原理原本 원리원본 1952년
(김원필선생 필사본)
(필사본: 1953)
* 본 내용은 참아버님께서 직접 쓰신 진본 (眞本. 1951.5.11-1952.5.10)을
정확하게 필사한 김원필선생의 필사본임 (1953. 9월 전후)
* 제목차례(편, 장, 절) 및 체계(제목 구분)는 누군가 붙였음.
1954년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 통일교
1996년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2020년 하늘부모님 성회
原理原本
(김원필선생 필사본)
1952. 5. 10
(필사본: 1953)
* 본 내용은 참아버님께서 직접 쓰신 진본(眞本. 1951.5.11-1952.5.10)을
정확하게 필사한 김원필선생의 필사본임(1953. 9월 전후)
* 제목차례(편, 장, 절) 및 체계(제목 구분)는 누군가 붙였음.
제목차례
第 一 編 總論 1
第一 章 하나에서부터 全存在로 1
第二 章 生의 發源은 先有에서부터 5
第三 章 無形世界와 有形世界의 同和的 根本意義 10
第四 章 灵人世界와 實體人世界와의 相對性 創造原理 12
第五 章 하나님의 理想 中心은 모시는 宗敎로 15
第 二 編 創造原理와 墮落攝理 17
第一 章 創造原理와 墮落原理는 사랑에서 始作 17
. 第一 節 어떻게 지으셨나. 21
. 第二 節 그렇다면 墮落의 始作을 아라보자. 24
. 第三 節 웨 墮落케 하였는가. 28
第二 章 하나님은 나를 알므로 알 수 있음 32
第三 章 原理로 찾으려니 聖經은 直接敎示치 못함 43
第四 章 그러면 왜 모세부터 直接 뜻 工作못하였는가 45
第五 章 生命樹에 對한 根本 뜻 46
第 三 編 復歸攝理 47
第一 章 하나님은 아담부터 찾는 工作못하고 아벨로부터 노아까지 사탄 對한 根本意義 47
第二 章 第一次 하나님的 責任分擔 攝理期間은 노아부터 예수까지 52
. 第一 節 노아부터 아부라함까지 攝理路程의 根本意義 52
. 第二 節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攝理하신 根本意義 55
. 第三 節 모세에게 대한 하나님의 役事의 路程이 왜 예수의 路程 全貌되는 理由 65
第三 章 第二次 하날 뜻 成事責任使命者로 오신 예수의 責任分擔 攝理期間에 대한 根本意義 78
. 第一 節 地上攝理 路程에 대한 根本意義 78
. 第二 節 洗禮요한이 엘리야되는 根本意義 81
. 第三 節 洗禮요한 人間性 標準으로 예수를 對함. 86
. 第四 節 復歸攝理 表示로 된 예수 祖上의 血統 92
. 第五 節 예수 三年 共生涯의 路程은 뜻 成事의 터를 찾기 爲함 96
. 第六 節 예수 十字架의 勝利的 根本意義와 勝利的 信仰者 109
. 第七 節 나를 더 사랑하라는 根本意義 111
. 第八 節 地獄가서 傳道하는 예수의 根本意義 113
第四 章 예수 昇天 後도 攝理하는 責任的 根本意義 114
第五 章 復活의 根本意義 117
第六 章 天使長의 喇叭소리와 再臨과의 根本意義 121
第七 章 審判에 對한 根本意義 121
第八 章 四十日 復歸코저한 攝理路程의 根本意義 151
第 四 編 攝理로 본 歷史的 辨證 126
第一 章 人類歷史 발전과 하나님의 섭리로 본 辨證 126
第二 章 歷史發展 限界를 復歸로 본 辨證 130
第三 章 歷史로 본 惡이 善 對하여 勝利한 原理的 辨證 136
第四 章 復歸歷史로 된 人類發展歷史 139
第 五 編 理想攝理 163
第一 章 創造性 復歸로 된 理想論 163
第二 章 再臨主는 理想論 完成의 基本存在 173
第三 章 歷史的 실두루머리 原理的 解決은 韓國에서 始作 180
. 第一 節 歷史的 실두루마리의 原理的 解決은 韓國에서 始作 180
. 第二 節 韓國의 氣候는 世界文明의 標本될 象徵 186
. 第三 節 韓國은 地理的으로도 世界의 中心地 191
. 第四 節 韓國은 諸宗敎의 總結實地 194
第二 編 第一章 第四 節 웨 타락케 하고 攝理하는가 200
第 一 編 總論
第一 章 하나에서부터 全存在로
太初는 하나이시다. 이 하나가 卽 太初의 根本이다. 이 根本이 卽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의 存在야말로 無限小에서 無限大의 存在에 根本이다. 이 하나의 根本이 全體의 根本이요 또 全體의 中心의 根本이요 또 全作用의 外力에 對한 平衡의 基本持點이다. 우리가 現科學 時代에 處하는 生活過程에서 數學을 떠나서는 그 基本發展의 軌道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複雜多段한 現實社會의 構成의 基礎로 數의 單位인 하나를 中心하고 그 中心을 主로삼고 展開시켜 大數의 實體를 자아내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그러므로 무슨 存在의 基本을 세우기 爲하여는 하나의 存在의 確定的 存立이 重大한 것이다. 이 存在가 決定되면은 다시금 하나로부터 增數의 重大要素를 加減組合하여서 나가는데 發展이 있는 바이며 發達이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모든 事物의 根本을 推測하려 할적에 하나되는 單位的 根本이 絶對 重要 要求要素이다. 이 要素의 決定은 우리가 重大 重大關係를 始作케하는 外部的 動作을 決定하는 基因이 되는 것이다. 이 根本이 卽 外部의 動作을 自由軌道로 옮겨주는 中心點이다. 이 中心點이 公式의 基本單位며 他事物體에 미처주는 第一存在다. 이 存在가 弟二存在까지 到達케하는 決定的 中心點으로 되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第二存在의 中心要求는 무엇인가 하면 弟一存在의 決定的인 單位로부터 끊을 수 없는 關聯된 增數單位라 할 수 있는 바이다. 이와 같이되어 基本的 單位數로부터 無限數까지에 到達하는 進級過程의 表示가 公式이라 한다. 그렇다면 現社會의 모든 存在의 自體는 單位를 떠나 또 公式原理를 떠나서는 存在의 決定的 存立을 保障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런고로 現實體社會의 諸事物은 單位를 中心한 公式發達이라고 規定할 수 있는 것이다. 卽 現世紀 文明도 單位를 中心한 公式發達이다. 그러나, 決定的 論理를 내린다면은 現科學世界도 單位를 土臺로 한 公式發展世界이다. 그런고로 사물의 존재를 認定할진대 根本 하나의 단위로부터 增數的 單位까지가 一平線 路程을 離脫할 수 없는 것은 事實이다.
이 一平線 路程이야말로 他아닌 各單位의 共通路程됨은 事實인 것이다. 그런고로 이 路程의 어느 部分에 서서 左右를 或은 上下를 잡아서 自己存在를 決定짓고자 할 때는 自己는 獨立的 存在와 같은 것이다. 實狀은 右가 있고 左가 있고 上이 있고 下가 있음을 누구나 否認 못한다.
그렇다면 左右의 존재와 또는 上下의 존재에 대하여서는 至今 自我의 決定的 解決을 짓고자 할 적에 左도 右도 上도 下도 모두다 決定的 解決의 間接으로 成立되는 것은 事實이다. 그러므로 至今 自我와 卽 하나를 중심하고 考察하려 할 적에 나아닌 他의 존재의 確定을 要케 되는 것도 事實이다. 이러고보니 큰 問題는 自己 하나를 公式의 根本되는 단위의 實格存在로 되어지는 것이 必然的 要求條件인데 이 條件을 우리 人生은 즉 나는 어디서부터 잡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重大 課業이며 義務이다. 이 課業과 義務를 다하는 根本單位라는 實體를 알고나게 될 때 他에 대한 根本實體單位로 亦是 關聯的으로 解決됨이 사실이다. 그러니 萬有에 있는 存在物은 한 共通路程(創造基準)을 넘어 存在할 수 없는 事實은 明白하다.
이 共通路程은 즉 平衡的 路程인 동시에 決定的 어떤 存在에도 基本되는 安定點이다. 이 점에 到達하여서만이 單數 하나 즉 나로부터 大數 즉 타에 影響되는 根本原理가 解決되는 것이다. 이 해결을 完全히 받았다 할진대 그 自體는 無限한 他自體까지 直結되어 있는 自己 使命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萬若에 이 使命을 勘當치 못하였다고 하면은 自己는 他自體의 存在할 수 있는 必要的 要素를 破하는 存在이니 어찌 그 犯罪的 追窮을 받지 않으랴. 그러므로 우리 人生은 自我에 대하여서 天宙(實體世界宇宙+하날無形世界)와 如何한 關係的 立場에 있는가가 해결의 문제인 동시에 一大苦心되는 사실의 課業이다.
以上 例를 보면은 科學은 有形體를 公式으로 찾는 反面에 그 單位가 實體的인 有形이니 問題는 그리 難하지 않으나 우리 人生은 그 외에 無形의 活動作用을 無視하거나 抛棄하거나 할 수 없는 他力의 힘의 作用과 衝動을 부인 할 수 없는 純粹한 良心的 作用의 힘을 認定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自我를 中心하고 어떤 單位를 근본하고 公式的 原理로 나에게 追窮시켜주는 根本 單位體 되는 第一存在를 認識치 않을 수 없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認識을 보아 自我의 存在를 表徵케 될 때 자아라는 존재는 벌써 第二存在에 처하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人生은 良心이 있나니 이 良心이 自我에 存在한다는 것은 누구나 否定 못한다.
그렇다면 良心이 바라는 바는 自體 個性存在와 他性的 存在間에 絶對的인 單位가 平衡線 路程을 通하여 共同한 理想體를 向하여 어떤 使命的 責任感을 追窮시켜주는 큰 힘이 흐르는 것은 事實이다. 이 事實本體를 人間의 根本單位本體라고 할 수 있는 細密하고 高尙한 존재의 근본이라는 것을 論할 수 있다. 이 존재를 말하기를 良心 本體이라고 하거나 또는 絶對善이라고 하거나 또는 하나님이라고 하거나 名稱의 問題가 아니고 存在의 決定的 事實의 問題이다.
다시 말하면 내 良心이 어떤 最善의 目的을 達成하기 위하여 絶對的 共通單位와 같은 公式原理를 向하여 움직여지는 事實이 즉 絶對中心의 力이요 理想完成을 向하여 나아가는 過中에 서 있다는 事實을 알 수 있다. 이 絶對的 力을 第一存在라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이라 할 수 있다. 이 絶對的인 力은 理想本體까지 到達케하는 作用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第一存在로부터 第二存在 第三存在등을 통하여 共通되는 絶對單位體까지 즉 個性的 絶對單位가 完成할 때까지 力은 作用하는 바이다. 이 良心에 作用하는 힘을 중심하고 나아가는 無形實體로부터 有形實體에로 平衡相衡이 없는 路程을 要求하며 나아감은 우리는 感觸을 보아서라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렇게 實行하면은 自我를 完成하는 길인 同時에 左의 第一存在, 右의 第三存在를 完全存在시키는 使命的 責任을 다하게 된다는 것이 前例로 잘 알 줄 안다.
이 關聯的 路程은 科學世界의 公式과 한가지 原理原則으로 秩序整然한 天宙體形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無形體인 第一存在(原理)로부터 自我와 第三存在등을 살펴보면 根本 하나의 하나님으로부터 單數로부터 複數에로까지 共通的 路程은 無形世界로부터 有形世界로까지 有形으로부터 無形으로한 回路의 通性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實體世界는 사람과 萬物의 展開를 말한다. 이 有形界는 無形世界의 表示的 影體로서 發展시키고자 하는 것이 즉 創造的 意義이다. 簡單히 表示하면은
神(하나님) = 사람 + 萬物世界이라고 表示한다.
그렇다면 創造한 意義는 하나님 自體 하나이나 性에서는 兩性이었다. 이 하나님의 自體인 自我(하나님)를 複數體系로서 벌려 놓은 것이 創造的 根本意義이다. 實體世界+사람과 無形世界+하나님과는 相對로 되 全部를 共通하게 하나님의 本意軌道로서 無에서 有에로 完全 授受하는 路程에 完全對像存在의 目的을 達成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創造란 것은 하나님의 性品 二性 즉 男性 女性 즉 陽性 陰性의 自體를 無限小에서 無限大까지 벌려 놓은 것이 天宙의 眞狀이다. 그런고로 무슨 事物體에서라도 이 性品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天理니 그것은 根本의 뜻에서부터 始作됨의 事實을 証明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에서 始作하여 複數로서 되었고 이 複數存在는 다시금 完全한 本性인 完全單數로 歸因케하여 第一單數로부터 單位複數로서 繁殖增大케 함이 根本 하나님의 理想으로 되었다. 그 理想의 中心點이 사람을 중심하고 天宙創造 하였음을 알게 될 때와 우리 사람과 하나님과의 關係가 큰 重大問題다. 그래야만이 우리 人間問題 根本 解決 問題策으로 結斷짓는 바이다.
하나님은 뿌리고 사람은 줄기와 가지고 萬物은 葉部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은 하나님을 닮기 위하여 마음으로 살고 萬物들은 사람을 돕기 위하여 사람에 取게 되어 根本体 하나님의 뿌리를 돕기 위하여 사람한테 取케 될 때 하나의 關聯作用은 반복되어 根本完成을 돕는 것이 創造的 中心 意義다. 이런 創造原理로 되어진 個性眞理体 人間이 찾아 나아가는 眞理라는 것까지와 그 眞理와 하나님과의 이상까지에 대한 根本 攝理路程을 찾아서 대수가 總結된 단수로 歸結하는 全部를 알아 볼 수 있다. 즉 天宙도 合하면 同性體로 하나되고 헤치면 無數하게 된다. 이것에 加減함의 妙味가 天宙의 原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創造하신 天宙라고 하는 그 속에는 極小로부터 極大까지가 무단히 秩序整然한 創造的 相對性 原則과 對像原理 完成으로써 配列됨이 즉 하나님의 存在의 根本부터 萬物存在의 根本과 一實通知하여 加減하여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는 事實이다. 이 事實을 찾아볼 때에 그 深大 深廣 深高한 妙理를 어느 方向으로 보든지 禁知無數이니 그러므로 天宙 전체는 神妙한 妙理로 전개되나 그 妙理에 대하여 내 자신이 單位로 되어 同形體로 설 수 있으며 對할수 있을적에 무한한 新眞理가 出現됨을 體驗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러나 過今을 통하여 이런 新眞理가 다시금 要求되는 바이다.
그 眞理本體에 대한 眞狀에 대하여는 體証의 重大性을 要求하는 世界이니 즉 科學的이 要求됨으로 다시 말하면 公式的 要求가 추구된다. 그 眞理本體야말로 現實的 立場과 未來에 대한 現實과의 如一한 活味를 不斷히 體得케함이 充分하여야 하며 發展할 수 있는 珍味와 衝動이 現實的 自我生活을 통하여 生涯로 生存의 理想을 連知함이 없다 할진대 生存의 要素임을 刺戟못하나니 그러므로 이 眞理本體야말로 直接인 同時에 理想인 同時에 永遠할 수 있는 理想의 實我를 把握하는 公式됨의 중요한 요구의 本意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과학적인 原理를 통하여 보여지는 創造主의 攝理와 인간의 중심으로 되어 萬 天宙의 창조적
意義 等等에 대한 根本問題며 또 그에 대한 重要 解決이 되나니 그 중요함이 철학의 근본이면서 宗敎理念의 窮極의 점이면서 萬 인간이 찾고자하는 天宙의 根本이 되나니 이 근본이 大衆人間의 바라는 바의 理想인 터이며 또 生存의 근본이 됨이니 누가 피할수 없는 公理니 그 公理가 바로 우리 전부의 해결을 초래하여 주는 근본 問題點이다.
그러므로 나는 뭇 人生에게 대하여서 인간이 찾아야 할 重大要素를 세상에 전할려는 바이니 전함을 받은 자는 靈을 통하여서 알려지는 사실을 肉을 통하여 能知할 수 있는 유일한 眞理니 그야말로 누가 反駁할 수 없는 天理原則이다. 善과 良心을 사랑하는 사람일진대 본 중요문제를 解決하기 위하여 靈的으로 努力이 조금만 있으면 旣必코 指明함이 有함으로 누구든지(특히 信仰理想을 바라는 자는 빠름) 解決됨으로 決定的인 實體證據로서 天宙理想의 本路를 찾게 될 터이니 어찌 이 根本을 찾지 않으랴. 그러면 지금부터 根本眞理를 알고 찾는 데까지의 經路를 살펴보기로 하자.
第二 章 生의 發源은 先有에서부터
그렇다면 眞理로 되는 根本体라는 存在에 있어 우리와 第一 問題로 되는 生의 根本問題가 解決의 要點으로 展開됨을 피할 수 없다. 즉 우리가 生하여지는 原因과 生하고 있는 原理와 生할 수 있는 原因 等에 대한 萬相体의 根本原因에 歸因하여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이 3대 原因을 알고저 할 적에 現實的이 唯心論的 堅持와 唯物論的 堅持를 살펴서 視察치 않을 수 없는 事實로 되어 있나니 이 양 方向이 理想으로 바라는 終點이 하나로 되어야 할 것이 分枝되어지고 있나니 즉 唯心論으로는 神을 세우지 않을 수 없고 唯物論으로는 物質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어 生에 대한 根本問題에 相俑을 造成하고 있는 것이니 創造의 調和로 된 宇宙이냐 進化로 造成된 宇宙이냐가 問題로 되어 있는 바이다.
그렇다면 生하여지는 問題가 重大問題다. 天宙의 生物이 生하여지기 위하여서는 무엇이 必要한가. 거기에는 具備條件으로 太陽光線, 空氣, 水, 體를 構成할 수 있는 物質이 要求된다. 그렇다면 進化的 立場에서 보면 한 생이 存在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다시 말하면 한 眞理構成體로서 存在하기 爲할려면 반드시 蘇生으로부터 長成까지 長成부터 完成까지에 대한 一貫한 過程을 通하여지는 時間的 移動性으로 보여지는 進化的 法則軌道를 보여준다. 즉 進化法則이 있을 바인데 어떤 目的物이 構成될 수 있는 外部的 條件 즉 進化 할 수 있는 方向으로
움직여주는 힘은 어디서부터 始作되는지? 기타 生을 保存 시킬 수 있는 諸條件과 要素 즉, 힘과 光, 空氣, 水, 土 等等의 存在할 수 있는 保障條件은 무엇때문에인가. 諸條件 等等의 여러 가지 要素를 살펴볼적에 進化的 法則은 移變體形을 취하는 자체 외에 外部的 諸要素存在까지 倉曹시켜 가면서 進化한다면은 모르거니와 그렇게는 되지 못함을 우리는 속히 觀測될 때 進化할 수 있는 外部的 旣存環境은 如何히 되었는가. 이것은 進化하기 위한 前提條件이니 누가 이를 否認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生物은 물론, 기타 諸事物이 存在하기 위하여 根本的으로 必要條件을 共通的으로 保有하게 하는 先有 存在物이 絶對로 要求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生하여 지는 原因을 造成하기 위하여서는 理想形으로 生하여 질 수 있는 外部力의 保障과 生하고 있는 必要要素의 보장과 생할 수 있는 將來의 불변의 條件의 確保 등등이 요구된다. 이 絶對的인 힘의 存在와 絶對的인 不變要素가 具備됨이 前提條件으로 되는 것을 볼적에 생의 共通的인 요소면서 必要的 요소로서 認定할 수 있는 동시에 目的完成을 위한 생의 要素的 存在를 確定시킬 수 있는 根本存在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볼적에 어떤 목적을 造成하기 위한 存在로써 生存하여 나아가는 데는 移變狀態를 볼 수 있나니 이 部分은 進化的 部分으로 보여지는 바이다. 한 部分的으로 蘇生에서 長成으로 完成되는 것임도 忘却하여서는 아니된다.
그러므로 한 生物 또는 物體가 存在하기 위하여서는 絶對的인 共同單位의 力과 要素를 보여주는 그 自體가 즉 創造的 進化인 同時에 目的物 根本体라 할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天宙 全部 즉 小에서 大까지를 網羅하여서 創造的 妙味를 無數히 발견하게 된다. 이 創造的 妙味야말로 原理 原則을 中心하고 絶對 理想型을 向하여 움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즉, 創造理想을 完成하기 위하여 온 天宙의 存在하여 나아가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神은 즉 絶對理想과 創造理想을 完成케하여 主管하는 그런 存在가 神이라고 하여 또 하나님이라고도 한다. 하나님의 創造하심의 뜻은 實體萬相을 主管하여 無形理想인 本意世界에 대한 影相으로 짖고 合流, 合和, 合體를 이루어 主管을 理想目的하고 이 天宙를 創造케 된 理由의 原因이 있다. 卽 創造理想 目的은 하나님과 天宙와 同一體形으로 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相對的이면서 聯關性을 中心케하여 하나의 根本的인 原理原狀으로 表現化 하려고 하신 것이 萬物創造이다.
하나님은 無形의 存在면서 有形의 存在인 生의 根本本體까지 되어있음에 모든 生物은 하나님 性像되로 지음받고 그 中 全生物과 萬物의 中心은 사람을 標証하여 創造하심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無形 하날이 右左하면 사람도 右左하고 사람이 右左하면 萬物全體가 右左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無形 하날 世界를 主管하는 同時에 有形實體世界까지 總結主管을 하여야 하는데는 實體世界 中心은 사람이니 사람만 主管하면은 萬物은 사람으로부터 主管하게 할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創造할때 하나님이 自己形像되로 創造하시어 實體世界 主管 完格者로 創造하심이 卽 代身 主管者 確立이었다.
이 確保이야 根本하나님의 同像 同性體으로 代辯格 實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사람은 格과 形像으로나 同體形으로 되어 있기에 主管格을 具備할 수 있는 것은 事實로 되어진다. 그리하여 萬物의 主人格 되는 사람은 萬物이 具備하고 있는 完成格 要素로도 充分한 具體的 形體로 지어졌다. 그러나 그 體의 物體的 存在에 있어서는 萬物의 體의 存在的 要素와는 다름 없었으니 生心의 存在가 萬物보담 나은 存在이었다. 사람도 肉身은 萬物要素와 별반 差異없었으나 그 良心的 構造에는 하나님인 性品이 分在할수 있는 存在 卽 生心이 特有点이다. 이 生心이 長成하여 靈形體를 이루고 靈形體는 또 다시금 生命體와 生靈體로서 完成되어 直接 神의 指示에 左右되게 되어 있음이 特有要點이다.
다른 生物은 肉身은 다 갖고 있으나 生心이 없다. 肉身에는 肉心과 肉體가 合하여 同一目的行動을 하게 되나니 이 作用部分은 動物性의 本能性이다. 이 本能性은 肉身的 活動으로 되어 生存의 知覺과 保護의 知覺과 繁殖의 知覺 等으로 區分되어서 生存體를 繼續하는 바이다. 사람은 內外에 靈的作用을 根本하는 永遠存在인 하나님의 部分性存在를 갖었기에 永遠 善으로 向하고저 함의 自然作用으로 되어있다. 그는 卽 同性 同質的 自體는 合하려는 陰陽 原因에서도 推測할 수 있는 事實이다.
그렇다면 萬物에 生이 注入된 根本은 하나님으로서지만 그 事實的 經路롤 찾어보자. 하나님은 生物의 中心生命의 本體이며 사람은 萬物의 中心의 表現體이니 그 要素에 있어서는 사람도 하나님의 性品, 永遠生命 要素도 갖고 能知할 수 있는
智性을 갖고 그 反面 物質的 部分에는 萬物의 要素를 兼有하여 있는 中間媒介作用을 勘當지었다. 사람을 지으실 때 土와 水를 組合하여 體를 造成하고 空氣와 太陽빛을 주어 實體 生의 體 肉身에다 靈體와 永遠存在할 수 있는 生을 注入시켜 心臟을 起動하는 作用을 일으켜 生의 基本을 세우셨다.
이 生이 起存하기 위하여는 有形體의 本質인 흙과 물을 對하여 無形인 無痛體인 光과 空氣로서 對하여 陰陽的 授受的 反復作用인 呼吸을 始作用하여 圓滿히 授受作用이 繼續하여 生의 維持를 보나니 이 生의 根本은 하나님으로부터 注入된 바이니라. 그리하여 呼吸은 生力의 要素를 돕고 즉 血液을 맑히고 萬物攝取 食物의 營養素는 體를 培養하여 肉體의 不均衡을 도와 並助 並動하여 肉身安全路線을 取케하는 呼吸으로 酸素와 營養素와 圓滿히 授受作用이 回復維持 할 때에 如前히 生의 保障을 이루는 바이다.
그 生의 自體인 肉身위에 無形體이며 根本體이신 하나님의 生心이 中心이 되어서 外部體 構造인 肉身의 動作과 差異없는 一平線上에서 生心의 要求되로 生存함의 目的을 向하여서 나아가여야만이 圓滿生存하는 것이 根本이며 人生의 創造하신바의 目的이다. 卽 生心이라고 하는 靈素의 部分은 하나님의 몸에 一部分에 繁殖을 肉身을 通하여 培養받게되어있는 것이므로 이 生心이 肉身內의에 어느 期間까지에 長成하여 完全한 靈人으로 第二世的과같은 存在의 靈人이 無形世界의 한 神格과 같은 資格으로 옮겨지게 하고저 하심이 生心을 肉身에 注入하신 根本目的이다.
그러므로 生心이 肉身에 있는 동안은 生心이 中心이 되어 肉身을 支配하는 바가 根本인데 肉身의 要求대로 나아간다면 生心은 拘束받음과 同時에 自由長成을 못하게 되있나니 이 自由長成을 못하게 되는 理由는 墮落以後에 始作되었다. 肉身生活을 中心한 生涯는 靈이 長成하는 한 期間의 터인데 靈의 要求대로 그 肉身이 그 目的을 向하여 나아가면 靈은 美形體와 自由形體를 造成케됨이 原則인데 肉身이 靈(生心)을 反하여서 지내면은 靈體는 흠이 많은 同時에 自由없는 靈體로서 되나니 그러므로 사람은 肉身生前에 充分히 靈體의 要素를 取하게하는 生涯의 目的이 生前의 重要目的이다. 이 目的을 造成하기 爲하여 墮落된 世界에는 道를 通하여 靈體의 自由長成을 培養하려는 것이 基本工作이다.
例를들면은 肉身은 菜蔬밭에 있는 靑蟲의 時代와 같은 것이다. 이靑
蟲의 時期에 充分히 營養要素를 取키에 努力하여 充分히 取하였다면 圓滿히 長成하여 完全한 나비로서 無限大空을 自由天地로서 香花甘蜜을 즐겨 活動할려면은 靑蟲의 時期에 營養을 充分히 取하지 못하였다면은 나비는 自體에 不具의 狀態를 주어 本目的을 成就못함과 같이 우리 肉身時는 靈心의 要求를 中心하고 나아가는 肉身은 靑蟲期에 營養을 잘 取한 나비와 한가지로 우리의 靈體가 美形體면서 自由形體를 具備하여 無限理想 境 舞臺를 活動하게 되는 것이 充實하다.
이와같은 模樣으로 肉身 時에 努力이 靈體의 要求대로 나아가는 바가 絶對的 義務로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는 靈이 肉身을 支配함의 根本된 原理로 되어 있음을 아니 우리 靈體의 要求에 肉身이 同一行動하여 差異없는 生活을 肉身生前에 하여야할 義務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우리 肉身을 靈體의 터로서 지어 自己의 理想繁殖을 始作케 하고자 함이 根本人間創造의 原因이다. 그러니 우리는 肉身生前에 靈心이 願하는 中心點에서 食生活을 하여 創造本體인 하나님의 人間을 지으신 本意를 完成하여서 天宙의 大理想을 充分히 完成시키는데 사람은 中心的 努力을 다하여야 한다.
사람은 天宙에 있어서 中心으로 되어있다. 卽 萬物의 生物은 사람을 基準삼고 지음받은 同時에 萬物보아서 사람은 幸福과 理想生活에 刺戟받고 살게끔 萬物은 慰勞物로 되어 있다. 사람의 生의 生活에 相互協助하는 作用을 갖추어서 圓滿히 生活하게끔 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植物은 우리의 肉身의 生을 돕는 酸素를 培養하고 사람과 動物은 植物의 長成要素인 炭素를 配給하여서 生의 要素를 授受하는 協助作用을 돕는 그 理致는 根本創造하심의 一體를 完成할려는 相對 될 수 있는 對像存在를 確定짖는 事實이다.
그 外 動物과 生物(星蟲)은 우리 사람이 生存할 수 있는 理想型의 한 表型을 보여주어 慰勞와 衝動과 刺戟을 받게끔 創造하심이다. 그러므로 우리 人間의 墮落이 없었으면은 萬物萬相은 自我生活에 큰 興味와 幸福됨을 切感하게끔 全宇宙 萬相은 表徵의 慰勞의 對像으로 되었다. 그런데 우리 人生이 墮落되고 보니 萬物萬相으로 하여금 傳하여주는 慰勞對像이 取하는 그의 要求의 目的을 直接 對할 수 없는 無感覺의 存在로 되어 있음을 自覺치 못하니 그 어찌 本創造理想의 慰勞的 對像 存在인 萬物萬相에 대하여 聯關性을 알지 못하게 되니 人間도 亦是 無意味로 보여 지며 同時에 萬物 自身에 대한 保護性과 價
値性을 몰라주니 萬物의 存在의 根本創造 意義도 破하는 作用이 始作되니 萬物의 存在의 根本目的은 아무런 使命的 役割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自己存在를 沒覺하는 생활은 卽 墮落生活을 하고나니 全宇宙는 사람을 爲하여서 和動하여서 協助理想을 完成하여 사람과 萬物로서 人間理想을 表徵시켜 하날의 理想을 對像的으로 對할 수 있는 第一理想作用을 破하게 되니 第一理想實念인 하날의 理想도 나와 和動의 作用을 合成化 할 수 있는 資格이 없게되니 이어찌 무서운 行動이라 아니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사람하나 墮落되고보니 萬物의 目的이 無價値存在로 墮落體를 받게 되고 그러고 보니 하날과의 對像形 理想根本도 그 目的을 完全히 繼承 못하게 되니 사람은 하날에 對한 墮落을 招來한 中心體形으로 되었으니 人間墮落은 卽 萬物墮落 또 하날 墮落으로 間接的 行動으로부터 直接的 行動 部分까지 犯行한 事實을 누가 責任을 저야되는가! 이것이 人間의 中心 責任 課業이다. 그러기에 人間의 墮落으로 因하여 온 天宙는 歎息의 基因을 가져온바이다. 聖經에도(롬8:19-27) 萬物歎息, 聖徒 歎息 하날 歎息의 始作도 人間의 墮落으로 因하여 始作된바다. 그러므로 人間에게 墮落이 없었드라면 이야말로 天宙는 全部가 理想實形 生活로 安定된 永遠한 幸福生活을 肉身生前부터 始作될것이었겠는데 墮落됨이 우리 全體生活을 拘束生活로 引導함이 今 人間生活의 全顯的 表現이다. 그러니 墮落前 사람으로 復歸하는 것이 人間責任的 義務이다.
第三 章 無形世界와 有形世界의 同和的 根本意義
하나님의 創造目的은 無形의 自體가 有形의 性體로 展開시켜 놓은 것이며 그의 各個性體가 사람의 性品自體를 標本삼고 지었으며 그 사람은 다시금 生心을 中心하고 無形의 本形體에로 還存케 할려는 第一存在世界를 扶與 하심이 根本目的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을 中心하고 하나님 自身이 無形體에서 有形體로 還存 할 수 있는 原理로서 創造하심이 根本 中心 目的이다.
하나님=사람+萬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 = 靈人 + 肉身이다.
靈人은 無形體이면서 永遠存在이다. 그는 하나님이 永遠이니 그도 永遠存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靈人을 完成하는데는 肉身을 터로 주어서 蘇生으로부터 長成케함이 目的이다. 肉體는 萬物의 生의 體의 要素를 取케 함이다. 肉身은 肉心과 肉體로 造成되어 있으니 肉體
인 有機體는 肉心으로 因하여 그 機體에 完全存在體形을 保障키 위하여 努力을 하고 그리하여 生心은 肉心이 理想形 體系로 나아갈길을 明示하여 그 理想體系를 脫線 못하게 하나니 그러므로 生心은 肉身培養上 卽 生心의 本路程線으로 이끌고저 함이고 肉身은 墮落性을 받고 있으며 本路上을 反하여 行動하고저 함이다. 사탄이 作用하는 것은 卽 肉身을 通하여 本能的 機關을 通하여 全面的으로 活動舞臺로 하고 있다.
모든 存在의 生物은 根本生力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生力은 完全히 繼續作用을 하여만이 生存이란 條件이 成立되는 바이다. 卽 肉身이 生할여면은 有機體로 食物을 無機體로 空氣와 太陽을 받아 呼吸起動으로부터 心臟起動으로 作用할 수 있는 外部的 力을 注入받아 生의 起動을 받음이다. 生이 繼續하려면은 사람에게는 肉身에서는 呼吸을 通하여 血을 맑히는 作用과 血을 供給하는 作用이 共同的 並助並行하여 授受作用을 繼續하여야 하는 同時에 生心에 있어도 또한 實體的 作用과 同一한 第二作用을 要하는 바로되여있다. 卽 生心에 있어도 肉身이 生하는 作用을 保障한 그우에다가 第二作用을 繼續하는 바이다. 그것은 肉身이 生心의 營養과 같은 것으로 作用한다.
그러므로 이 營養은 生心의 長成할 수 있는 必要素를 需給하여야만이 되는데 生心이 長成할수 있는 必要的 要素야만된다. 이 必要的 要素로 되기 爲하여는 生心에 反하는 要素를 許與치 않는다. 그러므로 良心的 立場에서 肉身 生의 保障이 要求된다. 그리하여 保障되는 肉身生力要素는 生心 要素의 血의 作用과 같은 作用으로 되어 生의 根本되는 無形世界의 生素를 呼吸하여 肉身으로 받은 生力要素와 合하여서 完全 授受作用의 保障이 根本的 要求됨을 아러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 人間은 無形世界의 生의 理想要素를 받어야 하는 것이 根本이고 이를 協助 並助하여 無形世界와 有形世界와의 共生基準點으로 始作됨을 아러야만 된다.
사람은 有形 生에서 無形 生의 世界까지 呼吸하여 生의 根本要素를 받고 있음으로 이 두 作用을 우리는 我한 自體에서 認識할 수 있는 바이다. 卽 無形의 要素의 長成이 要求되는 充當은 圓滿한 良心 路上에서만이 始作되는 바의 原理로 되었다. 그러므로 이 作用은 我를 이기는 힘으로 現實體我에게 强力히 要求하는 바의 實感力이 良心의 活動認認이다. 사람의 價値는 이 根本體와 合할 수 있는 永遠生要素를 갖임이고 伹 萬物은 萬物生力이 作用할 수 있는 必要要素를 自然界를 通하여 授受하는 作用 生의 繼續에 不過한 것이다. 그러므로
萬物은 生하다가 死하면 自然界로 還因함이고 사람은 萬物보다 第二還元存在가 있으므로 死하면 後, 生이라는 것이 示定되는 바이다.
그래서 우리말에 죽난 것을 돌아갔다고 하는 格言은 이것을 良心直告하는 第二還因生을 證據함에 不過하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은 永遠性 理想을 通함으로 그 良心 告白의 말은 現 世界에 事實的 實體를 豫証함을 여러 가지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墮落된 世上에서도 된다 된다 하면 그것이 必然的으로 到達하는 것은 根本 生心 作用은 永遠 本體와 連絡하여 그의 計劃的 路程을 豫感하는 表示로써되는 豫告的 事實을 우리 生涯路程에서 많이 보는 事實이다. 이는 사람의 永遠存在할 수 있는 第一存在의 實體의 確定的 存在를 明白히 알려주는 間接的 證據의 表示다.
第四 章 灵人世界와 實體人世界와의 相對性 創造原理
하나님께서 사람은 創造하실때에 自己로부터 分立性으로 表現하심에 創造에는 男性, 女性 卽 陽性과 陰性 또는 授受作用性 等의 完全히 存立됨에만이 生이 創造되었다.
그런데 사람의 한 存在의 卽 相對性 男性이면 男性, 女性이면 女性 한 存在를 다시금 分析하여보면 그 한 存在 各自에 異性形인 性品을 알 수 있다. 한 存在가운데 그 本體인 形像인 影體構造를 찾아볼수 있는바이다. 各 部分에면 部分에서 相對的 有機點을 中心하고 作用의 始作 또는 作用傳達 始作 等이 基礎로 되어 있음을 우리 사람 하나를 中心하고도 그 自體 中에 하나님 本性을 알 수 있는 同時에 天宙의 創造原理를 區分 分別로서 全體構成이 表示發見 할 수 있는 創造化의 原理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如何한 關係로부터 이와 같이 創造하심인가. 本來 사람에는 全宇宙 中心이다. 表現化된 連結性이 表示되었다. 卽 사람은 實體生存을 維持하려면 내한 自體에서 三部分의 生의 機動作用이 要求되는 바이다. 卽 胃의 作用, 心臟의 作用, 呼吸作用 等이다. 그 外에 對像된 存在로서 神經系通이 있음을 알 수 있다. 胃를 中心하고 보면 外部로부터 食物을 받아 營養素를 供給하여 血을 돕고 卽 받았으니 주는 作用이며 또 心臟은 血을 받아 動脈으로부터 通하여 靜脈이 있음을 알수 있다. 또 肺를 通하여서 空氣를 받아드렸으니 내보내는 作用 等이다. 全部는 授受作用을 圓滿하게 하여서만이 生의 한 存在를 維持시킬수 있는 體를 가질 수 있다.
이 사람 實體存在와 靈人存在와는 한 作用法則과 같은 原理로서 表徵되어 지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卽 肉身이 生하려면 胃部의 動的作用과 心臟의 動的作用과 肺의 動的作用이 同一하게 並動並助하는 路線에서만이 機關 動力 全部인 心臟을 起動함이 始作을 보게된다. 이 始作은 外部부터 完全 保有하여 주는 舞臺는 ①은 胃를 取하는 實體萬物存在 ②는 無形世界의 한 表示的 存在인 空中世界부터의 取하는 呼吸作用 또는 光線의 作用 等의 具備됨을 알 수 있다.
이와같은 環境的 具備体는 創造時부터 우리 靈人世界에서도 이 相對 될 수 있는 環境的 具備存在를 象徵시킨바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肉身이 生하여 生活體를 維持하기 爲하여서는 萬物의 恩擇과 空中의 恩擇을 받아 心臟의 動함과 同時에 神經系의 作用을 要케되어 한 存在를 維持한다.
但 心臟機關은 動力機關이며 神經系通은 感覺機關(器官)이다. 이것이 相互協助하여 한 目的으로 作用成事 完成 時에만이 한 우리 生의 感味를 取케 되나니 이 自體인 構造야말로 우리 靈人世界 構造를 表徵시켜주나니라.
그러므로 靈人의 存在하여 生할려고 할 때에 우리 肉身은 우리 肉體의 胃의 作用과 같은 血을 돕는 것과 같이 靈人이 生長할수 있는 營養要素를 授給하여야 한다. 그러면은 이 營養要素는 肉身生活 圓滿으로부터 始作됨이다. 卽 生心要求되로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生心은 한 肺臟과 같은 作用으로 無形空中世界로부터 無形生心要素인 呼吸을 始作하여 靈人体를 構成코저 함이다. 이것이 構成되면 靈人体의 感覺性 本體인 하나님의 實體와 聯關을 이루어 靈人 神經線과 같은 無限 生의 動力을 感覺하여 그의 完全存在인 한 分體로서 長成코저함이 重大要求이다.
그리하여 내 自體 한 存在가 完全한 分體存在로서 長成되면은 無限大의 生의 理想要素를 받게 된다. 그러므로 내한 自體에서 特히 하나님의 사랑의 充足함을 받아 喜悅과 幸福을 느끼는 同時에 한 完全한 相對性 存在인 異性体를 要求시키고저 함이 하나님이 사람을 分性하게 지었고 이 分性을 다시금 合成化하게 하고저함이 創造目的이다. 이 合成化를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路程이 한 理想路程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創造받은 萬物은 勿論이고 그 中 사람도 亦是 男性이면 이 存在가 完全 長成하면은 女性을 要求케되나니 이 要求하면서 찾아나아가는 것이 한 幸福의 路程으로 되어있다. 이 幸福된 路程에 醉함에 人間의 最大理想으로 하나님은 創造하였다.
그러면은 하나님의 創造理想은 사랑에 醉하며 繁殖케하여 創造主가 우리를 사랑하는 代身 사랑으로서 子를
사랑하면서 永遠히 살 수 있는 세계를 創造코저함이 目的 理想이다. 그러므로 男性 女性이 있고 相對性世界를 創造함이니 그 얼마나 고마운 創造들이랴. 그럼에도 사람은 그들 中에서 最高 理想 靈物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을 中心하고 萬物을 對하여 完全사랑을 줄 수 있는 中心存在로 되어 있으니 어찌 사랑치 않으랴. 이 圓滿 사랑을 成事코저 함이 하나님의 根本 人間 對한 사랑의 原理이다. 그러므로 人間은 한 하나님의 神經存在와 같은 中心 作用인 對像格 存在다. 其 外 萬物은 人間의 神經作用 部分을 刺戟하여 주는 對像存在로 되어 서로 사랑을 通達시켜 한 中心을 理想 圓滿 사랑에 處케 하고저 함이 全宇宙를 하나님이 사랑하는 目的이다. 萬物은 사람이 理想 사랑을 하게끔 刺戟 衝動을 보여주며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理想 사랑으로 發動시키는 存在로 되어야 한다.
하날은 우리를 爲하여 사랑을 주고저하나 그 사랑을 받아야 할 存在없고 보니 어찌 하날이 사람을 사랑하랴. 그러므로 사람이 사랑받지 못하니 萬物 亦是 그 사랑의 目的도 達成 못함이다. 이런 矛盾이 墮落부터 始作되었다. 그러나 사람이나 萬物이나 全部가 繁殖할 수 있는 것은 사랑으로부터 始作된다. 男性은 愛, 女性은 美로서 사랑할 수 있는 存在로되는 美의 存在가 要求된다. 그 存在를 所有하여 사랑하는 性交는 卽 創造的 本性 愛인 한 瞬間이라도 共同하게 切感하여 사랑을 주고받는 곳에서는 生에 對한 基本土臺를 作成하나니라. 그 時에 男性이나 女性이나가 사랑에 對한 醉感이 있어서만이 또한 條件은 男性의 動脈的 動과 女性의 動脈的 動이 共一 授受하게 되어야만이 生의 出發이 始作된다. 卽 姙娠된다. 動脈鼓動은 第二存生의 存在의 生의 起動力이 되어 圓滿하게 授受滿足으로부터가 第二 生의 始作은 創造原理로 보아 아러야 한다.
우리 肉身 生命도 생겨나기 爲하여는 特別한 愛의 授受作用을 通하여만이 成立되거든 우리 靈人의 生을 받는 것도 亦是 하나님의 無限 사랑과 하나이되는 一體 理想 路程을 取하게 될 때에 生의 始作은 勿論이고 生의 長成이 있나니 그러므로 우리 사람 自體는 하날 對하여서는 完全 美의 存在로 나타나여야만이 된다. 完全 美만 所有하면은 完全 愛 卽 하날의 사랑은 우리를 向하여 流動作用의 始作과 같이 흘러들게 되나니 이 作用이 우리 사람에게 미치게 될 때에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게 되며 萬物까지도 사람을
尊敬하게 된다. 하나님은 完全 사랑을 사람에게 하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個性体 對像体로 異性을 주어 하날 사랑의 한 高貴한 表示를 보고저 함이 目的이고, 이 사람이 男性으로부터 女性으로 同體의 愛를 주고받을 적에 하날에는 그의 사랑의 全性이 하나님의 創造理想形을 들어내게 됨으로 비로소 하날의 無限 사랑을 人間에게 扶與하여 주는 바가 目的이다.
그런데 創造世界가 墮落받고 난 後에는 宇宙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代身的으로 주고받는 한 存在도 없었으므로 하나님이 이 存在를 세워 찾고저 함이 目的이다. 이것을 찾아야 萬物과 宇宙가 다시금 蘇生하는 根本이 生起게 되나니 그런고로 하나님이 하시고저 하시는 役事는 卽 攝理는 여기에 重要要點이 있음이다.
그러면 結論的으로 表示하면은 하나님 하나에서 사람 二性(男性+女性)으로 分立시켜서 長成케하여 사랑 理想을 주어 幸福케 하는 同時에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들의 兩性이 一體가 되어서 사랑하는 그 自體들을 볼적에 얼마나 아름답고 貴하게 보는가를 사람에게 알게 하기 爲하여서 繁殖을 주어 사랑할 수 있는 存在들로 되게 함이 繁殖体 子息을 위한 父母들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理想 사랑하면은 이와같이 貴하게 보여지는 自體가 人間임을 아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人間은 肉身이 있고 靈人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사람에게 肉身의 父母와 靈의 父母가 딴 存在들과 다르게 所有함이 特有點이다. 이 點이 有함으로 永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은 永遠理想世界는 靈의 父母를 모시고 各自가 사랑 理想點을 每日 生에 醉한 生活이 우리 人生의 理想이며 創造主의 理想이며 靈의 아버지 어머니의 理想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肉身 父母가 있는 同時에 靈의 父母가 있는 것을 찾어 모시어여만이 우리 根本點을 찾아 사는 者가 된다.
그러므로 오날 世界에 이 根本原理를 밝히지 못한 것을 天命을 通하여 밝히고저 하는 바이다. 몬츰 宣言하는 바는 靈을 通하여 가르침을 받는 者는 이 原理와 本論에 대하여 事實의 根據点을 알기 위하여 問議하면 그 決定的 自體를 알려 주리라.
第五 章 하나님의 理想 中心은 모시는 宗敎로
하나님께서 世界를 主管한다면 그 主管은 必然的으로 自己를 높이는 中心構造를 中心하고 나타날 것은 우리가 想像的으로 推測하여 알 수 있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世界도 宗敎理想形態을 가진 國際構造가 必然的으로 나타나야만이 되어진다.
그렇다면 우리 理想은 卽 하나님의 理想이 世界的으로 實現될적에야 人生은 幸福으로 살 수 있으며 기리 기리 幸福이 始作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바라는 宗敎는 世界의 中心으로 움직임을 否認 못한다.
그러하면 現今世界를 볼적에 世界的 中心을 이루고 나아가는 하나님을 모시는 宗敎는 무슨 宗敎인가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 宗敎는 基督敎를 잡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그 基督敎의 中心眞理와 하나님의 理想과는 同一하며 그 理想과 世界와는 同一한 路程을 떠나서 나아갈 수 없는 바이다. 이것이 없다면 宗敎로 모시는 神의 存在에 對하여서도 다시금 疑心치 않을 수 없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現世界는 하나님을 中心한 國家들이 聯合한 國際機構와 反對인, 神이 없다는 國家構造인 共産主義 國家體系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다면은 造物主의 뜻이 완성을 보지 않을 수 없는 事實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反對하여 나아가는 그 存在들은 惡神의 主管國家이다. 다시 말하면은 사람을 서로 所有하고저 하는 神的 싸움 卽 하나님과 惡神 사탄과의 사람을 찾고저 함의 하나님의 뜻을 反하여 사람을 빼앗기지 않고저 하는 사탄의 反峠이 卽 現代 潮流의 眞狀이다.
그러므로 眞理는 하나이니 하나님은 旣必코 天宙로 하여금 그 뜻을 成事함의 目的이 達成되는 데까지는 戰爭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善惡의 分岐가 몬츰 問題로 우리가 苦心하여도 解決할 수 없는 事實이며 어찌하여 至今 世界까지 하나님이 攝理하시는 根本問題 等等을 찾아보아서 누구나 全人類는 하나님의 根本뜻과 그 理想을 全力 다하여 協助하는 方向으로 나아가야 할 責任的 義務의 根本 等等을 밝히기로 하여보자.
그러므로 하나님이 基督敎를 세워 人類를 對한 攝理路程과 基督敎의 至今까지 감추어진 眞理의 根本問題 等等이 明白히 나타나야만 된다 이 事實이 나타나면은 末世인 同時에 宇宙的 審判時期는 招來하는 事實의 根據 等等을 아러야 한다. 끝날이 되면은 聖經도 완성하여야만이 될터인데 聖經의 根本問題가 明白히 되지 않는다면 末世라고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再臨이라는 名詞조차 成事치 못한다. 再臨되기 前에 聖經中心 根本을 解決하여만 되는 것이 現基督敎 信者의 重大한 問題이면서 世界 神學界의 重大課業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全世界의 信者들에 對하여서 이 根本問題를 밝혀서 宣布치 않을 수 없는 바이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로 自己를 찾어 나오는 信仰生活路程에 反對된다고 反對하지말지어다. 먼츰 直接 하나님의 敎示를 받는 信者들은 밝힘을 받아 이를 支持하여 뜻 完成에 協助하여야할 重大義務를 아러야 한다. 누가 먼츰 本視的으로 알고 모시는 者는 저 나라에서 큰 榮光의 存在일 것이며 世上에서도 그 尊視하지 않을 수 없는 事實이다. 이 根本을 알고 나면은 우리는 如何하게 行動하여야하는가가 重大 責任感이다. 이리하여서 우리는 뜻 實現하는데 協助할 根本意義도 잘알면서 急速한 時日로 實現을 避하면 하나님 앞에 犯行이라 아니할수 없다. 모르면 容恕받지만 알면 責任使命에 대하여 各自는 全部를 奉獻하여 기쁨으로 나아가야만 된다. 그러야만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故로 信仰生活이라고 하는 것은 그 目的은 우리 人生이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는데서 完成된다. (5.22 己?年 記念日 記) (51. 10. 1 淨書 紹子)
第 二 編 創造原理와 墮落攝理
第一 章 創造原理와 墮落原理는 사랑에서 始作
하나님은 사람을 創造하심도 自己自身이 至極한 사랑의 理想을 實現코저함이었다. 卽 하나님은 中和性으로 계시는 本形像를 分性化 하신 것이 사람 創造며 萬物創造의 表徵이다. 하나님은 分性을 보게 될 때에 至極한 사랑을 現實化 시키고저 함이었다. 그러므로 萬物全部는 하나님의 理想을 더욱 美和하기 위하여서 萬物을 지으셨다. 萬物体에서 사랑性을 볼수 있게 되니 그 本性인 사랑 理想을 表徵시켜 內部로는 外部부터 表徵 體系로 傳하여주는 刺戟을 加하여 內部刺戟을 助長시켜서 內部的으로 더 높은 사랑 卽 어떤 萬物에서도 볼 수 없는 最高의 사랑을 할수 있도록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다시말하면 사람의 사랑은 어느 萬物性에서도 찾을 수 없는 사랑성을 갖고 있게 지으신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이 사랑性을 圓滿히 가져야할 目的이었는데 그 目的의 圓滿化를 이루지 못한 것이 墮落性의 出發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 나타나고 사람의 사랑을 萬物에게 表徵되어 美的世界를 이루어 온 天宙는 和動하여 一体的 喜樂을 보이고저 함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天宙 理想의 極局의 中心이며 또 喜樂과 幸福과 滿足과 主侖과 根本이니 그 사랑을 사람과 萬物과 하날 天使들이 즐겨 思慕하면서 더욱 많이 받고저 함이 直接的 要求였었다.
그러면 人間世界에는 善惡이 없어야 할 것이었는데 善惡의 始作도 사랑을 中心하고 되었었다. 卽 線은 하나님의 사랑 圈內며, 惡은 하나님의 사랑 圈外다. 本來 善의 世界뿐이만이 目的이었는데 惡의 世界의 出現이 卽 墮落이 拒來한 膳物이다. 그러므로 天堂 地獄이 있는 것이 아니고 天堂은 善의 世界 즉 하나님의 사랑 圈內요, 地獄은 惡의 世界 하나님의 사랑 圈外의 世界니 卽 死亡世界라고도 한다. 그것은 생명의 根本 하나님 사랑을 떠난 世界이므로 그렇게 부른다.
그러면 人間의 墮落根本과 惡의 起源點은 聖經을 비추어 또는 惡에 대한 하나님의 態度 等을 밝히기로 하자. 하나님이 天地萬物을 創造하실때에 善을 中心하고 지으셨다. 善은 하나님이 居할 수 있는 存
在요 善에는 하나님이 永遠하심과 같이 永遠性이 있는 同時에 사랑 理想性을 完成한 根本存在다.
創世記를 살펴 볼적에 모세가 記錄할 때 알려주신 創造說을 그 本意대로 發表키 위한 것이 아니고 卽 文字 그대로가 아니고 靈的으로 未來에 對한 秘密을 두고 敎示한 바이었다. 그 當時에는 根本을 밝혀서 發表할 수 없었든 것은 그 當時 人間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事實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創世記 創造說 가운데에서 보여주는 墮落 根本自體인 善惡果를 根本 存在케함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었다. 그로 因하여 墮落이 始作된다는 論理는 너무나 다 잘아는 事實이다. 그 外에 蛇의 存在와 해와의 誘引이 그 根本 中心들이다.
그러면 이 事實의 事實은 事實이나 그 根本意義에 있어서는 큰 問題로 되어 人間世上의 重大한 難關의 話題거리였다. 사람은 묻기를 하나님은 能力이시며 아지못함이 없으시며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시다는데 왜 墮落되게 하며 또 墮落的 要素를 配置케 하였는가? 等等을 살펴 볼적에 하나님은 사랑이니 무엇이니 한들 根本的으로 惡이 始作을 하게끔 지어 놓고는 무엇이 善하라 善하라 하고 人間 對하여 한다고 누구나 問題의 焦點으로 말하고 있다. 惡의 主人公은 사탄인 同時에 逆賊된 天使이며 그 存在에 있어서는 누시엘 天使長의 一名의 始作이 있음을 다들 아는 事實이다.
그렇다면 사탄이 根本 逆賊될 수 있게 하나님이 지으셨는가. 그 天使長은 왜 主管못하였는가 重大問題이다. 創世記 三章을 잘 보면 一節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野獸 中에 蛇이 가장 奸巧한지라, 배암이 女人에게 닐러 가라대 하나님이 동산의 果實을 따 먹지말라고 하시드냐”고 무른 것이 배암이 墮落케 하는 始作이었는데, 잘 보면은 배암에게 이 사탄이 들어가서 云云한 句節이 없나니, 그래서 배암이자 卽 사탄임을 알수 있다. 사탄의 存在가 卽 배암으로 表示됨을 알아야 한다. 卽 배암은 사탄이며
사탄은 卽 누시엘이다. 배암이라는 名詞를 비어서 誘引 對象의 表示格에 恰似함으로 이런 表示的으로 使用한 名詞인 것이지 그 自體가 蛇가 아니다.
現 信者들은 其 自體가 배암으로부터 誘引받게 된 줄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벌서 人間에게는 墮落시킬 權限없는 존재로서 사탄은 誘引 路程을 成事코저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벌서부터 萬物에 對한 主管을 附與받고 지었기 때문에 사탄도 이것을 알터인데 主管받을 배암가지고 誘引工作을 하리라고는 生覺되지도 않는 事實이다. 설마 誘引할려면은 더 高貴한 格의 存在로만이 必要함을 우리는 常識的 判斷으로도 明白한 事實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根本眞理路程을 밝히지 아니 하였기에 至今까지 確實한 根據를 잡기 못하고 나오고 있다.
그러나 至今은 때가 다 되었으니 世上에서 成事하여야 할 時期도 왔으니 必然코 歷史的으로 未分明한 此 創造根本과 墮落根本의 出發點을 밝혀야만 하나님의 뜻이 成事될 時期를 알려주는 것이니 반드시 根本을 表示하여야만 한다. 이것이 至今까지 世上을 찾고저하는 하나님은 사람의 根本으로부터 攝理의 根本問題의 뿌리(根)가 되는 것이므로, 至今 世上에는 뿌리를 要하는 末世期라고도 부르는 時期에 當到하였기 때문에 이 事實을 새로 온 天宙에 發表하는 바이다.
本來 하나님은 無形世界에 계셔서 天使 等을 지으시고 다시금 有形萬物實體世界를 하날 無形世界의 그림자 模樣으로 지으시기 始作하였다. 萬物有形實體世界를 지으시기 前에 天使를 지으심은, 하나님의 有形實體理想 世界 創造함을 돕게하는 同時에 여러 가지로 問議와 議論의 相對로 하여 왔든 것이었다. 天使 等 中에는 天使長이 있었다. 그 天使長이 卽 逆賊 軌道를 밟게 된 누시엘이었다. 天使 等을 지으심은 有形實體世界를 지어 하나님의 理想 展開할 世界를 도와주면서 協助的 存在로 지으셨고 그리하여 이 實體
世界와의 理想의 始作을 보게 될 때에 亦是 天使世界도 理想을 扶與받을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創造하심의 根本意義는 天使도 알지 못하였든것이었다.
萬物實體世界가 實現되면 하나님은 勿論이고 天使들까지도 기쁨이 되어 온 天宙는 하나님의 理想 기쁨에 充滿하여 그야말로 理想世界를 造成코저 함이 目的이었는데 目的이 未到達時에 墮落이라는 非公式的 存在가 生起게 되었다. 이는 卽 누시엘의 行動으로부터 始作됨이다. 이 行動이야말로 人間에게 있어서 無限의 苦痛의 根本이 되어 始作하였다. 이것이 卽 地獄分岐의 始作點이다. 卽 罪의 始作이다. 하나님이 本來 萬物을 지으실 때에 그 本意는 하나님의 本形展開면서 本性展開와 모든 各萬物自體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根本을 象徵하는 個性眞理体로 되어 根本眞理体되는 하나님의 本性品의 表示가 充分히 要求됨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唯一이며 永遠이며 不變의 存在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眞理의 根本이며 眞理의 重大三要素란 唯一性, 永遠性, 不變性을 지음 받은 萬物로 具備하여 理想的 生活形態를 保障될수있어야만 된다. 그러므로 萬物에로 하나님의 性品이 表示될수 있는 個性眞理形態를 갖추어 지으셨다. 그러므로 이 個性眞理体로 지으시기 爲하여는 蘇生으로부터 長成으로 長成으로부터 完成으로 되는 階級을 두어서 造成하였다.
한 存在가 完成存在로 될려면 蘇生이 始作을 보아 長成으로 長成을 다하여 完成으로서 萬物을 軌道內를 通하여서 創造받게 되었다. 다시 表示하면 ①眞理에는 蘇生이 있고 長成이 있고 完成이 있다. 이와 같은 時期的 過程을 經過하여야만이 한 眞理体가 完成된다. ② 眞理에는 唯一性, 永遠性,不變性이 있어서만이
하나님이 지으신 善에 屬하여 理想存在物로서 取扱하게 되어있다.
第一 節 어떻게 지으셨나
말삼(言)으로 萬物을 創造하시었다고 하시었지만 그 言이란 名詞 그대로가 아니라 말삼이라는 名詞 가운데는 하나님의 理想의 한 表示体의 證據로 되어 理想을 그대로 딴 存在物로 實現시키고저 함에 말삼(言)의 重要目的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 1장 2절에 言이란 太初에 하나님과 같이 계셔서 言으로 萬物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물건이 言이 없이는 지으신 것이 하나도 없나니라.
이 言이란 意義는 하나님의 理想인 第一存在의 마음的 計劃을 말삼을 通하여 第二存在의 確立을 要한 中媒的 分擔過程 期間이 말삼이 占有한 部分이기 때문에 말삼이라고 表示한다.
例를 들면 사람이 말하는 바는 마음의 實狀이 第二實體實狀을 完成코져 하난것이 中心目的이다. 말삼으로 지으셨다 하는 것은 하나님의 根本理想型을 그대로 萬物實體型으로 展開시켰기에 말삼으로 지으셨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말삼이 實現되는 곳에 理想이 展開되는 것이 根本말삼의 目的임으로 이런 名詞를 代用하신바를 알수 있는 바이며 또 事實的 意義로 되어있다.
말삼으로 萬物을 지으셨다고 하는 것은 벌써 하나님이 直接自己의 体로 되어있는 第二存在性을 알려주는 것을 아러야 한다. 다시말하면 말삼으로 지으섰다는것은 하나님의 根本形態와 性狀을 그대루 벌러 놓았다는 意義가 있단 것을 말하는 것이다. 말삼으로 지으섰다는 것은 相對性을 말하면서 陰陽性을 말하는 바를 알려주는 事實이다.
이말삼이라는 意義는 여기에 始作되는 바이다. 이 말삼에 對한 意義가 只今까지는 解得이 難한 問題이었지만 創造原理를 살펴볼적에 아므런 難한 問題가 아니고 事實的 實體로서 取扱되는 바이다. 이러한 意義를 두고 萬物을 지으섰기에 말삼으로 지으섰다고 宣言하심이다. 創世記 1장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무엇이 있으라 하시면 그대로 된지라 그대로 되안 存在에 대해서 善하신지라 저녁이 되며 아츰이 되니 몇잿날이러라 하신 句節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구절에 저녁이 되며 아츰이 되니 몇잿날이러라 하난 말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면 저녁부터 아츰까지를 하루로 잡고 있는데 그것을 世上的으로 살펴보면은 저녁이 있고 아침이 있으면 날수는 이틀인데 왜 한날로 하였나 하면은 여기에 큰 意義가 있는 것이다.
이 其間은 한 個體의 存在가 創造될 때에 蘇生으로부터 長成으로 長成으로부터 完成까지에 도달한 個體存在가 하나님의 뜻에 合致될때에 善하신지라고 命名하시었다. 그러기에 그 期間은 是完할 수 없는 것이다. 저녁이라 하신바는 한 個體物이 創造하심을 필하시든 때를 두고 말함이다. 즉 한 被造物体를 中心하고 말함이다. 아침이라 하는 것은 한 밤 시기를 지나서만이 오는 바인데 이 아침이라고 하는 것이 이 物體가 完成되어 새출발하는 것을 아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存在物이라도 저녁서부터 밤 기간을 통과치 않으면 안되었었다. 이 기간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通過하여서만이 하나님께서 善하신지라 하시었다. 그러면 이 밤 기간이란 무엇일까 하면은 被造物은 한 眞理体로서 永遠하면서 不變하며 不變하면서도 또 理想型을 表示할 수 있는 存在로 되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한 試驗期間이 즉 밤 期間이다고 한 것이었다. 그러기에 한 試驗期間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結果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 存在로 보게 되어서 만이 善하신지라고 命名하심이다. 이 善이라고 하는 말삼중에는 하나님의 지으신 物件은 永遠할 수 있어하는 完全 對象存在임을 말하심이다. 이렇게 萬物을 五日間 지은 物件은 무엇이나 저희가 밤과 아침 기간을 하나님의 뜻에 알맞게 通過치 않으면 善하다고 命名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善하신지라고 命名받은 바가 創造하심을 받은
萬物의 한 共通的 路程이었다. 그런데 第六日째 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形像대로 사람을 創造하시대 一男一女를 創造하시고』라고 創世記 1장 27절에 있는 것을 보아도 전에 말한바와 같이 하나님 속에는 女性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음받은 人間은 萬物을 主管할 수 있는 存在임으로 創造함을 받은 모든 物件이 通過한 共通的 創造過程을 다 圓滿하게 通過하여만이 主管格 主人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바이니 사람 역시 이 저녁기간되는 지음받음을 必하고는 밤기간과 같은 試驗期間이 있고 그 試驗期間을 通過한 후 아침 기간부터 萬物 主管理想의 根本出發코저 함이 根本目的으로 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萬物主管을 하라는 豫約을 받고 난 후 實際主管으로 한 밤기간인 試驗期間이 必要하게 되었다. 卽 아침期間에서부터 理想期間이었는데 이 밤 期間에 사람은 墮落的 誘引을 받게 되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 밤 期間은 어떤 期間이었는가 하면 少年時期로부터 長成하여 成熟時까지 인지라. 成熟時부터 理想사랑을 할 수 있는 格을 完成할 때까지가 그 밤 期間이 要求하는 期間이었다.
創世記 一장 三一절에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甚히 善하신지라 한 것은 萬物統合하여서 말삼하신 바이지 特히 사람만을 中心하고 甚히 善한지라 함이 아니다. 卽 사람에게 있어서는 밤 時期를 通過치 않었을때에 甚히 선하섰다고 하였기에 그 善이란 것은 豫約的 선이지 實格的 선이란 命名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지으시고 萬物을 主管하라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은 萬物의 全部를 主管할 수 있는 實格付與를 이루고저 함이 밤 期間이 要求하는 期間이었다.
萬物을 주관하려함의 根本目的은 하나님의 理想을 實現化하는 目的이었다. 그 主管할 수 있는 存在 아담 해와는 萬物의 全部를 主管할 수 있는 權限과 그의 資格格位는 어디서 받을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 目的이었는데 이 目的은 즉 하나님으로부터이었다. 그런고로 萬物主管完成者는 하나
님이었었다.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萬物의 主管主人格으로 주신바의 根本意義는 누구를 象徵시키냐 하면 하나님을 象徵시키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根本 사람을 創造하신 意義는 實體萬物 主管者로 지음 받은 아담 해와가 實體를 가지신 하나님의 몸들이었다. 그리하여 天宙를 친히 하나님 自身이 主管코저 함이 目的으로 創造함을 받았다. 萬物의 主人公 되는 實體를 쓴 하나님의 存在가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墮落되고 보니 그에게 달린 萬物은 根本主人을 잃어버린 存在로 되었다.
第二 節 그렇다면 墮落의 始作을 아라보자
아담, 해와를 創造하시기 前에는 無形世界의 天使들은 天使長을 中心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받았다. 그때 天使長 누시엘은 하나님의 여러 가지로 議論相對로 되었고 전 사랑을 받고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들의 生命의 根本이면서도 모든 행복과 要素이었다.
하나님이 無形世界를 지어놓고 天使들로 協助하게 하면서 實體萬物世界를 創造하기 始作하였다. 하나님이 有形實體世界를 지으심은 無形實體의 自己의 存在를 有形實體世界를 통하여 繁殖의 터로 하시고저 하심이 目的이었는데 그 中心理想은 하나님만이 알고 天使長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有形實體世界를 創造하시매 自己 理想의 展開와 함께 기뻐하며 동시에 天使長도 기뻐하였다.
그런데 萬物의 主人公格 아담 해와를 지어 놓으시고 하나님은 아담, 해와에 對하여도 사랑을 하시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서 天使長에 대하여는 대하는 일이나, 사랑하는 일이나 멀리 함이 아니었는데 天使長 누시엘은 아담 해와가 存在하지 않으실 때보다 自己 自體에 있어서는 더욱 滿足感을 느껴주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아담, 해와가 받으니 自己에게 대한 사랑의 減少되는 感을 느껴서 다시금 이런 感도 느끼지 않는 同時에 사람에게까지 가는 사랑을 자기가 所有하려는 마음으로 工作함이 始作하였다. 그때 하나님은 해와를 지극히 사랑하시니 그 해와 自體를 자기 所有로하고저 하여서 天使長 누시엘은 아직 成熟치 않
은 해와를 대해서 誘引키 始作하였다.
創世記 二章 九節에『生命樹와 善惡果樹가 있더라 하시니 무엇인가 하니 生命樹는 (陽)아담을 中心삼고 하나님을 表示함이고 善惡果樹는 (陰)해와를 表示함이다.』천사장이 해와를 보니 아름다우매 과연 하나님이 사랑할만한 존재이었다.
이 해와를 하나님이 사랑하시매 그 사랑을 빼앗기 위하여 해와의 사랑의 실체인 貞操를 所有할 工作을 始作하니 天使長 누시엘은 하나님이 許諾치 않는 行動을 始作하매 그 자체의 마음에는 恐怖心과 原理的 가책이 있었다. 恐怖心을 가지고 해와의 사랑을 所有하려 하기 위하여서 해와의 貞操를 蹂躪하고 보니 누시엘의 마음에 있는 恐怖心과 同時에 天使長의 智慧가 해와와 사랑의 一體를 이루고 나니 해와는 天使長의 智慧 所有者가 되는 同時에 恐怖의 마음을 刺戟받았다.
그리고 보니 해와는 未成熟期에 있었지만 自體의 智慧가 밝아짐을 通하여보니 해와의 자기의 男便은 아담이라 하난 것을 明白히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아지 못하는 아담이 自己의 男便이므로 다시금 男便대로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해와는 아담한테 사랑을 强要하게된다. 그 强要하는 해와의 知覺을 避치 못하고 그의 要求에 應하니 벌써 해와의 恐怖心 아담에게도 生起게 되어 하나님의 法理脫線함을 알게 되니 아담 해와는 나무 아래에 숨게 되는 行動이 始作되여 無花果나무 잎으로 犯行한 部分을 가리우게 되었다.
이리하여 하나님과 直接 사랑의 一體를 이루어야 할 目的이 根本이었는데 非原理 存在인 天使長 누시엘과 사랑의 一體를 받어 非原理的 墮落 始作을 보게 됨이다. 그러나 墮落이란 根本 始作에 있어서는 하나님한테 더 사랑 받고저 하여 行한 行動의 結果가 되었다. 누시엘은 사람에게 가는 사랑까지 所有코저 함이고, 해와는 根本 아담의 사랑을 찾아 세우고저 하는 行動에서 아담을 主管하고 나니 非原理 出發이 始作됨이다. 이 해와의 行動으로 因하야 하나님의 根本目的을 破하는 行動이 始作되었기에 지금까지 人間 世上에는 女人들이 破滅과 壓制와 無視에서 하나님이 미워하는
立場에 있게되어 女子들이 人類 歷史上 不自由 한 拘束에서 나온바도 根本 女人 代表 해와의 失手로 因한 報應이었다.
지금 와서야 男女 平等 權限이 生起는 것은 歷史發展 始作과 同時에 始作을 보아야 할 것이었는데 이와같이 進行 됨은 墮落이 招來한 膳物이었다. 그런고로 男女 平等 權限이 始作됨은 人間이 墮落前 軌道에 설수 있는 동시에 하나님 對하여 사랑 받을 수 있는 한 해와의 完全 存在가 始作을 할 수 있는 때라는 것을 보여준느 동시에 人類歷史는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復歸歷史라는 것을 이 한 事實을 보아도 明白한 事實이다.
이러한 根本이 墮落의 起源点인데 萬一 사람이 善惡果를 손으로 따먹었으면 그 部分을 가리울터인데 이 部分을 가리우심은 이 部分으로 犯罪한 自體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自體이었다. 본래 지음받은 몸에 있어서는 善으로 지음받었는데 어데나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아니었는데 이런 부끄러운 부분의 區別은 墮落 本體部때문이었다.
이리하여 해와의 사랑을 中心삼고 墮落이라는 出發이 始作되어 惡의 基本이 되었다. 善惡果라고 하심은 萬若 하나님의 뜻대로 成熟하여 理想格 愛를 주고 받을 存在로 된 後에 하나님의 神이 아담 마음에 臨在하여서 사랑 成事하였으면 하나님의 智慧를 받아 萬物 主人公으로 完備되는 同時에 이것이 理想이련만, 그와 反對의 行動이야 嘆息치 않을 수 없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해와의 사랑 自體는 하나님의 사랑 卽 아담 사랑 받았으면 至極히 善한 根本을 始作하는 果의 行動이 始作하여 永遠生이 될것이었는데 그 反對의 行動으로 말미암아 惡의 根本의 果의 行動이 해와의 사랑에 달려서 始作한 自體이니 善惡果로 表示한 바이다.
果(열매)라는 말은 씨라는 뜻이다. 善의 씨도 해와와 사랑 一體로부터인데 惡의 씨로 되고 보니 해와의 行動을 누가 嘆息치 않으랴. 그런고로 女人이 至今까지 拘束받고 있는 事實은 그 原因으로 始作된다. 이 拘束이 解放되어 平等時期가 오면 再臨時가 가까워온 줄도 알 수 있는 原因이다.
그런고로 基督敎에서 “三位一體”라고 하는 名詞가 무엇이냐하면 卽 하나님 아담 해와가 完全하게 一體가 되어야 할 中心意義를 두고 말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과 사람과는 夫子之關係로 되어있다. 하날 中心한 三位一體가 惡 中心하고 三位一體가 되고 마니 惡世界인 사탄 世界에도 三位一體가 있는 바이다. 그리하여 사탄은 우리 사람의 父格으로 代入받아 不順, 不信, 不侍의 한 本體로 役事한 셈이다.
新約에 보면은 예수도 不順, 不信, 不侍者를 對하여 요한복음 8장44절에 責望하여 말하기를 “너희들은 너희들의 아버지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들은 너희 아버지의 慾心을 行하고저 하나니라” 하시었다. 이 말씀은 墮落根本의 主人格의 本體는 사탄이라하난 것을 밝히 말한 것이다. 그러기에 배암이란 사탄이를 表示한바를 발기는 것이며 또 해와를 對하여 貞操를 빼앗어 거짓 아버지 格으로 되었다는 것을 밝히 말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怨讐 품에 안겨 있는 것을 알고 다시금 本 아버지를 찾아 모시게 하려는 路程이 구원노정이다.
아담 해와가 犯罪하고 보니 本來 아담 해와에게 注入하여준 하나님의 根本自體인 터 卽 生心을 중심하고 長成하여 하나님이 臨在할 수 있는 터, 自體 卽 아담의 靈人体는 惡을 犯한 自體의 몸에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거두심이었다. 그런고로 犯罪하기 前에 靈人体 自體가 하나님 右便에 계시었다가 第二 아담 格으로 모내심을 받은 그 분이 卽 獨生子 예수였다. 獨生子라는 名詞도 여기에 明白하게 되는 바이다.
罪를 짓기 前 아담의 靈이 예수의 靈에 注入받아 오심이 根本目的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罪를 짓기 前 아담의 完全 成熟한 存在로 나타나서 福音을 始作하심은 무슨 目的이냐하면 잃어버린 子女들을 다시금 찾아서 墮落前 하나님의 자녀로 찾아 옮겨 놓고자 함이 根本目的이다.
그런고로 오날 人間은 원수의 몸에서 拘束받고 참父母를 잃어버리고 사니 그 良心的 苦痛은 이 事實을 알려주는 間接的 刺戟
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의 품으로 옮겨 놓아 하나님을 根本아버지로 直系血統關係를 맺지 않으면 안될 重大 責任이 남아 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오셔서 成事를 完成치 못하였기에 再臨의 要求가 되게 되었다.
그런고로 우리는 惡의 血을 받았으니 養子의 關係로서 根本血을 받아서 蘇生되어 創造理想인 父母를 復歸함이 우리 人間의 全目的이다. 嘆息할바는 養子와 같은 存在로된 우리들이 生覺하면 苦痛之事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이 惡으로 因하여 始作되니 이런 名詞가 生起였구나. 우리 根本 아버지는 永遠의 아버지이며 사랑하여 찾아주신 아버지시다. 이 아버지를 아버지로 알고 모시며 또 어머님을 모시는 그 時期 卽 地上의 再創造理想이 始作되는 時期이다. 이 時期를 알아서 아버지 어머니를 다시 찾는 그 기쁨이 온 天宙를 찾고자 함의 根本目的이다. 이 目的은 再臨時부터 始作된다.
第三 節 웨 墮落케 하였는가
하나님이 本來 사람을 지으심은 個性實體가 完成하여서 永遠할 수 있는 한 理想存在를 保存할 수 있도록 지으셨는데 그 時期까지가 사람에게 있어서는 成熟時期까지가 標準長成하여 永遠하신 存在의 터를 確保함으로써 하나님의 實體 사랑을 주고저 함이 目的이다. 그 期間까지 長成을 通하여 完成까지 到達케 하심은 直接 하나님이 主管으로 하심이 아니고 그저 被創造物原理를 通하여서 完成 成熟段階까지 到達케 하시도록 지으시었기에 하나님은 原理 主管格으로 계시어 그 結果를 보아가면서 하나님은 기뻐하시었으며 빨리 理想 減筆함을 至極히 要求하였다. 그리하고 하나님의 사람 對한 理想은 卽 하나님의 理想은 自由理想을 標準하시고자함을 지으셨으며 그 理想에는 조금도 損失이 없도록 지으셨다.
그러므로 그 自由理想을 찾어 成事할 수 있는 標準軌道는 善을 中心하고 하나님의 뜻을 成事할 수 있는 존재의 터, 生心이 사람 自身에게 있어서 賦與받은 根本体 터로 되었다. 그러므로 사람이 完成期까지에 到達할 때까지도 하나님이 이러구 저러구(여러 모양으로) 自由理想完成을 간섭하지 않아도 뜻이 合當할 수 있도록 良心과 生心
은 그 中心 뜻(善)을 直向하여 나아가도록 志向하여 가게끔 原理지으셨기에 간섭 主管하지 않었다. 그것은 第一存在의 完成을 無視하는 것인 同時에 原理를 어기는 것이 됨으로 原理完成하여 뜻 成事코저함이 根本으로 됨이었다.
만일 하나님이 그 自體를 直接 主管하여 사랑하지 않었든가 하면은 하나님은 原理를 未完成하여 個性自體를 未完成한 것을 사랑하여 一體的 理想을 成事하였으면 未完成体의 不完全的 事實이 됨으로 그 根本 原理基準까지를 기대리심이 中心의 意義이었다. 만일 未完成時에 사랑 받으면 사랑 받는 그 자체는 사랑만을 要求하여 根本個性原理完成을 할 수 없는 事實이다. 또 原理規定을 反하는 것이므로 그 自體나 사랑하는 自體가 즉 理想 사랑을 成事할 수 없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을 至極한 사랑 理想形體를 完成코저 함이었든 것이다.
사람이 完全한 하나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存在로 成熟하였으면 原理的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完全 美로서 보여질 수 있는 同時에 그 自體들의 思慕함이 直接 하나님의 自體에로서 通할 수 있는 作用의 始作을 볼 수 있게 지으셨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계셔서 사람이 갖고 있는 사랑이 완성되면은 自然的 原理로 사랑할 수 있는 刺戟을 아러서 사랑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卽 하날 사랑은 陽이면서, 完全陰的 사랑 對象本體요 사람이 思慕하는 사랑 心의 起動의 目的은 基 相對存在이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는 하나님은 原理主管格으로 계시었다. 그 時期에 사람들의 墮落이 始作되었다. 사람도 自由軌道로 天使長도 自由理想軌道 世界의 原理로 活動하면서 살 수 있는 自由存在들이었다. 그 自由 理想 中心한 自由成事世界를 造成하여서 基 創造 全自由理想을 完成하기 爲하여서 個性完成과 自由体 理想世界 存在들이 하나님의 根本 理想이었다. 그러면 自由理想을 完成하여야만이 目的이 된다.
그러므로 自由理想을 基臺로 하고 基 우에다 사랑 理想 原理 創造体들이 永遠存在하여 하나님의 根本사랑 理想을 表現化하고저 함이 目的이었다. 그렇기에 人間世界에서 自由찾기 위하여 야단하는 그 原因은 墮落한 緣故이다.
이 自由를 찾으면은 理想自由를, 自由理想 갖고 찾으면은 사랑으로써 理想사랑으로 歷史는 必然的 軌道를 밟게 될 것이다. 그것은 原理를 보아서도 理論的이 가져다주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自由와 사랑 理想이 한 基臺로 하여 個性完成을 要하는 곳으로 人類歷史가 흘러 나가는 것의 始作을 보는 이것은 復歸로 되는 事實을 알려주는 증거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웨 墮落시켰는가 하고 말한다. 사람들이 自由舞臺의 世界에서 自由生活하면서 完成點 到達時까지는 原理主管이니, 그 自體들의 行動을 直接 간섭치 않고 良心과 生心을 通하여 本路線確保를 要하게 하였기에 사람으로서도 하나님을 直接 부를 수 없는 原理的 距離를 갖고 있었다. 그런고로 부를 수 있는 程度는 完成 사랑을 成事하여야만이 生覺하여도 하나님을 알게 되며 應하게 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直接的으로 알리려는 사람 自體行動이 나타나지 않고 그 行動의 結果만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고로 사탄의 行動에 動하는 基時에는 사람이 良心的으로나 生心的으로나 合하여 行動하여서 하나님이 直接 刺戟할 수 있는 行動으로는 아직까지 未到達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行動結果를 보아 基 墮落된 事實을 아시게 되신 것이었다. 이렇게 지으심은 完全한 사랑을 하기 爲하여 間接的 距離性을 두신 것은 極에 계시는 하나님이 사람도 有形體의 軸의 存在로 서 있어 서로 合體할 수 있는 電氣原理와 한가지로 지극히 큰 사랑을 始作코저 함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라고 한다면 사람 사랑 (-)는 直接 對할 수 있는 것으로 存在 完成이 未完成한 期이니 墮落行動들은 (-)에 작용함이었다하여도, 直接的 感應되지 못한 것과 같이 지으신 것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自體로서는 極에서 軸의 固內를 通하는 사랑을 하시고저 하여서 지었기에 萬物自體들의 사랑까지 人間을 通하여야만이 連結되게 되었음을 우리는 알어야 한다.
이 사랑의 未成事가 墮落이면서 善에 存在 外의 存在인
非原理存在가 法理舞臺로 出現하여지게 되니 善과 惡의 分岐點을 成事하고 말았다. 그러나 原理的으로 사람이 中心이니 이 사람의 繁殖發展과 함께 歷史는 始作되었다. 그러나 發展하는 世界의 歷史의 軌道는 自然界의 原理的 움직임 우에 그냥 始作되었다. 그러므로 世界는 惡에 屬하는 主管本意 아닌 非公式 主管軌道로 無目的 世界로 달리는 例로 시작되니 그 世界의 生存한 사람은 어찌 安樂과 平安이 있으랴? 이렇게 됨바는 사탄의 工作이라고 至今 알게 될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를 他目的處로서 끌어온 基 中心을 아지 못하였기 때문에 人生은 無限 苦痛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됨은 創造本意 아니매 하나님은 本意대로 다시금 찾어 創造本意 理想体하로 恢歸고저 함이 역사를 通하여 하나님의 攝理의 한 路程이다.
그런고로 사람 中心하고 善神과 惡神이 對立을 始作한 結果는 歷史 發展史를 支配하게 되었다. 卽 사탄은 怨讐 父母格으로 사람을 主管코저 함이고 하나님은 根本 子女를 찾고저 함이 目的이다. 이것을 안 우리는 어찌 아버지 어머니 앞에 悔改치 않으랴. 이것이 이 基督敎의 悔改의 根本意義다.
그러므로 根本悔改하지 않을 내(우리) 存在가 至今 悔改하는 것은 참 父母를 몰라보고 박대함의 心中으로 痛憤한 事實을 알게하는 結合의 情境이다. 이 時間의 기쁨이야 무엇으로 살수 있을 건가. 그러구보니 根本萬事는 平安으로 原理로 始作되며 良心的 解放의 시작이요, 참 기쁨의 始作이다. 새 福音 中心이다. 이같이 세상은 惡이 먼츰 始作하였기에 그 뒤를 이어 善完成을 이루고저 함이 目的하는 하나님의 뜻이요 또 하지 않으면 아니될 義務이니 旣必코 成事 時까지 하날은 勝利하고야 만다.
그러므로 世上은 至今 惡이 主管하는 時期이니 惡者勝 世界에는 善者들이 많이 밟히고 있다. 세상에는 거짓것이 먼츰 왔다가는 것이 世上이 보여주는 至今 現社會의 實狀이다. 그 후로 善이 始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原理로 지음받은 온 天宙는 이 뜻 成事에 努力하고 있는 것을 現基督人이 알지 못하는 것이 痛憤之事이다.
惡이 始作하였으니 그도 原理路程을 밟아 結實하여야만 된다. 그런고로 惡의 完成時期가 卽 基督敎의 末世時期인 再臨時이다. 世上이 절대로 없어지는 바가 아니고 世上에서 地上天國을 完成하여만이 根本目的이다.
그런고로 오시는 主도 完成主로 사람 몸을 쓰시고 오신다. 그것은 原理보아도 알 수 있는 바이다. 卽 肉身完成을 못하였기에 根本을 찾아 맞추는 時期가 末世며 審判時期이다. 卽 根本 사람, 아담 해와를 찾어야 되며 善을 찾어 터로 세우여야 되는 時期가 末世다. 그러니 惡은 自己本體의 路程으로 向하기 始作하는 時가 卽 末世다. 以上의 原理를 살펴 볼적에 하나님은 原理를 통하여 萬事를 成事코저 함이 根本意義이다.
그러므로 사탄까지 强制屈服을 要하는 것이 아니고 自然屈服을 要하며 六千年 歷史를 나오심은 全原理創造世界를 完全히 찾고저 함이니 그러야만이 原理創造世界 創造 理想体를 始作할 수 있으니 사탄까지 自由行動케 하심을 잘아러야 한다.
聖經歷史를 通하여서 사탄이 하나님께 대하여 말한 것이든가 참소함이든가 예수의 시험이라든가 等等을 보아도 그 自由許諾 理想舞臺를 根本意義로 하였기에라는 것을 아러야 한다. 또 바로를 강팍케 하심도 完全屈服과 自由屈服을 要하신 까닭이다. 또 이스라엘 百姓을 그 結果的 行動 如何를 갖고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신 事實은 人間이 根本 自由行動 結果를 主管함을 알려주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全宇宙理想과 天宙理想을 完成코저 하여서 至今까지 苦心하시는 그 自體를 우리는 어떻게 對하여야 하는가? 하나님의 心情을 아는 우리들에 있어서는 極心을 다하야 根本 創造理想을 完成하여야 할 責任을 各自가 다하여야 할 것이다.
第二 章 하나님은 나를 알므로 알 수 있음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根本에 對하여 까지 알아보려고 하고 있다. 果然 其 自體가 明白하여서 天宙의 全部를 圓滿하게 理解코저 함에서 始作이라고는 할 수 있는 事實은 自明하다. 사람은 하나님에서 始作하였으며 萬物도 亦是 하나님부터라고 是定할 수 있지만 根本되는 하나님은 如何하게
始作하였으며 그 前에는 무엇이 있었는가?라고 묻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하나님의 存在의 根本보다도 實際問題는 第一 가까운데 있는 自己가 問題이다.
現實 自己의 存在의 根本을 안 後에야 다음 問題 하나님으로 옮겨지여야 할 事實인데 自己의 存在의 根本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存在의 如何를 말한댓자 其 自體는 例를 들면 公式의 根本單位로 될 自體를 아지 못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면 單位數로 있는 自體의 問題를 確定하여야만이 其 公式의 第一步 應用의 始作을 繼續하여 廣大한 基本公式과 連結도 지을 수 있으면서 其 自體의 公式도 勿論 明白하여지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먼츰 한 單位體의 公式 根本과 같은 立場에 서 있는 自我의 한 存在만 確定하면은 其他의 存在決定은 如實한 結果로서도 推測하여 그로 미처주는 根本自體를 把握할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은 自己들이 有나 無나 하는 것을 먼츰 疑心하여야 할 事實이 根本으로 되어야 한다.
그리하면 自己가 있다면 무엇 보아서 알 수 있는가. 良心보아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感覺을 보아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體型을 보아서인가 하는 데에서 問題는 始作되는데 良心과 感覺과 體型이 有라고 하면은 무엇을 標準잡고 말하는가를 다시금 吟味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有라고 하는 것과 無라고 하는 것은 最初의 分岐點을 무엇으로 잡고 있는가가 生覺할 重要問題이다. 有하다면 相對인 無하다는 것을 聯想시키는 事實인데 사람들이 有하다는 그 自體는 무엇을 標準하고 始作케 되며 그 始作은 어느 限度까지 擴大하고저 하는가. 또 그와 反面에 無하다는 것도 어느 限度의 無를 規定하고저 하는가가 問題이다. 無하다면 實體 無한 存在는 始作點을 잡아 주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고로 사람 自體들이 無하거니 有하거니 하는 것은 어느 한 存在를 벌써 有에 處케하든가. 無에 處케 하든가의 實在 存在를 規定지은 위에서 말하난 바를 아러야 한다. 내가 있다고 하는데는 無한 實體에 對하여서 成立되는 名詞이다.
그렇다면 無는 어디에 한 可否存在의 根本決定을 지어주는 한 中心存在는 무엇인가가 要求되는 바인데 이 存在는 自己를 前提條件으로 規定한 基盤위에
서 始作하였기에 有無의 決定的 判決을 내리는 行例가 只今 사람들이 말하는 凡例의 事實이다. 그러므로 이 事實은 自己를 中心하고 있는 事實을 生覺치 않고 他 自體에로부터의 始作點을 보고서 하는데에서 여러 가지 存在의 確定을 알 수 없게 하는 것이 事實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自己가 한 無限有와 無限無와의 中間存在이며 한 公式單位體型이라는 事實을 明白히 하는 것이 今日 사람들이 질머진 課業이다.
그러므로 有하고 하는 것은 自體가 良心으로나 感覺으로나 體型上으로나 實定할 수 있는 事實들을 否定 못함으로 有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有自體인 自我는 至今 無의 始作을 결정짓는 基本行動으로 始作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런고로 無를 決定한다면 그 決定한 自體가 無의 最大値를 可決하였는가 無에 대한 程度는 如有인가가 疑問되니 그 無라고 하는 그 點은 有와는 어떤 距離를 갖고 있는지 大端한 重要問題다. 卽 無라고 하는데는 우리가 보고 보이지 않는 程度인지 또 感覺할 수 없는 程度인지 體型을 構成할 수 없는 程度인지 그 立場이 明白한 點은 如何한가 하면은 勿論 이 實在 感覺內에 屬하는 데서만이 有無의 出發點을 잡고 있다.
그러면 사람이 有라든가 하는 것은 實體로서만이 問題하지말고 無하다고 하는데에 있어서 그 無는 우리가 無라고 하는 最大値가 아니고 有와 聯關을 가질 수 있는 存在의 繼續体로서 우리 感覺內로 感觸할 수 없는 範圍 外에 있는 存在라는 것을 말하여 주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이 無라고 하는 것은 더 적은 無에로 나 갈 수 있는 中間存在임을 알려준다. 나를 有로하는 自體를 數로 表示하면은 ① 이라고 할 수 있다면 無하다는 것은 零(0)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하나 ① 數字를 보아서 零이 있다고 至今 數學世界에서는 보고 있지만 이 零이라는 存在가 數字上으로는 表示되나 實際에 있어서는 零이 無가 아니고 無를 象徵하기 위한 抽象적 存在와 같은 것이라고 至今은 말할 수 있다. 卽 無에는 無限無를 限定 못하니 그 無의 中心이야 零가지고는 表示도 못한다. 그런고로 零을 잡아보면 零이라는 것은 數字上 理論上 存在라고는 認定할 수 있으나 數字上으로는 零이라고 하는 零點이 있는 位置에서 一般的으로
알려지고 있는 零과는 判異한 自體이다. 그런고로 零이라고 現社會에서 쓰고 있는 것은 有의 小形体의 것이며 더 小로써 無限大하여지는 存在의 中間自體임을 否定 못한다. 有와 無의 限界線은 즉 하나이다. 그런고로 이러한 나를 잘 알려면 無限有의 始作이면서 無限無의 始作의 基礎를 알어야 할 重大한 問題가 生起는 바이다. 하나와 零이 同一點이라고 보니 無限有와 無限無의 存在의 第一 中心 據點이 卽 하나와 零線의 境界點이다. 그러므로 나 하나는 無限有의 始作의 存在며 極小有의 存在를 알고 있는 바이면서 또 無限無의 最大 存在라는 其 立場을 取하고 있는 自體가 卽 ① 하나인 것이라는 존재다.
하나와 零은 境界를 定치 못함.
數字上으로는 零과 ①하나와의 相異 位置를 갖고 있지만 實際에 있어서는 同一點을 離脫 못하는 共通 路線上의 存在다. 그러므로 實際上으로는 1=零이라고 할 수 있는 存在들이다.
1= 零
1= 絶大値數의 基本數이며 有의 基本存在다.
零= 無限無의 絶大値數면서 有의 無限小數의 中間存在다.
그런고로 問題되는 바는 나 한 自體가 重大 問題인데 나는 至今 어디서부터 始作하여 잡은 存在라고 하고 싶은가? 그것은 各自의 自由로 맡기기로 하자. 卽 ①에서 始作하였으면은 그 하나가 갖고 있는 存在의 價値價를 全部 認識하여만이 되지 않겠는가가 先決問題다. 卽 無限大와 無限小의 問題보다도 其 中間自體인 하나의 存在의 規定이 큰 難關逢着이라 아니할 수 없는바다.
이 하나되는 自我를 알면 無限大에 對한 位置부터 無限小의 위치가 갖고있는 中間存在에 對한 全部를 알어야만이 自己에 대한 確實한 規定을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그 存在를 全部 밝혀서만이 其보다 더 큰 存在에 대한 根據를 解決할 資格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사람들은 自己가 있다고 하여 놓고 無한 事實이니 無하다느니 하는바는 卽 數世界에 있어서 零이라하여 絶對無의 存在를 決定한 듯이 하고 있는 바와 同一한 生覺으로 되어 있는 바와 한가지라. 없다할진댄 無限小에 까지 倒着한 其 世界가 自己의
決定 範圍 內에 들어서게 될 때에는 無에 對한 結論은 價할것인데 그것 조차 生覺도 못하고서 그저 無라면 自己가 無라고 하는 바가 그냥 無로서 萬事를 解決하여주는 中心 存在로 되는가. 그것은 至極히 어리석은 行動이다. 有라할진대 其 存在의 價値는 絶對有까지 繼續 存在하고 있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有로 하는 自己와 無의 中心 立場의 自己에 대하여서 알려고 할적에 第一 큰 問題의 中心點이다. 卽 有로 내가 있어야 되며, 無로 내가 있어야 된다. 問題의 決定的 存在는 卽 自己이다. 이 自己가 至今 解決의 수수께기가 되는 根本問題다. 그런고로 먼츰 天宙의 基本單位라고도 할 수 있는 自己를 解得하여라. 그렇게 하므로써 딴 存在가 問題로 되는 바이다. 自己를 明白하게 解決하면은 其 以上에 대한 聯關的 事實에 對하여서는 認識할 수 있는 事實이다. 問題는 自己 하나 알고보면 하나님의 存在 有無에 대한 問題는 크게 논할 問題도 아니다. 그런고로 알어야 한다는 하나님에 對한 根據의 如何는 먼츰 被造体인 自己의 根據에 대한 實感性을 먼츰 알고 나아가면서 探究하면은 第一存在의 確實性은 自然的 意識存在로 계시는 것이다. 그것의 明白한 體驗을 實行하여 찾아보면은 其 自體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은 하나님은 絶對有에서 絶對無의 基本存在이므로 어느 面에서도 單位的 路線에서만 서서 存在를 찾으면 그 存在는 自然的으로 體感된다. 그 體感으로써 하나님의 存在에 對하여 確實한 根本問題를 解決할 수 있는 바이다. 왜냐하면 無限大에서 無限小에 通한 共通路線으로 흐르는 無限大에서 無限小의 힘을 보아 이 힘은 公式과 같은 原理를 通하여 連結되고 있으며 其 어떤 中間立場에서라도 自己만이 그 힘과 感應할 수 있는 聯体로 平衡線上에 서게 되면 無限大에서 無限小에 흐르는 그 感智를 통하여서만 알 수 있는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無限大에서부터 無限小에까지 聯關하는 中心 動力体이다. 그러면서 永遠을 標準하고 始作하며 나아간다. 그런고로 사람은 其 中間存在다. 이 中心存在가 完成하여야만이 天宙的 基本原理는 圓滿化를 가져오게 된다. 卽 하나님은 無에서 有에로
作用하고 사람은 有에서 無에로 授受作用 圓滿化를 取하여만이 圓滿存在으로 되는 것이 天理이며 創造原理다.
+ (無限有實體世界) +
사람
① ①
사람
ⓞ ⓞ
하나님
– (無限無 無形世界) –
이 表示圖를 보면 사람은 單位的 位置에 居한다. 사람을 通하여만이 宇宙와 天宙理想이 完成하게끔 지으셨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몸으로 지은 特有의 存在로 되어있다. 有(+) 無(-)라고 表示하면 사람은 (+)(-)의 中和体로 되었다. (-)는 靈으로 (+)는 肉體로서 合體되어 있다. 사람은 靈과 肉의 境界線을 定치 못한다. 그런고로 사람은 靈과 肉身이 合하여야만이 完全한 사람이다. 우리는 靈을 長成시켜서 靈人体를 完全 造成하면은 無의 世界까지 通할 수 있는 中間存在体다. 그런고로 本來 사람은 靈人体를 完成하여야 한다. 그러면 靈人体라면은 어떠한 構造로 되어 있는가 하면은 靈體, 生命體, 生靈體로 되어있다. 肉身에는 肉體와 肉心으로 되어 있는것과 마찬가지로 靈人体에는 生心을 中心하고 靈體를 附殖할 수 있는 基本 터를 이루며 長成하여서 生命體로 나아가 그 生命體가 되어만이 하날에 한 長成體를 가진 自體로서 生活할 수 있는 것이다. 其 生命體에다 生靈體를 이루어야 本創造理想인 靈人体로 된다.
그런데 至今까지 墮落되니 人間들은 靈體의 根本되는 生心까지 保有하는 存在가 없다하리만큼 墮落되었다. 이 人間들에게 靈體를 構成시켜서 長成하여 生命體까지로 目的하고 歷史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信, 信仰生活을 培養하는 目的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오셔서 生靈體까지 完成코저 하였으나 不信하고보니 未完成하여 生命體級까지 全人間을 長成시켜야 할 責任使命 部境이다. 그 후 生靈體는 完成體인데 再臨時부터 始作코저 함이 目的으로 남아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墮落치 아니하였으면 肉身의 完成과 함께 하나님의 사랑 中心하고 生心은 그 本路程으로 靈人体 構成을 同一時에 聯合하여 完成에로 나아갈 人間들이 墮落으로 因하여 全人間에게(하날人도) 區分하여 長成시켜서 完成의 模樣으로
되었다. 第二次 예수는 長成 生命體까지 第三次 再臨하여서 完成體 生靈體를 注入시켜서 理想 靈人体를 造成하고자 함이 根本으로 되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其 始作 할터를 닦도저 하니 舊約役事가 있고 新約은 그 터위에 長成하여 全世界에 터를 닦고 드 위에다 다시금 完成의 理想 生靈體를 땅과 함께 하날까지 聯殖시켜 理想天宙 完成 目的으로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舊約時期부터 絶對 뜻을 中心하고 人間들이 侍奉하였으면 直接 뜻을 中心하고 터를 세우면서 理想 展開코저 함이었으나 不信으로 因하여 그 目的 未達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要求와 其 救援要求가 남아지는 뜻으로 되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救援攝理는 사람을 찾아서 原理想 靈人体를 恢歸하여 本 創造理想을 成事코저 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絶對有의 存在이며 絶對無의 主人公이 卽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人間은 어느 方面으로든지 極을 찾어 가면은 갈수록 하나님에 對한 各要性을 切實하게 感覺되게 하는 것이 現天宙 萬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全部가 天宙의 公路를 正當하게 설수 있는 自我를 찾으면 全體에 對한 中心問題까지 解決을 가져오는 事實은 創造하신 萬相을 共同한 中心에 屬하여 있기에 어느 곳으로 通하든지 其 中心은 其 結局의 終點을 찾으면 同一한 其 根本原理를 通하여서 作用이 始作되어 있기에 自我 自身의 根本原理로 설 수 있는 基本을 찾으면은 全部의 中心인 하나님에 對한 問題는 自然的으로 알게된다. 또한 하나님이 根本存在 하심은 實感的으로 自覺할수 있게된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自己가 없다고 하면은 自己 自體로서 自己도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自己 自體에 對하여 有라하면 自然的 有하신 그 根本存在 有를 豫定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고로 自己가 有하면은 自己가 有하기 前에 父母의 有가 찾아지며 父母가 有하면은 先祖의 數 十, 數百代에 繼續하여서 至今 自我가 存在함을 알 수 있다. 이렇듯이 有에서만이 有가 시작된다. 無에서 無이지 有할 수 없는 것이 天理다. 現科學은 이 天理를 떠너서는 始作과 發展을 못한다. 그리고 自我 이후에는 有할 수 있는 後孫에 대한 有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至今 보이지 않는 後孫 無라고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있다면 其 自體는 原理의 合格體로 完成格의 存在 못됨을 말하는 것이다. 原理的으로 보면 其 後孫은 있게끔 有에서부터 모두 萬相이 지어지였기 때문에 後孫은 必要적 한 公理路程으로 有함을 알 것이다. 보지 못하였다고 其 있어야 할 其 存在들을 否定하면은 其 自體의 否定함에 根本原理的 解決을 주는 否定이 되는가? 그렇지 않음은 누구나 다 잘안다.
그런데 無라고 否定한다면 그 存在는 天理根本을 反逆하는 行動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고로 天宙萬物은 全部가 原理的 有에서 始作함으로 有라고 하는 基本點에서만이 萬原理와 理致의 符合을 볼 수 있으나 無라고 하면은 其 根本을 有에서 展開키 難한 原理的 結論으로 된다. 그런고로 至今 自我라는 自體는 有無의 한 中心의 存在면서 그의 作用的 目的으로 有를 全的으로 相對物로 하기 위한 行動으로 生活하는 바는 잘 體得하는바의 事實이다.
그러므로 나 自身이 有라는 原理的 存在라는 것은 根本的으로 是定하는 바이다. 無라고 하는 存在는 事實體 有의 世界에서는 自我로부터 表示로 되어 있다. 그 自我가 卽 有無의 根據點으로 하고야 有無라는 말을 할 수 있는바이다. 그런고로 나는 有에 屬하는 同時에 無에도 찾어가는 中間存在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中間存在로서 되어 있는 나에게 有無의 根本되는 하나님의 存在에 對하여 疑心하는 것과 동일하다. 그런고로 自己가 有無의 根本의 位置이니 卽 創造的 原理로 보아 하나님과 直接 同一點線에 有하난 存在임을 體得하여야 된다. 自我는 有無의 中和体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中心하고 계실 神性은 나와 中和性的 關係로써 有에서 無의 世界에 展開의 路程을 通하게 되어있다.
우리가 萬一 無하다고 하는 곳에 處하여 있어서 認識한다면 나에게 有에 對한 認識은 勿論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認識할 수 있는 環境과 그 位置를 갖고 있다는 그것 스스로가 벌써 인식시켜주는 有에서부터만이 始作되는 바는 至今, 누구나 잘 알 것이다. 卽 至今 科學世界에 있어서 모든 原理와 公式을 利用하여 應用 有에로 展開케 하는 것도 즉 根本 有가 있는 原理가 存在함이 有하다는 原則위에서 만이 始作하여 目的達成으로 進級됨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科學이 發展할 수 있는바도 前 有的 그 原理的 保有가 基本되어 그 基本
上에서만이 그 目的 表示的인 發達된 存在를 볼 수 있는 것은 事實이다. 그런고로 無에서 有라는 原理는 本來부터 우리가 세울 서 없다. 無라면 無이지 有가 되겠는가? 그러니 唯物論的 原理도 自然 그 末路는 未解決로 되는 것이 原理다. 無가 되는 까닭이다. 卽 始作이 無니 末도 無로 結果한다. 無하고하는 存在를 세우기 위하여는 前有 存在를 세워 놓고야인데 이 先有存在는 卽 主觀的으로 보면은 自己, 或 客觀的으로 보면은 他物이나가 벌써 先有한 事實을 決定지어 놓고 말하는 바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의 根本은 有에서 始作하였다는 바를 아러야 한다.
그런고로 사람은 根本有라는 存在부터며 萬物의 有도 亦是 同一한 바이다. 어떤 作用의 始作은 有의 始作으로만이 始作된다. 認識할 수 있는 모든 關係的 感覺性도 存在하여 나에게 미치고 있다. 作用은 根本的 有의 作用이 延長化된 存在임을 알 수 있다. 無라는 占有位置는 視覺또는 感覺性 外의 存在를 두고 말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우리 自我인 有가 感覺하는 그 感覺的 作用은 卽 有에서부터 波及이 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視覺으로 볼수 있는 圈外의 有의 存在하는 그 自體와 卽, 하나님과 우리는 聯關的 한 位에 속하여 있는 良心의 旣存有의 存在로부터 우리에게 作用되는 感覺을 알 수있는바이다.
그런고로 사람 한 나는 有無의 中和物로 되어 있다. 그런고로 우리가 즉, 無我라는 位置를 찾아 들어가면은 中和体에서 陰陽分도 같은 作用을 이르키는 것과 한가지로 無認識에로 나가면 相對的 絶對有에 比例되는 絶對有의 힘과 作用의 相逢을 본다하는 것도 아러야 한다. 사람이 無我에게 찾아들어 가면은( 즉 感覺無와 認識無에로) 相距的 無의 位置에 對比되는 有의 感覺과 認識의 境地는 타나난다. 이것은 修養探中에서도 많이 體驗하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고요하다는 그곳을 찾으면 本心의 作用舞臺를 딴 無境에로 存在하는 絶對有의 感覺을 體驗하여 새로운 神奇한 認識權을 찾는 것이 自然的으로 表示되는 듯이 되나 그 原理는 내 自身들의 理想覺性을 取할 수 있으며 그 滿足感을 取할 수 있는 根本理想이 有할 수 있는 根本에 屬하여 있는
存在이기 때문에 새로운 快感이 나와 기쁨의 表示로 展開시킨 것 밖에 지나지 않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이런 것을 볼 적에 우리는 有에서 處하여 있으니 有의 對한 感性이 各面에 感化되어 있는 것과 같은 理由로 되어 있기에 對 有에서부터 接하여 주는 減力에 대하여 振動感을 느낄 수 없고 또 外力 減力에 對하여 銳敏하게 使用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修養이니 祈禱니 하는 것이 미처주는 外力 減力에 대비하여 振動할 수 있는 對 減力의 存在의 位置를 取코저 하는바가 原理로 되어있다. 그러기에 無의 境, 고요한 곳을 要求한다. 그런고로 누구나 하나님이 有하다면은 無我의 境地에 찾아 들어가면 超自然 減力 絶對有의 境地가 있다는 것을 体證한다. 그것은 卽 하나님이 有하다는 것을 아는 同時에 그 根本 有의 作用과 合致한 點에 내가 서면은 내 自體에는 超自然 作用의 減力과 實感이 내 現自我와 連結됨을 알 수 있다.
그런고로 佛敎의 無我境이라고 하여 찾는 一理도 여기에 있는 바이다. 例를들면 科學世界에도 公理나 公式같은 것도 間接的으로 그 自體를 接하게 하는 것과 같은 바로 되는 것을 알어야 한다. 그런고로 이와같이 된 것은 墮落性 받은 人間임으로 이것이 要求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良心과 生心의 基本은 하나님이니 하나님은 萬物의 絶對單位의 根本이면서 原理의 中心이며 根本이며 모든 萬相의 單位體 中心이니 이 中心點인 하나님과 直接 通하게 되면은 絶對單位力에서 支配받고 存在함으로 生心의 長成体인 靈體를 가지면 其 單位를 直接 所有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 單位야 絶對單位 하나님의 單位에 한 部分的 基本으로 있기 때문에 萬物의 모든 根本을 알 수 있는 곳으로 展開시킬 수 있는 存在가 즉 사람이다. 그런고로 道通이라고 하는 것이 이러한 根本사람의 創造本境을 體得할때에 느끼는 體驗이다. 이 創造本境을 體得하는 同時에 하나님이 하시고저 하시는 未來의 모든 事實도 알어야 할 사람이었는데 墮落으로 因하여 未知의 存在로 處하게 되었으나 그 根本 本性心은 墮落性을 받은 肉身을 넘어서 創造本境을 隋時로 體得하려함이 根本 要求로 되어있다. 사람이 이 目的을 可能하게 못된 墮落의 存在임으로 肉身의 活動의 減力이 停止狀態에 處하는 때를 타서 本性心은 無限大의 創造本境을 찾아 活動하려고 한다. 이 事實에의 表現이 사람에게 夢示로
나타나 未來의 事實을 豫告하는 것이 卽 夢示라 한다. 그러기에 本來, 사람은 自己들이 生함의 目的과 해야 할 目的과 살어야 할 目的을 알어야 할 것이었는데 未知에 處하여 있기에 本性心은 이 어느 部分을 夢示를 通하여 알게하여 주는 것이다. 墮落이 없었드라면 우리 人間은 根本的으로 알고 살수 있는 存在들이었다. 그 肉身減力이 활동할 때에는 例를 들면 흙물을 그릇에 담았는데 그것을 휘저어 놓을 때와 한가지 理由다. 그러기에 肉身活動의 減力이 寢中에는 흙물이 까라앉어 맑은 물이 위로 떠 오르는 것과 같이 우리의 本性心도 肉身減力을 넘어서 本性路程에 活動이 始作됨으로 夢示가 보여지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리 本心은 創造本境 世界를 通하고저 하는 것이 本 創造性品이다.
그런고로 사람은 實體 有의 世界에서 無形의 世界로 連結을 가져야만이 되게 지음받았다. 그러기에 나를 有로하면은 有의 끝은 하나님이며 無의 끝도 하나님이다. 다시말하면 無의 끝은 有요, 有의 끝은 無이다. 그리하여 사람을 中心삼고 지음받은 天宙는 한 同路를 갖고 있다. 例를들면 우리 血管을 보면 動脈이 心臟에서부터 漸漸 작아져 細管까지 屬한다. 끝은 없어지는 程度를 向하여 世紛되어진다. 그러면 細管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끝은 딴 同路인 反對作用 路程으로 通하여 根本으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한 作用体를 構成하여 한 回路를 造成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도 亦是, 이 表示와 같은 것이다. 血管이 작아진다고 하여서 無하여진다고 結論하는 것과 같은 行動의 사람들이 有無의 結論을 말하는 것과 同一하다. 그런고로 끝 部分 그 自體는 中和의 點이다. 血管도 毛細管에서 돌아오는 靜脈部分이 有하여서만이 圓滿하지 않는가. 그와 마찬가지로 動脈을 有라 하는 것과 靜脈을 無라하는 結論的 事實을 體得할 수 있다. 그런고로 有無는 하나의 有에서 始作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有無의 根本体이다. 靈은 有에서 無에로 通할 수 있는 自體다. 그런고로 靈은 有라고 하는 感覺範圍 內 存在에 屬하지 않고 感覺 外 範圍에 屬하여 有의 權位까지 自由로 通할 수 있는 特有存在다. 이 性品이 卽, 하나님이 賦與하여 준 一體가 될 수 있는 特有性品이다. 卽 하나님의 性品이다. 그러니 우리 理想世界는 참 自由世界이다. 卽 距離支配를 받지 않는 世界며 空間의 支配도 받지 않으며 時間의 支配도 받지 않는 世界이다. 그저 生覺과 同時에 結果가 現立되는 自由理想世界다. 이 世界가 하나님을 中心한 世界다.
第三 章 原理로 찾으려니 聖經은 直接敎示치 못함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創世記를 敎示할 때에 웨 根本意義를 全部 밝혀서 敎示치 안이하였는가 하면은 여기에는 敎示할 수 없는 中心意義가 있음이다. 本來 사람의 祖上인 아담 해와도 하나님의 根本意義를 아지 못하고 있는 途中에 처한 存在로써 墮落을 始作하고 보니 根本 하나님의 本意의 뜻을 알지 못하고 中途에서 墮落한 셈이다. 모세를 세워서 役事하는 그 뜻은 墮落없는 그 世界에서 理想의 恢歸을 보고저 함이었다. 그 때 모세 自體로서는 사람 祖上 아담 해와가 未完成하고만 部分은 祖上自身 亦是 아지 못하는 事實이었다.
그것은 모세와는 아주 距離가 먼 位置에 處한 뜻이므로 그 뜻은 人間 祖上될 수 있는 그 自體들이 問題로 解決할 問題였기에 모세에는 根本 뜻되는 墮落原理에 對하여 全部에 關聯되어 있는 것을 밝힐 수 없었다. 아담 해와가 더 하나님 앞에서 完成하여야만이 될 分擔 責任部分이다. 그런고로 墮落함으로 그 分擔 責任은 未及의 事實로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고 사람 祖上도 사탄도 確實히 아지 못하는 事實인 同時에 未完成에 處하는 사람을 對한 하나님이 한 뜻의 課業이었다. 이 뜻의 成事를 보려면 사람 自體들이 이까지(墮落前) 처할 수 있는 한 世界가 恢歸되어만이 이 뜻은 實際로 하나님 自身을 통하여 實踐될 根本問題였기에 하나님이 이 뜻 成事할 수 있는 無墮落時代에 아담 해와보담 하날的 完成存在가 나타나서만이 始作할 部分의 뜻이니 그 自體를 모세에게 直接的으로 敎訓하지 않았다. 原理的으로 볼 적에 根本 人間祖上 되어야 할 存在들이 未知로써 되었는 事實을 모세로서 아는 것은 原理的 順序로 許與되지 않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原理的 存在될 수 있는 한 自體를 세워야 되는 것은 墮落됨으로 始作되었다. 그래 지금 聖經중에 우리 사람을 사랑하기 爲한 하나님은 未分明한 聖經으로 우리를 救援코자 하는가. 至今 그 原理되는 根本自體 卽 善에 屬하는 人間祖上이 나타날 때까지는 根本을 밝히지 않고 至今까지 나온 바를 아러야한다. 여기에 하나님은 原理根本으로 사람을 찾고저 하는 原理的 順序를 세움에서이다. 그러야만이 創造理想을 完成하게 되는 바이다. 예수 當時에도 譬喩로 敎示한 바도 亦是 原理 成事的 時期를 찾지 못하였기에 많이 譬喩로 말하였다가 때가 이르면 다시는 譬喩로 말하지 않고
아버지를 밝히 가르켜 말하리라.(요16장25절) 하심은 根本 이러한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고로 至今은 때가 아니었기에 世上이 勘當치 못하여 말하지 못하는 未敎示部分을 발표하게 하는 意義가 있는 바이다.
또 요한복음 16장 12-14절에 “내가 아직도 많은 것으로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 있으나 너희들이 勘當치 못하리라. 그러나 眞理의 聖神이 이르면 모든 眞理 中으로 너희들을 引導하리니 그 마음에로 할 것이 아니라 듣는것으로 말할 것이요, 또 將來일로 너희에게 나타나리라. 聖神께서 나를 榮華롭게 하셨으니 나의 것을 가지고 너희들에게 나타나리라” 하심은 譬喩로도 말할 수 없는 未來에 남아 있는 뜻이 있다 하는 것을 밝혀서 하는 말하는 바이다.
그러나 聖神이 이르러 將次 예수가 밝히지 못한 것을 밝혀준다고 하신 바는 時期的 經過를 두고 成事할 뜻의 部分이었기에 밝혀 말하지 못한 바이다. 이 部分은 예수에게 있어서 時期를 두고 더 이루어야 할 部分이었기에 이렇게 말한 바다. 이런 部分을 間接的으로 敎示하기 위하여서 많이 譬喩로 말하는 理由다. 이 밝히지 못한 未分明의 事實이 때가 이르면 聖神을 通하여 가르쳐 준다는 約束이 成事를 보았기에 끝날에는 聖經上에 밝히지 못한 것 즉 너희들이 勘當치 못하리라 한 부분이 밝히어시어야 뜻 成事할 바이니 聖經 外 部分이 聖神敎示 받는 者로 하여금 發表를 보아야 할 바이므로 普通信者로다 하는 자는 勘當치 못할 部分으로 되나 聖神敎示 받는 자만이 勘當할 수 있는 部分이 나타난다는 바를 지적하여 말한 바이다.
예수 當時에 弟子들까지 勘當치 못한 部分이 예수의 뜻 路程에는 있다 함을 밝힌 말씀이었다. 그런고로 가르킴 받는 자만이 예수의 참 新婦 될 수 있는 뜻 侍奉者가 되는 것을 끝날 믿는다 하난 者들이 알아야 할 바다.
第四 章 그러면 왜 모세부터 直接 뜻 工作못하였는가
아담 해와의 墮落으로 인하여 惡의 血을 받고 나니 子孫들에게 惡의 血가 흘러 들게 되었다. 이 더럽힌 血를 받지 않을 사람이 더러운 血를 받아 사탄의 子孫으로 사람들은 順從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즉 사탄 하나부터 繁殖되어진 사람을 다시금 하나님이 取하여 뜻을 세우기 위하여서는 더럽힌 바의 血를 맑혀야 할 것이었다. 이것을 맑히기 爲할려니 하나님을 絶對로 順從하는 사람을 세워서 사탄으로 받은바 피를 맑히기 위한 攝理를 세우셨다. 그런고로 사탄은 뜻을 反對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세우고저 하는 사람들을 反하여 對立的 怨讐로 되어 나왔다. 歷史的으로 始作되는 惡의 血로 世上은 더럽히었으니 善의 血로서 맑히고저 해야 善이 惡에 反對하게하시는 工作을 攝理 하시었다. 더럽힌 血를 世上에서 끊으려니 前人間이 하나님께 屬하여지는 바가 問題였는데 이 工作을 돕고 나오는 絶對 順從하는 사람이 稀貴하였다. 그런고로 善한 피를 흘리게 하여서라도 善의 한 基本的 中心 土臺를 잡고저 하여 하나님은 努力하였다. 그 努力의 成果를 보아서 全世界에 惡의 血가 다 善의 血로 인하여 맑힘 받고 난 후에야 하나님은 뜻을 始作할 수 있는 것이 原理이었다.
그래서 昔日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惡한 者에게 죽게 하신것은 그들로 인하여 世上의 惡의 血를 맑히기 위하여 蕩減的 立場으로 죽게 하신것이었다. 그런고로 모세를 세워서 直接 役事하신 것은 다시금 뜻을 成事할 수 있는 基礎를 닦고저 하는 것이 아버지 뜻이었다. 이 터가 成立되고 난 후에만이 하나님의 뜻을 始作할 수 있는 바이었다. 그래 모세는 하날 成事를 準備한 立場에 처한 存在므로 하나님은 根本 뜻 工作을 밝혀 시작하지 못한 것이다.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을 따르면 떠러지고 하나님의 뜻 中心하고 살면은 惡의 血를 除하여 義로 세워 하날에 屬하게 하였다. 그런데 그 工作을 사람들이 絶對로 받들지 못하여 하나님은 至今까지 뜻 成事를 보지 못하고 至今까지 世上을 대하여 攝理하시는 바이다.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한테 따르면 떠러지는 것은 根本原理에 서니 사탄 亦是 할 수 없이 떠러지는 것은 사실이다. 사탄도 原理에는 屈服한다.
第五 章 生命樹에 對한 根本 뜻
아담 해와를 中心한 에덴 동산은 自由 理想世界인 同時에 希望의 世界이었다. 自由根本과 사랑 根本을 잃고 보니 사람에게 있어서는 墮落의 苦痛이라는 것이 全部分에서 始作되었다. 聖經에 사람은 永遠할 수 있는 生命樹를먹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 뜻 中心하고 따 먹어야 할 生命果는 먹지 못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墮落 知覺을 받고나니 다시금 理想世界인 하날 世界까지가 우리와는 直接 關係는 끊어지게 되었다. 그것이 즉 (창세기 3장24절) 그룹들이 돌며 빛나는 화염검을 두어 生命果의 道를 지키게 하심이었다. 이 生命樹라는 것은 하나님께 直接 屬할 수 있는 자체를 막아버리게 되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날을 대하여 한 間隔이었었다. 이 間隔을 열려면 原理的 存在가 나타나야만이 始作된다. 그 存在는 즉 제2 아담인 예수와 해와 聖神이 出現되어야 한다. 그런고로 예수가 땅에 와서 自己 根本 使命的 役割을 택하고 昇天하고 난 후에 聖神降臨에서 부터가 다시금 (사도행전2장 1~4절) 화염검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事實的 原理이므로 聖神은 오순절에 불(火)같은 설(舌)을 가르면서 各人에게 임하심은 이 生命樹인 길을 하날적으로부터 열리기였기에 우리는 다시금 永生할 수 있는 生命樹의 道를 찾게 되어 生命果까지 取하여 永遠理想 永生을 取하여야 할 路程이 許與되었다.
그런고로 生命樹는 예수님이고 生命果는 예수가 완전 新婦格 成事 하여만이 우리에게 許與받을 수 있는 永生要素다.
第 三 編 復歸攝理
第一 章 하나님은 아담부터 찾는 工作못하고 아벨로부터 노아까지 사탄 對한 根本意義
하나님이 사람을 創造할때에 하나인 自己를 中心하고 아담, 해와를 通하여 子女繁殖을 하기 爲하여 創造하시였다. 그런고로 사람의 子孫은 하나님의 子孫으로 될 것이였는데 사탄 誘引받고나니 아담 해와는 中心에서 脫線하는 行動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때부터 사탄은 非公式的으로 사람을 對하여 나타난 存在로 되었다. 本來 사람은 하나님 한분을 相對하여야 할 存在였든 것이 根本인데 至今 非公式存在 사탄이가 한 存在로서 生起게 되어 하나님을 對立하여 나타났다. 여기에 하나님은 根本 自己에게 屬하여야 하게끔 原理를 세워 創造하였는데 다른 存在 사탄이 生起게 되니 사람하나 中心하고 그 相對存在가 있게되니 根本原理와는 背馳되는 事實이다. 그래 하나님은 다시금 사람을 所有할려고 하나 벌써 사탄이는 먼츰 原理存在로 對하여야 할 하나님의 存在모양으로 사람을 所有하고 말게되니 하나님은 사람 對하여 두 主人을 工作을 세울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이 사람 아담, 해와를 다시금 自己所有로 하여 볼내니 여기에 原理順序를 背馳되는 두 主人格을 成立시키는 行動이니 하나님은 다시금 이 失敗性을 取消시키는 工作을 할려고 할 때에 卽 原理대로 사람을 찾으려 할 때에 아담, 해와의 그 自體에는 벌써 失敗하였으니 그 自體에는 非公式的 사탄 所有인 同時에 또 創造原理的으로는 墮落이 없었으면 勿論 하나님의 所有者는 定한바이나 墮落되어서 그 原理的 立場은 벌써 하나님便에 屬하지 않는 根本原理 樣으로 사탄이는 사람을 取함이다.
그래 하나님에게로 自己 몸으로 지은 사람을 抛棄 할 수 없는 原理的 結託이 있으니 하나님 亦是 아담, 해와를 포기 할 수 없는 原理的 責任이 있는바였다. 이런 責任的 根本을 가진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中心하고는 直接 對하여 찾으려고 工作할려고 하려니 먼츰 非原理的 存在의 主人公이 所有함이니 하나님은 다시금 아담,해와를 두고 그의 子孫中을 通하여 이 두 主人格으로 分立시켜서 아담, 해와의 失敗를 찾고저 함이었다. 그래 아담,해와의 子孫中에는 두 性品的 結果의 子孫繁殖이라는 墮落世界의 存在를 보게 되었다. 卽 非公式的 主人性品에 屬한 子孫의 分立을 要하게 되었다.
아담, 해와는 失敗함으로 二性品格의 母體의 主人公으로 出發하니 創造原理的이 아닌 結果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래 하나님은 아담, 해와를 對하여서 直接찾는 工作은 始作못하고서 그 子를 두고 復歸工作을 始作하니 卽 아담, 해와의 子인 “가인”, “아벨”에 對한 攝理의 路程을 시작하였다. 그런고로 아담, 해와 사탄
血를 받고 난 맏 가인이니 첫 生産者는 사탄에게 屬하는 非原理的 存在의 立場이다. 그 다음 存在는 하나님이 찾을 수 있는 立場에 屬하는 存在로 되었다. 그것은 사탄의 血를 받은 사람을 찾으려 할 때에 첫번 해와는 사탄한테 屬하였지만, 다음은 아담한테 屬하는 樣으로 해와는 行動하였으니 비록 墮落된 自體들이었지만 아담的 사랑은 나중이나 그 子孫에는 두 性品的으로 흐름이 있는바는 事實的으로 나타났다. 그러므로 墮落된 自體들의 立場으로 보아도 사탄이에게서는 첫것 사랑이었으니 첫것보다 나중사랑 즉 아담사랑이 非原理 立場에는 屬한 사랑이었으나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미움이 아닌 事實이다.
또 이런 原因으로 보아도 첫 子孫은 보다 미움의 子孫이며 미움의 對象이었다. 그런고로 아담 子孫中心하고 이런 理由에 對比되는 입장은 사람 對하여 取케 되었다. 그래 사탄도 亦是 하나님 對하여서 非原理나마 自己가 所有할수 있는 한 相對의 血蹟의 子孫이 사람한테 所有되어 지는 것을 自然的으로 바라게 되어 사람을 中心하고 하나님과 사탄은 對立되어 自己 所有物 確立을 보게 됨이 事實이다. 그래 사탄도 亦是 처음에 非原理라고는 알고 있으므로 積極的으로 사람이 自己所有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을 알므로 自己便에 順從 할 수 있는 條件이 成立되어야만이 自己것으로 取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고로 아담 子孫 가인과 아벨에 對하여서는 非公式存在와 公式存在와의 對立헤서 보여지게 되었다. 그래 사람은 本來 하나님의 것으로 되었기에 하나님이 먼츰 取할 수 있는 原理的 權利는 有한바다. 그러나 사탄이 사람을 誘引하였으니 間接的 態度로 나아가는 立場에 處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은 여기서 復歸工作 始作을 볼려니 不順從으로 墮落한 人間이니 順從으로서야만이 하나님의 便에 서서 原理를 찾을 수 있는 바이고 不順從이면 不順從의 主人公이 사탄 所有라는 두갈랫길이 지어지게 되었다. 그런고로 사람 子孫 가인과 아벨이 드리는 祭物은 根本的으로 順從이나 不順從에 의하여 取고저하는 二性品的으로 所有物, 決定的 表定物이었다. 두 兄弟가 各己 祭物을 드렸으나 왜 아벨의 祭物은 祝福하고 가인 祭物른 不祝福이었든가 하는 것은 첫 子孫 가인은 사탄의 血를 繼承할 수 있는 表示로 된 者요, 다음 子孫 아벨은 하나님이 찾을 수 있는 者이니 하나님의 사랑하는 것은 原理的으로 가인보담 아벨이니 아벨의 祭物을 받고싶음이었다. 그 外 가인 祭物은 받지
않은바이었다. 그래 이때에 가인 제물은 받지 않었지만 하나님편에 서기 爲하여 살려고 自己의 自體가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벨을 사랑하면서 자기의 사랑받지 못하는 自體에 對하여 後悔하면서 하나님이 다시금 사랑받을 걸을 찾었으면은 卽 하나님이 하시는데 기뻐 感謝하는 態度었다면 가인 亦是 하나님便으로 取케되는 原理的인 사탄 所有하는 不順從圈內에서 순종권내에로 옮겨지면 하나님은 順從하는 子孫을 취하는 곳에 對比니 가인도 亦是 하나님이 取하게 될것이었다.
여기에 가인은 그와 反對로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벨 對하여 怨望視하는 行動, 卽 사탄 不順從의 根本되는 사탄의 行動과 같은 方向으로 나아가 아벨을 죽이고 나니 하나님이 뜻하였든 첫 復歸原理는 가인 行動으로 全人間에 死亡의 터를 자아내게 되었다. 卽 사탄은 그때까지 가인을 自己所有로 할 수 없고, 自己所有物되기를 苦待하는 立場으로 하나님 對하여 서게 되었다. 聖經(창세기 4/7)에 하나님이 가인보고 말하기를 罪가 門에 伏야 틈을 엿보나니 彼를 防備하려는 것은 사탄이 가인 너를 삼키고저 한다는 이 根本意義를 밝히는 바의 말삼이다. 이런 가인의 行動이 있었으니 不順從 사탄은 自己便 가인 所有를 갖고 아벨을 죽이는 바는 여기에 하날을 對하여 反逆 始作의 豫告를 보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 行動은 卽 全人類의 祖上級에서 되어지는 이런 行動들은 全人類를 左右하는 間接的 行動의 始作이라 할 수 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사탄은 내 所有만 만들겠다는 惡意의 發露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벨代身 셋을 준 것(창 4/25)은 아벨의 繼承 뜻을 세워서 다시금 하나님便的 存在로 세우셨다. 不順從하는 가인, 卽 사탄은 셋을 對하여서 工作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은 本來 어두움의 不順從 血를 받고 났으니 先血的 關係로써 하나님을 따르는 것보다도 사탄을 따르는 方向으로 흘러나려 오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根本目的을 達成하기 爲할려니 原理的 順從者를 찾아서 工作繼承하여 왔든 바인데 사람들은 즉 셋 子孫까지 가인의 子孫들이 좋아하는 生活體로 드러가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全人類는 하나님의 뜻을 세운 者는 漸漸 적어지고 사탄 뜻세워 따르게 되는 樣으로 墮落性 根本體인 淫行은 膨脹되었고 사탄 對하여 섬기는 것은 全部가 즐겨하는 行動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이 참을 수 없이 全 人類를 처서 없애고 이 뜻에 맞는 者의 子孫으로 뜻 工作을 計劃하시기 爲하여 노아를 세우심이었다. 卽 노아는 不順從을 反하여 하나님의 뜻을 順從하는 代表者이었다. 그런고로 노아를 두고 하나님이 根本復歸 繼承
하여서 뜻 成事를 볼려고 하였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은 第一은 사탄 崇拜하는 것이고 第二는 淫行 하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墮落의 씨가 되었으며 이것으로 通하여 사탄의 뜻 繁殖함과 같은 協助行動이니 하나님께서는 至極히 눈꼴사나운 相對 이었기에 第一 미워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人間世上에서는 男女가 사랑하는 것과 男女의 陰陽部가 부끄러운 實體며, 죄의 實體며 惡의 實體며, 또한 쌍것이 되는 바이다.
그런고로 世上에서는 男女의 第一 貴한 사랑이 實體들을 쌍것으로 認定하는 바는 이 根本 墮落性 根據이므로 말도 이와 같이 하는 바는 사람이 墮落한바들 良心直告하는 바의 事實을 證據하는 바이다. 세상에서 말하는 쌍소리가 왜 쌍것인가 쌍것이면 왜 좋아하는까? 世上의 第一 貴한 것이 사랑인데 사랑에 屬하는 實體 卽 第一 貴한데 屬하는 實體가 왜 쌍것인가. 이 根本만 찾으면 人生問題는 解決이다. 이 事實은 쌍것아닌 第一 좋은 것이 쌍것으로 되었으니 卽 非原理的 出發을 가져오는 根本이 되었다. 卽 死亡이 始作되는 것의 始作의 根本이 되었으니 이런 告白으로 表示됨이라. 그런고로 世上은 非原理中에서 있다는 事實的 良心 告白의 말이 많이 쓰여지고 있다.
例를 들면은 陰陽, 左右라는말, 黑白, 至今 많이 쓰는 赤白 等等은 全部가 先后가 反對로서 쓰는바는 人類歷史 始作이 反對로 되었다는 바를 證據하는 事實이다. 卽 左니 陰이니 黑이니 赤이니 하는 말은 非原理世界 始作이 먼츰 되었다는 것을 想證시켜 주는바이다. 卽 直告대로 右左, 陽 陰, 白黑으로 白赤으로 되는 世上이 와야 만이 우리 原理 찾은 世上이요 理想 世界의 要素이다.
이렇게 사탄의 昌盛을 보니 善에 對하여 積極的으로 對 怨讐로 나아가니 昔日부터 義人들의 慘死가 많은 바는 原理로 보아 應當하다. 이와 같이 노아의 時代까지도 全部가 不順의 子息들로 全世界가 되고보니 하나님은 全滅시켜서 다시금 뜻을 工作하는 結果로 노아 審判이 되게 되었다. 그 때에 노아는 順從者를 찾었으나 한 사람도 보지 못하고 전부가 死亡으로 들어갔다.
심판하고 나니 하나님은 痛憤!
根本에서 始作되었으면 自己의 子孫들이 였는데 사람의 行動이 全人間을 死亡으로 몰아넣는 結果를 가져와서 審判은 하였으나, 痛憤한 事實이다. 왜냐하면 사탄 때문이지 사람에게 무슨 罪가 있는가 하는 生覺은 하나님 亦是 生覺치 않을 수 없었다.
그런고로 다시는 이와 같은 審判은 하지 않을 것을 세웠다.
審判한 根本意義는
① 사탄을 사람한데 떼기 爲한 것
② 順從者로 되니 사탄을 怨讐視하게하기 爲하여
③ 이것을 보아 不順從者의 한 死亡의 表를 삼아 順從케 하여 不順從의 始作 없게 하기 爲하여
④하나님만이 사람 對하기 爲하여
⑤ 뜻 成事의 터를 잃지 않기 爲하여
以上과 같은 뜻을 中心하고 審判은 하였으나 根本的으로 生覺하면 하나님께 있어서 自己의 責任性을 느껴짐을 自覺치 않을 수 없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사람을 墮落하게 한 것은 結果는 自己自身이 지었었기에다 그런고로 最終局 責任은 自身에 結果點을 두고 있고, 그 다음 아담, 해와 이러니, 하나님은 잃어버린 사람 찾기 爲하여 自己와 아담, 해와의 責任이니 이 工作을 始作繼承하여야 할 代身的 役割이 남어지게 하였다. 그런고로 처음으로는 하나님이 責任지고 사람을 救援할 수 있는 基礎를 닦아주어야 할 責任이었다. 그래 하나님이 이 基礎 工作 始作할려니 舊約 役事에로 들어간다.
그 터가 되면은 無 墮落 아담, 해와의 分擔使命的으로 始作되었다. 그래야만이 創造原理의 成立을 볼 수 있는 바이다. 本來 사탄이는 하나님한테 順從하여서 屈服함이 없다면 原理人(無惡人) 사람한테도 사탄은 屈服치 못함이 事實이니 하나님은 모세 時代까지 自己가 活動할 基礎工作을 하여만이 되게 되었다. 이 基礎가 되어야만이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보내서 工作할 수 있겠으니 그 工作하여야 하는 責任이 노아 以後 工作이다. 하나님 앞에 順從屈服이 없다면 예수와 聖神한데도 사탄은 굴복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 뜻과 攝理의 最高 目的은 하나님으로부터 사탄을 屈服케하여 사람 祖上으로부터 사람全部에게 사탄을 屈服시키고저 하는 것이다.
(1) 第一은 하나님한테 順從屈服
(2) 第二 아담, 해와 (예수, 聖神) 順從屈服,
(3) 第三 全사람한테 順從屈服
以上의 目的을 完成하여 나중에는 사탄의 所有가 한 사람도 없게하여 사탄까지 終局 自然屈服으로 하여야 原理로 되는 바다. 그런고로 사탄은 이 뜻을 反하여 役事하는 것이 卽 아담부터 舊約時代로
舊約時代로부터 新約時代 新約時代로부터 再臨時代까지로 展開를 보게 되는 路程으로 하나님의 攝理의 役事는 歷史를 通하여 내려오게 되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끝까지 사람을 對하여 사랑하여 나오신 바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的 責任分擔歷史가 舊約歷史고 아담, 해와 (예수, 聖神) 全人類 責任分擔歷史가 新約歷史다. 그러야만이 本 墮落前 基本点을 볼 수 있는 것이 되어야만이 再臨成事時代 卽 成約時代면서 理想時代가 이런 路程으로 復歸 始作이 하나님이 뜻하고 사람 對하여 사랑하는 中心意義다. 그런고로 사탄과 하나님은 사람 中心하고 하나님 뜻 成事로서, 사탄은 뜻 破讓가 歷史上의 戰爭으로 展開되어진 것이 事實이다.
第二 章 第一次 하나님的 責任分擔 攝理期間은 노아부터 예수까지
第一 節 노아부터 아부라함까지 攝理路程의 根本意義
審判을 通하여서 노아의 八食口는 第二次로에도 繁殖하여지는 同時에 하나님의 뜻 攝理完成으로 始作과 同時에 結果로 나아가야 할 使命的 責任의 分擔은 卽 하나님의 뜻을 믿고 順從하는 것이 노아 後孫에 맡겨진 重大課業이었다. 그런데 全人類를 審判하고나니 사탄은 自己를 崇拜하며 섬기는 全人類를 잃고나니 사탄은 뜻 부칠 곳 없이 되었다.
그러나 사탄은 사람을 떠러질수 없는 關係的 因緣이 있는 以上 하나님 뜻 外에 部分 存在가 있으면 自己의 所有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은 다시금 하나님 한테 自由 屈服치 않고 노아의 八食口에 對하여 未練的 立場으로 自己의 뜻 所有가 될 수 있는 存在가 있는가 또는 自己가 取할 수 있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行動이나 없는가가 사탄에게 있어서는 要求하는 重大 注目点이있다. 이 어마 어마한 立場에선 者들이 卽 노아 8食口였다. 이 食口들은 하나님과 사탄사이에 있어 自己들의 根本 責任을 勘當하는 方向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卽 하나님便으로 갈려면 사탄이 따르고 사탄이 따르면 하나님이 滅하는 이런 立場에 서 있다는 바를 그때 原理的으로 안다면 모르지만 이 原理를 알지 못하는 八食口는 그저 하나님에 對한 積極性을 體得하여야 할 存在들이었는데 그런 方向으로는 如何한 結果를 가져오는가는 人間에게 特有性 自由行動結果가 左右하는 問題이었다. 노아 食口는 全하날의 期待인 所望存在요 또 사탄이 빼앗고저 하는 所望의 期待의 存在이었다. 그런 立場에 있는 存在들 卽 하나님 보시기에 義로 여기는 存在들이다.
이와같은 人間價値를 알고보니 이 사람이 그다지도 하나님을 받들지 못하였는가 하는 嘆息이
自然 나을 것이었다. 至今 우리는 이 原理로 보아 緊張한 立場들인 줄을 알 수 있는 福된 時期를 만남이 無限한 幸福스러운 것이었으나 이 時代에는 이 根本問題를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한 수수께기의 問題였기에 그다지도 自己들 存在價値와 하나님에 對함과 사탄 對함에 對하여서는 그저 根本을 알지 못하고 그 結果만 보아서 하나님과 사탄의 關係가 反對性으로서 서 있다는 것만을 歷史를 通하여 알 뿐이었다.
그 時에 노아는 天地의 主人公格이면서 第二次 人間의 祖上이 되는 存在의 行動 如何부터가 하나님과 사탄이 行動의 如何를 始作하는 基礎이었다. 그때 노아의 八食口 中에 罪라는 生覺조차 하여서는 아니될 存在들이고 하나님의 義만이 始作되어야 할 存在로써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모양이나 흉내가 보여지는 行動이 없어야 할 立場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노아는 農夫가 되어 葡萄農事를 하였다. 葡萄酒를 먹고 취하여서 帳幕 內에 裸體로 누어서 잠자고 있을 때에 노아의 아들 함이 父가 벌고 벗고 지는고로 부끄럽게 여기면서 自己兄弟들까지에게 가서 부끄러운 行動의 한 表示를 하니 셈과 야벳은 衣을 取하여 아버지 벗은 것도 보지 아니하고 뒷걸음으로 드러가서 아버지의 裸體를 더푼지라.
이것이 聖經을 보면은 왜 이런 行動이 하나님이 미워하는 行動인가하는 根本意義는 오날 未解決 問題이나 그 根本原理로 볼 적에 그 事實은 明白하여지는 바이다. 이 行動은 무엇을 象徵하여주는 事實이냐 하면은 하나님 앞에 至極한 미움의 行動이며 사탄 對이하여는 한便 될수 있는 아담, 해와의 벗음의 수치를 다시금 증거하며 墮落性 繼承을 表示하는 行動이며 사탄이에게는 하나님 앞에 自己의 立場을 세울 수 있는 根據的 問題였다.
卽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것은 墮落된 부끄러움의 自體임을 아직 잊지 못하는 存在의 씨라는 事實을 表露하는 行動이면서 또 全人類를 審判하심도 그것의 始作으로 因한하여 結果에 到達하여 지는 바에서 나온 바를 生覺하니 하나님은 痛憤하지 않을 수 없는 事實을 보여줌인 同時에 사탄의 性品 卽 犯罪한 直後에 行動의 繼承을 證據하는 事實이니 또 亦是 하나님의 뜻하는 根本目的의 未完成要素가 繁殖함을 알게됨이 또 다시금 사탄의 起着点을 보여주는 行動이였다.
그런고로 다시금 사탄은 그 行動 開始를 보게 할 根據를 삼고 나서니 그 要求의 터를 막을 수 없이 사탄의 繁殖을 始作하게 되었다. 그런고로 行動을 直接 開始하게 한 그 存在가 사탄 便의 者이니 함을 對하여
가나안의 祖上이 되어 하나님의 怨讐가 되리라는 것을 말함이다.
그리하여 또 다시 하나님과 사탄은 對立을 보게 되어 子孫을 繁殖하니 또 다시 그 子孫들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行動으로 흘러나가게 되었고, 노아 前과 같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사탄의 뜻 繁殖에 協力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금 사람을 뜻 中에 품으려하는 者들을 빼앗긴 셈이었다. 그러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이 사탄한테 屬하지 않게 하기 위한 對案이 要求되는 바이다.
때 마침, 사람들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곳으로 흘러나가는 行動뿐이었다. 그것은 사탄이 즐거워하는 行動結果이니 이것을 그냥 두어 둘 수 없는 事實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言語가 하나이니, 全部가 意思가 通하여 한 곳으로 動作하는데, 全體的으로 움직이게 되니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하날 便의 뜻 成事하기 위하여 도움되는 言語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바벨塔을 쌓아 사탄 뜻 協力하는 行動의 基因을 가져오니 하나님은 言語를 相反되게 함은 뜻을 反하여 行動 協助物이 言語로써 한 方向으로 全人類가 흘러 드러 나갔으니 言語를 混雜케 하여서 그 사탄 뜻 돕는 길을 막고저 함이 人間 言語를 混雜시킨 根本意義었다. 그런고로 萬若 뜻 中에서 人間이 이런 塔을 쌓았으면, 또 이 뜻 成事로 나갔으면, 言語를 混雜케 할 리 만무한 일이다.
그런고로 世上에 뜻 成事時期가 오면은 言語는 하나의 目的으로 하날적으로 始作되여야 한다. 사람들은 이 뜻을 成事 協助하야서 統一된 言語를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그 始作은 中心存在 卽 再臨主가 오면은 그로부터는 하나님의 言語와 創造的 主管 許諾이어든 世界主管世界는 根本的으로 復歸되어야 한다.
사탄 뜻 돕는 바벨은 分岐하는 工作이었으나, 하날 對하는 뜻의 塔은 合體하여 하나되게 하는 工作이다. 하날 뜻 中心하고 復歸된 사람들이 뜻의 塔을 높이 쌓는 것을 보고저 함이 하나님의 뜻이다. 또 , 우리 理想의 터다.
이렇게도 하나님은 사탄 對하여 빼앗기지 않기 위하여 言語 混雜케 하신 것이야. 人間에게 福된 일이 아니냐! 이와 같이 안타깝게 한 사람의 罪를 누가 勘當하랴! 이렇게 하였으나, 사람은 如前하게 뜻을 멀리하여 뜻을 세워서 받들면서 거기에 誠心다하는 者들, 보기가 甚히도 드물었다. 그래 하나님은 뜻에 품으려든 노아의 子孫들을 또 다시 사탄한테 빼앗겼으니 이것을
다시금 빼앗는 役事를 始作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사탄의 사랑하는 相對者 偶像 商하는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을 다시금 사탄품으로부터 빼앗아서 自己 뜻의 子孫을 빼앗긴 것을 다시 갚는 양으로 卽, 反對路線으로 찾아 세우기 위하여서, 사탄 團體 쪽인 偶像장사 데라의 아들 아부라함을 擇하신 根本意義가 있다. 그 理由는 사탄이 第一 싫어하는 바인 동시에 痛憤한 存在이었고 하나님 便에 있어서는 지극히 貴히 보는 存在이었다. 왜냐하면, 사탄품에 있다가 빠져나온 代表者요, 뭇사람의 本이 될 行動이면서, 다시는 사탄한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미 나왔으니 들어갈 수 없는 立場을 取게하기 위하여, 아부라함을 擇하여 하나님이 뜻하시려는 딴 地域으로 引導함이 즉, 아부라함에게 要求한 것이 故鄕山川인 갈대아우르를 떠나라는 根本目的이었다.
그 때 아부라함이 하나님의 命令을 따르니 하날 대해서는 기쁨의 存在며, 사탄 對해서는 슬픔의 存在로서, 한 分岐路線을 세울 수 있는 中心存在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뜻에 선 아부라함 뒤에는 怨讐 사탄이 未練을 갖고 따라들게 되었다.
第二 節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 攝理하신 根本意義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自己 故鄕山川과 情든 鄕土와 情든 父母에 對한 情理라든가 親戚에 對한 情理라든가 아브라함에는 큰 苦痛의 相對였으나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路程은 이 모든 것이 問題있는 곳에는 始作할 수 없는 事實이다. 이와 같은 情은 하날 情을 成事하고저 하는데는 反對되어 直接行動 如何를 00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不拘하고 아브라함은 이와 같은 것을 問題로하지 않고 갈대아우르를 出發하는 그 行動은 果然, 人間으로써 讚揚하여야 할 問題인 同時에 사탄에게 대한 復讐的인 하나님 뜻을 成事하는 터의 行動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自己의 基本 뜻을 아브라함으로부터 本格的 出發을 보고저 함이었다. 사탄은 아브라함을 빼앗기고는 아브라함에 대하여 恢歸 工作을 始作하는 同時에 하나님의 뜻 成事를 破壞하고저 함이었다.
그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 대하여 祝福하려할 때 아브라함 自體에 대한 祝福보담도 뜻 中心하고 祝福하는 것이 하나님의 根本意義이다. 아브라함의 福의 機關될 祝福을 하여주며, 그로 하여금 大族屬을 이루리라고 祝福하여 주마하신 뜻을 받들어서 故鄕山川을 出發하는 아브라함 自體에는 하날의 工作始作을 받게되는 하나님 代身 뜻 成事의 基本行動의 始作은 完成되었다.
아브라함을 빼앗아낸 하나님은 自己가 하고저하는 全目的을 두고 祝福과 約束에 對한 새로운 決定的 言約을 세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卽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決定的 言約을 세우게 된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는 族屬에게 잡혀간 롯을 다시금 찾아와 勝利한 後에 始作이었다.
이와같이 한바는 하나님이 미워하는 民族과 대립케 함은 하나님 자신이 뜻을 세울 수 있는 確固한 基礎를 세우는 同時에 벌써 하나님이 미워하는 나라와 怨讐的 立場에서 하나님 便 쪽에 섰기에 決定的 言約 成事를 始作함이 있었다. 이 言約이란 아브라함의 子孫으로부터 始作하여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民族建設의 始作이며 이를 擴大시켜서 國家建設에로 그리하여 世界復歸의 根本意義를 두고하신 言約의 全部의 始作이 卽, 아브라함의 全 言約중에 包含되어진 根本 事實을 알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非夢似夢間에 말삼하시기를 懼하지 말라, 나는 너의 盾이다. 네가 받을 報償이 크다.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나는 無子하오니 나의 相續者가 없다하니, 아브라함에 대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말삼이 너의 親子息으로 因하여 後嗣가 되게 하리라 하시며 데리고 外로 나아가 갈아대, 天을 仰로 보라 하시며 衆星을 計數할 수 없는 바와 같이 너의 子孫이 이와같이 되리라 하시매 아브라함이 이를 믿으니 義로 여기시면서 하시는 말슴이 이 目的을 完成키 위하여 갈대아우르에서 引導하였다 하시면서 이 땅을 너에게 주어 基業이 되게하리라 하시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말삼하시기를 제가 이땅을 얻어 基業삼을 것을 무엇으로 알리있가 하니 네가 나를 爲하여 三年된 牝牛 一와 三年된 山羊 一와 三年된 牡羊 一와 산비둘기 一와 집비둘기一를 獻라 하니, 아브라함이 그 모든 것을 取하여 그에 쪼개어 右,左에 놓고 그 비둘기는 쪼개지 아니하여 祭壇우에다 놓고 祭祀를 드리니 그 祭物위에는 독수라가 날라서 앉게 되었다. 그런고로 여호와,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너의 丁寧히 알라. 너의 子孫이 客이 되어 四百年 동안 苦役하리라 하신 怒함을 보게 되었다.
이 祭物은 무슨 祭物이었는가 하면 그 後孫에 대한 全部의 祭物의 表示物이었다. 卽 其祭物이 全 하나님의 뜻이 되는 百姓을 찾고저 하는 目的이며 全人類를 찾어야 할 하나님의 根本目的을 表示한 代身的 祭物이었다. 이 祭物위에 독수리가 내렸다 하는 바는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은 벌써 사탄의 侵入을 證據하는 事實이다. 卽, 아브라함 하나를 中心하고 하나님의 뜻을 세우려고 할 때에 사탄은 뜻을 破하기 위하여 아브라함 한 自身의 結果的 行動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의 言約祭物을 卽,
全 하나님의 目的을 두고 豫約的 祭物임에 틀림없다. 이 祭物 失敗하면은 다시금 사탄한테 侵入路程을 讓步하는 行動인데 아브라함이 全 뜻을 合意있게 獻祭치 못함은 하나님의 計劃의 뜻은 벌써 未成事 한 것을 表示하는 重大한 것이 이 祭物이었다. 그런데 아브라함 自身은 이 重大한 祭物을 드리는 自身으로서 祭物을 全部 쪼개지 못 함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그 祭物을 쪼개는 것은 사탄편 사람과 하늘편 사람이 있다는 全人類의 表示였다. 그런데 비둘기를 쪼개지 않는 바는 하나님의 所有된 子孫과 사탄 所有된 사람과를 갈라서 攝理코저하는 것이 하나님의 全意義였는데 쪼개지 않는 것이 있으니 하나님 子孫될 約束과 言約의 成立을 보는 祭物에 完成한 成立을 보지 못하고 마는 事實이니, 다시금 그 子孫까지 사탄이 侵入할 수 있는 터를 지은 것이 始作을 보이게 되어 사탄은 自己便쪽 表示로 갈려지지 않는 祭物 비둘기를 取하려하여 祭壇 위에 내린 바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뜻한 全 目的은 사탄이가 다시금 차지하는 뜻으로서 祭物獻祭는 失敗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 三大 祭物은 무슨 表示냐하면 하나님이 하시고저 하는 眞理 目的 中心은 蘇生에서 長成으로, 長成에서 完成으로써 한 祭物을 通하여 表示한 바이었다. 卽, 비둘기를 드리게 하심은 하나님의 뜻 蘇生을 表示함이고, 羊을 드리라하심은 長成을 表示함이고, 牛를 드리라고 하심은 完成을 表示하는 重大祭物이었다. 萬一 이 祭物이 뜻에 合意하게 獻祭하였으면은 애급 四百年 苦役이라는 것의 生活은 이스라엘 民族에게 없었을 것이었는데 四百年 苦役이라는 것은 이 獻祭物의 重大한 失敗를 告하는 바의 事實이다. (四百年 年代意義는 나중에 論하려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豫約 祭物에 失敗를 보니 그것은 子孫을 사탄한테 빼앗기는 表示로 되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 子孫 中에도 사탄이 侵入할 수 있게 되었으니 根本目的은 다시금 未成事的 原因으로 基因되니 하나님은 다시금 아브라함 子孫에게 사탄 侵入의 길을 막으려니 代身 祭物은 사탄한테 빼앗기었었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사탄의 뜻 成事를 본 것과 같은 結果를 가져왔는데 卽, 사탄한테 祭物드린 것과 같이 되어버렸다. 卽 아브라함도 자기 所有의 根據點이 되어 全 目的 未成事를 가져오게 되니, 다시금 하나님은 約束祭物은 빼앗겼지만 아직 實體 子孫되는 것은 빼앗기지 않으려니 하나님은 不得己 한 立場을 取하여 아브라함을 따르려는 子孫에 대한 사탄의 侵入을 막으려하매 하나님은 그
子孫의 始作인 한 自體가 사탄과 하나님과의 直接問題 要求物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取하여야 하겠고 사탄은 벌써 이삭에 대하여서 取할 수 있는 豫約祭物, 代身祭物을 自己가 所有하였는 것이기에 사탄 亦是, 祭物 代身되는 實體인 이삭도 要求物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다시금 順從을 세워 하나님 便으로 全子孫을 돌리려니 아브라함에 對하여 實體 子息 이삭을 祭物로 드리라는 問題를 提起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卽 아브라함으로 모리야 山上에서 이삭을 드리라는 根本意義는 여기 있는 바이다. 그때 뜻 中心하고 順從하면 사탄은 떠러지고 하나님 便으로 屬하는 것이었다. 그래 아브라함은 順從하여 代身祭物 잃어버린 것을 實體로서 찾는 樣으로 獻祭의 命令에 順從하게 되었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런 原理的 問題는 아지 못하였다.
이와같은 立場에 아브라함의 順從은 容易한 問題가 아니었으나 豫約祭物 獻祭時 失敗가 全子孫에게 四百年 동안의 苦役의 뜻을 알고나니 이번 失敗면은 말할 수 없이 큰 難한 問題가 生起리라는 것을 아는 아브라함은 全的으로 하나님의 命令을 順從하게 되어 뜻대로 燔祭로서 子息을 드리는 確固한 立場에서 사탄은 目的 相對인 이삭에게서 물러가게 되는 바의 始作을 볼 수 있었다.
그런고로 이 事實의 根本 뜻을 現下 信者들은 아지 못하는 것이나 聖經에 아브라함의 失敗한 句節을 알게하는 句節이 있다. 卽 창세기 22章 12節에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 할 때에 그 아이에게 手를 대어 害하지 말라. 네가 네 獨子를 나에게 獻기를 惜지 아니하니 이제야 네가 너 하나님을 두려워 하난줄 知노라 하심이다. 이 聖經句節 中에 이제야 하는 그 句節이 卽 前番 失敗를 警告하는 同時에 뜻 繼承成事를 告함이었다. 이리하여 사람이 하나님의 뜻 路程을 찾아나가는 그 途中에는 豫約時代祭物로 失手한 허물로 받은 아브라함 子孫에게는 四百年동안 원수 앞에 苦役하여만이 本路程에 들러설것이었다.
그래 이스라엘 民族 애급 四百年 苦役은 必然的 過程이었다. 眞理를 찾으려니 眞理에는 蘇生이 있고 長成이 있고 完成이 있는 바이니 하나님도 이 찾고저 하는 뜻을 한 眞理路程이니 이와같은 意味에서 三大祭物이 要求되었다. 이 祭物的 使命의 蘇生部分은 卽 舊約時代의 表徵이니 蘇生하면은 長成 完成으로 할려하든 것이 인간이 絶對 順從치 못함으로 分立을 자아내는 것으로 展開할 것이 表徵되어 있다. 한 祭壇위에 三祭物은 한번에 뜻 成事하여야 할것이 根本뜻이었다.
여기에 蘇生役事는 하나님 責任分擔 始作 基礎를 잡는 것이고 長成은 예수 오셔서 根本復歸의 復讐의 例로 해와를 찾아야만 되는 것이고 完成은 예수를 中心하고 全人類와 合하여 또 하나님과 合하여서 全根本創造目的 達成을 보고저 함이 表示로된 祭物에 意義다. 祭物중에 비둘기는 蘇生을 表示함이니 舊約時期를 말함이고 羊은 長成이니 新約時期를 表示함이고 牛는 완성이니 再臨을 말함이다. 장성과 完成과는 함께 하려는 뜻은 사람들이 不順從과 不信으로 因하여 예수를 죽이니 再臨이라는 問題가 生起게 되었다. 牛는 完成의 表示었는데 왜 牝牛이었든가. 즉 完成할려면 해와 한 存在가 問題되는 中心點이니 牝牛는 해와를 表示하는 뜻이다.
이 해와가 卽 完成할 수 있는 目的相對이었다. 簡單한 祭物內容을 紹介하였지만 다시금 本論으로 들어가면은 사탄은 이삭의 實體에서 뜻을 세우지 못하고 다시금 其 子孫에 대하여 對立的 態度는 勿論이며 實體子孫에 侵入의 길을 찾으려고 試圖하였다. 이삭의 한 存在가 豫約代身祭物에 侵入을 보였기에 그 이삭에게도 不順從의 터는 벌써 始作할 수 있는 可能性이 잘못하면은 생길 것을 사탄이는 바라보게 되었다. 그것은 祭物을 自己것으로 하였든 사실이 있음으로 사탄은 如前하게 그 後孫에게 對하여 對立性을 갖고 대하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삭에게 子息을 낳으니 雙胎인지라 卽 에서와 야곱이었다. 이 雙胎는 무엇을 意味하는가 하면 아브라함의 失敗로 因하여 祭物에 願치 않는 存在의 侵入이 있었든 것이므로 이 實體子息 이삭이 問題되어 또다시 찾았으나 이삭의 子息한테 대하여는 사탄 亦是 찾고저하는 한 터를 양보하였든 失手가 있었으니 그 子息되는 雙胎는 怨讐的 表示의 所有者와 하나님적 表示의 所有者가 한 胎中에 있음을 表示함이었다. 그래 에서와 야곱은 腹中에서부터 싸우심은 이와같은 根本的으로 背馳되는 存在이니 腹中부터 싸운 것이다. 子息낳으니 에서와 야곱이러라. 에서는 원수 사탄의 代表요, 야곱은 하나님 便的 代表이었다. 卽 에서는 아브라함의 먼츰 祭物의 失敗의 씨요, 다음 야곱은 잃어버린 이삭을 實體로써 찾아서 祭物까지 찾아 세우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第二次的 存在인 야곱을 通하여서 뜻을 세우고저 함은 根本이 그와같이 되었기에 빼앗아서 成事하는 양이니 하나님은 에서의 祝福을 야곱에게로 돌리는 根本意義는 여기에 有함이다.
그때에 祭物 失敗
있으면 이삭 子息에 하나님이 미워하는 에서와 같은 존재는 없었다고 할 존재가 生起게 된 것은 다시금 사탄을 分立하여야 하날 便과 사탄편을 完全分立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탄이 다시는 아브라함의 子孫한테 미련을 남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目的이므로 이와같이 表示的 事實로서 야곱이 에서의 장자의 職分을 빼앗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예수와서 원수의 피를 받은 全人類를 빼앗아 넘길 것을 豫告하는 事實이니 그런고로 이 한 事實이 根本을 밝혀주는 것인 同時에 뜻 成事의 한 表徵으로 가는 바가 되어야 하는 바는 아브라함의 言約은 全目的의 表示인 約束이었기에 이런 意味의 한 分岐 存在가 이삭이므로 其 子孫 에서와 야곱이 사이에 되어진 事實이었다. 이러한 結果의 影響을 받고 났기에 맛 子息은 하나님 앞에 사랑 받지 못한 事實의 原因이나 창세기 全面에서 보여주는 事實이다.
例를 찾으면 이삭, 야곱, 요셉 에브라엘, 아벨 等等의 事實은 이와 같은 사탄 피를 받고 났기에 맛 子息은 미움의 相對이었다. 여기서 뜻 成事의 出發의 후손은 야곱을 中心하고 택한 百姓 十二 兄弟는 十二支派으로 시작의 출발은 야곱부터 시작케한 것은 根本意義로 보아 알 수 있는 바이다. 이삭은 하나님과 사탄이 바라는 存在立場이 아담과 같은 두 相對立場이었기에 根本出發 못했다. 卽 이삭부터 애급 出發이 아니고 야곱부터 되는 바는 以上 解說 中 原理로서 明白한 事實이다. 이리하여 擇한 하날 百姓이 되어야 할 그 根本은 애級으로 옮겨지게 되는 바는 뜻 成事의 첫 出發이다. 지금부터 하나님과 사탄과의 分立되어 復歸의 出發은 始作된다. 이것이 즉, 하나님的 分擔責任成事의 出發의 始作이라는 것을 알어야 한다.
그런고로 이것이 根本이 되어 卽 標本이 되어서 長成과 完成的 使命分擔 責任者의 本이 되어야 하는 第一次 하날的으로 하나님 直接 使命코저하는 基礎는 始作함인 同時에 祭物表示蘇生過程의 發露이었다. 그런고로 애급에서부터 가나안 復歸까지는 예수 오셔서 할 基本表示工作과 같은 模樣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한 目的을 한 完成으로 볼 수 있는 한 터의 工作이니 애급서부터 솔로몬 王까지 第二次 完成하여야 할 存在가 나타나서 成事할 한 豫告的 表示로 되어있다. 卽 예수 오셔서 애급서부터 가나안 福地로가는 樣으로 우리 人間理想 復歸地로 찾어들어가는 한 使命的 基礎表示로 展開시키고저 함의 意義
를 알어야 한다.
애급서부터 가나안 復歸路程은 예수의 路程을 表示한바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根本 뜻이다. 그리하여 墮落시킨 人間 對하여 하나님이 自己自身 責任分擔 對하여 始作하는 것이 즉 모세의 세우심이었다. 모세는 하나님을 代身하고 바로는 사탄을 代身하고 나오게 되었다. 모세가 擇함을 받은 原因은 원수가 이스라엘 百姓을 極度로 虐待하는 同時에 强制로라도 全滅시키고저 하는 行動으로 나가게 되어 苦役 中 원수의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과 싸우는 것을 보고 애급인을 죽이는 모세는 本來 애급 宮中에서 長成하였으나 애급 사람을 怨讐示하는 바는 이스라엘 子孫이라는 表示하지 않는 志操는 果然 하나님이 擇하시는 貴여운 行使이었다. 애급 宮中에서 자라 났으나 애급 사람이 아니고 하날의 百姓의 變함없는 그 자체이었다. 이 自體는 애급 원수의 모든 第一 미워하는 自體인 同時에 사랑받고 자라는 存在이었다. 이 自體가 애급 宮中에서 나왔으니 애급과는 다시 結託 안하는 存在라는 것은 事實이다. 그런고로 그 위에 애급 사람 對하여 憎惡心을 갖고 있는 確固한 存在이니 하나님이 擇한바가 原因이 있는 바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여서 애급 王 바로를 對하여 工作을 하게 하기 爲한 시작을 命令하게 되었다. 그 때에 하나님의 命令을 받게 되는 모세는 自己自身이 애급 百姓앞에 信게 할 수 있는 證據를 要求하니 杖으로 蛇이 되게 하는 첫 異蹟을 보게 하신지라. 그리하여 祖上에 現된 하나님을 알게 하여 뜻 順從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함이었다.
그 다음에는 手를 품에 넣으라 하심에 手을 품에 넣으니 癩病이 된지라. 그 다음에 다시금 품에 넣었다가 다시 꺼내매 낳은지라. 그 다음에는 듣지 않거든 江水를 가저다가 부으라 그리하면 피가 되리라고 하나님은 말삼하시었다.
그 다음에는 모세는 言을 要求하였다. 이와같은 射殺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려 할적에 이런 異蹟을 보여주었나하면은 하나님이 將來하시고저 하는 事實의 터가 되는 行使이니 그 表示되는 모든 뜻은 全部 예수 오셔서 할 目的成事의 한 象徵이라는 것을 表示하는 것이 되어야 할 原理的 目的이 있는 바이다. 또 杖라는 것은 代身 依支者를 表示함이었다. 卽 나를 代身保護할 것을 말함이고 全 앞길을 잡아준다는 뜻이며 또 合當치 않은 것을 치어 뜻대로 成事하게 하는 뜻이 있는 바이었다. 이것은 卽 예수가 우리의 全生命에 對하여 保護가 될 것을 말함이었다. 蛇를 보여 주심은 배암으로 誘引한 表示的 存在로 해와 役事한 것을 보여 주었으니 예수와서 배암과 같은 役事로 사탄 중에서 빼앗을 役事하여야 할 하날 蛇的 表示를 豫告하기 爲하여서 着手할 것을 意味하심이었다. 사탄이 네가 蛇갖고 했으니 나도 蛇갖고 예수로 役事한다는 것이 根本杖도 蛇되게 한 意味가 있는 바이다. 모세 蛇 예수는 사탄 뱀을 잡아먹어 勝利할 것이 豫告的 表示였다.
모세 手을 품에 넣은 것은 첫 번은 사탄의 誘引받아 사탄 품에 안긴 해와의 行動은 人間을 죽이는 役事였으니 다시금
手를 품에 넣으심은 예수 오셔서 해와를 품는 事實은 癩病과 같은 死中에서 蘇生하여 산다는 表示로 手의 病이 낳은 것을 보여줌이었다. 卽 第一次 품은 것은 死亡이나 第二次 품으심은 生命이라는 永生의 始作을 豫證한다.
江水로 피된다는 바는 水은 世上을 表示함인데 예수와서 死亡中에 處한 存在들이 예수 오셔서 피로되는 生命 注入을 始作한다는 것을 表示한 바이었다. 言의 要求는 相對 目的 成事할 수 있는 重要 責任個性体니 言을 要求하심은 創造物 全部를 말삼으로 지은 것이 잃어버린 것을 예수와서 言 相對의 理想的 實體를 다시금 成事한다는 뜻을 表示한 바이었다. 卽 言은 創造目的 物實体를 말하심이다.
아담 해와를 찾는다는 것과 全人類와 萬物을 찾는다는 意味가 있음이다. 그 때 모세가 要求하는 全部를 許諾하시고 애級으로 가라하심에 모세는 自己의 妻子를 데리고 하나님의 杖을 들고 애級으로 들어가 바로에게 請하기를 이스레엘은 나의 長子라하라.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하라. 그래도 바로 보내지 않으면 長子를 죽이라 하라하는 命令을 받고 들어가는 途中 한 宿所에서 여호와 모세에게 顯하야 모세를 죽이고저 할 때에 모세의 妻는 아들 陽皮를 벗겨던져서 死를 免케하면서 妻가 曰 당신은 피흘리는 男便이로다 한지라 그것은 割禮를 한 緣故여라. 여기에 야곱 母가 야곱과 合하여서 살리는 行例를 成事한 것이었다. 그 根本意義는 무슨 뜻인가하면은 모세는 卽 割禮를 成事못하면 死는 것이고 成事하면 生한다는 重大意味가 있는 바이다.
예수 오시면 무슨 目的이나 하면은 割禮 根本目的完成하는 實體인데 그것은 그 母親과 合하여서 만이 成立되는 根本意義있다는 것을 보여줌이었는데 妻子가 合하는 일이 없으면은 뜻 成事 못하고 예수는 死는 十字架의 死있다는 豫告的 事實을 表示함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長子로 成事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問題가 모세가 生하여만이 될 것이었는데 모세 한 生命은 全이스라엘의 代身生命이고 전 이스라엘의 代身 存在라고 할 수 있는 存在이었다. 이 모세에게 있어서 割禮 없으면은 모세는 勿論이고 全이스라엘 百姓도 全部 死亡하는 表示的 行例이었다.
그런고로 모세 妻子가 割禮가 있었기에 살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生死의 重要問題를 右左하는 根本問題成事의 責任을 표시한 바다. 이 立場에서 모세 妻子 合함의 큰 勝利的 條件의 成立을 봄이었다. 이 뜻을 세우지 못하였으면 모두 失敗할 수 있는 難한 問題이었다. 그런고로 이 한 모세의 妻子의 한 割禮가 全 擇한 百姓에게 對한
長子의 名分을 完成하게 하는 根本自體가 卽 割禮이었다. 이와같이 예수님도 오셔서 母親과 合力하여 割禮成事의 뜻을 成事하여야 할 것이었으나 예수 이 뜻을 못 成事한 失敗的 根本이었음은 누구나 아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母親 뜻 받들지 못하였기에 예수는 母親에게 對하여 갈릴리 가나에서 異蹟을 볼적에 女人이여하신 말삼의 根本意義가 있음이라. 그에 母親 對하여서 女人이여 너와 나와 무슨 相關이 있는가 한 말삼 等等의 始作은 예수는 뜻 成事의 第一 始作의 失敗를 가져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十字架 上 死의 始作의 聯關性을 가지게 되었다. 卽 모세가 하나님 앞에 뜻 成事할 수 없는 自己 生을 가지지 못한것과 한가지 事實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하시는 路程의 숨어 있는 原理目的을 누가 알 수 있으랴.
여기에 割禮에 對하여 말하기로 하다.
本來 聖經에 割禮라는 名詞가 生起게 된 것은 墮落되었기에 基因되는 事實인데 本來 해와가 사탄 피를 받고 아담까지 墮落되었기 때문에 割禮의 中心問題가 要求되는 바이다. 그런고로 아담이 主管하여야 할 해와를 主管하였다면은 墮落조차 防止하였을 터인데 해와한테 主管받고나니 墮落됨이었다. 즉 아담 陽部를 通하여 全墮落을 成事되었으니 貴任은 아담 男子에게 있는 것이었다. 이 男子되는 아담이 主管받고나니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存在로 되며 墮落의 始作의 成立을 보게한 實體는 즉 男子의 陽部이었다.
그런고로 어두움의 被를 받아들인 그 自體이니 어두움의 피를 다시름 빼는 事實을 表徵함이 目的이었다. 그런고로 아브라함 子孫은 割禮하여만이 즉 어두움의 피를 먼츰 받아서 死케되었으니 그 自體로서 살려면 그 自體로서 死亡의 피를 빼여만이 하나님께 屬할 수 있는 始作을 봄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事實이다. 그러므로 割禮는 아브라함의 永遠한 規禮로 세움이었다. 그리고 割禮있으므로 主觀性을 다시금 復歸하는 男子의 資格을 賦與함이다.
割禮에는 미움의 割禮가 있고(신10/16) 肉身割禮가 있고(창17/10) 萬物割禮가 있다(레19/23). 이것은 사탐의 墮落으로 인하여 온 天宙가 더렵혀 짐을 말한다.
割禮는 (1) 死亡의 피를 빼는 表
(2) 主管性을 다시 찾는 表
(3) 根本 뜻의 子女의 길을 찾는 約束의 表
以上과 같은 重大意味를 갖는 것이 卽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命令하시는 根本의미하는 것을 人間은 至今까지 未知의 것이다. 또 몰라야 하는 것이 한 原理였었다. 그런고로 모세의 이 行例는 全이스라엘에게 질머진 全目的成事를 表示함을 다시금 알어야 한다. 그런고로 모세 行動如
何는 예수 오셔서 할 使命的行路의 前形 表示로 그의 모든 일은 表徵된 바라는 것이 原理로 보아 알 수 있는 事實이다. 卽 하나님의 使命分擔責任의 過程은 예수의 基礎되겠으니 같은 뜻의 目標表示으로 萬事는 드러내여 나아가는 것이 根本意義였다.
모세에게 아론을 주어서 이스라엘의 贖罪的 行例의 代表者로 세우심은 모세를 協助하여 한 目的 뜻을 成事코저하는 侍從이었다. 卽 百姓의 代身贖罪責任 役割을 하심은 해와 自體로 될 聖神과 함께 예수늬 뜻을 侍從하여 人間 對하여 直接 贖罪貴任을 할 것을 表徵함이었다. 모세에게 한 代身 協助者없다하여서 아론을 준바는 아니지만 말삼의 代身을 要求하게 될 때에 아론을 세우심은 아론은 말삼 代身자임을 表示하니 말삼의 最高 問題者는 해와의 한 存在이었다. 卽 말삼 成事는 해와를 完全하게 찾는 目的으로 基因되니 즉 아론을 세워 代身贖罪하심은 예수, 해와가 合하여서 人間 贖罪의 直接 問題를 하여야 할 自己 自身의 使命分擔役割이었다. 즉 해와는 罪를 지었으니 해와로서 代身 씻는 役割을 해야 할 責任分擔이 되었으니 아론은 모세의 한 相對格者로서 百姓을 대하여 모세의 뜻 卽 하나님의 뜻을 成事하게 協助한 바는 예수 오셔서 말삼 相對찾어 뜻 成事를 잡을 것을 表徵하는 意義이다. 모세의 以上과 같은 諸條件의 成立을 보니 바로를 대하여 直接對面을 取하여 나서게 되었다. 그때 바로는 모세의 要求에 對하여서 順從치 않는 反面에 도리어 모세에 屬한 이스라엘 百姓에게 더 憎惡心을 갖게 끔 하나님은 바로를 剛爆케 할 것을 말하면서 바로 앞에 가서 이스라엘 百姓을 놓아주어 曠野에 나아가 三日쯤 여호와께 祭祀하기를 請하라 하시었다.
여기 三日路程 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前生命이 놓으느냐 안 놓으느냐 하는 問題는 三日路程이라는 問題를 걸어 놓고 始作하게 되는 基本要求條件이었다. 이 三日間이 許與 안되면은 이스라엘 全部的 目的은 始作할 수 없는 問題를 말하는 바이었다. 이 三日路程이라는 것이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成事하게하는 工作의 基本되는 要求條件이었다. 그런고로 예수 오셔서 사탄 對하여 三日期間에 對한 過程에 妻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었다. 이 過程을 成事할려면은 모세에게 屬한 具備條件 같은 諸條件具備를 보아야 할 것이었는데 이 具備條件은 曠野試驗 通하여 그러는 사탄에게 勝利함으로 成立되었으나 그의 代身役者 아론과 같은 해와의 存在의 具備成事를 보지 못하여서 三日路程 始作 路程을 自由롭게 넘어서지 못한 原因으로 十字架 三日間의 基本的 根本은 始作이었다. 이때 예수 앞에 어머님과 合하여 뜻 成事를 중심하고 해와 한 存在와 人間들이 하날 便쪽으로 順從하였으면은 예수의
十字架 路程은 다른 方向으로 效果的 路程을 보아 사탄 對하여 積極對象의 成立을 始作하였을 것인데 그 對象을 어떻게 해서라도 成事할 責任이 예수의 責任이니 죽어서 三日 期間을 터치는 使命的 責任分擔을 完成하야 할 意味가 있음이었다.
第三 節 모세에게 대한 하나님의 役事의 路程이 왜 예수의 路程 全貌되 는 理由
위에서도 簡單히 表示하였지만 하나님이 本來 지은 것이 있기에 根本 責任存在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이 墮落한 後에 사람 지으심을 恨歎하시었다(창세기 6장6절) 하심은 여기에 基因되는 바이다. 其 外에도 聖經에는 하나님이 後悔하시었다는 말삼도 있는 적을 볼적에(사2/18) 하나님도 後悔와 恨歎하는 原因은 自己의 몸으로 되는 人間이기 때문이다. 卽 사람 잃어버린 것은 自己 몸을 잃은 것과 한가지었다.
그런고로 사람들이 第一次 審判으로 因하야 全滅 當한 後 하나님은 다시금 恨歎하시어서 다시는 審判하지 않을 것을 宣布하심과 同時에 審判받게 된 最終局點은 自己가 지었든 人間이었는데 墮落되었음으로 審判이 生起였으나 墮落하게 한 사탄도 本來 하나님 自身이 지으신 存在로부터 始作基因이나 全部의 責任은 하나님 自身이니 사람을 다시금 찾아서 根本을 다시금 成事코저 한 目的을 두고 審判한 것이지만 다시금 찾으려 할 때에 하나님 自身이 直接 이 目的의 길을 닦기 爲하여서 노아 以後 아브라함을 通하여 모세를 通하여서 役事를 始作하였다. 卽 사람의 墮落의 第一間接的 原因은 하나님이고 그 다음에는 아담이고 그 다음에는 해와이라는 本來 墮落시킨 直接的 原因과는 反對로 하나님은 보게 되었다. 그래서 찾는 役事의 第一責任者는 하나님이 本이 되며 中心이 되어서 아담 해와가 찾을 수 있는 길을 닦고자 함이었다. 그래서만이 아댐 해와가 나아갈 直接 本으로 表示를 定하는 同時에 사탄 對한 勝利路程이 되어야 되니 이 本대로 하여서 아담 해와의 勝利할 수 있다는 길을 定하는 것과 같은 基礎를 세워 놓으려 하는 것이 卽 모세를 通하여 하나님이 役事시키는 事實이다.
그런고로 아담 代身 오는 예수는 하나님이 敎示하여 준 勝利의 本路程樣으로 사탄 對하여 第一次 勝利의 路程을 본삼아 나아가지 않으면 아니 될 義務가 있음이있다. 그래 예수는 하나님이 먼츰 하신 事을 本삼고 하신다는 말삼을 요한복음 5장 19절-20절에 其內容的 事實을 發表하였었다. 卽 子이 父의 行하신 事을 見外에는 其事로 自爲할 수 없나니 父께서 行하시는 것을 아들도 또 그와 같이 行하시나니라. 父께서 子를
사랑하사 그 하시난 것을 啓示하시고 또 그 보다더 큰 일을 示하시 爾等로 기히히 여기게 하심이라 하시였다.
이와같이 예수는 하나님을 本받아 第二次 勝利의 路程의 始作을 第一次 勝利路程과 같은 路程을 取하여야 할 根本意義가 있음을 알어야 한다. 예수와서는 全使命役割은 하나님 責任分擔 路程에서 보여진 사탄한테 더럽힌 바를 다 成事하여야만이 始作의 出發을 보는 바를 알어야 한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責任分擔을 모세를 세워 원수 품에서 뽑아내는 것과 같이 예수 와서 全人類를 찾어 사탄한테 빼어야 할 使命的 基臺를 象徵사킨 事實의 根本原理를 알어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이 하신 길을 따라서 하야한다. 그러야 같은 目的하나를 合하게 할 수 있는 바이다. 이와같이 分擔하여 責任成事는 非公式路程을 아는 人間 우리는 切痛치 않을 수 없는 事實이다. 예수와 聖神分擔役事도 사람 때문이었다. 이 모든 原理的 根本을 아는 우리는 全 精力을 무엇아끼랴. 이와같은 基本原理를 아지 못한 墮落人 世界에 處하였든 自我들을 알게 될 때에 그 原理의 全部가 사탄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人間이 되었으니 사탄 對하여 總攻擊하여 急速한 時日을 두고 復歸하여야 할 것을 알았도다. 이제야 참살길의 始作을 알았고 人生의 뿌리를 알았고 또 하나님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으니 우리는 무엇으로 報答을 하랴. 問題가 이제 나타난 뜻 侍奉이 最高問題로 되는 바는 두말할 바 없는 事實이다. 잃어버렸든 아바지는 六千年前이고 잃어버린 子息찾는 것도 六千年間에 쉬지 못하고 나를 찾으려시든 그의 存在 누구였는가. 卽 아버지 어머님의 存在이다. 이 기쁘고 고마운 消息을 널리 傳할 者 世上에 어데있는가. 찾으시는 그 모습을 아는 者 몇 名이었는가. 지금까지 아바지 對하여 춤배았고 아들로서되 子息이 아바지를 모른다는 언통함을 기리 참으신 그 앞의 心情을 누가 同情할 孝子가 世界에 어데 있는가. 이 길을 닦기 爲하여 世上에 孝子之道와 忠臣之道와 師弟之道를 미리 傳播하여 그 基盤삼고저 함이었는데 至今 그 自體들이 없는 恨歎之事를 또 몰라주는 人間이 되어지려는가 아는 者는 直接 對하여서 孝子로 멀리 對하여만이 뜻을 세울 수 있는 事實이다. 이스라엘 百姓은 하나님 對하여서 以上과 같이 三綱이라는 儒敎的 中心體로서 하나님을 侍하였든가. 그 原理를 아지 못하므로 그리함이었다. 그와 같은 關係를 敎示 못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슬펐으랴. 그것은 創造原理를 全部 完全히 찾어 첫
理想을 成事할려니 숨은 原理的 間隔을 두고 墮落하였기에 敎示못함은 前番 말한바와 같다. 이와 같이 알어야 할 百姓이 아지 못하고 王으로 알어야 할 主人公을 아지 못하며 師이라면 以上없는 者로 侍奉할바로 아지 못하는 원수편 對立하여 섰든 그 自體를 對하여서 하나님은 얼마나 안타까운 心情이었으랴. 無知한 百姓을 찾아서 子女삼으려니 모세를 세워서 바로를 直接 對立하심이었다. 至今부터 모세는 그 使命의 첫 出發을 원사 사탄의 代辯人 바로 한테로 발을 옮기게됨이 크나큰 歷史의 希望의 焦點이었다. 모세가 바로 앞에 나타나서 거듭나는 異蹟으로 바로를 屈服하게하는 役事를 始作하였다. 바로에 對하여 十餘次에 對한 異蹟을 通하여서 바로 自身이 하나님 앞에 犯罪하였다는 告白과 함께 完全屈服을 標準하고 役事하심이었다. 하나님이 바로를 屈服케 하심은 무슨 目的이었는가 하며는
(1) 바로(사탄)가 다시는 擇한 百姓에게 生覺조차 못하게 하고저 하심이고
(2) 바로(사탄)는 힘이 없으니 하나님의 要求대로 自服하는 同時에 順從하여야 할 것을 自覺케 하기 爲하여
(3) 원수의 모든 것을 善하게 하기 爲하여
(4) 하나님을 反하는 者는 망한다는 것을 自覺케 하기 爲하여
(5) 長子의 根本 血받은 者를 쳐서 원수의 血을 滅하기 爲하여
以上과 같은 것이 원수 바로(사탄)는 自覺하여 自然屈服을 標準함이고 이스라엘 百姓에게는 무엇을 찾게 하기 위하여 바로를 剛愎케 하였냐하면은
(1) 바로(사탄)은 원수로 憎惡心을 품게 하기 爲하여
(2) 바로便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리기 爲하여
(3) 우리편에는 絶大能力 하나님이 같이함을 알게하기 爲하여
(4) 애급 대하여 이스라엘 百姓의 미련을 全燒하게하기 爲하여
(5) 애급 사람 對하여 한사람이라도 이스라엘 百姓의 情을 通하는 자가 없게하기 위하여
(6) 하나님이 미워하는 程度만침 이스라엘 百姓을 올라놓게 하기 위하여
(7) 하나님의 뜻에 一貫된 行動을 培養하기 爲하여
(8) 어떤 難關이라도 하나님은 打開하여 줄줄 알게하기 위하여
(9) 하나님을 對立하여 反對하는 者는 누구나 永遠한 원수로 알게하기 爲하여
(10) 前程의 勝利的 要素를 培養하기 爲하여
(11) 뜻을 바라 躁急하지 않게하여 永遠한 順從을 세우고저 하여
이상과 같은 意義로서 이스라엘 百姓을 오래 連帶시켜서 하나님의 바라는 條件이 具備할 때를 보기 위하여 바로(사탄)을 剛愎케 하심이었다. 이리하여 極度의 하나님을 대신한 모세와 사탄 代身한 바로와는 對立戰을 展開함이었다. 그리하여서 最後 勝利와 함께 이스라엘 百姓은 希望과 所望과 幸福의 곳 가나안 福地로 향하기 始作하였다. 이 始作은 오날 信仰生活 出發 路程한 表示的 路程이라는 것을 알어야 한다.
長子를 치심은 하나님과 사탄과의 對峠戰 展開에 失敗하는 終局에는 애급에 있는 長子에 對한 재앙을 내리심이었다. 이것은 무슨 意味냐하면은 사탄의 어두움의 血을 받은 百姓代表의 長子들은 더욱이 그의 直接的 먼츰 받은 血의 種子니 하나님이 미워하심의 百姓中 먼츰 난 者로 무엇이나 치게 되었다. 卽 사탄의 所有物 中心이었다. 이스라엘에게도 長子에는 羊의 血로 代贖하게 한바는 이 재앙을 避하게 하였음이라. 이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은 예수는 배암血을 받았던 百姓을 치는 自體로 오는 同時에 예수便에 屬하는 者도 代身血로 卽 예수의 生命을 받아 살수 있는 言約의 表示이었다.
모세 앞에 屈服한 바로는 드디어 이스라엘 百姓을 내보내게 되매 애급에 있는 財物을 取하여 가지고 오게 되었다. 이스라엘 民族은 모세를 中心하고 出發함과 同時에 하나님과 直接生活하는 한 路中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스라엘 百姓을 아주 내보내게 된 것을 안 바로는 분하여 兵車를 몰아 이스라엘 百姓을 追擊하게
되었다. 그래 이스라엘 民族은 애급 兵車가 오는 것을 騷動하난지라. 앞에는 紅海가 가로 막히고 뒤에는 追兵車가 있으니 할 수 없이 죽는구나하고 全民族을 騷動하난지라. 그때 모세는 여호와께 알리니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손에 든 杖으로 紅海를 치라 하심에 打신지라. 紅海가 갈라저 陸地와 같이 건느난지라. 이것은 우리 過去信仰路程에 있어 사탄 主管下에서 예수 품으로 드러올적에 사탄은 바로와 같이 우리 뒤를 追兵하는 것을 表徵하는 바라. 예수를 依하고 나아가면 卽 杖로치면 紅海를 갈른것과 같이 우리로 예수는 杖의 代身으로 우리의 紅海같은 過去 世上에 苦海를 갈라서 紅海를 건느는것과 한가지로 살수 있다는 表示이엇든 事實이 있는 바이다.
그래 이스라엘 百姓이 紅海를 걷는 後에 메추리와 만나와 生水를 주어서 苦痛에서 救援하심은 예수 오셔서 우리 生命蘇生要素를 無條件으로 줄 것을 보여 줌이었다. 신曠野로부터 호렙山 盤石 生水까지의 路程은 우리에게 無條件으로 만나와 메추리와 生水까지의 路程을 우리에게 無條件으로 만나와 메추리와 生水를 줌이었다. 그 生命要素를 받고 나아가는 이스라엘 民族 앞에는 아말렉 族屬의 攻擊을 받게 되었다. 그때 모세는 아말렉을 對하여서 여호수아에게 싸우라고 命하시고 山頂에 올라가 하나님의 杖을 들고 서니라. 모세가 手에 杖을 들면 여호수아 勝利하고 손을 내리우면 敗하난지라. 그래 아론과 훌은 石을 取하여다가 모세를 앉히우고 아론과 훌은 右左손을 終日들어 아말렉을 天下에서 除去하려니 爾는 是事를 記念하기 爲하여서 冊에 記하야 여호수아의 耳에 읽어드리라. 모세가 祭壇을 築고 其名을 여호와 닛시(我의 旗)라 하야 가로되 여호와의 寶座에 手을 置한 것이 有하니 여호아 아말렉과 代代로 戰리라 한지라. 이 事實은 무슨 意味인가하니 無條件保護받은 이스라엘 民族에 勝利 資格者로 세우고저하니 아말렉의 與戰을 보게함이었다.
이 事實은 卽 예수와서 우리 人間에게 無條件으로 사랑을 세어주시라. 예수의 生命받아 산 者에게는 원수 사탄의 한 對立을 주어 그 自體가 다시는 원수와 合하지 않게하고저 함이 目的이었다. 그런고로 언제나 信仰路程이 平坦한바가 아니고 혼자 살수 있는 保護 時期가 있으면 원수 對하여 勝利하여만이 될 義務가 있는 바이다.
勝利者가 되기 爲하여는 모세의 손을 들어주는 立場과 같은 條件을 保障하여만이 勝利할 수 있는 것이 原因으로 되어있다. 卽 모세는 手을 든 것은 무슨 뜻인고 하니 하나님이 품으시는 表示요 아론과 훌은 품길수 있도록 協助함이요, 여호수아는 信仰者 中心 代表者를 表示하면서 우리 自體들을 表示함이었다. 이와 같은 뜻이 成立되어만이 원수 아말렉을 問題없이
勝利條件이 成立하는 바를 表示함이었다. 그런고로 이 모든 것을 後日 第二 次 責任分擔 使命勘當者로 오는 예수와 우리가 合하여만이 勝利한다는 條件들의 要素를 보여줌이었다. 모세와 杖은 하나님의 代身을 表示함이고 石은 하나님의 寶座를 表示함심이다. 아론과 훌은 예수와 해와를 表示함이고 여호수아는 믿는 信仰者를 表示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後日에 예수를 侍하고 聖神을 右左p 두고 하나님을 받드는 者라야만이 勝利한다는 表示的 意義가 있음이다. 그리고 사탄이는 卽 아말렉과 代代로 戰하리라 하심은 石을 쌓아 모세를 앉히우신 緣故니라 이것은 아론과 훌이 한것이지만 하날과 땅을 나눠 세우여야할 立場에서 어렵다고 自己自意行事가 사탄이 하날 成事時까지 對敵할 수 있는 길을 지어주었으니 아말렉과 代代로 싸우심이라 하시었다. 이와같이 聖徒는 사탄 對하여 서 있음으로 뜻에 屬한 立場을 確固히 잡지못하면 끝까지 戰을 하여서라도 勝利하여야 할 것을 豫告함이었다.
이와같이 우리 聖徒는 아말렉과 같은 원수 對하여 싸워 勝利하여야할 責任이 있는 바이다. 聖徒를 사탄과 함께 싸우시게 하는 理由는 사람까지 全部가 사탄 主管할 수 있는 資格者되어야만이 根本이니 이런 싸움이 있게하는 바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直接指導를 받으면서 낮이면 구름기둥 밤이면 불기둥으로 引導함을 받아 시내 曠野에 至심이었다. 卽 이것은 直接품에 保護하여 引導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내 曠野山前에 留한지라. 그때 모세는 山上에서 돌아와 이스라엘 百姓에게 告하며 가라대 하나님의 말삼을 善히 듣고 나의 規禮를 지키면 祝福받아 世界에 없는 祭司長國과 聖한 百姓이 된다는 말삼을 宣布하신지라. 이 말삼은 예수 오셔서 大祭司長이 되어 全世界를 統治할 後日의 約束을 세우심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하는 바의 理想目的이다. 이와같이도 사랑을 받은 이스라엘 百姓은 더욱 하나님한테 合할수록 사탄은 이스라엘 뒤를 따르면서 曠野까지 따라나와 不信 不順從의 自體를 對할려고 試圖는 如前히 繼續하였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 뒤에 사탄이는 뒤를 따르게 되었다.
이것을 아지 못하는 이스라엘 百姓은 다시금 不信 不順從이면 死亡에 處하는 것을 切切히 뼈에 세기지 못하였다. 때마침 시내 山上에 70 長老를 데리고 모세는 40日40夜를 지내면서 十誡命 말삼 石碑를 받게 된지라. 그때에 六日間은 여호와의 榮光의 雲이 시내 山을 덮더니 7日에도 여호와 雲中에서 모세에 顯메 여호와의 榮光의 形狀이 이스라엘의 目前에 火焰과같이 비치심에 모세는 그 雲裏으로 入해 四十日四十夜를 지내게 되었다.
이 期間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가장 重大한 期間인 同時에 百姓에게 가장 지루한 期間이었다. 이 十誡命 받음과 同時에 聖殿建設 始作을 보게된바이다. 이것이 가장 重要한 實體의 事實이었다. 聖殿構造를 살펴보면은 至聖所가 있고 聖所가 있음이었다. 至聖所에는 法櫃가 있고 그 우에 두 그릅이 있고 그 間에 贖罪所가 있고 또 그 앞에 聖所가 있난지라 聖所와 至聖所는 區別되어 있게 되었다. 卽 聖殿은 예수님의 한몸의 建設의 터를 表示함이었다. 聖殿으로되는 예수속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表示함이었다. 그런고로 至聖所는 하날 世界를 表示함이고 聖所는 地上世界를 象徵시키는 뜻이 있는 것이었다. 예수한 自體에게는 하날과 땅 完成이 한 存在로 있어야 한다는 表示를 말함이었다. 至聖所를 살펴보면 法櫃가 있고 그 우에는 두그릅이 있고 其間에 贖罪所가 있음은 무슨뜻이냐 하면 本來人間이 墮落함에 말삼을 잃어버린 것과 같은 言의 理想實體인 하나님 몸인 아담과 해와를 잃어버림이었다.
아담 해와 墮落한 後 그릅들을 두어서 하나님 世界와 相隔(?)하였든 것을 表示하기 爲하여 예수오시면 하날 生命樹를 찾어 生命果를 받을 수 있으니 하나님이 그릅 間에 顯나시어 直接法櫃를 덮으심을 말하심이니 하나님이 그릅의 間隔을 通하게하는 것을 表示하여 이와같은 構造를 보게한바다. 贖罪所에 나타나심은 贖罪한곳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表示함이다. 이것은 卽 自身의 한몸인 예수와 聖神을 通하여 罪를 贖하신 後에 各사람의 마음까지 하나님이 계시고저 함이 目的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이 基本터를 닦는 存在로 올 것을 말함이고 그 聖所같은 그에 接하여 안기게 되면 그도 亦是 하나님을 모실수 있는 理想을 再建設코저함이 根本目的이었다. 그때 예수 오신 後부터도 至聖所와 聖所 區分이 없게 된 것은 聖殿 쓸데 없는 바는 예수의 한몸을 象徵하였든 基本自體가 表現하니 聖殿은 無必要로되니 舊約時代의 理想은
完成함을 結論할수 있음을 表示함이었다. 그때 예수는 自己가 聖殿이라는 것을 明白하게한 意義는 여기에 有함이라. 예수오셔서 그릅으로 막었던 하날 世界와 通路를 지었고 生命果의 理想目的 達成의 始作은 全宇宙를 通하여 成事코저하는 重大目的意義를 두고 聖殿建設을 하게하였다 하심은 누구나 다잘알어야 한다.
그런고로 아말렉을 勝利한 後에 이 聖殿建設始作이라 하심은 예수를 믿는 信者들은 원수를 勝利할 수 있는 資格者가 되면 우리 信者도 聖殿 建設할수 있다는 意義를 告함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全人類에게 對하여 苦待하는 最高目的이니 이 얼마나 貴한 所望의 存在였을가. 卽 누구나 하나님을 直接 對할수 있는 한몸 될수 있는 基本原理를 세우고저함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은 人間과 父子之間인 根本을 찾는 뜻의 成立이 始作이다. 이와같이 貴重한 聖殿의 始作을 보려고 모세는 山上에 四十日 四十夜를 지내는 中에 百姓들은 아론을 衝動시켜서 금송아지 偶像을 지어 심기난지라. 여기에 벌써 이스라엘 百姓들은 사탄 工作의 基礎를 지어준 行動으로 나아가 그 偶像을 自己들의 神으로 섬기난 것을 目見한 모세는 大怒하여 手에 든 二石板을 던저 破한지라. 그런고로 여기에 모세는 非法的 行動을 始作하였다. 石板들은 言을 記錄한 것이었으나 이것은 아담 해와의 實體들을 表示함이라. 卽 石碑를 깨는 行動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對하고 있는 사탄 對하여서는 기뻐하는 行動이다. 卽 結果에 있어서는 사탄의 시킴받아난 行動에 지나지 않는 行動이었다. 그러니 여기가 하나님께 있어 크나큰 重大之事가 表現을 보는 事實이다. 卽 다시금 오실 存在에 對한 한 破壞를 意味하는 바를 表示하는 行動의 結果이었다.
이 二石板이 무엇이냐하면 自己의 몸을 表示한바이요 全이스라엘 보다도 貴한 自體인것이었기에 여호와 大怒하여 全百姓과 아론 以下 全部를 塗抹하시고 모세로 하여금 이보다 强하고 담대한 나라로 되게 하시겠다고 하심에 모세는 다시금 四十日 四十夜를 禁食하여 하나님이 같이하지 않는 것을 돌리켜서 贖함을 받고 石板 二를 만들게한 石板에다 다시금 여호와 한테 言을 記錄받으니 前과 같이 모세에게 光彩가 發하난지라.
그런고로 다시금 뜻 繼承할바를 알게함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이스라엘 民族뒤를 다시금 이와같은 原因을 通하여 侵入의 길을 엿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不拘하고 이스라엘 百姓은 모세를 反對하여 애급에서 나온 것을
恨歎하여 먹을것이 없음으로 애급에서 나온 것을 말하니 모세는 會幕間에 도착하여 伏니 여호와의 榮光이 그 上에 顯아 가로되 杖로 아론과 더불어 會幕을 묶고 그 目前에서 盤石을 쳐서 水를 내어서 會衆과 牧畜에게 먹이게 하라하메 여호와의 命대로 모세는 其 目前에서 杖을 들며 갈아대 悖逆한 百姓들아 我言을 들으라. 우리가 물은 此 盤石에서 水을 내게하여 너희가 飮케 할려고 한다하면서 모세는 杖으로 盤石을 二次나 처서 水이 더 많이 나오난지라. 이것이 가데스에서 한것이었는데 그 때에 여호와 모세와 아론에게 謂시기를 너희가 我를 信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子孫의 目前에서 我를 聖케하지 아니함으로 너희를 引導하야 我가 너희에게 베푸신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 이스라엘 子孫이 여호와를 向하여 爭매 여호와 自己의 거룩함을 顯심으로 此水을 무리바라 하심이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뜻 들지 못하는 行動이 卽 므리바 水로 因함이었다. 이로 因하여 모세와 아론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根本意義였는가 하면 盤石한번 打것은 許諾된바지만 두 번打것은 許諾하지 않은 일인 同時에 또 許諾할수 없는 犯罪이었다. 盤石한번 打라는 것을 許諾하는 바는 너희가 順從하고 信지 못함으로 墮落하여 하나님의 몸되는 實體에 사탄으로 侵害받아 하나님의 몸을 破하는 行動의 始作을 보았기에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盤石을 말함은 무엇을 말함인가 하면 卽 하나님의 몸의 表示다. 고린도전서 10장4절에 盤石은 곧 그리스도라 하심을 보아도 盤石은 하나님의 몸인 同時에 그리스도를 말함이었다. 그런데 한번 打한 바를 容恕한 바는 아담이 不順從으로 말미암아 破한 것을 表証하는 바이었기에 하나님 自身의 代身 몸의 表示인 盤石을 打라고 하심이었는데 意外에 두 번을 打한 것은 한번은 意外의 것의 行動인 同時에 사탄이 다시금 하나님의 몸을 치는 表示的 行動을 함이었다. 한번더 打한 것은 모세가 치섰지만 사탄이 打것과 같은 行動의 結果로 되어지었다.
이 表示的 實事의 失敗는 다시금 石板과 함께 破함을 받은 行動과 같은 바이었다. 石板 二은 다시 찾을 수 있는 예수와 해와의 表示이므로 다시금 찾어서 세울 수 있으나 盤石은 石板의 根가 되는 하나님의 根本되는 바를 表示하는 바의 몸이었다. 그런고로 實體 몸과 根本 몸을 犯하는 犯行이야 사탄에게 있어서는 다시금 勝利할 수 있는 行動의 基礎를 不順과 不信한 結果로 잡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하나님 앞에 犯한 모세와 이스라엘의 罪는 사탄의 터가 되는 始作인 同時에 다시 보내시어 第二 次 責任分擔 使命者로 오는 예수까지에 對한 未完成의 한 表示的 根本實體를
犯하는 行動이 되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의 不順과 不信은 예수까지 다시금 打수 있다는 根本原理가 始作됨이라. 이 무서운 行動이라 아니할 수 있으랴. 이 行動은 즉 하나님만 앞에서 한 바가 아니고 사탄 앞에서 하였기에 이와같은 사탄의 기쁨의 한 勝利圈을 보여주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탄은 더욱 이스라엘 百姓 對하여 侵入의 基臺를 잡고 侵入할 수 있는 行動이 始作됨으로 이스라엘 民族 앞에 蛇을 遺받아 물리게 하게 한 것은 다시금 그 墮落시킨 本體의 侵入한다는 것을 表示하여 준 바이었다.
이 蛇에 물린바를 無事하게 되려면 火蛇을 지은 것이 旗等上에 있는 것을 보여만이 나옴을 받으리라고 한 것을 表示하여 준바이었다. 그런고로 모세가 盤石 두 번 친것이 卽 하날蛇的 예수의 自體가 侵犯當하여 死케 하는 行動의 基因을 許할수 있는 原因이 됨이러라 하는 表示였다. 이것은 卽 不順과 不信의 結果의 膳物이니 이것을 防備하려면 무엇보담도 實體인 예수 앞에서 順從과 信는 것 外에 要求되는 根本이 없게되었다. 그런고로 不順從 子孫들은 배암 사탄한테 便한바되어 曠野에서 全滅하게 한지라. 그런고로 가나안 땅은 信과 順從한 者만이 基業받을 곳이라는 것을 表示함은 우리 理想國家로 不順從者와 不信者와 恐怖者는 못가는 곳이라는 것을 象徵함이라.
乳과 꿀이 흐른다고 하는 바는 가나안 福地는 우리 本理想 하날 나라라는 곳을 表示하여 준바이다. 모세가 死는 것은 不順으로 인한 失手로다. 이와같이 예수도 其 結果를 보리라한바를 알어야 한다. 이스라엘 民族이 가나안 땅에 드러와서 基業받게 될 때에 가나안 民族을 물리치는 役事를 始作하여서만이 基業地를 찾게됨이다. 모세가 失手로 因하여 여호수아가 뜻을 세움이었다. 이것은 盤石 두 번친 연고니라. 여호수아는 예수의 한 表示的 存在도 되면서 모세의 뜻 成事者도 된다. 하나님의 全 뜻 成事的으로 보면은 모세부터 예수까지매 여호수아는 예수로 象徵한바고 모세한 뜻 中心하고보면 第二 모세 뜻 成事者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오셔서 勝利하여야할 基礎인 하나님的 責任分擔路程이니 예수 世上에 와서도 卽 하날나라 建設中에서 원수와 싸와 基業作定이 남어 있음을 表示함이었다. 師士들을 세워서 役事하여 基業을 完全成事할수 있도록 協助하심이었다. 師士後에 王을 세우심 王으로 그의 目的을 達成할 수 있기에다. 이와같이 예수 오시기 前에 벌써 예수 오시면은 直接王으로 설수 있는 基礎工作이 있다함을 豫告함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이 勝利한 後에 사울王을 세우심은 누구를 表示함이었나하면은 第一次 아담格者의 王位格을
表示함으로 失敗도 그 原因을 表示한바다. 다윗 王을 세워 하나님의 權勢를 드러내고 그 子 솔로몬은 榮光의 王으로 聖殿 完成王이라는 것을 表示한바는 예수 오셔서 뜻 成事하여 權勢로서 榮光으로서 本뜻 聖殿完成理想이 展開될 것을 表徵한바이었다.
그런고로 예수는 이 目的을 完成하여야 할 使命的 課業을 받고 있는데 이스라엘 百姓이 믿지 않고 順從치 아니함으로 예수 自身의 死게 함을 보여 하날的으로는 榮光이요 땅的으로는 權勢로 成事할 全根本理想을 未成事하고 갖기에 다시금 오시겠다고 하심이었다.
그런고로 이와같은 하나님的 第一次 責任分擔 勝利路程에서 사탄이한테 侵犯을 받았기에 行動의 侵犯은 예수로 하여금 第二次 成事責任使命 分擔을 未成事케하여 다시금 實體成事로서 오지 않으면 안될 重大課業인 榮光王으로 나타날 수 있는 터를 예수는 權勢王格으로 사탄 對하여 勝利하여 全人類를 根本子女되로 百姓되로 復歸하여야 할 責任이 남아 있기에 再臨하신다는 根本目的이 있음이었다. 再臨이라는 것은 하날 슬픔의 한 事實이고 사탄이 기뻐하는 行動의 發露의 結果이었다.
그리하여 예수오셔서 靈的으로 이 舞臺를 世界舞臺로서 擴大하여 靈으로 全人類를 찾어서 根本터까지 卽 墮落 사람 部分까지 靈的으로 끄러 올려야할 責任的 使命을 聖神과 合하여 成事하여 다시 몸으로 成事의 터를 세우심이었다. 이런고로 靈먼츰 成事하고 肉身成事코저하여 남어지는 바가 目的이다. 그런고로 예수는 肉身몸을 쓰고 再臨하여야 된다는 바를 아러야 한다. 사탄 對하여 權勢로 찾어 榮光을 누리어야만이 根本目的이 完成하는 바이다. 이것을 全世界的으로 한 主管下에 成事할려고 하는 바가 하나님의 뜻이며 또 根本 創造理想이었다.
그런고로 世界에서 예수를 中心한 國家들이 權勢로 사탄 對하여 勝利하게 되면 榮光王 再臨主가 나타남이 멀지 않음을 表示한다. 예수가 사탄 對하여 全世界的 大勝利의 한 分水嶺 戰爭이 卽 審判 時期이다. 其 後 再臨主는 사람을 갖고 榮光王 格으로 나타난다. 그런고로 예수 와서 未成事 部分을 完全히 達成하여야만 예수의 要求와 目的이 完成할 것이다. 이 舊約에 結果인 三大王 卽 사울王과 다윗王, 솔로몬王들은 全部 하나님의 攝理的 全部를 表示한바의 王들이다. 사울王은 墮落케 하여 하나님 反하는 아담의 表示가 되고, 다윗王은 예수를 表示함이 되고 솔로몬은 再臨主를 表示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直接的으로 責任分擔의 한 路程은 第一段階를 보게 되었다. 그런고로 最高目的인 하나님이 再臨할수 있는 聖殿造成한 根本完成意義는 한 成事를 보았으나 全이스라엘 百姓과 하나되는 것이 至今
以後의 한 사람 對한 要求의 對象이었다. 그것은 聖殿에서 要求하는 卽 하나님이 要求하는 全規例가 이스라엘 百姓全 生命의 基本이면서 全財産의 基本이며 國家成事의 基本이며 理想完成의 基本이었다. 이것은 卽 이스라엘 百姓에게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貴한 存在가 聖殿을 높이면서 뜻 成事를 基礎잡아야 할 重大義務가 남아 있음이었다.
여기에 聖殿成事하여서 예수와서 한 基臺를 成事할 수 있다는 表示的 成事는 보았으나 百姓으로 하여금 聖殿 뜻 즉 하나님의 言이 全守行의 始作이 完成부터 예수와서 뜻 成事할수 있는 聖殿될수 있는 第二使命的 準備의 터를 各自가 닦는 것이 舊約歷史가바라는 所望이었는데 全 百姓은 어려우나 너무나 하나님과 合함에 繼續하여 나아가여야 할 義務를 分擔하시었다.
그리하여야만이 예수와서 傳하는 바의 福音에 順應함으로 예수의 몸될 수 있는 聖殿에서부토 우리는 한 分聖殿 建設理想을 造成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承할 수 있는 터를 成事하여야 할 使命段階가 즉, 솔로몬 王以後에 이스라엘 百姓이 질머진 근 重大目的이었다. 그런 反面 사탄은 이스라엘 百姓들에게 妙한 手段을 하여서라도 하나님이 直接 取하여 나오는 그 뜻 成事의 길을 分裂하고저하여서 여러 모양으로 不順과 不信의 씨를 찾어서 이스라엘 百姓에 對하여 侵入의 魔手를 뻗치려는 試圖에 强硬히 對峠하여서 하나님 便에 더 깊이 서서 나아가야 할 立場임에도 不拘하고 王으로부터 百姓은 淫亂의 神의 根本인 원수를 섬기는 方向으로 나아갈려는 百姓을 또 打여 覺心케 하여 오면서 가진 手段을 다하여서 이 百姓을 保護하여 왔는바이었다.
그러나 그 心情을 알고 안타까하는 者는 漸漸 그 뿌리조차 보기 難하게 聖殿을 더럽힌 行動이 몇번이었든고 하나님은 聖殿을 세워서 뜻 成事基礎의 表示는 完成한 目的基本을 잡어서 約束은 始作하였으니 그만 둘수 없는 責任感 그 外 사탄은 氣勢堂堂하여 하날뜻을 破壞하는 그것을 볼적마다 功드렸던 이스라엘 百姓을 破棄할 수 없는 事實이다. 破棄하면 全部가 死亡의 苦에 삼켜질 것이며 하나님 亦是 不安할 根本意義를 避할 수 없는 事實이니 아모리하여도 그 뜻을 成事하여야 할 바가 하나님의 課業이니 先知들을 세워서 그 뜻을 百姓들이 聯和할 수 있도록 聖殿 뜻 維持를 繼續하여 왔든바이다. 그런고로 그 뜻 根本目的은 예수 한 存在가 中心이었다.
그 다음은 예수께 合하여 한몸되어 第二次 예수 存在와 같은 繁殖理想目的始作의 全部가 이스라엘 百姓行動 如何로 基盤을 잡을 수 있는 바이니 얼마나 아바지 뜻에 안타까운 心情이랴.
그런고로 聖殿지키면서 하날 뜻을 받들 수 있는 周圍工作을 繼續하면서 基本되는 自體인 메시야를 보내여서 뜻 成事할 最高目的을 이스라엘 百姓에게 豫告하여서 그 뜻을 받들 수 있는 그 路程을 지켜나가게끔 하여서 先知者를 通하여서 메시야 보내실 것을 豫言하여 이스라엘 百姓을 刺戟하시었다. 그러나 그 뜻을 바라면서 十數百年 동안을 繼續하면서 勸告하여 왔든 바이었다. 그러나 그 뜻을 이스라엘 百姓이 積極協助못하여서 이와같이 뜻 成事의 時日을 延長 시켜왔든바이었다.
메시야 約束을 받고 바라는 百姓은 躁急하게 바랐으나 하나님의 뜻 中心하고 實踐에 對하여서는 忘却하고 自己의 要求들만 바라는 그 自體는 墮落의 血을 받은 悖逆의 百姓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리 참으시면서 메시야 오기 前에 對한 期間도 알려주어 그의 바라는 希望性을 높여주어왔다. 메시야 오기 전에 먼츰 그의 全目的을 받들 수 있는 準備工作使命者로 오는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約束하여 그 時期的 限度를 보여주었든 바이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은 全部가 메시야 降臨이 全 바라든 所望으로 그를 生活內로서 뜻을 찾어 나오게 되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은 聖殿中心하고 메시야 所望이 한 目的으로 바라오면서 希望을 높이하여 自然的으로 自己들의 準備를 繼續하여왔든 바이었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 百姓과 合하여서 基礎工作과 함께 메시야를 世上에 보내주어 그들의 所望을 成事하여주는 同時에 自己의 目的實行의 한 기쁨과 期待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願하시는 메시야 보내주면 全 이스라엘 百姓은 生命代身 貴하게 알면서 그의 全 周圍에 대한 團束을 지어 聖殿理想을 실현코저 함이었는데 그 뜻을 아는 者 몇名이였는가? 그래 하나님은 한 所望을 갖고 第一次 하나님的 責任時期는 끝마추어 第二次 責任使命分擔의 行路를 잡아주고 攝理繼續하여서 自己몸으로 지었든 아담 해와의 使命的 分擔成事路程으로 옮기기 爲하여 오신바가 즉 예수였다.
예수는 第二 아담이다. 聖經에는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을 보아도 로마서 5장 14절을 보아도 예수는 第二아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 祖上 아담 해와가 墮落시켰으니 原理되로 自己들의 犯한 責任使命을 다찾어 復歸하여야만이 根本뜻을 成事할 수 있는 創造理想이 됨이었다.
第三 章 第二次 하날 뜻 成事責任使命者로 오신 예수의 責任分擔 攝理期間에 대한 根本意義
第一 節 地上攝理 路程에 대한 根本意義
舊約時代의 全目的 終結은 예수 한분에 基因하며 그의 完成的 使命도 예수 한 存在가 中心이었다. 聖殿을 세우기 爲한 行義의 路程은 舊約時代의 한 中心路程이었고 그 路程脫線은 不義라는 死亡의 始作이라 한 것은 잘아는바다. 예수 한 存在의 價値는 卽 全 이스라엘 聖殿 + 이스라엘 百姓보담도 貴한 한 存在이었다. 卽 四千年 歷史를 通하여 하나님이 攝理한 結實의 自體가 예수였다. 왜냐하면은 하나님 全天宙目的은 예수로부터 다시금 찾는 價値의 存在니 이 모든 것보담도 예수는 하나님 앞에 貴한 存在이었다. 예수 完全히 살아서 天宙살고 하나님 完全히 살며 예수뜻 成事하여야 하나님 뜻 成事라는 한 中心點의 存在가 地上 예수였다.
하날 成事로 예수 하나로부터 始作이라는 原因은 더 말하지 않어도 잘 알줄안다. 이 天宙의 中心點 예수의 한 存在가 地上에 오는 바는 地 아니면 뜻 成事 못하는 하나님의 創造原理의 中心地가 卽 地上이었다. 地上에서 사람 祖上 아담 해와는 墮落하였으니 땅 中心하고 復歸하여 그냥 하나님의 萬世 前 理想 卽 創造理想을 原理되로 成事할 수 있는 條件成事를 보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땅 없으면 하날은 未完成하여만이 하날 뜻 圓滿成事하고저 함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의 뜻이니 모두가 同一한 基点上을 分離할 수 없는 理由는 한몸된다는 基本因果로 되어 있기에 이와같은 貴한 한 存在가 예수인데 이 예수를 보내기 前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마 하심은 예수한테 사탄으로부터 被害를 받지 않게하기 爲하여서 엘리야를 보내어 이 根本自體 오신 다음에 前이스라엘 百姓의 大歡迎 받게하여 全 百姓은 예수한분 만으로 無限한 榮光이며 그들의 자랑으로 信과 侍여야할 使命的 責任들을 다할 수 있는 具備條件을 지어 놓기爲하여서 엘리야를 보내주마 하신바가 그 目的이 있는 바이었다.
이스라엘 百姓 對하여서는 直接引導하여서 뜻 侍奉으로 培養하였지만 世界的으로는 하나님은 全人類에게 모실수 있는 工作도 歷史的 聖人들을 通하여서 東西洋에 攝理를 하여 合成化 할려고 하는
뜻 成事 豫備 工作도 始作케 하심이다. 其 使命的 代表 人物들이 卽 孔子며 釋迦이었다. 또 哲人 소크라테스 等等의 良心的 道를 중심한 善을 標準하고 敎示케함도 그 根本意義였음을 알어야 한다. 어느 宗敎든지 근본을 善한 神을 標準케 함은 卽 하나님이 攝理하시는 目的을 根本하고 있다는 바를 明示하는 바이다. 그런고로 하나님 根本 뜻 成事하면은 그 自體인 가르침들도 한 根本上에서 總合을 보여야 되는바도 原理로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한 存在의 理想中에 뜻 中心이니 全 하나님의 理想을 完成할 根本体이니 예수의 뜻 成事時는 全 天宙는 한 中心에서 起動되어야 한다. 宗敎도 經濟도 科學도 合하여 한 基本上에 起動될 바이다. 그런 目的으로 하나님은 예수를 보내시어 찾어 맞추고저 함의 根本意義가 있다. 이와같은 크나큰 使命的 中心 存在의 降生과 함께 온 天宙는 큰 福音의 消息을 보았다.
하날은 勿論 예수의 뜻 成事를 바라는 바 그 땅은 예수의 앞에 指導받고저 함이 요구이었다. 예수 한분이 모든 生命의 근본이며 解放의 主人公이었다. 그것은 卽 사탄 世界인 非公式世界서 原理世界 예수의 世界에로 建設目的의 完成의 要求가 예수의 할 責任인 同時에 우리는 그에게 順從 信從 侍從하여서 영광을 돌리는 것이 땅의 백성이 질머진 責任使命이었다. 이 責任의 要求를 成立할려니 엘리야 와서 할 使命全部는 全百姓 合하여서 엘리야와 合心一體가 되어서 뜻 圓滿成事고저함이 目的이었다. 그런고로 이스라엘 百姓은 잘알고 있는 昇天한 存在였다. 그런고로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하였으니 틀림없이 올줄알았다. 昇天한 엘리야 언제나 오실까하고 바라는 데는 하날 向하여서 바라보는 것이 中心으로 되었다. 卽 하날로 올라갔으니 하날로써 나려올줄만 바라본 바는 事實이었다. 昇天한 엘리야로 그 當時 第一 貴하게 바라는 한 相對로 된바는 메시야 때문이었다.
메시야를 모실수 있게 하여주는 바도 엘리야니 엘리야를 바라지 않을 수 없는 必然的 要求이었다. 그런데 엘리야는 하날로 내려오니라고 바라는 者는 至今까지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유대교적 信者 等이다. 메시야로 왔든 것은 事實이매 至今은 全世界的으로 歷史를 通하여 確固한 것으로 되었으나 그 當時에 있어서는 예수를 메시야로 生覺할 수 없는 存在로 取扱되었든 바는 聖經보아 잘알 수 있는 바이다. 卽 바리세 敎人과 書記官들은 예수 對하여서 몇번식이나 묻기를
그대가 메시야면 엘리야는 왜 오지 않았는가? 엘리야는 어데왔는가? 하면서 예수 對하여 反問한바는 自己들이 歷史的으로 바라는 事實과 符合하지 않은 事實을 告白하는 것을 聖經에서 많이 볼수 있는 바이다. 果然 當時에는 참말 믿고 順從할 수 없는 바이었다. 메시야라는 그 存在는 그대들이 잘아는 요셉의 子로서 집에 뭇치어 木手業으로서 어제날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存在이며 그 內容內幕까지 잘아는 그 自體이며 生活體型으로 보아도 우리들과 다름없는 그 自體인데 어디 그 存在가 自己들이 바라는 理想한 中心存在라고는 生覺하는 點에 하도 먼 距離의 存在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게 보이었다. 우리가 바라든 그 存在는 千數百年間 約束의 存在요 希望의 存在든 自體가 예수라하니 이스라엘 百姓은 무슨 영문인지 큰 患難의 한 存在로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메시야를 바람은 全部 뜻 中心하고 바라는 것 보담도 먼츰은 自己를 中心하고 바란바는 事實이라 아니할 수 없다. 베들레헴에서 날줄로 알았다. 그러면은 自己들의 메시야 오면 한 조각의 食物이나 居處할 房이나 衣服이나 그 中 한가지라도 準備해놓고 베들레헴을 向하여 먼츰 무슨 色다른 消息이나 있는가 하여서 苦待한 者 萬一 있다면은 메시야 誕生도 알았으리라. 그런 存在조차 없었다는 事實을 볼때에 그들의 메시야 苦待는 벌써 全部가 自己 中心이었고 自己들이 메시야의 힘을 비러서 좀더 좋은 것을 바랐든 것이 事實이라는 바를 알 수 있다. 그런고로 各自 各自는 自己들이 理想에 符合하는 以上의 存在로 바랐다는 其 立場에 있을 때 예수란 者가 出顯하여 너희들의 理想의 存在라는 宣言은 하도 너무한 同時에 憤慨할 事實이라 아니할 수 없다. 果然 예수는 肉身쓰고 나니 自己들과 同一樣式으로 살어왔고 또 至今도 變함없이 同一한 樣이니 果然 그 自體에 對하여 疑心하는 바 當然之事였다.
이와같은 예수를 對하여서 더 疑心케 된바는 엘리야가 前提問題의 存在였다. 自己들이 엘리야라고 하는 그 者가 왔다면 예수니 메시야니 如何튼 問題는 解決인데 엘리야도 오지 않고 메시야 왔다니 그 어찌 信任할 수 있으랴! 지금 우리는 바꾸어 生覺할 必要를 느끼면서 昔日에 이스라엘 百姓을 辱하여 되는 問題다. 그러면 至今은 예수 卽 메시야가 萬民의 救主요 이스라엘이 希望한 中心存在라는 것은 歷史的으로도 認識過程으로 나왔으니 예수는 메시야며 뜻하신 豫言의 實體라는 것을 알며 그 前에 올 엘리야도 왔었다는 바를 世上 敎人들은 다 아는 事實이다. 卽 엘리야는 왔는데 洗禮요한 이라는 것을 歷史로서
認定하여주는 聖經을 보아 아는 事實이다. 또 예수는 엘리야가 왔으나 任意로 待接하였다고 하면서 福音書에 洗禮요한을 指摘하여 말한 바를 보아서 아는 間接的 知이었다. 果然 그 當時의 立場을 바꾸어 가지고 生覺하면은 至今은 果然 메시야로 信 侍 順從을 할 者 몇 名이나 될까? 지금 現敎人들이 바리새 敎人信仰 만치도 못한 者 많은 이 때에 生覺할 問題이면서 念慮할 重大問題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어찌하여 洗禮요한이 엘리야가 되는가 그 根據는 무슨 뜻이며 하나님이 攝理하는바는 무슨 意義를 두고 엘리야를 보내준다고 하고는 洗禮요한이를 보내였는가 하는 問題의 根本을 먼츰 알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根本意義를 밝히지 못하는 現實世界가 하날이 攝理하는 뜻의 侍奉을 完成할 것인가. 지금은 末世라고 하는 때이니 聖經 中에 未知였든 事實이 明白히 되어야만이 聖經目的을 끝내고 再臨主를 迎接할 수 있는 決定的 關門을 삼을 수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이런 重大視 되는 未知의 根本을 밝히기로 하자.
第二 節 洗禮요한이 엘리야되는 根本意義
하나님이 根本 뜻을 成事하시려 할 때에 그 뜻 成事에 제일 要點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外 사탄 存在가 有한 것인데 이 存在가 하나님의 根本 뜻을 破壞하였고 至今까지 敵으로 나와 뜻을 成事하지 못하게하는 存在가 있기에 큰 重大한 問題가 된다. 萬一 사탄이 없다면 뜻 成事는 問題되는 것이 아닌데 사탄이 있어서 人間을 대하여 自己의 所有圈外로 보내지 않으려고 極性을 다하여서 하나님을 對에하여서 役事를 하여나옴으로 하나님의 뜻의 成事는 歷史로 延長을 거듭하게 하여 온 바이다. 이 사탄이를 全幅的으로 屈服시켜서 뜻을 未成事게 하는 工作이 없도록 사탄 全滅을 期하는 바가 要求되는 바이었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根本 뜻은 뜻을 防害하려는 사탄을 뜻의 路程에 없게 하고저 함에 根本 뜻 中心이었다. 그런고로 이 根本 뜻을 成事하려고 메시아를 보내기전에 하나님이 바라는 뜻을 反對하는 사탄이를 屈服시켜 다시는 예수의 뜻(메시야의 뜻) 成事 路程에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工作이 먼츰 問題이었다.
이 問題를 解決할 責任者로 보내마 하신 存在가 卽, 엘리야였다. 엘리야는 잘 아다싶이 하나님앞에 혼자서 사탄 全部하고 싸운 最勝勢者이었다. 엘리야가 要求하는 當時의 最高 目的은 사탄 全滅의 目的이었다. 다시는 사탄이 하나님의 뜻을 막는 곳 없
게끔 바라든 바가 엘리야가 바라든 目的이었다. 그 目的이 卽, 하나님이 바라는 뜻 成事 路程을 두고 바라보는 目的과 같은 目的이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바알神(사탄) 八白餘를 滅한 者이며 뜻 成事 路程을 完成 할 수 있게 하는 사탄 대한 重要存在 였다. 엘리야의 目的은 完成하였는가 하면은 그 當時 사탄 대한 目的은 未完成하였다. 왜냐하면 다시금 사탄이 侵入을 보아서 예수앞에까지 侵犯할 優廬性이 있음으로 다시금 이 사탄에 對立하여 엘리야가 바라는 根本目的을 完成시켜서 예수 앞에 사탄 自體의 踪蹟이 없게하기 위한 代表者를 보내어 엘리야의 바라든 사탄 全滅工作成事할 것을 바람에서 엘리야를 새로 洗禮요한으로 表示한바며 洗禮요한이 엘리야되는 바의 目的이 있는 바이다. 卽 엘리야의 目的이 洗禮요한으로 完成할 使命的 役割을 가지고 있었든 바이었다.
하나님의 뜻 中心하고 말 할적에 엘리야의 目的의 成事는 洗禮요한으로 終結짓게 되는 것이다. 洗禮요한이 와서 한 使命達成하면은 하나님 뜻은 完全成事하므로 사탄을 하나님 뜻 路程上에서 없애고저 함에서 豫言하신 엘리야가 洗禮요한이었다. 例를 들면은 하나님의 뜻은 하나인데 뜻 成事하는데는 甲(엘리야)과 乙(요한)이 完成하였다.
그런고로 뜻은 하나이고 사람은 둘이다. 뜻 하나 中心하고 말할때 甲=乙 이라는 한 몸으로 完成한 것과 같은 根本意義를 두고 豫言하심이있기에 엘리야=洗禮요한 이라고 하심이 根本目的이 完成되는 바이다.
하나님의 뜻 = 甲\乙
이런 뜻으로 말삼 하심을 아지 못하는 百姓은 큰 犯行의 行路를 取下面서 自然스러운 뜻의 行함이라고 生覺하였다. 이제 엘리야 代身으로 보냄을 받은 洗禮요한의 使命은 무슨 目的이 남아 있나 하면 하나님의 目的 뜻 成事가 完成 하여야할 土臺를 造成하여 메시야 卽 예수 自體한테 被害 없게끔 하여야 할 歷史的 責任이 負擔되어 있다.
洗禮요한의 하여야 할 使命은 엘리야의 心情과 才能으로 예수앞에서 아버지로 아달을 사랑 할 수 있게 하는 同時에 子息으로 其의 아버지께 孝道하게 하여 줄 歷史的 使命性을 말라기 四章 五節, 六節에 記錄함을 보아서 알 수 있는 바이다. (누가복음1/16-17)
그런고로 예수는 卽 누구나 다 全人類의 祖上인 同時에 全人類는 예수의 子息이라는 創造原理로 되어있는 目的 찾어서 맞출수 있는 길을 닦아야할 責任이 요한의 使命이었다. 밖으로는 사탄을 防備하고 內的으로는 百姓으로하여금 子息된 道理를 알려주어
아버지를 모시어 사랑 받을수 있도록 其 時代에 대한 責任을 蒹有한 重大立場에 요한은 서 있었다. 그런고로 洗禮요한의 全 目的은 메시야의 道를 準備하는 者로써 卽 메시야 한 분만이 그의 生命의 代身이며 希望과 所望의 全部의 存在이었을 것이었다.
또 自己 自身이 알고 있어야 할 事實이었다. 그리하여야 洗礼요한의 曠野生活이라는 全 目的은 여기에 完成을 가져오는 바이었다. 예수보담 六個月 前에 사가랴의 家庭에서 태어난 그 自体는 하날이 無限한 期待로서 보낸 者이면서 사탄이 제일 미워하는 存在이었다. 其 時代를 代表하여 뜻을 세우기 위한 三十余年生涯 모두가 예수(메시야) 한 存在가 目的인데 그 메시야를 모시는 그 한날의 기쁨의 榮光이 그대의 目的이었다. 洗禮요한의 뜻을 全 이스라엘 百姓앞에 洗禮를 施行하게되었다. 洗禮는 예수의 그 根本 뜻을 成事할수 있는 한 터의 資格을 賦與하여 주는 約束의 表示의 禮이었다.(요한 福音 一章 三十一節~三十四節)
洗禮요한이 이 礼式을 施行 함은 自己 뜻을 成事하기 爲함이 아니고 예수의 뜻을 繼承키 위하여서 하심이라는 바는 다 잘아는 사실이다. 當時 洗禮요한을 이스라엘 百姓은 하날이 보내신 한 先知者로 알고 있었다. 그래 洗禮요한 한테 이스라엘 百姓은 洗禮式이나마 洗禮요한에게 洗禮를 받음은 하날로써 보내심을 받은 者로 알고 있든 까닭이므로 新法(요한복음 一章 十五節) 其 洗禮를 받음이었다.
이 洗禮요한은 證據하기를 自己는 물로 洗禮를 주지만 다음 오시는 메시야는 火와 聖神으로 洗禮를 준다고 하시며 大衆앞에 宣布하심은 自己自身의 使命과 메시야의 使命은 格別하게 相異있음을 告白하는 바이었다. 그래 洗禮요한은 全目的 實體 메시야의 한 存在가 所望城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요한이 요단江에서 洗禮를 배풀고 있을 때에 예수는 갈리리로부터 요단江에 至하여 요한한테 洗禮를 받고저 할때에 洗禮요한은 辭하야 말하야 가라대. 당신이 나한테 나오시나있까하니 예수 말삼하시기를 許諾하라. 우리들이 義를 行하는 것이 合當하리라 하신데 洗禮요한이 許諾하여 洗禮를 施行함을 받고 水에서 올라오시니 天이 開고 하나님의 神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 其 우에 臨하심을 보시더니 天로써 聲있어 言하사대 此는 我의 愛子요 我의 (기뻐하는 者라) 하시더라.
비둘기 모양으로 聖神이 나린 根本意義는 이와같은 하날의 뜻의 存在라는 것은 洗禮요한 스스로가 알게 되었다. 其때 누구나 全部가 이 事實을 듣고 보았든가 全部는 아지 못하였지만
洗禮요한만은 잘 알고 있었다. 이렇듯이 한 目的을 責任진 洗禮요한한테 알리어 全이스라엘 百姓한테 傳하여서 하날뜻을 成事하게 하고저 하심이 뜻이었다. 이와 같이 하날로부터 예수는 메시야라는 것과 하날로 보내신 特別한 者라는 것은 알려주었으나 洗禮요한한테 예수는 메시야라고까지는 指摘하여 敎示하여는 주지 않았다. 知慧롭게 行動을 取하여야 하는 한 段階에 處하게 되었다. 그때에 洗禮요한은 自己가 바라든 메시야를 맛난슴은 그 以上 무슨 딴 目的이 어데 있으며 다시금 무엇할 使命的 外部分을 要求할 무엇이 없었든 것이 事實인 同時에 기뻐서 大衆을 대하여 積極 예수는 보내시마 하신 메시야라고 宣布하여서 大衆이 예수앞에 集結하게하는 同時에 自己도 亦是 예수 앞에 있어서 모든 代表的 態度로 나서게 되었든가. 그 自體의 態度 如何로 因하여 大衆에게 큰 影響을 傳하는 重大立場에 있다.
그런데 洗禮요한이 예수 對하여 積極的으로 예수 自身은 우리가 바라는 目的의 存在 메시야라고 大衆앞에 宣布 못함은 사실이었다. 그저 요단江에서 洗禮 받을때에만 알뿐이고 洗禮요한은 그냥 그대로 自己가 처음 始作한 洗禮나주면서 다니는 行動을 繼續하게 되니 예수를 대하여서도 大衆은 메시야라고 보는 것 보담도 洗禮요한의 行한 行禮의 도움자로써 아는 者라고 生覺하는 者는 있는 程度이었다. 洗禮요한의 目的은 그저 洗禮나 주고 다니는 것이 歷史的으로 賦與받은 全使命이었든가. 너무나 價値없는 行動이었었다. 全이스라엘 百姓대하여 生命 繼承의 한 中繼存在가 그냥 멋대로 四方을 自由로히 다니면서 洗禮만 준다는 行禮에는 우리는 寒心한 態度로 注目하지 않을 수 없는 事實이었다.
洗禮요한 自身은 亦是 예수 앞에 서서 나타난 엘리야의 代身 存在라는 것을 잘알았는가 하면은 疑心할 問題이다. 요한 福音 一章 二十一 節에 요한이 엘리야도 아니라 하심 보아도 自己 自體가 그 使命的 立場을 明白히 알지 못함을 알 수 있다. 自己 自身이 알았으면 왜 大衆앞에 自己를 宣布하여서 이스라엘 百姓의 疑問点을 없이하여야 할 責任도 準備 못하였든 바이었다. 洗禮요한 自身이 엘리야란 것을 알았으면은 大衆에 대한 責任을 勘當하여야 할 存在
로서 어데 그 責任을 다하기 爲하여서 싸워서 그 基臺를 세웠든가 自己 自身도 確固한 엘리야의 代身者라는 것은 自覺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事實이었다. 이렇게 洗禮요한은 自身使命에 대하여 積極的 準備 工作을 하여서 그 目的 本體로 오신 예수 앞에 全을 侍從의 중심 存在로 서서 예수의 全 使命의 協助者로서 또 第一 큰 사랑받을 수 있는 예수의 한 弟子로서 侍奉하는 外에 더큰 다른 무슨 目的이 있었으랴. 그런데로 不拘하고 예수와 分立하여 行하신데는 洗禮요한이 하날 앞에 重大한 責任 未完成을 가져오는 基本的 代身 行動이라 아니할 수 없는 事實이었다.
聖經을 보면은 洗禮요한은 全幅的으로 메시야라는 것을 確實하게 알지 못함을 알려주고 있다. 獄中에 있어서 弟子들을 보내며 묻기를 그대가 오실바의 메시야니까 하는 質疑, 또 다른 사람을 기대리 오리까 하는 것을 보면은 洗禮요한 自身도 메시야에 對한 解決을 못하였든 바를 알리워 준다. 이와 같이 뜻 侍奉者가 되어야 할 그 存在조차 메시야로 오신 예수를 아러주지 못하니 예수 自身에 있어서의 全期待와 所望은 如何한 程度이였을까? 果然 痛恨치 않을 길이 없을까. 누가 그 心情을 알 者 있었으랴. 여기에 洗禮요한이 예수 앞에 하날 앞에 큰 犯行의 始作이 있다는 것을 아는者가 現基督敎界에 없는바를 나도 痛憤하는 바이다.
그저 洗禮요한은 貴하고 하나님 앞에 없어서는 아니될 存在 待遇하는 것은 容恕 할수 없는 行動이라 아니할수 없는것이다. 그런고로 自己 責任 다하지 못하고 自己 뜻대로 行하는 洗禮요한이는 아바지 앞에 貴함의 存在로는 보이지 않았을 것을 아라야 한다. 예수 때문에 온 者가 其 本使命 中心地을 떠나서 行하는 其 自體는 勿論이며 其의 侍從者까지 하날로서 善아히 對버할 수 없는 存在로써 그 末路에까지 하나님은 貴히 보지 않음은 事實이다. 이와 같은 重大之事 如何가 예수 앞에 크나큰 曠野生活이라는 苦痛의 路程을 斷行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는 原因이 되었다. 曠野에 나아갈 때에 孤獨한 心中을 헤아려 同情하는 者 世上에 몇사람이었든가?
여기에 人間을 相對하여 예수의 使命範圍는 한 暗路에 逢着하였음을 누가 아는가 아는 者 아버지와 예수뿐이었다. 그 曠野의 寂寞感은 예수 앞에 큰 落望과 同時에 다시금 再出發의 한 路程을 決心케 하는 路程이라 아니 할 수 없다. 曠野까지 예수를 侍奉하여 따른 자 한 사람도 없다. 그때 먼츰 예수를 메시야로 모시는 者 있다면 이는 하날에서 내리는 큰 賞을 받을
存在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生覺하면 東方博士는 어데 갔는고, 牧者는 어데 있는고. 母親은 어데 갔는고. 洗禮요한은 어데 갔는고. 모다 自己 뜻 中心하고 行動하는 其 自體들은 예수 앞에 기쁨을 變하여 嘆息하게 하는 한 存在 等에 不過하였으며 더욱 슬픔을 激動시켜주는 基臺에 틀림없는 存在들이었다. 그런 心情을 품고 曠野生活에 있어서는 第一次 落心을 다시 復歸하기 위한 目的인 同時에 積極的 원수 사탄 對하여 最終 決判時期이었다. 사탄이 벌써 하날 뜻 成事할 터를 侵入하여서 뜻 順從 路程을 받들지 못하는 洗禮요한의 期待는 보았으니 그 다음엔 그 中心 自體인 예수까지 와서 試驗의 試圖는 原理的 한 行動이었다. 그러니 曠野生活 中 사탄의 自由行動에 對比한 예수에 試驗이었다함을 알어야 한다.
第三 節 洗禮요한 人間性 標準으로 예수를 對함
洗禮요한의 行動이 어찌 容恕받겠는가 生覺하면 몸에 솜서리 치는 한 行動이 아니었는가. 洗禮요한 亦是 예수를 대하여서 뜻 中心하고서 對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洗禮요한도 사람인지라 메시야라는 自體는 좀더 高貴한 位에서 自己에게 보여지었을 것이 없는데 별다름 없는 存在의 容貌이면서 自己들이 바라는 바와 같이 뜻의 成事의 路程을 取하여 나가지 못하는 存在로써 어찌 메시아의 資格이란 너무나 距離가 멀었었다. 요한 亦是 그 時代的으로 대하든 이스라엘 百姓과 同一한 觀點으로 서게 됨이 큰 失手의 始作이었다. 그러니 이스라엘 百姓은 두 말할 수 없는 行動이었다.
그 洗禮요한은 예수 앞에 메시야라면 全 侍從하기 위하여서 自己를 中心하고 其 外 弟子들까지도 함께 데려와서 예수의 弟子가 되어야 할 立場이었는데 그것이 果然 人間性에서 나온 破壞行動이었다. 自己 弟子들과 함께 예수 弟子가 되어 昨日의 先生의 立場을 變하여 예수 앞에 弟子 樣으로 서니 弟子였든 者들과 同級的 立場에서 其 立場이 果然 人間世界에서는 어려운 事實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觀點 等은 人間의 全部가 自己 中心하고 하날을 대하고저 하는 代身 사탄 工作이라고 보여주는 結果를 招來하여 사탄과 合하는 方向으로 나가는 셈을 알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와 같이 論하는 것은 無根據한 原理위에서 論함이 아니다. 聖經에서 洗禮요한이 一大 失手의 行動을 暴露한 句節을 찾아서 解說하여 보자. 至今까지 神學界
에는 難解 問題의 句節일 것이다. 즉 마태복음 十一章을 보면은 그 內容的 事實이 如實하게 들어나 있다. 卽 예수께서 12弟子에게 命하심을 畢하시고 거기에서 離사 敎洲하시며 領布하시라고 各城에 往시더라. 그때 왜 요한이 獄에 있어 그리스도의 行함을 聞고 그 弟子들을 遺야 예수께 亶야 曰 當身이 來실이니까. 先生任이 오닜까 我等이 他人을 待하리까 예수 對答하여 曰 爾等이 往하야 聞고 見난 것으로 요한에게 告하대 귀머거리가 드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癩者가 潔하며 눈먼자가 보며 貧者가 福音을 傳한다하라. 그런지 我로 因하여 犯罪하지 아니한 者는 福이 있도다 하시고 被等이 離메 衆애개 요한을 指하야 言하시매 爾等은 何을 視라고 野에 去더냐. 風에 動이닌 갈대냐 또 爾等이 何을 視라고 去더냐. 美服을 衣한 人이냐 美服衣한 사람을 大闕에 있나이다. 爾等이 어찌 去더냐. 先知者를 見하랴더냐. 是하다. 我가 爾等에게 말하노니 此人은 先知者보다 勝하니라. 此人을 指하야 記錄하였으며 見할지어다. 我가 我의 使者을 爾等 前에 遺하노니 被가 爾路은 爾前에 豫備하리라 하였나이다. 我가 眞實로 爾等에게 論하노니 女人이 난 사람 中에는 洗禮요한보다 雄大한 者가 起함이 無이나 然나 天國에서는 至極 小子라도 被보다 大하니라. 洗禮요한이 來할때부터 至今까지 天國은 用力함으로 得하나니 用力난 者는 奪나니라. 諸 先知者와 律法에 豫言한 것은 요한까지 至하였으니 萬一 爾等이 그것을 肯受할진대 來리라한 엘리야가 此人이니라. 耳가 有서 聽者는 聽지어다. 次世代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譬喩컨데 兒孩가 市場에 座하야 同類를 불러 曰 我等이 爾等을 向하야 나팔을 吹하여도 爾等이 舞지 않고 我等이 哀音을 하여도 爾等이 울지 않았다함과 같으니 요한이 來하야 食지도 않고 飮지도 아니하매 被等이 語하기를 邪鬼가 들렸다 하더니 人子는 來하여 食하고 飮하매 또 語하기를 食하기를 貪하고 酒을 嗜하는 人이요 稅吏와 罪人의 親舊로라하니 다만 智慧는 그 行事로 義를 顯하나니라고 以上과 같은 言을 宣言하였다. 이 內容全部는 洗禮요한 對하여 놓고 한 말이었다. 그러면 요한 弟子와서 물을때에 본대로 말하라. 내가 누구라고 말하지 않으나 너희는 스스로 自覺하여라 하면 서 여러 異蹟 奇事로써 表示하였다.
그러면 예수는 왜 이런 對答을 하였는가. 그저 묻는 그대로 對答하여 옳도다. 내가 來하고 한 者로라 하면은 그만 解決을 짓는 일인데 이와 같이 예를들어 말한바는 人間으로 하여금 깨달을수 있도록 敎示하였으니 그것 보아서 알라는 큰 意義가
있음을 알어야 한다. 그 理由는 貴하고 높은 예수를 찾으면 그야말로 그에 더 成功은 없는 것인데 누구나 全部가 가르쳐주고 全部끌어다 주면은 그 貴한 自體를 찾지 못한 者 어데 있을까 밝히 끝까지 가르쳐주지 않으면 自己들이 智慧를 通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세우여야만이 그 뜻 成事는 勿論 하날의 協助하여 주었지만 自己 努力으로 찾으여야만이 墮落하지 않고 이루었다하는 結果를 보기 爲하여 그 찾는 賞給에 對한 榮光받을 資格이 決定되는 바이므로 最終點까지는 敎示하여 주지 않는바이다. 例를 들면은 100까지를 찾아야 하는데 95가량만 알려주고 5는 알려주지 않는 것이 한 뜻의 路程의 表示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100까지 中 100까지 全部를 敎示하면은 그 賞給은 하날에 있는 聖徒들 앞에서라도 그 榮光누릴 資格完成者라 할 수 없기에 95까지만 가르쳐주고 5는 自己 智慧를 通하여 찾아 100까지를 채우시기를 바래서 敎示하는 바가 지금 役事 路程에서 많이 보여지는 事實이다. 이 5이란 그것 찾아 成事하는 그 事實은 100의 成事한 榮光을 누리고 基本權限을 決定하는 事實이니 이와같은 例로서 洗禮요한 對하여서 對答한바도 事實이다. 또 洗禮요한 한테도 하날로써도 이와 같이 敎示하였다. 智慧로 찾아서 義로 定함을 주시고저 하여서 예수는 메시야라고 確定지어 敎示치 않은 바이다. 이런 것이 至極한 하나님이 사랑 하시어 하시는 攝理인 同時에 누구에나 許諾한 예수니 智慧있는 者만이 合하여만이 원수의 智慧를 破할 수 있는 基本動力이라는 根本의 力의 터가 되기에 이와 같이 하나님은 攝理하신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特히 어떤 目的을 敎示하였다가 다시금 試驗하여 그 目的 對한 疑心을 發하게 敎示하여 주는 때도 있다. 그것은 智慧로서 그 根本을 確得할 수 있는 資格者가 되어야만이 하나님 自身이 直接干涉하지 않아도 사탄 원수 對하여 勝利할 資格者로 세우려니 이런 試驗도 있는바는 靈敎示로 받는 者들의 體驗하는 事實的 根本意義로 있음을 알어야 한다. 그것은 즉 사탄이 對하여 反對役事할 수 잇는 것이기에 또 그리하여 完成格者 되면은 全部를 하나님의 干涉을 하지 않고 自由成事를 標準하기에 이와같은 자리를 바라서 우리에게 對取하기 爲하여 攝理하심은 알어야 한다. 智慧로서 뜻 찾어 完成하는 者는 저 하날 圈에서도 말할수 없는 貴한 存在다. 누구나 부러워 하는 存在의 資格은 智慧를 찾음으로 만이 尊敬의 價値를 볼 수 있는 根本의 行動이 즉 智慧로 뜻 成事를
完成하는 態度이다. 그리고 貧者에게 福音을 傳한다 하심은 큰 意味가 있다. 즉 여기는 이스라엘 百姓 全部가 메시야를 苦待하기를 自己들이 더 좋아지기 爲하여서 苦待하였기에 至今 이와 같이 나 自身은 너희들이 바라는 目的相對로 되지 못하여 貧者와 같은 者 밖에 相對할 수 없는 貌樣에 있다함을 告하는 同時에 너희들은 마음으로 富한 것이었기에 나 對할 수 없었다는 것을 間接的으로 表示하는 말삼이었다. 이 말삼은 사탄이 主管世上에서 善은 밝혀 貧者級에 많은 것을 말하는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惡의 主管世上이니 惡者는 富하고 善者는 貧하니 이런 原理的 言詞로 되어 있는 것 알어야 한다.
그 다음 마태복음 11장 6절에는 말삼하시기를 誰던지 我를 因하여 犯罪하지 아니한 者는 福이 有하도다 하심의 句節을 보게 된다. 이 句節이야 예수님의 숨은 心情을 表示한 말삼이었다. 卽 이 말삼에는 벌써 洗禮요한은 내에게 犯罪하였다는 結論的 事實을 告白하는 것이다. 犯罪하지 않은 者는 福이 있도다 하였으니 벌써 福된 立場에서 離脫한 存在하는 것을 暗示한 바이었다. 果然 예수 앞에 洗禮요한 한 自體는 크나큰 打擊의 存在이었다. 예수의 全目的의 大部分에 一大難事를 招來케 한 큰 犯罪라는 것은 더말할 나위없는 事實이다.
그 다음은 爾等은 무엇보려 曠野에 出더냐. 그 目的이 무엇이던지 그 野에 나아감은 全目的은 예수한 自體를 보기 爲하여 行動한바가 아니냐. 또 野에서 요한 自體가 證據한바가 아니었든가. 그런데 그때 벌써 알어야 할 時期를 놓치고 至今와서 이렇게 行動하는 것을 暗示하면서 責望하는 말삼이었다. 그러나 그 證據한 洗禮요한은 果然 先知者 中에서는 第一큰 者라고 하면서 말삼하시었다.
野에서 본 洗禮요한은 果然 先知者 中에도 큰 者라고 하나 할 責任을 擔當하지 못하였다는 意味로 말삼하시는 말심아 我가 眞實로 爾等에게 論하노니 女人으로 난 사람 中에는 洗禮요한보다 雄大한 者가 起함이 無하다. 天國에서도 至極者라도 被보다 大하니라 하심에 結論的 判決을 내리웠다. 이 말삼이 지금 神學界에서 未解決點이나 그 根本意義는 예수 對한 洗禮요한의 犯罪行爲에 對한 責望의 말삼이라는 것을 밝히 이제는 알어야 한다. 卽 根本意義는 무슨 뜻인고 하니 女人으로 난 사람 中에 洗禮요한보다 雄大者가 起함이 無하다함은 이 말삼에 對한 根本意義를 알어야 한다.
昔日의 先知者도 女人을 通하여 生하고 至今 洗禮요한도 女人을 通하여 生한 者라는 것은 틀림없는 事實인데 왜 洗禮요한이 第一로 큰 存在라고 하였는가 하면은 先知者라면 하나님의 뜻을 豫言하시어서 뜻을 알려주는 代辯人임에 틀
림없다. 그런데 洗禮요한은 亦是 하나님 뜻을 알리는 代辯人이라는 것은 같은 뜻의 存在이나 그 自體들이 證據 立場을 취하여 보면은 昔日 先知者 全部는 證據하되 豫言的 證據로서 예수를 證據하였으나 洗禮요한은 證據하되 直接的으로 證據하였으니 證據的 立場을 中心하고 말할 때 洗禮요한의 以上가는 者 없음은 事實이다.
그런고로 證據的 立場을 두고 洗禮요한에 對하여 말할 때 果然洗禮요한은 女人으로난 사람中에는 第一큰 存在라는 根本意義가 確實하다는 것을 明白히 알어야 한다. 그 다음은 然나 天國에서는 至極者라도 被보다 大하니라 하심은 무슨 意義냐 하면은 根本意義가 이러하다.
天國에 간 者도 女人으로 난 者들이다. 그렇다면 女人이 난 사람 中에는 洗禮요한이 第一 大하다고 하였는데 왜 天國에서도 커야 할터인데 第一 작은 者가 洗禮요한이가 되는가 하는 것이 疑心아니될 수 없는 수수께끼의 한 關門이다. 이 根本意義도 洗禮요한의 犯罪的 行爲를 責望한 重大句節이란 그 뜻은 이러하다. 至今 洗禮요한은 예수를 메시야로 證據하여 놓고는 自己는 自己 멋대로 行하였으니 예수에 對하여서 積極 存在가 되어 行하여야 할 立場을 떠나서 行動하였으니 큰 犯罪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를 메시야로서 侍奉하여야 할 中心 存在가 侍奉하지 못하고 도리어 뜻 破하는 行動을 하였으니 그 自體에서는 果然 天微者의 行動力이 아니라 할수 없다. 洗禮요한이 積極侍奉하였으면 그는 두말할 것 없이 하날에서는 至極히 큰 存在가 될터인데 侍奉치 못하니 天에서 微者보다도 못한 存在로 되었다하는 意味였다. 卽 천에 있는 聖徒나 또 天使나 어떤 存在라도 예수 對하여서는 메시야란 根本存在라는 것을 다 알고 極心으로 侍奉하고 있는데 侍奉할 中心存在가 侍奉하지 못하니 侍奉에 있어서는 最微者가 되었다하는 意味를 알어야 한다.
이 말삼은 侍奉을 中心하고 말삼하여서 洗禮요한에게 對한 犯罪行爲를 策함이라는 重大한 根本意義를 알어야 한다. 그 다음은 洗禮요한 來할때부터 至今까지 天國은 用力함으로써 得하나니 用力하는 者는 奪하나니라 하심의 말삼도 亦是 洗禮요한 對한 犯罪之事를 指摘함의 말삼이었다.
요한 來할때부터 至今까지라는 말삼은 무슨 뜻의 말삼인가 하면은 먼츰은 洗禮요한 自體가 뜻을 받들어서 侍奉하였다면 예수님의 首弟子는 洗禮요한이 될바는 定한 하날의 目的이었는데 用力하지 못하였기에 卽 侍奉하지 못하였기에 요한부터 至今까지라는 中에 요한이 先有權利를 주었든 큰 位置를
指示한바였는데 그 位置를 지키지 못하니 그 指定되었는 位置는 用力하는 다른 弟子에게로 옮겨지었다는 것을 指摘함이었다.
그런고로 天國은 用力하는 者는 奪하니라 하심이었다. 豫知 豫定은 根本을 두고 하신 말이란 뜻이 根本이다. 그런고로 用力하는 다른 弟子들한테 그 位를 奪심이라는 根本意義를 明白하게 表示한바를 보아도 여기에 洗禮요한이 犯行한 自體이면서 예수 앞에 큰 하날적 反逆者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런 存在 對하여서 오늘날까지 尊視하였다는 過去 信仰者의 無知의 서러움을 무엇으로 防止할까. 果然 痛憤한 事實이다. 이 事實의 行動으로 因하여 예수의 十字架의 難의 始作을 再促하는 行動이라는 것을 밝히 알어야 한다.
그 다음은 洗禮요한은 엘리야라고 말하고 그는 世上이 食口 飮치 않으니 邪鬼가 들렸다하고 나도 食口飮하니 稅吏와 罪人의 親舊라하니 다만 智慧는 行事로 義를 顯하나니라 하시었는데 이 말삼 中에는 世上이 함부로 하날뜻을 不知하면서 自己 멋대로 定하여 評한다는 것을 指摘하면서 뜻을 갖고 온 者를 對하여 조금도 應하는 者 없다함을 譬喩하여 兒孩가 市場에서 座하야 同類를 吹하여 曰 我等이 爾等을 向하여 나팔을 불어도 爾等이 舞치 않고 我等이 哀音하여도 너희들이 胸을 拍지 않는다는 것으로 世上을 譬喩하여서 現在 뜻 中心한 自己의 目的要求에 조금도 應치 않음을 指摘하심이었다.
그러나 智慧로운 者만이 하나님의 뜻을 行義로 顯낸다하심의 警告를 볼 수 있다는 바를 至今 敎人들이 아는가. 이와같이 初臨예수 앞에 展開되었든 眞狀이 至今 再臨을 바라는 世界信者들과 바리새 敎人들과 比하여 볼때에 뜻에 屬한 存在가 至今 信徒 中에 몇 名이나 있겠는가! 이와같이 根本原理들은 末世가 되니 뜻 成事時期가리니 明白하게 되어야만이 再臨은 오는 바가 아니겠는가. 이 根本의 뜻 알고 侍奉者는 하날에서 第一큰 者라는 것이 끝날도 付與하는 事實이다. 이와같은 環境을 본 예수 앞에는 曠野라는 서러움의 路程을 展開시킨 根本原理이라고 위에 論한바를 理解할줄안다. 이런 根本을 밝히지 않으면 積極反對할 者들은 現敎界 信仰者들일 것이다. 그러나 뜻과 根本을 알적에 큰 두려운 問題라 아니할 수없다.
以上 論한바 根本問題는 洗禮요한 自體는 하날적으로 豫定的 存在였으나 그 使命을 侍奉 못하게 될 때에 하날은 뜻 侍奉의 價値를 알고 侍奉하는 者가 하날적 豫定的 目的을 繼承하여 完成하는 바로 하나님은 뜻의 攝理를 돌리어 役事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豫知 豫定的이라는 것은 뜻을 中心하고 말씀한바이지
뜻 對하는 사람을 對하여서 말씀한바아니다. 이것 보아도 現實 信仰界의 豫定論 等은 그 問題外 位置것으로 되어진다.
第四 節 復歸攝理 表示로 된 예수 祖上의 血統
人間은 해와의 失手와 아담의 失手는 全人類로 하여금 死亡에 指導받아 하나님과는 먼 距離에서 反對方으로 나아가는 것을 다시 찾고저 하시어서 歷史를 通한 攝理路程에 全幅的 뜻 表示로 傳하여 왔음을 以上 論한바에 依하여 잘알줄안다.
그런데 特히 예수의 直系의 血統을 가진 歷史的 祖上들의 全部를 살펴볼적에 우리가 根本原理를 아지 못할때에는 한 疑心되는 血統을 가진바를 누구나 다 切感하여왔는 事實이 되어 왔다. 예수의 祖上의 혈통은 全部를 攝理하시는 하나님 뜻을 中心하고 祖上의 하나님을 對하여 왔든 바이다. 歷代의 祖上의 全表示的 中心되는 일은 後日 예수의 歷史的 事實을 全部 完成할 수 있는 原理대로 表示하면서 예수까지 引導하여 經由하심이 었다는바를 아러야 한다. 卽 예수와서 墮落한 全人類를 根本되로 回復하여야 하는 存在가되려니 그 歷史에 對하여서 根本 하나님의 뜻에 대한 表示的 系統을 取하여 왔든 바이다.
예수 祖上에 보면은 世上 사람보기에는 不潔한 血統을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 血代는 純粹한 血系가 아니고 여러 女人들 代表的 存在들이 나타나고 있다. 卽 다마, 라합, 룻, 밧세바 等의 女性들이다. 이와같은 血系를 가진바는 本來 人生祖上 아담 해와들이 더럽힌 者의 行例로서 하나님의 直系를 떠나서 사탄과 合하여 死亡의 血系를 받은바를 다시금 復歸하여 根本에 옮겨 놓고자하니 사탄한테 빼앗긴 事實的 例와 같은 反對行動으로 하나님께 屬하게 하여서 사탄의 根本 더럽힌 原理를 찾어 세우고저 함이 重大要素이다. 그런고로 이런 더럽힌 女性들과 같은 者들이 行動의 뜻 成事할 수 있는 하나님의 根本, 順從, 侍奉, 信從할 수 있는 그때야만이 뜻 成事된다는 原理成事를 始作할 수 있는 바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런고로 예수와서 復歸하여야 할 根本뜻들을 全的으로 表示的 順, 信, 侍從의 타나나는 곳에서만이 뜻이 始作한다는 表示로서 歷史의 祖上의 行動의 成立의 表示가 合意를 보아 예수의 根本되는 祖上 資格者로서 附與하신 바이었다. 야곱은 에서를 두고 長子의 基
業을 빼앗아서 하나님의 基業을 成事할 表示的 事實의 成立을 보았으나 이제는 다음째도 선 者가 먼츰 子에로써 本 系代를 成事할 始作은 卽 유다부터였다. 유다에게 있어서는 뜻 成事的 事實의 表示와 同時에 뜻 實踐 成事出發을 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그런고로 유다 支派를 通하여 하나님의 뜻 成事할 것을 미리 말하였든 바이나 뜻 成事의 첫 繼代者로서 베레스와 세라를 보여 주심이었다. 이 유다부터 하나님은 뜻의 基本 始作을 보는 것이었기에 다마에게 한 雙胎를 주어 베레스와 세라 亦是 야곱과 같이 腹中에서 싸워서 그 뜻의 基本 確立에 한 表示를 成事함이라는 큰 意義가 있는 바이었다.
그러면 다마가 한 行動으로부터 아러보자. 다마는 本來 하나님 뜻으로 許諾한 系代를 繼承하여야할 立場이었는데 그 男便 죽고 血代를 繼代하여야 自己 存在에 대하여 많은 苦心한 存在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 할려는 血代를 繼承하기 위하여서 누구보담도 많은 苦痛과 함께 其 血代의 價値性을 안 女性이었다. 그리하여 自身 뜻을 成事하는 同時에 하나님의 뜻을 繼承하기 위하여서 부끄러움도 死亡도 第二次的 問題視하고 目的達成의 行動으로 나아간 바이었다.
그때 이런 行動이라면 容恕없는 죽음의 길이 다마앞에 始作되는 바도 알고 있지만 그런 問題를 問題視보담 此後의 問題로 하고 아무리 하여도 유대의 子孫을 通하여서 繼代를 못할 것을 아는 다마는 不得已 自己의 媤父를 通하여서 繼代를 잇지 않으면 안될바를 覺悟하고 其 路中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때 마침 媤父가 羊毛를 剪(깎으)려 딤나에 온다는 말을 듣고 寡婦의 衣服을 입고 너울을 蒙고 딤나 路側에 坐즈매 유다는 娼女로 여겨 子婦인줄 모르고 我와 相關함이 어찜이뇨하니 許하여 同寢하니라. 그리하여 孕胎된 것이 베레스와 세라였었다.
이런 非原理인 行事가 유다와 다마 사이에서 始作되었다. 卽 다마는 非原理로 繼代를 잇는 存在가 되었다. 이 다마의 行動은 卽 무엇을 表示하는 바냐 하면 해와가 사탄한테 貞操을 빼앗겨서 非原理的 繼代를 세운자가 되었으니 墮落을 始作케 하였는데 그와 反對로 다마는 뜻 成事하기 위한 하날 便쪽에서 繼代를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根本 뜻인 한 해와가 잃었든 存在로 後日에 나타나서 다마와 같이 行動하는 것과 同一한 事實이 뜻 路中에 있음을 表示함이라는 것을 아러야 한다.
그런고로 墮落된 世上에 한 女性이 하나님의 根本뜻 成事할 수 있는 한 女性이 다마와 같이 非原理的과 같은 樣으로 사탄 世上 相對를 對하지 않고 하날 相對者로 繼代하여야 한다는 한 事實의 內包되어 있는
表示的 存在 卽 다마이었다. 그런고로 다마와 같이 사탄 世上 女人이 하늘 男便 맞으어야할 根本한 해와가 나타나서 新婦端裝하여 世上 보기에 非原理樣으로 生命을 아끼지 않고 뜻 繼承을 찾어 準備하는 女性이 잇어야 할 後日의 目的이니 이 다마는 그 實體를 表徵하는 한 存在로되매 이런 다마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血統的 繼代 잇는 第一 祖上이됨이다. 예수와서 이와같은 한 해와를 찾어 하나님의 뜻을 成事할 暗示的 숨은 表示가 있음을 아러야 한다.
다마와 같이 해와는 아비지품에 들어가기 爲한 努力이 다마 貌樣으로 世上에서 하날로 옮겨지는 한 行路가 있다함도 表示함이다. 유다는 하나님의 對象的으로 表示된바고 다마는 다시 찾으여야할 한 해와를 表示함이니 그 表示가 卽 예수의 뜻 中心이니 예수의 祖上의 繼代로 原理上으로 許與되는 뜻으로 되는 바이다. 男便되어야 할 存在를 두어두고 媤父의 품으로 들러오야 하나님이 사탄한테 다시 빼앗는 樣式을 實成하여서 根本復歸를 成事할 수 있갔으니 이런 表示로 됨이 事實이다.
이 다마에게서 베레스와 세라의 雙胎는 本來 하나되어야 할 存在가 둘이 되었다는 것을 表示함이다. 사탄에게 屬한 者와 하나님께 屬한 者가 있다함의 表示이다. 墮落없엇으면은 그냥 처음난 者가 長子될터인데 서로 長子되겠다고 싸운바는 墮落의 血을 받은 者가 되었기에 서로 뜻 繼承받은 者되기 爲하여서 싸우심을 아러야 한다.
야곱 時에는 나온 동생으로부터 빼앗을 것을 表徵하여 그 基業을 빼앗고는 基業成事者 베레스와 세라는 하나님의 基業繼代에 드러와섰으니 먼츰난 者가 뜻 繼承者가 되는 바는 事實이니 베레스와 세라는 싸와서 먼츰 나오려는 세라를 물리치고 베레스가 난 것을 보게 되었다.
이것은 예수와서 원수의 世上에서 원수 물리치고 長子의 基業成事 할 것을 表示함이었다. 卽 같은 世上에서 長子되려고 하는 者를 물리치고 根本자리에서부터 長子를 成立시켜 基業成事할바를 아러야 한다. 이와같은 原因으로 因하여 다마는 하나님의 뜻에 成事者의 母가 되었음이다. 그 아들 베레스가 長子됨이었다.
이 全部는 예수와서 直接 싸와서 勝利하여 基業成事함을 歷史的 距離를 두고 表示한바이다. 라합 亦是 그러하고 룻 亦是 그러하다. 이 女性들은 하나님의 뜻을 爲하여서 至今 現實의 立場을 떠나는 存在들로서 되었기에 그런 非原理行例樣과 같은 許諾으로 뜻의 成事를 繼承한다는 하나님의 根
本뜻을 暗示하는 表示的 存在들이었다.
밧세바를 살펴보자. 人間世上에는 容納할 수 없는 非行에서 生起인 한 存在가 卽 밧세바의 表示的 恩赦를 받는 理由는 여기에 있다. 사탄이 해와를 빼앗을 때에 男便되는 하나님을 두고 빼앗은 것이었다. 이런 것을 다시금 빼앗아서 찾으여야할 原理로서 한 男便있는 女性이 밧세바이었다. 卽 다윗 王께 있어서는 한 忠臣인 우리야를 다윗王은 戰場 第一線에 보내어 죽이게 하여서 그의 婦人을 빼앗은 存在 卽 다윗王에게 同寢한 솔로몬의 母親이 밧세바이었다. 이런 밧세바가 어찌 예수의 祖上되었는가. 또 至極한 榮光의 王 솔로몬의 母親이 되었는가 하는 것의 根本意義는 다윗王은 하나님을 表示함이고 우리야는 天使長 누시엘을 表示함이고 솔로몬은 親히 찾고저 하는 榮光主 예수의 中心을 表示한바이었다. 예수와서 하나님과 함께 하여야할 使命은 사탄의 妻와 같은 해와를 우리야의 妻 밧세바를 다윗王이 取한바와같이 世上에서 成事하여야 할 使命있다는 根本 뜻 中心하였기에 이와같은 예수의 한 뜻 成事의 表示이었다. 우리야를 죽인것과 같이 사탄이 이런 立場에 處케하기 爲한 뜻을 表示한 存在였기에 하나님은 사랑하여서 그 子를 榮光의 王 솔로몬으로 삼은것과 같이 이와같이 찾는 理由로 뜻 成事하여 예수가 榮光 누리게 하고자 함의 根本意義를 둔 뜻이 있기에 이와 같은 非公式的 存在들이 예수의 祖上들의 母들로 서게 된 바를 表徵시키는 하나님의 中心意義였다. 이와같이하여 예수와서 하여야할 使命的 內容을 表示하게하는 歷史的 祖上였음을 알적에 果然 이 根本問題가 全部 解決의 中心의 始作이니 이런 表示로서 攝理하시었다. 예수는 世上에 誕生할때에 하나님으로부너 童貞女마리아로부터 誕生케하심이었다. 이도 亦是 하나님이 사탄한테 童貞女 해와를 빼앗겨서 墮落시켰으니 하나님도 定婚한 요셉을 한 相對롣고 빼앗아서 第二次 아담 예수로 誕生케 하심이었다. 이때 對象的으로는 요셉과 마리아는 根本 아담 해와가 墮落때에 未成婚의 한 事實的 立場에서 사탄한테 빼앗겼으니 그와같은 原理로서 빼앗는 樣으로 하나님의 童貞女한테 受胎케함의 根本意義를 아러야 한다.
하나님 親히 靈으로 빼앗았으니 예순는 肉으로 또 그 根本意義를 復歸하여야 할 意義를 갖고 있음인데 마리야 不順應 함으로 뜻 未成事로서 예수 앞에 難點의 始作을 보게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肉身으로 해와 한 自體를 찾으려고 하니 새 路程을 取치 않을 수 없는 立場의 路程이 三年 共生涯의 路程이었다. 그런고로 예수 앞에 보여지는 마리아
는 重大한 하나님의 뜻 中心하고는 원수적 存在로 되었다. 그런고로 예수 母親보고 女人이여 너와 나와 무슨 相關이 있뇨 한 것은 하나님 뜻 成事케 못한 存在니 이런 言의 한 相對의 存在이었다. 人間的으로 아지 못하는 이와같은 根本原理를 세우려는 예수앞과 하나님 앞에서는 사탄이 第一 무서워하는 根本歷史인 이터가 破壞하는 일이니 사탄은 예수 앞에 언제나 對立하여 나아감을 다시금 認識치 않으면 안될 事實이다. 이와같은 世上없는 한 路程의 始作이 있다함을 完成하여야할 그때(하나님)의 心情에는 말할수 없는 큰 生命代身하여서라도 成事치 않으면 아니될 課業이 남어지게 되었다. 人間的으로 生覺하여 하날 뜻 成事못하는 그 立場인 요셉의 家庭과 마리아와 예수와는 相關없는 生活의 始作으로 나서게 되는 첫 始作이 曠野生活이다. 이때 弟子들로 完成하여야할 洗禮요한 一派 等도 예수 앞에는 何等도움 못되는 存在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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