 데리고 은퇴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면서 자기 모친은 이간이하인 불결한 행동을 아무도 권고하는 이도 없고 법에 고발하는 자도 없다고 한탄하더라는 것이다.

백 목사 부부는 정 득은의 딸을 만나기 전에 박 태선을 두 번 만났으며, 그 달에 백 목사는 부산에서 성민육아원 (聖民育兒園) 을 경영하였으나 재정란으로 막대한 부채를 걸머지게 되자, 백 목사의 부인은 혼음동지인 박 태선을 찾아가 어려움을 호소하고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 당했다.

백 목사는 정 득은여인의 딸을 만나기로 결심하고 혼음교리를 신앙하는 정 득은의 유혹에 빠졌던 그의 부인의 피가름사건을 세간에 공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1957년 3월 3일 백 목사는 서울 원효로에 있는 전도관에 가서 정문에 버티고 서서 들어가는 신도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박 태선이 동방의 의인이라고 그런 개소리 말라, 그놈은 제 장모와 형수를 XX고 원 경숙이와도 혼음한 놈이다. 박 태선의 처도 박 XX란 놈과 혼음했다. 당신네들을 속인 뱃장 검은 놈의 정체를 이제 당신네들에게 보여 줄테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내 처도 혼음파에 속했었소, 이제 와서는 대중 앞에 공개하고 회개하려 하오.

영체파의 교주도 살아있소. 여러분들이 전도관에서 떠남으로 박 태선을 회개하도록 결심을 가지시요」그때에 그 광경을 모여서서 바라보던 박 태선 신도들과 길 가던 사람들은 호기심에 찬 눈초리로 백 목사의 말을 듣고 있었다.

설마 하니 그리스도를 업고 예수 사명을 한다는 신성한 교회 교주가 제 장모와 형수와 혼음했다는 말인가?

백 목사가 그대로 서서 계속 전도관 문안으로부터 광신도들이 달려나와 백 씨를 에워싸고 폭행을 가하기 시작했다. 백 씨는 곧 경찰에 고소하여 폭행과 혼음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니 이것이 바로 김 경래기자의 취재로 세계일보에 특종보도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박 태선은 신문광고란에 이를 부인, 반박성명서를 내고 유력한 정계인사들을 동원하여 무마공작을 벌리는 한편, 육아원을 원조하기로 하고 고소취하 성명을 내도록 하고, 같은 기독교끼리 너무 지나친 행동은 서로 삼가하자고 중간에서 화해하라는 파도 있었다.

박 태선측은 대의명분을 세워 일방적으로 혼음시인이 아닌 부인광고를 발표하니 백씨 부부는 더욱 노하여 검찰에 고소를 하여 혼음의 전모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박태선은 문선명과 선후배지간

그런 점에서 볼 때 박 태선과 문 선명의 관계는 정 득은을 중심으로 복귀역사의 선후배 지간이며 동지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1960년도 박 태선이 형무소에 수감되자 문 선명은 그를 석방시키 기 위해 박 태 선도 모르게 통일교의 박 X X여사를 통해 석방운동을 명령한사 실이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박 여사는 문의 지시에 따라 민주당을 탈당하고 자유당에 입당하여 선거유세 까지 행한 쟁쟁한 인물이었다.

 

문선명의 찬란한 혼음행각

문 선명교주는 평양에서 관계를 가졌던 황 국주 일파에 의해 세워진 광해교 회가 분열되어 신도들이 홉어지자 이들을 규합하였고 이름 없던 문 용명 (文竜明) 이 주재하던 평양 육교리에 간판 없는 김 종화 여인집에서 뒷방살이를 하며 광야교회란 것을 세워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여인들과의 잡음이 끊이 지 아니했다.

1948년 2월 22일 김 종화여인과 타락한 하와를 복귀하기 위한 잔치를 한다는 복귀사건시에 옥 모여인, 지 모여인, 김모여인 (이들은 통일교의 원로 교인들임) 등이 문 교주가 쓰기 위한 면류관을 마련하고 어린양 혼인잔치 때 쓰기 위한 떡쌀을 씻다가 김 종화여인의 남편 이 모씨 (현재 서울 〇〇장로교회 집사) 와 인근주민들의 고발로 공산치하의 내무서원에 의해 체포된 것은 통일교에서 주 장하고 있는 반공운운은 전혀 터무니 없는 주장이다.

통일교에서는 문 교주의 흥남형무소의 복역을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투쟁 으로서 선전하고 있는 데, 그는 사회질서문란죄목으로 7년형을 언도 받았고 김 여인은 12개월 징역의 선고를 받았다. 통일교회사에 보면 5년형을 언도받은 것 으로 돼 있는 데 이는 거짓인 것이 옥중동기생 박 모씨의 증언으로 보아 드러난 것이다.

김 종화여인은 천사장 입장에 있는 남편인 이 씨와 완전히 갈라 서서 아담입 장에 있는 문 교주와의 하와적인 사명을 다 해야 한다는 교리를 갖고 있었으며, 그들은 남편인 이씨 물래 극비리에 복귀역사의 사명을 성취시키려다가 발각된 것이 유명한 평양사건인 것이다.

그 뿐 아니라 평양 장재대교회 장로인 우 하선씨의 부인 옥 여인과의 문제도 있고, 문 교주가 월남하여 1951년 부산 수정동에 있는 장 X X박사의 며느리 김 모여인과의 복귀사건도 빼놓을 수 없는 문 교주의 스캔들 사건이다.

김 여인은 일본에서 음악대학을 나온 인텔리이며 독자인 남편은 의학공부차 도미했고 2남 1녀의 자녀를 가진 유부녀였다. 그 일로 인해서 김 여인은 귀국한 남편과 이혼을 하였고 1953년에 문 교주는 대구 통일교회에서 김 여인의 오빠 로부터 가정파괴의 책임을 물어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뜻이 부여된 특별 케이스의 여 인들은 복귀함을 받은 후에는 축복이 있기까지 절대로 탈선해 서는 안되며 남편과 같이 살아도 정신세계는 문 교주에게 와 있는 셈이 된다. 통일교의 문 교주에게 심취되면 가정이 불화하는 이유가 바로 그 교리에 연유하는 것이다.

1952년 말경 남편으로부터 통일교에 빠진 자기 부인을 찾아 달라고 종로경찰 서에 고발된 김 순철여인 사건, 당시 수사관의 눈을 피해 다니면서 여관방을 전전하며 특히 서울 청진동의 대성여관에서 최 모양과의 거룩한 혼인잔치를 한 사건 당시 모 고관 부인인 김 모여인 (36세) 과의 6일간의 도피행각 등은 그 당시 문 교주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모 씨가 증언하고 있으나 하도 오래된 일이라 근거를 찾아 볼 길이 없다.

1953년 통일교 부산교회에서 모씨 가정을 중심한 요셉 가정의 복귀역사 사명 요구와 1957년 서울통일교회 홍 모씨 가정의 변 모여인에 대한 마리아사명 요구 등은 부부가 같이 통일교 신앙생활을 하는 가정으로서 고민을 자아내게 했다.

 

차라리 주사기로 피를 뽑아 섞는 것이 ……

그래서 부산의 모 씨는 차라리 주사기로 선생님의 피를 뽑아 섞는 방법을 쓰 는게 좋겠다고 농담 아닌 그의 고민을 털어 놓았던 사실은 초기 통일교회시에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그 모 씨는「천하를 다 주어도 내 아내와는 헤어질 수도 없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내 아내가 된다고 할지라도 나는 못 헤어 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래 서 문 교주는 특히 사이 가 좋은 부부지 간에 대해 하늘이 사랑하는 하와를 사탄에 게 빼 앗겼으므로 타락의 반대의 노정에 의하여 천사장과 같은 입 장에서 사랑하는 사이의 부인을 남편의 품 속에서 빼앗는 것이 탕감복귀원리가 된다고 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미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그래서 이런 일은 강제가 아닌 스스로의 뜻에 의한 자유의지로 결정하여 원 리를 이행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도 마치 하와가 천사장 루시엘의 품에 자유의 지로 돌아간 것과 같다고 한다. 그래서 문 교주는 설교를 통해「내 한 목숨을 버리거나 내 자식을 죽여 번제를 하더라도 6천년 동안 사무친 하나님의 한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질 수 있다면 이 제라도 주저 않고 할 수 있다」고 늘 말해 왔다.

이 모여인의 이혼사건, 유 모여인의 복귀사건, 이혼가정파탄의 경우 유 모여 인은 부산 수정동집회시에 부부가 함께 입교했고 문 교주의 설교와 원리에 홀딱 빠져버 린 그들이 점 차 자기의 판단력으로 느낀 것은 타락의 혈통을 청 산키 위한 복귀과정을 거쳤으나 후일 잘뭇을 알고 탈퇴해 버렸다.

유 여인의 남편 신 모씨는 문 교주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어느 주일 예배시에 스스로 일어나서 손뼉을 쳐 가면서 세계만방의 사람들이 문 교주를 찬양키 위 해 태극기를 손에 들고 한국으로 오는 환상을 보았다고 거 짓 꾸며 서 간증을 하자 이에 참석했던 신도들은 은혜를 받았고, 문 교주는 신 씨가 본 영적 체험을 미리 알고 있는 것처럼 우쭐거리는 태도에 신 씨도 자기나름대로의 짐작이 갔고, 폐회 후 친분이 있는 친구에 게 자기 가 한 거 짓 간증은 문 교주를 시 험 하기 위한 것이 라고 하자 그는 아연실색을 했다는 것이다.

신 씨의 가정은 퇴교 후 파탄되었고,그는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고 경제적으로 일시나마 헌신하여 통일교 초기발전에 도움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통일교 에서는 이탈된 그들에 게 탕감법을 적용하여 저주·비난하였고 그는 서울 모처 에 서 바느질로 살아가고 있다.

문 교주는 자신의 혈맥을 중심삼고 ‘탕감복귀의 종교적인 이론을 무기로 삼아 인류를 중생시켜야 할 원죄청산의 모체로서 최 모여인을 내 세웠고 2차적인 여 인복귀를 위한 참 어머니의 자리를 놓고 한 학자를 결정하기까지 수 많은 후보 여 인들의 가슴을 들뜨게 했으며 그로 인하여 피해를 입은 여 인이 바로 문 교주의 아이를 낳고 버 림 받은 김 모, 최 모여 인인 것이다.

특히, 모녀 지 간의 케 이스도 있으니 이 모여 인과 장녀·차녀의 경우이다. 장녀 는 청진동 모처에서 어린양잔치를 했고, 차녀는 1964년에 도미하여 사무엘 문을 낳았다.

문 교주는 당시 연세대 영문과를 나온 언더우드박사의 수양딸로 총애를 받고 있던 김 모양을 임신시켰고 자신의 혼음교리의 비밀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일본으로 밀항하였다가 일본 이민당국에 체포되어 오무라 수용소에 강금된 적이 있다고 당시 그녀를 밀항시키는 책임을 졌던 오 X X씨가 증언하고 있다. 오 씨는 그후 통일교를 이탈하여 문 교주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원주 통일교회를 거쳐 문 교주와 알게 된 자칭 도사인 박 문군씨의 도움으로 그들 두 남녀 김 양과 오 씨는 수용소에 서 풀려나왔고 김 양은 1955년에 문 교주의 아들 희진군을 일본에서 낳아 기르다기 귀국했고 희진군은 중학교에 다니다가 열차사고로 사망하여 문 교주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김 양은 일본에서 귀국할 때까지 재일동포인 방 모씨와 사랑관계에 빠졌었다. 귀국한 김 양은 경기도 인천 주안에서 고독한 생활을 하면서 문 교주의 방문을 기다리는 몸이 되었고 일본으로부터 김 양을 잊지 못해 한국까지 찾아 온 애꾸 눈의 불구자인 방 씨가 한 번은 문 교주와 김 양의 집에서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되어 분위기가 민망한 적도 있었다고 당시 문 교주를 수행했던 X 씨는 증언하고 있다.

말하자면 김 양을 놓고 두 사나이가 대 결한 셈이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일교의 원리에서 전개되고 있는 타락론으로 설명을 해 본다.

하나님의 사랑은 천사장급보다 강하다고, 그렇다면 재림주격인 문 교주의 사 랑의 힘으로 그의 뜻을 알고 교주의 아들까지 낳은 김 양의 일본에서의 타락 (방모씨와의 사랑을 통일교 입장에서 볼 때) 과 김 양을 찾아 사랑의 천리길을 달려 온 천사장급인 방 씨의 사랑의 힘보다 약한 문 교주의 사랑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런지 의심스럽다.

말하자면 하와의 타락전인 장성기 완성급을 넘어 선 재림주인 문 교주의 사 랑을 받은 김 양이 왜 타락했는가를 교리적으로도 설명을 해야 할 것이다.

 

야, 이 종교 사기꾼놈아!

1960년 3월, 18세의 소년인 한 학자가 인류의 참 어머니로 간택된 소식이 알 려지게 되자,이 소식을 들은 한 모여인 모녀는 청파동 통일교 2층 문 교주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야! 이 종교 사기꾼놈아〉라고 소리를 치고 삿대질을 한 일이 있다.

이것은 문 교주가 한 모여인의 딸을 참 어머니 후보로 암시를 주었을 뿐만 아니 라 그들 사이 에는 설명 못할 내막이 있는 듯 하다.

문 교주 주변의 여 신도들은 육마리 아의 구성과 일차부활의 황족권 (皇族圏) 인 36가정의 축복구성에 미련을 가졌고 교주의 거룩한 피 (聖血) 를 받아 복귀되기 위한 목적으로 연인들은 갖은 아양과 교태를 다 보였고 이러한 주변환경 속에서 문 교주는 솔로몬왕실의 이상론을 가끔 피력했다는 것이다.

교주와 중진간부들은 탕감복귀역사를 통해 서로 얽히고 설킨 관계를 가지고 있어 비밀을 서로 유지해야 된다고 후일 36가정에서 탈퇴한 한 중진간부가 폭 로하고 있으니 그것이 거짓이 아니고 사실인가 하는 여부는 국외자로서는 확인 할 길이 없으나 참으로 장막의 베일에 쌓인 집단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그럴리가 있겠느냐? 고 딱 잘라 거부하고 있는 측도 있고혹 자는「옛날에 있었던 일인데 오늘날에 와서 그렇지 않으면 됐지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하는 자들도 있고 또 어떤자들은 이미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 인데 무엇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는 자도 있다」

문 교주의 혈맥 (血脈) 에 의한 복귀역사는 점조직화되어 대외적으로는 절대 비밀로 되어 있고 심지어 부부지간이라도 모르고 있는 게 사실이며 오직 자신 만이 참 부모의 혈통을 받은 혈족 (血族) 임을 자부하고 있을 뿐이다.

「통일교도들은 혈통복귀의 원리시행을 사탄세계의 정복을 위한 하늘의 뜻으로 믿고 있으므로 최대의 비밀로 알고 생명을 내 걸고 극비사실을 지킴으로써 외 부에겐 절대로 알려지지 않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통일교의 혈통 복귀원리가 하눈의 참 뜻이 아님을 알고 스스로 퇴교 (退敎) 해 버린 복귀경험을 가진 36축복가정 및 초창기 통일교의 공로간부들에 의해 복귀역사의 단편들이 간간히 새어나오고 있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모 여대졸업생인 이 모양은 1959년경 주일 낮 예배가 끝난 후 최 모여인이 다가와서 말하기를 선생님이 너를 만나자고 한다고 하여 2층에 있는 교주의 방에 올라갔더니 낮에 설교를 마친 문 교주가 피로한 모습으로 내의만을 걸친채 침 대에 길게 누어 있었고 최 여인의 설득으로 교주와 혈통복귀행사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때 최 여인은 거룩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곁에서 계속 기도를 하고 있더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녀는 문 교주의 황실에 6마리아 구성의 일원으로 자기의 일생을 보내느냐 아니면 탈퇴하여 평소 잊고 있는 X 씨와 결혼을 하여 일생을 보내느냐는 문제로 고민하다가 사주팔자까지 보았고 결국 결심을 하고 통일교를 나와 결혼하여 서 울에 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

또 모 여대에서 퇴학을 당한 이 모양은 1959년 문 교주가 미국에 유학을 보내 주었고 미국에서 이 여인은 중국인과 결혼했는 데 김 상철씨가 맡고 있는 미국 통일교회에 이 여인의 남편이 나타나 두 번씩이나 난동을 부린 사실이 있다.

문 교주의 측근중에 C모여 인은 타락한 하와형으로서 복귀역 사에 사람을 도와 야 할 사명과 책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제3아담격인 문 교주를 위해 혈통복귀 역사의 조수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60년대 제3차 40일간의 협회수련회를 지방교회인 경기도 야목교회에서 열 었을 때,문 교주는 야목교회 주변 호수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이 때 야목교회의 기둥구실을 하던 C모여 인과 Y모여 인 L모여 인 등 세 여 인은 삼위기대 (三位基臺) 로서 문 교주를 모실 야목교회의 영광을 위해 지성으로 문 교주를 받들었고 이들 세 여인은 작당하여 Y모여인이 교주로부터 복귀를 받을 계획을 하여 두 여인은 교주의 숙소 밖에 서서 밤을 지새워 기도를 드렸고 Y여 인은 교주의 방에 들어 가 교주에게 안마를 해 주었다.

이러한 야목교회 사건이 비밀의 베일에 쌓인것은 교주가 세 여인에게 일체 비밀로 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함구해 버린것이다. 1950년대 야목교회 삼총사로 이름을 날린 세 여인들에 대해서는 문 교주가 가끔 설교석상에서 모범신도로 소개하여 통일교 신도들은 모르는 이가 별로 없을 정도로 유명한 여인들이다.

이 세 여인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맹세를 한 바 있는 30대 부인들로서 C여인과 L여인은 유부녀였고 Y여인은 과부였으며 L여인만이 문 교 주의 총애를 받았다. 이들 3총사는 60년대 말경에 같이 통일교에 서 이탈해 버렸 다.

당시 C모여인은 통일교 본부 간부였던 유 모씨의 이상상대설 (색시감이라는 말) 이 있었고 유 모씨는 C여인을 많이 도와 주었다고 한다.

1956년에 문 교주의 식사를 시중들고 있던 박 모라는 미모의 여인이 있었다. 1957년경 통일교 내부에서는 서로의 이상상대를 찾아 재림주격인 문 교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한 선풍이 전국적으로 불고 있었다.

이때 박 여 인은 문 교주의 2층 거실로 부름을 받고 을라가 복귀를 받았고 교 주는 그녀가 최고라고 칭찬을 해 주었다.

그녀는 한 때 통일교내에서 레아격인 어머니 위치에 선정될 후부로 있었고 통일교 중심교인들은 그녀를 귀하게 여겼는 데,결국 그 자리를 C여인에게 빼앗 겨 버리고 통일교를 떠나버렸다.

1950년대 통일교에 입교를 한 여인들은 부부 별거를 하여야 하고 앞으로 재 림주의 거룩한 피 (聖血) 를 받아 원죄를 청 산받고 교주가 축복하고 새로운 가정 을 이룰것을 기대하였으므로 술한 가정들이 파괴되었고 부부가 이혼을 해야만 했다.

부인들만 입교를 했던 가정의 남편들은 부인과 완전히 영육간에 분리가 된 채 가정불화가 일어났고 부인들로부터 통일교 원리를 들어보라는 강요를 받게 되었고 교리에 빠져 버린 부인들은 자녀를 돌아보기는 커녕 오히려 사탄시 해 버린 것이다.

통일교에 입교하면 6천년의 오랜 기간을 거쳐 만난 형제들로서 그들에 게 필 수적으로 각자의 십자가인 이혼의 비극을 감수해야만 한다.

「통일교에 빠져 이혼을 한 주요한 신도들만 해도 玉·李·金·崔·呉·全·黃·劉·朴·車·金·柳 등 무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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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의 아이를 밴 최 모여인

리틀엔젤스를 지도하고 있던 C모 여인이 미국에 다녀 와서 전직간부 닛씨를 붙잡고 하는 말이,미국에서 최 모여인을 만났는 데 그 여인이 문 교주의 아이를 잉태 하여 임 신 6개월이 된 사실을 털어 놓았다. H씨는 최 모여 인이 문 교주의 아이를 잉태한 사실을 K씨에게 전하니까 K씨는 안양과 수원지방 교인들에게 전하였고 지방교회가 어수선해 지자 통일교 본부 유 효원협회장 (사망) 이 수습 하기 위해 나섰고 유 씨는 H씨를 갈월동에 있는 태양다방에서 만나게 되었고, 그 이야기의 출처가 미국을 다녀 온 C여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협회장 역시 최 여인이 문 교주의 아이를 잉태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는 데 그 즉시로 중국집에가서 문제의 발설자인 C여인을 만났다.

C여 인은 다짜고짜로 앞으로 4개월만 있어 보면 그때 가서 최 여 인이 아이를 낳는가 안 낳는가 두고 보라고 욱박질렀다. 그러 자 유 씨는 C여 인을 저주하면 서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죽을 것이라고 저주까지 했으나 C여인은 지금 은행간 부로 있는 남편과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미고 있다.

결국 최 여인은 문 교주의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사무엘 문이다 (현재 사무엘 박이란 이름으로 박 보희 가정에 입양돼 있음) .

앞서 언급한 C여인은 통일교를 등졌고 통일교에 서 맺어 준 축복가정을 파괴하고 문 교주가 잘 아는 P여인집에 3개월 동안 몸 담고 있었을 때였다.

그때 문 교주가 P여인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걸적마다 P여인의 아이들에 게는 학교 선생이니 엄마 좀 바꾸라고 거짓말을 했고 P여인이 전화를 받으면 C여인을 내쫓으라고 했다.

C여 인은 국민학교 6학년 시 절부터 엄마를 따라 통일교에 다녔고 그의 부모가 통일교 때문에 이혼한 피해자중의 피해자였다. 초창기 부산시절부터 문 교주에. 게 재정적으로 지원한 공로자의 딸인데 P여인에게 자기의 비밀이 탄로날까 겁을 먹고 격리시키는 방법으로 C여인을 내 쫓으라고 한 것이다.

374

문의 혈통을 계승한 축복가정들

36가정은 일차 복귀부활의 참여자들로 천국세 계의 황족들이며 참 부모 (문교주 부부) 의 혈통을 실체 (實體) 로 계승한 지파구성의 족장들이다.

그들은 종적인 죄악사를 횡 적으로 전개한 실체로서 문 교주는 마태복음의 족 보에 나오는 다말·라합·룻·밧세바 등 4여 인을 음녀로 보았고 타락한 인류의 원죄청산의 피가름역사에 그 모형 (아담가정형一노아가정형一야곱가정형) 을 맞 추어 실체로 남자들에게 대입 (代入) 시켰고 (먼저 문 선명과 섹스를 한 4음녀라고 불리우는 네 명의 여자로 하여금 36가정의 남자들과 관계를 갖게 함을 말함) 제1가정 (아담가정형) ·제2가정 (노아가정형) ·제3가정 (야곱가정형) 으로 12명 씩 분류한 36가정을 이뤘고, 36가정의 12명 중에서 3가정을 최고모임가정으로 선정하여 문 교주부부→ 3 가정→ 33가정의 피라밋 식으로 확산되어진 것이다.

그리고는 제1가정은 타락한 아담가정형으로 이미 통일교에 입교하기전에 결 흔했던 기혼가정들로서 인정, 결정타락을 탕감복귀하는 중생의 역사를 통해 남 편들은 문 교주의 혈맥을 이어 받은 4음녀로부터 인침 (섹스) 을 받아 원죄룰 청 산했고 아내들은 이에 복귀된 남편들로부터 원죄를 청산받게 됨에 따라 선남선 녀의 인정을 받는 중생식을 거쳐 참 부모의 축복을 받게 된 것이다.

제1가정의 여인들은 본래 문 교주가 신부를 직접 세 번씩 (인정결정 판정) 복 귀행사 (섹스) 를 실시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편법을 써서 제1가정의 대표되는 김 모를 내 세워 대입 (代入) 시킨 것이다. 복귀된 남자가 자기의 부인이 될 이상형의 연인을 복귀시켜 가지고 축복의 자리에 나간 결정 타락을 탕감복귀하는 일도 있었다.

그 실례로서 현재 통일교 계열기업의 Y모사장은 X여인으로부터 이미 복귀를 받아 인정타락을 탕감복귀한 상태였다. 그런데 1961년 36가정 축복이 결정되고 그 대상들을 인선할 때 자기 죄의 자복을 하면서 문 교주에게 복귀된 이후에 딴 여인과 타락한 것을 실토했다.

이러하여 Y모씨는 황족권내에 들고 1차 부활 때 참여자인 36가정의 축복대열 에서 탈락 될 것에 고민하여 3·4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통일교본부교회 건너편 뒷방에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아비규환같은 고통스러운 생활을 했다.

이때 당시 통일교 사도였던 송 모장로가 문 교주를 만나 구제책을 논의한 결과 「잃어 버린 장소에서 다시 찾아 오는 방법」으로 인정타락을 탕감복귀한 여인으 로부터 다시 중생함〈피가름〉을 받아 비로서 부활함으로 그의 상대되는 처녀신 도인 김X X여인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Y씨는 자기 의 상대 되는 김 여 인을 직 접 복귀시켜 가지고 참 부모 앞에 나아가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Y씨는 이 미 처자가 있는 몸으로 자기 본 부인과 이혼을 하지 않고는 축복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며칠간 본처를 설득하여 당시 꽤 거금인 50만환을 위자료조로 주고 이혼한 바 있다.

결국 Y씨는 서울 청파동 본부에서 거행된 그 거룩한 (?) 성혼식 (聖婚式) 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른 아침부터 운집한 인파 속에 Y씨의 딸들이 나타나 아버지를 내 놓으라고 소리소리 질렀고 그 외에도 피해자 부모·형제들이 나타나 수라장 을 이루게 되었고 통일교측과 반대자들 사이에 난투극 때문에 거룩한 성혼식장 은 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제1가정의 대부분은 부부가 함께 입교한 신자들로서 참 부모의 축복에 임하 였고 그외 이 모씨,안 모씨 등 간부들은 본처가 엄연히 통일교 신도임에도 불 구하고 40대가 넘어 50대를 바라보는 처지에서 경기도 평택통일교회 출신인 처 녀들을 택하여 새 장가를 들어 주변의 빈축을 샀다.

그들은 20대 처녀들을 취하여 처녀 장가를 들게 되 었고 본처와 자식들은 강제 이혼으로 인한 슬픔의 비극을 맛보게 된 것이다.

이혼당한 이 모씨의 본처는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화병이 들어 죽었고 유 씨의 본처는 어디론지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 지금 어느 하늘 아래에서 한을 품고 원망을 하면서 살아가는 지 알 수 없다.

통일교 간부들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고 있 으면서도 교세확장을 위하여 많은 어린양들을 유혹하고 있다.

제2가정 (노아가정형) 은 미혼남녀들로서 남자들은 제1가정의 복귀방법과 여자 들은 대부분이 모 여대퇴학사건의 장본인들로서 교주로부터 직접 혈통을 이어 받은 여인들도 있고 복귀받은 남자들에 의해 선녀 (善女) 로 인침을 받아 축복의 자리에 나간 여인들도 있었다.

제2가정의 종적인 역사의 대표자인 유 효원으로부터 혈통계승에 대입된 가정 들도 있었다.

제3가정 (야곱가정형) 은 야곱가정의 승리적인 이스라엘의 표상으로서 숫총각 숫처녀들로서 구성된 가정들이다.

제3가정의 남자들은 제1가정이나 제2가정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4음녀에 대 입 (代入) 되어 원죄를 청산받은 자들이고 여자들은 문 교주의 혈통을 계승한 계 층들로 알려져 있다.

같은 36가정 중에서도 그 권위를 은연중에 과시하여 심지어 교회어른들에게 인사도 잘 하지 않고 건방지게 굴다가 욕을 먹는 경우도 있다.

제3가정에 속해 있다가 후에 탈퇴한 모 씨는 다음과 같이 그 내막을 폭로하고 있다.

자기는 청파동 본부교회 2층 문화부장 다다미방에서 50대의 X X X여인으로 부터 복귀 (섹스) 를 받았다고 하며 축복받은 후 자기와 자기 부인은 자동적으로 점차 혈통복귀의 내용을 알게 되자 부인으로부터 그 진상을 고백받고 결국 퇴 교해 버렸다.

타락한 온 인류의 대표자격인 제1가정의 김 원필이나 제2가정의 유 효원, 제3 가정의 김 영휘 등의 복귀문제와 타락한 인류의 어머니격이며 중생의 모체인 최 원복여 인을 중심한 이 정옥·이 득삼여 인과의 관계도 어떤 함수관계가 있는 것일까?

통일교에서는 교회규약에 의해 합동결혼식을 한 후 40일만에 첫날밤을 갖게 되는 데 40일 기간을 사탄분리기간으로 섭리적인 의의를 부여하고 있으나 사실 은 원죄탕감시에 씨가 다른 잉태를 분별키 위한 혈통복귀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40일 기간이란게 있는 것이다.

합동결혼식을 거행한 40일 후에 부부생활을 하기 전에 3차례에 걸친 중혼식 (重婚式) 이란 엄숙한 성교의식을 거행한다.

1차·2차 중혼식 때는 남자가 여 자에 게 두번 경배하고 한 번은 합배 (合拜) 하 며 여상남하 (女上男下) 의 성행위를 하고 제3차식 때는 비로소 타락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남자의 주관성을 회복하고 정상적인 체위에 성생활을 하게 되어있다.

남자가 여자에게 경배하는 것을 복귀된 하와로부터 나를 품으시사 아담의 주 관성을 회복하게 해 주십사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문 교주의 혈통을 직접 실체 (實體) 로 계승한 (문선명과의 직접적인 섹스관계) 삼육가정 (三六家庭) 은 성주식 (聖酒式) 을 거치지 아니하였고 그외 72가정부터는 합동결혼식을 하고 난 축복가정들은 혈통계승의 상징적인 방법으로 참 부모의 피가 섞인 성주 (聖酒, 백도라지 술) 를 마시는 성주식 (간접, 상징적 섹스관계) 을 거행하게 된다. 36가정들은 혈통복귀혁명의 족장들이며 그 이하 가정들은 계보에 따라 상징적이 아닌 실체로 천국조직에 대입되어야 할 과정을 남기고 있다. 그 래서 문 교주는 혈통혁명을 주장하고 나왔고 세계인류의 형제주의적인 대가족 제도를 성취시키기 위해 성씨마저도 문 씨로 통일하겠다는 내용을 갖고 활동하 고 있는 것이다.

 

축복 가정 선서

(註 : 합동결혼식을 통해 이룬 가정을 의미함)

「천주 (天宙) 의 중심 인 우리가정들은 상·하를 연 (連) 하는 형제자매로서 새 하 늘 앞에 참 부모의 혈육으로서 하늘이 분부한 전통과 가법 (家法) 을 준수하며 책임적 활동에 있어 자기위치를 잃지 않고 승리자의 영광을 갖추도록 참 부모님 앞에 선서하나이다」

위 내용에 있어서 “참 부모의 혈육”이란문교주 부부의 피와 살을 의미함이며 “하늘이 분부한 전통과 가법”이란 하늘은 재림주로 자처하고 있는 참 부모를 의미하는 것이다. “가법”이란 통일교의 합동결혼식을 참 계보와 계열을 의미한 다.

문 선명교주 부부를 참 부모로 믿고 있는 합동결혼식을 올린 축복가정부부들 은 매월 초하룻날과 매주 주일 새벽 5시에는 방안에 걸어놓은 참 부모님인 문 교주 부부의 사진 앞에서 큰 절을 세 번씩 하고 매일 아침 밥 한 그릇을 정성껏 떠서 밥상을 차려놓고 참 부모님께 바치고 있다.

 

일선통혼 (日鮮通婚) 찬양하는 문선명

그러므로 문 교주는 1958년도에 혈통혁명의 내용을 비유한 설교에서 “일본이 한국을 영원히 자기들의 속국으로 지배할 수 있는 비결은 혈통작전이었는 데 하늘이 그들에게 지혜의 길을 허락치 않았다.

만약에 일본의 최상급 미인들을 한국의 중류급 총각들에게 1년에 3천명씩만 혈맥을 혼합시켜 결혼을 시켰다면 한국의 총각들은 일본 여인에게 장가들려고 침들을 홀렸을 것이고, 그러한 작전을 30년만 썼디라면 제2세의 청년들은 일본이 외가 (外家) 로서 일본과 한국의 원수지간이 될 수 없고 영원히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통치국으로 지배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과연 문 교주 다운 정신이상적이고 망상적인 착상이다. 여기서 통일교의 혈통 혁명이론을 전개한 바,합동결혼식을 통해 각국 처녀총각들을 섞어 결흔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문교주의 착상을 실현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통일교의 복귀원리를 중심한 피가름의 역사의 원리가 36가정을 중심 하고 합동결혼식의 국제적인 경우에 이르기까지 중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감지 할 수 있다.

 

비밀폭로 두려워하는 문 선명

특히,문 교주가 가장 예민하게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36가정 중에서 퇴교한 자다. 반발하고 있는 자에 대한 혈통복귀의 비밀이 폭로되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교주는 36가정에 대해서는 1976년도에 1,200만원짜리 집이나 아파트를 사 주 었고 제1가정 중 모 인사는 그 호의를 거절한 바 있다. 문 교주는 혈통복귀의 비밀을 알고 있는 36가정에 대해서 되면 최고이고 안되면 최대의 역적이 된다고 말했고 간부들에게는「선생님이 지옥에 가면 같이 따라 가겠느냐?」고 여러 번 다짐한 바 있다. 이것은 자신이 재림주로서 헛점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풀이 된다.
문 교주는 또 1976년 2월에 공식석상에서 이런 예언도 했으나 아직 실현이 안됐다.
「앞으로 3년만 있으면 배반자와 반대하는 자들이 생겨날텐데 내 손가락끝만 가지고 저주만 해도 그 자리에서 즉사 해 고꾸라진다」
이러한 위협적인 예언은 자기네들의 세력이 국제적으로 확장되었을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대파를 없애버리겠다는 뜻이며 자신이 발표했던 야곱의 21년 노정 이 1981년으로 다가 오므로 재 림주인 자신에 게 확신이 없 기 때문에 신도들 로 하여금 미리 배신치 못하도록 못 박아 놓은 수법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예언하여 주장하기를 천상계 (天上界) 인 하늘에서는 76년 1월 1일 (음력) 통일식 (統一式) 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리가 완전히 잡혔고 지상에 자리를 잡기 위해 영계에서는 영인들을 총동원하였고 금년부터는 영인들의 협 조에 의해서 통일교의 가는 길이 형통된다고 호언장담했는 데 이와는 반대로 탈세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 예언은 들리는 말에 의하던 무당굿을 하고 조상 해원풀이군을 하던 . 통일 교의 영적고문인 논산할머니 (이 백임노파) 가 자주 입버릇처럼 뇌까리던 예언을 문 교주가 받아서 그대로 써 먹 었다고 하나 확인할 수가 없는 것이 이 제 논산할 머니는 죽고 없기 때문이다.

378

통일교 간부들의 불륜행위

문 교주의 사촌인 통일교산하 모 기업체의 대표인 문 모씨는 1970년 통일산업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어린 처녀 김 모 (19세) 양을 농락하여 물의가 일어났으나 문 교주는 모른척 하고 눈 감아버린 것이다.

36가정에 므씨가 있다. 그는 36가정의 제2가정으로서 현재 통일교 계열기업의 사장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축복가정인 쇼씨의 부인과 정을 통했고 그 사실이 남편 쇼씨에 알려지자 이혼하고 다른 여인과 1,800쌍 합동결혼식 때 재축복을 받았다.
II씨는 1차부활의 참여자요, 천국행 초특급 황족권의 족장으로 참 부모의 혈 통을 계승한 자로서 때가 아닌 때에 참 부모의 인정없이 탈선을 했고 9씨와 통정한 여 인의 남편 쇼씨는 성주식 (聖酒式) 을 통한 인정축복권내에 속한 자로서 언젠가는 계열에 따라 실체 (實體) 로 복귀되어야 할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II씨의 불륜한 행위가 교리상으로 볼 때 하와의 타락이 아담 모르게 비밀리에 행해졌기 때문에 아담격인 쇼씨의 부인 역시 남편 모르게 비밀리에 인정 타락을 탕감복귀 하는 수단으로서 참 부모의 혈통을 9씨로부터 계승받아 복귀될 수 있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자동적으로 복귀받는 가정이기는 하지만 조직과 계통을 무시하고 임의로 행한 처사를 자행한 그를, 문 교주는 제거하지 못하고 오히려 중책을 맡긴 것은 그들의 비밀이 들어 날까 보아 염려한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H씨의 쇼씨부인과의 사건은 통일교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인데 이러한 간통사건을 척결 못하는 이유가 나변에 있는가 생각해 볼 일 이다.

430쌍 합동결혼을 한 가정에 K씨가 자기 부인과 합세하여 17세의 소녀를 강 간한 사건은 신문에도 보도된 바 있다.

K씨는 영적인 체험을 경험한 일이 있는 자로서 자기 집 점원인 소녀를 복귀 서켜 준다고 그의 부인은 소니의 다리를 붙잡아 주고 자신은 소녀를 강간하여 사법사상 유례가 없는 부부합세강간을 자행하여 구속되었는 데 실형을 선고 받 았다.

A씨는 통일교 협회본부의 원리강사로서 간부직에 있는 36가정의 제1가정에 속한 사람이다.

그는 1950년대말경 모녀가 입교한 C여인의 딸을 유인하였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중진 간부들에 의하여 C여인이 교회 예배시에 나타나면「저기 A형의 장모 가 온다」고 놀려대기도 했다. 이럴적마다 쇼씨는 사색이 되어 쩔쩔 매었고「제발 그 소리만 하지 말라」고 저자세가 되어 애원했다는 후일담도 있다.

쇼씨는 지방전도대원들에 대한 순회강연이 맞았고 전국 교인들이 그에 대한 평은「더듬과 선생」이라고 한다고 하니 그의 행각을 알만하다.

A씨는 1960년대 초반 경기도 안양통일교에 자기 임의대로 자주방문했고 그때 마다 처녀 교인들의 허벅지를 노렸고 안양교회의 당시 전도사였던 C씨는 몽둥 이를 들고 때려 죽인다고 몰아 냈으나 그는 원리강의 보따리를 들고 힐끔힐끔 뒤를 돌아다 보면서, 쫓겨 가면서 하는 말이「저것 C전도사 녀석 원리를 모르는 구만」하면서 중얼거렸다는 일화는 그 당시 유명한 이야기가있다.

C전도사의 보고가 통일교 본부협회장 유 효원씨에게 직접 보고가 되었고 유 씨는 직접 안양에 내려가 사건을 수습했던 것이다. 또한 A씨에 대한 문제는 공 식 석 상에 서 문교주로부터 주의를 받아 창피를 당한 바 있다.

A씨는 현재까지 통일교 교리를 전하는 원리강사 중의 한 사람으로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

L씨는 교주로부터 명명받은 목사로 통하는 36가정의 제1가정으로서 위에서 지적한 A씨와 똑 같은 경우로 본처를 버리고 경기도 평택교회의 여자청년과 결혼을 했다.

L씨는 통일교 초창기 부산에서 문 교주를 만났고 지금까지 통일교의 간부직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1960년도 대구에서 모임을 갖고 있을 때 중진교인이 Y여인으로부터 타락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내가 직접 가르쳐 줄터이니 나 하라는 대로 하겠는가 ? 라고 다짐을 받은 후 방문을 잠그게 한 후 눈을 감으라고 지시했다.

그 다음 그 여인의 옷을 차례로 벗기더니 자기의 남성을 그녀의 얼굴로부터 가슴까지 온 몸 전체에다 부벼대더니「바로 이것이 타락이다」라고 했다는 것이 며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더 언급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이 사실은 경북지구내의 통일교간부들도 알게 되었고 그 당시 근무하다가 탈 퇴한 X씨와 현재 간부로 있는 X씨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직접 목격하지 못했으므로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윤리상 있 을 수 없는 이야기며 그후 그 연인은,퇴교하여 현재 대구 모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자신의 지난 날을 후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C모씨는 1946년 평양에서 문 교주를 알게 되었고 한 때 교주의 제자가 되었 다가 반대하는 입 장에 서 게 되었다. 그는 6·25동란으로 월남하여 경 기도 야목 에서 기성교회 전도사로서 목회를 한 바 있고, 1956년에 문 교주와 재회한 후 자기교회 교인들을 이끌고 통일교로 넘어 온 사람이었다.

C씨는 정규신학교를 졸업하거나 정규안수절차도 없이 문 교주가 임의로 안수하 여 만든 목사로서 많은 여신도들을 피가름 한 장본인으로 악명을 날렸다.

1958년도경에 서울교회를 중심으로 한 전국 통일교회내에 원죄청산의 복귀문 제와 이상상대를 각자의 지혜로 (인간책임분담5%) 찾아 이루기 위한 바람이 불 었고 피가름의 역사가 도처에서 비밀리에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때였다.

1962년 72가정 합동결혼시에 후보들은 자기의 죄상을 교주 앞에 고해성 사 (?) 으 의식이 있었는 데 이때 C씨의 음행행각이 뭇 여인들에 의해 들어났고 이에 당 황한 문 교주가 C씨를 호출하였고 비밀리에 무슨 말이 오고 갔는 지 모르지만 C씨는 그후 J권사와 결혼을 하여 지금도 통일교 일을 보고 있다.

1958년경에 김모씨의 60여명의 여인과의 피가름사건이 터졌다. 김씨는 일본 에서 음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통일교인들이 즐겨 지금도 부르는 성가를 102곡 이나 작곡한 장본인으로서 평양 숭실출신으로 통일교 활동의 동기생인 김 인창 (가명) 씨와 함께 박 모씨를 만나 이야기 하다가 놀라운 사실들이 터져나왔다는 것이다.

현재 통일교 본부교회 부인들로 구성된 형제회소속의 많은 회원들을 복귀서 켰고 김 씨가 복귀시킨 여인들이 다시 염씨·이씨 등 남자신도들을 복귀시켰고, 그 남자들이 한 여 인을 복귀시 켰고 다시 그 여 인들이 남자들을 복귀 시켜 총 60 여명이 피가름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은 우리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 는 일이다.

김 씨는 문교주의 전통과 계통을 완전히 무시해서 조직체계를 파피했다는 이 유로 당시 통일교에서 경영하던 경북 성주에 있던 서진광산으로 추방·좌천당 하였으나 광업소생활을 하면서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여 절대로 갱내에는 들 어 가지 않고 2년을 근무한 후 이탈하고 말았다.

김 씨는 여 신도 간음의 역 사가 하나님의 뜻으로 알았고 문 교주의 피가름사건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알았으며 그가 수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가진 것은 다만 피가름의 교리를 그대로 실천에 옮긴 것 뿐이고 그의 상대되는 부인들도 역시 교리에 따라 행동을 했다는 믿을 수도 안 믿을 수도 없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후 통일교를 떠난 김 씨는 경찰서 유치장전도를 하면서 여생을 회개하는 생활로 일관하고 있다.

381

문 교주의 사관 (史觀) 과 그의 정체

통일교에서는 인류역사를 선과 악의 투쟁사로 보고 있으며 평면적인 그 역사 이면에 하나님과 사탄이 인간의 시조인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반대경로에 의해 여 복귀하는 섭 리사에 나타났던 중요인물들의 책 임분담의 결과에 따라 죄악사 (罪惡史) 의 연장을 전개하면서 하나님과 사탄이 각각 그 주권을 빼앗기 위한 투쟁사로 봄으로써 기독교에 서 전지전능하시고 절대자로 믿는 하나님의 굴레를 사탄과 동일한 위치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과 만물 세계는 인류시조 타락 이후 지금까지 사탄이 지배하였고 하 나님은 6천년간 한이 맺혀있는 데 통일교 문 교주가 나서서 사탄편에 있던 인 간과 만물세계를 사탄의 손에서 빼앗아 하나님께 돌려주었다는 뜻에서 1월 1일 을 통일교에서는 “하나님의 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1968년 1월 1일을 기하여 문 교주가 하나님께 인류와 만물세계를 돌려주고 1975년 희망의 날 대 향연행사로 하나님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드리는 한풀 이굿이라고 문 교주 설교집 (말씀) 에 나와 있는 것을 보아 문 교주의 교리를 짐 작할 수 있는 것이다.

문 교주는 인류시조의 타락으로 인한 6천년 죄악사를 종적 (縦的) 으로 보고 (즉, 아담一예수一재림주) 종적인 죄악사를 횡적 (横的) 으로 전개하여 (아담가정 ―노아가정一야곱가정 ) 이 를 모두 탕감복귀 하는 수단으로써 야곱과 모세 의 노정 (路程) 을 예수님의 전형노정 (典型路程) 으로 보아 야곱노정에 의한 선주권 (善主權) 을 복귀하려는 문 선명교주의 생애를 통한 섭리사관이 바로 통일교 활동의 깊은 내막의 일환이다.

문 교주는 그의 생애를 통하여 1920년 1월 6일 (음력) 자신의 생일을 재림주 탄생의 기점 (基點) 으로 하여 1960년부터 40년간을 6천년 죄악사의 종적 (縦的) 으로 대입 (代入) 된 기간으로 보고 1960년부터 1981년까지 21년간을 횡적으로 전개된 야곱의 노정으로 보았다. 통일교에서는 1960년을 깃점으로 1차 7년노정, 2차 7년노정, 3차 7년노정, 토탈 21년노정으로 보고 이것도 야곱이 하란땅에서 21년간 종살이하고 가나안으로 나온 사실과 결부시켜 해석하고 있으니 문 교주 를 야곱적 사명을 가진 재림주로 보고 있는 것이다.

21년노정이 끝나고 한국을 중심으로 세계가 가나안복귀를 목표하고 문 교주 회갑인 1981년까지는 기필코 선주권을 쟁취하기 위해 맹렬한 활동을 벌였으나 실패작으로 끝나고 만 것이다. 선주권을 쟁취한다는 것은 문 교주가 이 세계를 지배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또 메시아로 자처하고 있는 문 교주의 혈맥 (핏줄) 을 중심하여 혈통혁명 (血統革命) 을 기반으로 하여 세계적인 기독교를 발판으로 삼기 위하여 기독교의 탈을 쓰고 위장하고 있는 것이 통일교인 것이다.

지상천국 건설과 천주복귀 (天宙復歸) 의 원화원 (圓和苑) 의 세계란 미명하에서 성서를 믿고 있는 기독교인들을 유혹하고 있고 그들의 교리 서인 원리강론을 통 한 이념활동은 기존질서의 파괴와 윤리도덕은 일체 무시된다. 그러므로 통일교는 종교단체로 위장한 정치목적을 위한 집단이며 종교의 탈을 쓰고 세계통일을 꿈 꾸고 있는 집단으로써 문 교주가 모든 주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정치·경제·문 화 ·종교·사회 전반에 걸쳐 깊숙히 파고들어 문 교주의 사상을 위주로 하는 사회·국가·세계의 재편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 증거로 현재 우리 한국 사회의 경제·정치·문화·예술·정보·종교·학 원 등 각 분야에 걸쳐 깊숙히 침투하고 있으며 적어도 통일교에 대해서 적극적인 활동을 기대하는 것보다 묵시적인 공감을 얻어 내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는 데 문제는 그렇게 말려든 미망에 빠진 각계 각층의 인사들의 사고양 식인 것이다.

문 교주는 자신의 혈맥을 중심 삼고 인류를 하나의 식구로 형성시키기 위해 1981년까지 혈통혁명을 위해서 합동결혼식을 하고 주권복귀를 위해서 정치에 직접 개입하려다가 1981년 7월 민정당과 현 정부에 의해 그 뜻이 좌절되고 국 제승공연합의 활동이 제재를 받게 된 것이다.

문 교주는 설교 때마다〈이 현실세상이 빨리망해 버리고 썩어야 뜻을 이루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고 강조했다.

통일교 신도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문 교주 부부를 인류의 참된 부모 님으로 섬기고 있으며 기도할 때에도 문 교주 부부의 이름인〈참 부모님의 이 름으로 기도하나이다〉라고 한다.

문 교주가 주장하고 있는 혈통복귀원리 (피가름) 는 철통같은 베일 속에 가려져 외부인들은 알 길이 없고 다만 핵심 간부들만 알고 있으리라고 본다.

문 교주는 항상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란 책을 즐겨 읽고 그의 수법은 히틀 러를 닮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이탈신도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독일의 히틀러가 정치적인 과대망상증 환자라면 문교주는 종교적 과대망상증 환자임에 틀림이 없다.

문 교주는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소위 하늘의 뜻을 내세워 “시간, 재물 등 모든 것을 회생하여 충성을 다 하라”고 유도하고 있으니 통일교도들은 항상 무거운 마음으로 바쁘고 쫓기는 생활을 하고 있다.

종교적인 진리를 신앙하면 우선 마음의 평안이 와야 하는 데 통일교 신도들은 무거운 책임의 의무감에 얽매여 있으며 소위 책임분담 노이로제에 걸려 있다고 하여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잠 잘 시간적 여유도 없이 활동하고 있으며 돈을 벌어 들이고 포교활동을 하는 데 맹렬한 기세로 내 몰리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란 한가하고 시간이 있으면 잡념이 생기고 생각하는 여유를 갖기 때문 에 통일교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도록 문 교주는 그의 비상한 숫법을 동원하여 신도들을 내 몰고 있다. 교주에 대한 절대충성을 강요하고 있으며 심 지어 육친의 혈육의 정까지 외면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실정이며 친 부모보다 참 부모인 문 교주를 더 사랑하고 충성하라는 강령도 있다.

우선 통일교인들이 좌우명으로 암송하고 있는 “축복 가정 선서”와 “나의 맹 서广를 살펴보면 무서운 살기 (殺氣) 마저 느끼게 될 정도로 느낌을 갖게 된다.

문 교주는 통일교는 교회가 아니라고 늘 강조해 왔다. 목사나 교주라는 명칭은 생각하기조차 싫고 자기 생리에 맞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실토한 적이 있다. 그 러면서 통일교 신도들은 혁명을 위해 싸우는 투사라고 외치고 있으며 그러기에 교명 (敎名) 도 협회라고 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통일교의 최종목표는 선의 주권을 복귀하기 위한 것인데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종교단체로 위장하고 활동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소위 이념운동인 것이다.

통일교 이념의 주체가 되는 문 선명교주와 문 교주의 사상을 중심한 한 국가의 주권자를 정복키 위한 책략이 통일교회 최고 지상목표이며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회 모든 유명인사나 정치인들을 포섭하고 있 으며 이미 상당수가 포섭되어 있으니 언론계,학계 ᅳ 정보기관 ᅳ 수사기관,법 조계,정계,경제계 ᅳ 기독교계 등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는 것이다.

포섭이 끝난 다음에는 그들이 소위 사탄세계라고 말하는 현실사회 속에서 국 토를 빼앗기 위한 방법이 그들이 택하고 정한 성지 (聖地) 라는 것이 기정화 하 였다. 문 교주는 이미 수 십차례에 걸쳐 한국 땅을 모조리 다 사버리겠다고 공 언한 바 있고 서울 여의도를 비롯하여 경기도 구리읍·청평·이천·서산·제주 도 등 전국에 걸쳐 적어도 한국 땅의 몇 천분지 일의 땅을 비밀리에 매입해 놓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사실은 통일교 교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합리화되고 있다. 하늘 편이 사탄에게 잃어버린 인간과 만물세계를 문 교주 자신을 중심하고 선주권복귀 (善主權復歸) 라는 목표하에서 종교적 인 허울을 쓰고 현실사회를 향하여 선전포교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통일교에서는 현실사회가 빨리 썩고 부패해야 자기들의 뜻을 빨리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사회 적 인 도덕관이나 윤리관을 완전히 무시하기 때문에 신도들의 가 정파탄 현상이 일어 나고 있으니 36가정을 분류 해 보면 조강지처를 버린 자가 부지기수이다.

통일교가 5·16광장에서 전개한 소위 구국세계대회나 뉴욕 양키스타디움에서 가진 대 규모집회는 전도가 목적이 아니고 자기과시를 하여 외세를 몰아 한국의 주권자와 결합하거나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이르키자는 것이고 박 보희가 프레 이 져의원과 대결하면서 주기도문을 외운 것도 제스츰어에 불과한 것이지 그들은 기독교의 사도신경이나 주기도문마저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네에게 유리한 부분만 발췌하여 마치 한국을 대변한 애국자인양 팜프랫트를 만들어 한 국사회 요소에 뿌렸고 사람들은 그것을 100% 믿게 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자 기선전극인 것이다.

문 교주는 희망의 날 대 향연을 전국 도시에서 전개하였고 각급 행정기관의 비호하에 기성교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들의 실력을 과시 (?) 하고 그것은 당시 박대통령을 만나기 위한 연극이었다. 그 문교주는 간부들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성교회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1차 작전에 실패한 그들 은 제2차 작전으로 뉴욕에서 뉴욕 20만집회, 워싱턴 50만집회 운운하고 떠들어 댔으나 불과 기만도 못 모인 것이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승리적인 열세의 깃발」을 들고 한국의 대 집회블 계획한 문교주는 한국이 세계의 중심국이요, 신앙의 조국이라고 부르고 통일교 섭리의 목표로 되 어 있는 야곱 노정 이 끝나는 1981년인 문 교주의 환갑때 까지 주권복귀 (말하자면 정권탈취를 의미함) 를 하려고 획책하고 국회의원들 까지 포섭하다가 1981년 7월초 집권당인 민정당에 의해 그들의 야욕은 무참하게 허물어지고 만 것이다.

문 교주는 당시 박대통령에게 안수기도를 하러 왔느니 또 축복 (결혼) 을 하러 왔느니 하고 떠들어 댔고 국회의사당도 살 수 있으면 돈 걱정은 하지 말고 사 보라는 지시를 내린적이 있었다는 이탈간부들의 폭로담이 사실이라면 문교주의 망령된 언동은 정신이상자의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이 말하는 주권복귀라는 것은 정권을 직접 탈취하자는 의미도 있으나 그 보다도 주권자 (대통령) 의 사상을 지배하고 주관하자는 것이니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닉슨대통령을 안수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문 교주의 닉슨에 대한 축복기 도는 20일만에 하야 할 수 밖에 없었던 저주기도로 변하고 말았다.

주권자의 사상을 주관하게 되면 통일교를 국교로 만들어 한 민족의 주권을 쥐고 통일교 교리와 이념으로 세계인류를 혈통혁명하자는 뜻이다. 통일교가 겉 으로는 정권에 협력하는 척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위장술책이요, 사실은 그들의 교리에 의하면 주권자는 죄악사를 외적으로 책임 진 천사장급으로서 하 늘의 뜻을 갖고 있는 아담적인 문 교주 자신을 내 세우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도들에 게 절대자로 군림 하고 있는 문 교주 앞에 자기들이 말하는 복귀역사의 사명을 못할 때는 하늘이 갈아치우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것도 세 번까지는 기회를 허락한다는 그들 나름대로의 원리를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통일교인들은 문교주의 이런 허황된 망상에 사로잡혀 큰 소리를 치고 있으며 뜻이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한다. 통일교인들은 앞으로 온 세상이 자기들의 이념권으로 들어 올 것으로 믿고 있으며 지금은 때가 아직 안되었다고 믿고 있다.

문 교주는 뜻을 위해, 역사적인 선한 일을 위해 재산을 바치라고 주장했으며 뜻을 위해 남편도 가정도 버리도록 유도했고 모든 세상적인 것은 사탄으로 규 정하도록 하면서 자기만 따르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피와 땀과 눈물을 바 치라고 충성을 강요한 문 교주에게 미혹되어 그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젊음을 바치고 나이들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비참한 신세가 된 사람들이 그 수 얼마인가 말이다.

통일교는 미국집회를 시작하면서 고급간부인 협회장과 재단이사장, 진화 인쇄 소 사장 홍 종복, 일화인삼회사 전무인 홍 성표 등 5명은 일간 신문사편집국장 들을 초청하여 미국 일주 관광을 시켰고 그때 두 신문사에서만은 그 대열에서 빠졌다. 문 교주는 수 많은 경제대원들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재력을 이용하여 최후에는 엉뚱한 짓을 척척하고 있는 것이다.

5·16광장집회 이후 사람들의 여론을 들어보면 무튼 난 사람이라고 칭찬하 는 사람도 있고 욕하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지만 하여튼 문 교주는 이 여론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오도하여 종교단체를 발판으로 내 세워 이 현실사회를 혁명 하자는 데 있는 것이다.

아무튼 문 교주의 속셈은 통일교를 거쳐 나오지 않은 사람은 그의 속사정과 정체를 알 수 없으며 수 많은 젊은이들이 문 교주의 허황한 논설에 현혹되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불나비처럼 뛰어들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말 이다.

문 교주가 자신에게 진정으로 충성하고 있는 부하신도들에게는 최고로 인색 하면서 대외적으로는 물 쓰듯이 돈을 쓰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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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바치시오

과거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장인 김 규남씨는 1970년 이래 열광적인 통일교 신도로 충성했으나 1974년도에 통일교에서 이탈하여 반통일교운동에 앞장서고 있다. 김 씨는 통일교회의 외적 활동과 이념에 매혹당했으나 차츰 그 내막을 알고 나서는 이에 환멸을 느끼고 그 진상폭로에 앞장을 선 것이다.

김 씨는 자신 뿐만아니라 그의 아내도 입교시켜 원리공부까지 하고 그의 직 위를 이용하여 재일교포들을 통일교에 입교시켰으며 문교주는 김씨를 최대한 이용하였다.

김씨가 입교한지 2년째 되는 어느 날 본부간부인 김 영운 여인에게 원리강의를 듣고 있던 중 이런 말에 충격을 받았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부인과 이혼하시요, 그러면 여자 교인 중에서 아름답고 젊은 여인과 재혼하도록 하겠으며 5명의 자녀는 모두 통일교에 마끼고 당신의 재산전부를 기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어렵다면 5명의 자녀를 낳은 아내에게 전 재산을 다 주고서라도 헤어진다면 더 좋은 생활로 통일교에 전심전력을 할 수 있다」고 권유해 온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김 규남씨는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들어 김 영운 여인을 향해 던져버리고 흥분하여 책상을 주먹으로 치면서 고함을 지르고 그 길로 나와서 반통일교운동에 앞장 선 것이다.

김 씨는 1974년 6월에 사업차 한국에 나와 호텔에 묵고 있었는데 통일교에 서는 그를 회유하기 위해 정 수원이라는 간부를 김씨에게 보내었다.

정 씨는 김 씨와 마주 앉아 기도하기를「하나님 아버지여! 한국에 태어난 모세 인 위대한 대 선생 김 규남씨를 우리 민주주의 국가에서 앞으로 새 에덴을 이룰 새 천국이 될 한국에 전신을 바쳐 일 할 큰 일꾼 김 선생에게 은총을 주옵소서」 라고 그럴 싸하게 아부와 찬사를 늘어 놓았다.

그러면서 정 씨는 이런 말을 김 씨에게 덧 붙였다. 「김 선생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일본통일교의 문제점을 전부 받아 드리겠읍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3일 간만 기도해 보십시요. 문 선명선생께서는 겨우 30일간의 기도로서 이 세상 모든 악한 인생의 사탄세력을 전부 빼 버릴 수 있는 능력과 역량을 가진 하늘의 재림주 사명을 가지신 위대한 분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국방을 하는가요? 전쟁에 쩔쩔 매고 무서워 허둥거리는 이치를 모르겠군요, 그처럼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김 일성이를 죽여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요?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런 능력을 가지고 행사하지 않으면 문 교주는 국가에 대한 반역자가 아닌가요 ?」

라고 김 씨가 반문하자 당시 승공연합회 사무총장인 정 수원씨도 무말도 못 했다는 것이 김 씨의 반통일교운동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김씨 일가는 1974년에 미련없이 통일교를 등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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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들의 고생

통일교에서 젊음을 다 바쳐버 리고 20여년만에 이탈해 나온 K모씨의 폭로담을 들어 보자.

K는 통일교 초창기에 입교하여 개척전도를 하느라고 자갈일 같은 중노동까지 해 가면서 식량을 구했고 심지어 밥을 얻어다 먹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고 어떤 때는 너무 배가 고파서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밥을 훔쳐 먹은 일도 있다는 것이다.

한 번은 너무 배가 고파 어느 추운 초겨울에 20리 길이나 걸어가서 늦게 까지 뽑지 않은 무우를 뽑아서 솔밭에 들어가 실컨 배를 채운 일도 있다. 또 전도를 하다가 배를 채울 길이 없어서 아무 것이나 눈에 띄는대로 뜯어 먹었다.

어느 한 날 배고프지 않은 날이 없었고 밤이면 고향집의 부모형제들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고 그러면서도 그 길이 뜻 길이요, 하늘의 뜻을 세우는 길이라고 해서 금식기도를 해가면서 흘러가는 구름처럼 정처없이 방황하곤 했다.

K씨는 7년간에 걸쳐 피눈물 나는 고난의 전도 길을 걸어 통일교를 곳곳에 세웠고 1958년 당시 복귀사건 (혼음사건) 이 터 져 통일교본부 청파동교회 교인들 이 무더기로 떨어져 나갔을 때 충성을 다하여 교회를 지켰다.

문 교주의 주례하에 합동결혼식을 올리고 부인이 아이를 낳았으나 먹을 것이 없어 어린애 벼개의 좁쌀까지 꺼내어 죽을 쑤어 먹은 일도 있었고 K씨가 전도한 인물들이 오늘 통일교회 핵심간부로서 활동하고 있다.

지방에서 피눈물 나는 고생을 하다가 본부교회에 올라와 문 교주를 만나 보면 과거 문 교주가 겪은 고생과 비교해 보면 K씨 자신의 고생은 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져 고생을 한 사실을 말 못하고 돌아선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더러 지방에서 고생을 한 전도사들이 고생을 하는 간증을 하면 서울의 본부 간부들은 말하기를 고생하는 자들은 모두 조상의 죄가 많아서 탕감하기 위한 자기 운명이라고 힐란하면서 하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왜 굶느냐고 반문하기 까지 한다. 그런데 문 교주의 생 활을 보면 완전히 호화,사치 판의 생활로서 식사 때는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이고 교주 안방에는 닭고기 · 과일등이 떨어질 줄 모 르고 있으니 신도들이 배고파 울부짖는 동안 교주는 기름진 배를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문 교주는 고생하는 전도사들에 게도 자기의 과거 옥중 고생담을 늘어 놓으면 서 지금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반박하기 일쑤였다. 문 교주의 측근 간부들의 대부분은 부모 · 처자 · 형제까지 버리고 문 교주를 따른 골수분자들인데 K씨도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신도들의 피 땀 눈물로서 이룩한 통일교 기반 위에서 문 교주가 호화판 생 활을 하는 반면 신도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2천 년전에 오신 메시아가 손수 비참한 소외된 자 · 병든 자 · 죄인들을 돌아보신 것 과는 대조적이다.

문 교주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모든 재원은 인재양 성과 공적인 뜻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해 놓고 이제 와서는 족벌형태의 문씨 일 가가 요직에 다 남아 있으니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통일산업은 문 성균 (文成均) 이 맡고 있고 한국티타늄은 문 승룡 (文昇竜) 이 사장이며 청평에 있는 재산관리는 문 용기가 맡고 있으며 수택리의 배밭은 문 용선이 맡고 있으며 원효로에 있는 원일철강사는 문 용현이 대표요, 각 회사의 주식은 주주 자신도 모르는 기업운영을 하고 있으며 의혹에 쌓인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렇게 친족 · 족벌 중심의 재산운영은 제자들이나 간부들을 믿지 못하고 불 신하는 데 야기되는 문제일 것이다. 문 교주 부부를 의미하는 ‘참 부모’ 의 혈족을 중심한 36가정도 못 믿을 일이라면 문제는 더 큰 것이다.

최근 들어 통일교회 내부에서는 기업체의 자리를 차지한 간부들과 소외당한 간부들 사이에 틈이 벌어지고 있으며 분렬의 움직임마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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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자 · 이철희도 포섭

더구나 문 교주는 장 영자 · 이 철희 사건의 주인공들과 유대를 돈독하게 다져 놓았는 데 그 공든 탑이하루 아침에 무너져 버려 권력층에 파고 들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문 교주는 자기 말에 맹종하는 신도들은 신임을 주고 있으나 자기의 비밀을 알고 있는 똑똑한 간부들은 우회적인 방법으로는 원격도 태와 제거를 함으로써 위험부담을 줄인다. 그 대표적 인 예가 김 모씨의 경우이다. 김 씨는 부모 · 처자를 다 버리고 문 교주가 내세운 ‘뜻’ 을 위해 중성을 다해서 헌신했는 데 결국 문 교주 족벌체제로 인하여 자연도태되고 말았으니「전통을 세워 하눈의 공의의 뜻을 세우자」던 문 교주의 공약 (公約) 은 공약 (空約) 이 되 어버린 것이다.

과거 1960년대까지는 통일교 신도들이 ‘뜻’을 위해 순수한 정성과 열의를 모 아 문 교주에게 충성을 다 했으나 기업체 중심으로 성장한 지금의 통일교는 ‘하늘의 뜻보다는 경제기반을 어떻게 더 공고히 닦느냐’ 는 문제로 기업의 돈 벌 이에 더 신경을 쓰게 되었으니 돈 때문에 신앙은 다 까먹고 문 교주를중심한 족벌과 기업체의 일부 간부들만 호의호식하고 사는 조직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통일교의 일반 일선신도들은 무슨 노정 (路程) 이니 하고 희 생을 강요당하고 있으나 미구에 쌓여진 불만의 감정은 폭발할 날이 오고야 말 것이 자명한 사실이다. 벌써 지금 기업체 간부들과 36가정 · 72가정 등 핵심 멤버지만 기업에 서 소외된 신도들 사이에 메꿀 수 없는 간격과 암투가 내부에 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976년 2월 문 교주가 한국에 와서 36가정 중에 통일교를 떠난 1모씨 집을 방문하였다.

문 교주는 L씨 자녀 남매를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보내면 문 교주 자신이 책임지고 교육시키겠다고 하여 L씨는 자녀들의 유학을 허락했다. 허락이 떨어 지자 문 교주는 년즈시 유학에 조건을 붙였는 데 그 조건인즉 미국의 경제대원 들과 함께 1개월에 하루만 장사를 해야 된다는 단서였다.

그래서 별로 유쾌하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 데 문 교주가 다녀 간 한 달 후에 미국선교사인 김 상철씨의 부인이 한국에 와서 L씨댁을 찾아 와 미국통일교 젊음이들의 실태를 이야기하면서 거리는 젊은이들이 나가서 한국에서 일찌기 동방교에서 하듯이 검팔이, 꽃팔이 인삼팔이 등을 시키는 모습이 계속미국 TV에 보도되어 물의를 빚고 있다는 말에 아연실색하여 문 교주와의 약속을 포기해 버리고 통일교계통이 아닌 미국의 다른 곳으로 유학 보내기로 결심을 바꿔 버린 것이다.

1975년 여름 서울 여의도에서 구국세계대회에 참석키 위해 한국에 온 미국 통일교 신도들은 통일교 원리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는 대원들이 대부분이었고 무조건 명령과 지시에만 응하는 허수아비 전도대원 같았다. 여의도 집회시 문 교주의 강연은 무슨 말인지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없는 악을 쓰는 데 불과했다.

문 교주는 외형적인 선전효과를 노려 자기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해 외국에서 꼭두각시들을 불러들여 자기자랑을 겸한 재림주선포의 내용이 것들어 한국민족 은 자기를 믿고 따르라는 뱃장의 표시 같았던 것이다.

 

탈퇴를 선언했던 박보희


▲  朴進慶 박사무엘   尹基淑 윤기숙   朴普熙 박보희

「리를엔젤스 무용단은 통일교인전체의 눈물과 피 땀의 결정체였는 데 어떤 경로로 박 보회씨의 전용물이 되어 버렸는가? 통일교인들이라면 왜 리틀엔젤 스가 박 보희 족벌체제하에 움직여 지고 있는가? 한 번 쯤 생각 해 볼 필요가 있다.

통일교 신도들은 굶주리며 피 땀 홀려 리틀엔젤스를 성장시 켰고 고생 하면서도 리틀엔젤스 활동을 통해서 국위선양까지 한다는 자부심과 보람마져 느끼고 있 었다. 그런데 박 보희씨도 미국에서 한미자유문화재단을 만들었고 전 주미대사 였던 고 양 유찬씨를 비롯하여 수 많은 저명인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섭외활동을 전개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장본인이기도 하다.

리틀엔젤스의 미국공연 명분은 한국동란 참전유가족을 위한 위문공연과 한국 의 국위선양이라는 그럴싸한 대의명분을 내 걸었고 국내외에서 크게 성공을 했 다. 리틀엔젤스의 배후에 통일교가 도사리고 있는 줄 모르는 순박한 각국 사람 들은 열광적으로 리틀엔젤스를 환영했고 코리아의 이미지를 크게 부각시켰다.

1963년 처음으로 미국에서 100일간의 첫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그때 문 선명교주는 성지 (聖地) 결정을 위해서 세계 순회중이었고 박 씨는 리 틀엔젤스가 벌어들인 외화로 문 교주의 막대한 여행경비를 댔다. 귀여운 꼬마들 이 벌어들인 돈이 엉뚱하게 쓰여진 것이다.

리틀엔젤스를 통한 재정적인 수입관계로 문 교주와 갈등을 겪은 박 보희씨는 급히 귀국하여 세종호텔에서 통일교본부 간부들을 초대했고, 초대받은 간부들은 당시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교주의 근황을 알고자 호텔에 갔다.

초대석상에서 박 씨는 통일교에서 탈퇴 하겠다고 선언하고 미리 계획했던대 로 박 씨의 통일교 입회원서를 그 간부들이 보는 앞에서 갈기갈기 찢어 버렸던 것이다.

간부들은 경악했고 그 충격적인 사실은 곧장 미국에 있는 문 교주에게 보고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박 씨는 문교주의 오른팔 노릇을 했고 통일교 핵심가정인 36가정의 수석가정이었고 서열상 적어도 4번째 가는 중요간부였기 때문이다.

이미 문 교주는 박 씨를 설득시키기 위해서 미국에서 박 씨와 밤샘을 하면서 이야기 했으나 결말이 나지 않은 채 박 씨가 귀국해서 엄청난 사건을 벌렸던 것이다.

그 어느 누구보다도 문 교주의 약점과 통일교 내막을 깊숙히 알고 있는 박 씨는 문 교주에게 충성했던 제자요, 더구나 문 교주가 여인을 통해서 미국에서 낳은 교주의 아들 사무엘 문을 박 씨에게 입적까지 시켰고 박 씨의 아들인양 위 장하여 양육하고 있는 중이 었으므로 문 교주와 박 보회씨는 생사고락의 공동 운명체였 던것이다.


▲ 文鮮明 문선명    朴進慶 박사무엘

그러나 박 씨가 현재 기르고 있는 사무엘 문이 박씨의 아들인지 문 교주의 아들인지 통일교 밖의 사람들은 딱 잘라 말할 수 없으나, 바로 박 보희씨가 살고 있는 미국 워싱턴 D.C. 알링톤에 주택을 가지고 있는 한 언론인의 이야기를 들 어보면 그 아이가 문 교주를 쏙 빼다 놓은 것 처럼 닮았다는 데서 핏 줄은 속일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나 국외자로서는 확중을 갖고 결론 내리기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해서 당시 문 교주는 통일교의 정성이 서리서리 서려있던 리틀엔셀스 를 박 씨에게 넘겨 주었고 박씨 체제하에서 리틀엔젤스가 움직여지고 있으며 선화예술학교 건립 때도 문 교주가 2억원을 지원했다는 말도 떠 돌고 있다.」

통일교가 오늘의 통일교로 성장한 이면에는 통일교를 위해서 낯선 개척지에서 기성교회로부터 이단이란 핍박을 받아가면서 일하다가 쓰러져 죽은 신도들도 있고 연탄까스에 사망한 사람도 있다. 그렇게 고생하고 피 땀 홀린 신도들에 대해서 문 교주는 말 몇 마디로 고작 돈 안드는 감언이설로 위로나 칭찬을 해주면 칭찬받은 신도나 간부들은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했다.

입회원서를 찢어 버렸다는 것은 통일교 신도들이 볼 때는 지옥을 가겠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이며 경악한 일인데도 왜 스스로 탈퇴하겠다고 선언한 박 씨를 문 교주는 밤새워 설득하였는가 ? 문 교주는 옷 잘 입고 많이 배우고 능력 있고 잘 생기고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은 100% 이용하고 잘 대해 주지만 못 배우고 가난한 신도들은 철저히 외면하는 비 인격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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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하고 버리는 문선명

문 교주는 경기도 양주군 구리읍 수택리의 땅과 명동에 있는 빌딩을 과부 신 도인 이 신실여인으로부터 기증 받았고 이 여인이 운영하던 X중고등학교까지 문 교주는 기증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그 거물급 이 여인의 현실 처지는 어떤가? 통일교 재단으로부터 얼마간의 생 계보조를 받을 뿐이요, 이용목적이 끝난 이 여인은 완전히 뒷방손님 격이 되었다고 한다.

신도들의 땀으로 이룩된 대부분의 재산은 문 교주 족벌체제에 의해 운영되고 있으며,몇몇 심복간부들만이 호의호식하고 있으며 이 대열에서 소외된 간부 및 신도들의 불만이 하늘에 사무치고 있으니 언젠가는 한 번 쯤 터질 날이 조만간 오고야 말 것이다.

한 번 흔들리면 여리고성 무너지듯이 와르르 무너질 것이 틀림이 없다.

 

초대 협회장, 유효원씨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들

박 씨는 또한 문의 충성스러운 부하요, 원리 강론이란 교리 서를 만든 통일교의 일등공신의 유 효원 (劉孝元) 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찾아갔더니 일체 면회를 못하도록 면회금지가 돼 있어서 양 윤신에게 쪽지를 써 보냈더니 다행히 면회가 허용되어 30분간 이야기를 할 수있었다.

병실에 들어서는 박 씨를 본 유 효원은 눈물을 홀리면서 반가워 했다. 유 효 원은 당시 골수염 때문에 다리를 절고 있었는 데 문은 유 효원더러 재수술을 하라고 권했으나 유 씨는 자신이 살아날 희망이 없음을 알고 교주의 재수술 제 의를 거절하자 7일간이나 면회도 아니오고 있다고 하면서 재수술은 죽어도 하지 않겠다고 울먹였다.

죽어가는 환자에 게 재수술을 권하는 것은 목숨을 재촉하는 결과이며 결국 문 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유 효원이, 문으로 볼 때는 거추장스런 존재였 기에 무리한 재수술로 유씨의 생명을 단축시키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있다.

통일교초에 협회장이었던 유 효원씨는 사실상 통일교 제2대 협회장인 셈이고 초대 협회장은 이 창환씨라고 볼 수 있고 유 씨는 초대 전도책임자요, 제 2대 협 회 장이라 볼 수 있다.

서울 성동구 북학동에 자리잡고 있던 초기 통일교시절에 문 교주 ᅳ 유 효원 ᅳ 이 창환씨가 포섭한 김 상철씨 등 4명이 모여 오늘의 통일교 명칭인 세계기독 교통일신령협회란 공식명칭이 지어 졌고 영문 명칭은 김 상철씨가 지었다.

이 창환씨는 연희전문 출신으로 종교통일운동으로 그의 생애목표를 삼았고 1953년 당시 그의 친구 엄 덕문씨가 이씨의 사무실을 찾아 와 대구에 있던 문 선명교주에게 내려가 거기서 이 씨는 교주와 함께 박 모씨를 만났다.

다음 해 봄인 1954년도에 문 교주와 이 요한씨 가 이 창환씨를 찾아 와 성동구 북학동에 정식 간판을 걸고 이 창환씨가 초대 협회장으로 취입했다고 한다.

2개월간 뜻을 같이하고 활동을 하다가 문 교주가 점차적으로 혼음교리의 정 체인 선악과문제를 들고 나왔고 이에 이창환씨는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생각이 들어 문 교주와 결별을 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고 그후 이 씨가 유 효원씨를 시내에서 더러 만나면 그의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 놓더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때마다 이 씨는 유 씨에게 몸도 그렇고 하니 (유씨는 한쪽 다리를 절고 있다.) 그냥 통일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좋겠다고 권고 했으나.유 씨는 섹스의 교리문제로 고민이 쌓여 간다고 말했다고 이 창환씨는 증언하고 있다.

유 효원씨는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출신이요, 경성의전을 중퇴하고 독실한 신앙인으로서 문 교주의 타락론 풀이에 매력을 느꼈다고 간증한 바 있고 통일교 발전사에 이론적으로 크게 기여한 공로자요, 문 교주의 수제자란 사실을 부인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중학시절에 카리에스로 인한 다리 병을 앓아 평생 다리를 저는 불구의 몸이 되어 말년에는 허리까지 못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그에 게 문 교주는 세계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하늘적인 면모를 세우기 위해 수술을 해야 한다고 권했으며 그 제안을 받아드렸다.

유 씨는 문 교주의 피가름교리와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장본인으로서 자신의 불 구는 수술로서 완쾌될 수 없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수술에 임했다는 사실은 혹시 기적적인 하늘의 은사를 기대했는지 모른다.

1차 수술을 하고 나서 재수술을 거부했으나 교주로부터 다시 수술권유를 받은 그는 재수술을 받은 후 1970년 8월에 사망하고 말았다.

유 씨가 사망하자 유 씨의 사망의 간접적인 책임은 수술을 권고한 문 교주가 져야 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더구나 재수술을 받기를 완강히 거부한 유 씨에 게 문 교주는 수술을 권고하여 다시 수술을 받게 하고 신도들에게는 기도를 시킨 심사블 문 교주 이외에 아무도 모르는 문 교주만의 비밀일 것이다. 혹자는 유 씨가 문 교주의 비밀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방법으로 자연적으로 제거했다는 비약적인 풀이 도 하고 있으나 제3자로서는 짐작이나 추측은 할 수 있으나 문교주 본인이 아 니고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들리는 말로는 유 씨의 장례식에서 문 교주는 유 씨가 지옥에 갔다고 외쳤다고 하니 그 이유가 어디있는 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교주를 위하여 일평생을 바친 유 씨에 대하여 그런 저주의 말이 나올 수 있느냐 없느냐는 주장으로 이론이 분분하다.

문 교주의 자신과 김 모양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 희진군이 중학생으로서 교 통사고로 죽었을 때, 슬퍼하여 희 진군이 충신이요, 효자요, 순교자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을 했던 사실과 일평 생을 바치다가 죽어 간 공로자의 죽음에 대한 저주의 발언과의 사이에 엇갈린 두 면을 볼때 참으로 이단의 정체는 이런것인가 하고 생 각케 하는 바가 크다.

문 교주는 통일교 발전사에 1등공신 노릇을 한 유 씨의 환상을 씻어버리기 위해 행한 언동이란 점에서,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세간의 속설이 여기도 적용된다고 보니 씁쓸하기 짝이 없다.

유 효원씨는 통일교에서 1인 2역의 주역을 했고 문 교주의 복귀주란 말에서 천사장 루시엘의 사명과 복귀된 아들의 사명을 했다. 그런고로 죄악사를 책임 진 그는 인류의 타락이 천사장 루시엘로 하여금 이루어졌기 때문에 복귀역사도 천사장이 협조하여 아담의 뜻을 이뤄야 할 탕감 섭리사에서 알파적 죄악사의 책임을 지고, 오메가적인 루시엘의 천사장 사명을 띄고 제3아담으로 등장한 문 교주 앞에서 숨은 하늘의 뜻을 알고 문 교주에게 모든 것을 바쳐 협조해 온 것이다.

그래서 문 교주는 죄악사를 탕감하여 복귀하도록 한 유 씨의 협조의 기반 위 에서 혈통섭리를 했고 유 씨로 하여금 모든 책임을 지도록 암시했다.

문 교주는 자기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한 원로 송 모장로나 초대사업부장인 송 모씨 등의 죽음을 놓고도 문교주는 그들이 지옥을 갔다고 했으니 충성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그렇게 깎아 내릴 수 있느냐고 이탈신도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 으고 있다.

문 교주는 그의 탕감복귀사관으로 보아 그가 후일 죽어서 영계에 가게 될 경우 그의 충성분자들에 대해 지상에서 했던 것 만큼 문 교주 역시 탕감 받아야 되는 것이 사필귀정이 아닌가 싶다.

394

용기있는 고발을 기도하며

이제 장황하게 통일교와 문 선명교주에 얽힌 이야기들을 털어 놓고 나니 마 음이 후련하다. 그 동안 젊음을 버리고 정열을 다 바쳐 몸담고 있던 단체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이지만, 그러나 진실을 밝혀야 하겠기에 엮어 본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여러 해가 흐르는 동안에 통일교는 많은 변모를 가져왔다. 미국 에서 문 교주가 탈세혐의로 조사받고 유죄판결을 받아 항소 중에 있으나 불원 추방될 것으로 보여진다.

문 교주는 이제 한국으로 그 거점을 옮기기 위해 경기도 청평에 위락시설을 만들고 있다.

영국에서도 데일리 매일신문사와의 싸움에서 완전히 패소하여 발판을 구축하 지 못한 채 후퇴 해 버렸다.

역사의 심판은 반드시 공정하게 내려지게 된다. 통일교가 그 막대한 금력과 조직력의 배경을 업고 사회 각계 각층에 그 거미줄 같은 포섭망을 쳐놓지 않은 구석이 없고 3류 소설가를 내세워 마치 통일교를 해부하는 양 위장하여 선전을 해도 진실은 역시 언젠가는 밝혀지게 마련인 것이다.

거 짓은 반드시 그 꼬리가 들어나게 되는 하나님의 엄연한 법 칙이니 통일교에 도 적용되 리 라 확신한다.

끝으로 통일교에 들어갔다가 물심양면의 상처를 안고 이탈하여 영육간에 불 구자들이 된 그 수 많은 피맺힌 이들의 한 (恨) 을 이 글에서 다 풀어보지 못하고 끝을 맺게 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용기있게 자신들의 당한 피해상을 이 사회 에 고발할 수 있는 동지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면서 이 글을 갖은 고난과 협박 · 위협 속에서 굴하지 않고 게재 해 주신 현대종교사의 발행인 탁 명환 소장 이하 온 편집부 직원들에게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월간 현대종교 1982. 11-1983.8의 연재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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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문선명의 여자관계

독자들은 지금까지 이 책에 제시한 여러 자료들을 통해서 참으로 믿기 어려운 사실들을 확인하셨으리라고 생각한다. 그 사실들이란 대체로 두 갈래인데 하나는 문선명이 ‘세계의 통치자가 되겠다’ 는 흉계를 품고 쉴새 없이 활동해 왔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문선명은 누구인가? ’ 씨리즈에서 방금 읽은 바와 같은, 문선명의 엄청난 ‘혼음 행각’ 에 관한 사실들이다. 과연 그 것들이 사실인가? 연재물에 기록된대로 ‘교리’ 를 빙자한, 그렇게 대량적이고 체계적인 섹스 행각이 가능한 것인가?

먼저 이 의문에 대해서는, 종교 단체에서 교리를 빙자한 교주에 의한 대량적인 ‘여자사냥’ 이 얼마든지 가능하며 특히 질이 나쁜 유사종교 (類似宗敎) 에서 그러한 예가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우선 신 흥종교문제 연구가로 소문이 높은 탁 명환 선생의 글을 인용한다. 그는 월간 성별 1981년 10월호 ‘기독교계 신흥종교개관’ (하) 이란 기사의 ‘신흥종교의 문제점’ 부분에서 신흥종교의 아홉번째 문제 점이 바로 색 스 문제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지막으로 신홍 종교의 비윤리적인 섹스관은 종종 사회적인 물의를 빚고 있다. 신흥종교에 있어서 섹스 문제는 대개 세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밀교 형태로서 실제로 교리에 의한 섹스가 이루어지는 경우다. 은밀 하게 이루어 지기 때문에 좀처럼 표면화되 지 않고 있으나 피해자들의 고발이나 폭로에 의해서 가끔 그 진상이 드러나기도 한다. 또 하나의 형태는 교권이 강화 됨에 따라 교주가 여신도들을 농락하는 양상이다. 일월산 기도원이나 팔영산 기도원 등에서 교주의 여신도 능욕 사건이 그 좋은 보기가 되고 있다” (월간 상월 81년 10월호 31~32페지).

이 밖에 1920년대의 보천교 (普天敎) 교주 차천자 (車天子) 차경석은 아예 공개적으로 ‘3천궁녀’ 를 거느리고 살았다고 하며 1930년대의 백 백교 (白白敎) 교주 전용해의 경우와 1950년대 용화교 교주 서백일의 찬란한 섹스행각이 신문에 의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바가 있다.

그러면 문선명의 경우는 어떠 하였을가 ? 앞장의 기사에 나온 일들이 모두 날조된 사실들인가? 물론 문선명 교단측에서는 펄쩍 뛰고 “그럴 리가 있느냐? ”, “우리 아버지가 저명인사 누구누구이고 또는 내가 대 학에서 교수를 했던 사람인데 그럴수가 있느냐 ? , 모략 중상이다” 라고 해왔지만 유감스럽게도 너무나 많은 자료들에서 문선명의 혼음행각이 사실임을 어렵지 않게 추리해낼 수 있다.

여덟가지 관점에서 추리해 본다.

첫째로 앞장 연재물의 신빙성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문선명 본처의 처가집 주변의 경치라든지 감옥에서의 죄수 번호, 피난길의 경로, 초창 기에 문선명이 접촉했던 사람들의 이름들까지 상세히 나와 있는 것을 보면 문선명과 지극히 가까왔던 한 인사의 기록임이 분명하고 이런 일 들이 사실이라면 혼음에 관한 일들도 날조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둘째로 앞의 연재물이 원고 상태에서 세상에 공개되려 할 때에 문선명 교단측에 서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이 를 막으려 애 썼다는 사실이다. 문선명에게 충성을 하고 있을 당시 필자마저도 이 원고의 공개를 막으 려고 공갈 협박자들을 만나 돈을 건네준 적이 있었다. 그 일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찌해서 문선명 집단에서는 그 원고의 공개를 막으려고 그 토록 전전긍긍 하였겠는가 ?

세째 여기에 다 옮길 수는 없으나 필자가 보고 들은, 문선명 교단내 에서 초창기부터 떠도는 말들과 가지 가지 이상한 사건들이 앞의 기 사 내용들과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이다. 문선명과 직접 섹스관계를 가졌던 여인들의 말, 고위 측근의 암시, 사건화되었던 간부들의 불륜한 섹스 사건들이 연재물 내용과 너무나 같다.

네째 문선명의 신앙경력과 그들의 경전인 소위 원리강론 안의 색스에 대한 언급과 문선명 자신의 설교 내용이다. 이른바 ‘혼음 또는 피가름’ 을 주장하는 신령파 종교 집단의 핵심 인물들인 황국주 · 정득은 · 김백 문들과 청년시절의 문선명과의 밀접한 관계가 의심의 여지가 없고 원 리강론 안에 그 흐름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이 책 354 · 355페지, ‘원리 강론 속의 혈통복귀 주장’ 참조) 그리고 문선명 자신의 말 속에, ‘사 랑의 실체복귀 · 혈통교환’ 등등 ‘피가름’ 에 대한 강조가 무수히 많다. 이에 관한 문선명의 말들은 뒤에 따로 어록을 만들어서 나열한다.

다섯째 문선명의 투옥 경력이다. 문선명은 일제 시절 이남에서 한 번, 육이오 전 이북에서 두 번, 50년대 중반 이남에서 또 한 번 도합 네번 감옥살이를 했으며 ‘일제에 대한 항일 운동’, ‘간첩혐의’, ‘병역기 피 혐의’ 로 옥살이를 하였다고 미화되어 있으나 사실상 이북과 이남 우리나라에서 잡혀간 것은 ‘여자관계’ 였음이 목격자들의 증언과 신문 기사등 자료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1948년 2월 이북에서는 유부녀를 빼 앗아 ‘어린양 잔치’ 라는 혼인식을 올리려다 남편의 고발로 쇠고랑을 찼으며 1955년 3월의 문선명 사건이 세칭 ‘이대 사건’ 으로 여자 관계 사건이었음은 그 당시의 신문이 말해주고 있다. 일제시대의 투옥이 ‘항 일운동’ 이었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만일 문선명이 항일운동을 한 ‘사 상범’ 이었다면 귀국 직후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토건회사 녹도조 (鹿島組) 에 복직이 되었을리 만무한 것이다. 사상범은 언제나 시찰대상이었기 때문이다.


▲ 金明熙 김명희


▲ 金明熙 김명희   文喜進 문희진   1959년


▲ 文鮮明  문선명    文喜進 문희진   1965.1.5.  青坡洞教会


여섯째 무엇보다 신도들에게 공개되어 다 알고 있는 문선명 주변의 여자들이 열명이 넘는다는 사실이다. 우선 본처 최선길이 있고 60년대에 다시 결혼한 한 학자가 있으며 55년도에 문의 아이를 숨어 서 낳은 김 명 희가 있으며 66년에 미국에서 아들을 낳은 최 순화가 있다. 그리고 이들 말고도 문선명 둘레에는 신도들에게 ‘어머니’ 라 불리우는 여인들, 崔, 季, 季, 奉, 季, 韓, 姜, 車, 季, 金, 등 열명이 있었다. ‘아버지’ 라 불리우는 문선명과 ‘어머니’ 라 불리우는 이들 여인들과의 관계가 단순히 ‘정신 적인’ 관계 뿐이었을가?


▲ 文鮮明  문선명   催淳華 최순화    1956-57년


▲ 文鮮明  문선명   催淳華 최순화    韓鶴子 한학자   催元福 최원복     1964년


▲ 催淳華 최순화  66년  朴進慶 박사무엘    1978년


남녀 관계의 일이란 본인들이 안 했다 하면 그만이니 알 수 없는 일 이나 문의 아이를 낳은 두여인의 경우는 문선명이 건드리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두 여인은 열렬한 신도들의 딸로서 당시 아 릿다운 처녀들이었다. 이렇게 증거가 드러난 것이 두 사람뿐이므로 괜 찮은 것일가? 두명의 처녀를 건드린 것이 사실이라면 백명, 천명을 건 드릴 가능성은 없는 것일가 ?

일곱째 소위 문선명의 ‘혈족 (血族)’ 을 편성해 간다는 축복행사, 합동 결혼식이 참으로 수상하다. 3쌍에서 비롯한 축복행사는 36, 72, 120 하는 식으로 6000쌍까지 나갔는데 이 합동결혼식을 거 친 가정들은 자신들을 문선명의 ‘혈육 (血肉)’ 이라 부른다. (376페지 축복가정 선서 참조) 어찌 하여 중심신도라 하지 않고 문선명과 피와 살을 나누었다는 의미의 ‘혈육’ 이 라 부르는가 ?

이 일은 문선명 교단의 교리와 연관하여 알아보아야 한다. 그들의 교 리인 원리강론에는 인간 시조 아담 하와의 잘못된 섹스로 더럽혀진 ‘혈통’ 을 깨끗하게 하고 되찾아야 한다는 말이 많이 나와 있고 (354페지 원리강론 속의 혈통복귀 주장 참조) 문선명이 재림주로서 혈통을 회복 하고 인류를 육적 (肉的) 으로 재생시킨다고 하였으니 문선명이 할 일은 실제 행 사든 상징 적 행 사든 바로 ‘되 찾기 섹스, 올바른 섹스’ 일 수 밖에 없다. 혈통 운운 하는 말들은 직접적인 또는 상징적인 섹스를 말하는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는 문선명에 의해 소위 ‘인간조상’ 자리에 올랐다 는 최고위 가정인 36가정에는 아무런 ‘상징적’ 행사가 없고 그 이후 가 정들에 만 문선명 의 손과 접촉하고 포도주를 받아 마시는 상징 적 행 사가 치뤄진다. 상징적 행사가 없는 최고위 가정에는 ‘실제혈통복귀’ 가 있었 을 가능성 이 아주 농후하다.

문선명교단의 경전인 원리강론은 인간의 타락이 잘못된 섹스로 혈통 이 더럽혀진 일이며 이것을 바로잡고 깨끗케 하는 ‘육적구원’ 을 위하여 재림주가 와야 한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재림주가 바로 문선명이라는 것이 문선명 교단의 중심 골자인데 혈통은 복귀한다고 하면서 피가름을 하지 않았느냐고 하면, 모두 다 화를 내고 ‘우리 아버 지가 저명 인사인데 그럴리가 있느냐·또는 내가 교수를 했는데 상식적 으로 그럴 수 없지 않으냐’ 는 등으로 부인하기에 바쁘다.

그러면 피가름 없이 어떻게 혈통이 바로잡히며 새로운 혈족을 편성해 가는지, 주사기로 문선명의 피를 뽑아 섞는지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는 지 그 혈통복귀 행 사의 진짜 내용을 밝혀야 할 것이다.

여덟번째로 이제 문선명 자신의 말로써 혼음행사의 사실 여부를 알 아볼 차례다. 1977년 미국에서 문선명은 자신이 수도 없이 많은 여자들 과 관계를 가졌음을 명백하게 암시하는 말을 한적이 있다. 바로 “자신이 여자들의 사랑을 받는데 있어서 최고 기록을 만들 것을 하나님이 허락 하셨다” 는 말인데 직접 살펴 보자.

“따라서 하나님은 선생님께서 역사상 어떠한 남자보다도 더 많은 사 랑과 그리움을 받는자가 되기를 바라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서는 선생에게 그 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을 것에 있어서 최고의 기록 을 만들 것을 허 락 하셨읍니다” (1977. 5. 3. 뉴욕 벨베디아에 서, 월간 목회 77년 가을호 26 · 페지).

이 무슨 소린가 ? 하나님 이 ‘허 락’ 하셔 서 역 사상 누구보다도 많은 여자들과 관계했다는 말이 아닌가? 허락만 받고 그쳤을가? 그리고 문선명이 그 많은 여자들과 사랑을 주고 받았다면 그 것이 ‘정신적 사 랑’ 뿐이 었을가 ? 결혼을 한 유부남이 정 신적 사랑에 그치 기 란 다 알 다시피 지극히 어렵다.

역사상 최고 기록을 만들 것을 허락받아 실제로 기록을 수립했다면 몇명일가? 몇백명 가지고는 역사상의 최고 기록이 어려울 것이다. 문 선명 교단측에서는 이를 밝혀 기네스 북에 올려 자랑함이 어떨가 한다. 다른 말들도 살펴 보자.

“지금 여자들은 전부 여러분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선생님 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1972. 9. 25. 말씀 142 호 23페지).

그리고,

“혈통을 통해 벌어진 역사이니 혈통을 찾아 세우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 섭리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1969. 5. 4. 성화 69년 5월호 16패지).

복귀 섭리 역사는 혈통 복귀 섭리 역사다. (1960. 4. 10. 말씀 105호 17 레지)

자, 이 정도면 문선명 교단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었나 짐작하기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 한다.

다른 말들도 더 알아 본다.

“해와가 잘못된 사랑을 해서 타락하여 혈통을 더럽혔으니 혈통적으로 잘못돼 버렸으므로 이것을 뒤집어 놓아야 한다” (통일세계 72년 7월호 8페지).

“해와는 하체를 통해 타락했으므로 탕감조건을 세워야한다” (1969. 5. 4. 성화 69년 5월호 16페지).

“기계도 고장이 났으면 고장난 부분을 수리해야 하듯이 사람도 거기 서 고장이 났으니 거기를 통해서 탕감 조건을 세워야 한다” (1969. 5. 4. 성화 69년 5월호 16페지)

“타락과 관계 없는 그 부모 (문선명 – 필자) 의 혈통을 통해서 다시 태어 나야 한다” (1969. 5. 4. 성화 69년 5월호 14페지).

“다말이 자기 시아버지를 속여 음행 (淫行) 을 해서라도, 이런 비법적 인 행위를 해서 라도 혈통복귀를 하였으나 죄가 되지 않는다” (며느리 다말 이 시 아버 지 인 유다를 속여 간음하여 베 레스와 세 라를 낳은 구약의 고사를 말함一필 자) (통일세계 72년 10월호 14페지).

“인류의 참부모는 문 선명이다” (1968. 음 10. 1. 성화 69년 2월호 23페지)

“통일교회에서는 사랑을 통해서 실체를 복귀한다” (1968. 11. 20. 성화 68년11 · 12월호 8페지).

“그럴려면 거짓된 사탄의 핏줄을 끊고 새로운 부본를 (문 – 필자) 통해서 태어나야 하며 역사를 바꾸치기붑 · 자녀등모두를바꿈一필자)해야 하고 이러한 혈대를 잇는 일을 내가 전부한다” (1972. 9. 25. 말씀 142호 22페지)

“그래서 세계 전체를 혈통을 통해 한 혈통으로 복귀해 나간다” (1969. 5. 4. 성화 69년 5월호 15페지).

“개인一가정一종족一민족一국가복귀의 기준을 세워나가면서 하나에 서 열, 열에서 백一一一一이렇게 접붙여 나간다” (통일세계 72년 7월히 19페지)

“하나의 부모를 중심한 하나의 혈족권을 편성해 나가야 한다” (1972. 9. 25. 말씀 142호 26페지)

“세상 남자들은 아내가 없다. 전부 복귀해|야 한다” (1972. 9. 25. 말씀 142생호 21페지)

위의 문선명 자신의 말들로 독자들께서는 문선명 교단 내에서 교리와 절대권을 가진 교주 문선명의 ‘설교와 가르침’ 에 의해 ‘혈통복귀’ 행사 가 틀림 없이 이루어졌으며 그것이 바로 문선명의 무차별 혼음 행각임을 알게 되셨으리라 생각 한다. 그러므로 앞 장의 연재물 내용이 전혀 날 조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사실과 가까우며 오히려 더 많은 사실 가운데서 극히 일부분이 기 사화 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점은 문선명이 색 스를 교리에 의한 종교행사로만 행하지 않고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고 지배하기 위한 숫법’ 으로 사용한 것 같은 흔적을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되는 점이다. 다음 말들을 살펴 보자.

“이렇게 여자들을 지배하는 수법이 꼭 복귀해서 구원해 주기 위한 목적뿐이냐?” (1969. 5. 4. 성화 69년 5월호 16페지)

“사랑 (성교 一 필자) 을 먼저한 사람이 주관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천사장 (남편 一 필자) 이 먼저 했다는 조건을 뒤엎어야 한다” (1969. 5. 4. 성화 69년 5월호 16페지)

“가난한 집 총각이 부잣집 맏딸과 사랑을 맺어 놓으면 누구도 꼼짝 없이 걸려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총각의 입에서 한 마디만 튀어 나오면 아무리 부자집 큰딸이라도 별 수 없는 것이다” (1969. 5. 4. 성화 69년 5월호 6페지)

“통일교인들을 감옥에 갈 수 있게끔 (병역기피 · 거짓말 · 간음 一 필자) 고생길 에 처넣었지만 우리는 올가미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1972. 9. 25. 말씀 142호 4페지)

또한 다음의 기사를 살펴 보자.

“79년 2월 1일 문선명교주의 통일교는 섹스공세 선거헌금 등의 수단으로 최 소한 100여명의 미국의원들을 매수한 뒤 이를 협박의 수단으로 이용해 왔다고 통일교 반대운동의 기수「테드 패트릭」씨가 폭로했다.

패트릭씨는 공개된 플레이보이 지와의 인터뷰에서 통일교 이탈자들이 자신에 게 그들의 홍보팀을 통해 섹스와 금전으로 의원들을 매수했음을 실토했다고 말 하고 그중 한 여 인은 의원들에게 보내는 한 봉투 속에 1만딸라의 현찰이 들어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자신에게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통일교측 개종자들이 미국, 한국, 일본 등의 여 인들을 앞세워 의원들 에 게 색스공세를 퍼부었으며 의원들이 이들과 성관계를 갖는 현장을 녹음, 이를 공갈수단으로 이용해 왔다고 말했다.

이 사건에 뒷 받침이나 하듯이 문교주는 그의 설교집 제179호 (75. 12. 10) P.15-16과 제180호 (76. 1. 15) P. 21에 보면 문교주가 미 인계를 썼음을 실토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성온천사건도 낭설이 아니지 않는가 하는 의혹까지 갖게 만든다.” (탁 명환 지음 ‘통일교의 실상과 허상 (상)’ 158-159페지).

위 기사 내용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설사 사실이라 하드라도 “내가 누구누구의 섹스 공세에 놀아났다” 고 나설 사람은 없다. 문선명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는데 섹스를 중요한 무기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독자들은 ‘필요한 재력만 있으면 기성 교회는 무너뜨릴 수 있다’ 고 한 문선명의 말을 기억할 것이다.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면 사람을 지배하고 움직이는데 ‘섹스’ 를 사용하지 않을 까닭이 없다. 그 발상의 차원이 같은 높이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 세계에 걸쳐 막강한 힘을 구사하는 미국의 마피아단, 콜롬 비아의 마약 밀매단 같은 조직들은 ‘돈’ 과 ‘섹스’ 가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주된 요소이고 그것들이 얼마만한 힘을 가지는가 보여주는 본 보 기들이 다.

어쨌든 ‘이렇게 여자들을 지배하는 수법이 꼭 복귀해서 구원해 주기 위한 목적 뿐이냐?’ 고 말하는 것이 문선명이고 이 말을 뒤집으면 복 귀해서 구원하기 위한 목적 뿐 아니라 다른 제2, 제3의 목적이 있다는 말이다.

섹스를 이용해서 사람을 꼼짝 못하게 몰아가는 숫법은 제비족이나 ‘가정 파괴범들’ 이 사용하는 숫법이고 범죄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범 죄다. 문선명 의 여자사냥이 바로 그 비슷한 일이 라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참고로 용화교 교주 서 백 일은, “종주 (宗主) 의 수기 (水氣)를 받아야 용화선경 (龍華仙境) 에 씨앗을 뿌릴 수 있다. 그래서 음중투양 (陰中投陽) 을 한다” 고 하며 어린 처녀들을 농락했고 백백교 (白白敎) 교주 전 용해 (全龍海) 는 “대원선경 (大元仙境) 의 궁녀를 만들어 준다” 하며 여인 들을 유린했음을 밝힌다.

종교를 빙자하여 여 인들을 무차별하게 농락한 이들, 서 백 일, 전 용해 의 천인공노할 범죄와 ‘혈통복귀’ 를 내세운 문선명의 섹스 행각이 어 떻게 다른지 문선명의 수제자들은 명백히 해명해 주기 바란다.


「私の一族は統一教会の餌食にされた」 崔淳英

最初の妻 崔先吉女史 が告白! 「文鮮明教祖の性の祕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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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문선명의위 험성

이제 이 책의 마지막 단계에서 문선명의 본질을 설명하는데 다시 더 많은 말이 필요할 것인가? 문 선명 자신의 다음말들이 문선명의 본질을 가장 뚜렷이 나타내 주기때문이다.

“공자 • 석가 • 예수도 내 부하다” (1976. 2. 1. 말씀 182호 29페지)

“내 말이 법률이 되어 움직일 때가 온다.” (1971. 11. 26, 말씀 135호 7페지)

“하나님은 내가 여자들의 사랑을 받는데 최고 기록을 만들 것을 허락했다.” (1977. 5. 3, 목회 77년 가을호 26 페지)

“통일교회는 망하지 않고 세계를 제패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중심 삼은 결론이다.” (1972. 5. 14. 말씀 138호 17페지)

“앞으로 통일교회를 믿든가, 죽든가, 도망가든가 셋중 하나를 택해야 할 때가 올것이다. 그 때를 내가 만들고 있다.” (1972. 6. 25. 말씀 153호 26페지)

결국 자신은 역사상 누구보다도 위대한 인물이요 세계를 제패하여 자신의 말 한마디가 곧 법률이 되어 움직이는 세상을 만들 것이며 힘을 가졌을 때 말 안듣는 사람을 잔인하게 처벌하거나 죽이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역사상 최고 기록을 수립할만큼 많은 여자들을 농락해 왔다는 말이다. 문선명의 위의 말들을 다른 뜻으로 해석할 길이 있는가 ?

한마디로 문선명은 상식 이 하의 종교적 미 치광이요 제 야망과 욕심을 채 우는데 수단과 방법 을 가리 지않는 간악한 처 세 가 (處世家), 더 이 상있기 어려운 색마 (色魔) 라고 결론 지을 도리 밖에 없다. 섹스를 사람을 지 배 하는 전략으로 사용해 왔으며 역 사상 최고기록을 수립 했다니 말이 다. 문선명이 농락한 여인들 가운데는 어머니와 딸들이 함께 당한 이른 바 ‘삼모녀 (三母女)’ 케이스도 두 집안이나 있다.

그리고 상상키 어려운 잔인성을 감추고 있는 인물이 문선명이라고 믿을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인물이 이제 전 세계에 걸친 어마어마한 판도를 구축하고 우 리나라와 전 세계를 몽땅 제 손아귀에 넣을 공작을 진행하고 있다.

세계평화, 하나님의 세계,승공 (勝共), 통일, 학문, 예술, 새역사등등의 가지 가지 명분과 이’ 론으로 흉계를 감싸고 돈과 여자 또는 협박을 전략 전술로 삼아서 이제 그는 전 세계 어디서나 불가능한 일이 없을 정도 의 세력권을 형성해 놓았다.

특히 우리나라에 대한 그의 마지막 공략은 거의 ‘초 (秒)’ 읽기의 절 박한 상황에까지 와 있다. 대 학교수 수천명을 그 영 향권안에 두어 울타 리 삼고 대학가를 장악했으며 기독교계의 핵심부를 유린하였고 700만 회원의 승공연합 조직을 완료해 놓았고 이제 정치가들과 유권자들을 동시에 돈으로 매수하려는 공작이 한장 진행중이며 ‘무술인’ 수천명을 포섭해 놓았는가 하면 이 나라의 경제계 안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 사하고 있다.

그리고 문선명은 믿든가, 죽든가, 도망가든가 셋 중 하나를 택할때를 만들겠다” 고 장담하는 잔인한 미치광이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 선명의 행적을 우리들이 잘 아는 동화 힌 토막에 비유 하여 설명하고저 한다.

토끼 열 두마리가 사는 집안의 어미 토끼가 시장을 보러 나가고 이러 한 틈을 노리던 늑대가 토끼 집을 습격했다. 어린 토끼들이 문을 열어 주지 않자, 늑대는 어미 토끼 목소리의 흉내를 내어 문을 열라고 하였다. 토끼들이 믿지 않고 손을 보여달라고 하자 늑대는 밀가루 칠을 하고 와서 보여 주었고 이에 속은 한 토끼가 문을 열어 주었다. 늑대를 본 어린 토기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려 하였으나 결국 다 잡아먹히고 시계와 뒤주 속에 숨은 토끼만 살아 남았다. 늑대는 토끼 열마리를 다 삼키고 배가 부르고 몸이 무거워 냇가에 드러누운 채 움직일 수 없었다. 그 때 마침 어미 토끼가 돌아왔고 살아남은 토끼들의 말을 듣고 냇가로 가서 꼼짝 못하게 된 늑대의 배를 가르고 토끼들을 꺼내 살려내었다.

늑대가 앞발에 밀가루 칠을 하고 어린 토끼들을 속여 토끼집 대문을 열었듯이 문선명은 언제나 다른 탈을 쓰고 사회 각계 각층에 접근하였 다가 종내에는 자신을 주종하고 지 지하는 세력으로 만드는 일을 계속해 왔다.

종교단체, 승공활동, 세계평화연구, 학문지원, 예술지원, 세계과학자대 회, 반공통일 운동, 초교파운동, 기독교연합 운동, 세 계종교지도자 회의, 닉슨지지 활동, 레이건의 선거운동, 친정부활동 등등이 모두 ‘밀가루 칠’ 아닌게 없고 문선명의 진짜 속셈이 결국은 자신이 ‘세계 제패’, ‘세계의 황제가 되는 일’ 임을 독자들께서는 문선명의 말들과 지금까지의 자료를 통해 서 너무나 똑똑히 보아 왔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문선 명의 주장이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라 하였다. 그것이 명사만이 아니고 사실로 그렇게 된 다는 것이 다” (1960. 11. 27. 말씀 122호 38페지)

이러하니 문선명과 그 집단이 벌이는 모든 이론, 이름, 명분을 동원한 가지가지 활동은 이 목표를 향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초기에는 속셈을 숨기다가 차츰 대세가 무르익으면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점에서 문선명과 그 집단의 활동이 공산당의 투쟁방법과 아주 비슷하다. 김 일 성도 처음에는 애국 애족하는 유망한 청년의 탈을 쓰고 가지가지 대회, 회의, 선동과 선전을 거듭하며 대중의 심리를 장악하는데 성공한 다음 테러와 협박으로 정권을 수립, 40여년간 북한을 통치해 오고 있는 것이 다.

문선명이 획책하는 바가 바로 그러한 일임이 모든 자료에 너무나 명 백히 드러나 있다.

이러한 인물이 결정적인 힘을 가졌을 때 어떠한 사태가 벌어질는지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히틀러, 김일성의 예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문선명은 서백일, 전용해의 단계를 훨씬 지나 있다.

독자들께 서는 심 사숙고 하시기 바란다. 사람이 사는 길에는, 개 인에 게있어서나 사회적으로 ‘설마’ 하는 일이 현실로 나타나기 쉬운 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재난을 피하는 길은 사실을 똑똑히 보고 용기 를 내어 대책을 세우고 커다란 힘으로 미리 막는 길 뿐인것이다.

(끝)


홍난숙

문선명의 장남인 문효진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홍난숙. 그녀는 1995년 8월 8일 14년간의 결혼생활을 청산하고 이스트가든을 떠났다. 그녀는 참가정을 떠난 것을 ‘탈출’ 이라고 표현한다. 그 후 홍난숙은 문선명 일가의 실상을 폭로하는 책을 썼다. 그 책의 이름은 <In the Shadow of the Moons>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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野錄 統一敎會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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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정 화 외2인 지옴 (前 통일교창립위원)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3aXq&articleno=15851262


빼앗긴 30년 잃어버린 30년 (문선명 통일교 집단의 정체를 폭로한다)

저자  박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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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理原本 1952년

丁得恩 / 鄭得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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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진 총기무장 행사, 한학자 총재가 주범이다!

이번 사태에서 통일교 구성원 그 누구도 책임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문제의 원인을 분명히 파악하고, 치유와 회복을 위한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 멸망의 문턱에서 침묵은 악의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